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碧巖錄

「벽암록(碧嚴錄)」 下 - 제93칙 대광의 춤(大光作舞)

경호... 2011. 10. 12. 00:32

원오(圜悟)스님께서 풍주(灃州)의 협산(夾山) 영천선원(靈泉禪院)에 주석하시면서
설두 중현(雪竇重顯)스님의 송고(頌古)에 대하여 평창한 말씀의 핵심.


    벽암록 下

       제93칙 대광의 춤(大光作舞)

      [수시]

      [본칙]
      擧. 僧問大光, 長慶道, 因齋慶讚, 意旨如何. 大光作舞, 僧禮拜.
      光云, 見箇什, 便禮拜, 僧作舞, 光云, 這野狐精.

      거론하다.(擧.)
      스님이 대광스님에게 물었다.
      “장경(長慶)스님이 말한 ‘재(齋)를 올리며 축하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僧問大光, 長慶道, 因齋慶讚, 意旨如何.)

      - (이 공안이) 또다시 빛나는구나.
        이 먹통아. 참으로 의심이 많군.
        묻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지.

      대광스님이 춤을 추자,(大光作舞,)
      - 사람을 속이지 말라.
        여전히 예전대로 이처럼 하는구나.

      스님이 절을 올리니,(僧禮拜.)
      - 또 이렇게 하는가?
        옳기는 옳지만 잘못 알까 염려스럽다.

      대광스님이 말하였다.
      “무엇을 보았기에 절을 올리느냐?”(光云, 見箇什, 便禮拜,)

      - 한 방 내질러야 하리라.
        반드시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

      스님이 춤을 추자,(僧作舞,)
      - 견본에 따라서 고양이를 그리는구나. 과연 잘못 알았다.
        그림자나 희롱하는 놈이다.

      “요, 여우야!”하고 말했다.(光云, 這野狐精.)
      - 이 은혜를 보답하기 어렵다.
        32조사가 ‘이것’을 전했을 뿐이다.

      [평창]
      서천(西天)의 28대 조사와 당나라의 여섯 명의 조사가 ‘이것’을 조금 전했을 뿐인데,
      여러분 또한 귀결점을 알았느냐?
      알았다면 이 허물을 면할 수 있겠지만,
      모른다면 여전히 여우 같은 정령이다.
      어떤 사람은 “이(대광스님의 말)는 콧구멍을 비틀어서 사람을 속인 것이다”고 하나,
      참으로 그러했다면 무슨 이런저런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대광스님은 훌륭하게도 사람을 지도했으니
      그의 구절 속에는 몸을 벗어날 길이 있다.
      종사라면 반드시 사람들의 못과 쐐기를 뽑아주고,
      끈끈한 결박을 풀어줘야 만이 비로소 선지식이라 할 수 있다.

      대광스님이 춤을 추자 스님은 절을 올리고,
      끝에 가서 스님이 춤을 추자 대광스님은 “요, 여우야!”라고 하였다.
      이는 스님을 (깨달음으로) 전변시킨 것이 아니다.
      결국 정확한 곳을 모른 채 이 스님은 그저 서로 춤을 추기만 하였으니
      이랬다가는 어느 때 쉴[休歇]수 있겠는가?
      대광스님이 한 “요, 여우야!”라는 말은
      금우(金牛)스님을 꼼짝 못 하게 한 것으로 기특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활구를 참구해야지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설두스님은 그의 “요, 여우야!”라는 말을 좋아하여 송을 한 것이다.
      말해보라. 이“요 여우야!”라는 말이
      “지장(智藏)스님의 머리는 검고 회해(懷海)스님의 머리는 희다”는 것과 같을까 다를까?
      (설봉스님의) ‘이 먹통’과 (남전스님의) ‘좋은 스님’이라는 말들이 있는데,
      말해보라, 서로 같을까 다를까? 알겠느냐?
      가는 곳마다 그 사람(대광·마조·설봉·남전스님)의 물줄기를 만나노라.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前箭猶輕後箭深. 誰云黃葉是黃金. 曹溪波浪如相似. 無限平人被陸沈.

      앞에서 쏜 화살은 그래도 가벼운 편인데
      뒤에 쏜 화살은 깊이 박혔다.(前箭猶輕後箭深.)

      - 백발백중이다. 어느 곳으로 피할까?

      어느 누가 누런 나뭇잎을 황금이라 말하는가?(誰云黃葉是黃金.)
      - 울음을 그치게 한다.
        어린아이를 속인들 쓸모가 없다.

      조계(曹溪)의 물결이 이와 같으면(曹溪波浪如相似.)
      - 진흙덩이를 희롱하는 쓸데없는 짓하는 놈들이 어찌 (번뇌에서) 벗어날 날이 있으랴.
        밑그림에 따라서 고양이를 그리는구나. 조금 봐주는군.

      한량없는 괜한 사람이 침몰 당한다.(無限平人被陸沈.)
      -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났다.
        천하의 납승들에게까지 누를 끼치나 어찌할 수 없다.
        (설두)스님께 누를 끼치나 어떻게 할 수가 없군.

      [평창]
      “앞에 쏜 화살은 그래도 가벼운 편인데
      뒤에 쏜 화살은 깊이 박혔다”에서 대광스님이 춤을 췄던 것은 앞에 쏜 화살이며,
      뒤이어 “요, 여우야!”라고 한 말은 뒤에 쏜 화살이다.
      이는 예로부터 전래된 무기이다.

      “어느 누가 누런 나뭇잎을 황금이라 말하는가”라는 것은
      앙산스님이 대중 법문에서
      “그대들은 각기 자기 자신에게 돌이켜 생각할 뿐[廻光返照] 나의 말을 기억하지 말라.
      그대들은 한량없는 옛날부터
      밝음을 등지고 어둠 속에 들어가 망상의 뿌리가 깊어짐으로써
      끝내는 (번뇌를) 단박에 뽑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임시로 방편을 베풀어 그대들의 거친 업식(業識)을 제거하고자 한다.
      이는 마치 누런 나뭇잎을 가지고 어린아이의 울음을 달래는 것과 같고,
      꿀과자를 가지고 쓴 외와 바꾸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옛사람은 짐짓 방편을 베풀어 사람을 지도하지만
      (어린아이가) 울음을 멈추면 누런 나뭇잎이 결코 황금이 아닌 것과 같다.
      세존께서 일대시교를 설하신 것도 어린아이의 울음을 달래는 말씀일 뿐이다.

      “요, 여우야!”라고 말한 것도 그의 업식을 바꾸려 한 것뿐이다.
      이 말에는 권(權)·실(實)이 있으며 조(照)·용(用)이 있으니
      납승의 본분소식을 알 수 있다.
      이를 안다면 마치 호랑이에게 날개가 돋친 격이다.

      “조계의 물결이 이와 같다”는 것은,
      만일 사방 팔면의 학자들이 그저 모두가 춤을 춘다면
      한량없는 괜한 사람들이 집착에 빠지게 될 것이니,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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