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佛敎에關한 글

[무문관] 공안에 나타난 유무상즉의 논리체계

경호... 2015. 7. 7. 05:55

<무문관> 공안에 나타난 유무상즉의 논리체계

 

 

김석암(화랑) / 동국대 선학과

 

 

목 차

 

Ⅰ. 서론
 Ⅱ. ?무문관?공안의 요체
 Ⅲ. 유무와 상즉의 개념
 Ⅳ. ?무문관?公案의 논리체계
   1. 제 1칙 趙州狗子
   2. 제 3칙 俱?竪指
   3. 제 5칙 香嚴上樹
   4. 제 7칙 趙州洗鉢
   5. 제 10칙 淸稅孤貧
   6. 제 11칙 州勘庵主
   7. 제 14칙 南泉斬猫
 Ⅴ. 결론

 

 

국문 초록

 

조사선의 공안에서는 자신이 본래 갖고 있는 불성의 자각을 중시한다. 특히 조사들은 붓다가 깨닫고 달마 이래 모든 선각들이 깨달은 중도의 이치를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하여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직접 수행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려고 한다. 따라서 공안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안이 제시하는 바가 초논리적이며, 파격적인 성격을 강하게 느끼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깨달음을 여는 중요한 기제(機制)로 인식되는 공안 속에서 일정한 논리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논리를 초월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일정한 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700개의 수많은 조사들의 공안들이 있지만, 모든 공안의 요체는 중도의 그 자리를 보게 하는 데에 맞추어져 있으며, ‘中正’의 상즉관계에 계합하는 논리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무문관?에 나타난 공안을 중심으로 조사들의 有無에 相卽한 ‘中’과 ‘正’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그 論理體系를 밝힌다.

 

 

* 주제어

무문관의 논리체계, 유무상즉, 공안, 조사선, 중도

 

 

Ⅰ. 서론

 

선은 인도에서 발생하여 번뇌를 끊는 관법을 중심으로 체계화 되었으나, 520년 보리달마가 중국에 들어와 大乘壁觀을 전하면서 청정한 불성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중국의 선으로 발전한다. 인도의 선은 소승선에서 대승선으로 발전하면서 觀法과 所緣의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고,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행법을 중요시하게 된다. 이에 비해 중국의 선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청정한 불성에 대한 깨달음을 중시하여 이미 우리의 마음에 내재된 불성을 찾는 것에 주력한다.

 

특히 중국에서 완성된 조사선의 선사상은 수행의 대상에 의식을 집중하여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번뇌 망상을 끊어내는 것보다, 근원의 본래의 불성을 자각하여 현재의 이 삶을 지혜롭게 창조하고 분별없이 살아가는 것을 중시하게 된다.

 

조사선은 6조 혜능의 남종선 이래 오가칠종의 전체를 일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조사라는 의미와 명칭이 완벽하게 확립되어서 佛이나 如來와 같은 위치로 승격된 수행자는 육조혜능 뿐이라고 볼 수 있으며,1] 마조도일(709-788)이 “평상심이 도이다”라고 정의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마조로부터 본격적인 틀을 잡기 시작한 조사선의 전개는 마조의 제자 百丈懷海(749-814)에 의하여 선종의 규범이 성문화한 ?淸規?가 제정되면서, 대규모의 교단성립이 가능하게 되고 집단생활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주지의 상당 설법과 선문답을 기록한 어록이 형성되게 된다. 이로써 조사선의 시대를 열게 되는 것이다.2]

특히 조사선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으로 理事의 상즉을 깨우치게 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3]가되는 스승의 가르침이 절대적이며, 그들의 인도하는 행법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을 중요시한다.

 

1]鄭性本, ?中國禪宗의 成立史 硏究? (서울: 민족사, 1993), pp.829-830 참조. “조사라는 관념과 위치가 급속히 높아져 佛과 如來와 같이 불교의 이상적 인격의 성위로 정착된 인물이 혜능” 이라 하여 敦煌本 ?壇經?에서는 혜능을 生佛로 보고 있다.

2]정성본, 앞의 책, p.801 참조, 선의 어록과 관계하여 정성본은 “좌선과 명상의 실천을 중심으로 한 선종의 주지의 상당설법의 제도와 師資間의 商量을 통한 독특한 선문답이라는 수행방법을 창조하여 선의 어록이라는 독자적인 선불교의 대화집을 성문화하게 된 것”이라고 기술하고 어록의 제작으로 인하여 조사선이 본격화된다고 주장한다. (정성본, ?선의 역사와 사상?, (서울: 삼원사, 1994) p.348)

3]정성본, ?中國禪宗의 成立史 硏究?, (서울: 민족사, 1993), p.826 참조; 동산선문의 개창자인 弘忍을 그의 제자들이 존경의 의미로 조사라고 부르기 시작하던 것이 시발이었지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하는 공안이 생겨나면서 조사는 보리달마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되었다가, ?寶林傳?이 801년에 제작되어 조사선의 계보가 만들어지게 되면서 조사선이라고 하는 명칭이 정형화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조사선은 당 중기부터는 붓다가 행했던 如來禪 4]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대승경전에서 나오는 불성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들을 현실생활에 맞는 언어와 행동으로 표현하며, 현실에 적합한 실천적인 불교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조사들의 어록에서 자주 발견되며, 선어들을 기록한 공안에서 찾을 수 있다. 공안은 조사들이 그들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썼던 과제로서, 선종에서는 禪者의 말이나 동작과 소리 등을 기록하여 이것을 좌선하려고 하는 자에게 보이고 ‘생각하는 대상 또는 단서’로 삼도록 하던 것이다.

 

4]?능가아발다라보경? (?大正藏? 16, p.492상)

“復次大慧 有四種禪 云何?四 謂愚夫所行禪 觀察義禪 攀緣如禪 如來禪……云何如來禪 謂入如來地行自覺聖智相三種樂住 成辦?生不思議事 是名如來禪”;

4종선에 대한 설명과, 如來地에 들어가 自覺聖智의 상에서 삼종락에 주하는 것을 여래선. 붓다가 수행한 선을 여래선이라고 하며, 보리달마가 중국에 전한 것은 여래선이라고 한다. 여래선이라는 말은 원래 4권?능가경?(?능가아발다라보경?)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데, 규봉 종밀은 여래선을 교선일치라고 주장하고 달마가 전한 최상승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의 앙산이 향엄에게, ?景德傳燈錄? 10권 (?大正藏? 51, p.283중)

“사형께서는 여래선을 알고 계시지만 조사선을 아직 모르고 계시군요(汝只得如來禪 未得祖師)” (?祖堂集? 19권, ?香嚴和尙章?)라고 하여 조사선의 우위를 주장하게 된다. 당나라 이후에 여래선이라는 용어는 ?능가경?과 ?반야경? 등에 나타난 여래의 교설에 의거하여 깨닫는 선을 의미하고, 그에 반해 조사선은 중국의 초조인 달마로부터 시작된 여래가 아닌 조사가 전한 ‘평상심이 도’라는 참된 선을 의미한다.

 

이런 공안의 내용들은 불성을 자각하기 위한 요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과 육체에 대한 거친 번뇌를 끊어 아공을 체득하고 정신과 개념에 대한 문제를 극복하여 법공을 체득하는 대승의 다양한 수행법과는 사뭇 다른 발전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인도불교의 수행법은 미망에 덮인 중생의 상태에서 수행의 시발점을 잡고 있지만, 조사선은 중생에게는 이미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대전제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사선의 공안에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갖고 있는 불성의 자각을 중시한다. 특히 조사들은 붓다가 깨닫고 달마 이래 모든 선각들이 깨달은 중도의 이치를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하여 그의 제자들이 직접 수행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려고 한다. 따라서 공안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안이 제시하는 바가 초논리적이며, 파격적인 성격을 강하게 느끼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깨달음을 여는 중요한 기제(機制)로 인식되는 공안 속에서 일정한 논리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논리를 초월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일정한 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700개의 수많은 조사들의 공안들이 있지만, 모든 공안의 요체는 중도의 그 자리를 보게 하는 데에 맞추어져 있으며, ‘中正’의 상즉관계에 계합하는 논리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무문관에 나타난 공안을 중심으로 조사들의 有無에 相卽한 ‘中’과 ‘正’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그 論理體系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무문관?공안의 요체

 

무문관은 1228년에 남송의 無門慧開5]에 의해서 저술된 것으로, 혜개가 제자들에게 유명한 선사의 공안을 자신의 評唱6]을 달아서 공부시킨 내용이다. 이 무문관에는 48가지의 공안7]이 기록되어 있다.

 

5]?五燈會元續略?권2, (?卍續藏? 80, p.479하) 萬壽觀禪師의 法嗣로 杭州黃龍無門慧開禪師. 무문혜개는 6조 조계혜능→남악회양→마조도일→백장회해→황벽희운→임제의현→흥화존장→풍혈연소→수산성념→양기방회→백운수단→오조법연→개복도령→대위선과→대흥조증→월림사관→무문혜개로 이어지는 선종의 법맥을 잇고 있으며, 육조혜능하의 19세손으로 마조도일과 임제의현을 잇는 임제종계통이다. 또한 수산성념 하에서 양기방회과 황룡혜남이 나와서 임제종이 다시 양기파와 황룡파로 분파되는데 두 파 가운데의 양기파의 법맥을 잇고 있다.

6] ?碧巖錄? 1칙, (?大正藏? 48, p.140상)선원에서 옛사람의 이야기와 공안을 평하고 제창하는 것을 의미한다.

7] ?禪宗無門關? (?大正藏? 48, p.292상)의 원본은 無門慧開의 법을 이은 心地覺心(1207-1298)이 일본으로 가져와 유통시킨 廣園寺 계통의 본(1405)이며, 1752년에 重彫하여 일본에 널리 유통되었으며, ?大正藏? 48권에 수록되었다. ?大正藏? 48권에 수록되어 있는 ?禪宗無門關?은 習庵의 序文, 表文, 自序가 공안의 앞에 달려 있으며, 조사들의 48가지 공안을 수록하고 있다. 48가지의 공안은 (?大正藏? 48, p.292중-하) 目錄에 “趙州狗子?百丈野狐?俱?竪指?胡子無鬚?香嚴上樹?世尊拈花?趙州洗鉢?奚仲造車?大通智勝?淸稅孤貧?州勘庵主?巖喚主人?德山托鉢?南泉斬猫?洞山三頓?鐘聲七條?國師三喚?洞山三斤?平常心道?大力量人?雲門屎??迦葉刹竿?不思善惡?離却語言?三座說法?二僧卷簾?不是心佛?久響龍潭?非風非幡?卽心卽佛?趙州勘婆?外道問佛?非心非佛?智不是道??女離魂?路逢達道?庭前柏樹?牛過窓??雲門話墮?躍倒淨甁?達磨安心?女子出定首山竹??芭蕉?杖?他是阿誰?竿頭進步?兜率三關?乾峰一路”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각각의 공안에 評昌과 頌을 달고 있다.

 

 

공안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이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문관에 나타나는 48가지의 공안은 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존재실상의 ‘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있고, 둘째는 열반적정의 ‘無’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있으며, 셋째 연기 중도의 ‘유무의 상즉’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로 통하기 때문에, 48가지 공안을 어느 한 가지에 국한할 수는 없다. 다만 유를 통과하여 무에 회통되며 나아가 상즉의 正과 中으로 가는가?, 무를 통과하여 유에 회통되며 상즉의 정과 중으로 가는가?, 상즉의 정과 중을 통하여 유와 무의 공존을 터득하는가? 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의 세 가지 관점을 고찰하기에 앞서 불교에서 쓰이고 있는 ‘유’와 ‘무’, 그리고 ‘상즉의 중과 정’의 개념을 살펴보고, 이에 입각하여 ?무문관?에 나타난 공안의 활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8]

8]본 논문은 무문관의 48가지의 공안 가운데에서 특히 趙州狗子?俱?竪指?香嚴上樹?趙州洗鉢?奚?淸稅孤貧?州勘庵主?南泉斬猫?洞山三斤을 중심으로 상즉의 논리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Ⅲ 유무와 상즉의 개념

 

‘有’란 범어 bh?va의 한역으로 존재를 뜻한다. 불교에서는 이 존재의 ‘유’의 의미를 매우 다양하게 쓴다. 첫째 異熟의 果體를 이끄는 업의 의미로도 쓰고 있으며,9] 둘째 衆同分과 유정의 오온을 의미할 때도 있고, 셋째 일체의 유위법을 총칭하기도 하며, 넷째 결생심 및 그 권속들을 ‘유’라고 하기도 하며, 다섯째 後有를 이끌 수 있는 생각을 ‘유’라고 하기도 하며, 여섯째 업과 이숙을 ‘유’라고 하기도 한다.10] 그래서 불교의 용어에서 보면 업에 의해서 윤회하는 모든 존재의 각양각색의 모습에 ‘유’라는 단어11]를 붙이고 있다. 불교에서 유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9] ?阿毘達磨俱舍論? 9권 (?大正藏? 29, p.48하) “因馳求故積集能牽當有果業此位名有.

10]?望月佛敎大辭典? 1권, p.202중-하, 참고.

11]有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는 ?阿毘達磨集異門足論? 4권과 ?阿毘達磨大毘婆沙論? 192권과 ?阿毘達磨俱舍論? 19권에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① bh?va로서 無의 반대말로 쓰이고 있다.12]

② asti나 pravartate, v?dyate로서 ‘존재하고 있고’, ‘생기고’, ‘보여지는’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13]

③ bh?va로서 12연기의 제 10지의 有支를 나타낸다.14]

④ prabh?va로서 생존의 장소로 주로 三有를 총칭하여 ‘유’라고 한다.15]

 

12]?中邊分別論? 상 (?大正藏? 31, p.451상)

“有者 但有分別 彼處者 謂虛妄分別

無有二者 謂能執所執此二永無

彼中者 謂分別中 唯有空者 謂但此分別離能執所執

唯有空於此者 謂能所空中 亦有彼者 謂有虛妄分別”

‘有’에 대하여 “단지 분별만이 있으며, 분별이 있는 곳은 허망분별을 의미한다”고 하며,

‘無’에 대하여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고, “能執(집착하는 주체)와 所執(집착하는 대상)이 완전하게 없는 것”이라고 하며,

‘中’에 대하여 “분별이 능집과 소집을 여의어서 분별 속에 오직 공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13] ?中論? 송에서 이 단어를 써서 서로간의 관계를 연기의 측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14]?成唯識論? 8권 (?大正藏? 31, p.43중)에서는

‘有’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윤회세계의 원인(有支)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루의 선(有漏善)이니, 곧 능히 애착할 만한 과보를 부르는 업이다.

둘째는 모든 불선법이니, 곧 애착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를 부르는 업이다.

윤회세계의 두 가지 원인에 따라서 훈습된 종자가 異熟果로 하여금 선?악의 취의 차별이 있게 된다. 마땅히 알라 아집은 윤회의 습기로 차별있는 과보에 대하여 증상연이 된다……아집명언의 두 가지 습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有支有二

一有漏善 ?是能招可愛果業

二諸不善 ?是能招非愛果業

隨二有支所熏成種令異熟果善惡趣別 應知我執有支習氣於差別果是增上緣

(此頌所言業習氣者應知?是有支習氣 二取習氣 應知?是)

我執名言二種習氣 取我我所及取名言而熏成故皆說名取 俱等餘文義如前釋 ”

15]선악의 원인에 의하여 미혹의 세계에서 고락을 받는 모습과 그 세계를 의미할 때 주로 쓰며, ?阿毘曇心論? 2권 (?大正藏? 28, p.818중)에서는 난?정?인?세제일법의 4선근 가운데의 난(煖)법 가운데의 16행에서 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智品? 6에서 有의 경계를 말한다.(p.820하)

 

 

중국 선불교의 공안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유’의 개념은 위에서 밝힌 ‘유’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①에서 쓰이는 ‘무’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유’란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무’의 개념이 주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 있어서 ‘무’의 개념은 주로 범어 ‘abh?va(非有; non-reality)’와 ‘n?sti(無; non-being 또는 asat)’와 ‘avidyam?na(無所有, 非實在)’로서 주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존재 않음’을 나타낼 때 쓰인다. ‘존재하지 않음’으로 쓰이는 ‘무’의 개념은 ‘지멸(nirodha)’ 또는 ‘열반(nirv??a)’을 의미할 때 종종 쓰이고,16] ?중론?송에서는 生(生起; Utp?da)의 반대가 되는 na-upapadyata(Anutpatti; 無生)라고 하여 ‘일어날 수 없는 것’ 또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때 쓰이고 있다.

16]?那先經? (?大正藏? 32, p.699상; 715하)

 

그러나 선에서 주로 쓰는 ‘無’의 개념은 앞에서 말한 윤회하는 모든 존재의 ‘有(bh?va)’에 반대되는 ‘무’의 개념이 되는 무위(Asa?sk?ita)법 , 無漏(An?srava)법과 열반을 총칭하기도 하고, 오관으로 경험하기 이전의 또는 語言으로 개념화되기 이전의 순수한 인간의식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순수한 인간의식의 상태는 의식이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무분별(Avikalpa)의 체를 의미하는 無自性(Asvabh?vatva)17]이기 때문에, 공안의 요체는 무분별지에 의한 답을 요구한다.

그래서 선의 공안에서는 유무를 분별하는 의식의 타파와 고정된 법에 대한 인식의 타파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며, 다시 상즉의 논리로써 유무의 복원이 가능한지도 묻고 있다.

17]스즈끼 다이세쯔는 Asvabh?va를 無自性으로 번역하였다.

"being without self-nature; Asvabh?va=??nya=nair?tma=anutpana" Daisetz Teitaro suzuki, Studies in The Lankavatara sutra, (London: George Routledge & Sons LTD, 1930), p.287.

 

 

‘相卽’이란 2개의 사실과 현상이 서로 융합하여 차별 없이 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법계의 ‘본체(體)와 작용(用)’인 ‘一과 多’가 서로 녹아서 장애 없이 관계되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18]

하나가 없을 때에는 많은 것이 성립되지 않고,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연의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18]화엄학에서는 상즉에 상입을 더 첨가하여 相卽相入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즉 ?華嚴五敎章? 4권에서는

“空과 有의 뜻이 있기 때문에 相卽門이 있으며, 力과 無力의 뜻이 있기 때문에 相入門이 있으며, 緣을 기다리고 緣을 기다리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同體異體門이 있다”고 하여 상즉을 더욱 발전시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상즉문에 대해서는 ?華嚴經探玄記? 4권에서 “體에 의하면 공과 유의 뜻을 갖추기 때문에 상즉이다. 말하자면 만약 하나가 없으면 일체의 연은 모두 자체를 잃는다”라고 한다.

 

 

이런 유무의 상즉 관계는 초기불교 이래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주로 중도로 표현되어 왔다. 중도는 2개의 반대적인 것들이 대립하지 않고 관계(緣)를 갖고 있음을 의미하며, 斷(Uccheda)과 常(???vata)의 2見(Dar?ana)과 有와 無의 2邊을 떠나, 치우치지 않는 ‘中正’의 道를 의미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이 2변을 버리고 중도로 나아가게 되면 明을 이루고 지혜(智)를 이루게 되며, 定을 성취하게 되어 자재함을 얻게 된다.”19]고 기술하고 있을 정도로, 중도는 완성과 가까운 의미로 사용된다.

?전법륜경?에서는 ‘中’의 의미를 ‘正’과 결합시키고 중을 얻는 것은 팔정도를 얻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0]

이때의 ‘中’은 탐욕과 기쁨이 없으며 바라문의 마음에 猶豫함이 없고, 이미 근심과 후회를 벗어서 여러 가지의 有愛를 여의고, 뭇 모여든 번뇌를 끊는 것21]이며, ‘正’은 적중과 正等(samyak)을 의미하기도 하고 如(理; ny?ya)를 의미하기도 하고, 열반의 뜻을 갖는 正性(samyaktva)을 의미하기도 한다.

 

19]?中阿含經? 56권 (?大正藏? 1, p.778상) “捨此二邊有取中道. 成明成智成就於定而得自在

20]?佛說轉法輪經? (?大正藏? 2, p.503중)에 “만약 비구가 탐욕을 생각하지 않고 몸에 집착하지 않으며 사랑하는 행을 하지 않으면 가히 ‘中’을 얻을 수 있으며, 여래의 최정각의 혜안을 얻을 수 있다. 두 변으로부터 건너서 스스로 열반에 다다를 수 있다. 무엇이 ‘中’을 얻는 것인가 하면, 八直之道(八正道)이다.……”라고 하여 여래의 최정각의 혜안은 中을 얻는 것이며, 이는 팔정도라고 하여 ‘中’과 ‘正’은 같은 의미임을 간접 시사하고 있다.

21] ?雜阿含經? 38경 (?大正藏? 2, p.276중) “中無貪喜. 是婆羅門心不猶豫. 已捨憂悔離諸有愛. 群聚使斷.”

 

 

불교의 제 經論에서는 진리의 迹을 보았을 때를 ‘正’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중도의 이치를 안 그 순간을 ‘正’이라고 종종 표현한다. 그래서 ‘정’은 팔정도와 같이 성제를 나타날 때 주로 결합한다. 22]

22]?阿毘曇心論? 6권 (?大正藏? 28, p.918상)에서는 16행 즉 無常?苦?空?非我?因?集?有?緣?滅?止?妙?出?道?正?迹?乘를 설명하고, ‘正’은 교묘한 방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선종에서는 이러한 斷常의 2견과 유무의 2변을 떠난 중도의 논리를 ‘道’ 또는‘大道’라고 표현하며, 이 ‘도’는 이미 갖추어진 본래 면목이라고 본다. 그래서 선에서는 번뇌를 털어내어 부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인 자기의 성품을 보라고 강조한다.23]

23]黃檗, ?宛陵錄? (?大正藏? 48, p.386중)

“上堂云 ?心是佛……本來是佛 不假修行 但如今識取自心見自本性 更莫別求”;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이 편찬한 ?간화선?에는 간화선을 설명하면서, 조사선의 본래성불에 대하여 번뇌를 털어내어 부처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수행에 의하여 얻는 것이 아닌(不假修行) “본래부처인 자기 자신의 본성을 볼일이지 다른 것을 구하지 말라” 는 황벽스님의 ?宛陵錄?과 대혜선사의 ?書狀?을 인용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 ?간화선? (서울: 대한 조계종 교육원, 2005) pp.61-66.

 

본래 부처인 자기의 성품을 보라는 내용을 선사들의 법어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달마대사는 ?二入四行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도에 들어감에는 理로 들어가는 것과 行으로 들어가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하고,

이치[理]로 들어가는 것은 가르침을 담고 있는 典籍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고, 이치로 들어가는 길은 범부와 성인이 모두 진리의 성품을 지니고 있지만 단지 객진의 번뇌에 의해서 덮여 있을 뿐이니,

언교(言說;De?an?)에 떨어지지 않으면 진리의 冥狀을 곧 깨달게 된다고 하여, 무분별의 고요한 명칭 없음에 들어가는 것 " 24]

24] ?楞伽師資記? (?大正藏? 85, p.1285상)

“未入道多途 要而言之 不出二種 一是理入 二是行入

理入者 謂藉?悟宗 深信含生 凡聖同一?性 但?客塵妄覆 不能顯了 若也捨妄歸? 凝住?觀自他

凡聖等一 堅住不移 更不隨於言? 此?與?理冥狀 無有分別 寂然無名之理入

 

또한 혜능대사는 신수대사의 게송을 보고, 수행이란 우리들의 마음속에 오염되어 있는 번뇌망상을 떠나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조 홍인에게 보이는 呈偈에서 “보리에는 나무가 본래 없고 거울 또한 틀이 아니네. 불성은 늘 청정한데, 어디에 먼지 있으리.”25]라고 말한다.

25]敦煌本 ?六祖壇經? (?大正藏? 48, p.338상)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佛性常淸淨. 何處有塵埃.”

 

청정한 불성이 본래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깨치면 모든 것을 이루게 된다고 설명한다.

후대의 황벽선사는 상당법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꿈틀거리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다 부처의 성품이 있으니, 마음의 본체는 한 가지이다.

그러므로 보리달마께서 서쪽으로 오시어 오직 일심의 법만을 전하셨으니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바로 들어 보여주셨다.

그것은 禪을 수행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그대의 마음을 돌이켜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할 것이되, 특별히 다른 것을 구할 것이 없다"26]

26]黃檗, ?宛陵錄? (?大正藏? 48, p.386중)

“卽心是佛. 上至諸佛. 下至蠶動含靈. 皆有佛性. 同一心體.

所以達摩從西天來. 唯傳一心法. 直指一切衆生本來是佛.

不假修行.

但如今識取自心. 見自本性 更莫別求.”

 

 

이것은 廻光返照하여 본래 갖추어져 있는 본래의 성품을 바로 보아야(卽見)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들 선사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깨달음’과 ‘본래의 마음’이란 중도의 상즉의 이치를 보는 것이며 ‘正’과 계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사선의 ‘平常心是道’를 후학들에게 갈친 마조(709-788)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란 닦을 필요가 없다. 오직 오염되지만 말라. 어떤 것이 오염인가?

나고 죽는 마음으로 취하거나 향하거나 조작하는 이것 모두가 오염이다.

도를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

왜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가? 여기에는 조작도 시비도 취사도 단상도 범성도 없기 때문이다."27]

27] ?景德傳燈錄? 28권, (?大正藏? 51, p.440상),

江西大寂道一禪師示?云

“道不用修. 但莫汚染. 何謂汚染.

但有生死心. 造作趣向. 皆是汚染.

若欲會其道. 平常心是道.

何謂平常心. 無造作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聖.”

 

 

마조스님이 제시하는 ‘도’란 특별히 다른 곳에 존재하는 성스러운 것이라거나, 일상성으로부터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닌 평범한 의도하지 않는 현재 그대로의 마음을 볼 것을 강조한다. 즉 분별이 떨어진 ‘正’과 ‘中’의 마음을 平常心이라고 본 것이다.

 

 

Ⅳ. ?무문관?公案의 논리체계

 

1. 제 1칙 趙州狗子

 

조주의 구자화두는 趙州無子話頭라고도 하며, ?무문관?에서 제 1칙으로 꼽을 정도로 선종의 대표적이면서도 중요한 공안이다. 우리가 화두공안을 이야기하는 입장에서 조주를 언급치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에게서 발생한 인연들이 가장 많이 古則으로 채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無’자 공안은 황벽이 말한 것처럼 ‘간화선의 최초 공안’28]이면서 그 결미를 장식한 가장 대표적인 공안이기 때문이다.29]

 

28]조주의 ‘무’자 공안은 최초가 아니라는 인경스님의 논문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선관책진의 수행관?(?보조사상? 26집)에서 그렇지 않다는 논의를 한 바 있다. 인경에 의하면, “선관책진은 무문관보다 400년이 지난 후에 출간되었다. 그러므로 조주보다 50년 전에 입적한 황벽의 조주의 ‘무’자를 간하라는 기록은 후세의 자료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자 화두는 수행의 방법으로 발전된 것이 원오극근을 거쳐 송대의 대혜종고에서 확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시중 속의 ‘무’자 화두의 참구는 뒤에 편입된 자료로 추측된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황벽과 조주의 생몰연대를 비교해보면 50년 전에 입적한 황벽과 120세를 산 조주는 ‘무’자 화두의 수행에 대하여 서로 교류할 만한 시대를 살았다고 본다. 50년의 연대 상의 단순한 차이보다는 황벽이 입적한 850년을 보면 조주선사가 70세이고 80세에는 관음원 주지로 40년을 더 살았으니 그렇게 차이가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라고 밝힌 바 있다.

29]원융, ?간화선? (장경각, 1993), p.58.

 

 

"조주화상30]이 어떤 스님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묻자, 조주화상은 無!라고 대답하였다 " 31]

 

30]조주화상(778-897)은 마조도일의 제자 남전보원(748-834)의 법제자로서 그의 어록을 담은 ?趙州錄?에는 520 가지가 넘는 인연들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 趙州勘婆, 趙州狗子, 趙州救火(?會元? 趙州章 葛藤集 上)趙州大蘿蔔(?碧巖錄? 31則), 趙州問死(?碧巖錄? 4則), 趙州柏樹子(?會元? 趙州章, ?禪宗無門關? 37칙), 趙州四門(?碧巖錄? 9則), 趙州三轉語(?碧巖錄? 96則)은 선종의 화두로서 유명하다.

종문에서는 일반적으로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에 비견하여 조주의 선을 입술로 하는 선(口脣皮禪)이라고 한다. 趙州從?의 전기는 ?祖堂集? 18권 (?高麗藏? 45)과 ?宋高僧傳? 11권 (?大正藏? 50)과 ?景德傳燈錄? 10권 (?大正藏? 51)에 수록되어 있으며 ?조주록?이 전하고 있다.

31]?禪宗無門關? 趙州狗子 (?大正藏? 48, p.292하)

“趙州和尙因僧問. 狗子 還有佛性也無. 州云無”

 

‘개에게 불성이 없다(無)’고 조주화상이 대답한 것은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고 ?涅槃經?에서 천명한 것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안은 일반적인 관념을 깨면서 상즉의 ‘中’과 ‘正’에 계합하고 있다.

 

모두들 ‘일체중생 실유불성’에 의거하여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알고 있는 관념을 깨는 수단으로 조주화상은 ‘無’라고 대답한 것이다. 원래 불성이란 깨달음의 성품으로 본래 부처를 누구나 갖고 있지만, 중생의 유의 현실은 깨달음에 대한 미혹의 세계이므로 미혹의 세계에서는 불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無’라고 대답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개의 불성은 바로 ‘무’와 상즉하므로 ‘무’라고 대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의 ‘무’의 개념은 번뇌가 끊어진 無爲와 無漏의 열반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개의 불성의 유무가 모두 한 점에서, 즉 ‘正’과 ‘中’과 계합하기 때문에, ‘무’라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럴 경우의 ‘무’라고 한다면 ‘空’의 의미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주스님께서 게송으로 읊으시길 “개의 불성 전부(유무)를 들어서 正으로 한 것인데, 조금이라도 유무에 미치게 되면 목숨까지 없으리라”라고 한 것이다.

 

‘趙州狗子’에 대하여 무문스님은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한다.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관통하는 것이요, 妙悟는 막다른 길에서(窮) 마음의 길(妄想)을 끊어야 할 것을 요한다. 조사의 관문을 관통하지 못하고 마음의 길을 끊지 못하면 이것은 마치 초목에 붙어사는 유령과 같으리라."32]

32]?禪宗無門關? (앞의 책)

“無門曰. 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附木精靈.”

 

무문스님은 이처럼 조주의 무자공안을 참구함에 온몸이 구도적인 문제의식(疑團)이 되어 ‘無字話頭’를 참구하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33] 무문스님이 ‘묘오는 막다른 길에서 마음의 길을 끊어야 할 것을 요한다.’고 한 것은 마음의 길 즉 번뇌와 업으로 만들어진 허망한 생사윤회의 길을 끊어낸 무미건조하고 沒滋味 한 자리에 두어 의심이 살아나야(疑團) 본원의 열반적정의 ‘무’의 길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33]정성본, ?간화선의 이론과 실제? (서울: 동국대 출판부, 2005), p.268.

 

 

2. 제 3칙 俱?竪指 34]

 

무문관의 제 3칙에 기록되어 있는 俱?스님35]의 일화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서 한 점을 이루지만, 이것 또한 없음을 손가락 하나를 들어서 나타내고 있다.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저 행동으로 중도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4] ?景德傳燈錄? 11권「天龍和?法嗣」(?大正藏? 51, p.288상)에는 이름만 보이는 新羅國?忠禪師와 함께 천룡화상의 법을 이은 2인으로 소개와 ?碧巖錄? 19칙 (?大正藏? 48, p.159상)에 수록되어 있으며 ?從容錄? 84칙 (?大正藏? 48, p.227하; 280하)에 수록되어 있다.

35]俱?和尙의 전기는 ?祖堂集? 19권 (?高麗藏? 45)과 ?景德傳燈錄? 11권 (?大正藏? 51, p.288상)에 전하고 있다.

 

 

"구지스님은 누가 무엇을 물어봐도 다만 손가락을 들뿐이었다.

어떤 동자가 어느 날 외부 사람이 찾아와서 ‘스님께서 어떤 법요를 설하던고?’ 묻자, 동자는 역시 손가락을 들었다. 구지스님은 (이 말을) 듣고 마침내 칼로 (그 동자의) 손가락을 잘랐다."36]

36] ?禪宗無門關? (?大正藏? 48, p.293중)

“俱?和尙. 凡有詰問. 唯擧一指.

後有童子. 因外人間. 和尙說何法要. 童子亦竪指頭.

?聞遂以刀斷其指.”

 

구지스님이 한 손가락을 든 이유는 ‘有無의 相卽’ 즉 연기하여 일어난 것은 모두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대답 대신 그 이치를 표현할 수 있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인 것이다. 그러나 동자는 그 ‘유’의 모습에만 집착하였기 때문에 동자의 손가락을 벤 것이다. 하나로 회통하는 상즉은 그 순간에도 찰라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지스님은 그 자체가 空하고 無임을 보이기 위하여 손가락을 벤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자는 손가락을 베임과 동시에 이치를 알아 깨달았다고 하는데, 항상 있어왔던 자신의 손가락이 사라짐을 正見함으로써, 또 손가락의 행위라는 有爲에서 손가락의 행위가 사라진 無爲의 상즉을 알아차림으로써, 그 상즉이 바로 그 자체일 뿐 어떤 특정한 가치를 부여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무문스님은 “구지선사와 동자의 깨달은 지점이 손가락 위에 있지 않다. 만약 이를 향하여 見得했다면 천룡과 구지와 동자와 자기를 한 꼬치에 꿰어서 버리리라.”37]라고 풀이 한다.

37] ?禪宗無門關? (위의 책)

“無門曰. 俱?幷童子悟處. 不在指頭上. 若向者裏見得. 天龍同俱?幷童子與自己. 一?穿却.”

 

무문 스님도 구지와 동자가 깨달은 곳은 손가락에 있지 않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理法에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인 것이다. 동그란 원의 한 중심을 긋는 한 점의 의미에서 손가락을 내보인 것이다. 有와 無가 연기하여 상즉하고, 此와 彼가 서로 연결되어 상즉하고, 理와 事가 서로 상즉하고, 너와 내가 상즉하고, 관찰자과 관찰대상이 상즉하고, 번뇌와 보리가 相卽하는 그 지점을 말하면, 말과 말없음이 相卽하는 ‘卽’의 도리가 회통하므로, 그 회통의 지점을 일러 손가락의 방편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卽’ 곧 ‘中’은 영원하게 본래의 자성이 공함(無自性空)을 보이면서도 양 극단이 하나도 통합해 감을 일치감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구지화상은 동자의 손가락을 자름으로써 있음과 없음의 논리를 회통(會通)해 가고 있는 것이다.

 

 

3. 제 5칙 香嚴上樹 38]

 

무문관의 제 5칙에 기록되어 있는 향엄화상39]의 공안에서는 죽고 사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빗대어 선의 도리를 묻고 있다.

 

38]이 공안은 ?景德傳燈錄? 11권 ?香嚴傳? (?大正藏? 51, p.283하)에도 전하고 있다.

39] 香嚴智閑禪師(?-898)는 ?山靈祐(771-853)의 제자로 臨濟義玄과 仰山慧寂과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의 전기는 ?祖堂集? 19권 (?高麗藏? 45)과 ?宋高僧傳? 13권 (?大正藏? 50)과 ?景德傳燈錄? 11권 (?大正藏? 51)과 ?聯燈會要? 8권 (?卍續藏? 136)과 ?五燈會元? (?卍續藏? 138)에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데, 입으로는 나무 가지만을 물고 있고 손에는 나뭇가지를 붙잡지 않고 발은 나무를 밟지 않고 있을 때에, 나무 아래의 어떤 사람이 (달마가) 서쪽으로 온 뜻을 묻는다고 하자.

그 때 대답하지 않으면 묻는 사람에게 (그 대답을 못해 주어서) 그릇될 것이고 만약 대답하면 떨어져 죽을 것인즉 이때 어떻게 대할 것인가? " 40]

40] ?禪宗無門關? (?大正藏? 48, p.293하)

“香嚴和尙云.

如人上樹. 口啣樹枝. 手不攀枝. 脚不踏樹. 樹下有人. 問西來意.

不對卽違他所問. 若對. 又喪身失命. 正恁?時. 作?生對.”

 

달마가 서쪽으로 온 이유에 대하여 대답하면 나무 위에서 떨어져 죽을 상황이고, 대답하지 않으면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즉 ‘西來意’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이러한 상황을 제시하고 그 상황의 대처에 대하여 香嚴和尙은 묻는 것이다. 입으로 나무 가지를 겨우 물고 있는 현실은 ‘有’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으며, 손과 발이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있는 현실은 ‘무’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래의’에 대답을 하면 이치를 아는 지혜인[無]이 되지만 현실에서는 죽음을 맞게 되어서[有] 滅과 死의 길로 나아가게 되고, 대답하지 못하면 愚癡人이 되지만 현실에서는 生을 얻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 향엄화상은 극단의 두 상황 즉 生?死와 生?滅과 智?愚는 현실 지금 이 순간에 접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질문하고 있는 것일 뿐, 그 정답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무문 스님은 “가령 현하의 말이 줄줄이 있어도 모두 소용없고 일대의 藏敎로 설득해도 소용없다.

만약 이에 대한 속내에 안착했다면 종전의 死路頭를 活却하고 종전의 活路頭를 死却하라.

그가 혹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곧 미래를 기다려 미륵에게 물어라.”41]라고 설명한다.

41]?禪宗無門關? (위의 책)

“無門曰. 縱有懸河之辨. 總用不著. 說得一大藏敎. 亦用不著.

若向者裏對得著. 活却從前死路頭. 死却從前活路頭.

其或未然. 直待當來. 問彌勒.”

 

결국 무문스님은 세속의 끝없는 대답은 전혀 소용없고 대장경의 수많은 가르침도 필요 없다고 선언하고, 그 깊은 이치를 알려고 한다면 죽은 길을 모색하는 화두(死路頭)를 살려서 없애고(活却) 사는 길을 모색하는 화두(活路頭)를 죽여서 없애라고(死却) 조언한다.

 

무문스님의 풀이에서 알 수 있는 법칙은 첫째 세속적 생각을 표현하는 말과 출세간적 생각이 표현되는 대장경의 교학을 버려야 통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로두-활각, 활로두-사각의 두 극단적인 활용의 도리를 이야기하면서 모두를 근본 도리로 相卽시키고 있다. 즉 死와 活의 두 극단과 活과 死의 두 극단을 활용함으로 ‘中’과 ‘正’으로 계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4. 제 7칙 趙州洗鉢

 

무문관의 제 7칙의 조주세발의 공안은 일상의 ‘유’의 생활을 통하여 ‘무’에 도달하는 奇智가 엿보이고 있다.

 

 

"조주스님에게 어느 날 어떤 스님이 묻길, ‘제가 갑자기 총림에 오게 되었습니다. 잘 지도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조주스님께서 ‘죽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스님이 대답하길, ‘죽을 먹었습니다.’라고 하자,

(조주스님께서) ‘그러면 바리때는 씻었을 테지.’라고 말하자, 그 스님은 깨쳤다." 42]

42] ?禪宗無門關? (위의 책)

“趙州因僧問. 某甲乍入叢林. 乞師指示.

州云. 喫粥了也未. 僧云. 喫 粥了也.

州云. 洗鉢盂去. 其僧. 有省.”

 

이 공안은 매우 일상적인 문답일 뿐이다. ‘죽을 먹었느냐?’의 물음에 ‘죽을 먹었다.’고 대답하고 ‘죽을 먹었으면 바리때를 씻었을 테지.’라는 간단한 일상의 주고받는 말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죽을 먹은 것은 일상의 ‘有’를 표현한 것이고, 죽을 먹고 바리때를 씻은 것은 번뇌를 씻은 것으로 이해하면 ‘열반의 無’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먹는 것은 플러스의 개념이고 씻은 것은 마이너스의 개념이라고 유추해 보면, 이 양 극단의 일상의 언어도 선리로 이해하면 바로 ‘緣起卽空’의 논리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禪理는 보물을 찾듯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상의 행위가 滅空을 통하여 다시 획득되기 때문에 ‘평상의 일이 도’일 뿐인 것이다.

 

조주세발에 나오는 유무의 상즉이 ‘도’라고 볼 때 ‘유’의 존재의 실상도 ‘도’이며 ‘무’의 도리도 ‘도’가 된다. 그렇다면 유무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의 ‘중’과 계합한 ‘유’는 다시금 긍정할 수 있는 논리가 가능해 진다. 즉 ‘유’의 일상의 생활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상즉의 논리에서는 ‘유’와 ‘무’가 하나로 인정되고 그런 이치를 뒤집으면 ‘유’도 ‘무’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주세발의 공안은 ‘무’로 바로 연결되는 ‘유’의 도리를 그대로 받아들었기 때문에, 승려는 그 간단한 생활의 이야기에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선도리는 평상시의 이 마음이 그대로 佛心임을 믿고, 분별하여 취사하지 않아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저것 조작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함을 보인43] 대표적인 공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43]?景德傳燈錄? (?大正藏? 51, p.440상)

江西大寂道一禪師示?云

“ 道不用修但莫?染 何??染 但有生死心造作趣向皆是?染 若欲直會其道平常心是道 謂平常心 無造作無是非無取捨無斷常無凡無聖

(도란 닦을 필요가 없다. 오직 오염되지만 말라. 어떤 것이 오염인가? 나고 죽는 마음으로 취하거나 향하거나 조작하는 이것 모두가 오염이다. 도를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다. 왜 평상심이 도라고 말하는가. 여기에는 조작도 시비도 취사도 단상(斷常)도 범부와 성인도 없기 때문이다.)”

한글 번역은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 ?간화선? (서울: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2005), p.68.

 

이에 대하여 무문스님은 “조주가 입을 여니, 담이 보였고 심장과 간이 드러났다. 이 僧이 듣고도 모르니 종을 가리켜서 옹기로 부르는 격이다.”44]라고 설명한다.

44] ?禪宗無門關? (?大正藏? 48권, p.293하) “趙州開口見膽 露出心肝者 僧聽事不? 喚鐘作甕”

 

무문스님의 해석도 구체적으로 대답을 일러 주는 격이 아니라 화두의 법칙으로 되받아 참구하게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으므로 보이는 입을 여니 보이지 않는 몸속의 담과 심장과 간이 보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결국 무문스님은 보이는 ‘유’의 입으로 보이지 않는 ‘무’의 심장과 간이 드러난다고 하여 먹고 씻는 개념의 결합관계를 언어의 유희로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종과 옹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종을 뒤집으면 바로 옹기의 모습이 되기 때문이다.

 

 

5. 제 10칙 淸稅孤貧

 

제 10칙은 조동종의 창시자 洞山良价의 제자 曹山本寂45]의 공안이 소개되고 있다.

45]그의 전기는 ?祖堂集? 제 8권 ?曹山和尙傳?과 ?景德傳燈錄? 17권 (?大正藏? 51, p.336상)과 ?宋高僧傳? 13권 (?大正藏? 50, p.786중)에 전하고 있으며 그의 어록 ?曹山本寂禪師語錄? (?大正藏? 47, p.536하; 540하)과 ?曹山錄? (?續藏經? 119)에도 전하고 있다.

 

 

"조산스님에게 어느 날 청세라는 스님이 묻길, ‘제가 대단히 외롭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 (저를) 구제해[賑濟] 주십시오’라고 하자,

조산스님이 ‘세사리(稅?利)야.’라고 불렀다. 세가 ‘네’라고 대답하였다.

조산스님은 ‘청원백가의 술을 서 되나 먹고도 아직 입술도 젖지 않았다고 하느냐’라고 말하였다."46]

46]?禪宗無門關? (?大正藏? 48, p.294상)

“曹山和尙. 因僧問云. 淸稅孤貧. 乞師賑濟.

山云. 稅?利. 稅應諾.

山曰. 靑原白家酒. 三盞喫了. 猶道未沾脣.”

 

청세라는 스님이 아직 깨닫지 못하여 ‘자신이 외롭고 가난하다고 말하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 구휼해 달라’고 하면서 도를 얻어먹겠다고 하자, 조산스님은 ‘청원 땅의 백가에서 만든 가장 맛좋고 뛰어난 술’에 빗대어서 ‘청원백가의 술을 서 되나 먹고도 아직 입술도 젖지 않았다고 하느냐?’라고 반박한다.

이 공안은 청세라는 스님이 도를 이미 들었고 도를 이미 배웠으며 ‘진리의 도’ 그 속에서 살면서도 이 밖의 딴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은 외롭고 가난하다고 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에 조산스님은 당대의 술빚기로 유명한 청원 땅의 백가의 술을 빗대어 항상 실컷 맛볼 수 있는 그 진리의 ‘도’를 서 되나 먹고도 전혀 먹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이 공안에서도 유무상즉의 논리가 흐르고 있지만, 깨달음이 특별한 것에 있고 세상을 벗어난 곳에 있으며, 일상을 벗어난 것에 있다는 청세의 생각에, 이미 내가 겪고 지금 겪고 있는 이 순간에 있음을 청원백가의 술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공안의 논리는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니다. 그렇다고 ‘무’이며 ‘유’임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공안이란 논리의 저변에 흐르는 것은 바로 ‘유’와 함께하는 ‘무’이고 ‘무’와 함께하는 ‘유’이다.

 

청세고빈의 공안은 ‘유’를 인정함으로써 ‘무’와 회통하는 논리가 보인다. 진리 즉 법의 이치는 ‘유’ 속에 있는 무를 봄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생각’ 즉 ‘외롭고 가난하다’는 것을 바로 그 자리에 내려놓음(방하착)으로써 원래 비어 있음[無自性空]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진정한 見神경험 또는 見佛경험은 선적인 체험에 있어서의 견성과 같이 견즉시성 성즉시견으로 신 또는 불을 보는 자가 신(불) 스스로가 아니면 안 되는 것과 같다. 신(불)은 신(불) 자신을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놈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47]

47]領木大拙, ?禪이란 무엇인가?, 趙碧山 譯, (서울: 홍법원, 1995), p.65.

 

청세고빈의 공안은 앞에서 살펴본 양 극단의 회통 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 있는 그대로 볼 것을 강조하는 ‘유’의 직관을 요구한다. 간화선의 강한 의심을 일으키는 방법과는 약간 다른 형태이다.

그러나 무문스님은 이 공안을 들면서 간화적인 요법으로 해석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강한 의단을 아래의 물음으로 불러일으키고 있다.

 

"무문스님 가로되 청세의 수기 이게 무슨 마음인가? 조산스님은 깊은 법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청세가 술을 마셨다고 하는 그 마음(도리)을 얼른 말해 보라."48]

48] ?禪宗無門關? (?大正藏? 48, p.294상)

“無門曰. 淸稅輸機. 是何心行. 曹山 具眼深辨來機. 然雖如是且道. 那裏是稅?梨喫酒處.”

 

‘이게 무슨 마음인가?’ ‘청세아사리가 술을 마셨다’ ‘어째서’ ‘왜’라는 경각심과 더불어 꼬여 흐르는 강한 추구의 화두참구라는 요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6. 제 11칙 州勘庵主 49]

 

주감암주의 공안은 말로 하는 기법을 벗어나서, 물음에 극단적인 행위로 대답하고, 그 행위에 대한 대응이 또 다시 달라지는 선리가 나타난다.

49]이 공안은 ?祖堂集?과 ?傳燈錄?에서 기록되어 있지 않고 ?五燈會元?에만 기록되어 있다.

 

 

"조주스님이 한 암두를 찾아가서 “계십니까? 계십니까?”하자, 그 암주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조주스님은, “물이 옅어서 배를 세울 곳이 못 된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다른 암주를 찾아가 “계십니까? 계십니까?” 하자, 역시 주먹을 들어 보였다.

조주스님 말하시길,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자유자재하군!” 하고 인사를 올렸다. "50]

50] ?禪宗無門關? (?大正藏? 48, p.294상)

“趙州到一庵主處問. 有?有?. 主竪起拳頭.

州云. 水淺不是泊航處. 便行.

又到一庵主處云. 有?有?主亦竪起拳頭.

州云. 能縱能奪. 能殺能活. 便作禮.”

 

이 공안에서는 조주스님의 같은 질문 즉 ‘계십니까?’에 대한 대답으로 두 암주는 같은 반응 즉 ‘주먹을 들어’ 보였지만, 그에 대한 조주스님의 대처방법이 다름을 보이고 있다. 같은 대답에 전자는 ‘물이 옅어서 배를 세울 곳이 못 된다’라고 부정적인 말을 하고, 후자는 ‘주고 빼앗는 것이 자재하고 죽이고 살리는 것이 자재하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주감암주의 공안의 특징은 말에 행위로 대답하고 같은 대답에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림으로써 유무가 상즉하는 논리를 보이고 있다. 부정과 긍정의 상즉의 논리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무문스님은 “쌍방이 주먹을 들었는데, 무엇 때문에 한쪽은 긍정을 하고 한쪽은 부정 했는가?”51]라고 도리어 반문한다.

51]?禪宗無門關? (?大正藏? 48, p.294중) “一般竪起拳頭. 爲甚?. 肯一箇不肯一箇.”

 

또한 공손하게 ‘계십니까?’고 하는 말에 오히려 불손하게 대답 대신 주먹을 들어 보이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무문스님은 조주스님을 “조주스님은 두 암주에게 간파 당했다”52]라고 혹평한다.

52]?禪宗無門關? (위의 책) “爭奈趙州却被二庵主勘破

 

선은 우물쭈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직입이라야 한다.조금이라도 우물쭈물하면 천리만리가 떨어진다. 즉 간격의 여유를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바로 대답하고 바로 행동하는 것이다. 주먹을 든 것에 대하여 조주의 대답이 다르니 두 암주에 대하여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틀린지에 대하여 말하면 이미 늦은 것이고 분별심이 일어난 것이 된다. 여기에는 일체의 분별심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먹을 든 그 것, 그 자체뿐인 것이다.

 

 

7. 제 14칙 南泉斬猫 54]

 

무문관의 제 14칙에서는 池州 南泉普願禪師55]의 공안이 소개되고 있다. 당시 남전보원선사가 동당과 서당 간에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가지고 서로 시비를 붙자, 이에 남전스님이 이를 빌미로 법의 도리를 물었던 것이다.

 

54] 이 공안은 ?碧巖錄?에서는 제 63칙의 ?南泉兩堂爭猫?와 제 64칙 ?南泉問趙州?의 2칙으로 나누어서 싣고 있으며, ?宏智頌古? 제 9칙에도 실려 있다. 근본 출처는 ?趙州錄? 상과 ?傳燈錄? 8권의 ?南泉章?에 전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55]南泉普願(748-834)은 마조도일의 제자로 ?祖堂集? 14권과 ?傳燈錄? 6권 등에 그의 전기를 전하고 있으며, 조주종심을 비롯한 長沙景岑과 陸亘大夫등 위대한 제자를 배출하였다.

 

 

"남전스님은 선원의 동당과 서당의 선승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갖고 다투고 있기에, 고양이를 잡아들고

‘대중아 도를 말한다면 살리게 될 것이요, 도를 말하지 못하면 참수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대중은 대답이 없었다. 남전스님은 드디어 이를 참수하였다.

밤늦게 조주가 외출에서 돌아오자 남전은 조주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니, 조주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나갔다. 이에 남전스님은 “네가 만약 있었더라면 고양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56]

56] ?禪宗無門關? (?大正藏? 48, p.294하) 南泉斬猫

“南泉和? 因東西堂爭猫兒 泉乃提起云

大?道得?救 道不得?斬却也

?無對 泉遂 斬之

?趙州外歸 泉?似州 州乃脫履 安頭上而出 泉云 子若在?救得猫兒”

 

여기서도 유무의 상즉의 논리가 교차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남전스님이 고양이를 죽인 것은 불교의 오계의 불살생계에 위배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를 얻고 도를 얻지 못함을 내세워 불살생계를 범하는 과감성을 보이고 있다. 선리에 흐르는 상즉의 논리에서 보면 도를 얻음은 도를 얻지 못함과 상즉하며, 시비가 상즉하며, 살생과 불살생이 상즉한다. 고양이 문제로 시비가 붙었기 때문에 이를 빌미로 도를 얻고 얻지 못함의 분별을 오히려 내세운 것이며, 불살생과 살생의 문제를 내걸었던 것이다. 선리적으로 말하자면 살생과 불살생은 같은 이치이기 때문에 그 도리 때문에 고양이는 참수 당했던 것이지만, 반대로 死는 生과 맞잡고 있기 때문에 남전스님은 조주의 행동으로 고양이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조주스님은 이 일에 대해서 살생과 불살생의 卽中의 논리를 대답 없음의 행위로 대답한다. 또한 조주스님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신발은 발에 신는 것이라는 고정적인 사고를 타파하고, 신발의 중도의 활용성을 보이고자 신지 않고 이고 나간 것이다.

 

그래서 무문스님은 “얼른 말해 보아라. 조주가 신발을 머리위에 얹은 뜻이 무엇인지를. 이에 대해 깊은 속내의 하나로 회통하는 말을 얻으면 곧바로 남전스님의 한 일이 헛됨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7]라고 하며 즉중의 즉답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57]?禪宗無門關? (위의 책) “無門曰. 且道. 趙州頂草鞋意作?生. 若向者裏下得一轉語. 便見南泉令不虛行. 其或未然險.”

 

무문스님은 공안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즉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 앞에는 ‘얼른 말해 보아라.’는 일구가 종종 붙는다. 생각은 시간을 요하고 분별은 세간의 흐름과 함께 하기 때문에 생각이 붙으면 상즉에서 오는 즉중의 대답을 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항상 무문스님은 생각 없는, 즉 분별없는 그 자리의 묘리를 즉시에 ‘中’과 ‘正’에 계합시키기 위하여 다그치는 것이다.

 

 

Ⅴ. 결론

 

이상에서 ?무문관?에 나타난 유무를 관통하고 있는 상즉의 논리체계를 살펴보았다.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로는 공안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끊임없는 분별에 의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공안 속에 흐르는 논리는 이 현실에 흐르는 본질을 보게 함으로써 더욱 현실을 인정하게 하는 도구를 이용한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깨닫고 달마가 깨닫고 육조 혜능대사가 깨닫고 모든 조사들이 깨달은 ‘中’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中’은 한 쪽 측면의 ‘有’도 아니고 또 다른 측면의 ‘無’도 아닌 것이다. 다만 이 두 가지가 상즉하고 있음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모든 공안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에 묶여 있으면 유무가 상즉하므로 돌연 ‘무’를 이야기하고 ‘무’에 묶여 있으면 돌연 ‘유’를 이야기 한다. 이도저도 아니라고 이야기하면 냅다 소리 지르고, 대답하면 방망이로 때린다. 세속을 이야기 하면 출세간으로 맞받고 출세간의 도리를 물으면 저자거리의 이야기를 한다. 말하면 행동으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하면 그 행동의 원리를 묻는다.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즉의 ‘中’은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무자성이며, 무상이며, 무아의 논리이며, 생각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통의 논리이며 생사에 대면하는 치열한 논리이다. 그래서 五祖法演선사는 “만약 그대들이 이러한 선문답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조사관을 관통해야 한다. 만약 조사관을 관통하지 못하면 결코 정법의 안목을 갖추지 못한다.”58]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趙州狗子의 공안에서는 개에게는 불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없다고 한 것이며, 俱?竪指의 공안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서 한 점을 이루지만, 이것 또한 없음을 손가락 하나를 들어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저 행동으로 중도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궁지에 몰아서 ‘서래의’의 뜻을 무분별로 알게 하는 것이며, 밥을 먹으면 마땅히 씻어야 하는 것이며, 깨달음은 천하고 천한 시궁창인 것임을 즉견하게 하는 것이다.

 

58]?五祖法演禪師語錄? (大正藏. 47, p.665하) “須是透祖師關始得. 若不透祖師關. 輒不得正眼?着.”

 

 

 

<참고문헌>

 

1. 원전/사전류

?景德傳燈錄? (?大正藏? 51)
?那先經? (?大正藏? 32)
?楞伽師資記? (?大正藏? 85)
?無門關? (?大正藏? 제 48)
?碧巖錄?(?大正藏? 51)
?佛說轉法輪經? (?大正藏? 2)
?禪宗無門關? (?大正藏? 48)
?成唯識論? (?大正藏? 31)
?宋高僧傳?(?大正藏? 50)
?阿毘達磨俱舍論? (?大正藏? 29)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大正藏? 27)
?阿毘達磨集異門足論? (?大正藏? 26)
?阿毘曇心論? (?大正藏? 28)
?聯燈會要? (?卍續藏經? 136)
?五燈會元? (?卍續藏經? 138)
?五祖法演禪師語錄? (?大正藏? 47)
?宛陵錄? (?卍續藏經? 119)
?六祖壇經? (돈황본)
?雜阿含經? 38경 (?大正藏? 2)
?祖堂集? (?高麗大藏經? 45)
?曹山錄? (?續藏經? 119)
?曹山本寂禪師語錄? (?大正藏? 47)
?從容錄? (?大正藏? 48)
?中論? (?大正藏? 30)
?中邊分別論? (?大正藏? 31)
?中阿含經? (?大正藏? 1)
?華嚴經探玄記? (?大正藏? 35)
?華嚴五敎章? (?大正藏? 45)
?望月佛敎大辭典?  1권

 

2. 단행본류
편집부, ?조계종 수행의 길-간화선?, 서울: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2005.
스즈끼 다이세쯔, ?禪의 진수?, 동봉 옮김, 서울: 고려원, 1994.
     ?禪이란 무엇인가?, 趙碧山 譯, 서울: 홍법원, 1995.
원융, ?간화선?, 서울: 장경각, 1993.
이희익, ?선의 心髓 無門關?, 서울: 경서원, 1989(제 4판).
정성본, ?간화선의 이론과 실제?, 서울: 동국대출판부, 2005.
     ?선의 역사와 사상?, 서울: 삼원사, 1994.
     ?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 서울: 민족사, 1993.
무문혜개, ?무문관?, 정성본 역주, 서울: 한국선문화연구원,   2004.
육조혜능, ?육조법보단경?, 학담 解義, 서울: 큰수레, 2006  (증보판)
Daisetz Teitaro suzuki, Studies in The Lankavatara sutra, London: George Routledge & Sons, LTD. 1930.

 


3. 논문류
이법산, ?楞伽經의 禪思想 硏究?, 인도철학 4집, 1994. pp.217-249.
최창술, ?선의 실천철학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6.
박문기, ?임제의현의 선사상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3.
柳田聖山, ?語錄の歷史?, 東方學報 제 57冊 拔刷, 1985.
西村惠信, ?禪佛敎における?佛?否定の二類型-臨濟と趙州-?, 印度學佛敎學硏究 68.
長谷部好一, ?佛敎の人間觀?, 日本佛敎學會, 日本佛敎學會年譜 3, 1967.

 

 

 

 

The study on logic system of 'kuan's(公案) in the Gateless Gate (無門關; Wu-wen kuan)

 

Kim, Seok-am / Lecturer,

Department of Zen Buddhism,

Dongguk University

 

Zen-master used whatever methods if they are helpful to enlight his disciples, so in the methods, there are very odd ones in common view as like shouting, hiting, etc. For that reason, We think that kuan(公案) which is a riddle that zen masters give to enlight zen-practicer is also non-logical.

But I think kuan has special logic system. For kuan is for the enlightment of middle way(中道), kuan has the logic form to enlight middle way.

In this paper, we shall see the logic system of koan in the Gateless Gate (無門關; Wu-wen kuan) to test above hypotheses.

For this aim, we examine the logic of the kuans in the Gateless Gate as like 1) Case 1: J?sh?'s "Mu", 2) Case 3: Gutei Raises a Finger, 3) Case 5: Ky?gen's "Man up in a Tree", 4) Case 7: J?sh?'s "Wash Your Bowl", 5) Case 10: Seizei Is Utterly Destitude, 6) Case 11: J?sh? Sees the Hermits 7) Case 14: Nansen Cuts the Cat in Two 8, 8) Case 18: T?zan's "Masagin".

All zen master' enlightment is to enlight the truth of midle way which being is not different to non-being, or being is same to non-being. Zen-masters say about being to the man who attaches to non-being, and non-being to the man who attaches to being, the absolute to the man who attaches to a phenomenon and so on.

For this reason, the kuan of J?sh?'s "Mu" say that there is not the buddha nature of a dog, though there is the buddha nature of a dog. We can enlight the truth of middle way through the logic of kuan.

 

* Key words

the logic system in the Gateless Gate, being is the same to non -being, kuan, zen of the patriarchs, middle 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