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가을 하늘에 띄우는 편지

경호... 2012. 10. 17. 04:02

 

편지 / 고은

 

지금 나는 넓은 후면(後面)을 돌아다 본다.
  길들이 재회(再會)한다. 하나의 길이 굽이친다.
  누가 저 길로 반짝이며 올 것인가,
  새가 잘못 날을 때 죽음이 여기저기서 메아리 친다.
  가장 멀리까지 들릴 새 소리 밑으로 나는 가야 한다.
  그리하여 상회(上廻)하는 하늘에서 편지를 받는다.
  
  받은 편지는 한 번 죽는다. 그리고 태어난다.
  어떤 여자가 첫 인사의 길을 묻고
  함께 가다가 어의(語意) 때문에 헤어진다.
  새가 나 대신 떨어져 죽는다.
  다 마친 일 속에 남은 일이 있다.
  마침내 반짝이는 편지 속에 새가 운다.
  
  지금 나는 밭에서 흙 묻은 손과 이야기한다.
  편지의 구절들이 살아서 내 말이 된다.
  저만큼 남은 처녀지(處女地)까지 가기 전에
  귀빈(貴賓)인가, 먼 곳에서 지진(地震)이 지나간다.
  그러나 내 앞으로 올 날들이 서두르고
  하늘은 무엇인가를 자꾸 시키면서 높아진다.
  
  편지는 저 너머의 것을 이 땅에 가지고 온다.
  새가 죽은 뒤의 극약(劇藥) 묻은 가지에서
  언젠가 날으고 잊어 버린 우뢰 아래서
  곧 무너질 근조(謹弔)의 언덕에서
  편지는 비처럼 내 일들을 적신다.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뜻으로 비가 왔는가.

 

 

 

 

당신의 편지/한용운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꽃밭 매던 호미를 놓고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글씨는 가늘고 글줄은 많으나 사연은 간단합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라면 글은 짧을지라도 사연은 길 터인데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바느질 그릇을 치워 놓고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나에게 잘 있느냐고만 묻고 언제 오신다는 말은 조금도 없습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라면 나의 일은 묻지 않더라도 언제 오신다는 말을 먼저 썼을 터인데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약을 달이다 말고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주소는 다른 나라의 군함(軍艦)입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남의 군함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편지에는 군함에서 떠났다고 하였을 터인데

 

 

 

편지/오세영

 

나무가

꽃눈을 틔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수국

그러나 시방 수국은 시나브로

지고 있다

찢어진 편지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이 진다는 것은

기다림에 지친 나무가 마지막

연서를 띄운다는 것이다.

 

이 꽃잎, 우표대신 봉투에 부쳐 보내면

배댤될 수 있을까.

그리운 이여

봄이 저무는 꽃 그늘 아래서

오늘은 이제 나도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편지/문정희

 

그 하나만 사랑하시고

모두 버리세요.

 

그것은 生이 아니라

약속이에요.

 

모두가 혼자 가지만

한곳으로 갑니다.

그것은 즐거운 약속입니다. 어머니

 

조금 먼저 오신 어머니는

조금 먼저 그곳에 가시고

 

조금 나중 온 우리들은

조금 나중 그곳에 갑니다

 

약속도 없이 태어난 우리

약속 하나 지키며 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외롭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니 울지 마셔요.

 

어머니는 좋은 낙엽이었습니다.

 

 

 

편지/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을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긴 편지 / 나호열

풍경風磬을 걸었습니다 눈물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너무 높이 매달아도 너무 낮게 내려놓아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오래 있다가 이윽고 아주 오랜 해후처럼 부등켜 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와르르 눈물이 깨질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씨앗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날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손금 속으로 사라지는 짧은 그림자 말이지요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솟아올라 고이는 샘물처럼 풍경도 슬픔을 제 안에 채워두어야겠지요 바람을 알아버린 탓이겠지요

 

 

 

새벽 편지 / 곽 재 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은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붉은 우체통 / 황지우                       

버즘나무 아래
붉은 우체통이
멍하니, 입 벌리고 서 있다
소식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思想이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여, 비록 그대가
폐인이 될지라도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고 쓴 편지 한 통 없지만,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길가에서 안개꽃 한 묶음을 사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뱃가죽에 타이어 조각을 대고
이쪽으로 기어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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