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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의 周易觀과 佛敎觀 - 『주역선해』譯注를 중심으로 -

경호... 2015. 7. 4. 03:45

서울: 한국불교학회, 2013.8.31.

 

 

탄허의 周易觀과 佛敎觀*
- 주역선해譯注를 중심으로 -

 

고영섭ㆍ동국대학교(서울) 불교학과 교수

 

 

목 차

 

Ⅰ. 문제와 구상
Ⅱ. 탄허의 三玄 인식
Ⅲ. 탄허의 『주역선해』 역주
  1. 지욱의 以禪入儒적 『주역』 선해
  2. 탄허의 以儒入禪적 『주역선해』역주
Ⅳ. 탄허의 禪法 이해
Ⅴ. 정리와 맺음

 

 

요약문

 

이 논문은 지난 세기 한국의 대표적 학승이자 선승이었던 呑虛 宅城(1913~1983)의 周易觀과 佛敎觀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그의 불교 內典과 불교 外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佛道儒 三絶의 계보를 이어 불교의 외연을 크게 넓혔다. 또한 탄허는 유교와 도가의 외연도 넓혀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 큰 시선을 열어주었다. 종교인이자 사상가였던 탄허는 한반도의 미래와 동아시아 삼국 및 미국 등 주변국들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관찰하여 비젼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하여 미래에 대한 그의 예지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공간 및 6.25와 휴전, 4.19와 유신, 그리고 민주화와 산업화를 겪어가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빛을 주었다.

 

처음 탄허는 유자와 도자를 넘나들면서 「주역」을 500독하고 10만 여자의 「장자남화경」을 1,000독하였지만 무언가 미진함을 느꼈다. 결국 그는 오대산의 方外道人인 漢巖 重遠의 문하로 출가하여 禪修를 하는 틈틈이 내전뿐만 아니라 외전에 대해 깊이 천착하였다. 탄허의 「주역선해」역주는 蘇眉山(東坡)과 天台學에 의존하는 저자 靈峰 智旭의 ‘以禪入儒’와 달리 의리역에 치중한 程子의 「伊川易傳」과 朱子의 「周易本義」에 크게 의존하면서 ‘유학으로써 선법에 들어가 유자들을 인도하여 선법을 알게 하고자’[以儒入禪]하였다.

 

탄허는 월정사 方山窟과 영은사 一笑窟 등에서 오랫동안 강학하면서 靈峰 智旭의 선행 작업에 일정한 영향과 자극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지욱의 지향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탄허는 유교 본연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주역선해?에 역주를 달았다. 물론 그의 저술들은 외전에 대한 그의 본격적인 저작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들 저술 속에서 탄허는 義湘의 性起觀, 李通玄의 修證觀, 知訥의 性起觀, 鏡虛의 定慧觀, 漢巖의 一鉢禪風을 계승하여 向上一路의 華嚴禪旨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저작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탄허가 젊은 시절부터 內典은 물론 外典까지 아우르며 수많은 전적을 현토 역해하고 강술 강론한 것은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교재의 편찬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탄허가 “한국불교의 미래는 법당 100채를 짓는 것보다 학인들을 공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발언은 지금도 한국불교의 변함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그가 평생 동안 펴낸 수많은 내전의 懸吐口訣 譯解와 외전인 「주역선해」 역주는 한국불교와 한국사상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그는 이 시대에 새롭게 평가받아야 할 주요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주제어: 주역선해, 현토구결, 지욱, 내전, 외전, 향상일로, 화엄선지.

 

 

Ⅰ. 문제와 구상

 

부모의 몸을 빌어 태어나 숨이 멈춰 떠날 때까지 대략 일백년 동안의 인간의 삶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만일 그가 문인, 사가, 철인, 선사, 예인 등과 같은 공인公人이라면 그의 살림살이는 더욱 더 다채로워질 것이다.
백 년 전 유학을 가학으로 한 집안에서 태어난 呑虛 宅成(913~1983)1]은 儒者에서 道者를 거쳐 漢巖 重遠(1876~1951) 2]과 약 3년간 도와 관련된 서신 20여통을 주고받다가 22세에 佛者(佛子)로 탈바꿈하였다.

출가 이후 그는 한평생을 수행자, 역경가, 교육자, 경세가 등으로 살면서 역경 결사와 교육불사에 헌신을 하였다. 탄허는 학인 양성을 위해 한암이 세운 강원도 삼본산 승려연합수련소에 이어 몸소 월정사 수도원과 영은사 수도원을 세워 인재 불사를 하였고, 월정사 方山窟과 영은사 一笑窟에서 내외전을 譯注하며 역경 결사를 하였다. 탄허는 “한국불교의 미래는 법당 100채를 짓는 것보다 학인들을 공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3]는 교육이념 아래 인재 불사에 헌신하였다.

 

그가 수많은 내전內典 4]은 물론 外典 5]까지 아우르며 현토 역해하고 강술 강론한 것은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교재의 편찬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흔히 儒者는 『사서』와 『오경』의 세계관을 자신의 거울로 삼아 내성외왕(內聖外王)적 삶을 추구하는 君子를 이상적 인간상으로 삼는다.

이와 달리 道者는 『道德經』 6]?과 『南華經』7] 및 『열자』와 『황제내경』등의 세계관을 자신의 거울로 삼아 無爲自在하는 삶을 지향하는 지인(至人, 神人, 聖人)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삼는다.

반면 佛子(佛者)는 『아함경』등의 세계관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아라한상과 『반야경』과 『법화경』 및 『정토경』과 『화엄경』과 등의 세계관을 통해 타인의 깨달음을 이루려는 보살상이 하나의 몸속에 구현된 佛體(붓다)를 궁극적 인간상으로 삼는다.

군자와 지인과 붓다는 각기 이름은 다르지만 영원한 대자유의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상통하고 있다. 하지만 삼세의 인과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영원한 대자유를 추구하는 붓다는 현세에서 人乘을 추구하여 공부를 하는 군자와 天乘을 추구하여 수양을 하는 지인과는 구별된다.

 

1] 高榮燮, ?呑虛 宅成의 생애와 사상: 한국불교사적 지위와 한국불학사적 위상?, 『한국불교학』 제62집, 한국불교학회, 2012; 高榮燮, ?한암과 탄허의 불교관: 해탈관과 생사관의 동처와 부동처?, 『한국종교교육학연구』제26집, 한국종교교육학회, 2008. 탄허의 법명 ‘宅成’은 ‘鐸聲으로도 쓴다.
2] 高榮燮, ?漢巖의 一鉢禪: 胸襟(藏?)과 把?(巧語)의 응축과 확산?, 『한암사상』제2집,한암사상연구원, 2007.
3] 1966년 동국대학교 역경원 개원식에서 呑虛선사는 한국불교의 미래는 인재불사가 급선무임을 역설하였다.
4] 內典 교재로는 『신화엄합론』(23권),『능엄경』(3권), 『금강경』(1권),『원각경』(1권), 『기신론』?(1권), 『서장』(1권),『선요』(1권),『도서』(1권)-『절요』(1권), 『초심』(1권)-『치문』(1권), 『육조단경』(1권), 『보조법어』(1권),『선종영가집』(1권),『발심삼론』(1권) 등 15종 40권(책)을 펴냈다. 이외에 법어집으로는 『부처님이 계신다면』(1권, 1979; 1980;1988; 1993; 2001), 『피안으로 이끄는 사자후』(1권, 1997: 2000) 등 2종이 있으며, 입적 이후 문도들이 펴낸 『방산굴법어』(2003; 개정증보판, 2011), 탄허장학회 편의 『탄허강설집』(2003), 월정사 편의 『탄허대사의 선교관』(2004), 탄허불교문화재단 편의 탄허대사의 경학관 1: 역경서문을 중심으로?(2008), 앞의 법어집 두 권에서 발췌해 엮은 『탄허록』(2012)이 있다. 이외에도 한암문도회와 김광식편의 『그리운 스승 한암 』상하(2006), 탄허대종사탄신 10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기념 증언집으로 월정사와 김광식 편의 『오대산의 버팀목』(2011)과 도서출판 교림이 펴낸 『탄허대종사연보』(2012), 월정사와 김광식 엮음의 『방산굴의 무영수』상하(2013) 등이 있다.
5] 外典 교재로는 『주역선해』(3권), 『노자도덕경』(2권),『장자남화경』(1권) 등 3종 6권(책)이 있다.

6] 老子가 주나라가 쇠퇴하자 세상을 등지려고 속세를 떠나 함곡관에 이르자 관의 수령 尹喜가 자신을 위하여 저술을 남겨달라는 부탁을 받고 『道經』(37장)과 『德經』(44장) 上下편(81장)을 지어 도와 덕의 뜻을 5천여 자로 풀이한 뒤 사라졌다.
7] 莊子가 曹州의 南華山에 은거했었는데 그 경을 이름하여 ‘南華(眞)經’이라고 하였다.

 

 

芬皇 元曉(617~686) 이래 통일신라 말기에 佛道儒 삼교에 뛰어난 재주(안목)를 지녔던 인물[三絶]로 널리 알려져 온 고운 최치원(857~?) 이후 한국사상사에서는 적지 않는 ‘삼절’들이 있어 왔다. 이를테면 고려 중기의 敎雄과 李奎報 등을 비롯하여, 조선 초중기의 涵虛 己和와 淸寒 雪岑, 虛應 普雨와 淸虛 休靜, 白坡 亘璇과 茶山 丁若鏞, 秋史 金正喜와 草衣 意恂, 月窓 金大鉉과 鏡虛 惺牛 등은 대표적인 ‘삼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교의 세계관을 가지고서 다른 세계관을 가지게 되면 ‘異端’ 혹은 ‘亂賊’ 또는 ‘背敎’라고 핍박하던 조선 성리학적 세계관8] 이후 이들 삼절의 계보는 잘 이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대한시대(1897~ )에 살았던 탄허는 이러한 삼절의 계보를 이은 희유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9]

 

勉庵 崔益鉉(1833~1906)-艮齋 田愚(1841~1922)-李克宗 계통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통을 이은 집안의 학문에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유자로 출발한 탄허는 도자를 거쳐 불자로 탈바꿈한 뒤에도 평생을 드넓게 배우고[博學] 자세히 물었다[審問]. 출가 이전부터 묻고 배웠던 『사서』와 『삼경』, 『노자』(도덕경)와 『장자』(남화경)를 거쳐 불교의 『기신론』과 『화엄경』및 『육조단경』과 『선종영가집』 등에까지 이르기까지 그의 배움은 넓었고[博] 물음은 깊었다[審]. 그리하여 탄허는 이들 불도유 삼교의 도리를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선풍10]으로 꿰어 靈峯 智旭(藕益11])의 『周易禪解』12]를 현토 譯注하였으며, 『道德經』을 選注13]하고 『南華經』을 현토하여 華嚴禪旨로 역해14]하였다. 이 글에서는 선행연구15]의 검토 위에서 탄허의 『周易禪解』 譯注16]를 통해 최근의 학문적 경향인 융복합(Fusion)시대 이전에 이미 불도유를 넘나들며 횡단적(Crossover) 삶을 살았던 탄허 택성의 周易觀과 佛敎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8] 불교를 양명학과 도가(교)와 함께 이단으로 보아 제자들을 경계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나 젊은 시절 금강산에서 출가생활을 한 뒤 당시의 주류사상인 유학의 시각에서 『도덕경』을 엮고 주해한 『醇言』(말씀을 순치한다)을 남긴 율곡 이이(栗谷 李珥) 또한 유가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양명학과 불교와 도가(교)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9] 물론 이들 이외에도 佛道儒 三絶의 계보를 이었거나 잇는 이들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구체적인 저작을 통해 불도유 삼절의 존재감을 보여준 이들은 凡夫 金鼎卨(1897~1966) 등 ?家(風流) 계통, 圓照 覺性(1936~ ), 東玄 宋贊禹(1951~ ) 등 불교계의 출재가자, 中天 金忠烈(1930~2008)/ 天原 尹絲淳(1936~ ), 琴章泰(1944~ ) 등 유학계의 학자, 多夕 류영모(1890~1981) - 씨알 함석헌(1901~1989)/ 鉉齋 金興浩(1919~2012), 觀玉 李賢周(1944~ ) 등 기독교계의 목사, 無爲堂 張壹淳(1928~1994)/ 芝河 金英一(1941~ )/ 禱? 金容沃(1948~ ) 등 재야의 지식인들도 불도유 삼교를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갔거나 만들어 가는 이들이 있다.

10] 高榮燮, ?한암과 탄허의 불교관: 해탈관과 생사관의 동처와 부동처?, 『종교교육학연구』제26호, 한국종교교육학회, 2008.
11] 탄허 懸吐譯解 ?周易禪解?1.2.3.(교림, 1982; 2010)는 雲棲 ?宏(1535~1615)과 함께 명대(明代)불교의 二大明星의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明末 淸初의 4대가의 한 사람인 八不道人 즉 靈峯 智旭(藕益, 字)의 필생의 역작인 ?周易禪解?에 대해 懸吐와 飜譯과 注를 덧붙인 것이다. 지욱은 그의 아호인 八不道人답게 一宗 一派에 매지는 않았으나 천태학의 文法과 文勢를 적절히 원용하였다.
12] 靈逢 智旭, 『주역선해』(嘉興大藏經 제20책, 臺灣 新文豊출판공사); 金陵刻經處, 『주역선해』(목판본, 민국4년, 1915); 탄허 懸吐譯解, 『周易禪解』1.2.3.(교림, 1982; 2010); 施維·周建雄 整理, 『周易·四書禪解』(사천: 파촉서사, 2004); 박태섭 역해, 『주역선해』(불광출판부, 2007).
13] 탄허 懸吐譯解, 『老子道德經選注』1.2(교림, 1983; 1996; 2011). 이 저술은 국역하고 가려 뽑은 註解를 덧붙인 것으로 탄허는 “옛 사람의 정밀하고도 隱微한 옛 註解를 선별하여 講義本으로써 注를 삼고 諸家의 해석을 보조로 삼았다”고 하였다.
14] 탄허 懸吐譯解, 『莊子南華經』(교림, 2004). 장자가 남화산에 칩거하여 강론한 『남화진경』을 현토하고 강술 역해한 이 저술은 탄허대사 입적 이후 ?中에 묻혀 있던 『장자』 內7篇 원고를 발견하여 출판한 것이다.
15] 오진탁, 『감산의 노자풀이』(서광사, 1989); 오진탁, 『감산의 장자풀이』(서광사, 1990);방인, ?주역선해를 통하여 본 지욱의 以禪入儒觀?, ?유준수박사화갑기념논문집?, 한양대 철학과, 1989; 방인, ?퓨전의 시대와 크로스오버의 철학?, ?문학 사학 철학? 통권 10호, 대발해동양학한국학연구원 한국불교사연구소, 2007; 방인, ?지욱의 ?周易禪解?: 퓨전의 시대와 크로스오버의 철학?, 동서사상연구소논문집,'동서사상' 제3집,2007; 崔一凡, ?周易禪解 연구-性修不二論을 중심으로?, 한국주역학회 주최 ?제3회 국제역학학술대회논문집?, 2007; 崔一凡, ?주역선해의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 ?
가산학보? 제11호, 2003; 홍종숙, ?지욱의 '周易禪解' 飜譯 연구-건곤괘를 중심으로 ?,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석사논문, 2005; 금장태, ?불교의 유교경전 해석-?山과 智旭의 四書解釋?(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금장태, ?불교의 주역·노장 해석- 智旭의 周易禪解와 ?山의 老莊禪解?(서울대출판부, 2007); 靑和(길봉준), ?주역선해연구-불교사상과 유교사상의 융합?(운주사, 2011).
16] 표지의 제목인 ‘懸吐譯解’와 달리 탄허는 자신의 원고에서 우리말로 ‘옮기고 주를 덧붙였다’는 뜻으로 ‘譯注’라 적고 있다. 

 

 

Ⅱ. 탄허의 三玄 인식

 

『주역』과 『노자』(도덕경)와 『장자』(남화경)는 각기 ‘道’(Tao)의 형용인 玄의 세계를 추구한다. 중국 魏晉시대 이래 유자와 도자들은 玄(the Mystery)의 이치를 탐구해 왔다. ‘현’은 천자문의 훈처럼 ‘검을 현’이 아니라 ‘가믈 현’이다. 여기서 ‘가믈다’는 것은 너무나 깊어 ‘그윽하기도 하고’, ‘아득하기도 하며’, ‘막막하기도 한’ 道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도의 모습은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땅의 경계인 지평선(地平線), 바다의 경계인 海平線, 하늘의 경계인 天平線 안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 밖의 경계처럼 그 중심(안)자리와 그 가장(밖)자리의 경계가 曖昧模糊 하여 잘 파악할 수 없다.
때문에 노자는 이처럼 현상을 지배하는 배후의 그 무엇을 형용하는 도의 모습을 ‘현’으로 해명하고 있다.

 

노자는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것[視之不見]을 ‘색깔이 없다’ 하고[名曰夷],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것[聽之不聞]을 ‘소리가 없다’ 하고[名曰希],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것[搏之不得]을 ‘모양이 없다’ 하니[名曰微] 이 세 가지[此三者]는 언어 문자로 사량할 수 없다[不可致詰]. 그러므로 혼융해서 하나가 되므로[故混而爲一] 저 높이 있는 해와 달도 그 광명을 밝게하지 못하고[其上不?], 저 아래의 두터운 어둠마저도 그 빛을 흐리게 하지 못한다[其下不昧]”17]고 하였다. 또 도는 “면면히 이어지기는 하지만[繩繩兮]
이름붙일 수 없고[不可名], 한 물건도 없는 자리로 돌아가니[復歸於無物]] 이것을 일컬어 모양 없는 모양이요[是謂無狀之狀] 형상 없는 형상이라고 하며[無象之象] 이것을 일컬어 홀황하다(是謂惚煌)고 한다. 그것을 맞으려해도 그 머리를 찾을 수 없고[迎之不見其首], 그것을 좇으려해도 그 꼬리를 볼수 없다[隨之不見其後]. 옛 도를 가지고[執古之道] 지금 세상을 다스리면[以御今之有] 능히 만물의 근원을 알게 될 것이니[能知古始] 이것을 도통의 전수라고 일컫는다[是謂道紀]”18]고 했다.

 

17] 老子,『道德經』 제14장; ?山, 『老子道德經解』 제14장 참고.
18] 老子, 『道德經』 제14장; ?山,『老子道德經解』 제14장 참고.

 

때문에 공자 이후 유교의 경전이 된 『주역』과 도가의 경전인 『노자』와 『장자』는 ‘현’(玄)의 도리를 추구한다 하여 ‘震旦三玄’ 혹은 ‘三玄學’이라 하였다.

魏晋시대에 이들 세 학문이 유행하여 그 시대의 학문을 흔히 ‘魏晋玄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현의 도리를 추구하는 『주역』이론에 대한 유교적 해석을 ‘유가역’(儒家易)이라 하고, 도교적 해석을 ‘道家易’이라 하듯 불교적 해석을 가한 지욱의 『주역선해』는 ‘佛家易’이라 해 왔다. 중국불교사에서 불자로서 타교 관련 저술을 지었거나 그 용어를 원용하여 불교를 해명한 이들은 당대의 澄觀과 宗密 및 명대의 ?山과 智旭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유자에서 불자로 전향한 감산 덕청과 영봉 지욱(우익)은 드물게도 '노장' 현학과 『주역』현학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감산은 주로 노장과 유학(春秋左傳心法 등)의 이해가 깊었고, 지욱은 『주역』과 '사서'? 및 기독교의 이해에 깊었다. 탄허는 이들 노장 현학과 주역 현학 모두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도표 1> 불자의 타교 관련 저술 목록

 

 

출가 이전 탄허는 유자와 도자로서 살았지만 불자로 탈바꿈한 이후에는 불도유 삼교를 가로지르는 횡단적 삶을 산 감산 덕청과 영봉 지욱을 깊이 의식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19]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감산과 지욱의 불도유 삼교를 가로지르는 삶을 추종하거나 계승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탄허의 『주역선해』 역주는 소미산(東坡)과 天台學에 의존하는 저자 靈峰智旭의 ‘以禪入儒’와 달리 의리역에 치중한 程子의 『伊川易傳』과 주자(朱子)의 『周易本義』에 크게 의존하면서 ‘유학으로써 선법에 들어가 유자들을 인도하여 선법을 알게 하고자’[以儒入禪]하였다.

 

공자 이후 유교의 경전이 된 『易經』은 伏犧氏와 文王(?~1120?; 1099?~ 1050, B.C.E.)과 周公( ?~1095, B.C.E.)과 孔子(551~479, B.C.E.)에 의해 단계적으로 집성되었다. 복희는 64괘의 卦象만 그렸고, 夏나라는 連山역, 殷나라는 歸藏역이라고 하여 각기 卦辭와 爻辭로 길흉을 판단하였다. 문왕은 彖辭(卦辭)를 묶어 ‘易’이라 하였다. 주공은 그 ‘역’에 효사들을 덧붙여 묶었고, 공자가 거기에 또 傳을 더하여 이해를 도왔으므로 『周易』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20]

 

종래에 유교의 주요 경전인 『주역』이 인간의 길흉을 점치는 술법 혹은 점서의 원전으로 이해되어 온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본 이들이 그렇게 단정하여 왔기 때문이다. 고대의 『주역』은 문왕의 괘사에 주공의 효사가 붙여진 64괘를 上經과 下經으로 나눈 것이다. 여기에 공자가?上經彖傳?, ?下經彖傳?, ?上經象傳?, ?下經象傳?으로 구분하고 乾과 坤 두괘에만 붙인 ?文言傳?, ?繫辭上傳?, ?繫辭下傳?, ?說卦傳?, ?序卦傳?, ?雜卦傳?의 날개를 달았으므로 이 모두를 十翼이라고 불렀다.21]

때문에 종래에 술법서 또는 점술서로 이해되어온 것과 달리 『주역』은 64괘와 같은 상징적 부호와 이것을 풀이하고 있는 괘효사 및 64괘에 대한 철학적 원리를 해명하는 ?계사전?과 ?설괘전? 그리고 ?십익전?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역』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이 이루어져 왔다.

첫째는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 천지자연의 진리와 세상사에 대한 이치와 가치를 해석하고 밝혀내어 이것을 정치적 사회적 이념과 개인적 삶의 가치로 실천하려는 義理易學의 관점이다. 둘째는 인간의 길함을 좇고 흉함을 피할 占筮와 象數에 담긴 이치와 미래에 대한 일을 예측해 내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象數易學의 관점이다. 이들 두 관점과 달리 불교적 혹은 선학적 관점에서 주역을 해석한 경우도 있었다. 유자들은 주로 의리역학의 관점에서 『주역』을 해석해 왔다. 불자인 지욱은 의리역학의 관점을 견지하면서도 불교의 화엄선적 시각에서 『주역』을 풀어내었다.

 

탄허 역시 정자와 주자의 설을 다수 인용하면서 의리역학의 관점에서 역주를 달고 있다. 그런데 그는 『노자도덕경』 선주와 『장자남화경』역해에서 정자와 주자의 설을 다수 인용하면서 불교(화엄선)적 관점에서 주석을 달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삼현 이해가 정자와 주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명대의 지욱의 불교(法華/天台) 선해와 청대의 宣潁茂의 영향까지 받으면서도 이를 다시 선학적 관점에서 풀어내려고 시도한 점이 주목된다.

 

탄허는 평생을 화엄과 선법의 접점과 통로를 모색하며 살았다. 때문에 탄허의 『주역선해』의 역주나 『노자도덕경』 선주 및 『장자남화경』 강술 역해에는 화엄선지가 훈습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삼현 이해는 법화/천태적 관점을 원용하는 지욱과 선적 관점을 원용하는 선영무와 변별되는 지점이며 화엄선가로서의 탄허의 안목을 보여주고 있다.

 

19] 탄허시대에 ?山 德淸의 저술이 널리 유통되지 않아 탄허가 감산 덕청의 저술을 직접 볼 수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법제자인 圓照 覺性의 『장자남화경』역해 서문에 준해 미루어 보면 일부나마 접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확정할 수는 없다.
20] 智旭, 『周易禪解』, 上經之一.
21]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앞의 다섯 傳을 『주역』上經과 下經에 맞추어 끼워 넣었고,그 결과 ?계사전? 등 나머지 다섯 傳은 上下經과 합본되지 않은 채 따로 유통되어 왔다.

 

 

Ⅲ. 탄허의『주역선해』역주

 

인도에서 전래되어온 불교는 중국 고유의 토양에서 비롯된 『주역』과 『노자』와 『장자』의 개념틀을 원용하여 용어를 해석하면서[格義] 그 토착화를 앞당길 수 있었다. 고구려 고승에게 편지를 보내 불교를 전한 중국 晋
나라의 支遁(支道林, 314~366)은 『주역』의 文辭를 원용하여 佛德을 비유한 ?釋迦文佛像讚?을 지었다. 그는 『주역』의 개념을 원용하여 석가문불을 기렸으며 이것은 불교를 펴기 위해 현학을 원용하였던 것이지 현학 자체를 탐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조짐이 드러나기 전에 앞일을 예지하는 부처님의 신통력은
육효 만으로 64괘 상을 나타내는 ?주역?의 여섯 방위를 넘어서네.
그 가르침은 완전무결하여 모두를 껴안으며
그 교화의 공덕은 삼황오제를 능가하네.
그의 큰 국량은 태허보다도 넓고 크며
그의 정신은 천지(兩儀)를 크게 뒤덮네.

『주역』음양사상의 간이함과 단순함은 부처를 기다린 뒤에야 형체를 이루고

음양의 큰 조화로움은 부처에 의거해 일컬을 수 있는 것이네
점서에 쓰이는 시초풀은 부처의 정신의 고요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주역』의 괘들은 곧 부처의 지혜가 두루함을 본 뜬 것이네.22]

 

위진 남북조시기를 거치면서 중국불교계는 三玄學의 개념을 빌어 불교용어를 풀이하였던 과도기의 格義佛敎를 지나 정면기의 本義佛敎를 전개하였다. 이제 본의불교의 기반 위에서 불교계는 敎相判釋의 방법론에 기초하여 宗派形成을 도모하였다. 제일 먼저 천태종의 창종을 필두로 하여 화엄종과 정토종 및 선종이 탄생하였다. 화엄종의 두순-지엄-법장에 이어 제4조가 된 澄觀(738~839)은 『주역』을 眞玄, 『노자』를 虛玄,『장자』를 談玄이라고 하였다.23]

하지만 징관은 『화엄경소』에서 매번 『노자』와 『장자』를 인용하면서 “그 문장은 취해도 그 뜻은 취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그의 제자인 宗密(780~841)은 “유가와 도가는 몹시 간략해서 사람의 근본을 캐지 못했다”고 비판했으며, 영명 연수는 『종경록』에서 유가와 도가를 더 한층 이단으로 몰아쳤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와 도가는 모두 외도의 가르침이었을 뿐이다.

 

한편 『역』에 대한 道家적 해석으로는 한 대 魏伯陽이 주역의 괘효로 鍊丹法 즉 양생술의 체계로 설명한 『周易參同契』(142년), 王弼(226~249)이 노장의 도가적 존재론과 연계시켜 풀어낸 『周易注』(249년), 張君房이 도교
경서로서 편찬한 『雲?七籤』(1019)이 대표적인 저술들이다. 또 全眞道敎에서도 주역에 의해 수행의 과정을 풀이하려고 시도해 왔다. 呂洞賓(798~?)은 역의 원리로 內丹法을 풀이한 『太乙金華宗旨』를 펴냈고, 수도의 과정을 64괘상으로 해명한 ?詠道六十四首象卦數?(『呂祖全書』)를 지었다. 전진도의 남종 初祖인 禪仙 紫陽眞人 張伯端(984~1082)은 역의 원리로 金丹大道를 풀이한 『悟眞篇』을 펴냈고, 전진도의 북종 龍門派의 제11대 조사인 劉一明(1734~1821)은 도교 내단 수행의 관점에서 주역 괘상을 풀이한 『周易闡眞』을 저술하였다.24]

 

『주역』에 대해서는 종래에 유자들에 의해 적지 않은 주석들이 이루어져 왔다. 또 도사들에 의해서도 많은 주석들이 만들어져 왔다. 그리고 불교와 선학의 접점을 통해 이루어진 眉山 蘇軾(1037~1101)의 『東坡易傳』,明대에 대두된 王陽明(1472~1529)의 心學에 자극받아 『역』을 불선(佛禪)의 시각에서 풀어낸 저술들도 있었다. 이런 것들로는 焦?의 『易筌』과 방시화(方時化)의 『易引』등을 거론할 수 있다.25]

같은 계열로는 李贄(1527~1602)의 『九正易因』도 있다.26]이러한 선구적 저작들이 있었기에 명말 청초의 선사인 靈峯 智旭(藕益, 1599~1655)27].28]은 『주역선해』(10권, 1641~1645)에서 불교적 관점 중 특히 천태학적 관점에서 해석해 낼 수 있었다.

 

불교계에서는 당대의 징관 이후 李? 등을 비롯한 몇몇 불자들에 의해 불도유 삼교 회통론 내지 일치론이 제기되기는 했지만 삼교 회통론 혹은 삼교 조화론을 본격적으로 거론한 것은 명말 청초 시기였다. 당시 선사들로서 박학과 심문에 집중하였던 蓮池大師 ?宏 (1535~1615)과 紫栢 眞可(1543~1603) 및 ?山 德淸(1546~1623) 등과 같은 삼대가 역시 『노자』와 『장자』와 『주역』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런데 『주역』을 선해한 지욱과 그의 『주역선해』에 현토와 역주를 한 탄허의 견해는 상통점이 적지 않다.
다만 지욱이 불교적 관점 중 특히 천태학적 관점을 의식하면서 ‘以禪入儒’적 『주역』 선해를 했다면, 탄허는 정자와 주자의 해석을 역주에 다수 인용하면서 화엄선적 시각을 의식하면서 ‘以儒入禪’적 역주를 달고 있다는 점이
상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22] 支遁, ?釋迦文佛像讚?, 道宣, 廣弘明集: 佛德篇?(『大正藏』제52책, p.196상); 박태섭역주, 주역선해, pp. 20-21 참고.
23] 澄觀, ?華嚴玄談? 권8 (?大正藏?제36책).
24] 박태섭, 앞의 책, p. 19 참조.

25] 廖名春, ?주역철학사?, 심경호(예문서원, 2000), p. 581.

26] 智旭은 ‘비’(否)괘 해석에서 이것을 인용하고 있다.

27] 智旭은 ‘同人’ 九五 爻辭의 해석에서 楊萬里의 ?誠齋易傳?을 인용하고 있다.
28] 智旭은 蓮池大師 ?宏(1535~1615), 紫栢眞可(1543~1603), ?山德淸, 1546~1623)과 함께 明末淸初의 四大家로 알려진 대표적 고승이다.

 

 

1. 지욱의 以禪入儒적 『주역』선해

 

명말 청초 이래 불도유 삼교의 混融조화론은 불교를 우위에 두고 다른 전통의 이론을 포괄하려고 하였다. 당시 운서 ?宏과 감산 ‘德淸’의 ‘佛儒’조화론은 특히 감산의 문하였던 雪嶺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설령은 다시 그의 문하이자 법명을 준 智旭에게도 영향을 주어 佛儒 회통론으로 나타난 것으로 짐작된다. 지욱이 자기 분야 즉 불교(천태, 선법)를 우위에 두고 다른 전통의 이론을 포괄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자에서 불학자로 탈바꿈한 지욱은 불교의 13종 중의 하나인 禪法에 입각한 해석인 ‘禪解’라고 제명을 붙였지만 사실은 원시불교와 부파불교를 비롯하여 계율과 유식 및 천태와 화엄과 정토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전 사상
을 아우르며 해석을 펼쳐나가고 있어 ‘佛解’라고 할만한 저작이다.

 

그는 “유가 텍스트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썼다는 점에서 격의 불교가들과 다르며, 사상적으로도 유가와 불가 사상을 연결하는 對位法과 개념적 置換 작업에 깊이 노력을 더함으로써 상호 이해의 가능성을 폭넓게 만들었다.”29] 그리하여 지욱은 “유학자의 눈으로 『주역』을 통하여 불교 三藏을 들여다보고, 또 불교의 눈으로 『주역』 속에 담긴 유가 형이상학을 들여다보았다.”30] 천태종 계보의 거의 마지막 인물이었던 지욱이 불교의 어느 한 사상에 구애받지 않고 불교의 제종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걸림없는 삶과 세계관에 의거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지욱이 “내가 역을 해석하는 까닭은 ‘선법으로써 유교에 들어가’[以禪入儒] 당시의 유자들을 이 끌어 禪을 알게 하고자 힘쓸 뿐”31이라고 저술 의도를 적고 있는 것처럼 그는 유자들로 하여금 불교 즉 선법을 알게 하고자 이 저술을 지었다. 여기서 선은 다분히 보편적 선법을 지향하는 천태선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29] 박태섭, 앞의 책, p. 22.
30] 박태섭, 앞의 책, p. 22.
31] 智旭, ?周易禪解?序文.. “吾所由解易者, 無他, 以禪入儒, 務誘儒以知禪耳.”

 

지욱은 『주역선해』의 성격을 해명하기 위해 四句 분별의 변증법적 논리를 원용한다.

 

"①『주역선해』는 역이다. (有)
② 『주역선해』는 역이 아니다. (空)
③ 『주역선해』는 역이기도 하고 역이 아니기도 하다. (亦有亦空)
④ 『주역선해』는 역이 아니기도 하고 역이 아닌 것도 아니기도 하다. (非有非空)"

 

지욱은 이러한 긍정, 부정, 긍정종합, 부정종합이라는 사구 분별의 논리를 원용하면서 『주역』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의 측면에 구애받지 않고 전체를 아우르며 저술하려는 그의 방법론적 구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성격 규정에 대해 예상할 수 있는 네 가지 비방[四謗]을 제시한다.

 

"① 역 해석이 역이라고 긍정하면, 역이 불교의 출세간법을 돕는 것이 되어 보태었다는 비방[增益謗]
② 역이 아니라 부정하면 그가 불교를 해설했을 뿐이지 역을 알지 못한 것으로 손상시켰다는 비방[減損謗]
③ 역이면서 역이 아니라고 긍정종합을 하면 유교는 불교가 아니요, 불교도 유교가 아닌 것이 되어 서로 어긋난다는 비방[相違謗]
④ 역이 아니면서 역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부정종합을 하면 유교는 유교일 수 없고 불교는 불교가 될 수 없어 말장난 한다는 비방[戱論謗]"

 

지욱은 증익방, 감손방, 상위방, 희론방이라는 네 가지 비방에 대해 만일 유교 혹은 불교 중 어느 하나의 입장에만 붙들리지 않는다면 정립과 반정립, 긍정과 부정의 어느 하나의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자유자재롭게 不思義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32] 그리고 그는 이러한 비방을 넘어서기 위해 네 가지 실증된 진리[四悉檀]의 개념을 원용하여 자신의 진리관을 드러낸다.

 

"① 불교인이면서 유교에 통달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해석은 역이다. (世界悉檀)
② 불교인이지 유교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자신의 해석은 역이 아니다. (爲人悉檀)
③ 불교와 유교의 분별을 벗어나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음을 아는 입장에서 자신의 해석은 역이면서 역이 아니다. (對治悉檀)
④ 불교와 유교에 불변의 실재가 있으니 고정된 유교나 고정된 불교가 아니요, 실성이 없는 문자의 명목을 벗어나 순간에 불가사의한 이치를 안다는 점에서 자신의 저술이 역이 아니면서 역이 아닌 것도 아니다. (第一義悉檀)"

 

네 가지 실증된 진리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 진리관을 보여주는 지욱은 『주역』의 저술에 동참한 복희, 문왕, 주공, 공자의 위치를 자리매김시키고 있다. 그는 『주역선해』를 지으면서 시작을 ‘건’괘에서 하지 않고 ‘상경’과
‘하경’ 뒤에 실려있는 공자의 ‘십익전’의 첫머리인 ?계사전?부터 시작함으로써 실증된 진리의 개념을 드러내는 최종단계인 제일의실단에 공자를 자리 매김시키고 있다. 이것은 지욱이 네 명의 공동 저자 가운데에서 공자의 ‘십익전’을 ‘역’ 해석의 확고한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서 ‘역’ 자체의 발현으로 받아들였던 것33]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욱은 『주역선해』의 서두에서 ‘건’괘와 ‘곤’괘를 불교와 연관시켜 풀어나가고 있다. 먼저 ‘건’괘의 4덕인 元亨利貞과 불성이 갖추고 있는 常樂我淨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는 ‘건’괘의 덕을 강건함[建]이라고 할 때, 이 강건
함의 대상에 따라 형통(亨: 元亨)하는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上品 十惡에 강건한 자가 지옥에 떨어지는 경우에서 上上品 十善과 십선이 ‘法界’요 ‘佛性’임을 환하게 아는 자가 無上道理를 원만하게 이루
는 경우까지를 불교에서 십법계의 각 단계에 강건하게 형통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바름[貞: 利貞]을 이루는 과제를 불교 교리에 근거하여 ‘三惡’과 ‘三善’ 및 ‘중·변의 다름의 분별’[分別中邊不同]과 ‘일체가 중도
아님이 없음’[一切無非中道] 등으로 사특함[邪]과 올바름[正]의 분별기준을 마련함으로써 비로소 바름(利貞)의 경계가 마땅히 강건하게 실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34]

 

32] 방인, 앞의 글, p. 216.
33] 금장태, ?지욱의 '주역선해'와 ‘易’체계의 불교적 이해?, '불교의 주역 노장 해석'(서울대출판부, 2007), pp. 66-67.

34] 智旭,'주역선해' 권1, 3절, ‘乾’

 

지욱은 또 ‘건’괘 ‘단전’을 풀이하면서 ‘건’을 씩씩하고 용맹하여 파괴할 수 없는 불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는 ‘건’의 4덕인 원형이정은 불성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4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彖傳’의 “만물이 의거하여 시작되니 이에 하늘을 통섭한다”[萬物資始, 乃統天]는 해석에서 “시험삼아 세간의 만물을 보면 어느 하나도 참되고 항상한 불성을 따라 수립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설사 불성이 없다면 또한 삼천(세계)의
性相이나 百界와 千如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常主佛性을 들어 올리면 世間果報天과 方便淨天과 實報義天과 寂光大涅槃天이 통섭되지 않음이 없다”35]고 하였다. 이것은 한 생각이 삼천의 법계를 내포한다[一念三千]
는 논리에 의해 만물은 ‘건’이라는 하나의 불성에서 성립되며, 이 하나의 불성이 없으면 전체의 세계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지욱은 “구름이 가고 비가 내리며 온갖 사물이 흘러 형체를 이룬다”[雲行雨施, 品物流形]는 구절을 “이 불성의 상주법신에 의거하여 응신의 구름과 팔교의 비가 있게 되니, 三草와 二木으로 하여금 각각 種姓을 일컬어 생장하게 할 수 있게 한다”36고 보아 법화천태학의 이론에 의거하여 ‘건’괘에 근거한 만물의 생성과정을 풀이하고 있다. 또 ‘건’괘 ?단전?의 “시작과 마침을 크게 밝히니 여섯 자리가 때맞추어 이루어지며, 때맞추어 여섯 용을 타고 하늘에서 몰고 간다”[大明終始, 六位時成, 時乘六龍, 以御天]는 구절에 대해 지욱은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실상이란 시작도 아니요 마침도 아니라는 전제 위에서, ‘다만 궁극의 철저한 증득에 의거하여 이를 마침이라 하고, 중생이 근본하는 이치를 이름하여 시작이라 하니, 그 시작도 불성이요, 마침도 불성임을 알면 미혹함과 깨달음의 시절 인연에 의하여 임시로 여섯 자리를 다르게 세운 것이다. 자리는 비록 여섯으로 나누어지지만 자리마다 모두 용이니, 이를테면 理卽佛에서 究竟卽佛까지이다. 이렇게 ‘일치하면서 항상 여섯이 되는’[卽而常六] 修德을 타고서 ‘여섯이면서 항상 일치하는’[六而常卽] 性德을 드러내므로,여섯 용을 타고 하늘에서 몰고 간다고 이름한다.”

 

35] 智旭,『주역선해』권1, 3절, ‘乾’
36] 智旭, 『주역선해』권1, 3절, ‘乾’

 

이처럼 천태가인 지욱은 ‘건’괘 ?단전?을 천태학에서 원교의 보살행에서 드러나는 지위인 理卽, 名字卽, 觀行卽, 相似卽, 分證卽, 究竟卽의 여섯 단계[六卽位]로 불성이 드러남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6즉’을 ‘건’괘의 여섯 자리에 상응시켜 풀이하면서 시작과 마침의 의미도 본래의 실상에서는 구분되지 않지만 불성의 실현단계에서 출발단계의 凡夫과 완성단계의 부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건’괘 ?단전?의 “크게 조화로움에 보조하여 합한다”[保合太和]는 구절에 대해서 “이 상주불성의 건도는 비록 만고에 걸쳐 변하고 파괴됨이 없지만 일체의 변화하는 작용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삼초와 이목’이 각기 그 자리에 따라 불성을 증득할 수 있게 하며, 이미 불성을 증득하면 자리마다 모두 법계이니, 일체의 법계를 통섭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다”고 풀이하였다.

 

지욱은 “여러 사물의 위로 머리가 나오니 만국이 모두 편안해졌다”[首出庶物, 萬國咸寧]는 구절에 대해서는 “여래가 성도함은 九界의 겉으로 머리를 내놓으니 온 세상의 중생이 불성 속에 편안히 머물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이것은 ‘건’에서 만물이 생성되고 ‘6효’를 통해 전개되는 현상을 불성에 근거하여 만물이 성립되고 불성이 여섯 단계로 드러나는 과정에 상응 시킴으로써 천태학의 교의를 ‘역’해석에 철저히 적용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37] 지욱은 ‘건’괘 ‘6효’에 대해서도 性德과 修德의 개념을 원용하여 풀고있으며, ‘건’괘와 ‘곤’괘의 상응관계를 ‘원융한 이해’[圓解]와 ‘도를 닦음’[修道]으로 대비시키고, ‘건’과 ‘곤’을 ‘지혜’[智]와 ‘수행’[修]의 관계로 파악하면서
수행에는 지혜를 통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며, 지혜가 없는 수행은 暗證의 미혹을 빠지게 된다
밝히고 있다.

 

그는 또한 ‘곤’괘는 상당히 함축하고 있지만 쌓아 두지는 못한 如來藏性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건’과 ‘곤’을 ‘지혜와 이치’[智-理]의 관계, ‘관조와 적멸’[照-寂]의 관계, ‘본성과 수행’[性-修]의 관계로 제시한다. 아울러 ‘건’이
수행 가운데서 지혜에 따른 행위라면, ‘곤’은 수행 가운데서 행위를 행해가는 것이라고 대비시킨 뒤 ‘건’의 지혜가 ‘곤’의 수행에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지욱은 “‘건’과 ‘곤’은 실제로 앞서거나 뒤따르는 것이 없으며, 이치와 지혜가 한결같고, 적멸과 관조가 둘이 아니며, 본성과 수행이 서로 관철되며, 복덕과 지혜가 서로 엄중하니, 이치와 지혜는 깊어지고, 적멸과 관조가 하나가 되며, 수행과 본성이 결합되고, 복덕과 지혜가 융화된
다”38]고 하였다.

 

지욱은 ‘곤’괘 ?단전?의 “암말은 땅에 속한 부류요, 땅을 가는 데 끝이없다”[牝馬地類, 行地无疆]는 구절의 풀이에서 “비록 유순하지만 강건하니, 三昧가 지혜를 따라 행하면 부처의 삼매가 되는 까닭이다. 五度는 장님 같으나 般若는 인도자 같으니, 福行을 앞세우면 부처의 지견(知見)이 열리지 않아서 곁길이나 꼬부라진 길에 떨어져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오직 지혜가 행위를 인도하고 행위도 지혜에 순응하면, 지혜가 항상하고 행위도 항상하게 된다”39]고 하였다. 이처럼 지욱은 곳곳에서 ‘止’와 ‘觀’, ‘六卽位’, ‘因中三觀’과 ‘果上三智’, ‘百界千如’와 ‘三千性相’, ‘對治助開’(十乘觀法 중 제7), ‘性具’와 ‘性造’ 등 천태학의 개념을 많이 원용하여 풀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역선해』의 형식을 1) 세간의 도에 의거하여 말하고[約世道], 2) 불도에 의거하여 말하고[約佛道] 나서, 3) 마음의 관찰하는 것에 의하여 해석하여[觀心釋者] 서술하고 있다. 지욱은 『주역선해』가 ?『주역』의 불교적 해석이라는 점에 염두를 두고 예상되는 네 가지 비방에 대해 佛法釋者의 관점 아래 天台四釋(因緣釋, 約敎釋, 本迹釋, 觀心釋)으로 이루어진 유심론적 해석에 입각한 觀心釋者의 관점으로 풀이하고 있다.

 

37] 금장태, 앞의 책, pp. 79-80.

38] 智旭, ?주역선해? 권1, 24절, ‘坤’

 

여기서 觀心釋은 세간적 관점과 불교적 관점을 아우르는 유심론적 해석이다. 하지만 천태교학의 주요 해석법이기 때문에 지욱은 불교 전체를 원용하면서도 天台禪法에 입각지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또 ‘역’ 개념의 연관구조를 해명함에 있어 개체와 전체가 서로 포섭하고 융합하는[一卽一切, 一切卽一] 화엄적 논리를 끌어들여 역의 세계를 화엄의 事事無碍法界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주역선해』는 불교적 ‘역’해석[以禪易解]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역’으로 불교를 해석하는 것[以易禪解]이기도 한 것40]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주역』과 불교라는 두 이질적 사유체계를 소통시키기 위해 지욱 스스로가 둘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 경계를 넘어서려고하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저술인 『주역선해』의 성격을 하나의 틀 속에 가두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지욱은 ‘易理’와 ‘易書’와 ‘易學’의 구분 아래 이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서 주역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는 역서를 읽으면서 그 근원인 ‘역리’를 항상 되돌아보게하고, ‘역학’의 과제가 끊임없이 ‘역리’와 일치를 추구하는 데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역서’의 이해가 우주의 질서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요, ‘역학’이 이 ‘역서’의 해석을 넘어 우주의 이치와 일치시켜야 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41] 그가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이 책의 서문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선법으로써 유교에 들어가[以禪入儒] 유자들을 이끌어 禪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반면 탄허는 오히려 ‘유교로써 선법에 들어가’[以儒入禪] 유자들을 이끌어 禪을 알게 하였다.

 

39] 智旭,『주역선해』권1, 24절, ‘坤’
40] 금장태, ?지욱의 『주역선해』와 ‘易’실현의 불교적 해석?, ?불교의 주역 노장 해석?(서울대출판부, 2007), pp. 137-140.

41] 금장태, 앞의 책, p. 66.

 

 

2. 탄허의 以儒入禪적 『주역선해』역주

 

가문의 중매로 16세에 토정 이지함의 후손인 이극종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결혼하였던 탄허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때마침 『주역』책이 없어 공부를 못하다가 이를 안 처가에서 소를 팔아 『주역』을 사 주
었다. 그런데 한참 동안 그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 글방을 방문해 보니 그는 흡사 미친 듯 춤을 추며 큰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장인은 사위가 처자를 돌아보지 않고[妻子不顧] 가사를 돌아보지 않을[家事不顧]
것 같지 않겠느냐며 결국 출가 반대를 포기했다고 한다. 출가 전 탄허는 『주역』을 이미 500독(讀) 하였다고 전한다.42]

 

탄허 역시 유학자에서 불학자로 탈바꿈한 뒤 오대산 상원사에서 講學과 禪修를 겸수하였다. 스승 漢巖 重遠(1876~1951)의 전적인 배려에 의해 아직 法臘이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학을 할 수 있었고, 안거 중에도
선수에 매진하면서 틈틈이 강학을 하였다. 강학을 할 때에는 출가 이전에 그가 보았던 『사서』와 『삼경』의 유학이론과 『노자』와 『장자』등의 도가이론을 불경 해석에 원용하여 종횡무진 펼쳐 내었다.

 

탄허는 지욱이 『주역』의 핵심이라 할 乾卦와 坤卦의 禪解에서 두 괘를 긴밀하게 연관지어 살피고 있다. 그는 상중하품의 十善과 十惡, 四諦, 十二因緣, 六卽, 因中의 三觀(靜·幻·寂 또는 空·假·中), 果上의 三智 : 一切智·道種智·一切種智, 법화, 천태, 천태삼관문 등 다양한 불교 용어에 대한 주석을 달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탄허 지욱과 달리 정자와 주자 주석을 적극적으로 원용하여 『주역』의 의미를 드러내려고 한다.

 

42] 「탄허 대종사 연보」, pp. 32-33, ‘만 17세의 일화’ 참조.

 

 

탄허는 ‘彖傳’의 “만물이 의거하여 시작되니 이에 하늘을 통섭한다”[萬物資始, 乃統天]와 “구름이 가고 비가 내리며 온갖 사물이 흘러 형체를 이룬다”[雲行雨施, 品物流形]는 구절에 대해 주자의 주를 원용하고 있다.

 

"주자(朱子)가 이르되 건원(乾元)은 천덕(天德)의 태시(太始)인 고(故)로 만물(萬物)의 생(生)이 모두 이를 자(資)해 써 시(始)가 되는 것이다. 또는 사덕(四德)의 수(首)가 되어 천덕(天德)의 시종(始終)을 관(貫)한 고로 통천(統天)이라 말함이니 차(此)는 원형(元亨)을 석(釋)함이다.43]"

 

또 탄허는 ‘건’괘 ?단전?의 “시작과 마침을 크게 밝히니 여섯 자리가 때 맞추어 이루어지며, 때맞추어 여섯 용을 타고 하늘에서 몰고 간다”[大明終始, 六位時成, 時乘六龍, 以御天]는 구절에 대해 주자의 주를 원용하여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주자(朱子)가 이르되 시(始)는 곧 원(元)이요 종(終)은 정(貞)을 말함이다. 종(終)이 아니면 시(始)가 없고 정(貞)이 아니면 써 원(元)이 될 수 없나니 차(此)는 성인(成人)이 건도(乾道)의 종시(終始)를 대명(大明)한즉 괘(卦)의 육위(六位)가 각각(各各) 시(時)로써 성(成)함을 보고 이 육양(六陽)을 승하여 써 천도(天道)를 행(行)함을 밝힘이니 이는 이에 성인(聖人)의 원형(元亨)이다."44]

 

탄허는 “여러 사물의 위로 머리가 나오니 만국이 모두 편안해졌다”[首出庶物, 萬國咸寧]는 구절에 대해서 풀이한 뒤 주자의 주를 원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고 있다.

 

"주자(朱子)가 이르되 성인(聖人)이 상(上)에 재(在)하매 물(物)에 고출(高出)함이 건도(乾道)의 변화(變化)와 같고 만국(萬國)이 각각(各各) 그 소(所)를 얻어 함녕(咸寧)함이 만물(萬物)의 각정성명(各正性命)하여 보합태화(保合太和)함과 같나니 차(此)는 성인(聖人)의 이정(利貞)을 말한 것이다.

대개 일찌기 통합(統合)해 논(論)하건대 원(元)은 물(物)의 시생(始生)이요, 형(亨)은 물(物)의 창무(暢茂)요 리(利)는 실(實)에 향(向)함이요 정(貞)은 실(實)의 성(成)이니 실(實)이 기성(旣成)이라면 그 근체(根?)가 탈락(脫落)하여 가(可)히 다시 심어 생(生)하나니 차(此)는 사덕(四德)의 써 순환(循環)해 무단(無端)한 바다.

그러나 사자(四者)의 간(間)에 생기(生氣)의 유행(流行)이 당초(當初)에 간단(間斷)이 없나니 차(此)는 원(元)의 사덕(四德)을 포(包)해 천(天)을 통(統)한 바다. 비록 그 문의(文義)가 문왕(文王)의 구자(舊者)가 아님이 있으나 그러나 독자(讀者)가 각각(各各) 그 의(意)로써 구(求)한즉 병행이불패(竝行而不悖)한 것이니 곤괘(坤卦)는 차(此)를 방(放)한다.45]"

 

"주자(朱子)가 이르되 리정(利貞)을 말함이다. 마(馬)는 건(乾)의 상(象)이로되 써 지류(地流)라 한 것은 빈(牝)은 음물(陰物)이요 마(馬)는 또 지(地에) 행(行)하는 물(物)이니 행지무강(行地無疆)이라면 순(順)하고 건(健)한 것이다. 유순이정(柔順利貞)은 곤(坤)의 덕(德이)니 군자유행(君子攸行)은 인(人)의 소행(所行)이 곤(坤)의 덕(德)과 같은 것이다. 소행(所行)이 이와 같다면 그 점(占)이 하문(下文)의 소운(所云)과 같은 것이다."46]

 

43] 呑虛, 『周易禪解 懸吐譯註』 (교림, 1982; 1990; 2010), p.66.
44] 呑虛, 『周易禪解 懸吐譯註』, p. 68.

45] 呑虛, 『周易禪解 懸吐譯註』, pp. 70-71.
46] 呑虛, 『周易禪解 懸吐譯註』, pp. 116-117.

 

탄허는 또 “숨겨진 용이 등용되지 않음[潛龍勿用]은 양이 아래에 있는 것[陽在下也]”이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주자의 주를 인용하여 이르되 “陽은 九를 말함이요 下는 潛을 말함이다”고 하였다.

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음[見龍在田]은 덕의 시가 보함이요[德是普也]”에 대해서는 정자의 주를 원용하여 이르되 “地上에 見하여 德化가 及物하니 그 施가 이미 普한 것이다.47]

이처럼 탄허는 주자의 주석 뿐만 아니라 정자의 주까지 원용하여 자신의 주역관을 피력하고 있다. 이것은 특정인의 주석에만 의거하지 않고 균형적인 시각 위에서 자신의 안목을 보여주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7] 呑虛, 『周易禪解 懸吐譯註』, p. 76.

 

탄허는 불교 우위를 전제로 『주역』과 『노장』을 아우르며 화엄선적 시각에서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명대의 감산과 지욱 및 조선말의 白坡와 鏡虛(1846~1912) 이후 한동안 끊어졌다가 탄허에 의해서 오랫만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물이 탄허의 『주역선해』현토 역주와 『노자도덕경』 현토 선주와 『장자남화경』 현토 역해라고 할 수 있다.

 

명대 말기의 불도유 삼교 통합 노력처럼 조선 중기의 虛應 普雨와 淸虛 休靜 등에 의해 한국불교 역시 불교의 우위를 전제로 다른 전통의 이론을 껴안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종래에 유교와 도교의 통합의 노력은 더러 있었지만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와 중국 재래의 도교와 유교의 삼교를 아우르는 통합의 노력은 당대의 李? 이후 명대의 감산과 지욱 등과 같은 불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한국불교에서는 원효 이후 통일신라 말기의 고운 최치원(857~?)이 고유사상인 풍류와의 접점 속에서 삼교의 소통을 제시하였다. 최치원은 ?鸞郞碑序?에서 우리 고유사상의 지형을 다음과 같이 그려내고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玄妙之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고 한다.

교(敎)를 시설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갖춰져 있다. 그 실제는 곧 삼교를 포함하고[包含三敎) 뭇삶을 제접하고 교화하는 것[接化群生]이다.

이를테면[且如] 들어와 집안에 효도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나라 사구(魯司寇, 孔子)의 주지(主旨)와 같고,

함이 없이[無爲] 세상일을 처리하고 말이 없는[無言]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周柱史 老子)의 종지(宗旨)와 같으며,

모든 악한 일들 짓지 말고 모든 착한 일들 높여 실행하는 것은 축건 태자(竺乾太子, 釋尊)의 교화(敎化)와 같다."48]

48 金富軾, ?三國史記? 권4, 眞興王 37년(576) 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여기서 ‘현묘의 도’로 표현되는 풍류는 고조선 이래 이땅 고유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불도유 삼교가 이땅에 전래되기 이전부터 있어 왔던 풍류의 다른 표현이다. 풍류에는 이미 삼교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으로 뭇삶들을 제접하고 교화해 왔다는 것이다. 고조선의 해체 이후 ‘이 땅에서 내려오는[遺] 가풍[風]과 그 나머지[餘] 흐름[流]’의 줄임말로 짐작49]되는 風流는 天地人 三才의 철학을 기반으로 형성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들어와 집안에 효도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과 ‘함이 없는 일에 처하고 말이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 그리고 ‘모든 나쁜 일들 짓지 말고 모든 좋은 일들 높여 실행하는 것’이다.

 

49] 道安, ‘歸宗顯本第一’, ?二敎論?,?廣弘明集?권8.

“有東都逸俊童子, 問於西京通方先生,曰: ‘僕聞風流傾墜, 六經所以緝修, 誇尙滋彰, 二篇所以述作, 故優柔弘潤於物, 必濟曰儒, 用之不櫃於物, 必通曰道. 斯皆孔老之神功, 可得而詳矣. ……”

 

탄허가 유자에서 도자를 넘어 불자로 탈바꿈한 과정이나 다시 불자의 입장에서 유교의 경전인 『주역』에 대한 지욱의 ‘선해’에 대해 현토 역주를한 것이나 도가의 경전인 『노자도덕경』과 『장자남화경』에 각기 현토 ‘선
주’와 현토 ‘역해’를 덧붙인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풍류와 불도유 삼교와의 접점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이교와 ‘현묘의 도’를 추구하는 풍류의 관계를 道安의 저술 속에 편집된 ‘근본
으로 돌아가서 본의를 나타낸다’[歸宗顯本]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 땅에서 내려오는[遺] 가풍[風]과 그 나머지[餘] 흐름[流]’이 기울고 추락하여 六經이 이 때문에 편수(編修)되었으며, 뻐기고 자랑하는 기풍이 더욱 늘어남에 (『노자』) 두 편이 이 때문에 찬술되었다”고 풍류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東都의 逸俊동자가 西京의 通方선생에게 물은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풍류를 포함(包含)삼교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 보면 풍류의 맥이 어디에 닿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난랑비서?에서 ‘郞’은 화랑이며 ‘鸞’ 은 봉황과 유사한 새로서 임금을 상징하고 있으므로 아마도 화랑 출신 임금의 별칭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난랑비?는 제48대 경문왕의 비로 보아도 큰 어려움이 없을 듯하다.50] 경문왕은 화랑정신을 특별히 부각시킨 왕이다. 이 사실은 화랑 출신인 경문왕에 대해 최치원이 특별히 기리고 있는 ?大崇福寺碑文?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선대왕(경문왕)께서는 무지개 같은 별이 화저(華渚)에 빛을 떨치듯이 오산(鰲岑)에 자취를 내리셨다. 처음 국선도(玉鹿)에서 명성을 날리셨으니 특별히 현풍(玄風, 風流)을 떨치시었다.51]"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최치원이 ?난랑비서?에서 화랑의 실천 윤리적 관점을 중심으로 풍류사상을 파악했다고 하여 이것을 화랑정신에만 국한시켜 이해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오히려 최치원이 애써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불·도·유 삼교의 차원을 넘어선, 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풍류도의 사상적 현묘함과 위대함이었다. 다시 말해서 풍류도에는 삼교사상의 중요한 요소가 본디부터 있으면서도 풍류도 자체는 유교나 불교나 도교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 것은 풍류도의 독특한 특성을 드러낸 것52]이라는 점이다.

 

탄허가 최치원의 東人意識을 자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이 땅에서 불도유 삼절의 계보를 잇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희팔계’와 ‘문왕팔계’와 변별되는 一夫 金恒 (1826~1898)의 ‘정역팔괘’의 해설을 통해 한민족의 미래에 대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접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탄허는 『주역선해』의 현토 역주 서문에서 “지욱의 『주역선해』를 正을 삼고 정자의 『이천역전』과 주자의 『주역본의』를 곁으로 끌어와 자구의 난삽한 곳에서 ‘머리를 긁적대고[搔首] 눈살을 찌푸리는[?眉] 근심’을 없애줌으로써 역학이 다시 천하에 밝아서 인인이 모두 도를 높이고 덕을 귀하게 여겨 영원한 고향에 노닐 수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 역주를 하고 있다.

 

"고로 이 선해(禪解)는 상수(常數)의 학을 총괄하여 제일의천(第一義天)에 회귀(會歸)하니 실로 사성(犧·文·周·孔) 언외(言外)의 비결(秘訣)을 천명(闡明)함이 되고, 또한 가히 이르되 “천고(千古) 부전(不傳)의 묘지(妙旨)를 개시(開示)했다” 할지라. 유(儒)·도(道)· 석(釋)의 도아(度我)·도타(度他)가 다 저리(這裡)로 좇아 하고 천(天)·지(地)·인(人)의 자조(自助)·자화(自化)가 다만 차중(此中)에 있도다. 고로 이제 역주(譯注)해 서술함은 선해본(禪解本)으로써 정(正)을 삼고, 정(程)·주(朱)의 전(傳)·의(義)를 방인(傍引)하여 그 자구(字句)의 난삽(難澁)한 곳에 그 소수찬미(搔首?眉)의 환(患)을 제(除)해 주노니 거의 역학(易學)이 다시 천하(天下)에 밝아서 인인(人人)이 다 가히 도(道)를 높이고 덕(德)을 귀(貴)히 하여 하유(何有)의 향(鄕, 시공이 없는 이상향)에 소요할지로다."

53]

 

탄허는 『주역선해』를 정본으로 삼고 정자의 『이천역전』과 주자의 『주역본의』를 방인으로 삼아 머리를 긁고 눈썹을 떠는 난삽한 자구를 만나는 근심을 없애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선법으로써 유교에 들어가 유자들로
하여금 불교를 알게끔 하고자 힘쓰려고 한’[以禪入儒] 지욱의 『주역선해』와 달리 오히려 ‘정자의 주석’과 ‘주자의 주석’을 다수 원용하여 ‘유학으로써 선법에 들어가 유자들로 하여금 선법을 알게끔 하고자 힘쓰는[以儒入禪] 것은’ 지욱과 크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탄허가 정자와 주자의 주석을 다수 인용한 것은 오히려 유교의 정통을 원용함으로써 일반 지식인들(유자들)로 하여금 선법을 알게 하고자 함이라고 이해된다.

 

그리하여 탄허는 역학이 다시 천하 사람들에게 밝아서 사람마다 도를 높이고 덕을 귀하게 하여 시공이 없는 이상향에 노닐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지식인들로 하여금 불교(선법)을 알게 하는 지름길이라 판단한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탄허는 유자로부터 출발하여 도자를 거쳐 불자로 탈바꿈한 이후 오히려 유학으로써 선법에 들어가 지식인들로 하여금 선법을 알게끔 하고자 힘씀으로써 佛儒의 소통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탄허의 선법은 華嚴禪旨라고 할 수 있다.

 

50] 장일규, ?최치원의 삼교융합상과 그 의미?, ?신라사학보? 제4집, pp. 269-270.
51] 최영성 역주, ?역주 최치원전집?1(아세아문화사, 1999), p. 203. “先大王, 虹渚騰輝, 鰲岑降跡, 始馳名於玉鹿, 別振玄風.”
52] 최영성, ?최치원의 ‘난랑비서’를 통해 본 韓國上古思想-풍류사상의 재해석을 중심으로-?, ?2013 유쾌한 인문학: 제1탄 한국의 사상? 자료집, 한바탕 전주, 전주시평생학습센터, 2013, p. 7.

53] 탄허, ?주역선해 현토역주?1(교림, 1982; 1996; 2010), p. 29.

 

 

Ⅳ. 탄어의 선법 이해

 

탄허는 불도유 삼절의 계보를 이은 화엄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 근원은 禪家에 맥을 두고 있다. 그는 向上一路 禪風을 통해 수많은 내전을 현토역해하고 적지 않은 외전을 역주하면서 자신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을 드러내 주었다. 특히 그는 외전인 『주역선해』를 역주하고 『노자도덕경』을 선주하고 『장자남화경』을 강해하면서도 이들 외전을 유학의 논리와 노장의 원리를 원용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불교 특히 화엄선지로 풀어내려고 하였다. 『주역선해』 역주에서는 정자의 『이천역전』과 주자의 『주역본의』의 주석에 대부분 의지하면서도 불교적 해석 즉 천태와 화엄의 해석들도 원용하였다.

 

선사 탄허는 불도유 삼절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불교 세계관에 기반하여 이들 외전들을 풀어내고 있으며 불교의 이론과 수행 중 특히 화엄선지로 귀결시키고 있다. 이것은 그의 정체성이 불교에 있으며 특히 화엄과 선법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 서역에서 비롯된 화엄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도 화엄은 발심하고 서원하는 삶을 통해 보원보살의 원행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중국 화엄은 삼종법계관, 이사무애관, 십문유식관, 삼성원융관 등의 관법을 통해 화엄적 우주관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한국 화엄은 인도 화엄의 보현행원과 중국화엄의 화엄관법을 통합하여 화엄선으로 나아갔다.54 의상의 성기관과 지눌의 성기관은 화엄과 선법의 접점을 넘어 통로를 보여준다.

 

의상의 성기관과 이통현의 수증관 그리고 지눌의 성기관은 경허와 한암을 거쳐 탄허에게 이어진다. 탄허는 의상 이후 한암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특성인 禪敎兼修의 전통을 통섭한 화엄선의 가풍을 계승하여 내전과 외전의 강해와 역해에서 적극적으로 투사하고 있다. 이러한 투사는 인도 이래 동아시아 불교의 주요 흐름을 계승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주요 흐름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선법 인식은 이러한 화엄선의 계보를 잇고 있으며 불도유 삼절의 계보도 잇고 있다. 경허의 返照와 自心에 기초한 미도선 혹은 예미선55]의 가풍은 한암의 일발선풍을 거쳐 탄허의 향상일로 선풍으로 이어졌다. 탄허 선풍의 원류는 위로는 의상의 性起觀에 맥을 대고 있고 이후 이통현의 修證觀과 지눌의 性起觀을 이어 경허와 한암의 정혜쌍수의 가풍을 잇고 있다. 이 가풍은 오늘도 면면히 살아있으며 탄허는 이러한 가풍을 계승하여 외전인 『주역선해』역주와 『노자도덕경』 선주 및 『장자남화경』 강해에도 적극적으로 원용하였다.

 

탄허의 내전은 물론 외전의 역주와 선주와 역해 속에도 화엄선지가 녹아있다. 이러한 가풍은 위로는 감산 덕청과 영봉 지욱(우익)의 선행 작업과 상통하고 있으며 그 결과 그는 불도유 삼절의 계보를 이을 수 있었다.
다만 외전에 대한 탄허의 본격적인 저술이 이뤄지지 않고 대부분 역주와 선주 및 강해로 남아있다는 점, 그리고 문체 역시 국한문 혼용체로 이루어져 있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기는 하다.56] 하지만 탄허와 동시대에 살면서 불도유 삼절의 계보를 이은 이도 적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저작을 남긴 이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들 저작의 그 의미와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탄허의 삼현관과 불교관은 다문화 다종교의 시대에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고 함께 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줌으로써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54] 高榮燮, ?불교 화엄의 수행관?, ?청호불교논집? 제1호, 청호불교문화재단, 1997.
55] 高榮燮, ?한국불학사: 조선시대편?(연기사, 2005).

56] 관점을 달리하면 원전에 충실한 逐字譯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전문가들의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Ⅴ. 정리와 맺음

 

呑虛 宅城(1913~1983)은 불교 內典과 불교 外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佛道儒 三絶의 계보를 이어 불교의 외연을 크게 넓혔다. 그는 유교와 도가의 외연도 넓혀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 큰 시선을 열어주었다. 종교인이자 사상가였던 탄허는 한반도의 미래와 동아시아 삼국 및 미국 등 주변국들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관찰하여 비젼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하여 미래에 대한 그의 예지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공간 및 6.25와 휴전, 4.19와 유신, 그리고 민주화와 산업화를 겪어가는 이땅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빛을 주었다

 

처음 탄허는 유자와 도자를 넘나들면서 『주역』을 500독하고 10만 여자의 『장자남화경』을 1,000독하였지만 무언가 미진함을 느꼈다. 결국 그는 오대산의 方外道人인 漢巖 重遠의 문하로 출가하여 선수(禪修)를 하는 틈
틈이 내전뿐만 아니라 외전에 대해 깊이 천착하였다. 탄허의 『주역선해』역주는 ?山과 지욱의 선해가 소미산(東坡)과 天台學에 의존하는 저자 영봉 지욱(靈峰智旭)의 ‘이선입유’(以禪入儒)와 달리 의리역에 치중한 程子의 『伊川易傳』과 朱子의 『周易本義』에 크게 의존하면서 ‘유학으로써 선법에 들어가 유자들을 인도하여 선법을 알게 하고자’[以儒入禪]하였다.

 

탄허는 월정사 方山窟과 영은사 一笑窟 등에서 오랫동안 강학하면서 靈峰 智旭의 선행 작업에 일정한 영향과 자극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지욱의 지향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탄허는 유교 본연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주역선해?에 역주를 달았다. 물론 그의 저술들은 외전에 대한 그의 본격적인 저작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들 저술 속에서 탄허는 義湘의 性起觀, 李通玄의 修證觀, 知訥의 性起觀, 鏡虛의 定慧觀, 漢巖의 一鉢禪風을 계승하여 向上一路의 화엄선지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저작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탄허가 젊은 시절부터 內典은 물론 外典까지 아우르며 수많은 전적을 현토 역해하고 강술 강론한 것은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교재의 편찬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탄허가 “한국불교의 미래는 법당 100채를 짓는 것보다 학인들을 공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발언은 지금도 한국불교의 변함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그가 평생동안 펴낸 수많은 내전의 懸吐口訣 譯解와 외전인 『주역선해』역주는 한국불교와 한국사상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그는 이 시대에 새롭게 평가받아야 할 주요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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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懸吐譯解, ?莊子南華經?(교림, 2004; 2011).
------, 懸吐譯解, ?周易禪解?1.2.3.(교림, 1982; 1996; 2010).
------, ?부처님이 계신다면?(탄허문화재단, 1979; 예지각; 1980; 교림, 1988;1993; 2001).
------, ?탄허록?(휴, 2012).
탄허문도회, ?방산굴법어?(교림, 2003; 2013).
---------------, ?탄허대종사연보?(교림, 2012).
---------------, ?피안으로 이끄는 사자후?(교림, 1997; 2000).
---------------, ?탄허강설집?(불광출판부, 2003).
혜거, ?탄허대종사경학관1?(탄허불교문화재단, 2008).

 

 

 

Abstract

 

I Ching Viewpoint and Buddhism Viewpoint of Tanheo

- Focusing on Comment of ?Juyeokseonhae? -

 

Ko, Young Seop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research I Ching viewpoint and Buddhism viewpoint of Tanheo Taekseong(呑虛宅城, 1913~1983), who was a representative learned priest and great priest of Korea in the last century. He understood Buddhist external scriptures, linked the genealogy of as an three exellent master(三絶) of Buddhism, Taoism and Confucianism and greatly enlarged the extension of Buddhism. In addition, Tanheo enlarged the extension of Confucianism and Taoism to open up new vistas for the researcher of this field. Tanheo, who was a religious man and philosopher observed the future of Korean Peninsula and the change of 3 Southeast Asian countries, USA and surrounding countries in detail and provided vision. Therefore, his foresight about the future provided Korean people who has to experience Japanese colonial period, liberation, 6.25, cease fire, 4.19, restoration, democrat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with hope and light.

 

Initially, hovering between Confucianism and Taoism initially, Tanheo read ?I Ching? over 500 times and ?Jangjanamhwagyeong? consisting of about 0.1 million characters over 500 times but he felt insufficiency. After all, he became the Buddhism monk while studying under Hanam Jungwon(漢巖重遠), who was a Out of world Master(方外道人) in Odaesan(Mt.). He researched Buddhist scriptures and external scriptures while training himself. Tanheo's comment on ?Juyeokseonhae? greatly relied on Jeongja(程子)’s ?Icheonyeokjeon? and Juja(朱子)’s ?Juyeokbonui? unlike enter to Confucianism with Seon[以禪入儒] of Yeongbong Jiuk, who relies on Somisan(蘇眉山, 東坡) and Tiantai Doctrine. During this period, he focused on enter to Seon with Confucianism[以儒入禪] ' to guide Confucianist to Seon and let them know it.

 

Tanheo lectured in Bangsangul of Woljeongsa and Ilsogul of Yeongeunsa for a long time and he was stimulated by good deed of Yeongbong Jiuk. However, his effort was not identical to the orientation of Jiuk. on the contrary, Tanheo added comment to ?Juyeokseonhae? on the basis of lesson of Confucianism. Of course, it was regrettable that his books are not real books for non-Buddhist scriptures. However, the books are meaningful because in the books, Tanheo succeeded Uisang's Seonggigwan, Lee Tonghyeon's Sujeunggwan, Jinul's Seonggigwan, Gyeongheo's Jeonghyegwan and Hanam's Ilbalseonpung to Hwaeom trend, one absolute way for progress.

 

Tanheo has interpreted and lectured many records from Buddhist scriptures(內典) to non-Buddhist scriptures(外典) from his young age because he recognized that the publication of education material is essential for nurturing competent person. Tanheo's comment, 'for the future of Korean Buddhism, it is more important to teach people than build 100 temples.' has been the unchangeable assignment for Korean Buddhism. Hyuntogugyeol(懸吐口訣) translation(譯解) of Buddhist scriptures and the comment on ?Juyeokseonhae? that he published for his life has been the basic data for the study of Korean Buddhism and Korean thought. When considering this point, Tanheo is the person who should be evaluated newly in this age.

 

Keyword: Juyeokseonhae, Hyuntogugyeol, Jiuk, Buddhist scriptures,

Non-Buddhist Scriptures, one absolute way for progress,

Main thesis of Avatamsa Seon.

 

 

 

* 이 논문은 2013년 4월 26일 개최된‘(사)한국불교학회40주년 기념 춘계학술대회: 탄허대종사의 인재양성과 교육이념의 시대정신'에서 발표된 내용을 수정ㆍ보완한 것으로 " 한국불교학"에 게재할 분량이 넘쳐 부득이하게
주역관과 노장관을 나누어 ‘탄허의 노장관과 불교관’은 한국불교사학회가 간행하는 "문학 사학 철학" 제33호
(한국불교사연구소, 2013. 6)에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