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날, 가까운 데서 송수권 시인이 특강을 한다고 하여 퇴근길에 들렀다. 학생들을 위한 강연이었다. 나는 아직 그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미술학원 가는 둘째를 이웃에게 부탁했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와서 계획대로 100여 분을 강연했다. 원고는 “나의 詩와 고향 또는 불교적 상상력 - 삶과 죽음은 하나”였다. 원고 안에 <山門에 기대어, 연비, 인연, 여승, 꿈꾸는 섬, 시골길 또는 술통, 종소리, 퉁> 등의 작품을 스크랩하듯 실었다.
강연의 절반은 시에 접근하는, 시를 바라보는 이야기였다. 그 나머지는 시를 읽기도 하고, 남의 시를 말하기도 하면서 요즘 시를 쓰는 일이 고달프다는 이야기에 관한 것이었다. 강연 내내 잡고 놓지 않은 것은 시인과 “상상력”과 시의 “서정성”이었다.
그는 아이들과 눈빛을 맞추고, 시인이 멍청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자신은 시골에서 논을 매다 온 사람 정도로 불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요즘의 시인들은 주머니에 유전자 지도를 넣고 다닌다는 말을 던졌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면서 전통적인 상상의 방식이 구닥다리가 되었는데 아직 서정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를 반문하였다. 벤야민이 “서정시는 죽었다.”고 한 것을 인용하였다. 도시서정이니, 테크노에 눈뜬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주류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다소 힘을 주어서 말하였는데, 문학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문제, 인간성의 회복, 인간성의 옹호”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인은 예언자적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새벽닭이 되어서 세상의 빛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여전히 시의 본령은 노래이며 서정이고 인문학이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깥이 아니라 내면의 풍경을 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문학이 언어의 표현미를 다룬다고 하지만, 문학은 정신의 미를 확장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이 시대에 어떻게 이것이 유용할 지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있는 공간과 시간’은 과거의 것이라고 하였다. ‘없는 것, 없는 공간’을 드러내는 것이 시인의 상상력이라고 하였다. 서정주의 <동천>이나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말 하였다. 그것은 양념 정도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의 충격을 이야기하였었다. 머리로 충격을 주는 시, 가슴으로 충격을 주는 시가 있다고 하였다. 감정 없는 것을 지향하는 최근 시의 경향을 우려하였다. 시인들의 시 쓰는 전략은 대략 30개 정도 되는데 그 코드들이 이미 낡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진부한 것에 기대지 마라, 공부를 해라, 책을 읽어라, 단계를 넘어라 그런 이야기를 하였다. 시에, 한때 “준엄한 정신”을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으나 농경사회에서 최첨단의 정보화시대로 넘어가는 이 시대에 그것은 쉽지 않다고 하였다.
시인은 인습, 그 인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 시대에 시인은 만여 명 쯤 되는데, 부단히 노력하면서 새로운 정신을 깨어나가는 시인은 백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언어를 비비고 정신을 주입하는 시인은 드물다고 하였다. 인문학 코드의 실종이라고 하였다. 등단을 꿈꾸면서 이름을 그 어느 말석에 올리고, 즐기는 시를 창작해 보겠다는 소위 “아줌마부대들”을 경계하였다. 슈거코팅 시, 대중문화코팅 시, 언어가 공허한 시, 알맹이가 없는 시, 창작정신이 없는 시를 경계하였다. 참담한 시대여서,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거짓이 되는 시대여서 체계적으로 공부하라고 거듭 아이들에게 권하였다.
최근에 발표한 “달궁아리랑”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하였다. 시인이 늘 시대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깨끗한 시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문학 공부를 하고 치열한 시를 써야 한다 그렇게 말했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고 나서 하동 송림 모래밭에서 그를 추모하는 조포 세 발을 쐈다고 하는 토벌대장 차일혁의 사연에 눈이 갔다.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민중적 유대감에 대하여 부려놓은 것을 내가 읽고 있는 동안, 그는 그의 절창 <산문(山門)에 기대어>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부뚜막에 앉아서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둔 그 사연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음성 어디가 떨리는 것을 들었다. 그에게 남동생이 아주 짧게 스쳐갔으리라. 비가(悲歌)를 말하면서 김광균과 정지용과 박목월과 신라의 고승 월명사를 또 이야기하였다.
그는 다비식 광경을 노래한 시 <연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인간의 죽음은 옷을 바꿔 입는 것이다, 인간은 꽃이거나 소리이거나 빛으로거나 그렇게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였다. 그의 시 <인연(因緣)>을 아이들에게 낭송해 주었다. 김소월의 시처럼 맹아리 없는 시로서 이 시대를 돌파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함민복의 시 <구혼>을 구술하여 아이들에게 받아 적게 하였다. 지난한 세월을 출근하는 얼굴과 상상력의 작동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이승만 정권 때 전라도 지역의 사찰을 불태우라고 하였을 때, 어느 장교가 화엄사 대웅전의 문짝 하나를 떼어 내어서 태우고는 완전 소각을 보고하였다가 나중에 처형당하였다는 이야기를 여담으로 하였다.
강연이 끝나고 나는 인사나 하고 갈까 하여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월 첫 장마 비가 굵게 내리고 있었다. 시인이 나와서 담뱃불을 붙이며 나를 보길래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하였다. 말을 조금 이었다. 아이들이 몇몇 와서 질문을 하고 웃고 돌아가고서, 시인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아서 시집 <꿈꾸는 섬>에 사인을 하나 받았다. 그러면서 다시 담배를 무시길래 물었다. 사모님은 좀 어떠하십니까, 늘 그러지 뭐, 늘 그려. 비가 많은데 어찌 가시겠습니까, 차는 가져왔습니까. 고속버스로 왔지, 택시 하나 잡아서 동대구 가서 가면 되지 뭐. 그러는 동안에 다음 소설 특강한다는 작가가 왔다 갔다 하고 분주하였다. 멀리에서 온 시인을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 비가 오는데 제가 차로 동대구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바깥의 운동장에 두었던 내 차를 몰고 왔다. 시인은 여전히 혼자서 다시 담배를 물고 비를 피해서 서 있었다.
빗방울이 더 세게 차를 때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문태준은 아직 전통 서정 시인이라고 하였고, 만일 시를 쓰려거든 오래 남을 시를 쓰라고 나에게 말하였다. 시가 고단한 때라고 하였다. 아이들이 던진 질문 몇 개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광주행 고속버스의 출발 시간까지 다 기다리지 못하고 자판기 커피 한잔을 나누고는 돌아왔다. 빗속에 시인을 남겨 두고 돌아왔다. 그가 한국의 현대시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나 오늘은 저 비를 맞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이들도, 특강을 들은 어른들도 그를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시인은 순천에서 서너 시간을 달려와서 100여 분 강의를 하고 다시 광주로 서너 시간을 달려 갈 모양이다.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송수권 시인의 뒷모습이 고단하게 느껴졌다. 목우(木偶)의 무표정과 어수룩함이 그에게 있었다.
그의 절창 <산문(山門)에 기대어>, <여승(女僧)>, <인연(因緣)>이다.
* * *
산문(山門)에 기대어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여승(女僧)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女僧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인연(因緣)
내 사랑하던 쫑이 죽었다
어초장 언덕바지 감나무 밑에 묻어주었다
이듬해 봄 감나무 밑에 잎새들 푸르러
컹컹 짖었다.
'#學問 > 人文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절한 시인의 마지막 시 1 박정만 / 김영석 (0) | 2015.07.13 |
---|---|
[습작참고]시를 잘 쓰는 16가지 방법 /송수권( 시인) (0) | 2015.07.13 |
배 터진 귀족과 굶어죽은 백성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0) | 2015.07.13 |
불행의 씨앗, 행복은 씨앗 (0) | 2015.07.13 |
혜민스님 북토크 강연록 (0) | 2015.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