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問/古典

[동양고전 특강] 맹자 / 성백효 교수

경호... 2012. 11. 28. 03:24

[동양고전 특강 3회] 연이은 강력범죄

… 인간의 본성은 정말 선할까? - 성백효 교수

 

포털 뉴스를 보고도 사람이 선하다고?

맹자, 대인은 어린아이의 선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어린아이(赤子)와 대인(大人)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어린아이는 버르장머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수양을 해야 대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맹자의 입장에 의하면 대인은 어린아이의 선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맹자라는 이름을 들으니 예전에 윤리 시험을 보기 위해서 지겹도록 외웠던 단어들이 생각났다. 성선설과 성악설 같이 많이 들어봤고 익히 잘 알고 있으나, 실상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던 그런 단어들 말이다. ‘동양 고전’, 하면 어렵고 지루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중에서도 수준 높은 고등 교육의 영향인지 유독 맹자에 대해서는 그런 편견이 심했다.

 

그런데 맹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의외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맹자는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않는다. 왕 앞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펼치며 왕에게 훈수를 두거나 그 당시 유행했던 다른 제자백가 사상이 잘못되었다며 크게 일갈하는 등, 화통하고 적극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유학자 하면 떠오르는 정갈하고 단아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인, 가득한 열정으로 자신의 말을 쏟아내는 유학자가 바로 맹자다.

 

‘동양고전, 2012년을 말하다’ 세 번째 강연의 주제는 맹자였다. 강연자로 성백효 교수가 강단에 올랐다.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불인지심

 

맹자가 살던 시대는 전국시대였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그래도 주나라 황실을 부흥하려는 대의명분이 존재하던 시대였다. 권모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외형상으로는 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오로지 부국강병만을 외치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런 시대 상황에서 맹자는 인의와 도덕을 강조했지만, 맹자에게 정치를 물어보는 많은 제후들은 패업에 대해서 물었다.

 

이는 제나라의 선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맹자는 공자의 제자들은 패도정치에 논하지 않았다며 선왕을 타박하고 왕도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맹자가 말하는 왕도 정치란 “백성을 보호하고 왕 노릇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왕은 자신이 왕도 정치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이에 맹자는 자신이 들은 선왕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선왕 또한 왕도정치를 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왕께서 당상에 앉아 계시는데, 소를 끌고 당하로 지나가는 자가 있었습니다. 왕께서는 이를 보시고 “소를 어디로 가는가?”하고 물으셨고 그는 “장차 종의 틈을 바르는데 쓰려고 잡으러 가는 중입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놓아주어라. 내가 그 두려워 벌벌 떨며 죄 없이 죽는 곳으로 나아감을 차마 볼 수 없다.”하셨고, 그가 “그렇다면 종에 틈을 바르는 일을 폐지하오리까?"하자, 왕께서는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는가. 양으로 바꾸어 쓰라.”하셨다고 합니다. "(맹자 - 양혜왕장구 상)

 

 

맹자는 소가 끌려가는 불쌍한 모습을 보고 그냥 끌려가도록 내버려 두지 못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선왕이 왕도 정치를 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소에게도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데, 백성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런 동정과 연민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이라고 설명되는 불인지심(不忍之心)이다. 성백효 교수는 모든 맹자 사상의 기초는 성선설이라고 말한다. 맹자가 주장한 민본주의나 인정론의 맥락을 알기 위해서는 성선설을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대목이 바로 이 소를 양으로 바꾼 마음, 바로 불인지심이다.

 

 

정말로 사람은 선하게 태어났나요?

 

대형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루에도 수십 건씩 인간의 본성을 의심하게끔 만드는 강력범죄나 아동성폭행, 학교폭력 등의 소식이 올라온다. 이런 현실에서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말한 맹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게 들린다. 만약에 범죄자들에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런 악독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맹자의 성선설은 반박되는 것이 아닐까? 이에 성백효 교수는 맹자에 있는 우산(牛山)의 일화를 들어 설명을 시작했다.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었는데, 대국의 교외이기 때문에 도끼와 자귀로 매일 나무를 베어가니,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밤에 자라고 비와 이슬이 적셔주어 싹이 나오지만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된다.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민둥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 민둥산이 된 모습을 보고 '일찍이 훌륭한 나무가 없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맹자 - 고자장구 상)

 

 

물론 현재의 모습은 민둥산처럼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만을 보고 처음부터 선한 마음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맹자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선한 마음이 존재했으나, 주변에서 도끼질을 하여 현재에는 선한 마음이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이다. 즉, 맹자가 말한 본성의 선함은 태어날 때부터 본래 가지고 있는 선함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어린아이(赤子)와 대인(大人)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어린아이는 버르장머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수양을 해야 대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맹자의 입장에 의하면 대인은 어린아이의 선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천작을 일으켜라.

 

"천작이 있으며 인작이 있으니, 인의와 충신을 행하고 선을 즐거워하며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천작이고, 공경과 대부는 인작이다." (맹자 - 고자장구 상)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진정한 귀함이 아니니, 조맹이 귀하게 해준 것을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다." (맹자 - 고자장구 상)

 

맹자는 벼슬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바로 천작(天爵)과 인작(人爵)이다.

천작은 자신의 본성과 본심을 기르고 길러서 자연적으로 존귀해지는 것을 뜻하는 반면, 인작은 다른 사람이 준 것을 말한다. 즉, 천작은 내 안에 있는 것을 스스로 구하는 것이고, 인작은 조맹과 같은 권력가가 주는 벼슬자리를 뜻한다. 당연히 맹자는 인작보다는 천작을 훨씬 귀한 것이라고 말한다.

성백효 교수는 인작에 대해서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는 것을 가지고 진짜 나라고 생각하고 삶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삶은 고통스럽고 공허해진다.”고 해설한다. 누군가가 빼앗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삶의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매우 위험천만하다는 것이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불쌍한 사람일까요? 배고픈 사람? 아닙니다. 진짜 불쌍한 사람은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로또를 맞아서 뭐합니까? 아무런 소용 없습니다. 이런 것은 예의를 구분하지 않고 받는 것으로, 오로지 물질적인 것만 바꿀 수 있습니다. 품행의 아름다움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재물이 많은 것을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재물이 적절하게 분배되지 않음을 근심해야 합니다. 행복은 돈을 살 수 없습니다. 이제는 여민동락, 서로 도와주며 함께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맹자는 세가지 즐거움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부모 형제가 탈없이 살아있는 즐거움, 둘째는 양심에 가책이 없어서 하늘을 우러러봐도 부끄러움이 없는 즐거움, 셋째는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인데 여기서 왕 노릇의 즐거움은 들어가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천작을 일으키십시오. 자연스럽고 떳떳하게 남의 인정을 받는 것이 진정한 귀함입니다.”

 

 

질의응답

 

Q. 맹자의 성선설을 듣고 있으니 불교의 불성론 혹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와 비슷한 맥락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맹자는 과연 노자에 대해서 공부를 했는지 궁금하다.

 

A. 노자는 언제 쓰였는지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노자는 논어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책이라 생각한다. 맹자와 장자를 보면 화자가 끝까지 설명을 다 해준다. 하지만 논어와 노자에는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제자가 물어야 그에 대해서 대답을 해주는 거지, 일반적으로는 부연을 하지 않는다.

노자 당시에는 이단이란 것이 없었다. 기록이 없어서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맹자는 노자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맹자는 주로 양주와 묵적을 비판했다.

 

 

Q. 맹자는 성선설을,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성악설이 아니라 성선설을 배울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장점에 어떤 것이 있을까.

 

A. 인간에게는 야성이라는 것이 있다. 나도 나이를 먹었지만, 예쁜 여자를 보면 끌어 안고 싶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니 예의로써 올바른 사람이 되라고 말했고, 맹자는 본성을 보존해서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 그러니 성악설이든 성선설이든, 둘 다 좋은 사람이 되자고 한 말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원래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잘 보존하라고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채널예스

 

 

 

...

 

 

 

 

윗글에서 나오는 忍은 "참을 인"의 뜻이 보통 쓰이지만 "잔인할 인"의 뜻도 있습니다.또 "차마~하지 못하다"라고 쓰이기도합니다.그래서 不忍은 차마 모질게 할수없다 라는 뜻입니다

 

맹자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단칠정이 성리학 이기론의 몸통입니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

조선시대 내내 싸우고 지금도 싸웁니다^^(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가끔 그러지요^^)

 

다산은 이기론을 크게 반박하지는 않습니다. 윗분들의 주장이니 감히 비판하려하지 않았을테지요

그러나 속으로는 이랬을겁니다

"뭔 씰데없는 소리들여, 탁상공론에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고 싸우지들말어.그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으면 되는거여~~"

그것이 효제(孝弟)입니다. 글 곳곳에 이 孝弟를 주장합니다.공자가 내세우는 인(仁)도 곧 孝弟라 주장합니다.

 

 

요약

사단칠정론 [四端七情論]

 

조선시대의 석학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慾)을 말한다.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 서막이 되었다. 즉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내세웠으며, 이를 다시 이이(李珥)가 뒷받침하여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을 말하여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맹자의 사단설(四端說) 가운데서 나오는 말로, 《맹자》 〈공손추편(公孫丑篇)〉에 있는 말이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惻隱之心 之端也 

羞惡之心 之端也 

辭讓之心 之端也 

是非之心 之端也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극치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

 

 

이 말은 맹자가 독창적으로 주창한 인성론으로서 ‘사단설’ 또는 ‘성선설(性善說)’이라고도 한다.

성선설이란 사람의 본성은 ‘선(善)’이라고 보는 학설이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의지적인 확충작용에 의해 덕성으로 높일 수 있는 단서를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다.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이 4단(四端)이며, 그것은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근원을 이룬다.

맹자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왕도정치인데, 이 왕도정치가 가능한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보고, 그 마음을 확대하여 나가면 ‘인의예지’ 네 가지 덕을 완성하여, 다시 이 덕행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교화시킴으로써 왕도정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맹자는 왕도정치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 왕이 먼저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으면,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정치가 있다.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정치를 행하면 천하 다스리기를 손바닥 안에서 움직일 수 있다.”

 

여기서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란,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여, 사람의 불행을 앉아서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 이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면 마치 손바닥 위에서 물건을 굴림과 같이 아주 쉽게 공을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맹자는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은 사람에게 본래 있는 것이라며 성선설을 입증하고 있다.

 

“사람들은 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까닭은 이러하다. 이제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다 놀라고 불쌍한 마음을 가진다.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 함도 아니며, 마을 사람들과 벗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하여 그러는 까닭도 아니며, 그 원성을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맹자는 사람들은 다 차마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앞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워 근심하고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반드시 달려가 구하려고 하는데, 이는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근본 마음이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측은지심 [惻隱之心]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을 이르는 말.

惻 : 슬퍼할 측.隱 : 근심할 은.之 : 의 지.心 : 마음 심

 

수오지심 [羞惡之心] 
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羞  부끄러울 수 .惡  미워할 오 .之  의 지 .心  마음 심 
 
사양지심 [辭讓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할 줄 아는 마음.

辭  말 사 .讓  사양할 양 .之  의 지 .心  마음 심

 
시비지심 [是非之心] 

옳음과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

是  옳을 시 .非  그를 비 .之  의 지 .心  마음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