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佛敎에關한 글

한암 스님

경호... 2012. 9. 30. 06:21

한암 스님

 

“천고에 자취 감춘 鶴이 될지언정…”

 

 

 

 

방한암(方漢岩) 큰 스님은 조선조 말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22세 때 우연히 금강산 구경길에 나섰다가 장안사(長安寺) 행름노사를 만나 삭발 출가하였다.

24세 때에 당대 최고의 선지식 경허대선사를 청암사에서 만나 『금강경』을 배우던 중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에서 큰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개안(開眼)의 기회를 얻었다. 그 후 스님은 해인사, 통도사를 거쳐 평안도 맹산군 도리산에 있는 우두암에서 홀로 참선수행하던 중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 큰 깨달음을 얻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부엌에서 불 지피다/홀연히 눈 밝으니
이로부터 옛길이/인연따라 분명하네
만일 누가 달마스님이/서쪽에서 오신 뜻을 나에게 묻는다면
바위 밑 샘물소리/젖는 일 없다 하리.

이 때 한암 스님의 세속 나이는 35세.

“한암 아니면 누구와 지음(知音) 되랴”

한암 스님이 해인사에서 머물고 계실 때, 스승이신 경허 선사께서 정처없는 만행길에 올라 해인사에 오셨다. 경허 선사는 발길을 다시 북쪽으로 돌려 해인사를 떠나면서 한암을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에 간절한 글 한 편과 시(詩) 한 수를 지어 한암에게 전했다.

“나는 천성이 화광동진을 좋아하고 더불어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삽살개 뒷다리처럼 너절하게 44년의 세월을 지내다 우연히 한암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선행은 순직하고 또 학문이 고명하여 1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평생에 처음 만난 사람인양 생각되었다. 그러나 오늘 서로 이별하는 마당에 서게 되니, 아침 저녁의 연운과 산해(山海)의 멀고 가까움이 진실로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즉, 이별의 섭섭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날 사람은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차 있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고 하지 않았던가.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그러므로 여기 시(詩) 한 수를 지어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


북해에 높이 뜬 붕새 같은 포부
변변치 못한 곳에서 몇 해나 묻혔던가.
이별은 예사라서 어렵지 않지만
뜬 목숨 흩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랴.
이 간절한 스승의 글과 시를 받아 본 한암 스님은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스승께 바쳤다.
서리국화 설중매는 지나갔건만
어찌하여 오랫동안 곁에 둘 수 없을까.
만고에 변치 않고 늘 비치는 마음 달
뜬세상에서 뒷날을 기약해 무엇하리오.


그리고 한암 스님은 스승 경허 선사와 헤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스승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어찌 감히 짐작이나 했으랴.

 


<사진설명>한암 스님이 주석했던 월정사.

 

 

“잿물은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한암 스님께서 한강 건너 봉은사 조실로 계실 때의 일이었다.

한번은 한암 스님께서 강화도 전등사, 보문사 참배길에 오르셨는데, 이 때 시봉을 들고 있던 수좌는 성관이었다. 지금은 드넓은 다리가 두 곳에 놓여서 강화도 가는 길이 편하지만 당시에는 김포와 강화도 사이에는 다리가 놓여지기 전이라 배를 타고 건너다닐 때였다. 우선 김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가서 거기에서 수십리길을 걷고 걸어서 길상면 전등사까지 가자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버렸다. 게다가 비까지 억수로 퍼부었다.

하는 수 없이 남의 집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인색하기 그지없는 부잣집이었다. 그 부잣집 주인이 거드름을 피우며 스님께 빈정거렸다.

“스님들은 탁발을 나오기만 하면, 보시하라, 나누어 주어라, 그러시던데, 재산이 좀 있다고 해서 허펑허펑 남에게 퍼주기만 하면 그게 옳은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안 쓰고 절약해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게 옳겠습니까? 어디 한 번 대답을 해보시오.”

이때 한암 스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부잣집 주인에게 말씀하셨다.
“주인 어른께서는 오른손을 한 번 펴보시지요.”
“손을 펴라니, 이렇게 손가락을 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이다. 주인장께서 지금 손가락을 쫙 펴셨는데, 그 손가락을 오무리지 못하면, 그것은 불구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그, 그야 편 손을 오무리지 못하면 불구입지요.”
“그럼 이번에는 주먹을 한 번 쥐어보시지요.”
“이, 이렇게 말씀입니까?”
“그렇소이다. 주인장께서 지금 주먹을 꼭 쥐셨는데, 이 손을 펴지 못하면, 그것은 불구입니까, 아닙니까?”
“아, 그야 주먹을 펴지 못하면 그것도 불구입지요.”
“재물도 그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재물도... 그와 같다니요?”
“재물도 덮어놓고 허펑허펑 허비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요, 그렇다고 재물을 덮어놓고 움켜 쥐고만 있으면 그 또한 옳은 일이 아닙니다. 손을 펼 때 펴고, 오무릴 때 오무릴 수 있어야 정상이듯이, 재물도 또한 아낄 때는 아끼고, 쓸 때는 제대로 쓸 줄 알아야 옳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한암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난 그 부잣집 주인은 그제서야 부끄러워하며 스님을 극진히 모시는 것이었다.

이 때 강화도 전등사와 보문사를 참배하고 봉은사로 돌아오신 한암 스님은 왜색 승려들이 설치는 꼴을 보다 못해 홀연 봉은사를 떠나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가 동구밖 출입을 끊어버리셨다. 이 때 봉은사를 떠나시면서 저 유명한 한 말씀을 남기셨다.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 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법당에 앉은 채 “이제 불을 지르시게”

 

 

<사진설명>한암 스님이 아니었다면 상원사는 불타버렸을 것이다. 사진은 손재식씨가 촬영한 <오대산>/대원사 에서 발췌.

 

 

1925년 오대산으로 들어가 ‘천고에 자취 감춘 학(鶴)’이 되어버린 한암 큰스님은 1951년 3월 22일 세수 75세, 법랍 54세로 좌탈입망에 드실 때까지 당신의 말씀 그대로 장장 27년 동안 불출동구(不出洞口), 결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산문 밖으로 나오신 일이 없었다.

1941년 일본불교와 차별화하기 위해 뜻있는 우리 스님들에 의해 창종된 불교교단이 바로 ‘조선불교조계종’이었는데 이때 한암 스님이 초대 종정이 되셨다. 오대산 그대로 들어앉아 계시면서도 초대종정에 추대된 것이었다.

 

“적멸보궁 참배나 다녀오게”

그러자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이 한암 종정 스님을 총독부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한암 큰스님은 불출동구를 접지 않고 일언지하에 미나미 총독의 초청을 거절했다. 이에 입장이 난처해진 미나미 총독은 부총독격인 정무총감 오오노를 오대산으로 보내 배알케 했다. 이때 오오노가 한암 큰스님께 법문을 간청하자 스님은 묵묵히 백지 위에 ‘정심(正心) 두 글자만 써주셨다.

그후 경성제대(京城帝大) 교수로 와있던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명승 사또오가 월정사로 한암 스님을 찾아 뵙게 되었다. 큰 절 월정사에서는 급히 한암 스님이 계시는 상원사(上院寺)로 사람을 보내어 한암 스님으로 하여금 월정사로 내려와 사또오 교수를 만나라고 전했다. 그러나 대중들과 김장준비 울력을 하고 있던 한암 스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할 수 없이 사또오 교수가 상원사로 한암 스님을 찾아뵈었다.

사또오 교수가 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나서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대의(大義)입니까?”

스님은 묵묵히 놓여있던 안경집을 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사또오가 또 물었다.

“스님은 일대장경과 모든 조사어록을 보아오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스님은 사또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시면서 한말씀 하셨다.

“적멸보궁에 참배나 다녀오게.”

사또오가 또 물었다.

“스님께서는 젊어서 입산하여 지금까지 수도해 오셨으니, 만년의 경계와 초년의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스님은 한마디로 잘라 답했다.

“모르겠노라.”

사또오가 일어나 절을 올리며 말했다.

“활구법문(活句法門)을 보여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에 스님께서는 사또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마디 하셨다.

“활구라고 말하여 버렸으니 이미 사구(死句)가 되어버렸군.”

사또오는 이때 상원사에서 3일을 머물다 돌아갔는데 “한암이야말로 일본에서도 찾을 수 없는 큰스님”이라고 극구 칭송하고 다녔다.

그후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한암 큰스님의 도(道)가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을 전해들은 일본정부의 경무국장 이께다(池田淸)가 오대산으로 찾아와 한암 스님을 뵙고 한마디 물었다.

“이번 전쟁은 어느 나라가 이기겠습니까?”
순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바짝 긴장했다. 스님께 질문을 던진 사람은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일본의 경무국장. 만일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가 이긴다고 대답하면 길길이 날뛸 것이 아닌가?

스님께서는 과연 뭐라고 대답하실 것인가? 그러나 스님은 태연히 말씀하셨다.

“전쟁은 덕이 있는 나라가 이긴다”

“그야 물론 덕(德)이 있는 나라가 이길 것이오.”

스님의 이 대답을 들은 일본의 경무국장 이께다는 더 이상 아뭇소리도 못한채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오대산을 떠났다.

한암스님은 중국의 한산(寒山)이 한산 깊숙히 들어가 산문 밖으로 평생 나오지 않은 채 저 유명한『한산시』를 남긴 한산처럼 여전히 오대산 깊숙히 들어앉아 불출동구하며 틈나면 좋아하는 ‘한산시’를 읊조리곤 하셨다.
1943년 봄, 전주 청류동 관음선원의 묵담선사가 한암스님께 실참법문을 내려주십사 간청하자 한암스님께서는 한산시 24편을 손수 써서 보내주셨는데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시도 들어있다.

“남을 속이는 자 살펴보니/

바구니에 물을 담고 달려가는 격/

단숨에 집으로 돌아온들/

바구니 속에 무엇이 있을꼬.”

그렇다.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여가며 직위를 탐내고, 부(富)를 탐내며, 천하의 부귀영화를 향해 미친 듯 달려가지만, 그것들 모두 ‘바구니에 물을 담고’달려 가는 격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암 스님은 이 한산시를 통해 어리석은 우리 중생들에게 큰 가르침을 내리신 셈이다. 과연, 바구니에 물을 담고 달려간들, 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스님 법력이 상원사 살려

 

<사진설명>한암 대종사의 부도와 탑.

 

 

1951년. 6.25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밀고 올라갔다가, 밀려 내려왔다를 거듭하고 있던 1월. 느닷없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까지 겪어야 했지만, 바로 이 무렵 오대산에서는 밤낮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한 국군장교가 한 무리의 병력을 이끌고 한암스님과 수좌들이 수행하고 있던 상원사에 들이닥쳤다. 모든 스님들을 절마당으로 모이게 한 뒤, 그 국군장교가 선언했다.

 

“공비들이 절을 거점으로 암약하므로 오대산에 있는 모든 사찰은 다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이 떨어졌소! 이 절도 불태워야겠으니 스님들은 모두 짐을 챙겨 속히 떠나시오!”

이때 한암 스님은 잠시만 말미를 달라고 한 뒤 안으로 들어가서 가사 장삼을 수하시고는 법당으로 들어가 정좌하고 앉으신 채 국군장교를 불렀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으니 불을 지르시게.”

국군장교가 소스라치게 놀라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어서 나가시오!”

그러나 스님은 법당 앞에 정좌한채 요지부동이셨다.
“그대는 군인이니 명령을 따르는게 본분이요. 나는 출가수행자니 법당을 지키는게 본분, 둘 다 본분을 지키는 일이니 어서 불을 지르시게.”

국군장교는 범접할 수 없는 한암 큰 스님의 법력 앞에 어쩌지 못한채 부하들에게 기상천외의 명령을 내렸다.
“이 절의 문짝들을 뜯어다 마당에 쌓아라!”

그리고 그 국군장교는 문짝만을 뜯어다 마당에 쌓고 그 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 뒤, 총총히 산속으로 사라졌다. 우리의 자랑스런 고찰, 상원사가 불타지 않은채 오늘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은 바로 저 한암 큰스님의 법력 덕분이었다.

 

/ 2004. 윤청광.

 

 

 

 

 

한암 스님

 

경허 스님 금강경 설법에 깨달아

 

1925년 왜색 승려들이 설치는 꼴을 보다 못해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27년간 동구불출하며 ‘오대산 학’으로 불린 한암 스님은 1876년 3월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속성이 방 씨였던 스님은 9세에 처음 서당을 다니며 ‘사략(史略)’을 배우던 중 ‘태고에 천황씨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반고씨가 있었다면,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는가’를 선생에게 물을 정도로 유년시절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이때부터 세상과 인간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스님은 이후로도 10여년 동안 그 근원적 의문을 풀지 못한 채 유교경전을 공부하다가 22세에 금강산 구경 중 돌연 입산 출가했다. 이후 금강산을 떠나 성주 청암사에서 운명처럼 근대 선의 중흥조 경허 스님을 만났다. 그리고 경허 스님의 ‘금강경’ 설법 중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닌 줄을 알면 곧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대목에서 깨달음을 맛보았다. 이때 비로소 유년시절부터 품었던 ‘반고씨 이전의 면목’을 깨달은 것이다. 이어 해인사에서 경허 스님이 법좌에 올라 대중에게 “원선화(遠禪和,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의 경지를 지났다”고 공표함으로서 인가를 받았다.


일생 후학들에게 ‘금강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애써 배우기를 당부한 한암 스님의 ‘금강경’ 사랑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자신이 경험한 바가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스님은 1936년 봄 월정사, 유점사, 건봉사의 3본사가 상원사에 개소한 연합수련소의 책임을 맡으면서 참선수행 도량임에도 ‘금강경’ 등을 가르쳤다. 특히 수좌와 수련생들에게 불교 교학 및 사상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보조법어’와 ‘금강경오가해’ 등을 현토해 교재로 간행하고, 각 사찰 승려와 학인들도 배울 수 있도록 출판하기도 했다.


스님은 당시 “탄허가 학식과 문필이 나보다 천만억 배나 낫다”고 할 정도로 아꼈던 상수제자 탄허 스님에게 미리 가르쳐서 경전을 해석토록 하고, 제자들이 의문 나는 것을 물으면 직접 설명하는 형식으로 후학들을 지도했다. 이때 스님은 ‘금강경’ 외운 것을 시험으로 보기도 했고, 잘 외우지 못할 경우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 그만큼 ‘금강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금강반야바라밀경 중간연기 서’에서는 “오가해 중에 육조·야부·종경 등 삼가(三家)의 주석에는 곧 의리(義理)의 미묘함을 설해서 보고 듣는 자로 하여금 깨끗이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은 듯하게 하며, 또한 돌을 부딪쳐서 번갯불이 번쩍이는 소식을 들어보이사 곧 일천 성인이 전하지 못하신 향상일로를 초월케 하시니 가히 말하자면 천지 이전에서 이후까지 억겁을 지난다 해도 만나기 어려운 법이라 하겠다”고 할 정도로 ‘금강경’을 높이 평가했다.


스님은 상원사에 불이 났을 때도 먼저 법당의 대장경부터 꺼내오도록 지시할 만큼 경전을 아꼈고, 강(講)을 할 때면 참선하는 수좌들도 모두 참석하도록 했다. 스님은 또 “경은 노정기(안내서)요, 선은 행함이니 오랫동안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며 열심히 경을 읽고 수행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한편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이 되랴”고 했을 정도로 자신을 아꼈던 경허 스님이 지어준 한암(寒巖)이라는 이름이 너무 차다고 해서 뒷날 스스로 한수 한(漢)자로 고치기도 했다. 

 

 

경봉에게 보조 ‘간화결의’ 추천

 

▲한암 스님

 

보조국사 ‘수심결’ 내용 중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 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을 굳게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소신연비의 고행을 하고 모든 경전을 독송하더라도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아 오히려 수고로움을 더할 뿐이다”라는 대목에서 지견을 얻었던 한암 스님은 이후 수행과 후학양성 과정에서 보조 스님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이후 1903년 해인사에서 ‘전등록’을 읽다가 “한 물건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구절에 이르러 의단이 끊어지는 경지를 만나 확철대오한 한암은 금강산 장안사 지장암에서 수행하던 중 1921년 건봉사 주지 이대련 등의 청을 받아들여 건봉사 조실로 주석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의 요체 21개조에 대한 답변을 글로 정리하면서 선의 본질과 수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선의 요체를 담은 것이다. 이때 이와 함께 행한 법어, 게송, 가사 등의 어록을 정리한 ‘한암선사법어’가 편집되기도 했다.


한암의 수행정신은 교와 선을 일치하는 교선일치, 정혜쌍수의 특성이 두드러진다. 때문에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쌍수를 계승한 선지식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암이 보조국사를 대하는 면면은 경봉 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스님은 경봉 스님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만약 일생의 일을 원만하고 구족하게 하고자 한다면 옛 조사의 방편 어구로서 스승과 벗을 삼아야 됩니다. 우리나라 보조국사께서도 일생토록 ‘육조단경’으로 스승을 삼고 ‘대혜 서장’으로 벗을 삼았습니다. 조사의 언구 중에서도 제일 요긴한 책은 대혜의 ‘서장’과 보조의 ‘절요’와 ‘간화결의’가 활구법문이니 항상 책상 위에 놓아두고 때때로 점검해서 자기에게 돌린 즉, 일생의 일이 거의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제(弟) 또한 여기서 힘을 얻은 것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스님은 이어 “또한 ‘서장’과 ‘결의’와 ‘절요’의 끝부분을 의지한다면 활구를 깨닫기가 쉽고도 쉽습니다. 이 말이 비록 번거로운 것 같지만 그러나 일찍이 방랑을 해보아야 나그네의 심정을 안다고 했으니 제발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만약 한 때의 깨달음에 만족해 뒤에 닦음을 지속하지 않으면 영가께서 말한 바, ‘모두 공이라고 여겨 인과를 무시하고 어지러이 방탕하여 재앙을 초래한다’는 것이 이것이니…”라며 천하의 경봉 스님에게까지 보조국사의 ‘절요’와 ‘간화결의’에 의지해 정진할 것을 재삼 당부했다.


스님은 또한 ‘보조선사 어록 찬집중간 서’에서 “보조선사께서 후학을 연민히 여기시어 경책하여 분발시키심이 매우 간절하시기에 그 연민과 경책 그리고 분발의 의지를 뜻이 같은 이들과 생각을 함께 하여 몇 편의 법어를 편찬하는데 스스로의 아는 바 옅음도 잊어버리고 감히 토를 달아 함께 사는 도반에게 준다”며 ‘보조어록’에 토 붙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암은 자신의 깨침 역시 경전 열람이라는 계기에서 나왔음을 솔직하게 밝히기를 꺼리지 않았다. 하지만 경전과 어록 공부를 강조하면서도 항상 “참선을 거쳐야만 교학의 진수를 얻을 수 있다”며 선 수행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도록 후학들을 지도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시대였음에도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적더라도 나눠 먹으면서 살자’고 했던 한암은 항상 보조국사의 어록이나 경전 강의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스님은 “내가 아무리 법문을 잘해도 고 조사나 부처님만 하겠느냐. 법문을 따로 들으려고 하지 말고 경전이나 어록 속에 담겨 있으니 내 말보다도 부처님 말씀과 경전을 잘 배워야 한다”고 했다.

 

 

 

편지글 등 엮은 ‘일발록’ 남겨

 

 

▲스님의 좌탈입망 모습.

 

 

한암 스님은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7인의 교정으로 추대된 이후 조계종 창종 때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는 등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종정을 역임하면서 근대 한국불교를 이끌었다. 오늘날 조계종이 선종을 표방하며 선 제일주의에 빠져 있으나, 조계종 탄생에 크게 기여하며 종정까지 역임했던 한암은 결코 선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암은 이른바 승가오칙이라 하여 “참선, 간경, 염불, 봉사, 포교 등 다섯 가지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선중방함록 서’에서 염불과 참선이 둘이 아님을 명쾌하게 적시하고, 선문납자로 하여금 선의 본지를 깨달아 선원을 개창한 의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간절한 노파심으로 법문한데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지인과명사리(知因果明事理)’, 즉 ‘중은 인과를 제대로 알아야 하고 사리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암은 또 출가자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그 도리를 일러주었다. “중노릇 잘하라”고 강조하면서 “절집을 떠나지 말아라. 대중처소에서 생활해라. 인과를 분명히 하는 생활을 해라. 중으로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를 참여하지 못하면 중이 아니다”는 점을 언제나 당부하고 또 당부했던 것이다. 오늘날 출가수행자들이 깊이 새기고 따라야 할 가르침이기도 하다.


또한 “산은 높은 대로 바다는 깊은 대로 평등한 것이다. 오리의 다리는 짧은 대로 평등한 것이고 황새의 다리는 긴 대로 평등한 것이다. 산을 깎아 바다를 메우면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불평을 하게 된다.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해서 황새의 다리를 잘라 붙일 수 있겠는가”라며 대중들이 서로 반목하지 않고 화합할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암은 1932년 ‘불교’지 제100호에 ‘화엄경’, ‘기신론’, ‘보장론’ 등을 근거로 ‘참선에 대하여’를 기고하면서 자신의 견지를 피력할 정도로 선지식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그런 한암의 선지는 한국전쟁 때 국군이 법당을 불태우려 할 때 잘 드러났다. 인민군들이 근거지로 쓸 수 있다는 이유로 절에 불을 지르려 하자, 한암은 가사·장삼을 수하고 법당에 들어가 정좌한 채로 “이제 됐으니 불을 놓으라”고 말해 군인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이때 한암은 “당신들은 상부의 명령을 따르면 되고 나는 중으로서 절을 지키면 되지 않느냐. 본래 중들은 죽으면 불에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이도 많고 죽을 날도 멀지 않았으니 잘 된 것 아니냐. 그러니 걱정 말고 불을 질러라”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한 장교가 기지를 발휘해 법당 문짝만을 뜯어 태우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선지식의 기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선지식의 선지와 기개를 담은 저술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평생 쓴 편지, 누군가에게 게송을 주거나 현판을 써준 것 등을 한지에 적어 묶어놓아 자서전과도 같았던 ‘일발록(一鉢錄)’이 있었으나, 1961년 상원사 소림초당이 불에 탔을 때 함께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다행이 탄허 스님이 대강의 내용을 외우고 있어서 후일 다시 만들어 전해지기는 한다.


한편 27년 동구불출하면서도 선지를 밝혀 세상에 빛을 보였던 한암은 1951년 3월22일 세수 75세 법랍 54세로 좌탈입망했다. 그리고 그가 입적하자 편지글로 서로를 탁마하며 도반으로 살았던 절친 경봉은 “눈빛을 거두는 곳에 오대산이 서늘해/ 꽃과 새들도 슬피 울고 달에까지 향연이 어리는 듯/ 격식 밖의 현담을 누가 아는가/ 만산엔 변함없이 물이 흐르네”라고 추도했다. 


심정섭 기자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