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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선(外道禪).범부선(凡夫禪).능엄선(楞嚴禪) / 윤창화

경호... 2013. 1. 8. 01:32

24. 외도선·범부선

 

승천을 목표로 수행하는 것이 외도선

인과설에 가치두고 수행하면 범부선

 

 

외도선(外道禪)·범부선(凡夫禪)·소승선(小乘禪)·대승선(大乘禪)·최상승선(最上乘禪), 이 다섯 가지 선은 중국이 아닌 인도에서 형성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한다면 중국 선불교의 입장에서 인도불교, 인도의 요가 명상수행법을 분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분류한 이는 중국 당대(唐代)의 스님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이다. 그는 화엄종의 제5조인 동시에, 선으로는 하택종에 속한다. 즉 화엄과 선을 함께 연구했는데, ‘선원제전집도서(都序)’ 첫 머리에서 인도의 선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설명을 달았다.


1. 외도선(外道禪) : 불교에서 본 외도(이교도)의 수행법으로 초기불교 수행법을 제외한 요가 및 인도 일반의 모든 수행법을 가리킨다. 규봉종밀은 어떤 특정한 종교를 지목하지는 않았는데, ‘천상, 극락에 태어나는 것을 좋아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 즉 ‘승천(昇天)을 목표로 하여 수행하는 것’을 외도선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불교도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극락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이들은 모두 외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종밀의 관점이기도 하지만 중국선(中國禪)의 전체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범부선(凡夫禪) : 인과응보를 믿음으로써 수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수행을 통하여 무아(無我), 공(空)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를 위하여 수행하는 등 인과설에 가치를 두어 수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중생 즉 평범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수행법이라는 뜻이다.


3. 소승선(小乘禪) :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이치 모두를 깨닫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아공의 이치만 깨닫는 데 만족하는 가르침, 또는 그런 수행자를 뜻한다. 일체개공(一切皆空)이 아닌 개아(個我)의 공(空)만 이해하고 있는 것, 소승불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 선불교의 관점에서 초기불교(원시불교) 전체를 가리켜 소승선이라고 한 것이다.


4. 대승선(大乘禪) : 대승선이란 대승불교를 가리킨다.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사상, 가르침인 일체개공의 이치 즉 아공(我空)·법공(法空) 모두를 가르치는 불교, 일체개공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명상수행을 가리킨다.


5. 최상승선(最上乘禪) : 앞의 네 가지 선을 초월하여 가장 뛰어난 선이라는 뜻이다. 곧 자신의 마음이 본래 청정해서 번뇌가 없으며, 완벽한 무루지혜(無漏智慧)를 갖추고 있고, 자기 마음이 부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믿어, 이것을 깨닫는 것, 또는 그런 수행자를 가리킨다.


규봉종밀은 ‘도서(都序)’에서 “자기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번뇌가 없으며, 본래 무루(無漏)의 지성(智性)을 구족하고 있으며, 또 이 마음이 곧 부처이며, 필경에 부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이것에 따라 수행하는 것을 최상승선이라고 한다. 또 여래선이라고 하며, 이것이 일행삼매, 진여삼매로, 일체삼매의 근본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어 “달마 문하에 전하는 것이 바로 이 선(禪)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상에서 본다면 최상승선 곧 여래선은 조사선과 차이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조사선의 완성자인 마조도일 시대에 이르러 인도 대승불교를 중국 선불교의 관점에서 발전시키고 선종 조사(祖師)를 중시하는 경향과 함께 탄생한 것이 곧 조사선이라고 할 수 있다. 조사선의 특징이라면 부처님보다는 중국 선종의 조사(祖師)를 더 중시했다는 것이다. 

 

 

 

25. 능엄선(楞嚴禪)

 

능엄경 바탕으로 공부하는 선 수행법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이 핵심 내용

 

능엄선(楞嚴禪)은 ‘능엄경(楞嚴經)’을 바탕으로 공부하는 참선수행법이다. ‘능엄경’에서 설하는 25가지 수행방법인 이십오원통(二十五圓通) 중, 25번째 관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이 그 핵심 내용이다. ‘이근원통’이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6근 가운데 이근(耳根, 귀, 청각) 즉 귀로 듣는 소리를 자각하는 수행법이다. 소리를 들을 때 듣는 자 즉 무엇이 듣는지 그 자성(본성)을 깨닫는 이치로, 이것을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또는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고 한다. 들은 것을 되돌려서(反聞) 자신의 자성, 자신의 본성이 듣게 하여(聞自性) 자각함으로써 번뇌를 잊고 불성을 발현시키는 것이다.


‘능엄경’에서는 이근(耳根) 하나가 원통해지면 나머지 5근도 모두 원통해져서 해탈을 이루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이 원통(圓通)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안근(眼根)이나 비근(鼻根)이 아닌 이근이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눈은 담장 밖의 것을 보지 못하고, 입과 코도 마찬가지며, 몸은 접촉하는 대상과 합해야 앎이 생기고, 마음과 생각은 분잡하여 단서가 없지만, 이근은 담장에 막히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오직 이근만이 전체를 통하는 진실한 것이다. 이근이 탁 트여서 원통해지면 나머지 5근도 모두 원통해져서 각각 자성을 반조하여 불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근원통 수행은 바깥에서 나는 소리(外耳聲)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소리(內耳聲)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바깥의 소리란 바람소리, 물소리, 또는 타인이 염불, 독경하는 소리 등에 집중하는 것이다. 또 자신의 소리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즉 다라니나 나무아미타불 등 염불소리, 독경소리를 자신의 본성이 듣는 것이다. 즉 자기 목소리를 자기가 들음으로써 ‘누가 이 소리를 내고 누가 이 소리를 듣는가?’, ‘듣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자각을 통해 번뇌를 단절하고 자성이 곧 불성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능엄선 수행법은 처음에는 소리에 집중(觀)하고, 그 다음에는 ‘돌이켜서 듣는 그 놈을 자성이 듣는(反聞聞性)’ 것인데, 중국 명·청(明淸) 대에 형성된 염불시수(念佛是誰,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화두도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인가라는 반문을 통하여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다.


‘능엄경’에서는 이근원통(耳根圓通) 반문문성(反聞聞性)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난아! 소리도 사라지고 메아리도 없어지게 되면 너는 들은 것이 없다고 말하는데, 만약 참으로 들은 것이 없다면 듣는 성품(자성)이 이미 없어져서 고목과 같을 것이니, 종(鐘)을 다시 친들 네가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느냐? 있음과 없음을 아는 것도 그 소리가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이지, 어찌 너에게서 그 듣는 성품 자체가 ‘있었다’ ‘없었다’ 하겠느냐? 듣는 것이 참으로 없다고 한다면 무엇이 있어 그 없다는 것을 알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듣는 가운데 저절로 소리가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지, 소리가 생겼다가 없어짐이 너의 성품으로 하여금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은 아니니라.”

 

선불교에서 ‘능엄경’을 중시한 것은 중국 송 대부터로 특히 선원에서 선승들이 능엄주를 외우기 시작한 것은 중국 남송 때인데, 능엄주를 외우면 보다 쉽고 빠르게 능엄삼매를 얻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 불교에서 ‘능엄경’을 강조한 이는 고려중기 청평거사 이자현이 있으며, 근현대에는 용성 스님과 성철 스님께서도 ‘능엄경’을 중시하여 제자들에게 능엄주를 외우라고 강조하셨다. 능엄주에 마음을 집중시켜 능엄삼매를 얻어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이다. 

 

 

윤창화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