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산책]/한국화,동양화

동양화가 말을 걸다 / 조정육 미술사가

경호... 2012. 4. 25. 01:39

우리가 찾는 모든 문제의 해답은 전통에 있다

 

혜허 수월관음도

 

 

▲ 혜허 ‘수월관음도’ 비단에 색. 142×61.5㎝. 일본 센소지(淺草寺) 소장

 

 

한국미술사를 전공한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작품 1순위는 혜허가 그린 ‘수월관음도’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작품만 실제로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미술사를 공부했었다.

어느 누구도 실물을 본 적이 없이 그저 흐릿한 도판으로만 전해지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2010년 G20 정상회의 때 이 작품이 공개됐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70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온 명화 앞에 서는 순간, 내가 그동안 복을 많이 쌓았다고 생각했다. 일본·미국·유럽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고려 불화(佛畵) 대표작과 중국·일본의 작품 108점 중에서 혜허의 ‘수월관음도’는 단연 최고였다.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색이 조금 빛을 잃었지만 원판이 워낙 훌륭하다 보니 그 정도 흠이야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나머지 107점을 본 감동을 다 합해도 이 한 작품에서 받은 감동에 비하면 가벼울 정도였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 작품에 열광하는 걸까.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려를 대표하는 그림
   
물방울 같은 광배(光背·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 장식) 속에 관음보살이 서 있다. 몸에 화려한 천의(天衣)를 걸친 관음보살은 오른쪽을 향해 살짝 몸을 틀었다. 오른손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왼손에는 정병(淨甁·부처님께 올리는 맑은 물을 담는 병)을 들고, 화면 왼쪽 아래에서 합장한 채 서 있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내려다보고 있다. 정치(精緻)한 사라(紗羅·비단) 속에 감추어진 몸매는 더 이상 붓질이 필요없을 만큼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다. 대부분의 고려 불화가 작가 미상인 데 반해 이 작품은 혜허(慧虛)라는 승려 화가의 이름이 명문으로 기재되어 있다. 고려 불화의 양식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기준작이다.

‘수월관음도’라는 정식 명칭 대신 ‘물방울관음’으로 부르기도 한다. 광배는 빛을 형상화한 것이므로 불꽃 모양으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 데 반해 특이하게 큰 물방울처럼 생겨 붙여진 별칭이다. 소장처는 일본의 센소지(淺草寺)인데 작년 고려불화 전시회 때 처음 공개된 작품으로 유명하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그린 불화를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라 부른다. 보살(菩薩)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上求菩提 下化衆生)’ 존재로 부처와 중생을 연결하는 중간자적 존재이다. 수월관음도가 그려지는 근거는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음보살은 ‘보타락산(補陀落山)’이라는 바위산에 머물고 있는데 53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는 선재동자를 맞아 법을 설한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각 분야의 멘토들을 찾아가 어떻게 살아야 훌륭하게 살 수 있는지를 묻는 젊은 후배에게 삶의 노하우를 전수해 준다는 의미다. 관세음보살은 53명의 멘토 중 한 분이다.
   
수월관음도의 도상은 반가부좌한 관음보살이 오른쪽으로(혹은 왼쪽으로) 살짝 몸을 틀어 바위 위에 앉아 있고, 합장한 선재동자가 화면 오른쪽(혹은 왼쪽) 아래에 서서 관음보살을 올려다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위 위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인다. 뒷배경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다. 현존하는 고려 불화는 대략 160여점 정도다. 그중에서 수월관음도는 약 30여점이 알려져 있다. 1310년에 제작된 가가미진자(鏡神社) 소장 ‘수월관음도’를 비롯하여 1323년 서구방(徐九方)이 그린 ‘수월관음도’(泉屋博古館 소장), 다이토쿠지(大德寺) 소장 2점의 ‘수월관음도’ 등 대부분의 고려시대 수월관음도가 모두 이런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센소지에 소장된 이 ‘수월관음도’는 좌상이 아니라 입상이다. 그렇다면 혜허는 어디서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영감을 얻었을까?
   
   
물방울관음은 어떻게 명화가 되었을까

 


    
▲ 작자 미상 ‘아미타삼존도’ 14세기 중반. 비단에 색. 109.5×55.7㎝. 마쓰오지(松尾寺) 소장

 

 

그 해답은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에서 찾을 수 있다. ‘아미타삼존도’는 서방 극락정토의 주불(主佛)인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세지보살(勢至菩薩)을 협시보살(脇侍菩薩)로 거느린 그림 형식이다. 협시보살은 보처보살(補處菩薩)이라고도 부른다. 중앙의 본존불 곁에 ‘보디가드’처럼 서서 중생구제를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염불에서도 알 수 있듯 관음보살은 단연 많은 중생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관음보살의 인기를 반영하듯 ‘아미타삼존도’의 왼쪽에도 관음보살이 서 있다.

그런데 관음보살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혜허가 그린 ‘수월관음도’의 도상과 똑같다. 머리 위의 보관(寶冠)에는 화불(化佛)이 그려져 있고, 천의 위에는 부드러운 사라를 걸치고 있다. 오른손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고,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이 모습은 ‘아미타삼존도’뿐만 아니라 8명의 보살이 함께 등장하는 ‘아미타팔대보살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수월관음도’가 사실은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라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월관음도’를 명화라 부른다. 아무도 인용작이라고 폄하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혜허가 ‘수월관음도’를 그리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관음보살을 독존도(獨尊圖)로 그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미타불을 보좌하는 협시보살로만 바라봤을 뿐이다.

그런데 혜허가 관음보살의 진가를 알아봤다. 만년 2인자로만 있던 조연을 주연으로 캐스팅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순히 주연으로 캐스팅한 것에 머물지 않고 톱스타에 어울리는 의전을 갖춰 주었다. 바로 광배다. 혜허는, 광배는 둥근 원형이어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물방울 모양으로 전환했다.

관음보살이 손에 들고 있는 버드나무 잎사귀를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촛불을 보고 영감을 얻었을까. 머리에 빛나는 두광(頭光) 대신 몸을 감싸는 타원형의 신광(身光) 때문에 ‘수월관음도’는 불멸의 작품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뛰어난 심미안을 가진 혜허의 손에 의해 안정된 이등변삼각형의 광배에 둘러싸인 관음보살이 고려를 넘어 세계미술사에 빛나는 작품이 된 것이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가 찾는 문제의 해답이 선배들의 작품 속에 전부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것을 전통이라 부른다. 고리타분해서 그다지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선배들의 작품이 사실은 모든 영감의 원천이다. 다만 그것을 보아내는 눈이 없을 뿐이다. 새롭게 자기식으로 해석해 내려는 고민이 부족할 뿐이다. ‘수월관음도’는 우리가 전통에서 무엇을 배우고 자기화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훌륭한 모범답안이다.

 

 

 

 

 

너만 화가냐 나도 화가다

 

맹호도와 까치호랑이

 

▲ 작자 미상 ‘맹호도’ 조선 후기, 종이에 연한 색, 96×55.1㎝, 국립중앙박물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은 늘 가슴속에 인간 세상에 내려가 살고 싶다는 ‘로망’을 품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아버지는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며 아들의 앞길을 축복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좌우명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환웅은 아버지의 전격적인 지원을 받고 배낭을 꾸렸다. 환웅의 뒤를 따라 3000명의 ‘드림팀’이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짐을 풀었다.

이두박근 삼두박근이 우람한 3000명의 신들은 ‘굴삭기’로 땅을 파고 ‘엔진톱’으로 소나무를 잘라 궁벽한 태백산 오지에 ‘신도시(神都市)’를 뚝딱 완성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환웅이 숲속을 얼쩡거리던 곰과 호랑이를 은밀히 불렀다. 내가 이 성스러운 도시에 나를 꼭 빼닮은 옥동자의 후손을 퍼뜨릴 ‘프로젝트’를 계획 중인데 의향 있으면 한번 응모해 봐. 그렇게 내려진 ‘미션’이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로 100일을 견디는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그 다음은 우리가 다 아는 얘기다. 최종 승자는 곰이었고, 호랑이는 다시 산중으로 돌아갔다. 호랑이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대신 오천 년 동안 이 땅을 지키며 산 중의 제왕을 넘어 신령스러운 산신령이 되었다. 호랑이의 씨가 말라버린 지금까지도 호랑이는 여전히 한국의 상징이다. 그림 속에서 호랑이의 포효를 들어보자.
   
   
나는 호랑이다
   
“호랑이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박 서방이 소리친다. 질주하며 내지른다. 지게를 내던진다.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나 달린다. 공깃돌을 집어던진다. 딱지가 흩어진다. 콩대가 넘어진다. 짚신이 벗겨진다. 감나무집 점복이가 넘어져 운다. 앞서 달리던 점순이가 되돌아온다. 낚아채듯 동생을 업고 내쳐 뛴다.
   
부딪치고 엎어지면서 아이들이 빠져나가자 왁자지껄하던 골목길이 삽시간에 정적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모두 방문을 잠근 채 숨소리를 낮추고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인다. 오래지 않아 멀리서 크르릉, 하는 짐승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제발 아무것도 피해가 없어야 할 텐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돼지막의 새끼돼지도 걱정이고, 마당가에 풀어 놓은 오골계와 병아리도 걱정이다. 그렇다고 문 밖에 나갈 수도 없다. 사납기로 소문난 호랑이한테 걸리는 날이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그저 호랑이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며 쥐 죽은 듯 숨어 있어야 한다.
   
김홍도 작으로 추정되지만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맹호도’에는 호랑이를 향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심이 담겨 있다. 산중의 제왕을 바라보는 경외심이 뒤섞인 두려움이다. 시퍼런 불길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형형한 눈빛. 언제라도 먹잇감을 향해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앞다리.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긴 허리는 유난히 길고 날렵한 꼬리와 함께 그 앞에 선 사람의 간을 오그라들게 할 만큼 위협적이다. ‘임금 왕(王)’자가 겹겹이 이어진 등줄기는 이 호랑이가 뼈대 있는 가문 출신임을 말해준다.
   
뼈대 있는 가문의 영물(靈物)을 그리기 위해 뼈대 있는 집안의 화가가 붓을 들었다. 화가는 바늘 끝처럼 가는 붓을 들더니 영물의 몸속에 흐르는 기(氣)를 통하게 했다. 호랑이의 맹기(猛氣)가 뿜어져 나오도록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붓질을 더했다. 머릿속에는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의 도상이 들어 있었지만 소나무는 삭제했다. 사람들이 오로지 호랑이한테만 집중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얼굴이 드러나고 몸통이 완성되고 다리와 꼬리가 모습을 나타낼 때마다 화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먹잇감을 향해 불시에 습격하는 호랑이처럼 아무것도 없던 종이 위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튀어나올 준비를 마쳤다. 화가의 붓을 통해 신화(神話)시대부터 조선의 산천을 누비고 다니던 호랑이의 위용이 성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사조(傳神寫照)’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해주는’ 전신사조는 초상화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그릴 때는 어디서나 필요한 덕목이다. 붓질을 마친 화가가 그림 뒤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화가의 귓전에 포효하는 호랑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호랑이다!”
   
   
호랑이 같지 않은 호랑이
 

▲ 작자 미상 ‘까치호랑이’ 조선 후기, 종이에 연한 색, 93×60.5㎝, 삼성리움미술관

 

내가 처음부터 이런 몰골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사는 것이 여의치 않다 보니 호랑이로서 품위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을 뿐이다. 난들 왜 멋있는 호랑이가 되고 싶지 않았겠는가. 산천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뭇 생명들을 제압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호랑이가 되고 싶었다.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이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가. 폼 잡는 것이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물려받은 것이라곤 허울 좋은 통뼈와 글자도 흐릿한 족보책이다. 좁은 골목길을 걸을 때 거치적거리는 그 따위 유산은 생존경쟁이 치열한 생활전선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몰락한 집안의 후손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처자식 거느리며 살아가다 보니 고양이처럼 쪼그라들고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다.
   
‘까치호랑이’ 속의 호랑이가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의 스토리를 들려줄 때 현장에 있던 동물들은 모두 눈가를 찍어 눌렀다. 젊을 때는 견딜만 했다,고 과거를 회상할 때 늙은 호랑이의 눈빛 위로 아련한 자부심이 스쳐 지나갔다. 밤새 먹잇감을 찾아 어둠 속을 헤집고 다녀도 한숨 자고 나면 거뜬했다,고 말할 때는 다시 호랑이의 살생본능이 발동하나 싶어 주변에 살짝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사슴, 고라니에서 멧돼지, 늑대까지 그의 발톱에 피를 보지 않은 집안이 없었다. 그런 맹수가, 이젠 환갑을 지나서 그런지 온 삭신이 쑤시고 다리 들어올리기도 힘들다고 고백한다. 어쩌다 저렇게 몰락했을까. 영웅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한물간 호랑이를 그리기 위해 한물간 동네 환쟁이가 초빙되었다. 늙은 호랑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를 하고 있을 때 환쟁이는 조용히 늙은 영웅의 모습을 기록했다. 환쟁이는 호랑이를 그리면서 흡사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림 속 주인공이나 그림을 그리는 환쟁이나 늙고 쇠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환쟁이는 알고 있었다. 호랑이가 비록 자신의 무용담을 떠들고 있지만 호랑이에게는 한번도 화려했던 시절이 없었다는 것을. 환쟁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비록 동네에서는 그림 좀 그린다고 폼 잡고 다니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한양에서 본 ‘맹호도’를 그릴 수 없었다. 바늘처럼 날카로운 붓질로 촘촘히 박힌 호랑이털을 그릴 수 있는 천재성은 애당초 자신의 재능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프로들의 전유물이었다. 호랑이나 환쟁이나 삼류인생이었다.

   
위대한 긍정이 전설을 만든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잘나가는 호랑이만 호랑인가? 이 세상이 꼭 일류나 이류만 살아야 하고 삼류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무명화가의 ‘까치호랑이’ 속에는 자신의 작품을 작품이라고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함이 들어 있다. 일류작가가 세필(細筆)로 일일이 털 한 올 한 올을 그릴 동안 삼류작가는 몇 번의 붓질로 복잡한 과정을 생략해 버렸다. 정교함이 드러나야 할 자리에 대범함이 대신했다.

그러자 ‘까치호랑이’는 일류작가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개성적인 작품으로 변신했다. 남들이 자신을 민화작가라 수군거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민화는 민화의 길이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만약 ‘맹호도’에 기가 죽어 ‘까치호랑이’를 부끄럽게 여겼다면 오늘날까지 이 작품은 남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민화작가는 주눅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핸디캡’을 독창성으로 바꿀 줄 알았다. 그의 자부심과 결단에 의해 우리는 다양한 형상의 호랑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개성 있는 호랑이를 만날 수 있었다. 멋있지 않은가. 너만 화가냐, 나도 화가다, 라고 소리칠 수 있는 민화작가의 자긍심이. 그것은 마치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가 자기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산속을 펄펄 날아다니다 종국에는 산신령으로 추앙받은 것만큼 위대한 자기변신이다. 위대한 긍정이다. 긍정과 자기 확신이 패자를 승자로 만들었다. 호랑이도 그림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당신

 

장조화 쓰레기 줍는 노인

 

 

▲ 장조화 ‘어머니의 희망’ 1954년. 종이에 색. 중국 개인

 

 

겨울이다. 비가 그치더니 매서운 바람이 분다. 대관령에는 폭설이 내렸단다. 이제 겨울 추위가 시작되고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마음까지 추워진다. 아니나 다를까. 우울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얼마 전에 TV에서 홀로 사는 사람의 ‘외로운 죽음’에 대한 내용이 방영되었다. 어느 도시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지 7일 이상 방치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따뜻한 방안에서 식구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TV를 시청하고 있을 때 내 옆집에서는 외로움에 지친 사람이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거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12월의 시작이 우울하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아기
   
젊은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다.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에는 사랑스러움이 그득하다. 일을 하다 잠시 아기를 안아주러 온 걸까. 젊은 엄마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신발도 벗지 않은 상태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아기가 잠든 사이 부지런히 일을 하려는데 어느 새 깼는지 엄마를 찾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외면하지 못해 잠시 방에 들어왔다. 혼자 누워 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신이 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엄마와 눈을 마주친다. 세상의 그 어떤 미소가 이렇게 예쁠 수 있을까. 세상의 그 어떤 소리가 아기 소리만큼 고울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엄마에게 아기는 삶의 의미이고 희망이자 세상의 모든 것이다. 화선지 위에 아무런 배경 없이 오로지 엄마와 아기만 그려져 있어도 이 그림은 더 이상의 붓질이 필요 없다. 아무리 큰일이 닥쳐도 엄마 품에 안기면 모든 일이 해결되었던 아기의 어린 시절처럼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로 엄마와 아기만 있으면 충분하다. 값비싼 옷장도 요란한 장식물이 없어도 넘치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그린 중국 근대 수묵인물화의 대가 장조화(蔣兆和· 1904~1986)는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부모님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유랑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녔다. 갖은 고생을 하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 그는 스물여섯의 나이로 대학교수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런 화가에게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의 모습은 잃어버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했을 것이다.

너무 오래된 과거라서 이젠 기억조차 희미한 어린 날의 행복을,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회복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기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은 특정 종교의 예배 대상이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성모자(聖母子)’상이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마의 훈기는 아무리 매서운 겨울 추위도 훈훈하게 녹여버릴 수 있는 마법의 기운이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봐 준 엄마의 자식이다.


팔순쯤 되었을까. 등에 망태기를 짊어지느라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멍하니 서 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은 몇 차례 누볐을 무거운 외투 속에 꼭꼭 감추었다. 바구니를 걸친 두 손은 찬 기운을 피해 소매 속에 넣었다. 초점이 없는 시선 속에는 넝마주이를 하며 살아온 힘겨운 세월이 투영되어 있다. 가족은 없는 걸까.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삭신이 쑤시고 아플 나이에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 어떤 설명보다 절절하게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서 있다
   
장조화는 ‘어머니의 희망’ 같은 따뜻한 작품도 그렸지만 유랑민(流浪民)을 그린 작품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린 시절 본인이 직접 유랑생활을 하면서 본 사람들의 모습을 대학교수가 되어서도 줄기차게 그렸다. 출세한 후 행여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알까 봐 덮어버리거나 미화시키려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밝음과 어두움이 뒤섞인 자신의 인생을 건성으로 묻어버리지 않고 통투(通透)하게 바라보며 삶의 본질을 찾아내겠다는 다짐 속에서만 가능한 작업이다. ‘쓰레기 줍는 노인’이 그 어떤 고운 여인보다 더 진실하게 와 닿는 이유다.
   
당시 힘겹게 살아가는 노인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1941년판 ‘장조화 화집’에 실린 작품으로 최근에 출판된 화집에는 ‘已失(이미 사라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已失’의 의미가 작품 자체가 없어져버렸다는 뜻인지 혹은 소장처를 알 수 없다는 뜻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1930년대의 중국 상황을 대변해 주는 이 명작을 우리는 더 이상 직접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빛바랜 화집 속에서만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장조화 ‘쓰레기 줍는 노인’ 1938년. 종이에 먹. 중국 소재지 미상

 

 

TV에 나온 82세 된 할머니는 자식이 여섯 명이나 되지만 다들 벌어먹고 사느라 바빠서 1년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을 때도 있다고 서운해 했다. 다리가 아파 약으로 연명한다는 어떤 할아버지는 자식들과 인연 끊어진 지가 오래되어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고 서러워했다.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소문은 이제 풍문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태가 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 해도 자식들에 대한 원망을 품고 사는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어떻게 기른 자식인데 이럴 줄 몰랐다는 둥, 자식 길러놔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둥 배신감을 느끼는 부모의 하소연은 이 집 저 집에서 계속된다.
   
그러나 자식들이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오랫동안 ‘효’라는 이데올로기에 억눌려온 자식들은 ‘효’라는 말만 들어도 급격한 피로감을 느낀다. 부모도 중요하고 형제간도 중요하지만 우선 당장은 나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언제 잘릴 지 모르는 회사를 다니며 노후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이 나라의 가장에게 부모는 짐이고 무거움이다. 나를 귀하게 길러준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불안하고 미래가 아득한 상황에서 부모의 불평불만은 또 하나의 스트레스이자 회피하고 싶은 멍에다. 나 살기도 힘든데 그 사정도 모르고 걸핏하면 어디가 아프다, 뭐가 필요하다면서 볼 때마다 손을 벌리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머리부터 지끈지끈 아픈 것이 자식의 심정이다. 아들의 심정이 이럴진대 며느리의 심정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식 관계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부모가 자식을 그리워함은 원시적이고 맹목적이다. 어떤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본능이다. 분석될 수도 없고 규명할 수도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자식은 부모의 이 감정을 탓해서는 안된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고 정리할 수도 없을 때는 그냥 순순히 항복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노인 복지 정책에 대해서도 우리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부모 자식 관계가 더 껄끄러워지기 전에 나라에서 알아서 노인돌보미서비스 같은 것을 실시해줘야 한다고 큰소리로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서비스가 실시된다 해도 부모가 자식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혼자 사는 1인 가구 수가 40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누군가 지켜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죽어가야 하는 ‘고독사(孤獨死)’는 앞으로도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겨울이다. 날씨가 차가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마음까지 얼어붙은 계절이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부모님께 연락한 지가 오래되었다면 지금 당장 전화를 걸어보자.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지겹게 되풀이하더라도 짜증 내지 말고 들어주자. 우리 어머니는 내가 자라면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도 모두 참고 들어주시지 않았던가. 이제는 내 차례다.

 

 


 

 

조정육 미술사가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