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碧巖錄

「벽암록(碧嚴錄)」 下 - 제91칙 염관의 무소뿔 부채(鹽官犀扇子)

경호... 2011. 10. 12. 00:31

원오(圜悟)스님께서 풍주(灃州)의 협산(夾山) 영천선원(靈泉禪院)에 주석하시면서
설두 중현(雪竇重顯)스님의 송고(頌古)에 대하여 평창한 말씀의 핵심.


    벽암록 下

       제91칙 염관의 무소뿔 부채(鹽官犀扇子)

      [垂示]
      垂示云. 超情離見. 去縛解粘. 提起向上宗乘. 扶豎正法眼藏. 也須十方齊應八面玲瓏.
      直到恁麽田地. 且道還有同得同證同死同生底麽. 試擧看.

      [수시]
      알음알이와 견해를 초월하여 끈끈한 집착의 결박을 풀어버리고
      향상의 종지를 일으키고 정법안장을 세우려면
      반드시 시방이 일제히 호응하고 팔방이 영롱하여야만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말해보라, 함께 도를 깨쳐 얻고 생사를 함께 할 수 있을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擧. 鹽官一日喚侍者, 與我將犀牛扇子來. 侍者云, 扇子破也,
      官云, 扇子旣破, 還我犀牛兒來, 侍者無對. 投子云, 不辭將出, 恐頭角不全.
      雪竇拈云, 我要不全底頭角. 石霜云, 若還和尙卽無也. 雪竇拈云, 犀牛兒猶在,
      資福一圓相, 於中書一牛字. 雪竇拈云, 適來爲什不將出.
      保福云, 和尙年尊, 別請人好. 雪竇拈云, 可惜勞而無功.

      거론하다.(擧.)
      염관 스님이 하루는 시자를 불러 말했다.
      “무소뿔 부채[犀牛扇]를 가져오너라.”(鹽官一日喚侍者, 與我將犀牛扇子來.)

      - 언어문자를 적잖이 늘어놓는군.
        ‘이것’과 비교해서 더 좋은 물건인가?

      “부채가 다 부서졌습니다.”(侍者云, 扇子破也,)
      - 애석하다. 좋은 물건이다. 무슨 말하느냐!

      “부채가 부서졌다면 나에게 무소를 되돌려다오.”(官云, 扇子旣破, 還我犀牛兒來,)
      - 허물이 적지 않군.
        북쪽 유주(幽州)는 그래도 괜찮은데 가장 괴로운 건 신라(新羅)이다.
        스님은 무소로써 무엇을 하시려구.

      시자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侍者無對.)
      - 과연 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구멍 없는 철추로군. 애석하다.

      투자(投子)스님은 말하였다.
      “사양치 않고 가져다 드리겠습니다만 뿔이 온전치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投子云, 不辭將出, 恐頭角不全.)

      - 비슷하기는 해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걸 어찌하랴.
        그래도 이러쿵저러쿵 했구나.

      설두스님은 이에 염(拈)하였다.
      “나는 온전치 못한 뿔을 필요로 한다.”(雪竇拈云, 我要不全底頭角.)

      - 무엇에다 쓰려는가?
        잘못을 가지고 점점 더 잘못에 나아간다.

      석상(石霜)스님은 말씀하셨다.
      “스님에게 되돌려줄 것은 없다.”(石霜云, 若還和尙卽無也.)

      - 무슨 말을 하느냐? 핵심을 찔렀구나.

      설두스님은 이를 염하셨다.
      “무소는 아직 그대로 있다.”(雪竇拈云, 犀牛兒猶在,)

      - “준험하군. 잘못 알고 말았네.
        머리를 거둬가거라.”

      자복(資福)스님은 일원상(一圓相)을 그리고서 그 가운데 소 우(牛)자 한자를 썼다.
      (資福一圓相, 於中書一牛字.)

      - 초고를 수고로이 들춰내지 말라. 그림자나 회롱하는 놈!

      설두스님은 이를 염하셨다.
      “조금 전엔 무엇 때문에 가지고 나오지 않았느냐?”(雪竇拈云, 適來爲什不將出.)

      - 금인지 놋쇠인지도 알지 못하니 이 또한 (번뇌의) 풀 속에 있는 놈이다.

      보복(保福)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스님께서는 춘추 높으시니 따로이 사람에게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保福云, 和尙年尊, 別請人好.)

      - 후미진 곳에서 관리를 욕하는구나.
        신랄하게 욕해서 뭘 하겠다는 거냐.

      설두스님은 이를 염하셨다.
      “고생을 했지만 공로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雪竇拈云, 可惜勞而無功.)

      - 이 말을 한 설두슨님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서른 방망이를 먹여라. 분명하다.

      [평창]
      염관스님이 하루는 시자를 불러 “무소뿔 부채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이 일’은 언구상에 있지는 않으나, 사람의 평소의 생각과 행동거지를 시험하려면
      또한 반드시 이 같은 말을 빌려 나타내야 한다.

      섣달 그믐(죽는 날)에 이르러 힘을 얻고 주인공 노릇을 하면
      갖가지 경계에 부딪쳐도[摐]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작용이 없는 작용이며 힘이 없는 힘이라 한다.

      염관스님은 바로 제안(齊安)선사이다.
      예전에 무소의 뿔로 부채를 만들었는데,
      당시 염관은 무소뿔의 부채가 부서져버린 지를 모를 턱이 없었다.
      고의로 시자에게 물었던 것인데 시자는 “부채가 부서져버렸다”고 말하였다.
      저 옛분들을 보면 하루 종일 항상 자기의 본분에 관계시켰던 것이다.

      염관스님께서는 “부채가 부서졌다면 나에게 무소를 되돌려다오”라고 말하였는데
      말해보라, 그는 무소를 가지고 무얼 하려고 했던가를.
      그저 상대가 귀착점을 알고 있는가를 시험하려고 한 것일까?

      투자스님이 “사양치 않고 가져다 드리겠습니다만
      뿔이 온전치 못할까 염려스럽다”고 말하자,
      설두스님은 “나는 온전치 못한 뿔을 필요로 한다”고 하셨다.
      이 또한 언구에서 당면한 문제의 핵심에 바로 투합된 것이다.
      석상스님이 “스님에게 되돌려줄 것은 없다”고 하자,
      설두스님께서“무소는 그대로 있지”라고 하셨다.

      자복스님이 일원상을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의 소 우(牛)자를 쓴 것은,
      그는 앙산의 법을 계승한 자로서
      평소 주위의 사물을 예로 들어 사람을 제접하면서
      ‘이 일’을 밝히기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설두스님은 이에 대하여
      “조금 전엔 무엇 때문에 가지고 나오질 않았더냐”라고 말씀하셨다.
      이 또한 그(자복스님)의 콧구멍을 뚫어버린 것이라 하겠다.

      보복스님은 “스님께서도 춘추가 높으시니
      따로이 이 사람에게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온당하다 할 수 있다.
      앞의 세 스님(투자·석상·자복)의 말은 이해하기 쉽지만
      이 한 구절은 깊은 뜻이 있었다.
      그러나 설두스님은 이것도 타파해버렸다.

      산승은 지난날 경장주(慶藏主)의 처소에 있으면서
      이를 이해하고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님께서 춘추 높으시고 늙으시어 처음은 기억하시나 끝은 잊어버리신다.
      조금 전에 부채를 찾다가 이제 무소를 찾으니,
      시봉하기가 퍽이나 어렵다.
      그러므로 따로이 사람에게 청하는 것이 좋겠다.”
      한편, 설두스님은 “고생은 했지만 공로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셨다.

      이 모두가 하어(下語 : 설명) 하는 격식들이다.
      옛사람은 이 일을 사무치게 보았으므로 비록 각자의 말들이 똑같지는 않지만,
      말을 했다 하면 백발백중하여 반드시 몸을 벗어날 길이 있었으며
      구절마다 혈맥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은 물었다 하면 그저 이러쿵저러쿵 계교를 지을 뿐이다.
      이 때문에 하루 종일 언구를 되씹으면서 끊임없이 증오처(證悟處)를 구하려고 한다.


      [송]
      犀牛扇子用多時. 問著元來總不知. 無限淸風與頭角. 盡同雲雨去難追.
      雪竇復云. 若要淸風再復. 頭角重生. 請禪客各下一轉語.
      問云. 扇子旣破. 還我犀牛兒來. 時有僧出云. 大衆參堂去.
      雪竇喝云. 抛鉤釣鯤鯨. 釣得箇蝦蟆. 便下座.

      무소뿔 부채를 오랜 동안 써왔건만(犀牛扇子用多時.)

      - 여름이 되면 시원하게 해주고 겨울이 되면 따뜻하게 해준다.
        사람마다 이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어째서 모르는 것일까?
        어느 누가 일찍이 사용하지 않았으랴.

      물으면 의외로 아무도 모르네.(問著元來總不知.)
      - 알기는 알았으나 깨치지는 못하였다.
        사람을 속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남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한한 맑은 바람과 뿔이(無限淸風與頭角.)
      - 어느 곳에 있느냐?
        자기 분상에서 이해하지 않고 어느 곳에서 이해하려 하느냐.
        천성천하(모두가 무소뿔 부채)이다.
        뿔이 다시 돋아났다.
        이는 무엇일까.
        바람도 없는데 파랑을 일으켰다.

      구름과 비와 똑같이 뒤쫓기 어려워라.(盡同雲雨去難追.)
      - 아이고, 아이고! 돈 잃고 벌까지 받는군.

      설두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맑은 바람 다시 되돌리고 뿔을 다시 돋아나게 하려거든(雪竇復云. 若要淸風再復. 頭角重生.)

      - 사람마다 무소뿔 부채를 가지고서 하루 종일 모두 그 힘을 받고 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물으면 모두가 모르는 것일까?
        말할 수 있겠느냐.

      선객(禪客)들이여, 각각 휙 뒤집어놓는 한마디를 해보라."(請禪客各下一轉語.)
      - 그래도 염관스님이 있었군. 세 번 뒤집어 놓았구나.

      다시 말했다.
      “부채가 부서졌다면 무소를 되돌려다오.”(問云. 扇子旣破. 還我犀牛兒來.)

      -이 말할 사람 한 명은 커녕 반 명도 없다. 쯧쯧! 선상을 뒤엎었더라면 좋았을걸.

      이때에 어떤 스님이 나오면서 말하였다.
      “대중들아, 좌선하러 가자.”(時有僧出云. 大衆參堂去.)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겼군. 창을 빼앗겨버렸으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구나.

      설두스님이 일갈(一喝) 한 후
      “낚시를 던져 고래를 낚으려 했더니,
      겨우 새우를 낚을 줄이야”라는 말을 마치고 문득 법좌에서 내려와 버렸다.
      (雪竇喝云. 抛鉤釣鯤鯨. 釣得箇蝦蟆. 便下座.)

      - 그(설두스님)가 이 같은 꼴을 불러들인 것이다.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긴다.
        불과(佛果)스님은 스스로 이 말에 대해 묻고 말하였다.
        “또 여러분에게 묻겠노니, 이 스님이 ‘대중들아, 좌선하러 가자’고 말하였는데
        설두스님의 말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몰랐다면 어떻게 이처럼 말할 줄 알았겠는가?”
        알았다면 설두스님은 다시 “낚시를 던져 고래를 낚으려 했더니
        겨우 새우를 낚을 줄이야”하고 문득 법좌에서 내려와 버렸는데
        말해보라, 어렵게 꼬인 곳이 어디에 있는가를.
        자세히 참구하고 살펴보라.

      [평창]
      “무소뿔 부채를 오랜 동안 써왔는데도 물으면 의외로 아무도 모른다”는 것은
      사람마다 무소뿔 부채를 지니고 하루 종일 모두 그의 힘을 받고 있으면서도
      왜 묻기만 하면 모두가 모르는 것일까라는 것이다.
      시자스님, 투자스님, 나아가서는 보복스님까지 모두가 몰랐었다.
      말해보라, 설두스님은 알았을까?

      듣지도 못하였느냐? 무착(無著)스님이 문수보살을 예방하여 차를 마실 무렵
      문수가 파리(玻璃) 찻잔을 들고서 말했던 것을.
      “남방에도 이런 게 있느냐.”
      “없습니다.”
      “평소에 무얼 가지고 차를 마시지?”
      그러자 무착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 공안의 귀결점을 알 수 있다면
      무소뿔 부채에 한량없는 맑은 바람이 담겨 있고
      무소의 뿔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것도 보게 될 것이다.
      네 늙은이가 이처럼 말한 것은 마치 아침에 피어오르는 구름과
      저녁에 내리는 비처럼 한 차례 스쳐 가버리면
      다시 쫓기 어려운 것과 같다.

      설두스님께서 다시 “맑은 바람 다시 되돌리고, 뿔을 다시 돋아나게 하려면,
      선객들이여, 각각 휙 뒤집어놓는 한마디를 해보시오”라고 말한 뒤에
      “부채가 부서졌다면 무소를 되돌려다오”라고 하자
      그때 한 선객이 나오면서 말하였다.
      “대중들아, 좌선하러 가자.”

      이 스님은 주인의 권한[權汭]을 빼앗아 말하기는 대뜸 말했지만
      열 중에 여덟만 말했을 뿐이다.
      온전히 말하려 한다면 곧 선상을 번쩍 들어 뒤덮어버렸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말해보라, 이 스님은 무소를 알았을까, 몰랐을까?
      몰랐다면 이처럼 말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알았다면 설두스님은 무엇 때문에 그를 긍정하지 않고서,
      “낚시를 던져 고래를 낚으려 했더니
      겨우 새우를 낚을 줄이야”라고 말하였겠는가?

      말해보라, 결국 이 무엇일까?
      여러분은 무심하게 (설두스님이 말한 것을) 참구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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