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般若心經

반야심경강의 (정명스님)

경호... 2011. 8. 27. 20:13

반야심경 강의

시작하면서

불교경전 중에서 최고의 걸작을 꼽으라 하면 대부분 불자들은 주저함 없이 “반야심경‘을 꼽을 것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걸작 몇 편을 꼽으라 해도 반야심경은 꼭 포함되리라 생각한다.
간단 명료 하면서도 물질계와 인간의 의식구조를 반야심경만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불자들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불교를 제대로 알리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반야심경이 많은 경전들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35년 전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감동으로 흥분되어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게 했던 반야심경이다. 그 감동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한 감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반야심경을 좀더 알기 쉽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덧붙여 보았다. 군말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진리의 화살이 과녁을 꿰뚫기를 바라면서, 진정 자비광명이 충만한 21세기이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이생에서 불법 만난 인연의 지중함을 인식하기를 기원하면서.

진정 중요한 것은
밑도 끝도 없이
자신에게로 빠져드는 일

자비 또한
그 속에서 조용히 익어가는
조그마한 여울

지혜 또한
그 속에서 면밀히 깨어 있는
최상의 편안..


정명합장




반야심경 강의



@반야심경의 구조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 반야심경의 결론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공의 원리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 공의 모습(현상)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 오온개공
무안이비설신의 -------- 육근공 ---
무색성향미촉법 -------- 육진공 --------------------------- 십팔계공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 육식공 ---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 십이인연공
무고집멸도 ---------------------------------------------- 사성제공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 육바라밀공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 지혜의 능력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 성문의 성취
시대명주 --------------------------------- 연각의 성취
시무상주 --------------------------------- 보살의 성취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 부처의 증명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 지혜의 주문



@ 우리말 반야심경

1. “가장 뛰어난 지혜의 완성을 이루는 데 핵심되는 말씀” 또는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부처님의 핵심되는 말씀”

2. 관자재보살이 지혜의 완성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선정삼매에 들어 있을 때 존재의 실상인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느니라.

3. 사리자여, 물질(육신)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아서 물질이 곧 공이며 공이 바로 물질이다. 감수작용과 표상작용과 결합생성작용과 분별작용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4. 사리자여,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생기는 것도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라.

5. 그러므로 공한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감수작용도 없고 표상작용도 없고 결합생성작용도 없고 분별작용(오온)도 없으며,
눈 귀 코 혀 몸 뜻(육근)도 없으며,
형상 소리 냄새 맛 접촉 생각(육진)도 없으며,
눈으로 보는 세계, 귀로 듣는 세계, 코로 냄새맡는 세계, 혀로 맛을 느끼는 세계,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세계, 뜻으로 생각을 일으키는 세계(육식경계)도 없느니라.

6. 또한 무명도 없으며 무명의 다함인 지혜도 없으며 그리고 노사도 없으며 노사의 다함인 열반(십이연기)도 없으며,

7. 고와 고의 원인인 집과 고가 해결된 멸과 멸에 이르는 실천 방법인 도(사성제)도 없으며,

8. 지혜(육바라밀)도 없으며 지혜을 실천함으로써 주어지는 공덕의 얻음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원래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9. 보살은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또한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뒤바뀐 망상을 여의게 되고,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였느니라.

10. 그러므로 이 “지혜의 완성”에 이르는 주문은 크게 신비로운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동등함이 없는 주문이어서,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이제 “지혜의 완성”에 이르는 주문을 설하노니 다음과 같느니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1.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가장 뛰어난 ‘지혜의 완성’을 이루는 데 핵심되는 말씀” 또는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부처님의 핵심되는 말씀”

(해설) 마하(Maha)는 크다, 많다, 뛰어나다는 뜻이며, 반야(Prajna)는 지혜를 뜻한다. 반야는 크게 실상반야, 관조반야, 방편반야의 3가지가 있다. 실상반야는 지혜를 터득했을 때 나에게 비치는 제법의 실상, 즉 진리 자체인 법신을 말하며, 관조반야는 지혜를 터득한 상태에서 어떤 현상을 깊이 관찰하는 것으로 보신을 가리키며, 방편반야는 터득한 지혜를 현실에 적용시켜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는 구체적인 지혜로 화신을 나타낸다.
바라밀다(Paramita)는 저 언덕에 이른다는 도피안의 뜻이다. 이 언덕은 고통과 번뇌가 가득한 중생세계를 상징하며, 저 언덕은 지혜와 광명이 가득한 부처의 세계를 상징한다.
심은 마음 심(心)으로 심장, 핵심을 나타내며, 경은 경서 경(經)으로 진리의 말씀, 부처님의 말씀을 뜻한다.
그러므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은 “가장 뛰어난 ‘지혜의 완성'을 이루는 데 핵심되는 말씀”이며, 또는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부처님의 핵심되는 말씀”이다.



2.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지혜의 완성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선정삼매에 들어 있을 때 존재의 실상인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느니라.

(해설) 관자재(Ava rokite svara)는 관세음의 다른 이름이다. 세상의 중생들을 고통에서 구제할 때는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나타내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갈 때는 관자재보살의 모습을 나타낸다. 말 뜻대로 스스로 혹은 원래 존재하는 것을 관찰 관조하는 보살이니 항상 진리의 세계를 꿰뚫어 보는 보살이다.
보살(Bodhi sattva)은 위로는 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가장 이상적인 수행자 상이다. 우리 중생들은 60% 정도 자신이 잘 했으면 자신이 맞다고 우기는 것이 중생심이고, 10% 정도 자신이 잘 했으면서도 자신이 잘 했다고 고집피우는 것은 지옥중생의 마음이고, 99% 자신이 잘 했으면서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 일이 일어났다고 미안해 하는 것이 보살의 마음이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는 말 그대로 해석하면 행할 행(行), 깊을 심(深)이므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이다. 이 부분이 반야심경에서 가장 핵심되는 부분이며, 결국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반야심경의 결론이며, 나머지 부분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나나타는 현상을 설명한 것이다. 반야는 지혜이며, 바라밀다는 도피안으로 저 언덕을 건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지혜를 체득하여 고통의 세계를 넘어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것을 뜻하므로 “지혜의 완성”이라 한다.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는 “지혜의 완성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선정삼매에 들어 있을 때”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 때마다 독송하고 있는 반야심경의 골수는 지혜의 완성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선정삼매에서 살자는 것이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은 비출 조(照) 볼 견(見) 다 개(皆)이므로 오온을 비추어 보니 모두 공하다는 뜻이며, 건널 도(度)이므로 일체 모든 고액을 건너다는 뜻이다. 선정삼매에 들어 존재의 실상인 오온(다섯 가지 쌓임)을 살펴보니 모두 다 공함을 비추어 보고 존재의 실상인 “공”을 인식하는 순간 모든 것이 “고” 임을 인식하고 일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음을 설파하고 있다. 오온은 다섯가지 쌓임으로 색수상행식을 나타낸다.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무생물까지 포함)는 육신과 정신으로 나누어진다. 이 때 육신을 이루는 부분이 물질 즉 색이며, 정신을 이루는 부분이 수상행식이다. 색은 수상행식이 살고있는 집이며 집에는 창문이 사방 네곳에 나 있다. 동쪽 창문에는 눈(眼)이 달려 있고, 서쪽 창문에는 귀(耳)가 달려 있고, 남쪽 창문에는 코(鼻)가 달려 있고, 북쪽 창문에는 혀(舌)가 달려 있어 사방을 감시하고 살피고 있으며, 집체는 몸체(身)에 해당하며, 집 내부에 들어 있는 뜻(意)은 집체와 네 곳의 창문을 통하여 나타내진다. 정신작용인 수상행식에서 수는 눈귀코혀몸으로 받아들인 것을 인식하는 감수작용이며, 상은 감수작용을 통하여 인식된 것을 형상화하는 표상작용이며, 행은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생성작용과 상의 작용과 식의 작용을 유지시키려는 결합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행은 생성결합작용이며, 식은 모든 의식을 통합하고 판단하는 분별작용을 한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은 색수상행식이 공하다는 것이다. 색 즉 물질은 모두 제법무아이고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공한 것이며, 또한 수상행식인 정신작용도 물질과 형상을 통하여 형성되는 인식작용이기 때문에 제법무이이고 제행무상이다. 그러므로 수상행식도 공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제법무아이고 제행무상인 것을 바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것이 고임을 알았으며, 고임을 알았기 때문에 고에서 벗어나 열반, 해탈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광명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이 반야심경 내용의 전부이며 핵심이다.



3.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물질(육신)이 공과 다르지 않고(제행무상)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아서 물질이 곧 공이며(제법무아) 공이 바로 물질이다. 감수작용과 표상작용과 결합생성작용과 분별작용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해설) 사리자는 사리불이며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에서 제혜 제일인 제자이다. 관자재보살이 지혜가 제일 뛰어난 사리불을 대상으로 법의 공한 원리인 “공 도리”를 법문하고 있다.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아서 물질이 곧 공이라는 것이다.
결국 물질과 공은 같은 것이다. 지, 수, 화, 풍으로 이루어진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단지 인연의 모임에 의하여 생겨 형상을 이루고 행위를 하며 업을 축적하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 공으로 돌아가게(제행무상) 된다. 그러므로 생노병사는 어떤 주체가 있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제법무아) 인연의 작용에 의하여 모였다가 주하다가 흩어지는 과정일 뿐이다. 형상으로 보는 인연의 모임과 다시 공으로 돌아가는 인연의 흩어짐은 단지 관계의 작용(연기)일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물체들도 성주괴공을 한다. 우주에 흩어져 있는 성간 물질들이 인연의 모임으로 별이나 천체등의 형상을 이루었다가(성) 성장하며 씩씩하게 활동하다가(주) 늙어 파괴가 되어(괴) 인연이 흩어지면 없어진다(공).
상대성이론에서 아인시타인이 밝힌 “질량 에너지 등가원리”는 질량이 곧 에너지라는 것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과학적으로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형체를 가지고 있는 질량이 곧 형체가 없는 에너지와 같다는 것이다. 수소원자가 결합하여 헬륨이 될 때 질량이 결손되는 질량이 E(에너지) = m(질량) x c2(광속) 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를 방출하여 원자폭탄이 된다. 2차 세계대전 때 히로시마에 투하된 성냥갑만한 원자폭탄이 히로시마를 재로 만들었다.
오늘날 전자의 회절은 용어상 명백히 모순이지만 일반적인 현상이다. 전자 다발이 아주 적게 열린 금속의 틈 사이를 지나갈 때 전자 다발은 빛이 회절하는 방식으로 정확하게 회절한다.
미세한 입자들인 원자나 분자 아원자들이 어떻게 운동하고 작용하는지 현대과학의 최첨단인 양자역학에서도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이론은 프랑크와 드 브로이의 연구 업적의 합작이다. 드 브로이는 입자가 파동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음을 밝혔고(색즉시공), 프랑크는 파동(공)이 입자(색)와 같은 특성을 갖고 있음을 밝혔다.

왜 물질이 공이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우리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직접 설하신 아함부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육신과 정신에는 다섯가지 쌓임이 있다. 색의 쌓임과 수상행식의 쌓임이다. 무엇을 색의 쌓임이라 하는가? 모든 색으로써 그 일체는 다섯가지 요소(흙, 물, 불, 바람, 공)와 그 다섯가지 요소로 된 색이니, 이것을 색의 쌓임이라 한다. 이 색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니, 이 색의 쌓임을 영원히 끊어 남음이 없으며, 끝까지 버리어 떠나고 멸해 다하며, 욕심을 떠나 완전히 고요해지면 다른 색의 쌓임은 계속되지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않고 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일체의 남음이 있는 애정이 다하고 욕심이 없어지고 번뇌가 다 멸하여 열반을 얻는 것이다."
이 부분은 부처님께서 깨치신 연기의 도리를 명쾌하게 나타내고 있다. 색불이공은 시간적 연기인 “제행무상”을 말하며, 색즉시공은 공간적 연기인 “제법무아”를 말하고 있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 색은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다. 그러므로 색을 통하여 인식된 감수작용이나 표상작용이나 결합생성작용이나 분별작용도 색과 같이 “수불이공 공불이수 수즉시공 공즉시수”이므로 모두 “공”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을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색불이공 공불이색..... 처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불이공 공불이수 수즉시공 공즉시수
상불이공 공불이상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불이공 공불이행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불이공 공불이식 식즉시공 공즉시식

결국 물질이나 물질작용이나 정신이나 정신작용이나 모두 공이다. 이 도리만 알면 우리는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와 진다.




4.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시고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是故
사리자여,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생기는 것도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라.

(해설) 관자재보살은 사리자에게 법의 공한 원리를 설명하고 이어서 법의 공한 모양을 설명하고 있다. 날 생(生) 멸할 멸(滅)이므로, 존재의 본질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없던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생멸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들의 분별심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관계로 보지 못하고 존재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의 정신작용은 소유- 존재- 관계(연기)로 성숙해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에는 내 것이다는 소유로 생각하다가, 의식이 조금 성숙되면 서로를 존재로 인식하여 조금 자유로워지며, 자신의 영역을 갖기 시작한다. 서로의 존재와 감정을 연기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삶과 죽음까지도 자유로와 지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물에 열을 가하여 온도가 100도가 넘으면 수증기가 되고 온도를 0도 이하로 낮추면 얼음이 된다. 수증기와 얼음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의 조건이 달라지면서 관계의 변화에 의하여 생겨난 것일 뿐이다. 부처와 중생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없던 부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중생심 속에는 불심도 똑같이 들어있던 것이 수행과 참선을 통하여 지혜심과 자비심이 성숙하게 되고 이렇게 조건이 달라지면서 관계의 변화가 오는 것이다. 지혜심과 자비심이 100%로 될 때 그 때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부터 부처인 것이다.
사리자여, 더러울 구(垢) 맑을 정(淨)이므로, 원래 더럽고 깨끗한 것도 있는 것이 아니며,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며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다. 깨끗하고 흰 솜에 깨끗한 물이 스며들면 깨끗하게 보이고 더러운 흑탕물이 스며들면 더럽게 보이지만 솜 자체는 더럽고 깨끗함이 없는 것이다. 똑같은 떡이라도 초상집에서 나온 떡은 더러워 보이고 절에서 나온 덕은 복덕이 있어 보이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원래 더럽고 깨끗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지워짐에 따라 우리들의 분별심을 통하여 깨끗하게도 보이고 더럽게도 보일 뿐이다.
사리자여, 더할 증(增) 들 감(減)이므로, 존재의 본질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여름에 날씨가 더워 바다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된다. 이때 바다물은 줄어든 것같이 보이지만 구름으로 변한 양을 더하면 줄어듬이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조건의 변화에 의해 상태의 이동, 변화가 일어날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는 것이다.



5.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그러므로 공한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감수작용도 없고 표상작용도 없고 결합생성작용도 없고 분별작용(오온)도 없으며,
눈 귀 코 혀 몸 뜻(육근)도 없으며,
형상 소리 냄새 맛 접촉 생각(육진)도 없으며,
눈으로 보는 세계, 귀로 듣는 세계, 코로 냄새맡는 세계, 혀로 맛을 느끼는 세계,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세계, 뜻으로 생각을 일으키는 세계(육식경계)도 없느니라.

(해설) 오온(五蘊)의 온은 쌓을 온(蘊)으로 ‘흩어진 것을 한 곳에 합쳐놓다’라는 뜻이다. 현대적인 용어로는 ‘요소’라는 뜻으로 오음(五陰)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구조는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색수상행식을 한 곳에 합쳐 쌓아 놓은 것이다. 인간은 육신과 정신으로 나눌 수 있고, 육신은 색이라는 요소로 이루어졌으며, 정신은 수, 상, 행, 식이라는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색은 육신을 가리키며, 육신은 흙, 물, 불, 바람, 공의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흙은 뼈, 손톱, 근육 등 육체의 딱딱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고체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물은 침, 혈액, 오줌 등 육체 중에서 액체로 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유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불은 체온과 같은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바람은 육체 중에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려고 하는 움직이는 성질을 이루고 있다. 공은 이 네 가지 요소가 인연의 결합에 의하여 있기도 하고 인연의 소멸에 의하여 없기도 한 것을 의미한다.
수는 모든 감수작용으로 생기는 감정을 말한다. 그림에서 보듯이 눈(眼)을 통하여 들어오는 대상이 식(識)과 결합하여 안식이 발생하여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느낀다. 귀(耳)를 통하여 들어오는 소리가 식(識)과 결합하여 이식이 발생하여 듣기 좋은 소리와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다. 코(鼻)를 통하여 들어오는 냄새가 식(識)과 결합하여 비식이 발생하여 향기로운 냄새와 역겨운 냄새를 맡는다. 혀(舌)를 통하여 들어오는 대상이 식(識)과 결합하여 설식이 발생하여 맛 좋음과 맛 없음을 느낀다. 몸(身)을 통하여 들어오는 촉감이 식과 결합하여 신식이 발생하여 쾌감과 불쾌감을 느낀다. 뜻(意)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식이 식(識)과 결합하여 의식이 발생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낀다. 이 모든 감각작용을 통틀어 수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는 감수작용이며, 포괄적으로 말하면 괴로운 감정, 즐거운 감정,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감정으로 나눌 수 있다.
상(想)은 개념과 표상을 만드는 작용과 만들어진 표상을 말한다.
눈(眼)을 통하여 들어오는 대상이 식(識)과 결합하여 안식이 발생하여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느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귀(耳)를 통하여 들어오는 소리가 식(識)과 결합하여 이식이 발생하여 듣기 좋은 소리와 듣기 싫은 소리를 들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코(鼻)를 통하여 들어오는 냄새가 식(識)과 결합하여 비식이 발생하여 향기로운 냄새와 역겨운 냄새를 맡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혀(舌)를 통하여 들어오는 대상이 식(識)과 결합하여 설식이 발생하여 맛 좋음과 맛 없음을 느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몸(身)을 통하여 들어오는 촉감이 식과 결합하여 신식이 발생하여 쾌감과 불쾌감을 느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뜻(意)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식이 식(識)과 결합하여 의식이 발생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며, 이것이 일정한 형태로 저장되어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염(念)하게 하며, 일정한 모양의 형상으로 저장된다. 이와 같이 대상의 성질을 인식하고 그 대상의 구체적인 형상을 인식하는 정신기능과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신현상을 통틀어 상이라 한다. 그러므로 상은 표상작용이다.
행(行)은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일반적인 사고작용이며, 또한 상의 작용과 식의 작용을 유지시키려는 결합작용을 한다. 구체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상의 작용을 지속시키며, 아울러 식의 작용을 귾임없이 활성화시킨다. 정신작용 중에서 표상작용과 분별작용 이외에는 모두 행의 작용에 속한다. 이 행이 원인이 되어 선악의 행위를 하게 되어 업을 짓게 된다. 그러므로 이 행은 결합 생성작용이다.
식(識)은 일반적으로 분별능력이나 판단능력이나 인식능력을 말한다. 상의 작용에 의하여 형상화되어 저장되어 있는 것이 식의 작용에 의하여 분별되고 판단되어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책을 통하여 참선이라는 내용을 읽었을 때 상의 작용에 의하여 다리는 결가부좌 하고 손은 단전에 가볍게 대고 있는 참선하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저장되어 있다가 부모의 죽음을 접하게 되었을 때 ‘나도 이렇게 죽을 수 밖에 없구나. 안되겠다. 참선을 해야 되겠구나.’ 하는 결심을 하게 되는 분별과 판단의 결정작용을 식이라 하며, 식의 작용에 의하여 생각이 결정되면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식은 분별작용이다.
인간은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순간적으로 결합되어 이루어져 있는 집합체라는 것이 오온설이다. 잡아함경에서는 “마치 여러 가지 재목을 한데 모아 수레라 이름하는 것처럼 이 오음이 모인 것을 중생이라 한다.”라고 비유하고 있다. 바퀴, 차체, 굴대 등 여러 요소가 모여 수레가 되는 것처럼 오음이 모여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 요소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있을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서로 관계 지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색수상행식의 다섯 요소가 모일 때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기관과 그것에 상응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의식이 형성된다. 눈은 형상을 만남으로써, 귀는 소리를 만남으로써, 코는 냄새를 만남으로써, 혀는 미각을 만남으로써, 몸은 접촉을 만남으로써, 뜻은 생각을 만남으로써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의 여러 가지 정신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수성유경에서는 “비유하면 두 손이 화합하여 서로 마주쳐 소리를 내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눈과 형상이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색수상행식에 대하여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길을 가다가 길가에 피어 있는 무궁화 꽃을 보았다고 하자. 눈을 통하여 꽃을 보는 순간 안식이 생기며, 꽃에 붙어있는 벌의 윙윙거리는 날개 짓 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식이 생기며, 향기로운 꽃 내음을 느끼는 순간 비식이 생기며, 어릴 때 무궁화 꽃을 만져보며 따서 맛 본 기억이 스치면서 설식과 신식이 생기며, 이 오식을 통합하여 의식이 생긴다.(색의 작용)
이 육식을 통하여 무궁화 꽃에 대한 느낌인 감수작용이 생긴다. 눈을 통하여 무궁화 꽃이 아름답다고 느끼며, 귀를 통하여 꽃 주위를 맴돌고 있는 벌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정겹게 느껴지며, 코를 통하여 향기로운 꽃 냄새를 느끼며, 혀를 통하여 쌉살한 꽃 맛을 느끼며, 몸을 통하여 부드러운 꽃잎을 느끼며, 뜻을 통하여 무궁화 꽃에 얽힌 추억을 느낀다. 한국 사람은 나라의 상징인 무궁화 꽃을 보는 순간 진한 감동을 느끼지만, 외국 사람이라면 산 속에서 무궁화 꽃을 보더라도 반갑지만 그냥 꽃으로 느낄 뿐일 것이다. 이러한 느낌을 통틀어 감수작용이라 한다.(수의 작용)
이러한 무궁화 꽃에 대한 감수작용을 통하여 기억 속에 무궁화 꽃이 형상화되는 것이 표상작용이다.(상의 작용)
행의 작용은 상의 작용에 의하여 형상화 되어 있는 무궁화 꽃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사고작용과 식의 작용에 의하여 결정이 일어나 판단이 이루어져 행위를 하는데 활성화 되도록 하는 결정작용을 한다. 행위를 하여 업을 짓게 되는 구체적인 의식작용이 이 단계에서 이루어진다.(행의 작용)
꽃을 꺾어서는 안 된다라는 판단이나 꽃을 더 크게 개량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분별작용이다.(식의 작용)
그런데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 각 요소들을 깊이 관조해 보면 어떤 것도 실체가 없다. 단지 서로의 인연 조건에 의하여 생성되었다가 소멸할 뿐이다. 실제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실체가 없다. 이러한 상태를 무아(無我)라 하며 깊은 성찰을 통하여 무아임을 인식함으로써 세상의 욕망이나 부귀영화나 모든 것에서 자유로와 지는 것이다.
오온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인식이 무아이며, 그러므로 오온의 흐름, 즉 오온의 움직임에 의해서 인식되는 모든 것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한 가운데서 오온을 바라보면 바로 무아이며, 무상인 것이다.
이와같이 무아와 무상의 관점에서 볼 때 오온이 공하며, 오온의 색(色)에서 외부 현상을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창구인 육근(안이비설신의)도 공하며, 육근의 대상인 육진(색성향미촉법)도 공하며, 육근이 육진을 만나 나타나는 육식경계(안계, 이계, 비계, 설계, 신계, 의식계)도 모두 공함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모든 인식이 생기기 이전의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무념(無念)이며, 이 무념의 상태가 지속되면 줄탁동시가 되는 어떤 한 순간에 “지혜의 완성”이 성취되어 무명의 벽을 무너뜨리고 견성성불하게 된다.



6.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공한 가운데는 무명도 없으며 무명의 다함인 지혜도 없으며 그리고 노사도 없으며 노사의 다함인 열반(십이연기)도 없으며,

(해설) 연기(Paticcasamuppada)란 재미있는 말이다. 그것은 말미암아(綠, Paticca, grounded on)라는 말과 일어나는 것(起, Samuppada, arising)이라는 말이 결합된 단어이며, 어떤 조건에 말미암은 발생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통해서 부처님께서 나타내고자 한 것은 그가 깨달은 존재의 법칙이었으므로 결국 연기란 부처님의 존재론을 말한다. 즉 긴긴 고행 끝에 보리수 밑에 앉아 “진지하게 사유한” 결과 일체의 존재는 모두 이 연기의 법칙에 의해서 성립되고 있음을 파악한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어짐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그 후 부처님께서는 계속 명상에 잠겨 생노병사가 생기게 되는 더 근원적인 요소가 무엇인가를 관조하여 ‘12연기’를 분명하게 밝혔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형성력이 생기고, 형성력으로 말미암아 재생의 식이 생기고, 재생의 식으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 생기고, 영혼과 육신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6식이 생기고, 6식으로 말미암아 접촉이 생기고, 접촉으로 말미암아 느낌이 생기고, 느낌으로 말미암아 갈애가 생기고, 갈애로 말미암아 집착이 생기고, 집착으로 말미암아 업의 생성력이 생기고, 업의 생성력으로 말미암아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노병사가 있다. 12연기의 시작인 무명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하였다. 무명이 무엇인지 모르고는 천년을 절에 다녀도 불교를 알 수가 없다. 이것을 알기쉽게 그려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왜 늙고 죽음이 있는가? 태어남 때문에
왜 태어나는가? 업의 생성력 때문에
업의 생성력은 왜 생기는가? 집착 때문에
집착은 왜 생기는가? 갈애(애욕) 때문에
갈애는 왜 생기는가? 느낌이 있기 때문에
느낌은 왜 생기는가? 접촉 때문에
접촉은 왜 생기는가? 6식(눈귀코혀몸뜻)이 있기 때문에
6식은 왜 생기는가? 영혼과 육체의 결합 때문에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왜 생기는가? 재생의 식 때문에
재생의 식은 왜 생기는가? 모든 행위는 형성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형성력은 왜 생기는가? 무명 때문에

12연기를 역으로 무명으로부터 관조해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무명에 의해서 형성력이 생기고
형성력에 의해서 재생의 식이 생기고
재생의 식에 의해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생기고
영혼과 육체의 결합에 의해서 6식이 생기고
6식에 의해서 접촉이 생기고
접촉에 의해서 느낌이 생기고
느낌에 의해서 갈애가 생기고
갈애에 의해서 집착이 생기고
집착에 의해서 생성력이 생기고
생성력에 의해서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에 의해서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다.

12연기는 전생의 과(果)가 현생의 인(因)이 되고, 현생의 과(果)가 내생의 인(因)이 되어 끝없이 윤회하게 된다. 도식화해면 다음과 같다.

우리 인간 존재의 생주이멸이 그렇고 우주의 존재법칙 성주괴공이 바로 이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에서부터 무생물까지 모두 이 연기법을 따르고 있다. 연기를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면 인과응보가 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나, 뿌린대로 거둔다는 속담은 모두 연기법을 표현하고 있다.
‘불교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지식이 없는 사랑으로 중세 전역을 흑사병으로 몰고 간 것이나, 사랑이 없는 지식으로 전쟁은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수행은 미혹으로 몰고갈 것이며, 수행이 없는 삶은 우리를 지옥으로 몰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12 연기의 처음인 무명에 의하여 결국에는 삶과 죽음이 있게 되며, 이 무명이 해결된 상태가 연기인 것이다. 즉 우주 삼라만상의 존재 관계는 무명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불교란 “무명과 연기”의 끊임없는 반복 성찰 확산으로 구체화 되어지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이며, 나와 남과의 관계인 것이다.
불자는 부처님과 같이 견성성불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과응보를 철저하게 믿으며 오계를 지키면서 진지하게 수행하여 우리의 가슴 깊숙히 흐르고 있는 욕심 내는 마음과 성 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의 줄기인 중류의 물줄기를 끊어버릴 때 모든 집착과 분별심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수행에 의하여 집착을 없애가는 방법으로 수행하여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와지며 나아가 생사의 문제가 해결되고 결국에는 스스로 화두를 들게 되며 화두를 들게 되어 무명을 타파하고 견성성불하여 부처를 이루게 된다.
선불교에서 참선으로 성취되는 견성성불은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부처란 무엇인가?’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하는 ‘이뭣고?’의 화두에 목숨을 걸고 몰두함으로써 근본 무명을 타파하여 견성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7. 무고집멸도
無苦集滅道
공한 가운데는 고와 고의 원인인 집과 고가 해결된 멸과 멸에 이르는 실천 방법인 도(사성제)도 없으며,

(해설) 고의 상태에서 고가 해결된 편안한 상태에 이르는 실천 방법이 사성제이다. 고집멸도에서 고는 과제의 제시이며, 집은 고가 발생한 이유이다. 즉 왜 고가 생겼는지 근본 이유를 밝히는 것이며, 멸은 고가 극복된 상태이며, 도는 집을 소멸하여 멸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에서 연기에 이르는 실천 방법이 사성제인 것이다. 고, 집, 멸, 도 사성제는 다음과 같이 경전에 전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생은 고다. 노는 고다. 병은 고다. 죽음은 고다. 시름, 근심, 슬픔, 불행, 번민은 고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고다.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함은 고다. 뭉뚱그려 말한다면 인생의 양상은 ‘고’ 아닌 것이 없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은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후유를 일어나게 하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가 그것이다. 그것에 욕애와 유애와 무유애가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이 갈애를 남김없이 멸하고, 버리고, 떠나고, 벗어나서 아무 집착도 없는데 이르는 것이 그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성스러운 팔지의 도가 그것이니,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이니라.”

이 고집멸도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들이 불교적인 방법으로 살도록하고 수행하고 인식하게 하는 인식방법의 기본구조이기 때문에 수천번을 강조해도 괜찮다. 구체적으로 고집멸도를 실천하고 인식하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예1) 붓다 : 고행을 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느냐?
비구 : 얻지 못했다.
붓다 : 무엇 때문에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느냐?
비구 : ?
붓다 :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 이유는 집착 때문이다.
비구 : 잘 모르겠다.
붓다 : 너의 마음의 상태를 잘 살펴보아라.
집착에는 세 가지가 있다. 탐심, 진심, 치심이 그것이다.
너의 마음은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우냐?
비구 : 아니다.
붓다 : 너의 마음은 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화내는 마음에서 자유로우냐?
비구 : 그렇지 않다.
붓다 : 너의 마음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느냐?
너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상황의 상태를 분명하게 꿰뚫어보고
있느냐?
비구 : 그렇지 못하다.
붓다 : 그렇기 때문에 고에서 벗어나 평안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는가?하는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근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이 “집”의 성제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살펴보자.
그렇게 고행을 하는데도 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너는 고행하여 천당에 태어나려고 생각하고 있으며, 오래 살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비구 : 그렇다.
붓다 : 우리가 고행을 하고 수행을 하는 목적은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지, 천당에
태어나려고,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내가 추구하고 있는 목적이 잘못되 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 “고”의 성제이다. 바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 하는 것이 “고”의 성제인 것이다.
비구 : ?
붓다 : 그렇게 고행을 하는데도 왜 화내는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한가?
그것은 자비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만 옳고 상대방은 틀린다는 생각 때문에
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이 있는 한 화내는 마음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수행자로서 모든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화내는 마음은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구 : ?
붓다 :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면 우리들은 저절로 평안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문제가 해결된 상태, 생각의 자유로움과 마음의 평안을 얻은 상태가
“멸”의 성제이다.
이 “멸”에 성제에 도달하기 위하여 어떤 행위가 최선의 방법일까?를 생각하고 결정하여 실천하는 것이 “도”의 성제이다. 제대로 실천을 하려고 하면 일어난 현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먼저 이러한 능력이 내 속에 서 성숙되어야 올바른 실천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행위하면 된다. 이것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바르게 정진하는 것이며, 바르게 생활하는
것이며,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다.
비구 : 그런 것 같다. 이해가 된다.

(예2) 붓다 : 너희들 둘은 어제 다투고 화를 내었다.
무엇 때문에 다투었느냐?
비구 : 내가 탁발하여 온 공양을 상대방이 더 많이 먹으려고 하였다.
붓다 : 6 년을 함께 고행한 벗들인데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진정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터럭만큼이라도 있었으면 다투었겠는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조금 더 먹으려고 할까? 하는 자비심이 너의 마음에서
일어났다면 너의 공양을 한술 더 떠 주었을 것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인 “자비심”은 수행자에게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자비심이 없으 면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이 된다.
수행자에게 “자비심”이 충만 되어 있으면 저절로 “도”의 성제는 이루어지지만,
“자비심”이 없으면 천년을 다리 틀고 앉아 수행한다 하더라도 지옥에 갈 죄만 더 하는 것이다.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관조하여 “일어난 근본 이유”를 찾는 것도 “최선의 실천”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지만 “자비심” 속에는 이미 “고의 성제”와 “집의 성제”가 해결되어 상대방을 100 % 위하는 “실천의 도”가 행동으 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나면 최선의 해결책이
생기게 되며, 또한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게 된다. 알겠느냐?
이것이 바로 고집멸도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국자가 국 속에 천년을 있어도 국맛을 모르듯이 우리 불자들이 천년을 절에 왔다갔다 한다해도 불교적인 방법으로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불교하고는 전연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깊이 느끼고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삶 속에 불교의 향기가 스며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천년이 걸릴지라도 처음 시도가 제대로 되어야 그 다음부터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 결국은 부처가 되는 것이다.




8.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공한 가운데는 지혜도 없으며 지혜을 실천함으로써 주어지는 공덕의 얻음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원래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

(해설) 이 부분을 다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도 없으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실천으로 주어지는 육바라밀의 공덕의 얻음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원래 공이므로 얻을 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주며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베품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베품의 뿌리는 행하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실하게 느끼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적수선사를 있게 한 적수선사의 어린시절 이야기다.
무더운 여름이 계속되자 깊은 산속에 있는 암자에서도 더위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적수선사의 스승이 어린 적수에게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물통에 물을 채워 놓으라고 하였다. 어린 적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콧노래를 부르면서 물을 길어 물통에 갖다 부었다. 여러 번 왔다갔다 하여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 길어온 바께스의 물이 반쯤 남았다. 적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남은 물을 바닥에 쏟아 버렸다. 법당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놈, 부처가 되겠다고 먹물 옷 입고 수행하는 녀석이 그렇게 행위를 함부로 하면 어떻게 하느냐? 살생하지 말라하는 뜻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모든 생명을 살려라 하는 뜻이다. 그래. 지금 너의 행동을 한번 살펴보아라. 남아 있는 물을 바닥에 쏟음으로서 너는 물을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덥고 가문 날 그 물을 저기 있는 나무에 주었다면 너는 물도 살리고 나무도 살렸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수행하실 때 바른 말 한 귀절을 듣기 위하여 몸을 던지기도 했다.
부처님의 전생 호명이란 이름으로 히말라야산에서 홀로 정진하며 수행하고 있는데 제석천왕이 나찰로 변하여 부처님의 수행력을 시험하였다. 나찰은 수행자의 반대편 나무 위에 앉아서 게송을 읊었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아서(諸行無常)
끝없이 났다가 없어지나니(是生滅法)

이 소리를 듣고 수행자의 가슴은 환희로움으로 가득차 버렸다. 누가 이 법을 말하는가?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니 험상굳게 생긴 나찰이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수행자는 나찰에게 게송의 나머지 반을 마져 읊어 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나찰은 몸을 던져 보시한다면 나머지 반을 말해주겠다고 하였다. 수행자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러자 나찰은 게송의 뒷 부분을 읊었다.

나고 없어지는 법 깨닫고 나면(生滅滅已)
진리의 바다 고요하여 즐거우리라.(寂滅爲樂)

수행자는 이 소리를 듣고 조용히 합장하며 자신의 몸을 던졌다. 몸을 던지자 그 곳에서 깨달음의 꽃이 피어났다.
베품은 입으로 하는 예배가 아니다. 베품은 말과 마음과 행동이 하나된 자기 봉사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베품에는 내가 없으며, 베품을 받는 상대도 없으며, 베풀어지는 물질이나 정신도 없다. 이 때는 베품이 이미 베품이 아니다. 그러므로 베품이 공하다는 것이다.
진지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것에라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결과에 대해 집착하는 바가 없이 순수한 동기와 올바른 수단을 취하는 것이 바른 베품인 것이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동물이나 고기와 같은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도 살생이지만 자신의 생명을 무의미하게 던져버리고 도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살생이듯이 궁극적이고 진정한 베품은 자신의 내부로 눈을 돌려 자신에 대한 베품이 행해질 때 진정한 베품이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베품(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이 이루어질 때 육바라밀의 실천과 육바라밀의 실천으로 주어지는 공덕도 공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보시라 하며 눈의 도적을 버리면 모든 빛의 경계를 떠나서
마음에 인색함이 없어지므로 저절로 보시가 이루어진다.
자기자신을 잘 지키는 것을 지계라 이름하며 귀의 도적을 막으면 소리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
으므로 스스로 구속 속에 있으나 구속에서 자유로운 지계가 이루어진다.
자기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을 인욕이라 이름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면 향기로운 좋은 냄
새와 악취가 나는 나쁜 냄새에 균등하여 자유롭게 길들여지므로 저절로 인욕이 이루어진다.
자기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을 정진이라 하며 혀의 도적을 제어하면 삿된 맛을 탐내지 않으며,
읊고 강설하되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저절로 정진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것을 선정이라 이름하며 몸의 도적을 항복시키면 모든 애욕에 초연하
여 요동하지 않고, 물들지 않으므로 항상 선정 속에 머물게 된다.
생명의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을 지혜라 이름하며 뜻의 도적을 조복하면 무명을 따르지 않고
항상 생각이 깨어 있어 행하는 모든 행위가 법에 맞으며, 모든 공덕을 즐겨 닦으므로 지혜의
빛이 항상 밝게 빛날 뿐이다.
이 여섯가지 중에서 단 한가지의 실천이 부족하더라도 “지혜의 완성”으로 성취되는 깨달음과는 십만리나 멀어짐을 알아야 한다.



9.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가碍 無가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故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보살은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또한 뒤바뀐 망상을 여의게 되고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되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였느니라.

(해설) 사리자여, 부처를 이루고자 수행하는 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성취하려고 노력하여 지혜의 완성을 성취하여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철저하게 알고 느끼고 체험하고 있으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으며,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 우리에게 공포심이 일어나는 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우리는 간혹 혼자 집에 있어도 무서움을 느끼며 혼자서 산 속에 있을 때는 누구나 두려움을 느낀다. 이것은 제법무아라는 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며 제행무상이라는 나의 존재의 흐름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도를 이루기 위하여 숲 속에서 수행하고 계실 때 숲 속에 혼자 있을 때 두려움이 엄습하면 어떻게 극복하느냐 다른 수행자가 물었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편안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바르게 직시함으로써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앎으로써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공포를 물리쳤다고 다른 수행자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무서운 동물이 나를 덮치려고 움직이는 소리일 것이라고 생각할 때 공포가 닥친다. 이 때 눈앞을 똑바로 응시하여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버리면 공포는 사라진다. 이와같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수상행식의 작용도 외부현상을 바르게 인식함으로써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정되어 공포심이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연습이 되풀이 됨으로써 잘못 축적된 업에 의한 집착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게 되고 결국에는 자비심과 지혜심이 가득하게 된다. 공포심은 결국 집착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바른 인식의 축적에 의하여 집착을 여의게 되면 두려움은 없어지고 확고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또한 사리자여,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인식하게 됨으로써 나의 분별심과 망상에 의하여 잘못 인식하고 있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바르게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자여,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생활하고, 바르게 수행하게 되므로 저절로 도를 이루어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사리자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아는 무라는 뜻이며, 뇩다라는 상이라는 뜻이며, 삼은 정이라는 뜻이며, 먁은 등이라는 뜻이며, 보리는 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방세계 가운데 제일 높고 그 이상 위가 없는 진리를 바르게 깨쳤다는 뜻이다. 결국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도 지혜의 완성에 의하여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관계의 결과인 것이다.



10.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故設般若波羅密多呪 卽設呪曰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그러므로 이 지혜의 완성은 크게 신비로운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동등함이 없는 주문이어서,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이제 지혜의 완성을 성취하는 주문을 설하노니 다음과 같느니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해설) 그러므로 사리자여, 이 지혜의 완성은 성문의 입장에서 보면 큰 위신력이나 신통력을 발휘하여 마구니를 항복받아 결정적인 믿음이 일어나게 하여 깨달음에 들게 하므로 대신주이며, 연각의 입장에서 보면 무명으로 말미암아 탐심과 진심과 치심으로 일어나는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바른 견해가 생겨 결정적인 이해를 일어나게 하여 깨달음에 들게 하므로 대명주이며, 보살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 고액을 다 소멸하여 무상열반에 들어 끝없는 자비심으로 결정적인 행을 일어나게 하여 깨달음에 들게 하므로 무상주가 되며, 부처의 입장에서 보면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위없는 바른 지혜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여 회향하여 깨달음을 증명하므로 무등등주가 된다. 그러므로 사라자여, 지혜의 완성을 성취하게 되면 일체의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부처님께서 증명하므로 허망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이다.
성문은 사성제를 100% 이해하고 믿을 때 존재 본질의 양상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이 일어나 지혜의 완성을 성취하게 되며, 연각은 십이연기법을 100% 이해하고 믿을 때 결정적인 존재 본질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져 지혜의 완성을 성취하게 되며, 보살은 육바라밀을 100% 이해하고 믿을 때 존재 본질의 생존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져 지혜의 완성을 성취하게 된다.
끝으로 주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목숨을 건 지극한 마음으로 세 번만 염송하면 “지혜의 완성”를 이루어 부처가 된다.
어떠한 상황이든 100% 완전하게 믿어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중생심은 정말 그렇게 될까? 정말 내가 부처일까? 하는 조그마한 의심들이 내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기 때문에 죽어도 100% 믿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100% 믿으라.
100% 그 마음일 때 그 일은 그 순간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 반야심경 강의를 인연으로 100% 믿는 마음을 낼 수 있다면 이 생에서 그대의 삶은 성공적인 삶이 될 것이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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