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전성시대 중 하나였던 영,정조 시대에 몰락한 양반으로 태어나 그림쟁이로 활동했던 강세황.
사실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막 들어오기 시작하던
서양화법을 받아들여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낸 사람으로서 강세황을 따를 자가 없었다는 평을 듣고 있을 만큼,
당시에는 꽤 인정 받았던 화가랍니다. 이번 회에는 검은 묵을 주로 사용하였지만
서양의 채색화법을 이용하여 나름대로 고운 조선의 색채 감각을 보여준 화가 강세황을 소개하겠습니다.
무려 64세의 늦은 나이로 막내아들을 얻은 예조판서 강현에게
강세황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었겠죠. 게다가 그 아들은 여섯 살부터 글을 짓기 시작하더니,
열 살 때 숙종이 승하하시자 국상에 바치는 시까지 지었다고 해요.
게다가 13살 때 쓴 글씨를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 하며 병풍까지 만들었다고 하니,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어요.
하지만 강세황이 21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여행 중 객사를 하시게 되고,
스물 여덟 살 때에는 어머니 마저 돌아가셨습니다. 곧이어 그가 얻은 아들 중 셋이나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한 채
차례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게다가 그의 형 강세윤 또한 난에 연루되어 귀양까지 가게 되었고,
그 이유로 그는 벼슬길에 오르는 것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몰락한 양반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굶기를 밥먹듯이 하면서도 돈은 벌지 못하였으니,
그의 가정은 빚더미에 올라앉고, 그와 가족들의 건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그의 아내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들을 돌보며 고생만 하다가 45살에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강세황은 그림을 벗하며 살았답니다.
양반 주류에서 소외되고, 생활고가 지독할수록 오히려 풍류라도 잡으려는 듯 말입니다.
그렇게 강세황은 당시의 화가였던 정선, 심사정, 강희언 등과 교류하고, 김홍도와 같은 제자를 키우기도 했습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던가요. 1773년 영조는 향연을 베풀던 중 강세황의 장남인 강연을 만나게 되고,
부왕인 숙종 시절에 알았던 강세황의 아버지, 강현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옛 충신의 아들인 강세황이 나이 육십이 넘도록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에게 9품 하급직을 제수하였습니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던 강세황은 곧 사임을 하였구요.
하지만 강세황이 곧 사임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영조는 다시 종6품 사포서 별제를 임명합니다.
그렇게 공직을 시작한 강세황은 4년 만에 종2품 당상관, 그리고 정조 시대에는 호조판서까지 지내게 됩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에서 질주를 한 것이죠.
하지만 관직에 몸담게 되면서부터 강세황은 그림 그리기를 그쳤습니다.
그에게 벼슬길을 열어준 영조대왕이 “그림 그리기는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 라고 일렀기 때문입니다.
영조 또한 강세황을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고,
그 마음을 헤아린 그가 절필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후에 강세황은 그의 인생 말년에
다시 붓을 들어 자신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몇몇 그림을 내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의 나이 72세 때는 천추부사로 연경에 가기도 하고, 76세 때는 금강산 유람을 하면서,
기행문과 실경사생화 등을 남겼습니다. 당시 여행으로 얻은 경험을 기반으로 삼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키기도 하였고, 풍속화, 인물화 등을 그려내기도 하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서양 채색화법을 전적으로 수용, 발전시키기도 하였죠.
꾸밈없이 소박한 필치, 맑고 고운 채색법 등으로 자신만의 개성있고 독자적인 화풍을 보여주었습니다.
79세로 붓을 놓을 때까지 말입니다.
19세기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처럼 강세황 또한 공기를 통해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공기원근법을 시도하였습니다.
중국 화풍을 모방하여 그려진 듯한 작품이지만,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필치와 먹과 색채의 어울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매우 전형적인 한국화 특유의 구도와 필치를 보이고 있는데요.
신선의 세계인 양 강 위로 자욱히 흐르는 안개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당시에 자주 교류하였던 심사정과 함께 그려내던 죽도입니다.
비 갠 뒤의 투명해진 공기를 통해서 바라다본 백석담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그려낸 것인데요.
영통동 계곡의 입구에 들어서면서 가까이 있는 바위들을 부각시키고
부인과 사별 후 마음을 달래고자 떠났던 개성여행으로 강세황은 <송도기행첩>을 내놓습니다.
오사모에 짙은 옥색 도포차림을 한 좌상을 그린 것으로 강세황이 70세였을 때의 작품입니다.
인생의 말년을 그는 자연과 더불어 여유롭게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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