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 寶王三昧論

◎ 寶王三昧論(보왕삼매론) - 5. 수행 중에 마(魔)가 올 때

경호... 2011. 10. 20. 02:07


5. 수행 중에 마(魔)가 올 때


    立行不求無魔(입행불구무마),行無魔則誓願不堅(행무마즉서원불견)

    수행하는데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수행(修行)은 우리 모두의 삶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누구라도 수행은 절대 절명의 서원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祈禱)”와 “기도 성취”는 모든 종교에 있어 살아 숨 쉬는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자신의 능력 범위 밖에 있거나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성취를 위해
    우린 내면의 가치를 절하하고 외부의 그 어떤 절대적 존재에 의지하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없으니 내 힘으로 되지 않으니 외부의 힘을 빌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불교에서는 돌이켜 내 안으로 돌려놓을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기도라는 말보다 수행이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왠지 “기도”라는 말 속에는 내 밖의 그 어떤 절대자,
    혹은 다른 존재에게 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수행이란 스스로 내 안에서 닦아나가고
    발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도 좋습니다.
    다만 기도라고 했을 때 그 대상이 밖으로 향하지 않고 내면을 향하고 있다면
    그 또한 수행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 깊은 곳에 종교심을 가지며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본능과도 같이 내면 깊은 곳에 종교심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라도 수행은
    내면의 종교심을 일깨우는 고요한 마음의 고향입니다.

    우린 이따금씩 내면의 종교심과 만나게 될 때
    수행에 대한 서원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막연한 수행심은 쉽게 타오르고 쉽게 꺼지기 마련입니다.
    전생 그 전생을 이어오며 너무도 오랫동안 쌓아 온 탁한 업장들이
    우리의 순수한 수행심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마(魔)”라고 이름 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수행을 시작하고 나면 안팎에서 수행을 방해하는 마장을 만나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삿된 마음들로 인해
    내 안에 존재하던 업장들이 내면의 마가 되어 나타나며
    마음 밖에서 수행을 방해하려는 온갖 경계들이
    조건과 환경 속에서 외부의 마가 되어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금강과도 같은 굳은 서원 앞에선
    그 어떤 마장도 쉽게 물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러난다기 보다 그 마장으로 인해
    오히려 수행자의 서원은 더욱 굳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마장 또한 내 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내 문제이기에 내 안으로 돌려놓고 나면 그대로 여여해 집니다.
    내가 나를 헤칠 수 없기에
    마장 또한 나를 결코 헤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수행 중에 나타날 수 있는 온갖 마장들에 휘둘리지 않고
    바로 관하여 온전히 극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수행심을 견고히 해 주는 원이 굳건해야 합니다.
    원을 세우지 않게 되면 적당히 수행하며 게으르게 되고,
    수행 중에 마장이 올 때면 이겨내지 못하고 바로 수행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적당히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남들은 수행이라는 것도 모르는데 나는 그래도 가끔 절도 하고,
    염불도 하고, 책도 읽고, 절도 가는데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의 나태한 수행심에 안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굳고도 밝은 원을 세워 수행의 나침반을 삼을 일입니다.
    스스로의 원을 세워 발하겠다는 발원(發願)을,
    세운 원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맹세를 다짐하는 서원(誓願)을,
    세운 원을 반드시 실천하고야 말겠다는 행원(行願)을 가지고,
    강하게 밀고 나갔을 때 원에 큰 힘이 붙어 원력(願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원이 굳게 서 있어야
    수행자가 나태나 게으름, 혼침과 도거 등 온갖 마장을 만나더라도
    그 어떤 안팎의 마가 수행자를 넘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온갖 마장을 만났을 때
    마장을 벗 삼아 정진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녹이려는 마음에서
    우리의 서원력은 더욱 굳건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장도 우리 수행의 도반인 것입니다.
    두려워 할 것도 없고, 맞서 싸우려고 할 것도 없습니다.
    본래 마라는 것은 근본도 뿌리도 없어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그 허망하다는 근본을 바로 관하고 난다면
    더 이상 마가 나를 괴롭힐 수 없게 됩니다.

    신기루나 환영을 보고 신기루라고, 환영이라고 바로 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실제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이에게는
    신기루나 환영에 크게 걸려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수행 중에 마장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도고마성’이라 하여 ‘도가 깊어지면 마도 더욱 성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산이 높을수록 골이 깊듯 정진이 깊어지다 보니
    마라는 경계 또한 도깨비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또 어떤 수행자는
    나에게는 왜 마장이 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거나,
    마장이 온다고 우쭐해 한다는 것은 똑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장이란 오는 것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요,
    오지 않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니 마가 있고 없음을 놓아버릴 일입니다.

    수행 중에 마장이 오더라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될 것입니다.
    수행의 도중에 나타나는 삿된 경계를 보고 분별심을 낸다면
    이것은 마의 유혹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수행 중에 나타나는 경계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무집착, 이것이 마장을 대하는 가장 밝은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겁낼 필요도 없으며, 특이한 현상에 우쭐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가만히 지켜보면 됩니다.
    나와 둘이 아닌 모습임을 관하면 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수행 중에 그 어떤 경계를 만나면
    한 생각 분별심을 일으키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다고 그것이 자신의 수행의 진전을 의미하거나
    퇴전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고 바로 놓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왜 그 어떤 경계도 나타나지 않는가 하고 고민할 것도 없고,
    나는 왜 경계가 자주 일어나는가 하고 답답해 할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경계를 만나는 데에 예민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 중 나타나는 경계에 결코 끄달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 ‘이것이 과연 무슨 경계일까’ 하고 의심 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관하고 놓아버리셔야 합니다.
    결코 분별심을 내거나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경계라고 잡으려 해서도 안 되며, 나쁜 경계라고 버리려 할 것도 없습니다.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의 양 극단을 다 놓아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역경이 다가오면 잘 다스리다가도
    순경이 올 때 빠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경이란 당장에 나를 괴롭히기 때문에
    누구든 역경계가 나를 괴롭힐 때 오히려 마음을 굳게 가지며
    더욱 수행을 열심히 하고 놓아버림으로 이겨낼 수 있지만,
    순경이란 놈은 나를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애써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도록 정진심을 묶어 놓습니다.
    그러니 더 큰 경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저 불교라는 종교를 그저 마음속의 종교로 가지고만 있다가
    어느 순간 큰 역경계가 닥쳐오면 부처님 전에 달려들어 붙잡고 늘어집니다.
    그러면서 부처님과의 인연이 더욱 성숙해 지고 정진에 불이 붙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역경계가 더 큰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이 늘상 편안하고 당장에 괴로운 일이 없다보면
    지금도 이대로 행복한데 무슨 수행이며, 무슨 정진인가 하는 마음이 듭니다.
    막상 수행을 하다가도 일이 잘 풀리고 좋은 일이 생기게 되면
    애써 수행까지 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고 중간에 그만두게도 됩니다.
    그 놈이 바로 순경의 무서운 점입니다.
    눈 밝은 수행자는 마땅히 이러한 때를 더욱 경계할 일입니다.

    100일 기도, 1000일 기도는 제쳐두고 3.7일 기도를 시작하고 나서라도
    회향법회까지 꾸준히 동참 정진할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음을 봅니다.
    쉽게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 마음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순경과 역경이 안팎의 마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순역의 경계, 내외의 경계를 바로 관하고 잘 닦아가야 할 것입니다.

    수행을 시작 할 때 쉽게 하려는 마음은 버리셔야 합니다.
    그것이 탐심(貪心)입니다.
    왜 수행이 잘 안되지 하고 답답해 한다면 그것이 진심(嗔心)이며
    ‘내가 수행한다’, ‘정말 수행 잘 된다’, ‘내가 깨닫는다’ 하면
    이것이 바로 치심(癡心)인 줄 아셔야 합니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심(三毒心)의 마음을 놓고 나면
    수행심은 조금씩 고개를 들고 내 안을 서서히 밝혀 줄 것입니다.
    마장은 내 수행을 도와주고, 내 서원을 굳게 해 주는
    또 다른 나의 모습입니다.

    경계에 끄달리지 않아 탁 트여 있는 마음,
    텅 비어 오히려 꽉 찬 청정한 마음,
    그 속에 수행심은 빛을 더 할 것입니다.

    마장에 끄달리지 말고
    오히려 내 수행을 이끌어 주는 벗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도반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