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 寶王三昧論

◎ 寶王三昧論(보왕삼매론) - 4. 마음공부에 장애가 생길 때

경호... 2011. 10. 20. 02:08

4. 마음공부에 장애가 생길 때


    究心不求無障(구심불구무장),心無障則所學躐等(심무장즉소학렵등)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니라.


    삶은 공부의 연속입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 참으로 밝은 진리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우린 너무도 모르고 살아 온 듯 합니다.

    밝은 지혜를 가진 사람만이,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만이 나의 스승인 것은 아닙니다.
    참다운 스승은 언제 어느 곳, 어디에서라도
    충분히 철철 넘쳐흐르는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다만 “나다”, “내가 옳다”고 하는 지독한 아상의 굴레
    고정관념의 꽉 닫혀 진 소견들이
    내 주위를 훈훈히 감싸고 있는 훌륭한 스승을 발견치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가 쳐 놓은 울타리만큼의 가르침만을
    세상 속에서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가르침을 주려고 해도
    내 안에 강하게 쳐져 있는 관념의 틀이
    도저히 받아들이질 못하게 막아 버립니다.

    내가 쳐 놓은 소견만큼만, 그 수준만큼만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있는 그대로의 너른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고
    내 소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내 세상” 속에서만 아웅다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세상”을 깨고 보면 세상 모든 두두만물이 다 부처님이요,
    부처님의 가르침 아닌 것이 없다고 합니다.

    화들짝 열어 재낀 열린 마음,
    내 소견의 고집을 놓아 버린 텅 빈 마음,
    그 마음은 이 세상이 무한히 발하고 있는 고귀한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모두 흡수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이
    팔정도의 첫 번째 정견(正見)의 공부입니다.
    내 지식을 자꾸만 쌓아가는 것이 공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소견”을 놓아 버린 텅 빈 그 속에
    참으로 밝게 빛나는 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쌓는 것이 공부가 아니라 놓는 것이 공부입니다.
    진정 내가 옳다고 하는 소견을 놓아버릴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처럼이나 자유로워 질 것입니다.

    즐거운 순경계(順境界)이건 괴로운 역경계(逆境界)이건
    우리의 마음, 우리의 소견이 세상을 향해 마음을 낮춰 하심(下心)할 수 있다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그 모든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맑고 향기롭게 주워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부하는 이는 모름지기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보다 못한 이에게 마음을 낮추고
    어린 아이에게조차 배움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잘났다고 하는 마음으로는 진정 순수한 공부는 있을 수 없습니다.

    나를 낮추고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 그런 순수한 마음의 자세라면
    공부가운데 일어나는 그 어떤 장애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겨 낸 다기 보다 오히려 감싸 안고 받아들여
    내 안에서 참된 공부로 바꾸어 갈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낮추어 하심하고 소견에 사로잡혀 얽매이지 않고
    텅 비어 밝게 빛나는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
    그것이 공부하는 이의 밝은 마음입니다

    “내 생각”이라는 작게 얽매여 있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면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이끌어 주는 참으로 소중한 스승입니다.
    일상 속에서 장애라고 생각하던 것들 속에서 진정한 스승을 찾을 수 있고
    그 안에서 진정한 우리의 공부는 익어 갈 것입니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장애가 나를 괴롭히는 역경(逆境)이 되지만
    내 소견을 놓아버리고 일체를 받아들이고 바라보면
    장애야말로 나를 이끌어 주는 마음공부의 스승이며 참부처님 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장애가 왔을 때 괴롭다고 생각하여 버리려고 하겠지만,
    수행자는 장애가 옴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경계로 받아들이며
    나아가 그 장애를 공부의 참된 재료로 잘 돌려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공부 중에 오는 온갖 경계며 장애들은
    쓸데없는 것이 하나도 없고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법입니다.

    이렇듯 마음 공부하는데 있어서 “장애”는
    오히려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는 스승입니다.
    공부하는데 장애가 없다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될 것이며,
    배우는 것이 제 그릇을 뛰어넘으면
    어리석은 아만심만 커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깨닫지 못하고도 ‘깨달았다’고 하는
    대망어를 저지르게 되는 일이 생기게도 됩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그 좋은 조건이 계속된다면
    그 자체가 바로 더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그 속에 계속해서 안주하다보면
    우리의 마음은 더욱 나태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경이 없는 아무리 좋은 조건이 준비되어 있더라도
    텅 비우지 못해 제 그릇이 작은이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배우는 것이 넘쳐나니 제 그릇 밖으로 넘쳐흐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좋아 안주하는 것은 제 그릇을 더욱 좁히는 것이지만,
    배움 가운데 장애가 생긴다는 것은
    자신의 그릇을 넓힐 수 있는 참으로 좋은 인연입니다.

    그렇듯 장애 가운데에서 공부도 되는 것이고 해탈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장애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한 발 더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상에서처럼 장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지만,
    말로만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모든 장애를 슬기롭게 잘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온전히 장애의 실체를 관하고, 그 뿌리를 깨쳐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통 마음공부 가운데 올 수 있는 장애 중 가장 큰 것이
    번뇌망상과 의심이라고 합니다.

    번뇌망상은 말 그대로 수행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산란한 마음들, 번뇌, 망상 등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고요히 있지 못하고 늘상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하루 가운데 단 몇 분조차도 우리는 마음을 쉬고 살지 못합니다.

    바쁘지 않아 잠시 남는 시간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시간동안 마음을 쉬고 고요히 있지 못합니다.
    공상이라도 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노래라도 듣고, TV라고 켜야 합니다.
    이런 일상의 모든 분주한 일들로 인해 우리 마음은
    거칠게 흔들리고 있는 찻잔 속의 물처럼이나 계속 흔들립니다.

    그러다보니 공부를 하고자 가부좌를 틀고 앉더라도
    한번 흔들린 물이 쉬 고요해지기 어렵듯
    우리 마음도 일상의 분주함의 타성에 젖어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온갖 망념 망상 번뇌들이 잠시라도 가라앉아주는 법이 없습니다.
    이놈이 바로 번뇌 망상이란 첫 번째 장애입니다.

    그러나 한번 흔들린 물도 오래도록 가만히 두면 저절로 가라앉아 고요하듯,
    우리 마음도 처음에는 번뇌망상이 끊임없을지라도
    인욕과 보리심을 가지고 용맹스레 정진하면 저절로 고요해 질 것입니다.

    번뇌망상은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환영과 같고, 번개와 같습니다.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홀연히 사라지는 법입니다.

    그러니 번뇌망상이 올 때, 그것을 실체시하여 그로인해 괴로워하거나,
    싸우려 들지 말고 그냥 놓아버리면 됩니다.
    그에 대한 집착되는 마음을 다 놓아버리면
    인연이 다하기에 홀연히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또한 의심이란 장애를 이겨내기 위해서
    태산과도 같은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수행 중에 이 길이 바른 길인지,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정말 깨달음이란 있기나 한 것인지, 참성품이 무엇인지 하는 등의
    온갖 의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의심이 일어나는 이유는 믿음이 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내가 나 자신을 믿지 못하면 과연 누구를 믿고 의지하겠습니까.
    믿음이란 자성불을 믿음이며, 자성불이란 바로 스스로를 믿는 것입니다.
    죽든 살든 내 뿌리 내가 굳게 믿고 갔을 때
    의심이란 장애는 설 곳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일체의 모든 장애가 일어날 때
    마땅히 그 실체를 잘 깨쳐 보아 온전히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경계도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바로 관하고,
    온전히 자성불을 믿고 그 자리에 되놓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장애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