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師禪 成立에 대한 小考
- 마조계를 중심으로 -
신정운
<차 례 >
Ⅰ. 연구목적 및 서문
Ⅱ. 祖師禪의 의의
1. 조사선 開祖에 대한 여러 見解
2. 조사선 성립 당시 禪宗系
3. 조사선의 의의
Ⅲ. 祖師禪의 禪法
1. 조사선에 스며든 대승경전의 全收的 凝縮
2. 조사선의 心性論
3. 조사선의 修證論
Ⅳ. 祖師禪의 특질 및 전개
Ⅴ. 나오면서
<국문요약>
祖師禪은 인도적인 색채를 벗어나 중국의 문화와 사유방식이 혼합된 禪이라고 할 수 있다. 조사선을 확립하고, 독립된 선종으로 성립되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 당나라 중기 때의 馬祖道一(709~788)이다.
마조는 『유마경』의 煩惱卽菩提, 『화엄경』의 性起思想, 『열반경』의 佛性思想에 의해서 그의 선사상 체계를 이루었는데, 곧 卽心是佛과 平常心是道이다. 평상심이란 단순한 평상시의 마음이 아니라 是·非, 造作, 斷滅·常住, 善·惡, 美·醜라고 하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 마음이 아니며, 깨닫지 못한 범부라고 할 것도 없고 깨달은 성현이라고 할 것조차 없는 본원 청정한 마음을 말한다. 이 청정한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이므로 수행할 필요가 없음[道不用修]을 강조한다.
즉, 조사선은 과거·미래가 아닌 현재 卽今에서의 佛性을 자각하는 頓悟見性이라는 사상을 성립시켰으며 조사선의 수행체계나 사상은 禪宗의 기틀을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조사선의 특질은 대략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이전에는 一代一人의 付囑이었으나 조사선시대에는 한 스승이 여러 제자에게 法을 傳하는 一代多人의 付囑 時代가 되었다.
② 특수한 禪問答이나 喝·棒 등을 사용한 禪機의 시대이다.즉 그때그때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자유 자재로운 大機大用의 방편이 활용되었다.
③ 語錄의 발생인데, 어록의 내용이 공안으로 변형되었으며 어록으로 인해 경론을 중시하는 인도적인 색채를 벗어나 중국 특유의 선종이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④ 淸規 확립으로 인한 선종의 독립과 일상성의 종교로 전환되었다.
⑤?寶林傳?의 성립으로 인해 조사선을 재정립·발전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와 같이 당나라 시대 때, 형성·발전한 조사선은 후대 ?照禪과 看話禪이라는 수행체계로 발전되었으며 宋나라 이후 儒學의 새로운 철학을 이루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마조의 직계제자들에게 법을 받아온 신라의 구법승들에 의해 신라 땅 곳곳에 山門이 開山되었음을 감안해볼 때, 조사선은 한국 불교 선사상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주제어: 조사선, 마조, 즉심시불, 평상심시도, 불성
Ⅰ. 연구목적 및 서문
禪의 기원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선의 완성은 중국적 토양 속에서 발양한 禪思想이라고 볼 수 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禪은 동양의 정신 가운데서도 불교의 방대한 사상체계를 훌륭하게 수용하여 핀 중국 정신의 가장 놀라운 꽃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칼융의 이 말은 중국선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서 인도에서 시작된 선이 중국에서 완전한 선사상으로 정립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중국화된 선사상이란 곧 祖師禪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조사선의 흐름은 一心을 강조하는 역사이다. 一心은 보리달마의 安心 법문에서 시작하여 三祖僧璨(?~606)의 信心으로, 東山法門에서는 守一不移·守心으로, 慧能의 自性 淸淨으로 각각 나타나고 있다.
馬祖에 와서는 平常心과 卽心으로, 黃蘗에게서는 無心으로, ?山에게는 如如佛로, 臨濟에게서는 無事와 無位眞人으로 각각 나타난다.
이와 같이 一心을 根幹으로한 선종의 흐름에 있어 조사선을 확립하고, 독립된 선종으로 성립되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 당나라 중기 때의 馬祖道一(709~788)이다. 물론 중국 조사선의 開祖를 마조라고 보는 통일된 학문체계가 된 것은 아니지만, 중국선종사에서 그가 이룩해 놓은 선사상은 조사선의 開祖로 보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조사선은 인도적인 색채를 벗어나 중국의 문화와 사유방식이 개입된 선으로, 중국의 선을 한 단계 차원 높인 선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이 조사선은 후대 ?照禪과 看話禪이라는 수행체계로 형성되었으며 문인 및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치어 宋 이후 새로운 경향의 철학을 이루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조사선은 단지 중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한국 불교 선사상의 근원이기도 하다. 즉 바로 마조의 직계제자들에게 법을 받아온 신라의 구법승들에 의해 신라 땅 곳곳에 山門이 開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사선은 곧 한국 불교의 선사상이요, 근원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현 중국에서의 조사선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논자는 몇 년전 중국의 선종사찰을 탐방했다. 현 중국의 禪은 禪淨一致된 선이요,미타 신앙이 중심이다. 사회주의 이념으로 인해 몇 십년간 불교신앙과 禪이 주춤하였지만, 중화민국의 禪刹에서는 조사선의 禪風을 펼치고자 많은 수행자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현재 중국의 禪宗은 남방지역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다. 조사선의 開祖인 마조를 비롯해 마조 門下는 그들이 선종사에서 차지하는 수행력만큼이나 예전에 그들이 머물던 도량이 현재 수행도량으로 불사가 정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현 中華民國의 선종을 대표하는 一誠방장은 ‘馬祖의 現身’이라고 불려 질 정도로 마조의 선사상인 조사선을 전개하고 있다.
솔직히 조사선 성립에 관한 논문이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너무 광범위한 선종의 역사이며 조사선이 시작되는 시기와 누구를 조사라고 보는 관점에 따라 많은 이의제기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물론 논자가 보편적·합리적인 기준에 준거한다고 하지만, 타의 안목에서는 순전히 私見과 邪見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견이라는 틀을 깨고 올바른 正法眼藏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시도 작업이 수반돼야 한다고 생각된다.
조사선에 관한 논문은 누구를 조사선의 개조로 보느냐에 따라 본문의 구성도가 달라질 수 있다. 이에 조사선 성립에 관한 논을 전개함에 있어 본 논자는 마조를 시작점에 두고, 마조 및 마조계 선사들의 사상과 선종교단이 체계를 잡아가는 과정 및 전개를 중심으로 한다.
논문전개는 대략 3단계로 나눈다.
첫째, 조사선 의의 및 조사선 성립당시 여러 정황이나 배경 및 조사선의 의의를 살펴본다.
둘째, 조사선의 禪法이다. 마조의 사상이 중심되지만 黃檗·臨濟 등 마조계 선사들의 선사상도 함께 보았다. 또한 조사선에 농축된 大乘禪觀을 아우르고자 한다.
셋째, 조사선의 특질 및 전개인데, 선사들의 수행면모와 선종교단의 체계를 중심으로 한다.
Ⅱ. 祖師禪의 의의
1. 조사선 開祖에 대한 여러 見解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이니 하며 불교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눈 것도 후대 학자들이 불교학의 흐름에 따라 정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선종의 역사에서 조사선에 관한 언급도 그러하다. 어느 시대부터 조사선이 시작되었고, 조사선에 관해 정의를 내리는 것 또한 정확하지 않다. 또한 조사선의 開祖가 菩提達摩, 六祖慧能, 馬祖道一 등, 누가 선구자인가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다. 더 나아가서는 달마이전인 金陵 寶?公(418~514)이나 傅大士(497~569)를 조사선의 선구자로 내세우는 경향도 있다.
여기서는 마조와 혜능을 조사선의 선구자라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만을 살펴보기로 한다.1) 먼저 六祖 慧能(638~713)을 조사선의 개조로 보는 경우이다.
1) 선학자들의 저서나 논문을 토대로 한 것이므로 논자의 私的인 견해가 들어 있음을 명기한다.
?群,2) 洪修平·孫亦平3)과 김태완(부산대학)은 조사선의 선구자를 혜능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일본의 선학자 鈴木大拙는 “중국화된 선으로서의 시작은 혜능부터이며 일상화된 선도 혜능부터이다.
중국의 선종은 혜능 때 일대 전환되었지만, 다시 한번 전환을 이룬 사람은 마조이다.”라고 하여 조사선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지만 조사선의 선구자를 혜능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洪修平은 “여래선은 바로 經文에서 나온 것이며, 조사선처럼 혜능선의 不立文字·以心傳心·敎外別傳의 특색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 표면적으로 보면, 조사선은 달마 이래 역대조사들이 전한 선을 가리키지만, 실제로 혜능의 南宗禪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5)
또 月庵스님은 혜능 때 조사선 사상이 시작하여 마조도일이 꽃을 피웠다고 서술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월암도 혜능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계종 교육원에서 편찬한 『看話禪(조계종수행의 길)』에 의하면, 조사선의 시작과 그 조사선 전개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2) ?群은 중국 東南大學의 교수이며, 저서『祖師禪』이 운주사(서울: 2000)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3) 洪修平·孫亦平 두 분은 모두 중국 南京大學 교수로서 그들의 저서 『如來禪』이 운주사(서울: 2002)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4) 鈴木大拙, 金知見譯, 『禪, 그 世界』(서울: 동화, 1986), 227-242면.
5) 洪修平·孫亦平, 『如來禪』(서울: 운주사, 2002), 374면.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三處傳心으로 마음을 전하였고, 이 법이 전승되어 28번째 보리달마는 東土의 첫 조사가 되었다. 이후 6조 혜능이 실질적으로 조사선을 정착시켰으며 마조와 석두는 조사선을 크게 융성시킨 인물이다. …… 이 두 인물에 의해 5가 7종이 생기고, 여기서 ?照禪과 看話禪이 발생하였다. 이후 大慧가 체계화한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행법이다.”6)
6) 불학연구소, 『看話禪-조계종 수행의 길-』(서울: 조계종출판사, 2008), 27-32면.
앞의 인용된 글을 통해서 볼 때, 교육원에서 펴낸 책자에서는 東土의 첫 조사가 달마라는 측면으로 보는 듯하지만, 혜능을 전면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혜능에 의한 선사상은 후대 간화선에 그대로 흘러들어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한편 조사선 시작을 馬祖道一(709~788)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이다.
일본 선학자 柳田聖山과 入矢義高,7) 윤영해,8) 宗浩9)· 性本· 唯眞· 圓融스님은 조사선의 개조를 마조로 보았다.10) 유진스님은 “신회가 실천이론의 기초를 구축하고 혜능이 그것을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혜능에 의해서 실천이론이 완성되기는 했지만 그 이론이 생활과 하나가 되지는 못했다. 지금 여기의 자기와 생활을 하나로 만든 것은 마조와 그의 제자에 의해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여래선은 실천이론을 완성한 선이라고 한다면 조사선은 그 실천이론을 일상생활로 끌어내려 자기와 생활이 하나가 되도록 만든 선이라고 할 수 있다.”11)
또한 伽山文化院에서 발행되는 『佛敎大辭林』 5권에서는 “마조는 卽心是佛이라고 하며 크게 禪風을 펼쳤는데, 이전에 쓰이던 뜻과는 다른 점이 있어 이로 인해 마조는 조사선의 開祖가 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12)
『看話禪』의 저자인 원융스님은 이전의 고차원적인 깨달음의 세계에 머물렀던 것을 일상생활 속으로 환원시킨 마조와 문하를 언급하면서 이들이 조사선의 시작점이라고 보았다.13)
7) 入矢義高, 『馬祖の語錄』(일본: 禪文化硏究所, 昭和59年).
8) ?祖師禪에서의 本來面目의 의미?, 『한국선학』 제15호(서울: 한국선학회, 2006), 245-270면.
9) 宗浩스님은 그의 저서 『臨濟禪 硏究』(서울: 경서원, 1996), 162면에서 “上堂과 示衆 및 일상 속에서 隨時로 설하고 있는 마조는 새로운 祖師像을 보이고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10) 圓融, 『看話禪』(합천: 藏經閣, 1999).
11) 唯眞, 『禪學槪論』(서울: 경서원, 2007), 107면.
12) 智冠, 『佛敎大辭林』5권(서울: 伽山文化院, 2003), 797면.
13) 원융, 『看話禪』(합천: 藏經閣, 1999), 38-47면.
좀 더 적극적으로 마조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학자들도 있다. 性本스님은 조사선이라는 용어를 마조계 洪州宗의 별칭이라고 까지 언급하고 있으며, 柳田聖山은 “마조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움직임을 일반적으로 마조선이라 부르며 荷澤神會(670~762) 일파의 如來禪에 대한 대비된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개성을 제일로 삼는 의미이다.”라고 하여 ‘마조선=조사선’이라는 도식을 성립시킬 정도이다.14)
14) 柳田聖山 著, 徐景洙 譯, 『禪思想』(서울: 한국불교연구원, 1984), 110면.
특히 마조를 조사선의 개조라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마조의 가르침인 평상심에서 비롯해 일상의 실천적인 선으로 전개하였으며, 좀 더 인간의 내면을 강조하는 측면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대로 조사선의 선구자를 학문적으로 정립한다거나 확실하게 단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어느 시기까지가 여래선의 역사요, 조사선의 역사라고 정의하는 것조차 단언할 수 없는 것이 선종의 역사이다.
논자는 마조도일을 조사선의 선구자적인 위치에 둔다. 조사선이라고하는 타이틀이 전제될 때, ‘누구를 조사선의 開祖로 보는지’에 따라 논문의 전체적인 프레임이나 전개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두고, 마조계를 주축으로 선법과 수행관을 전개할 예정이다.
2. 조사선 성립 당시 禪宗系
논자는 앞에서 마조를 조사선의 선구자라는데 초점을 둔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마조의 어떤 점을 가지고 조사선의 선구자적 위치로 볼 것인지에 대해 사회적인 측면과 중국 선종의 교단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 조사선 성립 당시 선사들의 行蹟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조사선이 형성하게 동기나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安史의 大亂(755~763)으로 인해 당나라의 태평성대는 흔들리고 정치·경제·군사·외교·사상·문화·종교까지도 변화되었다. 종래의 문벌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문화 대신에 혁신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즉 피폐된 사회 분위기에서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신뢰감을 회복시키는 사상을 필요로 하였다.
둘째, 선이 어느 정도 중국인들에게 인식되어질 무렵, 당시 학자나 문인들이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다수의 출가 수행자들을 인도하기 위한 적합한 방편이 필요했다.
셋째, 선이 자연적으로 중국문화와의 결합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도교와의 결합이다.15)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기 이전, 기원전 2세기에 형성된 도교는 중국인과 사회에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 단적인 예로 도교와 관련된 마조이다. 도교는 중국의 5대 종교 가운데 중국에서 자생한 유일한 종교이다. 마조가 磨塼作鏡으로 깨달음을 이룬 湖南省 南嶽衡山은 바로 도교의 성지이다. 마조에게 기와를 가는 機緣을 보이며 법을 깨닫게 한 스승 南岳懷讓(677~744)이 머물렀던 福嚴寺도 바로 이곳이다. 복엄사는 磨鏡台와 불과 500여 미터거리에 위치하는데, 남악회양이 머물기 이전에는 도교 사찰이었다.16)
넷째, 마조가 활동하기 이전 무렵,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문화가 최고조로 번성했고 불교학도 발달이 최고조였던 시대이다. 최고조였던 불교학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사상으로의 변이가 필요했던 것으로 추론된다. 이전의 장안과 낙양을 무대로 펼쳤던 기존의 법상종·화엄종·정토종에 비해, 조사선은 강남의 곡창지대를 무대로 선이 전개되었다.
15) 조사선이 도교적인 성향이 있었다면, 점차 후대로 가면서 송나라 때 雲門宗의 雪竇重顯(980~1052), 佛日契嵩(1007~1074)에 의해 유교와 선의 융합적인 면이 나타나기도 한다.
16) 복엄사는 567년 남조시대에 지어졌고, 원래 천태종 2조인 南嶽慧思(514~577)를 위해 창건되었다. 이후 도교사찰이었다가 713년에 남악회양이 이곳에 상주하면서 선종 수행터로 만들었다. 논자가 이곳을 참배한 2006년에도 복엄사는 산의 형세에 따라 건축되었는데, 일반 사찰과는 다르게 독특한 건물이 많다. 주조된 청동의 南岳神(南岳衡山의 山神)이 모셔져 있다. 이 복암사에 도교전당이 있는 것은 이 고장의 풍습이기도 하지만, 불교와 도교와의 (융합이 아닌) 혼재된 이미지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4가지 요인 가운데, 조사선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첫째와 둘째가 간접적인 요인이라면, 셋째와 넷째는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조와 石頭希遷(700~791)은 왕권 및 귀족적인 성향을 벗어나 시골(江西省과 湖南省)에서 법을 펼쳤다. 이후 江西(마조)의 江과 湖南(석두)의 湖를 붙여 江湖라는 말이 생겼는데, 세상 천하를 의미한다. 간혹 중국에서 무술 고수들의 모임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원래는 마조와 석두의 선을 상징하는 용어로서 始發되어 이때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 지명에 의해서 승려를 호칭할 때, 江湖가 붙어 江湖僧·江湖衆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결제 기간을 江湖會·江湖僧會·江湖라 불렀고 승려가 머무는 당우를 江湖道場·江湖療라고 불리었다.
이렇게 강호라는 말이 중국에서 일반화되었음을 볼 때, 마조와 석두의 선이 쌍벽을 이루며 당시 사회와 불교계에 풍미했음을 알 수 있다.
『宋高僧傳』에는 “강서의 주인은 마조이고 호남의 주인은 석두로서, 수행자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이 두 대사를 찾아뵙지 않으면 無知한 사람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전할 정도이다.17)
17) 『宋高僧傳』卷9(『大正藏』 50, 764a). “江西主大寂 湖南主石頭 往來憧憧 不見二大士 爲無知矣”
당시에 수행자들은 마조와 석두 사이를 빈번이 오가며 수행한 사람들이 많았다. 龐居士, 丹霞天然, 鄧隱峯, 藥山惟儼, 五洩, 曇藏 등이 있으며, 어록에 전하지 않은 수행자들까지 고려해볼 때 많은 수행자가 두 선사를 오가며 수행하였으리라고 사료된다.
한편 강호시대를 열은 석두·마조 이외에 牛頭宗의 徑山法欽(714~792) 또한 당대의 선지식이었다. 법흠은 성품이 온화하고 말이 간단하며 논설하는 일이 드물어 묻는 이는 많았지만 대답하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당시 수행자들은 석두·마조·법흠의 문하를 자연스럽게 오고 가면서 수행하였다. 그래서 이 세 사람 모두에게서 법을 받은 이도 있고, 두 문하에서 수행한 이도 있었다.
<표 1>
石頭希遷·馬祖의 양 법맥을 이은 선사 | 龐蘊居士, 鄧隱峯, 藥山惟儼 五洩靈?, 西園曇藏, |
?山法欽·馬祖의 양 법맥을 이은 선사 | 東寺如會, 伏牛自在, 西堂智藏 |
石頭·?山·馬祖의 3인의 법맥을 이은 선사 | 天皇道悟, 丹霞天然 |
중국의 諸子百家 시대에 수많은 성인들이 탄생했고, 붓다가 성불하고 활동할 당시 인도에서 육파철학 등 인도종교와 철학계가 풍성했던 것처럼, 마조가 활동할 당시 뛰어난 선사와 제자들이 있어 禪風은 천하를 풍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호시대 조사선의 시작점을 마조와 석두로 보지만, 당시 석두계의 활약은 미비했다는 점이다. 이 점을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았다.
첫째로 마조계 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쓰여진 『寶林傳』에 석두계에 관한 기술이 부족한 것은 당연할지 모르지만, 宗密의 저술에서도 湖南의 禪家를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圭峰宗密이 저서에서 『禪門師資承襲圖』의 四家, 『禪源諸銓集都序』에는 十室, 『圓覺經大疏?』에 七家를 논한 가운데 洪州宗은 모두 실려 있지만, 石頭宗에 관하여는 『禪源諸詮集都序』의 十家중에서만 그 이름을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18)
18) 『禪門師資承襲圖』에는 江陵의 悟, 즉 天皇道悟의 이름을 가지고 그것을 馬祖道一의 法脈에다 두고, 겸하여 徑山法欽에게 ?受하였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며(『卍續藏經』110, 869면), 石頭希遷은 그 이름조차 보이지 않는다. (關口眞大 著, 李永子 譯, 『禪宗思想史』(서울: 홍법원, 1989), 145면 재인용)
둘째로 석두와 그 문인들은 대부분이 山居 수도자들이 많았다. 석두의 ?草庵歌?의 한 일부분을 보기로 하자.
“풀을 엮어 움막 하나 짓는데,꾸밀 것이 하나도 없네. 밥 먹고 편안히 잠을 청하니, 마음은 한가롭다.
… 世人들이 사는 곳에 나는 살지 않고, 세인들이 좋아하는 것 좋아하지 않네.
초암이 비록 좁지만 法界를 머금고 있어 내 한몸 거동하기 불편이 없네.”19)
19)『景德傳燈錄』卷30(『大正藏』51, 461c).
“吾結草庵無寶貝 飯了從容圖睡快……
世人住處我不住 世人愛處我不愛
庵雖小含法界 方丈老人相體解”
이렇게 산거수행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석두의 ?草庵歌?는 중국 승려 최초 선시집으로 중국 문학에서 새로운 철학시 계보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산거수도자였던 석두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曹洞宗이 처음 열리게 되는 9세기 중기부터이다. 또한 조동종계 道吾(769~835)의 樂道歌, 雲巖(782~841)의 寶鏡三昧歌나 洞山·龍牙 등의 많은 韻文作品들이 山居 수행의 所産인 반면, 마조 계통에서 일상생활에 卽한 문답의 기록을 전하는 것과 크게 성질을 달리한다. 이에 선종사에서 석두의 위치가 작지는 않지만, 석두를 조사선의 開祖라고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따라서 석두를 조사선의 개조로 보는 점에 있어서 후대 조동종계의 요청이라고 사료되며 마조와 석두가 강서와 호남으로 각립해서 서로 그 종풍을 다투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마조를 조사선의 개조라고 보는데 타당하다고 본다.
3. 조사선의 의의
禪은 팔리어 jh?na, 범어 dhy?na의 음역으로서 Chandogya upanishad에서 최초로 언급되었다. 禪那·善思로 음역되었고, 禪那와 善思를 간략히 하여 禪이라고 하였다. 또한 精慮·思惟修라고 의역하며, 五蓋(탐·진·의·혼침·掉擧) 등의 악을 모두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棄惡’ 이라 의역되기도 하며, 온갖 공덕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功德叢林’ 이라고 한다.
禪이라는 말에 祖師를 붙여 祖師禪이라는 용어가 활용되기 이전부터 선을 체계 있게 나누고 있는 것은 인도선정부터이다.
禪의 높고 낮은 경지를 『大乘起信論』에서 3종선[外道禪·聲聞禪·菩薩禪]으로, 『維摩經』에서도 3종선[世間禪·出世間禪·出世間上上禪]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楞伽經』에서는 愚夫所行禪·觀察義禪·攀緣如禪·如來禪인 4종선으로 구분하였다. 圭峰宗密(780~841)은 『都書』에서 外道禪·凡夫禪·小乘禪·大乘禪·如來淸淨禪인 5종으로 선을 나누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능가경』에서 최고의 선을 如來禪이라고 하였다.
『능가경』에서 구분해 설한 4종류의 선은 人·法 無我사상을 어떻게 깊이 이해했느냐에 따라 깨달음의 단계를 나누었다. 마지막 如來禪에 대해 정의하기를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 自覺聖智相을 행하고 法樂에 머물며 아울러 중생을 위해 부사의한 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였다.20)
『능가경』에서 불타의 自覺聖智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自內證의 여래선밖에 없으며 진여를 찾고 난 다음 중생을 위해서 자비를 베푸는 의미도 갖고 있다. 洞山良价(807~869)의 가르침인 三路21)의 垂手에 해당되며 十牛圖의 마지막 10번째 그림인 入纏垂手의 원리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승불교의 원리이자 수행관이기도 하다.
20) 『楞伽經』 卷2 ?四種禪說分?(『大正藏』 16, 492a).
“云何如來禪 謂入如來地 行自覺聖智相 三種樂住 成辦衆生不思議事 是名如來禪”
여기에서 三種樂이란 天樂·禪定樂·涅槃樂을 말한다.
21) 三路를 보통 ‘洞山三路’라고 하며, ‘三路’는 학인들을 지도하기 위한 3가지 수단방편이다.
‘鳥道’는 새가 허공을 날아다닐 때에는 일체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 없는 것처럼 수행자는 沒?迹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玄路’는 玄玄微妙 한 길의 의미로 有無나 迷悟 등 일체의 차별적인 견해를 초월하여 공적한 곳을 왕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展手’는 向上의 一路에 머물지 않고 더욱 한걸음 더 나아가 중생교화의 행화문을 향해서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래선을 제시하고 있는『능가경』은 초기선종의 소의경전이었다. 달마가 혜가에게 4卷本『능가경』을 주면서 ‘이 경의 현리를 심요로 삼으라’ 고 하였고,22) 혜가 이외 那禪師·慧滿 등 달마계 초기의 선사들은『능가경』을 수행의 요지를 삼았다. 이런 점 때문인지 胡適박사(1891~1962)는 초기 선종을 楞伽宗이라고 하였다. 또한 마조도 『景德傳燈錄』 ?馬祖語錄?에서 여래선을 언급하고 있다.
22) 道宣, 『續高僧傳』 卷16 ?慧可章?(『大正藏』 50, 552b).
"본래부터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있다.
그러므로 道를 닦는다거나 坐禪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를 닦지도 말고 좌선을 하지도 말라. 이것이바로 如來淸淨禪이다."23)
23) 『景德傳燈錄』 卷28 ?馬祖章?(『大正藏』 51, 440b).
“本有今有
不?修道坐禪
不修不坐 卽是如來淸淨禪”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여래선은 선종사에서 조사선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까지 최고의 경지를 의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 선종사에서 여래선과 구분하여 조사선을 最上乘禪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 조사선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 가이다.
조사선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호칭한 선사는 ?仰宗의 仰山慧寂(807~883)인데, 앙산이 香嚴智閑(?~898)과의 대화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 향엄과 앙산은 ?山靈祐(771~853)의 제자로서, 이들은 사형사제이지만, 향엄이 깨닫는데 앙산의 도움이 컸다. 『景德傳燈錄』卷11에 전한다.
앙산이 향엄에게 물었다.
“최근에 깨달은 것이 있어 다시 말할 것이 있습니까?”
향엄은 앙산의 질문에 게를 설해 답했다.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 가난이 참 가난이네.
작년 가난에는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더니
금년 가난에는 그 송곳조차 없구나.”24)
24) 『景德傳燈錄』卷11 ?仰山章?(『大正藏』 51, 283b).
“仰曰
若有正悟 別更說看
嚴作頌曰
去年貧 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貧猶有卓錐之地
今年貧錐也無”
그러자 앙산이 말했다.
“그대는 如來禪은 보았지만 祖師禪은 아직 보지 못했군요.”25)
25)『景德傳燈錄』卷11 ?仰山章?(『大正藏』 51, 283b).
“汝只得如來禪 未得祖師禪”
향엄에 대한 앙산의 비판은 아직 最上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여래선이라고 하고, 최상승의 경지를 조사선이라고 비교 언급한 최초이다. 『?山錄』에는 다음 이야기가 전하는데, 향엄이 다시 “나에게 한 기틀이 있사오니 눈을 깜빡거려 그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만약 그래도 알지 못한다면 따로 사미를 부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26) 앙산은 “반갑게도 향엄사제가 조사선을 알았군.”이라고 하였다는 일화이다. 이후 선종사에서는 여래선보다 조사선이 더 수승하다는 사상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26) 『四家語錄』 ??山靈祐禪師語錄?(합천: 藏經閣, 禪林叢書 13), 부록 31면.
“我有一機 瞬目視伊 若人不會 別喚沙彌”
앙산의 일화에서 조사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또 다른 이면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荷澤神會(684~758)가 滑臺의 대운사에서 무차대회를 통해 神秀系를 北宗이라고 공격하며 육조현창운동을 하였다.
이때 신회가 주장한 것 중 하나가 “보리달마의 선법은 여래선을 전한 조사”라는 것이다.27) 신회가 북종선을 漸修라고 하면서 自派를 내세우기 위해 南宗은 頓悟이면서 달마의 선을 이어받은 正系인데, 달마는 여래선을 표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대 여래선을 뛰어넘는 조사선을 주장한 이들은 마조계에 의해서이다. 조사선을 처음 언급한 앙산이 하택신회가 여래선을 주장하는 데에 대한 自派의 입장을 견지했다고 볼 수 있는 점이다.
27) 胡適, 『神會和尙遺集』(중국: 胡適記念館), 261면.
그렇다면 조사선에 관한 의의를 내리기에 앞서 ‘조사’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祖師의 ‘祖’는 뿌리의식의 표현이다. 만물의 시초요, 근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老子는 이것을 천지의 근원, 만물의 스승이라고 하였다.
중국불교사에서 ‘조사’라는 호칭은 天台智?(538~597)의『摩訶止觀』에서 龍樹菩薩(150~250)을 천태종의 원조로 추앙하여 ‘高祖師’라고 부른 것이 최초이다.28) 용수는 대승불교를 완성시킨 인물로서 중국 8宗의 조사라고 칭하는 인물이다.
28) 『摩訶止觀』 卷1(『大正藏』 46, 1b).
“付法藏中 第十三師 智者觀心論云 歸命龍樹師 驗知 龍樹是高祖師也”
한편 마조의 스승인 南岳懷讓(677~744)은 慧安에게 참문해 ‘祖師西來意’라는 문답으로 깨달았다.29) 또한 『馬祖語錄』에도 ‘祖師西來意’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여기서 조사는 달마를 가리키는데, 단순한 어구적인 해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禪의 본질은 무엇이냐?’, 수행코자 하는 ‘그 마음의 본질이란 무엇이냐?’, ‘부처란 무엇이냐’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조사는 선의 원류인 달마를 지칭한다고 본다.
29) 南岳懷讓은 15세에 荊州 玉泉寺의 弘景律師(634~712)에게 출가하였다가 후에 同學인 坦然禪師와 함께 嵩山의 慧安禪師를 찾아갔다. 혜안은 五祖弘忍의 제자로서 혜능과 同門이다. 이때 南岳懷讓은 혜안에게서 ‘如何是祖師西來意旨’란 문답으로 大悟한 뒤, 혜안의 권유로 육조혜능을 參問해 제자가 되었다.
이런 여러 관점을 토대로 보았을 때, 조사선 이전부터 ‘조사’라는 의미는 근본이나 근원, 본질, 최초의 源流를 의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조사선 시대에 들어 편찬된 어록에 드러난 조사의 의미를 살펴 보기로 하자.
『寶林傳』에는 조사의 의미에 대해 “佛心의 근본을 밝혀 조금도 착오가 없는 생활방식이 깨달음과 합치하는 자를 祖라고 한다.”라고 하였다.30) 또한 『傳燈錄』 ?達磨章?에는 이렇게 전한다.
30) 柳田聖山, 『達摩』(서울: 민족사, 1999), 56면 재인용.
"大道에 달하여 사량을 초월하고, 佛心에 통함에 척도를 뛰어 넘었으니 凡과 聖,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초연한 사람을 祖師라고 한다.31)
31) 『景德傳燈錄』卷3 ?達磨章?(『大正藏』51, 220a).
“達大道兮過量 通佛心兮出度 不與凡聖同? 超然名之曰祖”
大道에 통달하지만 도에 무한하며, 佛心에 통하지만 불심에 어떤 경계가 없으니 凡과 聖, 모두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초연한 것을 조사라고 하였다. 즉 일상성에 입각한 평상심에 근거하는 사람을 말한다.
마조의 4세 臨濟(?~866)는 이런 사람을 ‘祖佛’이라고 하였다. 조사와 부처라는 뜻이 아니라 조사인 부처, 조사가 바로 부처라는 것이다. 부처보다도 조사에 더 중점을 둔 표현으로 조사선 특유의 용어이며 조사선에서 표방하는 이상적 인간상이기도 하다. 임제는 이것을 다른 말로 ‘活祖’라고 하였다.
조사선시대에 제시하는 조사는 근원적인 본래심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지칭하며 곧 평상심에 입각해 無心·無事의 경지에서 자유로운 이들을 조사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사선 이전의 기록과 조사선 시대로 접어든 어록에서 조사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앞에서 전개해왔던 점들을 통해 조사선의 정의를 내려보기로 하자.
인도선에서 비롯해 중국에 선이 전래된 후 완전히 중국화된 선으로 정립되기까지 선을 여래선이라고 보고, 이후 중국적인 견해와 사상이 가미된 선을 조사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사선이 등장하면서 여래선을 폄하하는 경향이 보편화되었다. 논자는 논 전개상 조사선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논하기 위해 여래선과 함께 언급하였지만, 조사선과 여래선의 우열을 논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당 중기 마조를 기점으로 종래의 선을 여래선이라고 하고, 마조이후 더 뛰어난 경지를 조사선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본다면, 마조의 할아버지뻘 되는 六祖慧能을 여래선 쪽으로 두어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한국 조계종 宗名은 혜능을 의미하는데, 한국선 전체를 어긋나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여래선이라고 하는 체계가 있었기에 조사선이 나올 수 있는, 선종사의 한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조사선은 인도 禪에 중국의 문화·종교와 결합이 되기 시작하면서 부처의 가르침에 따른 정통적이고, 인도 고유의 선적인 측면이 아니라 점차 중국의 노장 사상이 가미되어 중국적인 토양으로 변이된 선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한국의 조사선 우위 사상은 신라의 9산선문 가운데 ??山門 梵日국사의 眞歸祖師說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眞歸祖師가 설산에서 석가를 기다렸다가 석가에게 心印을 전해 주었다는 설인데, 석가모니도 진귀조사(문수보살의 화신)를 만남으로서 진정한 正法眼藏을 전수받고 종지를 증득했다는 설이다.32)
32) 『禪門寶藏錄』 ?頓敎對辨門? 第25則(『韓國佛敎全書』 6), 470면.
“眞歸祖師在雪山 叢木房中待釋迦 傳持祖印壬午歲 心得同時祖宗旨 達磨密錄” // 眞歸祖師說에 대해서는 고려 眞靜天?(1206~?)의 『禪門寶藏錄』과 西山休靜(1520∼1604)의 『禪敎釋』에 실려 있다.
또한 조선말기의 白坡亘璇(1767~1852)은 대표적인 저술인 『禪文手經』에 禪을 3종류로 구분했다.33)
즉 祖師禪·如來禪·義理禪이다. 의리선은 선을 언어나 문자로 이치를 설하는 것이며, 여래선은 여래의 교설에 의거하여 자성의 본래 청정을 체득하는 것이고, 조사선은 文字義解에 의하지 않고 以心傳心의 禪旨를 바로 체득하는 敎外別傳의 禪이다. 의리선은 최하급의 선이며 조사선과 여래선은 格外禪이다. 단지 여래선과 조사선의 차이가 있다면 여래선은 義理의 格에서 벗어났지만 그 깨달음의 경계가 眞空에 머문 단계이며, 조사선은 眞空과 妙有가 원융한 중도를 깨달은 경계라는 것이다.
백파의 『禪文手經』은 당시 김정희, 草衣선사에게 비판을 받은 바 있지만, 불교의 암울한 시대에 있어 백파의 조사선 우위 사상은 간과할 수 없는 한국의 선사상이라고 생각된다.34)
33) 白坡亘璇은 3종선으로 5家를 구분하여 각 종파의 우열을 판단했는데, 그 판단의 구체적 기준은 임제종의 선리였다. 즉 백파는 三句·三玄·三要·四料簡 등 임제의 설법으로 각 종파를 분석했고, 이는 교종에 비해 禪宗의 우월함과 선종 중에서도 홍주종 계통의 임제종이 최상승선임을 밝히고자 했다.
34) 초의선사는 ?禪門四辨漫語?를 지어 格外禪·如來禪·祖師禪·殺人劒活人劒·眞空妙有 사변으로 백파의 禪論을 비판했으며, 송광사 우운도 ?禪門證正錄?을 지어 반박했다. 이후 백파의 4대 법손인 설두유형(1824~1889)이 ?禪
門遡流?를 써서 백파를 변호하고, 설두의 제자 축원진하(1861~1926)는 ?禪門再證錄?을 지어 초의선사 입장에서 백파와 설두를 비판함으로써 150여년 동안 선논쟁이 이어졌다.
Ⅲ. 祖師禪의 禪法
1. 조사선에 스며든 대승경전의 全收的 凝縮
앞에서 논자가 언급하였듯이, 조사선 시대를 8세기 마조를 기점으로 보았다. 마조를 기점으로 중국불교사를 조망해보면, 마조 以前은 교학불교가 완성되었고 마조 以後부터 禪인 실천불교가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다. 선종사적으로도 마조 이전의 선사들은 경전에 입각한 반면 마조 이후는 어록이 발전되었다.
그러나 마조이전이나 이후 중국 선사상 전체적으로 볼 때에도 몇몇 대승경전은 선종의 사상적 근간이 되고 있다. 『楞伽經』은 초기 선종의 소의경전이었으며 중기 무렵에는 般若部 경전이 南宗의 소의경전이었다. 또한 『維摩經』은 선종의 소의경전이라고 할만큼 선사나 거사들이 애독하는 경전이다.
한편 화엄사상과 선이 일치하는 華嚴禪이 등장하였고, 당말 이후에는 정토사상과 선을 융합하는 禪淨一致가 등장하였다. 특히 『涅槃經』의 佛性, 『般若經』의 般若, 『楞伽經』의 自覺聖智, 『華嚴經』의 唯心·性起, 『維摩經』의 不二思想 등은 조사선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마조의 경우도 그의 어록을 통해서 볼 때, 경전에 입각해 그의 禪觀을 수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조어록』에는 『능가경』과 『유마경』의 구절이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는 『마조어록』을 통해 드러난 『유마경』의 煩惱卽菩提, 『화엄경』의 性起思想, 『열반경』의 佛性思想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유마경』의 선관을 살펴보자.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그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 땅을 떠나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35) 이는 미혹과 깨달음은 비록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一心을 말미암는 것이니 절대 이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땅’은 일심이요, ‘넘어진 사람’은 번뇌가 일어난 것이다. 또한 ‘일어나는 사람’도 곧 보리심을 發한 것을 말한다. 결국 일심에서 번뇌를 일으키기도 하고 번뇌를 제거하기도 한다. 이는 『유마경』에서 설하는 此岸卽彼岸· 煩惱卽菩提· 生死卽涅槃인 것이다. 번뇌와 보리는 한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요, 그 번뇌의 자리에서 보리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35) 柳田聖山 主編, 『寶林傳』 ?第二 優婆?多章?(일본: 中文出版社, 1983), 27면.
“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離地求起 無有是處也”
"62見과 일체 모든 번뇌가 모두 如來種이다.
왜냐하면 無爲로 正位에 드는 법(出世間法)으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지 못한다.
마치 고원의 육지에서는 연꽃이 피지 못하고 낮고 질척한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다."36)
36) 『維摩詰所說經』(『大正藏』 14, 549a-b).
“六十二見及一切煩惱皆是佛種 曰何謂也
答曰 若見無爲入正位者 不能復發阿?多羅三? 三菩提心
譬如高原陸地 不生蓮花 卑濕?泥乃生此華”
인간의 좋지 못한 邪見과 모든 번뇌를 如來種 혹은 佛種이라고 하였다. 즉 더러운 흙탕물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여래의 종자도 인간의 번뇌 속에서 피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번뇌 속에 보리가 있고, 此岸을 여의고 彼岸에 이르는 것이 아닌 차안이 곧 피안으로서 공간적인 이동이 아님을 뜻한다. 여기서 여래종·불종이란 인간의 번뇌 자리에서 보리를 이룰 수 있다는 內在·具有적인 사상으로『열반경』의 불성과 같은 뜻이다.
이렇게 내재된 자리에서 보리를 이룰 수 있으므로 굳이 공간적인 이동이 아닌 그 자리인 卽今에서 도를 실현하는 일상성의 사상이 전개된다. 『유마경』 ?菩薩品?에서 ‘直心是道場’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현실의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 선수행이 가능하다는 禪의 근거를 밝히고 있다. 광엄동자가 바이샬리 城門을 나가려고 하는데, 마침 그곳으로부터 들어오고 있는 유마거사를 만난다. 광엄동자가 유마에게 ‘道場을 찾아 城門을 나가려고 한다’라고 하자, 유마는 자신은 지금 도량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곧은 마음이 도량이니 거짓이 없는 까닭이며, 행을 닦아가는 것이 도량이니 능히 일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며, 깊은 마음이 도량이니 공덕을 증진하기 때문이며, 보리심이 도량이니 그릇됨이 없기 때문이다.37)
37) 『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542c).
“直心是道場無虛假故 發行是道場能辦事故 深心是道場增益功德故 菩提心是道場無錯謬故”
"보살이 만일 모든 바라밀로써 중생을 교화하면, 온갖 행위 즉 一擧手一投足이 모두 도량으로부터 와서 佛法에 머무는 것이다."38)
38)『維摩詰所說經』(『大正藏』14, 534a).
“若應諸波羅密 敎化衆生 諸有所作 擧足下足 當知皆從道場來 住於佛法矣”
바로 자신의 마음이 도량인데, 굳이 어떤 장소를 찾아다니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유마의 비판이다. 불법의 실현은 구체적인 日常에서도 가능하다고 하는 禪의 기본입장을 간명하게 표현해 놓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4威儀가 도량이며 3業이 佛事라는 말을 적극 활용하여 좌선과 노동, 인간의 일상생활 모두를 佛事로 보고 있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이 말은 인간의 일상행위인 行·住·坐·臥 일체동작이 法界가 되며, 身·口·意 三業의 행위가 전부 부처의 行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조사선의 修證觀인 作用卽性과 같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사선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일상성의 종교로 된 점인데, 이는『유마경』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화엄경』의 性起(tath?gata-gotra-sa?bhava)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如來性起品?에서 말하는 性起란 원래 如來의 지혜인 如來의 性品이 그대로 드러난 것인데, 佛性現起 혹은 體性現起가 줄여진 말로서 性의 起, 혹은 性의 顯現이다.
즉 번뇌가 전혀 없는 부처가 중생에 현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法界가 如來로 되어 출현하는 것, 중생의 마음 가운데 지금 바로 일어나고 있는(現起) 그대로가 바로 如來의 性起라는 것이다. 이는 수행에 의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39) 그런데 중생이 이 점을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부처님께서 탄식한 부분이 있다.
39) 海住, 『華嚴의 世界』(서울: 민족사, 1998), 234면.
"기이하고 기이하다. 모든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구나.
내가 마땅히 성인의 진리로서 그 허망한 생각과 집착을 여의케 하고 자기의 몸속에 있는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부처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리라."40)
40) 80卷本 『華嚴經』 ?如來出現品?(『大正藏』 10, 272c).
“奇哉奇哉 此諸衆生 云何具有如來智慧 愚癡迷惑 不知不見
我當敎以聖道 令其永離妄想執着 自於身中得見如來廣大智慧 與佛無異”
60卷本 『華嚴經』 ?如來性起品?(『大正藏』 9, 624a).
“而時如來 以無障碍淸淨天眼 觀察一切衆生 觀已作如是言
奇哉奇哉 云何如來 具足智慧 在於身中 而不知見
我當敎彼衆生 覺悟聖道 悉令永離妄想顚倒垢縛 具見如來智慧在其身內 與佛無異”
『華嚴經』에서 드러나는 세계는 부처님의 눈으로 본 세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중에 法界의 빛이 비추어져 부처님의 눈에 보일 때는 우리들 하나하나가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리의 세계는 우주 전체로서 그 우주 가운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들어 있다는 비유이다.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法界의 한 구성원이 되는 셈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티끌 중에 각각 삼천 대천세계와 진리 그 자체인 부처의 法身이 들어 있다. 그래서 重重無碍法界·事事無碍法界인 것이며, 義湘스님은 法性偈에서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라고 하였다.
이렇게 『화엄경』에서 如來性起를 설한 것은 바로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여래의 지혜가 행화되어 그 결과 중생도 여래와 본질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마음과 부처·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41)고 하였다. 이 성기는 평상심의 근원이요, 지금 여기에서의 자신의 청정한 불성을 자각하는 조사선 수행의 핵심이 된다.
41) 60卷本 『華嚴經』 ?夜摩天宮偈讚品?(『大正藏』 9, 465c).
“心如工畵師 畵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지막으로 『열반경』의 佛性思想을 살펴보기로 한다. 佛性(Buddha- dh?tu)의 dh?tu는 性이나 法界로서 성질·속성의 의미보다는 원리·원인·근본의 의미이다. 즉 불성이란 부처가 될 원인,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 불성은 모든 대승경전에 광범위하게 스며있지만, 특히 구제불능인 一闡提를 포함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은 『열반경』에서 집중적으로 설하고 있다. 이 불성의 변치 않는 성품을『열반경』에서는 소금과 꿀·물[濕性]에 비유를 들어 설하고 있다.
"소금이 짠 성분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물질로 하여금 짜게 하고, 꿀은 본성이 단 성분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물질을 달게 하며, 물은 습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 다른 물질로 하여금 습하게 한다."42)
42) 『涅槃經』 ?獅子吼菩薩品?(『大正藏』 12, 793b).
“如鹽性?令異物? 蜜本性甘令異物甘 水本性濕令異物濕”
마치 이 소금·꿀·물이 어디에 섞여도 그 소금·꿀·물의 본 성품은 변하지 않고 본성이 살아 있듯이 智慧 佛性도 어떤 번뇌에 뒤섞일지라도 그 본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불성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천제를 포함해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체중생은 본래 열반에 들고, 無漏智性을 본래 스스로 구족하다”고43) 하면서 “초목국토도 모두 성불할 수 있으며 산하대지가 法身을 드러냄이니라.”44)라고 無情衆生도 성불할 수 있다고 하였다.
43) 『涅槃經』 ?如來性品?(『大正藏』 12, 424c). “一切衆生本來涅槃 無漏智性本自具足”
44) 『涅槃經』 ?獅子吼菩薩品? “草木國土 悉皆成佛 山河幷大地 全露法王身”
이와 같이 『유마경』에서는 번뇌즉보리와 일상에서의 수행에 관해 살펴보았고, 『화엄경』에서는 중생의 마음 가운데 지금 바로 일어나고 있는[現起] 그대로가 바로 如來라고 하는 性起思想, 『열반경』에서는 일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점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초기선종은 敎에 의지해 禪을 펼친 반면 조사선은 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고 하여 경전을 벗어난 것으로 정의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논자가 앞에서 밝혔듯이 성기사상이나 불성, 不二사상은 조사선의 선사상 체계 및 근간이 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또한 후대 선승들의 活句는 불성이라는 말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지만 불성에 대한 自覺이 주를 이루고 있다.
2. 조사선의 心性論
마조의 대표적인 사상은 卽心과 平常心이다. 이 마음을 시발점으로하여 平常心是道와 卽心是佛, 非心非佛, 제자 접득을 위한 다양한 방편설, 일상화된 禪의 저변에 깔려 있는 心地法門이 전개된다. 大地가 모든 만물을 생성해내듯이, 마음이 만법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데서 대지에 비유해 心地라고 한다.
마조가 스승 南岳懷讓(677~744) 문하에서 공부할 때, 마조가 회양에게 물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여야 無相三昧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회양은 “지금 心地法門을 익히는 것은 마치 스스로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라고 대답했다.45) 이렇듯 마조는 스승과의 機緣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의 심지법문을 정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조는 심지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다.
45) 『景德傳燈錄』卷5 ?南岳懷讓章?(『大正藏』 51, 240c-241a).
“如何用心卽合無相三昧 師曰汝學心地法門如下種子”
"一切萬法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긴다. 만약 心地를 요달하면, 짓는바(行하는 바)가 걸림이 없다. 너의 지금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達磨가 西來하여 오직 一心의 法을 전했다. 三界는 곧 마음이며 森羅및 萬像은 一法에서 나온 것이다."46)
46) 『宗鏡錄』 卷97(『大正藏』 48, 940b).
“一切萬法皆從心生 若達心地所作無碍 汝今此心卽是佛故
達磨西來 唯傳一心之法 三界唯心 森羅及萬像 一法之所印”
"법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를 떠나 따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善을 취하지도 말고 惡을 버리지도 말라. 깨끗함과 더러움, 그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47)
47) 『四家語錄』 ?江西馬祖禪師語錄?(합천: 藏經閣, 부록 7면).
“夫求法者 心外無別佛 佛外無別心
不取善 不捨惡 淨穢兩邊 俱不依?”
마조는 마음에서 부처를 구할 것이요, 다른데서 구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卽今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굳이 善에만 머물러야 하고 惡은 제거해야 하며 空을 관하고 선정에 들어야 한다는 인위적인 마음이 아니라, 본원에 입각한 마음이다.
이렇게 이 마음은 본래 모든 분별을 뛰어 넘는 一心 眞如의 경계인데, 분별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 앞에 수만 가지 경계와 대상들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마음이 생기면 여러 가지 법이 생기지만, 마음이 멸하면 곧 바로 법도 멸하는 것이다. 마조는 마음과 법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다.
"一切法이 모두 心法이다. 일체의 이름 또한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실로 모든 법이 마음으로부터 생겨남이니, 마음이야말로 法의 근본이 된다. … 각양각색의 모든 존재는 一心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다."48)
48) 『四家語錄』 ?江西馬祖禪師語錄?(합천: 藏經閣, 부록 12면).
“一切法皆是心法 一切名皆是心名 萬法皆從心生 心爲萬法之根本 … 種種成立 皆由一心也”
어떤 현상이란 내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경계가 나타난 것이다. 마조의 3세 黃檗(?~856)도 ?傳心法要?에서 “대상이 없는데, 어찌 작용할 觀照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49) 또한 이어서 “일체의 모든 법은 모두 마음으로 인해 짓게 되며 사람·天·지옥 등 육도가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아 짓는 것이다.”라고 하였다.50) 곧 모든 현상이란 마음이 만들어 내었다고 하는 三界唯心이 강조되고 있다.
49) 『傳心法要』(『大正藏』48, 383b). “若是無物 更何用照”
50) 『宛陵錄』(『大正藏』 48, 386b). “一切諸法皆由心造 乃至人天地獄 六道修羅 盡由心造”
그런데 마조는 현상이란 마음에 의해 일시적으로 드러난 것이므로, 自性이 없는 空임을 설하고 있다. 그때그때 시간과 장소라는 조건 속에서 나타나는 대상에 각기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곧 인연에 의해 생겨났으니 서로 그 인연에 장애가 없으며 이미 생겨났다고해도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 마음은 본래부터 있어왔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살펴본대로 마조가 설하는 心地法門은 본래 具足된 自性이므로 善·惡의 대상에 끄달리지 말아야 하며, 본래 청정한 佛心이기 때문에 밖으로 치달려 道를 구하고자 하면 오히려 멀어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본래 구족된 淸淨心이란 바로 차별심이나 분별심 없는 경지인 平常心인 것이다.
平常心이 道라는 사상은 조사선을 대표하는 문구로서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언제 어디서나 자기 본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각적인 삶을 영위하는 살아 있는 지혜이다. 마조이후 조사선을 완성시킨 五家의 선사들이 한결같이 계승·발전시켰으며 조사선 전개에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선사상이다.
마조는 平常心是道로 제자들의 心印을 깨우쳤고, 후대 선종사에서도 평상심이 마조 사상으로 인식되어졌지만, 마조의 독창적인 설은 아니다. 그는 『열반경』의 佛性思想, 『능가경』의 心地思想, 『유마경』의 直心是道場, 『화엄경』의 性起思想 등을 수용해 그의 心性觀을 정립하였다.
『傳燈錄』 卷28에 실린 마조의 示衆을 통해 平常心의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道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더러움에 汚染되지 않도록 하라. 무엇이 汚染인가?
다만 生死心을 염두에 두고 造作하여 취하려는 것이 모두 汚染이다.
만약 곧 道를 알고자 한다면, 平常心이 바로 道인줄 알라.
平常心이란 어떤 것인가? 造作, 是·非, 取·捨가 없고 斷滅·常住가 없으며 凡夫라 할 것도 없고 聖人이라 할 것도 없느니라."51)
51) 『景德傳燈錄』卷28 ?馬祖章?(『大正藏』 51, 440a).
“道不用修 但莫汚染 何爲汚染
但有生死心 造作趣向 皆是汚染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
何謂平常心 無造作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無聖”
이 示衆은 마조선의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시중에서 살펴 본대로, 평상심은 인간의 평범한 그 마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성이 청정하고 본래 구족되어 있는 마음인 것이다. 즉 단순한 평상시의 마음이 아니라 是·非, 造作, 斷滅·常住, 善·惡, 美·醜라고 하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 마음이 아니며, 깨닫지 못한 범부라고 할 것도 없고 깨달은 성현이라고 할 것조차 없는 그 마음을 지칭한다. 따라서 평상심, 그 자체가 곧 부처[卽心是佛]이므로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道不用修]라고 한다.
마조가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본래 자성이 청정하고 구족되어 있는 불성[平常心]이며 다시 새롭게 수행을 완성시킬 필요가 없으므로,
"道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오염시키지 말아야 한다. 生死心을 내고 조작하여 취하려고 하는 마음이 모두 오염인 것이다.52)
52) 『傳燈錄』 卷28 ?馬祖章?(『大正藏』51, 440a). “道不用修 但莫汚染 何爲汚染 但有生死心造作趣向皆是汚染”
라고 하였다. 곧 마조가 말하는 평상심은 本覺사상에 입각한 자성 청정한 마음이요, 닦아서 부처를 이루는 것이 아닌 깨달은 상태의 頓悟에 입각한 마음이다. 곧 자성이 본래 구족되어 있으므로 분별심이나 조작하는 마음만 없다면 그 자체가 도가 닦아져 있는 것이요, 本源 淸淨한 마음이기 때문에 道不用修라고 한 것이다.
黃檗은 『傳心法要』에서 “몰록 지금 자기 마음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頓悟하면 一法도 얻을 것이 없으며 조금도 닦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53)
53) 『傳心法要』(『大正藏』48, 381a). “唯直下 頓了自心 本來是佛 無一法可得 無一行可修”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해야할 것은, 도를 닦지도 말고 좌선을 하지도 말라고 해서 證悟할 佛性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성불로 無生法忍을 갖추고 있으므로 다만 오염시키지 말라는 끊임없는 실천사상이 담겨 있다. 이 오염이란 바로 造作하고 取捨選擇하는 인위적인 분별심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곧 오염시키지 않는 것이 바로 道不用修인 것이다.
이와 같이 마조는 본래부터 인간 그 누구라도 구족하고 있는 자성청정이라는 철저한 本來心의 자각을 견지하고 있다. 마조의 평상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臨濟(?~867)는 평상심에 입각한 사람을 無事人이라고 하였다.
"無事하게 사는 사람이 貴人이다. 다만 조작하지 말고 오직 平常이라."54)
54) 『鎭州臨濟禪師語錄』(『大正藏』47, 497c). “無事是貴人 但莫造作 祗是平常”
是·非, 조작이 없는 平常의 무사인은 어디에도 걸림없는 대자유인이다. 임제는 平常無事의 삶을 사는 사람을 祖佛, 혹은 活祖라고 하였다.
또한 마조의 平常心은 龐居士나 大珠慧海 등 많은 제자들이 일상 속에 도를 추구하는 선을 전개하였고, 이런 일상에서의 선수행 전개는 교단사적으로 百丈의 淸規를 정립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였다.
마지막으로 卽心是佛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卽心是佛은 平常心是道와 함께 馬祖禪의 중요 사상으로서, 조사선의 실질적인 기반이 된 선사상이다. 즉심시불이라는 語句가 사용되어진 대표적인 예가 『宗鏡錄』 卷1이다.
"『능가경』에 설하기를 “부처가 말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 無門을 法門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무슨 뜻으로 부처가 말한 마음을 근본[宗]이라고 하는가? 부처가 말한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이 곧 부처임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것도 곧 이 마음이 말하는 것이다.55)
55) 『宗鏡錄』 卷1(『大正藏』 48, 418b).
“楞伽經云 佛語心爲宗 無門爲法門 何故佛語心爲宗 佛語心者 卽心卽佛 今語卽是心語”
마조에게는 ‘자기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이 모든 것에 先行하고 있다. 無門을 法門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本性이 공함을 了達하면 一法도 있는 것이 아니라 自性 스스로가 門이기 때문에 어떤 방편수단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불교학자 汾州無業(762~823)과 마조와의 대화중 卽心是佛을 상징하는 문답이 다음과 같다.
"분주무업이 물었다.
“三乘의 文學은 거의 그 뜻을 알았습니다만, 항상 禪門에서 卽心是佛이라고 설하는 뜻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자네가 지금 알지 못한다고 하는 그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56)
56) 『景德傳燈錄』卷8 ?汾州章?(『大正藏』 51, 257a).
“問曰 三乘文學?窮其旨 常聞禪門卽心是佛 實未能了
馬祖曰 只未了底心卽是 更無別物”
마조는 ‘알지 못한다고 하는 그 미혹한 마음’이 곧 부처라고 설하고있다. 알지 못하는 그곳이 이미 깨달아 있는 부처이니, 본래의 그 마음을 떠나서 道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마음을 여의고서 부처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조는 이에 자주 “밖에서 馳求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이다.
黃檗도 『宛陵錄』에서 “…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지금 그대들이 말하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그대들의 마음이다.”라고 하였다.57)
57) 『宛陵錄』(『大正藏』 48, 386b). “云何識自心 卽如今言語者正是汝心”
바로 『유마경』에서 말하는 生死卽涅槃, 煩惱卽菩提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손을 편 손바닥이 부처요, 주먹이 중생이라고 한다면 손(=心)이라는 마음자리에 부처와 중생, 번뇌와 보리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손바닥과 주먹이 하나이듯이 결국 본인의 마음자리에 부처와 중생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며 번뇌와 보리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앞의 분주무업과 마조의 말을 정리해 보면 未了底心이 곧 卽心으로, 이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卽心是佛]인 것이다. 달마가 혜가에게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서 安心을 설한 것이나 마조가 제자에게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마음, 그것이 부처’라고 표현한 것이 결국 卽心是佛로 귀결된다.
또 大珠慧海가 마조에게 찾아와 “佛法을 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하자, 마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찌하여 너의 보물창고를 집에 놔두고, 쓸데없이 돌아다니기만 하는가?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불법 따위는 찾아서 무얼 하겠느냐?”
혜해가 절을 올리고 다시 물었다.
“제 보물 창고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지금 묻고 있는 자네가 바로 그 보물 창고이네.”58)
58) 『景德傳燈錄』卷6 ?大珠慧海?(『大正藏』 51, 246c).
“祖曰 來此擬須何事 曰 來求佛法
祖曰 自家寶藏不顧 抛家散走作汁? 我這裏一物也無 求甚? 佛法
師逐禮拜 問曰
阿那箇是慧海自家寶藏
祖曰 卽今問我者 是汝寶藏”
여기서도 ‘보물 창고’란 바로 부처를 품고 있는 卽心의 의미와 같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마조가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즉심시불이라고 하지 않지만, 마조의 가르침은 곧 즉심시불의 어구를 함축하고 있다. 즉,
각자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라고 믿는 이 마음이 부처이다[各信自心是佛 此心卽佛],
다만 지금 말하는 것이 너의 마음이다[但今語言卽是汝心],
지금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마음 그것이 부처 자리다[未了底心卽是],
그렇게 묻고 있는 자네가 보물 창고다[卽今問我者 是汝寶藏]라고 다양하게 표현한 것 등이다.
그러나 마조가 설하는 卽心是佛이라고 하는 것도 어떤 定說이 아닌 방편설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전등록? 卷6에서 非心非佛, 不是物이라고 하였다.
"어느 승려가 물었다.
“和尙께서는 어찌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고 설하십니까?”
“어린 아기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다.”
“울음을 그치면 어떻게 합니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에게는 ‘물건도 아니다’라고 하겠다.”
“바로 그런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에게 大道를 손에 쥐어 주도록 하겠다.”59)
59) 『景德傳燈錄』卷6 ?馬祖章?(『大正藏』51, 246a).
“僧問 和尙爲什?說卽心卽佛
師云 爲止小兒啼
僧云 啼止時如何
師云 非心非佛
僧云 除此二種 人來如何指示
師云 向伊道不是物
僧云 忽遇其中人來時如何
師云 且敎伊體會大道”
방편의 이 비유를 黃葉止啼錢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枯葉을 반짝거리게 해서 황금이라고 속이는 것이다. 맨주먹을 보이며 좋은 것을 주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울음을 그친 아이에게는 황엽의 지제전은 필요없다. 마조는 또 그런 사람을 위해 非心非佛이라고 설하고, 또 이것마저 필요없는 사람에게 不是物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즉심시불에 대해 설하고 있듯이 마조는 그것을 교조화하거나 기록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 마조가 즉심시불이라고 설한 본 의도는 수많은 제자들의 開悟의 機緣에 보여진 日常語일 뿐이요, 隨時의 방편설이기 때문이다.
3. 조사선의 修證論
마조의 선사상은 지금 여기의 일상 속에서 마음을 강조한다. 움직이고 활동하는 모든 현상이 모두 마음의 활동이요, 著衣喫飯하는 일상사의 마음은 곧 부처의 행위인 것이다. 즉 일상 속에서 平常心을 유지한다면 그대로가 부처의 경지요, 현실적인 일상생활 그 자체가 부처의 行이라는 것이다.
"일체중생은 오랜 옛적부터 法性三昧를 벗어난 적이 없다. 항상 법성 삼매 가운데 오래 머물면서 옷 입고 밥 먹으며 이런 말 저런 말을 하기도 한다. “六根의 작용이나 모든 행위가 다 이 法性이다.”60)
60) 『四家語錄』 ?江西馬祖禪師語錄?(합천: 藏經閣, 부록 10면).
“一切衆生 從無量劫來 不出法性三昧 長在法性三昧中 着衣喫飯 言談祇對 六根運用 一切施爲 盡是法性”
日常事, 그 자체를 法性으로 보는 것은 마조의 한결같은 自性의 본래 具足에 입각한 것이다. 마조는 일상사 그 자체를 바로 법성으로 인정하는 바탕에서 설하고 있다. 곧 이 법성이란 바로 평상심이요, 불성이다.
보고 듣고 말하며 생각하는 모든 행위가 佛性의 작용인 것이다. 圭峰宗密(780~841)은 『都序』에서 마조의 불성 작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리고 있다.
"지금 말하고, 움직이며, 탐내고, 성내며 혹은 사랑하고 참으며, 善惡을 만들고, 苦樂을 받는 것 등이 곧 그대의 佛性이요, 곧 이 본래의 부처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또 다른 부처가 없다."61)
61) 『禪源諸詮集都序』(『大正藏』 48, 402c).
“卽今能語言動 作貪嗔慈忍造善惡 受苦樂等 卽汝佛性 卽此本來是佛 除此無別佛也”
종밀은 홍주종의 禪을 지금 우리들이 말하고 행동하며 생각하는 모든 行爲가 다 佛性의 全體作用이라고 정의하였다.62) 作用卽性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佛)性은 곧 (佛)心을 말한다. 마조가 말하는 心은 衆生心의 전체가 부처이며 그 이외에 또 다른 부처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고 움직이며 밥 먹고 일하는 일상적인 평상시의 마음이 곧 부처이며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자체가 道이므로 굳이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닦을 것이 없으므로 증득할 것조차 없다고 하는 것이다.[無修無證]
62) 종밀은 『禪門師資承襲圖』에 馬祖系의 禪宗을 ‘洪州宗’이라고 부르고 있다.이는 마조가 주로 활약했던 洪州지역의 이름을 따서 ‘홍주종’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하였지만, 마조계를 卑下한 의미가 담겨 있다. 종밀은 知之一字 衆妙之門이라는 絶對知를 수립하였으며 종밀의 수행체계는 頓悟漸修이다.
作用卽性은 작용하는 가운데 性이 있다는 것, 즉 구체적인 현실 생활 속에서 불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用이 작용하는 가운데 ?가 포함되는 것이지, ?속에 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불성의 작용가운데 체를 포함시켜 작용하는 의미를 중시하고 있다.[체<용]
반면 神會(684~758)의 南宗은 ?인 見性사상을 강조해 用보다는 ?에 중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체>용] 이것은 何澤宗의 5세인 종밀에게서도 나타난다. 모든 행위를 見聞覺知라고 한다면, 종밀이 주장하는 知之一字 衆妙之門의 ‘知’는 모든 행위인 견문각지의 知가 아니라 그것의 根底에서 견문각지를 견문각지답게 하는 원리적인 知이다.
그런데 마조계에서는 보고 듣고 말하며 행동하는 인간의 행위 하나 하나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그 행위 뒤에 숨어서 행위하게 만드는 원리적인 무엇이 아니라,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되 그 행위 자취에 머물지 않는 자주성에 의미를 부여한다. 즉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되, 결코 그 행위에 머물지 않는 無心이요, 無住인 것이다. 황벽은 무심에 대해 “항하강의 모래는 善人이 지나갈지라도 기뻐하지 않고, 소·양이 지나가도 화내지 않으며 진귀한 보배도 탐내지 않는 이런 마음이 무심이다.”라고 하였다.63)
63) 『傳心法要』(『大正藏』 48, 380a-b).
항하의 모래일지라도 각각이 그다운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法界를 벗어나지 않으며 견문각지 하나하나의 움직임이지만, 이들은 본 자성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닦을 것조차 없는 부처된 상태에서 하는 見聞覺知인 것이다. 곧 無住요, 無心은 작용에 있어 그 의미를 발휘한다. 이에 대해 마조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대들이 그때그때 던지는 말 가운데서도 대상 그 자체는 항상 그대로 진리인 것이다. … 이러한 도리를 깨달으면, 때에 따라 옷을 입기도하고, 밥을 먹기도 하며, 성인이 될 소질을 계속 키워 나가면서 흘러 가는대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64)
64) 『四家語錄』 ?江西馬祖禪師語錄?(합천: 藏經閣, 부록 8면).
“汝但隨時言說 卽事卽理 都無所碍 菩提道果 亦復如是 … 若了此意 乃可隨時 著衣喫飯 長養聖胎 任運過時 更有何事”
즉 보고 듣고 말하며 움직이는 모든 일상적인 생활에서 道를 行한다고 하는 것은 평상심 그대로의 발현이요, 本來心의 작용이며, 불성의 전체작용인 作用卽性이다. 이 작용은 일상사의 日用을 말한다. 이는 어떤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佛心의 전체 작용이요, 妙用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無心의 경지에서 나온 日用이다.
현 삶의 우리의 존재 방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방식 그대로가 바로 진실[立處卽眞]이기 때문에 마조는 때에 따라서 어디에서든 늘 진실 그대로[隨處任眞]라고 하였고, 또 현실에 즉한 그대로가 참됨[卽事而眞]이라고 하였다.
臨濟(?~867)도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진리의 땅이 되게 하라[隨處作住 立處皆眞]’고 하였다. 즉 자신의 존재가치를 결정해 가면서도 현실 그대로에 적응하면서 그 자리에서 느끼는 진실된 자각이 自由라는 것이다. 이렇게 隨處作住의 삶을 사는 사람을 無事人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마조계의 修證觀을 살펴보았는데, 재정리하면서 이 장을 마무리해보자.
첫째, 마조는 일상 속에서 견문각지하는 작용 그 자체가 바로 불성의 작용임을 강조한다. 그 작용이란 어떤 구애됨이 없는 無心·無住·無事의 경지에서 작용하는 妙用이다.
둘째, 일상적인 평상시의 마음이 곧 부처이므로 굳이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조사선은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몰록 자각하는 頓悟이면서 수행을 假藉하지 않는 頓修임을 알 수 있다.
셋째, 과거·미래가 아닌 현재 지금 여기[卽今]에서 자신의 불성을 자각하는 일이다.
Ⅳ. 祖師禪의 특질 및 전개
馬祖를 조사선의 선구자라고 하는 것도 그의 이름에서 드러난다. 그의 전기의 독특한 독자성은 그가 죽는 날까지 그의 속성인 馬氏라고 불리었는데, 마씨의 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마조라고 한 것은 새로운 시대의 禪의 조사로 어울리는 사람이다.
예로부터 俗姓으로써 한 종파의 조사를 부른 예가 있었는데, 화엄종의 祖師인 杜順(557~640)이나 傅大士(497~569), 신라의 金和尙(無相,684~762)과 같은 사람도 똑같은 경우이지만, 마조라고 하는 호칭은 역시 이 派가 지니고 있는 선의 성격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65)
65) 『(講座)禪, 禪の歷史-中國』(일본: 筑摩書房, 1967), 60면.
선종의 역사는 不動의 역사가 아니라, 끊임없는 動의 역사요, 후대의 요청이 가미된 역사이다. 당시 神秀(606~706)가 五祖弘忍(601~674)의 법을 이은 정통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神會(684~758)의 6조현창운동으로
인해 慧能을 6조로 받들면서 신수의 선을 방계인 北宗이라 불렀고, 혜능의 법을 이은 자신은 7조라고 하면서 南宗이라 자처했다. 즉 선종의 역사가 신회로 인해 흐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신회 입적후, 신회가 예상치 못했던 傍系라고 할 수 있는 南嶽과 靑原系로 선종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이에 예상치 못한 선종의 역사는 바로 動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남악회양은 당시 山居 수행자였는데, 마조라는 걸출한 제자를 배출함으로서 조사선의 역사는 마조계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조사선의 특질 및 전개 또한 마조계의 활동 및 선종의 교단체계를 중심으로 살펴 본다.
첫째, 禪의 嗣法者가 많다는 사실이다.
達摩이후 六祖慧能에 이르기까지 한 스승이 한 제자만을 선택한 一代一人의 付囑이었다. 중국 초기 선종의 선사들에게서 많은 傳燈史書가 편찬되었는데, 杜?의 『傳法寶記』, 淨覺의 『楞伽師資記』, 無住의 『歷代法寶記』등 여러 傳燈史書에 자신의 법 계보를 세우며 자파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마조·석두 이후, 조사선 시대에는 한 스승이 여러 제자에게 法을 傳하는 一代 多人의 付囑時代가 되었다. 수행자는 구도를 위해 깨달은 스승을 찾아 다녔고, 스승도 오로지 제자들을 깨우치는데 역점을 두었다. 마조 문하의 특기할 만한 사항은 마조계의 수많은 제자들의 기록이 후대에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66)
66) 마조의 제자는 기록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祖堂集』 ?馬祖道一章?에는 “마조에게 친히 法을 계승한 제자가 88명, 제자들 가운데 세상에 드러나 활동하거나 혹은 은둔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숫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세상에 머무르며 교화한 40여 년 동안 따르는 제자가 千餘 大衆이 된다.”(『高麗大藏經』 45, 321c)고 하였다. 또 『傳燈錄』에는 “入室제자가 139명인데, 그들은 제각기 한 지방의 宗主로서 교화를 펼침이 무궁하였다.”(『大正藏』51, 246b)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天聖廣燈錄』에는 84人說(『天聖廣燈錄』卷8 ?百丈章?(『卍續藏經』135, 328c), 『祖堂集』卷16 黃檗의 설법에도 “馬祖의 門下에 88人이 있었다.”(『高麗大藏經』 45, 326a), 『宋高僧傳』 ?南泉章?에는 “大寂의 門下가 800여명”(『大正藏』 51, 775a)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마조 당시의 선사들은 자신에게 찾아온 제자일지라도, 자신과 緣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서로 다른 선사들에게 보냄으로써 제자들의 心印을 깨우치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런 스승들이 있었기에 心印을 얻은 수행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이 선승들로 인해 五家 七宗이 일어나는 조사선 禪風이 풍미하던 시대가 초래되었다. 五家는 마조계 법손으로부터 제일 먼저 종풍을 세우는 ?仰宗이 성립된 후 이어서 臨濟宗, 그리고 석두계에서 曹洞宗과 雲門宗·法眼宗이 성립되었다. 또한 임제종계에서 黃龍派와 楊岐派로 나뉘어졌다.
둘째, 조사선 시대의 선지식들은 어떤 특수한 問答이나 喝·棒 등을 사용함으로 禪機의 시대가 열렸다. 즉 그때그때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자유 자재로운 大機大用의 방편이 활용되었다. 마조의 어떤 설법이나 행동은 제자들의 도를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런 방편의 활용을 仰山(807~883)은 雜貨鋪라고 하였는데, 곧 마조의 黃葉止啼라는 가르침에서 구체성이 드러난다. 『앙산어록』에 의하면, 앙산은 “石頭(700~791) 和尙이 순수하게 금만을 파는 眞金鋪라면 나 앙산은 雜貨鋪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방편법문을 잡화포라고 비유하며 마조와 같은 차원에 두고 있다.67) 어떤 물건이든 다 파는 잡화포라는 말은 제자들의 근기에 맞추어 제자를 지도한다는 뜻이다. 마조의 다양한 접화방법이 후대에 공안으로 형성되는 기원이 되었다.
67) 『祖堂集』卷18 ?仰山章?(『高麗大藏經』 45, 345c). “石頭是眞金鋪 我者裏是雜貨鋪”
조사선 시대에 스승이 제자를 제접하는 禪機의 활용에 대해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크게 언어적인 측면과 행위, 몸의 동작, 어떤 집기를 이용하는 것 등 크게 세 방향으로 나눌 수 있다.
(1) 언어적 표현이다.
① 스승과 제자와의 일상적인 대화(問答商量)에서 스승이 제자를 깨우치게 하고자 말했던 語句, 즉 후대에 이를 禪問答이라고 한다.
② 悟道頌·偈頌·涅槃頌 등을 詩的으로 표현,
③ 방장이나 사찰의 주지가 법상에 올라가 대중들에게 설한 上堂說法이나 示衆法門한 강의식 표현,
④ 良久(아무 말도 하지 않음),
⑤ 喝 등이다.
(2) 몸의 동작이나 행위에 의한 것이다.
① 拳(주먹을 쥐는 것),
② 打着(사람의 몸을 손으로 치는 것,
③ 打?(후려갈기는 것),
④ 把鼻(코를 잡는 것),
⑤ 吹耳(귀에 대고 소곤대는 것),
⑥ 展手(손바닥을 펴는 것),
⑦ 拍手(손뼉 치는 것),
⑧ 吐舌(혀를 내미는 것),
⑨ 竪指(손가락을 세움),
⑩ 斷指(손가락을 자르는 것),
⑪ 彈指(손가락을 튕기는 것),
⑫ 擬勢(어떤 형태를 취하는 것),
⑬ 作舞 등이다.
(3) 주변에 있는 사물·불상·경전·동물·주장자 등을 사용하거나 그 외에 집기를 사용하는 일이다.
① 棒,
② 斬猫,
③ ?狀(평상을 뒤집어엎음),
④ 敲柱,
⑤ 斬蛇,
⑥ 焚經,
⑦ 焚佛,
⑧ 拂子 등이다.
이와 같이 스승이 제자를 제접하는데 다양한 방법[機緣]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선문답이나 喝·棒·拂·拳 등이 조사선 시대에 적극 활용되었다. 마조이후 棒을 활용했던 대표적인 선사가 德山宣鑑(782~865)이며, 喝에는 임제, 손가락을 들어보였던 天龍과 俱?선사가 있다.68)
68) 『祖堂集』 ?俱?和尙章?에 의하면 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을 하나 세워보인 俱? 선사가 天龍의 제자이다. 천용이 처음으로 암자에 주할 때였다.實際 비구니가 찾아와 삿갓 쓰고 지팡이를 들고 구지선사의 선상을 세 바퀴 돌고는 주장자를 우뚝 선사 앞에 세우고 말했다.
‘화상이여! 한 마디 이를 수 있다면 삿갓을 벗지 않겠소.’라고 했으나 구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지는 탄식을 하고 지낸지 열흘 뒤 천룡화상이 와서 그에게 예를 표하자, 천룡화상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여, 구지가 깨닫게 되었다. 이에 실제 비구니는 구지선사를 발심케 한 장본인으로도 선가에 회자되고 있다. 天龍은 마조의 제자인 大梅法常의 제자이며, 실제비구니는 마조에게서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다.
셋째, 語錄의 발생이다. 어록이 만들어지면서 선사상은 인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 점이 조사선의 특질 가운데 가장 주목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선사가 법상에 올라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는데, 이를 上堂說法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승려들의 朝參이나 晩參에 제자들에게 示衆을 하거나, 문답을 통해 상대의 견지를 탐사하는 勘辨등을 한다. 대체로 이런 상당설법이나 示衆, 勘辨 등이 語錄으로 엮어졌고, 어록의 내용이 공안으로 변형되어 看話禪이 형성되는 근원이 된 셈이다.
어록이란 상당설법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간의 일상적인 대화와 행동도 포함되는데, 스승이 제자를 깨우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어록은 본인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제 3자가 기록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어록은 인간과 인간과의 대화이며, 이 인간과의 대화는 선을 일상생활의 종교화로 만든 중요요인이 되었다. 이 어록의 발생으로 인해 경론을 중시하는 인도적인 색채를 완전히 벗어나 중국 특유의 선종이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록은 마조가 활동하던 시기이후 그 문하들에게서 크게 발전했다.
이전에도 달마의 『二入四行論』이나 홍인의 『守心要論』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은 경전의 훈고주석을 대신하는 말이었고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큰 의미였다. 따라서 이들은 경전의 권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조사선시대는 완전히 다르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말이 존중되고, 경전의 인용까지도 또한 인간의 말이었다. 경전의 권위보다는 그 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을 문제 삼았다. 홍주종의 사람들은 어록을 많이 남겼다. 즉 百丈, 南泉, 龐居士, 大珠慧海, 大梅法常 등이다.69)
69) 柳田聖山, ?馬祖禪の諸問題?, 印度佛敎學硏究 17(일본: 印度佛敎學硏究會,昭和44), 37-38면.
한편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선사들이 경전 인용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경전 인용이 점차 줄어들었다. 또 어록이 등장하면서부터 중국에서는 僞經이 사라지는 현상이 있었다. 즉 부처의 이름을 빌려 거짓으로 쓰여진 것보다 살아 있는 조사들의 절절한 말씀이 환대를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발달한 어록이 점차 후대로 가면서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어쨌든 송나라 시대로 접어들어 어록의 내용이 공안으로 변형되어 看話禪이 형성되는 근원이 된 셈이다. 看話禪은 이전의 경전과 선문답을 기록한 어록에서 정법안장을 터득하는 방편으로 공안을 채용하여 그 공안을 투득하는데 중점을 둔 수행이 되었다.70)
70) 법안종의 承天道原선사가 1004년에 『景德傳燈錄』卷30을 완성시켰다는데, 여기에는 선사들의 機緣과 문답이 총정리 되어 있다. 이후 分陽善昭(947∼1024)가 ?300칙의 頌古?를 만들었고, 이어서 雪竇(980∼1052)스님이 ?雪竇頌古 100칙?을 완성시켰다.
‘頌古’란 말 그대로 옛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한 機緣들에 대해 운문체로 게송이나 頌으로서 간결하게 독자적인 해석한 것을 말한다. 또한 拈古란 古則 公案을 拈弄한 것으로, 간명직절하게 고칙 공안을 비평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점차 독자적인 해석을 붙이자, 수행자들을 지도하는 이른바 ‘評唱’이라는 강의 형태가 생긴다.
이때 생겨난 것이 圓悟克勤(1063∼1135)의 『碧巖錄』이다. 그런데 원오의 제자였던 대혜종고(1089∼1163)는 당시 수행자들이 『벽암록』의 문구에 빠져 수행은 하지 않고 미사여구만을 지어내는 것을 걱정하고, 『벽암록』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간화선은 송대 이후 수행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넷째, 淸規 확립으로 인한 선종의 독립과 일상성의 종교화로 전환되었다. 청규는 淸淨 大海衆의 ‘淸’ 글자와 승려가 지켜야할 規矩準繩의 ‘規’ 글자를 따서 淸規라고 하였다. 즉 선종이 율원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선종교단 자체 내에서 필요했던 조직적인 규칙들을 체계화하여 성문화시킨 규칙이다. 백장이 처음 제정한 청규는 산실되어 원래 그대로는 아니다. 오늘날『景德傳燈錄』卷6 ?百丈懷海章?에 楊文公(974~1020)이 정리한 ?禪門規式?을 통해서 처음 제정했을 때의 청규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또한 宋代 宗?이 모은『禪苑淸規』를 통해서도 古淸規의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傳燈錄』에 실린 ?禪門規式?을 통해서 청규에 대해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德있는 스승을 長老로 삼아 方丈에 거주케 하고 유마거사의 방과 같이 할 것이요, 개인의 침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佛殿을 세우지 않고 法堂만을 세워, 生佛로 추대된 장로로 하여금 법당에서 법을 설하게 한다. 법당이라는 명칭은 인도에서부터 있었지만, 중국 선종은 독특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또한 入堂하여 법랍의 차례에 따라 앉고, 긴 평상과 선방을 설치하여 도구를 걸어두며 누울 때는 반드시 평상에 비스듬히 기댄다.”71)
71) 『景德傳燈錄』 卷6 ?百丈章?(『大正藏』51, 251a).
또한 그 외 『四家語錄』 ?百丈錄?에 의하면, 모든 대중이 평등하게 작업하는 普請法이나 齋粥, 禪苑의 특유한 僧堂안에서 생활양식의 모든 규범과 의식·절차를 제정한 것에 대해 거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앞에서 살펴본대로 청규제정으로 인해 선종의 승려들이 율원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유로이 수행할 수 있었고, 또한 대중이 평등하게 노동하는 普請法으로 인해 노동과 선을 하나로 보는 일상성의 선이 확립되었다.72) 자급자족의 생활에서 형이상학적 신통방술이 아닌 일상성의 종교로 변화한 조사선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요, 중국선의 획기전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72) 백장의 청규 제정 이전에도 중국 선사들이 수행하면서 노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五祖弘忍이 밤에는 좌선에 힘쓰고 낮에는 노동에 힘쓰며 사람들에게 공양한 일이라든가, 牛頭法融이 300명이나 되는 제자를 위해 매일 80리길을 통해 한섬 여덟되의 쌀을 운반한 사실도 있다. 또한 6조혜능이 행자 시절 8개월간 디딜방아를 찧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백장의 청규로 인해 노동하는 일이 수행의 한 차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다섯째, 『寶林傳』의 성립이다. 『보림전』卷10은 801년 智炬에 의해 찬술되었으며 당시 세상에 유행했던 전설도 모았다. 또한 그 당시 선종에서 수행자들의 이상을 달마의 전기에 가탁해서 표현했다. 따라서 적어도 그 시대 선사상이나 선종의 이상을 『보림전』에 표현한 것으로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73) 청규와 『보림전』의 성립은 서로 잘 어울려서 선종이 한 종파로서 거의 완전하게 독립하고 또 대성했음을 보여준다.74)
73) 『寶林傳』의 원제는『大唐韶州雙峰山曹溪寶林傳』이다. 오늘날 『寶林傳』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1939년 중국의 山西省의 越城縣 廣勝寺 襲藏의 金版大藏經에 포함되어 있던 卷1~5와 卷8의 여섯 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또 1932년 일본의 常盤大定이 京都 靑蓮院에 소장되어 있는 일본의 古寫本에서 卷6의 한 권을 발견하였다. 현재 7卷이 발견된 상태이며 아직 卷7·9·10, 3卷은 발견되지 않았다.
74) 關口眞大, 『禪宗思想史』(일본: 山喜房佛書林, 昭和39年), 214-215면.
『보림전』에는 西天 28祖, 東土 6祖를 거쳐 달마에서부터 혜능에게 전해진 付法傳燈說을 세웠다. 선종사에서 28祖說이 최초로 주장된 책이다. 이후 선종 계열의 책에서 그대로 답습되어졌다. 寶林은 혜능이 머물던 영남지역을 말한다. 이 六祖慧能 門下의 南岳懷讓 - 馬祖에게 28조의 법이 바르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또한 달마의 스승 27조 반야다라가 중국 선종에 대해 예언한 讖偈가 있는데, 이 가운데 남악과 마조의 활약을 노래하고 있다.75)
75) 『四家語錄』 ?江西馬祖禪師語錄?(합천: 藏經閣, 부록5면),
“初六祖謂讓和尙云 西天般若多羅讖 汝足下出一馬駒 殺天下人”라는 언구가 있다.
즉 6조 혜능스님이 회양에게 말씀하기를 “인도 반야다라존자가 예언하기를 ‘그대의 발 아래에서 말 한 마리가 나와서는 天下 사람들을 발길질로 차 죽이리라'라고 하셨느니라.” 여기서 말 한 마리란 馬祖를 가리킨다.
이 『보림전』의 성립과 더불어 마조선의 선종 교단을 재정립·발전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는 以心傳心·敎外別傳이라고 하는 『보림전』은 종전의 책에서 正法眼藏이 전수되는 계보와 傳法偈를 첨가하였다. 또한 『四十二章經』전문을 실은 뒤, 『보림전』이 불타의 어록에 견줄 수 있다는 복선을 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사선이 전개된 특질에 대해서 禪의 嗣法者가 많아졌다는 점, 喝·棒 등 禪機의 활발한 시대가 열렸다는 점, 어록이 만들어진 점, 청규확립으로 인해 선종이 율원으로부터 독립, 노동을 함으로서 일상성의 종교화, 선종의 계보 및 역사를 확실히 한 『보림전』의 성립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조사선의 특질은 선종의 내적인 발전이기도 하지만, 외적으로는 당시 문인들의 시와 문학 속에 자유를 테제로 하는 선이 대중화되었고, 조사선의 心性은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宋明理學에 새로운 철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Ⅴ. 나오면서
선종이 융성했던 시기는 일반적으로 8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종이 융성했던 이 시기에 조사선의 선구자 마조와 마조계에 의해 발전한 선종은 곧 조사선의 시작이요, 조사선을 전개시킨 마조 문하에 의해 사회적·교단적으로 선종이 발전하였다. 곧 선종의 발전은 선의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고, 이 변화가 곧 조사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논자는 조사선의 의의 및 禪法, 조사선의 특징과 전개를 논문 구성으로 삼았다. 조사선 성립소고를 통해 논자가 제시하고자 한 점을 정리해보고, 裏面에 담긴 몇 가지를 재고해 본다.
첫째, 논의 구성이 조사선을 중심으로 하지만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니 나누면서 어떤 것이 최상승선이라는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초의선사는 “여래선과 조사선은 禪法은 같으나 다만 傳法이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고, 대혜종고도 여래선과 조사선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여래선이라는 시대가 있었기에 조사선이 형성될 수 있었다. 조사선은 禪宗史上 禪이 진일보하는 하나의 과정이요, 조사선으로 인해 古今의 많은 수행자가 해탈로 나아갈 수 있는 방편이 되었음에 큰 의의를 둔다.
둘째, 조사선은 이전의 인도선정에서 탈피하여 중국의 노장사상이 가미된 선사상으로 인간 본연을 중시하는 종교의 목적에 부합한 禪이라고 생각한다. 즉 조사선은 과거·미래가 아닌 현재 卽今에서의 불성을 자각하는 일을 중시함이요, 현 인간 삶인 모든 것이 本覺에 입각한 부처인 존재임을 강조하는 인간성 중시가 베어있다는 점이다.
셋째, 조사선은 무조건 경전을 배척한 敎外別傳 不立文字인 선이라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논자가 본문에서 밝혔듯이 조사선도 대승불교의 한 흐름으로, 조사선의 흐름 속에 佛性·不二·般若·唯心·性起 사상 등이 응축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간화선 시대에 선승들의 活句나 공안은 대승경전의 사상을 표면화하지는 않지만, 佛性·本性·一心에 대한 자각이 주를 이루고 있다.
현 한국불교 풍토는 敎보다는 禪을 중시한다. 경전을 보거나 교를 강조하면, 일종의 근기가 하열하거나 승려답지 못한 이미지로 보기도 한다. 진정한 捨敎入禪은 경전을 통달해 문구에 걸림없는 無心한 경지의 소유자요, 경전을 보지도 않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看經을 마친 無事人이라고 생각한다.
넷째, 조사선은 후대 간화선을 형성시킨 근원으로서, 이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담고 있다. 현 한국 불교는 조사선을 받아들여 이 체제로 수행하고 있으며 한국 불교의 구체화이다. 오래전에 서옹스님은 ‘참사람’ 운동해서 임제사상을 수용해 펼친 적이 있었다. 현 한국 불교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조사선의 근본정신을 되살려 한국적인 풍토가 깃든 선을 전개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고 본다.
<참고문헌>
1. 原典
『華嚴經』60卷, 大正藏 9
『華嚴經』80卷, 大正藏 10
『大般涅槃經』, 大正藏 12
『維摩詰所說經』, 大正藏 14
『無門關』, 大正藏 48
『禪源諸詮集都序』, 大正藏 48
『勅修百丈淸規』, 大正藏 48
『宗鏡錄』, 大正藏 48
『黃檗斷際禪師宛陵錄』, 大正藏 48
『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 大正藏 48
『宋高僧傳』, 大正藏 50
『續高僧傳』, 大正藏 50
『景德傳燈錄』, 大正藏 51
『祖堂集』, 高麗大藏經 45
『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 卍續藏經 110
『四家語錄』, 卍續藏經 119
『四家語錄』 ?江西馬祖禪師語錄?, 藏經閣, 禪林叢書 11
『四家語錄』 ??山靈祐禪師語錄?, 藏經閣, 禪林叢書 13
2. 單行本
불학연구소, 『看話禪-조계종 수행의 길-』, 서울: 조계종출판사, 2008, 1-431면.
원융, 『看話禪』, 서울: 藏經閣, 1999, 1-239면.
월암, 『看話正路』, 서울: 현대북스, 2006, 1-509면.
唯眞, 『禪學槪論』, 서울: 經書院, 2007, 1-112면.
宗浩, 『臨濟禪硏究』, 서울: 經書院, 1996, 1-612면.
定芸, 『求法』(中國禪宗寺刹探訪), 서울: 솔바람, 2007, 1-460면.
鄭性本, 『禪思想史』, 경주: 禪文化硏究所, 1993, 1-389면.
_______, 『中國禪宗의 成立史 硏究』, 서울: 民族社, 1991, 1-894면.
退翁 性徹 편역, 『馬祖錄·百丈錄』, 합천: 藏經閣, 1989, 1-178.
關口眞大, 『禪宗思想史』, 일본: 山喜房佛書林, 昭和 39, 1-217면.
石田瑞?, 『(講座)禪』(第三卷 禪の歷史), 일본: 筑摩書房, 1967, 1-183면.
柳田聖山, 『寶林傳』, 일본: 中文出版社, 1983, 1-250면.
_________, 『禪의 思想과 歷史』, 서울: 민족사, 1989, 1-266면.
_________, 김성환 譯, 『達摩』, 서울: 민족사, 1991, 1-273면.
_________, 徐景洙 譯, 『禪思想』,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1984, 1-177면.
入矢義高, 『馬祖の語錄』, 日本京都: 禪文化硏究所, 昭和59年, 1-227면.
董群 저, 김진무 역,『 祖師禪』, 서울: 운주사, 2000, 1-493면.
3. 論文
近藤良一, ?百丈淸規成立の要因?, 『印度哲學佛敎學』 2호, 日本: 北海道 印度哲學佛敎學會, 昭和62年, 231-246면.
西口芳男, ?馬祖の傳記?, 『禪學硏究』 63, 日本: 禪學硏究會, 1984, 111- 146면.
石川力山, ?馬祖禪の一側面?, 『宗學硏究』 13, 日本: 曹洞宗宗學硏究所, 昭和46년, 105-110면.
矢?仁, ?祖師禪於ける ‘祖’字の槪念について?, 『禪學硏究』 70, 日本: 禪學硏究會, 13-36면.
須山長治, ?馬祖道一の禪思想?, 『印度學佛敎學硏究』, 日本: 印度學佛敎 學硏究會, 1990, 205-208면.
鈴木哲雄, ?純禪と禪機?, 『印度學佛敎學硏究』 41-2, 日本: 印度學佛敎學硏究會, 541-545면.
柳田聖山, ?馬祖禪の諸問題?, 『印度學佛敎學硏究』 17, 日本: 印度學佛敎 學硏究會, 昭和44年, 33-41면.
_________, ?祖師禪の源と流?, 『印度學佛敎學硏究』, 日本: 印度學佛敎學 硏究會, 10-1, 82-87면.
李鍾益, ?祖師禪에 있어서의 無心思想?, 『佛敎學報』 10집, 서울: 불교문화연구원, 239-267면.
鄭茂煥, ?祖師禪について?, 『印度學佛敎學硏究』, 日本: 印度學佛敎學硏究會, 昭和60年, 287-290면.
中川孝, ?馬祖道一禪師の 禪法 ?, 『印度學佛敎學硏究』, 日本: 印度學佛敎學硏究會 13-1, 昭和40年, 266-270면.
논문투고일: 2009.3.1
심사완료일: 2009.3.9
게재확정일: 2009.6.25
'[佛敎] > 佛敎에關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禪家龜鑑 선가귀감 52 ~ 74 (0) | 2015.07.09 |
---|---|
禪家龜鑑 선가귀감 75 ~ 81. 발跋 (0) | 2015.07.09 |
[무문관] 공안에 나타난 유무상즉의 논리체계 (0) | 2015.07.07 |
관세음보살보문품 [영인스님 - 독경] / 법철스님 관음경 강의 (0) | 2015.07.07 |
참선수행과 선병(禪病)의 문제 (0) | 2015.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