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願)은 발보리심(發菩提心)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깨달음을 내 안에 구축하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 중에 하나는 원(願)을 세우는 것입니다.
원(願)이라 함은 깨달음의 세계가 자신의 내면세계에 구축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원(願)으로 하여 부처의 세계가 밖에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내 안에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도, 자기 성품자리를 볼 것[견성 見性]도 없이 본래 다 갖추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알아차림, 즉 깨우침은 훨씬 훗날의 일이며, 어쩌면 평생토록 알 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할지도 모릅니다.
'본다[견 見]'는 것은 눈을 뜬다는 말입니다.
눈 뜨지 않고서야 어찌 삼라만상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소식을 알 수 있으리오.
눈 뜨지 않은 채 어찌 물 흐르는 소리, 새의 노래 소리며 날개 짓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눈 뜨지 않은 채 어찌 나를 바로 볼 수 있겠습니까. 원(願)은 내 마음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우리들 중생의 원(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을 발(發)하는 일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입니다.
즉 ‘아뇩다라’는 무상(無上)을, ‘삼’은 정(正)을, ‘먁’은 등(等)을, ‘보리’는 정각(正覺)을 뜻하니,
곧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입니다.
다만 그 이름이 무상정등정각일 뿐입니다. 그 옛날 여러 삼장 법사들이 산스크리트어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음역한 것에는 깊은 뜻이 있을 터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꼭 찝어 무상정등정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얻은 바 없음을 얻었다 하시니, 무어라 이름지어 부른다면 이미 그리칠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위하사 법을 설하지 않고는 가르침을 전수할 수 없었으니, 방편으로 당신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이름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 중생의 원(願)도 다름 아닌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이 무상정등정각을 내 안에 구축하는 일입니다.
발(發)은 일으킨다는 뜻으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줄여서 발보리심(發菩提心)은 지혜[보리菩提]를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을 증득하기 위하여 일으켜 세운 마음을 말합니다.
발보리심을 통하여 깨달음을 증득하니 우리는 그때 비로소 윤회전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놓여나는 자유, 이 생명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경지를 해탈(解脫)이라 합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바로 해탈의 근본조건이나 얻으려 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요, 얻으려는 마음을 놓아버리면 또한 얻을 수 없습니다. 실로 '실다움도 없고 또한 허망함도 없음[무실무허 無實無虛]'입니다.
금강경의 수보리 존자의 말처럼 "제가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옵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말씀하실 만한 정해진 법도 없습니다.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무유정법 여래가설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
세간(世間)에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참선이 오롯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 하고, 염불 수행하는 사람들은 염불이야말로 말법시대(末法時代)를 사는 근기 약한 중생에게 으뜸가는 길이라 합니다.
사경(寫經)하는 이는 사경이, 주력(呪力)하는 이는 주력이 또한 그렇다고 내세웁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참선도, 염불도, 그외 어떤 수행법도 불법(佛法),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꼭 그렇다고 정해진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의 부족한 천수경 강의를 접하는 모든 사람들마다 받아들이는 정도와 이해하는 깊이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노트를 하고 마음에 새긴다 해도 그것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이 강의 내용을 옮기는 사람마다 다른 소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내용을 말과 글로 옮긴다는 일은 아주 어렵기만 합니다. 말로 옮겨진 내용이 때로는 머릿속에 들어있는 내용과 다른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과거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중생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같다[여如]'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오롯이 남아 있는 한 마디는 바로 '여(如)', 한 글자 뿐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말로 또는 글로 표현된 것은 그뿐, 이미 여(如)는 아닙니다.
자장면이 맛있다고 하여 먹어본 사람이 자장면을 먹어 보지 못한 이에게 설명하고자 할 때, 이전에 자장면을 먹어보지 못했을 때에 했던 말, 즉 '자장면이 맛있다고 하더라.'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먹어보니 이러저러하게 맛있더라.'하고 말할 것입니다.
또 비로소 먹어본 그 기막힌 맛을 아무리 진지하게, 실감나게 이야기하더라도 듣는 이에게는 꿈속에서 떡보기요, 병풍 그림 속의 꽃일 뿐입니다. 기막힌 소식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이 '자장면이 맛있다고 하더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취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치는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고요함을 얻지 못한 것은 번뇌 망상이 들끓기 때문입니다.
보리심을 일으켜 세우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것이니, 깨달음을 얻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보리심은 모든 과거세의 여러 부처님과 석가모니불[과거칠불 過去七佛]을 지나 미륵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이 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종자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본래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복 밭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원하옵건대 여래의 진실 된 가르침을 해득하게 하옵소서[원해여래진실의 願解如來眞實義]’라고 간절히, 실로 간절하게 발원(發願)하는 것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나도 깨달음을 증득하겠다는 중생 자신의 서원(誓願)입니다.
대장부론에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굳건한 보리심을 내어야 한다. 보리심을 발하는 것을 제외하고 보리(菩提)에 이르게 하는 법은 결코 있지 않다.
보리심이 없으면 부처님의 과보를 얻지 못하고 부처님의 과보를 얻지 못하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보리심은 늘 나를 깨어있게 합니다. 방심하여 허망하지 않고 맑게 깨어있는 정신은 나를 부처님의 세계로 이끌어 갑니다.
한량없는 세월 동안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돌고 돌아[윤회전생 輪廻轉生] 이 몸을 받아 온 지금, 나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의 깨달음[등각 等覺]’을 얻고자 보리심을 발하였습니다.
보리심을 일으켜 세운 사람을 발심보살(發心菩薩)이라 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 대중들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발심보살 아닌 분이 없습니다. 보리심을 발한 사람, 즉 발심보살은 늘 깨어있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발보리심을 일으켜 세운 사람은 중생으로서 저지르는 여러 불선업(不善業)을 이미 떨쳐 버리고 자신 스스로를 닦아 부처가 될 마음을 일으켜 수행(修行)해나가기 때문입니다. 발심보살의 깨어있는 정신은 나의 근원으로 나를 인도합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보리심만을 발(發)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보리심을 발하여 안으로는 불도(佛道)를 이룩하고 밖으로는 자비심으로써 보살도(菩薩道)를 행해야만 합니다.
물러서지 않는 자기 수행과 자비의 실천을 병행해 나갈 때에 나의 보리심도 완성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