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홍도
단원 김홍도(1745-?)는 1791년 12월 연풍현감으로 부임한다. 연풍현은 충청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조령과 이화령을 끼고 있어 교통의 요지이나, 전답과 인구가 적은 시골의 작은 고을에 지나지 않았다. 또 김홍도가 연풍현감으로 있은 1792년부터 1794년까지는 연속해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은 때였다. 김홍도는 지방의 수령으로 백성을 구휼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연풍현: 정월부터 4월까지 12번을 순시하였습니다. 굶주린 사람은 모두 3,060명으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조(租)는 160석 10두인데, 그 중 110석 10두는 현감 김홍도가 마련하였고 50석은 감영에서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리 31석 1두, 죽미(粥米) 5석 1두, 장(醬) 2석 11두, 소금 3석 5두, 콩 46단 2주지를 현감 김홍도가 마련했습니다. (『일성록』1793년 5월 24일자)”
그러나 단원 김홍도는 1794년 호서위유사 홍대협이 올린 보고서로 인해 1795년 1월 7일 연풍현감 직에서 물러난다. 단원이 다년간 벼슬을 하면서도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굴고 잘한 행적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서면으로 보고 드립니다. 신이 지난 해 11월4일 명을 받들어 호서위유사로 가서 정황을 살펴본 결과 […] 연풍현감 김홍도는 다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하나도 잘한 행적이 없으며, 관청의 우두머리 된 몸으로 즐겨 중매나 행하고 구슬아치들에게 위압적으로 호령하여 가축을 상납케 할뿐 아니라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화를 내어 전에 없는 악형을 저지른다고 합니다. 또 듣자니 근일에는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온 읍의 군역에 매인 장정을 징발하여 그 빠진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날짜를 계산하고 나누어서 벌로 세미(稅米)을 거둠으로써 경내 전체가 소란하고 원망하는 비방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현의 이방을 잡아다 조사 문초해 본 즉 그 자백한 바와 전하는 말이 처음부터 터럭만큼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이같이 백성에게 포악한 무리는 중하게 다스려 벌주어야 합니다. (『일성록』1794년 월 초칠일 경인)”
1년 사이에 보고서가 정반대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단원 김홍도가 포악했을까? 중매를 한다는 것은 인간적이라는 얘기며, 사냥을 즐겨한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산천을 유람했다는 뜻이다. 가축을 상납 받고 세미를 거두었다는 것은 굶주리는 백성을 거두고 구휼미를 확보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화원 출신으로 힘이 없던 단원은 결국 양반 세도가들의 희생양으로 연풍현을 떠나게 된다.
그렇지만 단원이 연풍에서 보낸 3년 남짓의 세월은 본인은 물론이고 이 지역 사람들에게도 큰 의미로 남아 있다. 김홍도는 현감으로 있으면서 늦둥이 아들 양기(良冀)를 얻었다. 또 주변의 산수를 유람하며 승경에 흠뻑 빠졌을 수도 있다. 한진호(1792-1844)가 쓴 『도담행정기(島潭行程記)』「사인암 별기」에 보면, 단원이 4군 산수를 즐겨 찾았는데 그것은 정조의 어명에 따른 것이었다.
“세상에 일컫기를 단양의 경승으로 다섯 바위가 있다고 하니, 삼선암의 세 바위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과 운암 그리고 사인암을 이른 것이다. 이제 사인암을 보니 참으로 진기한 경관이다. 일찍이 듣자니 전의 주상(정조)께서 그림 잘하는 김홍도를 연풍현감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4군(영춘, 단양, 제천, 청풍) 산수를 그려 돌아오게 하였다 한다. 김홍도가 사인암에 이르러 그리고자 했으되 그 뜻을 얻지 못하더니 10여 일 동안이나 머물러 가면서 익히 보고 노심초사하였는데도 끝내 참모습을 얻지 못한 채 돌아갔다고 한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김홍도 같은 천재 화가도 사인암의 경승을 그리는데 애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사인암의 웅장함이 김홍도를 압도하였기 때문일 수 도 있고, 그렇게 멋진 장면을 열흘 정도에 그린다는 것은 화가의 양심상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저런 이유로 단원은 단양을 몇 번 더 찾아 그림을 완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사군산수첩』이 나오게 되었고 정조 임금에게 진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화첩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전해지는 김홍도의 4군 산수 그림은 1796년에 만든 『병진화첩』 속에 있다. 이 화첩에는 사인암 외에도 옥순봉과 도담삼봉 그림이 들어 있다. 옥순봉과 도담삼봉은 남한강 중상류 단양 땅에 있는 명승으로, 강이 깊은 두메산골을 지나면서 만들어낸 자연의 걸작이다. 옥순봉은 석벽의 형세가 기이하고, 도담삼봉은 세 바위의 배치가 오묘하다. 이 『병진화첩』에는 산수화와 풍속화 20점이 들어 있다.
단원의 도담삼봉은 이들 그림 중 가장 입체적이다. 그것은 가운데 도담삼봉을 중심으로 근경과 원경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도담삼봉의 표현은 아주 사실적이다. 여기서 사실적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뜻이다. 도담삼봉 그림이 현재 우리가 보는 모습과 거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중경에 삼봉을 크게 배치하고 근경에 나루를 건너려는 사람을 작게 배치했으며, 원경에는 멀리 보이는 산을 배치했다. 우리의 시선이 먼저 삼봉에 머물렀다, 원경의 산으로 간 다음 근경의 사람에게로 향하도록 그렸다. 그리고 바위와 소나무, 배와 사람을 제외한 대상을 과감히 생략하여 도담삼봉을 부각시키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동양화의 특징인 생략을 통한 강조다.
중심이 되는 도담삼봉은 수직준을 사용하여 바위를 예리하게 표현했다. 가는 필선을 죽죽 그어 내려 바위의 날카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부벽준의 기법을 첨가하여 바위의 질감을 표현했다. 이에 비해 배경이 되는 산은 먹의 농담을 이용하여 형태만 표현했고, 그 앞의 가까운 산은 소나무를 넣어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근경은 오른쪽 아래로 아주 조금 나타나게 만들었다. 그림에 보면 근경의 세 사람이 배를 불렀는지 삼봉을 지나 사공이 노를 저어 온다. 이들 세 사람은 그 사이 삼봉을 바라보면서 뭔가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또 이들 오른쪽으로는 나귀를 끌고 오는 일행이 표현되었는데, 이들은 양반의 짐을 끌고 오는 하인들일 수도 있고, 배를 타려는 손님일 수도 있다.
현재의 도담삼봉이 단원의 그림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가운데 봉우리의 정자 정도다. 이 정자 역시 1900년대에 만든 것으로 그 역사가 100년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현재의 것은 1976년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 지금은 충주댐으로 인해 수량이 많아져 그림 속 바위 아래에 있는 모래톱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단원은 조선 후기 실경산수의 대가다.
소리:박종순 /
장구: 유흥복 / 대금: 우종실
靑山은 어찌하여 萬古에 푸르르며
流水는 어찌하여 晝夜에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萬古常靑 하리라
'[예술작품산책] > 한국화,동양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화)강세황 (0) | 2011.11.29 |
---|---|
노인(老人) - 이상원 화백 (0) | 2011.08.18 |
청강 김영기 작품감상 (0) | 2011.02.15 |
꽃의 화가 / 김재학-1 (0) | 2011.02.15 |
꽃의 화가 / 김재학-2 (0) | 2011.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