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산책]/한국화,동양화

김흥수 화백 - 하모니즘과 조형주의

경호... 2012. 4. 27. 23:25

 

 

 

 

 

 

 

 

 

 

 

 

 

 

 

 

 

 

김흥수 화백의 예술세계는 우주와 같다. 때문에 그의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으로 논하기는 쉽지않다.

그의 예술은 집합체와 들어갈수록 그 깊이는 더해 간다. 보통 그림은 회화적 개념으로 아름다움 그 자체다.

물론 김흥수 화백의 그림도 아름다움의 미적 표현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미적 표현에는

전달하고자 하는 여러가지 방법적 메시지가 있기 마련이다.
김흥수 화백의 예술에 나타나는 조형주의 하모니즘적이고 철학적 개념으로는 음양의 조화이다.

음양의 조화란 대우주의 현상이자 동양사상에서는 철학이다.

김흥수 화백의 예술관에 담긴 음양조화의 철학적 하모니즘은 한국에 정서로

깊은 뿌리를 내린 정신적 지주와 같은 것이다.

1.하모니즘의 개념


하모니즘의 개념은 음양의 철학이며 이는 동양사상을 모태로 한다.
동양사상의 원류는 음양을 하나의 몸체로 갖는 태극에 있다.태극은 우주의 본체로서,

이 태극이 동정(動靜)하여 음양이 생기고 또는 천지만물이 생성한다는 것이다.

음양은 문자 그대로 어둠과, 밝음 즉 명암의 대립관렴을 기조로 한 우주만사의 현상이

그로부터 생성하는 만물에 대한 이원적 개념이다. 다시말해서 우주의 현상 가운데

가장 명확한 어둠과 밝음의 대립적인 현상으로 제시할 때 하늘과, 땅 남과 여, 추위와 더위

모든 우주 및 자연현상이 이에 해당한다. 즉 우주 및 자연현상은 어김없이

대립적인 관계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 및 자연현상은

이들 음양의 개념에 합당한 2원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음양사상에서는 이처럼 서로 다른 성질 또는 현상을 별개로 보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즉 동체로 본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음양의 대립 및 순환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 조화를 이룰 때 극대의 효과를 낳는 다는 것이다.

추상과 구상의 완벽한 두 개의 다른 화면을 통해 상호 상승작용을 하게 되지만

두 화면이 동질적인 때는 하모니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때문에 구상과 추상의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관계야 말로 조화의 극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추상과 구상이 하나의 하나의 화면 속에서 결코 서로의 존재감을 부정하지 않는 가운데

이제까지 맛볼수 없던 조화의 묘미를 발휘 하고 있다.

이는 서로의 존재를 오히려 돕는 역할을 함으로써 미적 긴장은 물론

새로운 감각의 조화미를 연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위와 같은 김흥수 화백의 하모니즘 조현주의는 어떻게 탄생되어진 것이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 언급하면 하모니즘 조형주의가 탄생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하모니즘의 창시


하모니즘에 대한 착상을 얻은 것은 6.25사변을 격으면서 라고 한다. 형제가 남북으로 나눠져

서로 총칼을 앞세워 싸워야 하는 충겪적인 체험을 리얼리즘으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때마침 타임지를 통해 구라파에서 추상회화가 유행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게 된다.

이때부터 김흥수 화백은 추상화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고 미술사조의 기법과 형식의 변화를 살펴보게 된다.

사실주의 쿠르베는 객관을 객관으로 후기 안상파 세잔느는 객관을 주관적으로,

추상의 사조 칸딘스키는 주관을 주관으로, 초현실주의자 달리는 주관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하모니즘의 원초적 구상의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한다.한화면 주관과 객관이 함께 표현될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후 그는 도불하여 '61년까지 파리화단에서 활동했다.

귀국후 그는 다시 '66년 미국으로 건너가 10여년간 체류하는 동안 대학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된다.

 어느날 우연히 학생들이 전람회를 위해 진열해 놓은 그림 중에 우연하게도 하나는 완전한 추상이고,

또 하나는 완전한 구상이었다. 그런데 그 두 그림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그동안 갈망해 오던 한 화면에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그 방법에 대해 착상을 하게 된다.

그날밤 김흥수 화백의 조형주의 하모니즘이 탄생하게 된다.

사실에서 구상으로 구상에서 반추상으로 형식의 변화를 꾀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 전쟁에 대한

화가로서의 대응자세,즉 같은 민족간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을 때

회화적인 가치를 과연 만족 시킬 수 있을 것인가하는 점에 의문을 가짐으로써 비롯되었다.

그는 사실주의적인 표현보다는 묵시적이고 상징적인 표현 방법으로만

이 비극의 진실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결국 음양조형주의는 시각적인 통찰에 의해

 그 실체를 나타내게 된것이다. 만일 그가 한국인 또는 동양인이 아니었더라면 음양의

조화에 그 원리를 둔 조형주의의 출현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3.김흥수 화백의 예술관

김흥수 화백은 구상과 추상이 병존하는 화면구조의 종래 회화적인 개념을 뿌리째 흔드는

혁명적인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구상은 구상으로 추상은 추상으로서의 본연의 길을 벗어날 수 없었던,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는 구상과 추상의 결합이야 말로

미적 긴장을 증폭시킬 수 있는 새로운 회화개념임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까지

구상과 추상을 대립 개념으로 보았던 시각의 고정관념이 있음을 강변한 것이다.

또 그의 그림에서 음양의 원리는 단순히 표현적인 현상의에만 적용되고 있지는 않다.

기쁨과 슬품 사랑과 미움등 안간 감정 및 정서도 여기에 포함된다.다시 말해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동적 감정이 진실하게 내제하고 있는 것이다.때문에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무엇보다 시각적으로 열과케하는 화려한 색상, 추상과 구상의 대립 및 조화에서 야기되는

긴장, 패턴화를 거부하는 다양한 표현구조 그리고 다양한 이미지의 전개 및 깊이감 밀도감을

자아내는 표면질 등 한마디로 회화적인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또 구상과 추상이 완벽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조화미를 보여주고 있다. 조화미란

 서로 다른 두개의 이미지가 서로의 존재를 통해 회화적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을대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어느 것이나 개별적인 형식의 완결을 통해 독립적인

표현가치를 확득코자 하는 열정과 의지로 넘친다.
또 그의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추상부분의 표현은 대부분 규칙성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정한 간격의 색면 연결이라든가,병마개의 규칙적인 배열, 오브제의 시메트리, 단순한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반복 구성 등에서 표현적인 규칙성이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또 그의 작품에서 일체의 조형적인 문제를 주도하는 것은 당연히 구상 부분이다.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는 구상부분에 사실적인 이미지로 결정된다. 구성부분에 사실적인 이미지는

의미 내용을 이끌어 가는 요체이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누드는 형태적인

아름다움 또는 에로티시즘을 겨냥하느 것이 아니다.

생식의 모체로서 영원한 생산, 즉 창조의 모태로서의 상징적 의미체계를 갖는다.

여기서 누드는 추상과의 대립관계로 보면 양에 속하지만 순수한 여체로서의 시각에서 보면 음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누드는 음과 양을 동시에 포용한다.

하지만 누드는 전체적으로 포름의 완성에 가장 적합한 조형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추상에 대립하는 여러가지 소재 중에서 누드는 그 자체로서

이미 조형적인 요구에 완벽하게 응답하는 소재인 것이다.

또 누드를 소재로한 작품을 제외하고 나면 모두 한국적인 불상, 전통춤,탈, 한국인 등

한국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소재로 강한 민족주의임을 알 수 있다. 편견없는

순수한 예술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의 하모니즘은 구상과 추상의 공존이라는 새로운 표현형식의

 제기만으로도 이미 독자적인 형식미학에 도달하고 있다.


4.김흥수 화백의 예술인생 70여 년의 행적

김흥수 화백은 1919년 함흥에서 태어나 동경 미술학교에서 유화를 전공했다.

 함흥고보 시절인 17세에 선전에 유화 '방의 정물'로 특선을 수상했다. 27세에

서울 동화화랑(신세계백화점)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28세에 제1회 국전에 '壺'를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했으며, 625사변중 종군 화가단에 참가 52년 종군화가전에 '출동'을 출품하여

국방차관상 수상, 제2회 국전에 '군동'으로 연속 특선을 차지했다.

54년 서울미대에 출강하며 미도파 화랑에서 도불고별전을 갖고

한국인화가로서는 맨 처음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56년에서 61년까지 파리 화단에서

 괄목할만한 작품활동을 전개. '길동무', '우정', '쌍', '군상', '고민'등을 프랑스 최고의 그룹전인

사론·도똔느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한국 화가로서는 최초로 사론·도똔느 정회원이 되었다.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라라 뱅시화랑과 라벨 가브리엘 화랑 초대로 두 번의 개인전을 가졌는데

전시 중 40점이 팔리고 나머지 10점도 전시 후 매진되는 이례적 기록을 세워

파리 유수한 화상들의 표적이 되었다. 61년에 귀국한 그는 국전 심사위원, 초대작가를 역임했고,

그해 제1회 5월 문화예술상 미술부문 본상을 수상하여 명예도 누렸다.

44세인 63년부터 67년까지 그는 국전 심사위원과 초대작가를 역임하다 67년

 펜실베니아 무어 미술대 초빙교수로 도미하여 80년까지 강의했다.

71년 '이 해의 수작 초대전'에서 1등상을 수상했으며,

필라델피아 미술협회 화랑에서 초대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73년 Jenkintoun 아트훼스티벌에 대자 '음과 양'을 출품하여 1등상을 수상했다.

76년엔 국내 한국 미술대상전(한국일보)에 '불사조'를 출품하여 대상을 수상했다.

77년과 79년 국립 현대미술관 초대전, 81년 현대화랑 개관기념 초대전,

프랑스문화원 초대전, 82년 파리 '나부좌상' 외 4점을 출품하여 사론·도똔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83년 한국양화 70년전(호암갤러리), 김흥수 유화전(현대화랑),

서울미술대전(서울시 주최), 제1회 아세아 국제전(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적십자 창립80주년 기념벽화 '낙원의 봄' 800호의 완성과

86년 미술대전 서양화 심사위원장, 동아미술대전과 무등 미술대전에 심사위원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문화훈장 옥관장을 수여 받았다.

86년부터 91년까지 30여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90년 프랑스 최정상급 뮤지움인

룩셈부르크 화랑에서 '김흥수조형주의 미술전'을 초대받았으며

국내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을 받았으며 한국화가 최초로 세계적 미술경매회사인

크리스티에 그의 작품6점에 출품되어 매진되었다.

93년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과 러시아 에르미타쥬 박물관의 김흥수 작품 초대전을 가졌으며,

 1994년 김흥수 조형주의 하모니즘 작품 순회 초대전이

서울 예술의 전당 및 대전 한림미술관, 대구 문화예술회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