*** 무량수전 가는 길 ***
2006년 12월 11일,
지난주 부석사를 찾았다가 날씨가 너무 추워서 중간에 되돌아간 마음이 아파 다시 찾았다.
일주문을 지나면 가득하게 피었다가 떨어진 노란 은행잎은 겨울바람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차가운 겨울바람만이 옷속을 파고 들었지만 수술을 이틀 앞두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하여
극락을 향하는 마음으로 108개의 돌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부석사가 위치한 곳은 봉황산 중턱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태백산에서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달려
이룬 것이 소백산맥이다. 태백산에서 뻗은 줄기가 구룡산, 옥석산, 선달산으로 솟구치다가
소백산으로 이어져 형제봉,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을 이루었다. 부석사가 위치한 봉황산
은 선달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뻗은 줄기에 위치한다.
우리나라 불교 화엄종을 처음으로 도입한 신라고승 의상대사(625-702)는 신라왕족의 신분으
로 경주 황복사에 출가하여 20세에 불문에 귀의하였다. 그가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
유학길에 나선 시기는 진덕여왕 4년(650년)의 일로써 그의 나이 26세였다.
처음 당나라로 떠난 길은 고구려 땅인 요동반도를 거쳐 들어가는 루트였으나 국경에서
고구려군의 검문을 받아 첩자혐의로 체포되어 고생하다가 귀국하였다. 이들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시도하였는데 의상이 36세 되던 해에 원효와 함께 서해안
당항성(남양, 오늘날 경기도 화성군 해안 추정)에 다다라 당나라로 떠나는 무역선을 기다렸다.
당나라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시기는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이고 처음으로
세운 사찰이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경북 영주 부석사이다. 의상이 당나라로 떠난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하던 시기였고, 백제가 멸망하면서 서해 바닷길이 열렸으나 아직
고구려는 건재하였던 때였으므로 이 위험한 고구려 내륙 루트를 이용하지 않고 뱃길을
택하여 중국 산동반도 등주로 떠났다. 그 당시 산동반도를 비롯한 황해 연안은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신라방(신라주민 집단 거주지)이 있었고 여기에는 신라인들이 출입하는
사찰도 있었는데 의상이 잠시 머문 곳이 적산 법화원이다.
의상대사에 관련한 중국내 기록은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에 살면서 승려가 된 북송의
찬영이 저술한 송고승전에 전해오고 있으나 우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구체적 기록이 전해오지 않는다.
*** 석 등 ***
*** 무 량 수 전 ***
의상이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도착한 곳은 서해안 당주계(신라시대 지명에는
당성, 당항성)이며 그들은 배를 기다리다가 산중에서 노숙하면서 밤중에 비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 민가를 찾아 해맸으나 찾지 못하고 움집을 발견하여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의상과 원효는 밤중에 갈증을 느껴 가까이 고인 물을 달게 마셨다.
먼 여행길에 지치고 피로하여 불편을 잊고 단잠을 잔 뒤 이튿날 날이 새면서 주위를 살펴보
니 자신들이 잠을 잤던 그 자리에 해골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하룻밤을 보낸 곳은 움집이 아니라 피폐해진 무덤속이었다. 의상은 해골에 고인 물
을 자신이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 구토하고 더러움을 느꼈으나 원효는 태연작약한 자세로 오
히려 환희에 젖어 있었다.
이튿날도 비가 멎지 않자 또 다시 무덤속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밤중에 귀신이 나타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원효는 이틀동안 무덤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고 갈파하였다. 즉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 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원효는 "어젯밤 무덤을 무덤이라고 보지 않고 토굴이라고 생각하여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고, 자리를 옮겨 잠을 자면서 귀신을 만났지만 마음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
누구나 생각하기에따라서 모든 사물의 형상이 다르게 보고 느끼게 되고 또 생각을 멀리하게
되면 무덤이나 토굴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가짐
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오직 내 마음 이외 무슨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깨달았으니 당나라에 가지 않고 경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의상은 더 배우
기 위해서 홀로 외롭고 험한 길을 택하여 뱃길로 중국을 향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운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
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으로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
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
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무량수전에 모신 불상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높이가 2.78m로 거대한 불상이다.
그런데 부처가 가운데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바라 보고 있어
여러 상상력을 자극한다. 아미타물은 서방정토, 사후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부처인데
동쪽을 보고 앉아 있는 것은 서라벌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영주 부석사의 아미타불과 대구 팔공산의 갓바위 부처, 경주 토함산의 부처가 바라보는 것은
동해바다의 문무왕릉이라고 한다. 나라의 지키려는 호국불이라 할 수 있으니, 통일을 이룬
신라가 당과 왜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켜려는 열망이 종교로 까지 승화시켰던 것일까?
*** 부 석(浮石) ***
서기 699년에 의상이 중국 땅을 밟은 곳은 산동반도 북쪽 등주였는데 그는 독실한 불교신도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 집에는 아름다운 처녀 선묘가 살고 있어 훗날 신라승려 의상과
인연을 맺게 되지만 의상이 여자를 멀리하므로 두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의상이 적산에 있는 법화원으로 옮겨 머무는 동안 아침저녁으로 탁발을 나설때는 선묘가
멀리서 의상을 바라보면서 흠모했다고 한다. 선묘가 절 밖에서 의상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마음을 전하려 했으나 의상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의상은 이곳에서 서쪽 멀리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떠났으며 근처 종남산에서 화엄경을 설법하는 지엄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10년간 삼장(불교의 기본이 되는 경·율·논)을 배웠다.
지엄은 의상에게 귀국하면 널리 화엄종을 보급할 것을 당부하였고 의상은 유학을 마치고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등주 항구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선묘는 자기가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고자 바닷가로 갔으나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의상에게 법복이 무사히
전달되도록 마음속으로 빌면서 배를 향하여 던지니 법복은 무사히 의상 품안으로 떨어졌다.
선묘는 평소 독실한 신도로써 의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의상이 불법을 공부하여 득도하고
무사히 귀국하도록 부처님에게 빌었다. 의상이 떠나자 함께 따라 갈 수 없게 되어 선묘는
자신이 용이 되어 달라고 하늘에 빌면서 황해바다에 몸을 던졌다. 하늘이 이에 감읍하여
선묘는 용이 될 수 있었고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면서 신라까지 무사히
보살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신라에 돌아온 의상은 뜻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은 이상히 여겼지만 나중에서야 용이 된 선묘의 보살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선묘
의상이 귀국 후 처음 세운 절은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이고 그 다음이 태백산 근처 봉황산
아래 지은 부석사이다. 문무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에 내려가 명산대천에 사찰을 지으라는
분부를 받고 절터를 정한 곳이 곧 부석사이다. 그는 문무왕 10년(676년)에 이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미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사는 5백여명의 다른 종파의 불승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의상은 마음속으로 부처님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자 갑자기 하늘에서 바위로
변한 선묘의 용이 나타나 3일 동안 공중에 머물면서 반대하는 불승들을 향하여 내리칠 듯
위협하니 그들은 두려워서 달아나고 종국에는 굴복하여 새 절을 짓는데 협조하게 되었다.
어리고 착한 선묘의 넋이 용이 되어 의상을 보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용이 된 것이다.
선묘가 바위가 되어 땅에 내려앉은 바위를 부석이라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지어진 이절의
이름을 부석사라고 지었다. 현재 부석사에 선묘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곳은 부석,
선묘각(선묘상을 모신 사당), 선묘정, 석룡이다. 절 동쪽에는 선묘정이 있고 서쪽에는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던 식사용정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래 묻혀 있는 석룡은 절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데 아미타불 불상아래에 용머리가 묻혀있고 절 마당 석등
아래에 꼬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근세 이 절을 보수할 때 비늘이 새겨져 있는 석룡이
묻혀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그 당시 무량수전 앞뜰에서 절단된 용의 허리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원정군으로 참전한 이여송이 우리나라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인재가 태어날
곳에는 지맥을 많이 끊었다고 하며 그 무렵 이 절의 석룡의 허리가 짤렸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라시대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야기처럼 의상과 선묘낭자의 사랑은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
*** 전 경 ***
부석사 무량수전앞에 있는 안양루에 올라 황혼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낙조
경치를 볼 수 있다. 멀리 아득하게 발아래 펼쳐진 산들은 학가산, 가야산, 그 너머에는
지리산이 있다고 한다. 그 수많은 산들이 모두가 무량수전을 향해 엎드려 절을 하는 것 같고,
그 산위에 붉게 물든 저녁해가 넘어갈 때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는 학가산의 맥이 휘어들고 서쪽으로 소백산맥이 휘어돌아
거대한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여 뭇 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읍하고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상으로도 뛰어난 길지에 속한다. 부석사가 들어선
터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다. 그나마도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어 경사가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석사에 들어서면 국이 협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솔길을 따라 절에 들어서면 높직한 석축단에 의하여 구분된 터에 드문드문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뒤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내려가는 길에는 건물 지붕 위로 보이는
전면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석양이 뉘엿거릴 무렵 안양루 쪽에서 멀리
도솔봉 쪽을 바라보면 펼쳐 있는 산맥의 연봉들이 장관을 이룬다. 초점이 되는 도솔봉
오른쪽으로는 아스라이 죽령이 보인다. 가히 대단한 경승지라 할 수 있다.
조사당
삼층석탑을 돌아 산길을 따라 오르면 조사당(국보 19호)에 이르게 된다. 그 절의 조사스님
을 기리는 전각이다. 물론 창건주인 의상을 모신 곳이다. 내부에는 의상대사를 모신 조각물
이 있으며 한편엔 선묘낭자가 애타게 의상대사를 바라보고 있다.
맞배지붕의 주심포건물이다. 작은 집이지만 단정하고 조용한 느낌을 갖는다. 우리나라에
고려시대 건물이 6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부석사에만 2개나 간직하고 있으니 이 곳에 절을
세운 의상대사에게 그저 감사함을 느낀다.
한 옆엔 낚시 그물처럼 잘게 엮어진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다.
그 안엔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다름 아닌 선비화(仙扉花)다.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
놓았는데 나무로 자란 것이다. 저 잎을 따다 다려먹으면 아들 낳는다는 낭설 때문에
이렇게 교도소 면회소 같은 곳에서 보관되어 있다. 21세기 무지와 욕심 때문에 이런
씁쓸한 모습을 봐야 한다.
얼마전 어느 재벌이 돈은 원하는데로 줄테니 조사당 터를 팔아라고 했단다.
그 터가 천하의 명당이라 자신의 무덤을 쓰고 싶어 했다는데,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보니 씁쓸한 입맛이 든다.
조사당 벽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浮石面) 북지리(北枝里) 부석사에 있는 고려 말기의 벽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6폭이며, 각각의 크기는 가로 75cm, 세로 205cm이다. 원래 부석사의 창건 당시
조사당 벽면에 그려져 있던 벽화인데, 현재는 이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내어
안전장치를 한 후에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안에 보관하고 있다.
조사당 벽면에 있던 원래의 위치 순서대로 열거하면 ① 보살상(菩薩像),
② 다문천왕상(多聞天王像) ③ 광목천왕상(廣目天王像), ④ 증장천왕상(增長天王像),
⑤ 지국천왕상(持國天王像), ⑥ 보살상(菩薩像)으로 되어 있다.
이들 벽화는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 금색, 녹색, 백색 등으로 짙게
채색하였다. 양 보살상은 풍만하면서도 우아한 귀부인상으로 정적이고도 유려한 선(線)을
잘 구사하여 그렸다. 또한 가운데의 사천왕상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모습으로, 힘차고 동적인 먹선으로 윤곽을 그렸고 그 안에 채색을 하였다.
1916년의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으로 미루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이 밝혀졌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벽화는 이 조사당벽화를 비롯해서 개성 수락암동(水落巖洞)
고분벽화, 개풍군 공민왕릉(恭愍王陵) 벽화 등이 있으나 예술적 가치나 보존 상태로 보아
이 벽화가 가장 뛰어나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남아 있는 벽화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그 의의가 크다.
*** 극락을 뒤에 두고 ***
대개 가람은 깊은 산속에 지었다.
성불(成佛)을 위해서는 고해(苦海)의 바다인 인간세계와 떨어져 수도에 전념하고자 위함일 것이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완전한 인간을 만들기 위한 소승불교가 깊은 산속으로 들아가는 반면,
모든 사람을 조금씩이나마 순화하자는 원효의 대승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 들기 위해서
도시 주변에 절을 지었다.
모든 가람이 명산에 많이 있다.
명산에 명당이 있고 그 명당에 터를 잡았으니 언제 보아도 아늑하고 가슴이 탁 트이는 곳들이다.
어머니 품속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생각이 드는 곳이 청도 운문사와 밀양 표충사라면,
가슴이 탁 트이고 남성다운 기상을 느끼게 하는 곳이 부석사 전경이다.
언제나 마음이 울적할 때는 부석사 안양루 앞에서 멀리 떨어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인간사 모든 희노애락을 잊고 싶다.
부석사엔 남다른 정이 가는 곳입니다.
일주문 앞,뒤에 걸린 현판이 저의 선친이 쓰신글씨라서요.
덕분에 여기서 아버님의 숨결을 느껴 봅니다. --- 뿌구리(06.12.15 06:17)
석등에 그려진 공양보살상, 공민왕이 썼다는 현판 .
무량수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 때 쓴 글씨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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