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佛敎에關한 글

당신은 부처님

경호... 2012. 4. 27. 23:41

 

 

당신은 부처님

無比스님

 

머리말

 

새로운 불교

 

마음이 부처라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 몸이 부처다. 또 깨쳐야 부처라는 시대도 지나갔다. 깨치지 않아도 지금 그대로 부처인 시대가 왔다. 3아승지 겁을 닦아야 성불(成佛)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지금 그대로 닦지 않고 성불이다. 지금 부처로 살지 않고 어느 세월에 부처로 살겠는가?

 

눈에 보이는 현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발전한다. 첫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경제사정이 그렇다. 내가 의식할 수 있었던 5, 60년 전과 비교하면 대강 계산해도 국가나 개인이나 모두가 1천배 이상 부자로 산다. 수출은 1만 배란다. 의식주(衣食住)의 모든 면이 그렇고, 교통사정이 그렇고, 통신사정이 그렇고, 제반물질의 풍요한 점이 그렇다. 모두가 줄잡아 1천배 이상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산다. 그만큼 발전하였다.

 

우리 불교는 그동안 얼마나 발전하였는가? 아마도 시중에 절과 포교당이 좀 늘었으리라. 그러나 이웃종교와 비교하면 명함도 못 내밀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불교까지 질량(質量)으로 발전을 꾀할 것은 아니다. 나는 저 눈부신 물질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수행하는 출가승려(出家僧侶)들부터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고와 생활까지 너무나도 달라져버린 이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불교를 주창(主唱)하고 싶다. 우리 불교의 교설(敎說)도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답도 없는 방편(方便)만을 말할 것인가?

 

그렇다고 과거에 다른 사람들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이상야릇하고 괴괴망측(怪怪罔測)한 불교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하였듯이 옛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사(祖師) 스님들의 가르침을 밑바탕으로 하여 신()불교, 신대승(新大乘)불교, 최상승(最上乘)불교를 주창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즉 앞선 불교며, 정법(正法)불교며, 새로운 불교며, 일체 방편을 다 배제한 진실한 불교며, 미래지향적인 불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를 밑받침 하는 사상은 사람이 곧 부처님이라는 인불사상(人佛思想)이다. 이 인불사상이야말로 사람사람이 모두 행복하고 세상 인류가 다 같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최상의 바른 열쇠가 된다. 인불사상으로 모두가 서로 서로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면 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며, 세상사람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부처님 2 /1 당신은 부처님 1 /참구하고 또 참구해 봐도 1

 

나는 종일토록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 않으면서 참구하고 또 참구해 봐도 다른 것이 없더라. 사람이 곧 부처님이요, 이 몸이 곧 부처님이더라[吾終日不食終夜不眠 而參無別 人卽是佛 是身卽佛].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이 말은 <법화경(法華經)>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의 주제다. 그리고 <법화경> 전체의 주제다. 또한 석가세존께서 길고 긴 한 생애의 목숨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전 인류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단 한마디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불교의 무수한 가르침들은 결국 이 한마디 말을 주제로 삼고 온갖 방편의 교설들을 장황하게 펼쳐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불교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당신은 부처님이다.

 

뿐만 아니라 석가세존 이후의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선지식들과 조사님들과 성현들께서 뼈를 깎는 정진과 수행을 통해서 마침내 얻어낸 결론이 또한 이 한마디 말씀 당신은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모든 조사들의 혈맥이며 심장이다.

 

평생을 사람 노릇 하지 않고 그 소중한 인생을 다 바쳐 공부한 당신. 전 인류에게 전하고 싶은 단 한마디 말을 선택하라면 당신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만약 당신이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말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곧 석가세존의 전신(前身)인 상불경보살이다.

 

상불경보살은 어떤 욕설과 구타에도 굴하지 않고 사람들을 끝끝내 부처님으로 부르고 받들어 섬기며 존중하고 찬탄하였다. 자신을 향해 욕하고 구타하는 그 능력, 그 사실에서 부처의 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석가세존의 과거생의 삶이기도 하며, 또한 금생의 삶이기도 하며, 내생의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 사람에게 행복의 문을 여는 진정한 열쇠를 나누어주는 분이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받들어 섬기면 그도 행복하고 나도 또한 행복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부처님 3 /1 당신은 부처님 2 /참구하고 또 참구해 봐도 2

 

모든 사람은 지금 이대로 부처님이 아닐 이유가 절대로 없다. 어디를 살펴보아도 지금 그대로가 부처님이다. 사물을 볼 줄 알고, 소리를 들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느라 밤잠을 못 이루며 몸부림치는 그 능력, 그 사실을 두고 어디에서 다시 무슨 부처님을 찾겠는가? 어디에 무슨 부처님이 있어서 그렇게 할 줄 알던가? 어디에 무슨 신()과 무슨 하나님이 있어서 그렇게 할 줄 알던가?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하고 미운 일이 있으면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할 일이 있으면 질투하고 시기한다. 자신이 잘한 일이 있으면 자랑하고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감추고 덮어서 남이 모르게 한다. 2, 3세 되는 어린아이에서부터 8, 90 노인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 하나 다른 사람이 없다.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하지 않은가? 부처님과 조사(祖師)와 같이 진리를 깨달은 분들은 한결같이 사람의 이러한 점을 들어 부처라 하였다.

 

자비롭다든지 지혜롭다든지 선량하다든지 이러한 점을 취해서 부처라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조건을 들어 부처라 하면 영원히 답이 없다. 방편으로 설하는 불교는 답이 없는 문제만을 영원히 끌고 간다. 3천 년 전에 계셨던 역사상의 석가모니 부처님은 달리 이야기해야 하지만, 법당의 부처님은 비난을 하고 욕을 해도 화를 낼 줄을 모른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그 사실을 모른다. 심지어 당신에게 바친 돈을 훔쳐가도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라는 부처님은 슬프면 울 줄도 알고 기쁘면 웃을 줄도 안다. 추우면 추운 줄을 알고 옷을 찾아 입는다. 더우면 더운 줄을 알고 시원한 방법을 찾는다. 참으로 신통방통한 살아있는 참 부처님이다. 종일 동안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 않으면서 아무리 궁구하고 참구해도 다른 것이 없다. 그것이 그 끝 모를 불가사의하고 진정한 부처님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활불(活佛)이요, 생불(生佛)이다. 활신(活神)이요, 생신(生神)이다. 모든 사람이 본래로 이와 같거늘 우리 모두가 지금 이대로 부처님이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사람을 유정불(有情佛)이라 하지 않던가?

 

당신은 부처님 4 /1 당신은 부처님 3 /참구하고 또 참구해 봐도 3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이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은 물론이려니와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유일한 열쇠며, 최고의 처방전이다. 그리고 온갖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 어떤 사고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튼튼한 에어백이다.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분노와 원망과 원한의 무서운 불길도 다 끌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소화기(消火器). 나아가서 전 인류를 행복하게 하고 평화롭게 하는 단 하나뿐인 열쇠다.

 

평소에 불교를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고 잘못 공부하여 자신과 남을 일러 번뇌 많고 업장 두터운 중생이라는 말과 생각을 하루에 1만 번을 했다면 이제는 지금 이대로 부처님이라는 말과 생각을 하루에 백만 번을 해야 부처님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인불사상(人佛思想)이 자신에게 인격화가 되고 몸이 되고 자신의 살림살이가 되려면 하루에 당신은 부처님을 백만 번을 읊조려야 하리라. 그 말을 듣는 상대가 있건 없건 백만 번을 읊조려라. 그리고 시간이 나는 대로 그 사실을 깊이깊이 사유하고 명상하고 참구하라. 깊은 사유와 명상과 참구를 통해서 그 진리가 나에게 인격화가 될 것이고 나의 몸이 될 것이고 나의 살림살이가 될 것이다. 만약 사유와 명상과 참구가 안 되면 염불을 하라. ‘당신은 부처님’ ‘당신은 부처님’ ‘당신은 부처님이라고 염불을 하라.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지장보살을 부르는 염불보다도 그 공덕이 천만 배나 수승하리라.

 

당신은 부처님 5 /2 법화경의 인불사상 1 /1 성인 중의 성인 1

 

인류 역사에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은 대단히 많다. 그러나 훌륭한 지혜를 갖춘 참다운 성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세상의 온갖 유형무형인 존재의 실상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훌륭한 지혜를 갖춘 참다운 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세존을 성인 중의 성인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사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수행을 결심하신 것도 인간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였다. 6년의 수행 끝에 정각(正覺)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사실도 실은 인간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미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참다운 가치를 알았을 뿐이지 새로운 것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49년간, 당신이 깨달으신 인간 존재의 실상을 수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 전법의 세월을 보냈다. 그 전법의 세월을 보내면서 가르치신 내용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의 내용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유형무형의 온갖 존재들에 대한 실상을 설하여 그 존재의 실상에 맞춰서 사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많고 많은 가르침으로써 진리를 설명하고 사람들은 그 진리에 맞게 살아감으로써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을 한껏 누리며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수 있다고 하는 내용이다.

 

무수한 가르침들 중에서 그 근본 취지만을 가려서 살펴본다면 부처님의 몇 가지 경전과 후대에 깨달음을 이루신 몇 분의 조사님들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먼저 <법화경>은 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가슴에 묻어두었던 최후의 말씀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리라. 특히 <법화경><방편품>에서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취지를 스스로 밝힌 내용이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당신은 부처님 6 /2 법화경의 인불사상 2 /2 깨달음의 지혜

 

부처님은 오직 하나의 큰 사연[一大事因緣]이 있어서 세상에 출현하느니라. 사리불이여, 무엇을 부처님은 오직 하나의 큰 사연이 있어서 이 세상에 출현한다.’ 하는가? 부처님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서[]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여주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의 길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느니라. 사리불이여,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하나의 큰일 인연을 위하여서 세상에 출현한 것이라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경전에서 오직 부처님의 지견을 사람들에게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 주고, 들어가게 해 주기 위해서 세상에 출현하였다는 그 부처님의 지견이란 정견(正見)이며 깨달음의 지혜다. 그 지견으로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고 사람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지혜에 의하여 사람의 실상을 바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만을 말하자면 사람이 부처님이요, ‘당신이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혹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잘못 알고 말하는 사람들은 죄업이 많고 번뇌 망상이 가득한 못난 중생이라거나, 또는 하나님의 종이라거나, 탐욕과 진에와 어리석음과 같은 몹쓸 것만 지니고 다니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하지만 그것은 삿된 견해며, 전도된 견해며, 캄캄한 눈을 가진 사람이다. 마치 맹인이 태양이 밝게 비추는데도 자신의 눈이 어두운 것은 탓하지 않고 태양이 없다고만 말하는 경우와 꼭 같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고 하나님으로 보아서 부처님으로 또는 하나님으로 받들어 섬기며 존중하고 찬탄할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지혜를 갖춘 참다운 성인이다.

 

당신은 부처님 7 /2 법화경의 인불사상 3 /3 皆已成佛道 1

 

<법화경>28품으로 나눠져서 한 품 한 품이 모두 특색을 가지고 있다. <방편품><법화경> 전체의 안목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법화경> <방편품>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으로 나무 꼬챙이나 붓이나 또는 손가락이나 손톱 따위로 불상을 그린다면 이와 같은 이들도 점점 공덕을 쌓으며 큰 자비심을 갖추어서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皆已成佛道]. 다만 보살이 되어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였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탑에나 불상에나 탱화에 꽃과 향과 깃발과 일산으로써 공경 공양하였거나, 또는 남을 시켜 풍악을 울리고 북 치고 소라 불고 퉁소와 저와 거문고와 공후와 비파와 징과 요령 등 이러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불상에 공양하였거나, 또는 환희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하거나, 내지 아주 작은 음성으로 공양하더라도 이러한 이들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皆已成佛道].

 

만약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꽃 한 송이를 불상에 공양하면 점점 무수한 부처님을 친견하느니라. 혹 어떤 사람이 절을 한 번 하거나, 합장만 한 번 하거나, 손만 한 번 들거나, 머리만 조금 숙이어도, 이러한 일로 불상에 공양하면 점점 한량없는 부처님을 친견하고 스스로 최상의 도를 이루고는 무수한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게 하기를 마치 나무가 다 타고 불이 꺼지듯 하느니라.

 

당신은 부처님 8 /2 법화경의 인불사상 4 /3 皆已成佛道 2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탑에 들어가서 나무불(南無佛)’ 하고 염불을 한번 하더라도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지나간 세상의 부처님들이 혹 생존해 계실 때나 열반에 드신 뒤에 이러한 법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皆已成佛道].”

 

위에서 인용한 경전의 내용을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살펴본다면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다.”는 것이 주제다. 경전의 내용대로라면 성불하기가 너무도 쉽다. 아니다. 성불을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간단한 말이나 행위를 하는 그 사실과 그 능력을 부처의 능력이며 부처의 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으로 나무 꼬챙이나 붓이나 또는 손가락이나 손톱 따위로 불상을 그린다면 그것으로 다 이미 성불하였다.”고 하였다. 또 탑이나 불상 앞에서 노래만 한곡 불러도 다 이미 성불하였다. 또 산란한 마음, 즉 번뇌와 망상이 있는 그대로 불상 앞에 꽃 한 송이만 공양하더라도 그들도 다 이미 성불하였다.

 

또 탑 앞에서 나무불이라는 한마디 말로 다 이미 성불하였다. 성불의 조건이 이와 같이 쉬운데 그대들은 아직도 그와 같은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직도 부처님이 되지 못했다면 그처럼 쉬운 일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리라.

 

경전의 속뜻은 이렇다. 실은 부처님께 공경 공양하고 찬탄 예배하든지, 아니면 부처님을 비방하고 불상을 훼손하든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아무런 관계없이 그가 사람이면 그대로가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치 삼독과 84천 번뇌 망상이 뒤범벅이 되어 취생몽사하는 사람이라도 그냥 그대로가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사랑할 줄 알고 시기하고 질투할 줄 아는 그 사실이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실로 그 능력보다 더 위대한 능력이 또 어디 있는가?

 

이는 곧 사람은 본래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달리 다듬거나 가꾸거나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어떤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은 멀쩡한 살을 공연히 긁어서 부스럼을 내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기에 <법화경>의 위와 같은 말씀이 빛을 발하며, 경전 중에 최고의 경전이며, 경전 중의 왕으로 숭상 받고 있다. <법화경>은 전편이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사람이 본래로 부처님, 당신은 지금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뜻을 밝히고 있는 가르침이다. 그것이 세존께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인류에게 던져주고 싶어 했던 금과옥조다. 팔만대장경의 핵심이다. 이 한마디 말만 자신의 인격이 되면 불교공부 끝이며 인생 공부 끝이다.

 

당신은 부처님 9 /2 법화경의 인불사상 5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법화경 상불경보살품>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

 

최초의 위음왕 여래께서 열반하신 뒤 정법(正法)이 없어지고, 상법(像法) 동안에 뛰어난 체하고 잘난체하는 비구들이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한 보살비구가 있었으니 이름은 상불경(常不輕)이라 하였느니라.

 

득대세 보살이여, 무슨 인연으로 이름을 상불경이라 하였는가. 이 비구는 무릇 만나는 사람마다 비구거나 비구니거나 청신사거나 청신녀거나 간에 보는 대로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나는 그대들을 깊이 공경하고 감히 가벼이 여기거나 업신여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도를 행하여 마땅히 성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비구는 경전을 읽거나 외우지도 아니하고 다만 사람들을 향해서 예배만을 행하였느니라. 멀리서 사부대중을 보더라도 또한 일부러 따라가서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나는 그대들을 깊이 공경하고 감히 가벼이 여기거나 업신여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의 도를 행하여 마땅히 성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느니라.

 

사부대중 가운데 화를 내거나 마음이 부정(不淨)한 이가 있다가 나쁜 말로 욕설을 하면서 말하기를 이 무지(無智)한 비구야, 어디서 왔기에 스스로 말하되, “나는 그대들을 가벼이 여기거나 업신여기지 않노라.”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마땅히 성불하리라.”고 수기(授記)를 주는가. 우리는 그런 허망한 수기를 받지 아니 하리라.’라고 하였느니라.

 

그는 이렇게 여러 해를 다니면서 항상 욕설과 꾸짖음을 당하여도 화도 내지 아니 하고 항상 말하기를 그대들은 마땅히 성불하리라고 하였느니라. 이러한 말을 할 적에 여러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리거나 돌을 던지면 멀리 피하여 달아나면서도 오히려 음성을 높여서 외치기를 나는 그대들을 감히 가벼이 여기거나 업신여기지 못하노라. 그대들은 모두 다 마땅히 성불하리라고 하였느니라.

 

그가 항상 이렇게 말하므로 뛰어난 체하고 잘난체하는 비구와 비구니와 청신사와 청신녀들은 별명을 지어서 항상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상불경(常不輕)이라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상불경 보살은 석가세존의 전신이다. 석가세존이 과거에 이와 같은 정신과 행동으로 비로소 성불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본래로 부처님이라는 이 사실이 불교의 전체의 가르침을 관통하고 있으며 이 말씀이 불교의 결론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80생애를 마치면서 <법화경>에서 최후의 유언으로 전 인류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마지막 한마디 말씀이 당신은 부처님이다. 무엇이 그토록 가르쳐 주고 싶었던 부처라는 사실일까? 눈과 귀와 코와 혀 등을 통해서 마음껏 활발발하게 작용하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그 능력이다.

 

가을이 와서 낙엽이 지면 공연히 고독하고 쓸쓸한 감정에 젖어들 줄 아는 그 미묘 불가사의한 그 물건, 그 작용이 곧 부처의 작용이다. 봄이 돌아와서 새싹이 돋고 날씨가 화창하면 공연히 기분이 상쾌하고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이것이 모두 진실한 부처의 미묘한 작용이다. 이 사실은 이 세상 그 어떤 물건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참으로 신기한 존재다. 이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없다. 이것은 만유의 주인이다.

상불경 보살은 사람 사람에게서 바로 이것을 보았던 것이다.

 

당신은 부처님 10 /2 법화경의 인불사상 6 /석가세존의 비원(悲願)

 

<법화경><상불경보살품> 이외에도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수기(授記)의 내용들이 대단히 많다. 부처님의 10대 제자와 세속의 부인이었던 야수다라 비구니와 젖을 먹여 키워준 마하파사파제 비구니와 5백 명의 제자들과 2천 명의 제자들, 심지어 석가세존을 여러 차례 죽이려고까지 했던 천하에 무도한 악인 제바달다까지도 부처님이라는 보증을 하여 수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용녀라는 축생까지도 수기를 주었다. 그 외에도 부처님으로 보증한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그래서 <법화경>을 다른 이름으로 <수기경(授記經)>이라고도 부른다.

 

왜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보증하는 수기의 이야기가 많은가? 석가세존께서 모든 인류에게 바라는 한 가지 비원(悲願)이 있다. 그것은 바른 견해[正見]. 전 인류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모두 하나님의 종으로 보거나, 죄업이 많은 중생으로 보거나, 번뇌와 망상과 삼독으로 가려진 미완성의 부처님으로 보거나 미래의 부처님으로 보는 것은 삿된 소견이며, 전도된 소견이며 하열한 근기의 사람들을 위한 방편의 가르침이다.

 

지금 이 순간 부처가 아니면 우리는 언제 어디에 가서 부처가 되리. 실로 이렇게 글을 쓰고 이렇게 글을 읽으며 글의 내용을 긍정도 하고 부정도 하는 그 능력 그 사실을 두고 달리 무엇을 일러 부처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부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본래로 살아 있는 부처님이며, 살아 있는 하나님이라는 올바른 견해, 즉 정견(正見)을 갖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 세존이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인류에게 전하고 싶었던 단 한마디 말이 당신은 부처님이었다.

 

이 말씀은 마치 하루의 해가 대지를 비추다가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최후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장엄하게 비추는 것과 같이 평생의 수많은 설법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면서 지극히 고귀하고 높은 차원의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은 가장 수준이 높은 보살들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께서 가슴 깊이 간직해 두고 보호하고 아끼던[敎菩薩法 佛所護念] 경전이라고 하였다.

 

당신은 부처님 11 /3. 화엄경의 인불사상 1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없다

 

그렇다면 세존이 처음 출가하여 6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행을 끝내고 깨달음을 이룬 뒤 최초로 설하신 것으로 되어있는 저 <화엄경>에서는 무슨 말씀을 하였는가? 먼저 가장 널리 알려진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는 말씀을 살펴보겠다.

 

부처님은 자비심이 넓고 깊기 때문에 한 사람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을 다 제도하려면 하는 수 없이 다양한 방편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아신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별의별 가르침이 많지만 진실은 하나다. 그래서 부처니, 중생이니, 마음이니, 사람이니, 성품이니, 불성이니, 진여니, 법성이니 하는 말을 하지만 <화엄경>의 말씀과 같이 그것은 차별이 없다. 오직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의 말일 뿐이다.

 

다만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견해[正見]이며 진리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는 신라 때부터 의상(義湘) 스님과 원효(元曉) 스님을 통해서 일찍이 화엄경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화엄경 사상으로 불교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상이나 글이 결코 생소하지 않다.

 

참고로 <화엄경>의 글을 그대로 옮겨둔다.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여러 가지 색····식을 그린다.

일체 세간의 것들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법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와 같으며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

[心如工畵師 畵種種五陰 一切世間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然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당신은 부처님 12 /3. 화엄경의 인불사상 2 /신기하고 또 신기하여라

 

또한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에 여래가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시원하고 툭 터진 지혜의 눈으로 일체 중생들을 널리 살펴보시고 이와 같이 말하였다.

 

신기하고 또 신기하여라. 이 많고 많은 모든 중생이 어찌하여 여래의 지혜를 모두 다 갖추고 있건마는 어리석고 미혹하여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가? 내가 마땅히 성스러운 진리로써 그들을 가르쳐서 그들에게 죄업이 많은 못난 중생이라는 잘못된 생각[妄想]과 그것에 대한 집착을 영원히 버리게 하리라. 그래서 스스로 자신들에게 있는 여래의 넓고 큰 지혜가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들에게 가르쳐서 성스러운 진리를 사유하고 명상하게 해서 죄업이 많은 중생이라는 잘못된 생각[妄想]을 버리게 하고 그 생각을 버리고 나서는 여래의 한량없는 지혜를 증득하게 해서 그들이 다시 또 일체 중생들을 이익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도록 하리라.”라고 하였다.

 

여래는 중생에게서 무엇을 보고 신기하고 또 신기하다.”라고 하였을까? 즉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능력[見聞覺知]을 보고 그렇게 말하였다.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하고, 사랑하고 미워할 줄 아는 바로 그 사실, 그 능력을 보았던 것이다. 그와 같은 능력이 사람을 제외하고 달리 어디에 있겠는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것은 사람밖에 없는 능력이다. 이것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하나님이 아니고 무엇인가.

 

당신은 부처님 13 /3. 화엄경의 인불사상 3 /사람은 누구의 종이 아니다

 

역시 또 <화엄경 여래출현품>,

 

불자들이여, 여래의 지혜가 어느 곳이든지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왜냐하면 그 어떤 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지 않는 이가 없지만 다만 스스로 그렇지 못하다는 잘못된 생각과, 부처님과 중생은 다르다는 전도된 생각과, 또 그것이 집착이 되어 깨닫지 못할 뿐이다. 만약 그와 같은 잘못된 생각만 버린다면 일체 존재의 실상을 아는 지혜와 자신에게 본래부터 저절로 갖춰져 있는 지혜와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지혜가 앞에 나타나게 되리라.”라고 하였다.

 

<화엄경>은 마치 하루의 해가 처음 떠오를 때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비추듯이 석가세존이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나서 곧바로 그 깨달음의 진실을 아무런 방편도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설파하신 내용이기 때문에 진리의 최고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통한 바른 견해가 그대로 녹아있다.

 

<화엄경>은 물론 유형무형의 세상 온갖 존재에 대한 바른 견해를 설파한 것이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 사람이므로 사람에 대한 바른 견해를 소개한 것이다. <화엄경>에 나오는 사람에 대한 바른 견해란, 사람은 누구의 종도 아니요, 죄업으로 뒤덮인 몹쓸 중생도 아니며 모두가 여래의 지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완전무결한 부처님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존도 신기하고 또 신기하여라.”라고 하였던 것이다. 다만 사람의 수준에 따라 달리 말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방편으로 한 것이지 진실은 아니다.

 

당신은 부처님 14 /3. 화엄경의 인불사상 4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길

 

 

부처님은 본디 태자의 출신이다. 온갖 호사품을 다 지녀보았고, 부귀영화를 누린 분이다. 세상에 그 무엇이 신기하고 또 신기하겠는가? 깨달은 사람, 즉 부처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큰 희생과 투자를 하였는가?

 

머지않아 왕의 지위에 오를 태자의 자리를 헌 신짝 버리듯 미련 없이 버렸다. 그렇게 나라를 맡기고 싶어 했던 부왕의 간절한 기대마저 저버렸다. 사랑스런 아내와 어린 자식마저 버렸다. 어찌 그뿐인가? 금지옥엽 귀한 왕자의 몸으로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피나는 고행을 6년이나 거뜬히 하였다. 그런 끝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비로소 기대하던 부처가 되었건만 부처가 되어 깨달음의 눈으로 저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아무런 희생도 투자도 고생도 하지 않은 그들도 여래의 지혜와 부처의 능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고 또 신기한 일이려니와 한편 얼마나 허탈하였을까? 그러나 어쩌랴. 사실이 그런 것을. 그래서 깨달음을 이루고 최초로 설하셨다는 <화엄경>에서는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보는 올바른 견해 즉 정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너무나도 존귀하고 소중한 부처님이다. 살아 있는 부처님이며 살아 있는 신이며 살아 있는 하나님이다. 사람 외에 달리 무슨 부처님이 있으며, 사람 외에 달리 무슨 하나님과 신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한다. 사람을 하나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한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사람을 하나님으로 받들어 섬기면 그도 행복하고 나도 또한 행복해진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길은 오직 이 한 길뿐이다.

 

<화엄경>은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크게 숭상하던 경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성자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 모두 <화엄경>을 통달한 화엄의 대가들이다. 원효 스님은 경주 분황사에서 화엄의 깊은 뜻을 서라벌에 전하였으며, 의상 스님은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창건하여 화엄 사상을 더욱 널리 전파하였다. 부석사와 범어사와 해인사와 화엄사와 불국사 등이 모두 화엄사찰들이다. 두 스님이 모두 깨달음의 바른 견해로 인간의 진정한 가치인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깃발을 높이 휘날렸던 분들이다.

 

 

당신은 부처님 15 /3. 화엄경의 인불사상 5 /먼저 사람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

 

불교는 특히 정견(正見), 즉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와 사람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존중한다. 그런데 서양에서 들어온 삿되고 전도된 견해로 인하여 사람을 신()의 종으로 본다든지, 사람을 재산이나 돈보다 못한 것이라고 본다든지, 그래서 급기야는 사람을 돈으로 사고팔기도 하며, 남의 나라의 석유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켜 그 귀중한 생명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일을 자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서양의 물질문명이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그와 같은 잘못된 견해까지 함께 들어와서 오늘날 자신의 귀중한 생명을 아무렇게나 죽여 버리는 자살행위나, 재산이나 몇 푼의 돈을 빼앗기 위해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들의 목숨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해치는 행위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사람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진 지도자라면 어떤 일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고쳐야 할 것이 그와 같은 잘못된 국민의식, 사람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국가적으로 고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석가세존께서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처음 하신 말씀이나, 열반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나 한결같이 사람의 소중한 가치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석가세존의 간절하신 말씀은 사람은 누구의 종도 아니요, 죄업이 많은 못난 중생도 아니라, 본래로 완전무결한 부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당신은 부처님 15 /4. 달마 스님의 인불사상 /1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원만하다

 

불교사에서 달마(達磨, ?~528) 스님보다 더 유명한 분이 있을까? 그는 인도의 향지국왕의 셋째 왕자였다. 양나라 보통 8년 정미(서기 527)921일에 중국에 건너와서 중국 선불교의 초조(初祖)가 되어 불교를 완성의 단계로 이끌어 올린 분이다. 그가 광주에 오자 광주 자사 소앙(蕭昻)이 주인의 예를 갖추어서 영접하고 나서 표를 올려 무제에게 알렸다. 무제가 그 보고를 받고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달마 대사를 맞이하여 101일에 지금의 남경인 금릉에 도착하였다.

 

 

양무제가 물었다.

 

짐이 왕위에 오른 이후로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스님들을 양성한 일을 가히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달마 대사가 말하였다.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이러한 것은 다만 인간으로나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작은 과보이며 모두가 빠져나가 버리는[] 원인일 뿐입니다.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아서 비록 잠깐 있으나 실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참다운 공덕입니까?”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원만하여 그 자체가 스스로 공적하니 이와 같은 공덕은 세상의 일로는 구할 수 없습니다.”

 

양무제가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로서 제일가는 도리입니까?”

 

달마 대사가 말하였다.

 

넓고 텅 비어 성스러움이란 없습니다.”

 

짐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릅니다.”

 

양무제가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달마 대사가 갈대 잎 하나로 장강을 건너 위나라에 이르러 숭산 소림사에 머무시면서 얼굴은 벽을 향해 앉아서 종일토록 침묵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벽만 보고 있는 바라문이라고 하였다.

 

 

당신은 부처님 16 /4. 달마 스님의 인불사상 /2, 천하 사람들의 눈을 열다

 

금릉에서 달마 대사와 양무제와의 그 역사적인 만남은 불행인가? 다행인가? 아무튼 유명한 대화를 남겨 오늘날까지 선불교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여러 가지 불사를 하여 큰 복을 지었는데 그것이 어떤 공덕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한 마디가 천하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는 지침이 되었으며 올바른 불교공부의 기준이 되었다. 만약 이 한마디 말이 없었더라면 불교도들은 지금까지 자기와는 상관없는 밖을 향하여 부단히 찾고 있었을 것이다. 절을 지어 복을 닦으며 탑을 쌓아 공덕을 짓고 온갖 보시와 선행으로 공덕이 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것이 성불의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삿된 견해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공덕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 성불의 바른 길인가? 달마 대사는 양무제가 그동안 해 온 불사로는 한갓 천상이나 인간에 태어날 수 있는 과보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무한한 생명과 무한한 광명의 대 해탈과 진여열반의 삶과는 그 거리가 십만 팔천 리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원만하여 그 자체가 스스로 공적하니 이와 같은 공덕은 세상의 일로는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사람 사람이 본래로 갖추고 있는 그 본성의 공덕과 청정한 지혜는 세상의 일이나 인위적인 수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추고 있어서 누가 가져갈 수도 없으며 새롭게 다듬거나 장엄하거나 닦을 것이 아닌 그 사실을 아는 것뿐이다. 만약 수행을 통해서 새롭게 닦거나 장엄한다면 그것은 마치 본래 있는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는 것과 같다.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은 본래부터 이미 해탈이 되어 있고 부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한량없는 복덕과 한량없는 신통을 다 갖추고 있어서 조금도 더할 것이 없는 그대로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뜻을 설파한 것이다. 인간이 본래로 그렇게 위대한 존재거늘 하물며 양무제가 다시 물은 성스러운 진리로서 제일가는 도리가 따로 있을 까닭이 있겠는가.

 

역사적 만남의 두 사람의 대화는 자꾸 어긋나기만 한다. 그러나 그 어긋난 대화가 다행히도 먼 후대에까지 사람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하게 하였으며, 불교를 바로 가르치고 수행을 바로 하게 하는 거울이 되고 지침이 되어 바른 견해[正見]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부처님 17 /4. 달마 스님의 인불사상 /3, 오직 모를 뿐 

 

양무제와의 최후의 한마디 모른다[不識].”라는 그 말은 달마 대사의 모든 저서와 주옥같은 말씀 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모른다보다 더 훌륭한 말이 어디에 있겠는가. 후대의 어떤 선사도 오직 모를 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나서 천하의 명화인 달마 대사가 갈대 잎 하나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가는 일위도강도(一葦渡江圖)를 남기게 된다.

 

그 후 숭산 소림사에 와서 소림굴에 묵묵히 앉아 벽만을 쳐다보고 말없이 중생 제도의 세월을 기다린 것이다. 그것이 무려 9년의 세월이었다. 마치 강태공이 강가에 앉아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천하를 경영할 웅지를 품고 때를 기다리듯이.

조정에서 궁중의 직원들을 다 모아 놓고 정사는 돌아보지도 않고 스스로 가사를 입고 경전을 강설하던 불심천자(佛心天子) 양무제는 더 이상 불교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황벽 스님은 자신의 저서 <완능록>에서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이유를, “오직 한 마음의 이치를 전하여 일체 중생이 본래로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또한 중생이 부처가 되는 데는 어떤 수행도 필요치 않다는 사실과, 다만 지금 자신의 마음을 바로 알아 자신의 성품을 볼 것이며, 달리 다른 곳에서 부처를 구하거나 찾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정리하였다. 다시 내 식으로 간추리면 사람이 부처님’, ‘당신이 부처님이라는 인불사상(人佛思想)을 전파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은 부처님 18 /5. 혜능 스님의 인불사상 /1, 내 성품이 본래

 

석가세존이 깨달음을 성취하여 불교가 발생한 이후 27백여 년의 긴 세월이 흘러오면서 석가세존 못지않은 수많은 성인들이 출현하였다. 그들도 하나같이 사람이 부처님’ ‘당신은 부처님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스님은 오조 홍인 스님 밑에서 수행하다가 어느 날 홍인 스님 방에 들어가서 <금강경> 강설을 들었다. <금강경>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일체 모든 존재가 자신의 마음자리를 떠나 있지 않은 사실을 크게 깨닫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성품이 본래 저절로 청정하다는 사실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성품이 본래 불생불멸하다는 사실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성품에는 본래로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성품은 본래 아무런 동요도 없다는 사실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성품이 능히 모든 존재와 이치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내 어찌 알았으랴.

 

[何期自性本自淸淨 何期自性本不生滅 何期自性本自具足 何期自性本無動搖 何期自性能生萬法]”라고 탄복하였다.

이는 진정으로 사람이 부처님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내용이다. 그러자 홍인 스님은 그가 자신의 본 성품의 진실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곧 진정한 대장부며, 인천(人天)의 스승이며, 부처님이라고 명명하였다.

 

 

당신은 부처님 19 /5. 혜능 스님의 인불사상 /2, 그대는 진정한 대장부

 

육조 혜능 스님은 우리나라 불교에서 매우 높이 숭상하는 성인이다. 얼마나 숭상하였으면 그가 돌아가신 후에 그분의 머리를 모셔다가 탑을 세워서 예배하고 찬탄하고 공양을 올리겠는가? 하동의 쌍계사 육조정상탑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육조 스님은 사람의 실체를 성품이라고 표현하기를 즐겨한다. 어떤 이는 그냥 마음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는 진여라 하기도 하고, 불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모두가 개인의 취향일 뿐 뜻은 다르지 않고 똑같다. 나는 그중에서 사람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아무튼 혜능 스님은 참선을 그렇게 많이 한 사람이 아니다. 고행을 많이 하거나 여섯 가지 바라밀을 많이 닦은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한 수행 덕목이 부처가 되는 데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와 같은 조건을 갖춰야 비로소 부처가 된다고 알고 있다. 그런 가르침은 불교를 잘 몰라서거나 아니면 근기에 맞춘 방편의 말이었을 것이다.

 

혜능 스님은 자기 자신이 그와 같은 내용들을 본래로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몇 가지를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람의 본성에 갖추고 있는 것이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사람은 한량없는 능력과 지혜와 복덕과 신통묘용을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다 갖추고 있어서 완전무결한 존재다. 혜능 스님은 자신이 즉 사람이 부처님이 아닐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스승인 오조 홍인 스님은 그대는 진정한 대장부며, 인천의 스승이며, 부처님이라고 명명하지 않았던가.

 

사실은 이것이 어디 혜능 스님 혼자만의 특권이겠는가? 사람 사람이 본래로 다 갖추고 있는 사실, 개개인이 본래로 원만하게 성취되어 있어서 완전무결하다고 옛 성인들이 입이 쓰도록 말씀하지 않았던가? 모든 사람이 본래로 완전무결한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염불을 읊조리고 깊은 사유와 명상을 통하여 그 이치가 자신에게 인격화가 되고 살림살이가 되고 삶 그 자체가 되도록 하여 그 아름다운 부처의 향기를 온 세상에 널리 널리 퍼지게 하여야 할 것이다.

 

 

당신은 부처님 20 /6. 마조 스님의 인불사상 /1,무엇 때문에 밖을 향해서 구하는가

 

마조(馬祖, 709788) 스님은 불교 역사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제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분이다.

 

대주(大珠) 화상이라는 스님이 마조 스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니 마조 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어디에서 오는가?”

 

, 월주 대운사라는 곳에서 왔습니다.”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여기에 와서 불법을 구하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의 보물창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집을 버리고 쓸데없이 와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이곳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구하자는 것인가?”

 

대주 스님이 드디어 예배를 올리고 물었다.

 

무엇이 저의 집의 보물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질문을 하는 그것이 곧 그대의 보물창고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서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그래서 쓰고 싶으면 마음대로 쓸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밖을 향해서 구하는가?”

 

대주 화상이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본래의 마음을 스스로 알았다.

 

이 이야기는 선가(禪家)에서 대단히 많이 애송된다. 불교가 이 얼마나 간단명료한가? 이 얼마나 쉬운가? 그렇다. 불법은 이렇게 쉽고 간단명료하다. 복잡하고 어려우면 그것은 십중팔구 가짜 불교다.

 

지금 나에게 질문하는 그것이 그대가 찾는 불법이며, 그대의 보물창고라네. 그것밖에 달리 없네.”

 

그렇다. 궁금하면 물을 줄 아는 그것이 곧 진짜 불법이다. 누가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상대방이 말하면 들을 줄 알고,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알고, 웃을 줄도 알고, 울 줄도 아는 그것이 곧 불법이며 보물창고다. 참으로 신기하고 미묘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그 곳에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세상에서 가장 고급 용어를 빌어 부처님또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당신은 부처님 21 /6. 마조 스님의 인불사상 /2, 삿된 견해의 폐해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에게 불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황벽 스님은 불문곡직하고 사정없이 60번이나 몽둥이를 후려갈겼다. 그래서 임제 스님은 죽기 직전까지 불법을 얻어맞았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엉뚱하게도 대우 스님에게 가서 주먹질을 세 번 하여 불법을 토해내었다.

 

참 멋있고 근사한 불법놀이의 광경이다. 불교 역사의 명장면 제1호다. 그리고 거기에서 황벽 스님의 불법이 참으로 간단하고 쉽구나.”라는 말이 등장한다. 진정한 불교는 이처럼 어디에 가도 쉽고 간단명료하다.

 

왜냐하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부처님이며, 자기 자신이 불교며, 자기 자신이 도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간단히 표현하면 당신은 부처님이다. 이와 같은 견해가 바른 견해다. 이와 다른 견해는 사견(邪見)이다.

 

멀쩡한 사람을 죄업이 지중한 중생이라고 보거나, 어느 누구의 종이라고 보아 지극히 고귀한 부처님이며 하나님인 사람을 돈으로 사고팔던 사조가 동양에 유입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래서 재산을 위하여, 또는 돈을 위하여 자신을 죽이고 남을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1회로 끝나면 다행이겠으나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어서 깊이 염려된다. 잘못된 견해의 폐해는 저 핵폭탄보다도 무섭다. 핵폭탄은 1회로 끝나지만 삿된 견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오염도가 더욱 확산되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부처님 22 /6. 마조 스님의 인불사상 /3, 하루 삶의 가치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든 사람의 하루의 삶의 가치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우리들은 무감각하게 아무런 고마움도 모르고 이렇게 마음 놓고 잘 살고 있지만, 오늘 이 순간을 살기위해서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렸지만 끝내 오늘을 살지 못하고 어제, 그리고 그저께, 그끄저께에 돌아가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을 살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이고, 또한 인공호흡기를 사용해 가며 가족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무진 애를 썼으나 모두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떤 대가라도 치를 테니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그와 같은 광경을 생각한다면 오늘 이 순간의 삶의 가치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지극히 소중한 순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리라.

 

어떤 사형수가 쓴 글이 있다. 사형집행 날짜를 며칠 앞둔 그는 문득 감방 안에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를 보고 부러워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이 몸이 애석하구나. 차라리 저 벌레가 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며 살고 싶구나.”라고 하였다.

 

그는 또 이런 글도 남겼다.

 

애정에 굶주린 사형수여라. 과자를 땅에 놓고 개미를 기다리네.”

 

세상의 보탬이 되고 죽고 싶은 사형수의 이 눈을 얻으려는 사람도 없는가?”라고 하였다.

 

사형수의 눈이니 어떤 맹인인들 가져가려 하겠는가? 벌레가 되어서라도 살고 싶다는 말이 너무나 절절하다.

 

또 교통사고를 당하여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아들을 보고 팔과 다리를 다 자르더라도 내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내라.”고 울부짖으며 애원하고 또 애원하는 광경은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을 무슨 방법으로 살릴 수 있으랴? 수백억을 들인다고 살릴 수 있겠는가? 사람의 하루의 삶의 가치는 수백억보다도 더 값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신을 죽이고 남을 죽이는가? 모두가 삿된 견해의 소산 때문이다. 사람의 지고한 가치, 즉 부처님이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전도된 견해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운동을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힘껏 펼쳐야 한다.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염불을 통해서, 깊은 사유와 명상을 통해서 힘껏 펼쳐야 한다.

 

 

당신은 부처님 23 /7. 임제 스님의 인불사상 /1, 성인은 이름일 뿐이다

 

임제(臨濟, ?~867) 스님은 선종사에 있어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달마 스님도 육조 스님도 우리나라에서는 임제 스님 다음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스님이 입적하면 빨리 돌아오셔서 임제문중에서 다시 큰 일을 밝히시고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축원을 올린다. 그리고 큰스님들의 비석마다 임제 스님의 몇 대 법손이라고 쓰여 있다. 그와 같이 임제 스님의 안목은 높고 투철하여 아무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임제록>에 이런 말이 있다.

그대들이 성인(聖人)을 좋아하지만 성인이란 이름일 뿐이다. 어떤 수행하는 이들은 모두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틀린 일이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문수를 알고 싶은가? 다만 그대들의 눈앞에서 작용하는 그것,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딜 가든지 의심할 것 없는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문수다.”라고 하였다.

 

다시 부연설명을 붙이자면, 불교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성인을 좋아한다. 천불(千佛) 만불(萬佛)을 찾고 천 보살 만 보살을 부른다. 열광적으로 그 이름을 부르고 천 배 만 배 절을 하는 것을 보면 불보살에게 절하는 것에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있다. 아름답게도 보이지만 측은하게도 보인다. 성인이라고 해서 그토록 좋아하면 반대로 범부는 아주 싫어할 것이다. 선을 좋아하면 악은 싫어할 것이다. 증애심과 취사심이 그렇게 끓고 있으면 도와는 멀다. 불교와도 멀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가려내고 선택하지만 말라. 다만 증애심만 없애면 환하게 밝으리라.”라고 한 <신심명>도 있다.

 

성인이란 단지 성인이라는 이름뿐이다. 천 보살 만 보살, 천불 만불이 모두 이름뿐이다. 단지 사람이 있을 뿐이다. 부처님이 있다면 사람이 부처님이다. 오대산을 찾아간 무착 스님뿐만 아니라 수많은 불자들이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간다. 몇 달 몇 년을 걸쳐 일보일배(一步一拜)의 고행을 하면서 찾아간다.

 

하지만 벌써 틀린 짓이다.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다.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말씀이다. 가슴이 천 조각 만 조각 나는 말씀이다. 기존의 일반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저 넓은 바다의 끝없는 파도처럼 출렁대는 그 마음들을 어쩌란 말인가. 진실은 물과 같이 까딱도 하지 않는데.

 

그대들은 정말 문수보살을 알고 싶은가? 그대들의 목전에서 지금 활동하고 있는 그것, 보고 듣고 하는 그것이다. 시간적으로 시종일관 다르지 않고 한결 같은 그것이다. 공간적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분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래서 너무도 구체적인 그것이다. 추상적이거나 애매모호한 점이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도 확실한 그 사람이 문수보살이요, 부처님이다. 그대가 참으로 살아 있는 문수보살이다. 그대가 참으로 성인이다. 그래서 당신은 부처님이다.

 

 

당신은 부처님 24 /7. 임제 스님의 인불사상 /2, 인간 해방의 대 선언서

 

이것이 진짜 불교다. 임제 스님만이 가르칠 수 있는 불교다. 임제 스님은 수천 년의 인류사에 떠오른 천 개의 태양이다. 수억만 가지의 방편을 다 걷어치우고 진실만 드러내셨다. 하늘만큼 땅만큼 많은 불교의 거품을 다 걷어낸 가르침이다. 온갖 이름과 모양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속박과 구속과 저주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시원스런 해방의 묘책을 확실하게 제시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이것이 진짜 불교다. 임제록은 인간 해방의 대 선언서(大宣言書). 그래서 일본의 어느 선사는 일본 열도가 다 불에 타는 일이 있어도 이 <임제록> 한 권만 남아 있으면 된다고까지 하였던가. 실로 임제 앞에 임제 없고 임제 뒤에 임제 없다. 천상천하에 오직 하나뿐인 임제다

당신은 부처님 25 /7. 임제 스님의 인불사상 /3, 어느 청산인들 도량이 아니랴

 

조주(趙州, 778-897) 스님이 행각할 때 어떤 작은 암자에서 며칠 묵었다. 떠나면서 원주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원주가 묻기를,

 

어디로 갑니까?”

 

오대산으로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게송이 하나 있으니 들어보시오.”

 

어느 청산인들 도량이 아니랴.

 

그런데 하필 오대산에 가서 참례하려 하는가.

 

구름 속에 비록 문수보살이 나타나더라도

 

바른 안목으로 보면 좋은 것이 아니오.”라고 하였다.

당신은 부처님 26 /7. 임제 스님의 인불사상 /4, 권위나 관념에서 벗어나라

 

한국불교는 모두 임제 스님의 후손들이다. 임제 스님을 역대 조사들 중에서 가장 높이 숭상한다. 왜냐하면 임제 스님의 불교는 일반적인 불교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일체의 방편과 가식과 거품을 다 걷어내고 불교의 진실만 오롯이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법을 설함에 있어 결코 수준과 근기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당신이 깨달으신 진리를 거침없이 표현한다. 누가 무어라고 하던 절대 눈치 보면서 설법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설법은 한 토막만 들어도 속이 시원하고 백년 묵은 체증이 모두 다 내려간다.

 

<임제록>에 이와 같은 설법이 있다.

불교를 공부하며 배우는 벗들이여! 법다운 견해와 참다운 지혜를 터득하려면 남에게 끌려 다니면서 미혹[속임]을 당하지 말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곧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그와 같은 모든 것으로부터 다 벗어나서 다른 경계에 구애되지 않고 철저하게 벗어나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너무나 충격적인 설법이라 좀 부연설명을 해야 한다. 여법한 견해나 진정한 견해나 정견(正見)이나 훌륭한 지혜나 모두가 같은 뜻인데, 이 지혜를 유지하려면 다른 사람에게나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끌려 다니면서 미혹을 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임제 스님께서 죽이라는 말씀은 온갖 경계가 앞에 오거든 무조건 다 부정하고 끌려가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다. 나를 욕하고 나를 때리고 나를 모함하고 손해를 입히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을 흔드는 부처님이나 보살들이나 부모나 친지들이나 온갖 내 마음에 잘 맞는 대상들에게도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나로서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달리 부처님이나 조사나 보살들에게 끌려가고 흔들릴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자신이 저 부처님보다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부처님이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부모나 처자 권속이나 모두가 다 나 아닌 다른 경계이며 내가 미혹을 당할 상대들이다. 다시 말해서 역()경계나 순()경계나 일체를 부정하고 벗어나라는 것이다. 거기에 끌려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해탈이며 나는 나로서 당당하게 나의 삶, 나의 인생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내 인생이 툭 터져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부처님이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그 어떤 권위나 관념들로부터도 벗어나라. 인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깡그리 부정해 버리고 끌려가지 말라는 뜻에서 죽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부처님이나 보살이나 조사에 대한 모든 잘못된 관념들을 때려 부수라는 뜻이다. 이렇게 파격적이고 강도 높은 언어를 써도 강강(强剛)한 사람들은 억세고 미련하여 아무런 감동이 없다. 깊은 사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한 부처님이며 그러므로 당신도 똑같은 부처님이라는 염불을 몰라서이다.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염불을 하자. 그리고 깊이 사유하고 명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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