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
명예로운 삶, 인사유명, 헛된 명예를 탐하지 말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예를 정치적 생활의 목적으로 삼았다. ‘행복론’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결을 가진 스토아 학파도 건강과 부와 함께 지고선(至高善)을 위해 명예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명예는 인간 존엄에 대한 중요한 덕목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 조상들, 특히 선비들은 명예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높이 여겼다. 명예는 높은 자리나 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인격적 존엄에 대한 자각이 선행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칭찬하고 존경하는 게 바탕이며 핵심이다.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이제 법적으로 금지된 명예 살인(honor killing)이 여전히 성행한다. 아마도 명예 때문에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이상한(?) 생물은 오로지 인간뿐인 것만 같다.
인간의 명예, 그것도 삶 전체를 관통하는 명예에 대한 상찬과 집착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 가운데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보다 또렷한 말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표사유피 인사유명(豹死留皮 人死留名)’이란 말은, “짐승도 가죽을 남겨 세상에 이익을 주는데 하물며 사람은 더 훌륭한 일을 해 좋은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흔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운운하지만 원래는 표범이 맞다. 하기야 ‘표범’이나 ‘범’이나 모두 고양잇과 맹수들이니 크게 다를 것도 없겠지만).
호랑이는 가죽으로 알 수 있고 사람은 이름으로 빛난다(人在名虎在皮)는 말과도 함께 쓰인다.
이 고사는 중국의 24사(二十四史) 가운데 하나인 ‘오대사(五代史)’의 ‘왕안장전(王彦章傳)’에 나온다.
생전에 글을 전혀 배우지 못해 일자무식이었지만 병졸에서 시작해 후량(後梁)의 태조(太祖)인 주전충(朱全忠)의 장군이 된 용장 왕언장은 하나의 무게가 백 근이나 되는 한 쌍의 철창을 들고 늘 주전충의 곁을 따라다녔다.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나 그 철창을 옆에 끼고 적진을 누비며 놀라운 전공을 쌓았다. 그런 그의 용맹을 기려 사람들은 그를 왕철창(王鐵槍)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왕언장은 비록 무장이었고 무지한 사람이었지만 충성심과 명예심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의 소종(昭宗)을 살해하고 애제(哀帝)를 세우고 결국은 당을 멸망시킨 주전충은 즉위 6년 만에 아들 주우규(朱友珪)에게 피살됐다. 탐욕과 살인은 끊이지 않았다. 주우규는 동생에게 피살되는 등 권력 다툼이 이어지다 마침내 양나라(후량)에 내분이 일어나게 됐다. 진왕(晉王) 이존욱은 황제가 되어 국호를 당(唐)이라 칭하고 양나라와 대치하게 됐다. 왕언장은 초토사(招討使)로 출전해 싸우다가 패해 파면됐다.
그러나 곧 당나라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다시 등용됐다. 그는 용맹스럽게 나아가 싸웠다. 하지만 기우는 나라의 운명을 그 혼자 힘으로 버티게 할 수는 없었다. 중과부적이었다. 그에게 남은 병사는 고작 500명뿐. 그는 그 소수의 인원으로 끝까지 수도를 지키다가 상처를 입었고 결국 포로가 됐다. 그것으로 양나라는 끝이었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는다
포로로 잡힌 왕언장의 용맹을 아낀 당제는 그를 친히 불러 후하게 대접하고 자신의 휘하에 들어올 것을 권했지만 왕언장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침에는 양나라를 섬기다가 저녁에 당나라를 섬긴다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대하겠소. 기꺼이 죽음을 택하겠으니 허락해 주시오.”
왕언장은 그렇게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양나라의 운명도 끝났다.
구차한 삶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던 그 왕언장의 좌우명이 바로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의 ‘표사유피 인사유명’이었다.
그는 일자무식의 무장이었고 망국의 장수에 불과했지만 그의 의기는 학식이 높은 지식인이나 높은 권좌를 차지한 왕이나 대부보다 훨씬 존중과 흠숭(欽崇)을 받았다.
표범이나 호랑이가 가죽으로 이름을 날리는 건 호랑이다운 풍모와 위엄 때문이고 사람이 이름을 남기는 건 사람답게 살아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걸 의도하고 좇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건 헤아리지 않고 그저 그 말에만 매달리면 자칫 그 굴레에 묶여 자신의 삶을 망치기 십상이다.
현대의 표준말인 ‘서울말’ 대신 백제와 신라의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해 주목을 끌었던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에 기가 막힌 한 장면이 나온다. 장수 계백은 패배가 뻔한 전장에 나가기 전 가족을 불러 모은다.
어차피 함락되면 온 가족이 적의 포로가 될 터인데 적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제 손으로 죽이는 게 낫다며 칼을 들었다. 그때 계백의 아내(김선아 분)가 내뱉었던 대사가 압권이었다.
“뭐시여? 호랭이는 뒈져서 가죽을 냉기구, 사람은 뒈져서 이름을 냉긴다구? 웃기고 자빠졌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루 혀야제.
호랭이는 그 잘난 ‘가죽’ 땜시 뒈지고, 사람은 그 잘난 이름값 허느라 개죽음 허는 겨, 이 화상아!”
사람들이 범을 잡아 죽이는 건 사람을 해치는 맹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가죽이 탐나기 때문이다. 그 가죽 때문에 범이 죽는다는 계백의 처가 내뱉은 한탄이야말로 진리 중의 진리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 잘난 이름 석 자 남기기 위해 목숨마저 초개처럼 날린다.
명예라는 허명을 좇다가 헛된 망상과 욕망으로 망치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자기 혼자만 망하고 죽으면 괜찮지만 애꿎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삶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온갖 골병 다 들게 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본인 자신이야 제가 원하는 바를 위해서고, 한 번 사는 삶, 원하는 것 하다가 말아먹어도 회한은 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뒷바라지 하느라 곁다리에 부록으로 삶을 망쳐야 하는 가족이나 친지들은 무슨 죄인가 말이다.
자기가 성공하면 ‘가문의 영광’이라며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정말 치유 불능의 고질병 환자다.
그 잘난 국회의원 선거에 예닐곱 번 떨어져도 칠전팔기의 의지를 과시하며 단골손님처럼, 혹은 4년마다 연례행사 치르듯 선거 몸살에 온 가족 몰아대는 사람에게 정말 그 출마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희생일까.
극히 드물게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오기로 또는 습관으로 출마하고 떨어지고, 출마와 낙선을 거듭할 것이다. 이성적 판단은 고사하고 오기와 자기도취뿐이다.
“못 먹어도 고! 사람은(이런 인물들은 꼭 ‘남자라면’ 운운하는 ‘마초’들이기 십상이다)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하는 거야!”만 외치며 허황된 희망에만 매달린다.
그 잘난 이름 석 자 남기려고 제 인생도 모자라 애꿎은 남의 삶까지 싸잡아 망쳐 놓는다.
패가망신의 지름길 될 수도
명예는 내가 요구해서, 바란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권위가 그렇듯 그건 남들이 존경하고 따를 때 저절로 생긴다. ‘복숭아와 오얏은 말이 없어도 저절로 길이 난다(桃李不言 下自成路)’는 말처럼, 명예는 이름을 남기려고 애쓴다고 해서 남겨지는 게 아니라 제대로 잘 살다 보니 남들이 그 이름을 기억해 주고 기려서 생기는 것이다.
내 삶에 찾아온 이들의 방명록에 스스로 방향(芳香)을 가득 채우는 삶이 이름을 남기게 해 주는 것이다. 높은 자리 차지하거나 많은 재산을 모은다고 이름이 높아지는 게 아니다.
내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서 함께 산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가르침을 나눠주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이름값을 한 것이다. 억지로 이름을 드높이려고 하는 것은 천박한 탐욕일 뿐이다. 그게 바로 사람 살리는 명예가 아니라 정작 사람 죽이는(게다가 남까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 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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虎死留皮 人死留名 호사유피 인사유명
《오대사(五代史)》 〈왕언장전(王彦章傳)〉에 나오는 말이다. 왕언장(王彦章)은 병졸에서 시작하여 후량(後梁)의 태조(太祖)인 주전충(朱全忠)의 장군이 된 용장이다. 그는 하나의 무게가 백 근이나 되는 한 쌍의 철창을 들고 늘 주전충의 곁을 따라다녔다. 전투시 언제나 쇠창을 옆에 끼고 적진을 누벼 사람들은 그를 왕철창(王鐵槍)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주전충이 즉위 6년 만에 아들에게 피살되고 그 아들은 다시 동생에게 피살되는 등 양나라(후량)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왕(晉王) 이존욱(李存勖:장종)은 황제가 되어 국호를 당(唐)이라 하고 양나라와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왕언장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싸우다가 패해 일시 파면되었다가 당나라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다시 등용되었다. 그는 양나라가 멸망할 때 겨우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수도를 지키다가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되었다.
당제(唐帝)는 그의 무용을 아껴 자신의 부하가 되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왕언장은 '아침에는 양나라를, 저녁에는 당나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느냐'며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이때 그의 나이 61세였고, 그가 죽은 후 양나라는 곧 멸망하였다. 왕언장은 생전에 글을 배우지 못해 거의 문자를 알지 못했으나 언제나 즐겨 인용하는 이언(俚諺)이 있었다. 바로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의 '표사유피인사유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이 말처럼 구차히 살아 남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해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겼다. 이 말은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 '인재명호재피(人在名虎在皮)'와 같은 뜻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오대사 왕언장전(王彦章傳)
오대(五代) 시대, 왕언장(王彦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양(梁)나라 태조(太祖)를 따라 전투에 참가하여 큰공을 세웠다. 태조가 죽자, 그는 말제(末帝)를 보좌하며 남북으로 정벌에 참가하여 양나라의 영토를 굳게 지켰다.
양나라와 진(晉)나라가 전쟁을 할 때, 왕언장은 작전 상 두 차례의 실수를 범한 적이 있었는데, 왕언장을 시기하던 어떤 사람이 그를 모함하였다. 그 결과 왕언장은 병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후 반 년 동안, 진나라 군대는 양나라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왕언장은 다시 등용되었다. 첫 전투에서 왕언장의 말이 죽는 바람에 자신도 중상을 입고 생포되고 말았다.
진(晉)나라 왕이 왕언장에게 말했다.
"너는 전에 내가 어린 아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제 이렇게 나의 포로가 되었구나. 항복을 하겠느냐? 내가 듣기에는 네가 병법을 좀 안다더니, 왜 곤주(袞州)를 지키지 못했느냐?"
왕언장이 대답하였다.
"지금 양나라의 대세는 이미 기울었으니, 이는 나 한 사람의 힘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진나라 왕은 왕언장의 용맹에 감탄하여 그를 무척 아깝게 생각하였다. 진나라 왕은 직접 그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그에게 투항을 권유하였다.
왕언장은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보통 사람으로서, 귀국의 왕과는 15년 동안 적대 관계였오. 이제 전쟁에서 패하였으니,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장수된 자로서 아침에는 양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다가, 저녁에는 진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소?
왕언장은 강개한 말투로 말을 계속하였다.
"대왕께서 나에게 죽음을 내린다해도 나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소. 자기의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마땅한 것이오."
이 일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이 있게 되었다(俚語謂人曰. 豹死留皮, 人死留名).
五代?期,梁朝名? “王??” 王彦章??梁太祖朱?南征北?,?立?功,深受重用。梁末帝朱??位后,唐??攻梁?。王彦章受命御?,但因寡不??被?。唐庄宗?王彦章?降。
王彦章?:豹死留皮,人死留名,?死不降,不久就被?害。
·王彦章(왕언장): (863~923) 오대십국 때 후량의 명장. 그는 매 전투 때마다 선봉에서 철창을 들고 돌진하여 군중에서의 별명이 ‘왕철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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