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文이란 무엇인가?
출처 : 충청남도중등한문교과교육연구회(한문교육총론)
漢字로 이루어진 文語體의 문장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 보통, 중국에서 漢文이라 함은 唐詩나 宋詞 혹은 元曲, 明淸小說 등과 대비되어, 漢나라의 文이라는 뜻으로 쓰여왔다. 그러나 주변국들, 특히 우리 나라나 일본은 이러한 구별을 하지 않고 漢字語로 된 문장을 모두 漢文이라 써왔던 것이다. 한편, 보다 범위를 국한시켜 漢詩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한문이 쓰이기도 한다. 이때는 散文으로서 韻文과 상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1. 漢文의 갈래
漢文의 갈래는 魏나라 文帝인 曹丕의 저서 『典論』의 論文篇과 陸機의 「文賦」에서 비롯되었다.
① 論辨類 : 議論文의 형식이다.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사상을 분석하여 시비를 따지고 도리를 가리는 글 이다. 본래 論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론문과는 약간 성질을 달리하였다. 성인의 가르침을 經이라 하고, 경의 원리를 祖述한 것을 論이라 한 것이다.
② 奏疏類 : 신하가 왕에게 올린 글. 형식은 의론문이며, 六朝시대 이후에는 騈文으로 썼다.
③ 詔令類 : 군주가 신하나 백성에게 내려주는 글. 처음에는 命이라 하였다가 夏 殷 周 삼대에서는 誥와 誓를 더 첨가하였다. 命은 官位의 수여나 제후의 임명 등에 사용하였고, 誓는 정치에 대한 진술에 각각 사용하였다.
④ 私牘類 : 사적인 문서로 의례적인 문구를 넣어 정중하게 뜻을 전달하는 문장.
⑤ 序跋類 : 자신의 저술 또는 타인의 저술에 대한 經緯 解釋 評 性格 등을 서술하여 책의 앞 또는 뒤에 붙이는 글. 의론문으로 보아도 좋으나 記述을 겸한 문장으로 敍라고도 한다.
⑥ 贈序類 : 贈序라 이름 붙여진 것은 당나라 때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餞別 석상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시를 지어 석별의정을 나누었던 것인데. 그 시를 책으로 꾸며서 서문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序跋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나, 뒤에는 서문만을 지어서 보내던 습관이 생기자 贈序類는 하나의 독립된 갈래를 이루게 되었다.
⑦ 傳狀類 : 某某傳 某某行狀의 형식이다. 사마천이『史記』를 저술할 때 列傳을 삽입함으로써, 열전을 正史의 일부로 파악하게 되었다. 열전은 한 왕조를 통해서 역사상 특이한 인물로 역사기술상 관련이 있다고 인정되는 인물들의 전기를 기술한 것이다
⑧ 雜記類 : 記는 기사문이다. 어떤 사건의 시말을 기록한 것으로 碑誌類와 닮은 점이 있다. 雜誌 또는 雜識라고도 하며, 비교적 형식이 자유스럽고 제재도 넓은 범위에 걸쳐있다. 이른바 현대개념의 수필이나 기행문과도 비견될 수 있는 것으로 문학적 향기가 짙게 깔려 있는 글이다.
⑨ 頌贊類 : 頌은 공적을 기리는 것이다. 贊은 讚과 같이 기리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⑩ 哀祭類 : 『周書』諡法에는 젊은 사람이 죽은 것을 哀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哀辭, 追 悼 文 이 나타나거니와 이 경우도 처음에는 젊은 사람이 죽었을 때만 쓰였던 것이다. 애사 외에 弔 文 이라는것이 있다. 이것은 대개 높은 지위에 있다가 불운하게 죽은 사람, 높은 지조를 지키다가 죽은 사람, 재능은 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죽은자 등을 追想하여 영령을 위로하는 글이다.
⑪ 碑誌類 : 옛날 제왕들은 그들 나름대로 말을 기록하여 천지에 제를 올리고 그 곳에 암석으로 성가퀴를 만들어 碑라 하였다. 또, 죽은 사람의 영을 모신 영실에는 동서 기둥 옆에 비를 세웠다 하는데, 여기에는 산 동물을 묶어 놓았을 뿐 개인의 사적을 적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차츰 功業을 기물에 새기는 습관이 발달하자 후대에는 기물 대신에 碑가 생기게 된 것이다. 碑誌가 성황을 이룬 것은 후한시대이다. 그러나 묘지에 修辭가 동원되어 문학성을 띠게 되는 것은 남북조시대이다.
⑫ 箴銘類 : 箴이라는 글자는 鍼 針이라 하는 글자와 같은 것으로 병을 다스릴 때 쓰는 침이나, 바느질할 때 쓰는 바늘과 같은 것이다. 즉, 자극을 주어서 마음이나 행동의 戒로 삼도록 쓰여진 글이다.
그 밖에 ⑬ 詩賦類와 ⑭ 小說類는 현대의 개념과 비슷하다.
2. 우리 나라 漢文의 갈래
우리 나라 한문의 갈래가 어떠한 경로로 성립되었는지를 정확히 추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한문의 발상지인 중국으로부터 한문관계 서적이 언제부터 우리 나라 독서층에 알려지게 되었는가이다.『三國史記』에 기재된 강수에 관한 기록 중에 그가 『文選』을 배웠다는 언급이 보인다. 이로써 강수 이전에 벌써 문선이 이 땅에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문자행위는 문예의식적 차원보다는 실용을 위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실용문의 발달은 왕권확립을 지향하던 삼국시대의 정치적 필요성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에 오게되면 한문의 갈래가 하나의 틀을 형성하게 된다. 그는 직접 중국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던 관계로 그곳의 문학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문집 속에는 17종의 한문의 갈래가 정돈되어 나타나는데, 表 狀 別誌 擊 書 牒詞 齋詞 祭文 記 疏 啓 碑文 讚 願文 傳 등이다. 여기에 나타난 것이 그의 작품의 전부라 할 수는 없지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갈래가 체계적으로 나타나고 있기에 우리 나라 한문의 기틀을 마련해준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산문체의 변화양상을 살펴볼 때 우리 나라의 경우 고문이나 변문이 모두 중국의 영향하에서 창작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로 중국의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의 생활과 정서가 배어 있는 것이기에 독자적인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일찍이 金澤榮은 『麗韓九家文』이라는 고문가들의 작품을 편집한 바 있으니, 이에 속한 문장가들의 작품은 중국의 것을 모방하기는 하였으나 독창적인 세계를 보여준 산문문학의 精華라 할 수 있다.
3. 漢 字
漢字는 漢族이 그들의 말인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글자로서 표의문자의 하나로 대표적이라 할만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表語文字라고 불리기도 한다. 표어문자라는 말은 그 글자대로 뜻을 풀이하면 '단어를 표기하는 문자'라는 뜻이다. 중국어의 모든 단어가 한 음절로만 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의 단어가 한 음절로 되어 있으니 이른바 單音節語라는 것이다.
이들 단어의 하나 하나를 한 글자로 표기한 것이 漢字이니, 한자를 표어문자라고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자는 한 글자가 곧 한 음절이요 또한 단어인 것이다.
4. 漢字語
하나 또는 둘 이상의 한자의 결합으로 되어 한국어로서 사용되는 한국식 발음의 단어. 이에는 다음과 같은 구분이 있다. ① 중국어에서 쓰이는 것이 그대로 쓰이되 발음이 한국식인 것 : 君子 匹夫 聖人. ② 한국어에서 만들어져 쓰이고 중국어에서는 쓰이지 않는 것 : 田畓 汽車. ③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 : 入口 取扱 相談 등이다.
(1) 漢字語의 생성
서기전 2세기경에 한자·한문이 유입되었다고 하거니와 3세기 후반에는 이미 학문을 일본에 수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6세기에는 이미 한자·한문이 토착화되었다고 간주된다. 뿐만 아니라 한자어의 생성이 표면에 드러난 것이 이때이다. 실제로 한자어의 생성은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나 공식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지증왕 때의 일이다. 지증왕 4년(503)에 국호를 '新羅'로 정하고, 처음으로 '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지증왕 5년에는 중국식 喪服法을 제정하고, 지증왕 6년에는 州·郡·縣의 이름을 정하였다. 법흥왕 1년(514)에 지증의 시호를 贈하였다. 법흥왕 7년에는 율령이 반포되고, 법흥왕 14년에 異次頓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가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또, 법흥왕 23년에는 '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기타 국가의 제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한자의 사용범위는 더욱 확대되었다. 결국 漢字·漢文이 정착, 보급되어 실생활에 활용되면서 한자어라는 특수한 語詞를 낳게 되었다. 한자는 중국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었다. 한자어는 知的인 개념어로서 적절하였다. 그래서 권위의식과 필요 충족의 동기가 함께 작용하여 한자어는 계속 증가되어 오늘날 한자어 투성이의 한국어를 낳았다.
(2) 漢字語의 발달
지증왕·법흥왕 때에 國號와 王號가 한자어로 개정되고 年號와 諡號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공식적으로 한자어 생성의 시초로 간주되거니와, 본격적으로 한자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이후라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의 정치·제도·학술·예술 등의 융성과 불교의 성행은 한자어의 수를 증가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문화를 담당하여온 것은 유학과 불교였으며 통일신라의 뒤를 이어서 고려시대는 한자어가 대폭으로 증가하는 시기였다. 문화적 개념어가 모두 한자어로 新造되어 고유어를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고유어는 한자어에 밀려서 그 일부가 한자어로 대체되는 현상이 이미 이 시기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건국 이후 유교는 시종여일하게 치국과 교육의 大本이 되어왔으나 一浮一沈의 운명을 면하지 못하였다. 초기에는 漢唐類의 학풍을 지녔고, 명종·선조 때에는 理氣·心性의 宋學이 일어났다. 李滉·李珥와 같은 동방 성리학을 대표하는 巨儒가 나와 조선유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관리의 등용은 과거에 의존하였고 유교중심의 교육이 행하여졌다. 특히, 文科에서는 유학과 한문을 중심으로 과거를 치렀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에도 한문 숭배 사상은 높아지기만 하였고, 이러한 사상과 사회환경 속에서 한자어는 크게 증가하였다. 그 뒤 서양으로부터 학문과 기술 등 많은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말도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용어들이 번역될 때는 한자어로 충당되었다. 또, 중국이나 일본에서 새로 만든 한자어나 번역 한자어가 유입되어서 한자어 증가를 촉진하였다.
5. 漢文學
(1) 由來와 定義
중국의 문자, 즉 漢字로 기록된 문학을 우리는 漢文·漢文學·漢學이라 하여, 아무런 저항감 없이 그 용어를 써왔다. 그러나 중국인의 처지에서 보면 이러한 용어사용은 어색한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漢文唐詩라 하여, 漢文은 '漢代의 文章'이라는 뜻으로 썼고, 漢學은 宋學에 대한 대칭으로 '漢代의 儒學을 배경으로 한 제반 學問'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중국문자로 기술된 것을 漢學 또는 漢文學이라는 명칭으로 불러왔던 것은 이 땅에 漢文 내지는 漢文化가 옮겨지고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 漢代였고, 또 漢나라의 세력은 중국을 대표할 만한 상징적 위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에 '漢文學'이라는 용어가 유래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漢文學을 일반적으로 정의하자면 漢字文化圈―중국을 비롯한 한국·일본·베트남 등의 나라에서 漢字를 공용하여 형성된 文化領域―에서 생성된 일체의 文語體의 詩文章을 漢文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시야를 국한시켜 우리 나라의 한문학을 정의하자면, 중국의 문자와 문학형식을 빌려 우리 민족의 정서와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문학을 지칭할 수 있으니, 한자문화권에 속한 다른 나라의 한문학에 비하여 개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2) 국문학과의 관계
韓國漢文學은 중국 사람들의 안목에서 보면 그들의 주변문학처럼 인식되기 쉽고, 한글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어딘지 걸맞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우리 國字로 창작된 문학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정은 서구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르네상스시대에 접어들면서 自國語를 표방하고 나서기 이전에는 그들 역시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문학을 창작해왔던 것이다. 또한,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일본·베트남 등도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자를 문학행위의 도구로 사용해 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역사 경험은 우리 민족의 의지의 결과라기보다 오히려 지정학적인 조건, 상층문화의 유입 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 선인들이 중국에서 한자와 문학형식을 차용하여 문학활동을 하였지만, 그 속에 담긴 사상·감정이나 풍토·지리·풍속 및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우리의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우리 문학은 이중구조 속에서 발달해왔다. 즉, 선비층은 한문을 구사했고 서민층은 한글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민족문학이라 한다면 양자를 다 지칭해야 하고, 연구자들도 양자를 균형 있게 살펴야 함은 물론이다. 만일 한문학 유산을 우리 문자로 기술되지 않았으니 우리 문학이 아니라는 형식논리에 집착하여 특수한 역사상황을 무시한 채 국문학의 영역에서 배제하려 한다면, 결과적으로 국문학의 기형화를 초래하여 우리 문학은 그 양과 질에서 빈약함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곧, 여기에서 말하는 '기형화'란 한문학과 한글문학은 너무도 밀착되어 있기에 한쪽을 베어 버리면 다른 한쪽은 불구가 되는 운명을 맞게 됨을 의미한다. 예컨대, 설화나 소설은 한문으로 기록된 것이 많은 분량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웅혼한 서사성이 그 속에 응집되어 있다. 그러므로 국문소설만을 가지고서는 우리의 서사적 맥락을 제대로 찾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서정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高麗俗謠를 비롯하여 얼마간의 시가라는 것이 있지만, 이것들은 양적으로 지극히 미미할 뿐만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감정의 드러냄에 그친 것이어서 先文學的인 위치를 차지할 뿐이고, '시조'라는 것도 역시 유가 선비들의 餘技的 소산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에 비해서 한시의 세계는 양적으로도 천문학적인 숫자에 이를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지극히 우수한 것이 많아서 명실공히 한국 서정문학의 주된 흐름을 담당하게 된다. 그밖에 비평문학이나 문학사상, 그리고 민속분야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자료가 漢籍속에 실려 있는 실정이어서, 한문학을 뺀 민족문학은 생각조차 하기가 어렵다. 현재 우리의 한문학유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정확히 조사된 바가 없으나, 대략적으로 도서목록에 수록된 양으로 보면 典籍의 종류는 1만 8000, 그리고 책의 수는 7만 7000에 이른다. 이 속에 실려 있는 각종의 작품은 엄청난 숫자에 이르지만, 모두가 우리의 고전으로 향유할 만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우선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추려내고 정리하여 사적으로 체계가 완성될 때만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국문학의 영역과 광장이 넓어지고 나아가 우리 문화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하는 바도 크게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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