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타와 위빠사나
깨달음에 이르는 명상의 두 날개
사마타(止)는 무엇이고 위빠사나(觀)는 무엇인가.
사마타란 고요 혹은 평온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들뜸과 산란함을 가라앉혀 집중된 경지를 가리킨다. 이러한 집중의 상태는 몇몇 단계로 나뉜다. 감각적 쾌락에 동요되는 않는 경지인 첫 번째 선정(初禪)이라든가 언어적 사고(語行)가 정지한 두 번째 선정(第二禪) 따위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마타는 여덟 단계로 구분된다. 거기에는 생각과 정서가 가라앉은 정도에 따른 ‘물질적 영역의 4가지 선정(色界四禪)’과 ‘비물질적 영역의 4가지 선정(四無色定)’이라는 2가지 구분법이 포함된다(Ps. I. 98).
한편 위빠사나란 있는 그대로(如如, yathabh?ta?)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몸과 마음에 관련된 제반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주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몸의 움직임이나 느낌 따위를 관찰하면서 모든 현상이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이치를 통찰하는 것이 곧 위빠사나이다.
나아가 괴로움에 대한 통찰(苦隨觀), 무아에 대한 통찰(無我隨觀), 소멸에 대한 통찰(滅隨觀) 따위가 그것이다(Ps. I. 98~99).
사마타는 고요함의 깊이에 따른 여러 심리적 위계를 망라하며, 위빠사나는 다양하게 드러나는 통찰의 내용을 포섭한다.
초기불교 이래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명상의 양 날개 구실을 해왔다. 수행에 처음 입문한 사람에게는 일단 사마타를 통해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절차가 권장된다. 탐욕이라든가 의심 따위에 동요되는 상태에서는 정신적 진전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사마타를 통해 마음을 비우고 가라앉히는 과정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사마타의 사례로는 특정한 색깔로 이루어진 원판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거나 떠올리면서 몰입하는 방법이 있다(Ps. I. 95). 혹은 불(佛)·법(法)·승(僧)의 삼보를 지속적으로 떠올림으로써 잡념을 차단하고 몰입된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이 제시되기도 한다.
한편 위빠사나는 특별한 집중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상에 상관없이 경험하는 일체의 현상에 대해 본질적 특성을 통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위빠사나는 사마타와 전혀 다른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무상에 대한 통찰이 반드시 평온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괴로움에 대한 통찰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집중된 상태에서는 괴로움이라는 느낌 자체가 잘 포착되지 않는다.
마음상태가 거칠면 거친 대로, 고요하면 고요한 대로, 그때그때 경험하는 안팎의 현상을 놓치지 않고 통찰하는 과정이 위빠사나이다.
그러나 실제 수행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서로 혼합된다고 할 수 있다. 사마타를 체험해보지 않고서 내면을 반조하는 능력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예컨대 탐냄이나 성냄에 휩싸여 있다고 치자. 사마타를 통해 가라앉은 마음상태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한 발짝 물러나 통찰하는 여유를 지닐 수 있다. 그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탐냄과 성냄에 뒤엉켜 자기 자신이 과연 어떠한 상태에 빠져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하나의 쌍으로 언급되곤 하며, 특히 전자를 닦은 연후에 후자로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이다.
사념처(四念處) 명상을 사례로 들어보자.
사념처란 몸·느낌·마음·법을 지속적으로 주시함으로써 경험하는 현상의 본질을 깨닫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측면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다. 몸이나 느낌에 대한 마음지킴은 고도로 집중된 경지인 사마타의 상태를 가져오는 동시에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의 요소를 포함한다.
한편 마음과 법에 대한 마음지킴에서는 더욱 유연한 태도로 기민하게 깨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진행하는 와중에는 위빠사나의 측면이 강조되지만 사마타 또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사념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골고루 계발시키는 균형 잡힌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66. 다섯 장애
수행 진전 방해하는 대표적인 번뇌
다섯 장애(五蓋)란 무엇인가. 수행의 진전을 방해하는 5가지 대표적인 번뇌를 가리킨다.
쾌락에 대한 욕망(貪欲), 악한 마음(瞋), 혼침과 졸음(昏沈睡眠), 들뜸과 회한(掉擧惡作), 의심(疑) 따위이다. 이들은 마음을 오염시켜 지혜를 가로막는다. 여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면 명상의 진척을 기대할 수 없다. 장애에 부딪힌 대부분의 초보 수행자는 그대로 주저앉고 만다.
그러나 사념처(四念處)의 마지막 관문인 법에 대한 마음지킴(法念處)은 바로 이들에 대한 알아차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들 자체를 통찰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면 사념처 명상의 완성 단계에 이른 셈이다.
쾌락에 대한 욕망은 성적(性的) 욕구에 휘둘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출가자는 물론이고 재가자들 또한 경계해야 한다. 어찌 보면 성적 욕구란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일 수 있다. 이러한 생리적 현상 자체를 문제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 부화뇌동하여 휘둘리는 상태에 이르러서는 곤란하다. 그것으로 인해 불안과 회한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법에 대한 마음지킴에서는 바로 이러한 상태를 관찰하면서 무상(無常)의 이치를 깨우치도록 유도한다. ‘있으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없으면 없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통해 일어남과 사라짐의 진리를 자각하도록 한다(DN. II. 300).
쾌락에 대한 욕망이란 본능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쉽사리 제거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방안은 일단 그러한 현상의 발생을 인정하고서 주시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저항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력감이 느껴질 수 있다. 심지어 욕망과 하나가 되어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지긋이 초점을 모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어느덧 약화된 욕망의 틈새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지가 드러난다. 혹은 불가항력적인 경우에는 환경을 바꾸거나 주변의 도움을 구하는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는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번뇌를 억지로 없애려는 시도는 무모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우선 번뇌에 빠져 있다는 사실 자체를 직시해야 한다. 이때 번뇌에 수반하여 발생하는 부차적 느낌이나 상념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찌 이것을 없앨 수 있을까’라든가 ‘과연 이것이 없어질까’ ‘아니야 난 틀렸어’ ‘이번 한번만…’ 따위의 동요로 인해 마음의 중압감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진다. 이러한 모든 상념을 내려놓고서 다만 지긋이 번뇌를 그 자체로서 응시할 때 자연스럽게 변화는 일어난다.
악한 마음,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 의심 등도 이러한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 악한 마음이란 자신과 타인에 대해 품는 공격적 성향을 가리킨다. 혼침과 졸음은 몸과 마음이 둔해져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들뜸과 회한이란 미래에 대한 기대와 과거에 관한 후회로 요동치는 마음상태를 나타낸다.
마지막의 의심이란 이리저리 의심하고 반신반의하면서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불안정한 마음을 말한다. 이들은 한 결 같이 넘어서기 힘든 내면의 장애이며, 여기에 지배되는 한 정신적으로 고양된 경지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확고한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은 감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열어준다. 내면의 장애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이기적 본능의 사슬을 결코 끊을 수 없으며, 자신과 타인을 위해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이로운가를 깨우치지도 못한다(AN. III. 230). 그러나 이들 장애에 대해 분명한 자각과 인식을 갖게 되면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게 된다. 마음지킴이 전제될 때 번뇌는 저절로 변화하여 깨달음의 매개로 바뀐다. 번뇌가 곧 보리(菩提)인 셈이다.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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