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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교음악과 그 감상(1)-불교음악, 그리고 연재의 방향

경호... 2011. 7. 21. 03:52

 

 

한국의 불교음악과 그 감상


첫째 마당. 불교와 음악, 그리고 연재의 방향

  

  음악은 현대인의 필수적인 생활의 일부가 되다시피 했다. 필자의 딸은 하루 중 쉬는 시간뿐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음악을 듣는다. 공부할 때도 귀에다 헤드폰을 대고 있어 주의를 준 적이 있을 정도다. 딸의 친구들을 보아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노래방은 어떤가? 한참 줏가를 올릴때 정도는 아니어도, 이곳저곳 둘러보면 한국의 노래방은 여전히 건재하다. 많은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중간고사, 기말고사 끝나고 자기네끼리 회포를 풀며 시험 뒷풀이 하는 장소가 노래방이기도 하다. 또한 지금도 어느 술자리, 어느 야유회를 가든 한국인은 최소한 십팔번 곡 하나쯤 선보이지 않으면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민족이다. 한국 교회에 가면 찬송가와 합창단이 필수이며, 이제 어느 덧 불교계에도 제법 많은 찬불가가 만들어졌고, 합창단도 조직되었다.

 

  미국은 어떤가? 필자가 종교 자원봉사자로 1999년부터 4차례에 걸쳐 미국내 영성공동체나 한국 절 체류를 통해 보니, 앵글로 색슨 족 역시 일상생활에서나 종교생활에서 음악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미국인들 합창반에서 같이 노래도 불러보았고, 한국의 전통음악을 소개하는 기회도 몇 차례 가지면서 미국인들의 음악에 대한 애호를 목도할 수 있었다. 특히나 필자가 이태리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솔레 미오’ 혹은 ‘아 목동아’를 불렀을 때, 미국인들이 무척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응답을 해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모름지기 현대 사회에서 음악은 일상생활에서나 종교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문화의 일부가 되어있는 게 현실이라 판단된다. 그렇다면 세존(世尊;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런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경전 상의 여러 곳에서, 우선 세존은 가무(歌舞), 즉 음악을 금지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아함경을 보면, 세존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들에게 현성팔관회의 법(法)을 설할 때 음악을 금지하고 있는 대목과 마주칠 수 있다. 또한 장아함경 권 제11 선생경에는 장자의 아들 선생(善生)에게 이르기를 여섯 가지 재물을 손상케 하는 업(業)이 있으니, 그중 하나가 기악과 가무에 미혹되는 것이라 하여 역시 음악을 금지하고 있다. 증일아함경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속박하는 데에 아홉 가지가 있는데, 세존은 노래하고, 춤추고, 기악 하는 걸 첫 손에 꼽고 있다. 우바새오계위의경에서는 노래와 춤, 음악, 악기 연주가 방일함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금하라고 한다.

 

  이러한 경부(經部)에서뿐 아니라 율부(律部)에서도 세존은 비구, 비구니는 물론 재가신도에 대해서까지 음악을 금지시키고 있다. 마하승기율에서 세존은 말한다. “오늘부터 악사들의 기악을 보지도 듣지도 말아라. (중략) 공연을 지나가다가 보게 되면 죄가 되지 않지만 만약 일부러 가서 본다면 비니죄(毘尼罪)를 저지르는 것이다.” 마하승기율의 다른 대목에서 세존은 길거리에서 공연을 본 비구니를 나무라면서, “이제부터는 기악을 듣지도 보지도 말아라. 한번 들은 사람은 반드시 다시 듣게 되느니라. 만약 비구니가 기악을 보았다면 비구니의 가벼운 죄를 범하느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세존은 음악을 영원히 금지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보았을까? 법원주림(法苑珠林) 제36 패찬편 음악부에 의하면, 세존 재세시에 사위성 사람들이 음악으로 세존을 찬탄하고 스님들께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에 세존은 기악을 지어 스님들을 공양한 공덕에 의하여 미래 일백겁 중 악도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다. 한편, 도세품경에는 보살에게 청정하게 하는 열 가지 일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불법을 모시는 절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로 찬탄하여 맑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중생을 위해 법문을 전해 주는 것이며, 존신을 모시는 절에서 기악을 하고 금, 생, 적 등의 음악으로 부처님의 탑과 절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장아함경 석제환인문경에서는 음악을 예찬하는 세존의 모습이 보인다. “착하고 착하도다 반차익(般遮翼)이여, 그대는 청정한 음성과 유리금으로 여래를 찬탄하는구나. 그대의 금과 그대의 소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고 완곡하고도 애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구나. 그대가 연주한 금 소리에는 모든 뜻이 다 갖추어져 있어 욕망에 얽매임도 있으며, 범행과 사문과 열반도 설하고 있구나.”

 

  이와 같은 검토를 통해, 세존은 금지할 음악과 긍정적인 음악을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세존은 수행자를 어지럽히고 수행에 방해가 되는 음악은 금하고, 불보살을 찬탄하며, 고(孤),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진리를 설파하는 음악은 권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존이 말하는 긍정적 음악이든 부정적 음악이든, 인간은 청각을 통해 음악을 지각한다. 그런데 인간의 5가지 감각 중에 청각이 지니는 특징이 무얼까?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중에서 가장 예민한 감각이 귀라는 과학적 실험결과가 있다. 귀보다는 눈이 더 예민해 사람한테 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이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실제 실험에서 실험참가자들에게 영상과 소리가 있는 화면을, 처음엔 영상만 보게 했다가 이어 소리만 들려주었다. 그리고 순서를 반대로도 해보았다. 이어 어느 쪽이 만족도가 더 높냐고 했더니, 대부분이 영상을 못볼지언정 소리를 듣는 쪽을 택하겠다는 응답이 나왔다. 이 대목에서 독자 가운데는 과거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며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갖가지 정경을 그려보던 기억을 떠올리는 분이 있으리라. 영상만 보아서는 이런 상상력이 잘 발동되지 않는다는 경험을 필자도 한 적이 있다. 의문나는 독자들은 직접 실험을 해보면 어떨지...... 과학적 실험과 우리의 일상 경험을 통해, 다른 감각에 비해 청각이 지닌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능엄경(楞嚴經)의 핵심 교의 중 하나로 꼽는 이근원통(耳根圓通)도 이런 청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근원통이란 “귀에 의지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소리를 내서 소리를 듣고 관(觀)하는 수행이 가장 쉽게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이행문(易行門: 용수보살이 설한 자성[自性]을 깨닫는 쉬운 방법)으로서 염불수행의 중요성을 뒷받침할 뿐 아니라, 또한 현대인들에게 좋은 음악이 지니는 중요성을 각성케 하고 있지않나 생각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2600년 전에 세존이 그토록 간곡하게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에게 좋지않은 음악을 금하도록 역설한 까닭도, 부정적인 음악이 인간의 청각을 통해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염두에 두어서일 것이다. 또한 세존이 긍정하는 좋은 음악이 미치는 영향력도 좋은 쪽으로 대단할 수 있음은 물론이겠다.

 

  이와같이 마음을 가장 자극하는 감각은 청각이라고 과학이나 불경에서는 말한다. 또 우리가 숨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있는 의식은 듣는 의식이라 하며, 어느 신문에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사람이 환자 주변에서 하는 말을 다 들었다고 하여 놀랐다는 기사도 보도된 적이 있다. 그러기에 절집에서 임종 때 마지막 가시는 분을 위해서 하는 염불, 조념염불(助念念佛)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요즘에는 심리학 분야에서 음악을 수단으로 마음을 치료한다느니, 젖소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젖이 더 많이 나왔다느니, 식물에도 좋은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더 잘 자랐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어떤 학자는 소리에도 긍정적인 소리와 부정적인 소리가 있는데 가장 나쁜 소리는 기계톱으로 나무 자르는 소리이며, 음악으로는 랩 음악이라 했다 한다. 이런 소리 했다간 요즘 아이들한테 딱 원성사기 알맞을 뿐 아니라, 시대에 뒤진 구닥다리 소리라는 힐난을 듣기 십상이겠지만 일리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그러면서 필자를 포함해 불자들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마저, 세존이 꾸짖고 경계한 좋지 않은 음악에 내맡겨두고도 태평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케 한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불교계에서는 좋은 음악을 널리 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던가? 세존이 하도 곳곳에서 음악과 춤에 대해 금하라는 말을 많이 해서인지 한국불교 역사에서도 그렇고(물론 불교가 국교이다시피 했던 신라, 고려의 경우는 예외지만), 미국불교 역사에서도 불교계의 음악 수용이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 연재는 앞으로 주로 한국불교에서 좋은 불교 음악을 펴려는 과정에서 드러났던 다양한 음악을 다루게 되므로, 한국불교의 경우는 차차 함께 살펴보고 감상해나갈 것이다. 하여 연재의 첫 번째 글인 이번 글에서는, 불교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는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압축적으로 불교계 음악수용의 현실태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리라 본다.

 

  마침 필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번역해 ‘미주현대불교사’와 ‘운주사’가 함께 간행했던 <<이야기 미국불교사>>에서, 이에 합당한 생생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책에 많이 등장하는 폴 카루스의 사례다. 불교를 서구화하려는 방법을 놓고 여러 고민을 해 본 결과 카루스는 음악 도입이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카루스는 달마팔라의 시구와 다른 불교의 경구를 베토벤과 쇼팽의 음악과 독일민요에 접합시켰는데, 카루스의 이 ‘과감한 시도’는 그와 서신 왕래를 하던 스코틀랜드 승려 아난다 메테야의 강한 반대에 부닥친다. 메테야는 국제불교도협회 의장이었고 3,000부가 발행되는 <불교(Buddhism)>지 편집장으로, 랭군 본부에서 카루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낸다. “불교도에게 음악은 감각에서 추출한 추잡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불교라는 종교는 음악을 신도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원인 중 하나이므로 삼가하라고 가르친 점을 귀하께서는 망각하신 듯합니다.” 세존이 역설한 부정적 음악에 대한 경계를, 메테야는 음악 일반에 대한 금지로 극단화시킨 것이다.

 

  카루스는 메테야의 반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메테야에게 붓다는 감각적 쾌락의 극단이나 금욕주의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추구하지 말고 중도(中道)의 길을 가도록 가르쳤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또한 시와 마찬가지로 음악도 매우 저속한 생각뿐만 아니라 매우 숭고한 사상도 표현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어 카루스는 메테야에게 스즈키가 번역한 <<대승기신론>>의 한 부분을 따서, 마명대사는 파탈리풋트라 사람들에게 “고전적이고 슬프면서 곡조가 좋은 가락을 작곡해 인생의 비참함과 공허함 및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무아(無我)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하여 불교도로 개종시켰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카루스는 아잔타 동굴 벽화에 기타와 다른 악기들을 가진 승려들이 그려진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럽의 고전음악은 깊은 종교적 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므로 가히 불교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쇼팽의 야상곡 37번 작품을 ‘열반을 향한 염원’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승려인 메테야보다 경전과 불교역사에 더 충실한 쪽이 카루스임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설득에도 메테야는 자기 의견을 굽힐 줄 몰랐지만, 카루스는 캘리포니아에서 많은 동조자를 얻었으니, 가장 열성적 후원자는 새크라멘토에 있는 불교교회 주지 마찌난다 스님이다. 마찌난다는 ‘수년간의 고생’ 끝에 300명 이상을 불교로 개종시켰으며, 자신의 노력 중에서 스스로 미국인에게 맞게 작사․작곡한 노래(예를 들어: ‘나의 붓다 곁으로 더 가까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카루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그리스도교 숭배의식을 본떴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붓다도 로마에 가면 로마 사람이 하듯이 행동하라고 가르쳤어요.” 이와 같이 카루스와 마찌난다의 사례는 불교계에서 음악을 수용하는 경우에 참고할 수 있는, 바람직한 중도적 접근의 사례가 아닐까 한다.

 

  이제 이 연재물의 방향을 말할 차례다. 2003년에 열반하신 청화 큰스님은 수행 중에 들었던 음악에 대해 소참법문이나 대담에서 말한 적이 있다. 또한 많은 경전에 따르면, 세존이 성도했을 때나 법열의 경지에 들었을 때 음악이 울려 퍼졌다 한다. 어쩌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전통 속의 훌륭한 불교음악이란, 이렇게 수행 중에 하늘에서 들린 음악을 기록한 건지 모른다. 적어도 하늘에서 나는 음악소리를 들을 정도에 버금가는 수행 속에서나 만들어지고 연주되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수행 속에서 감각이 정화되지 않고서는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작품을 써내고 연주하기가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필자를 비롯한 독자들의 입장에서도 수행을 여법히 해나갈 때만, 건강한 청각의 회복을 통해 연주나 작곡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음악을 선별해 자신에게는 수행의 조도(助道)로 활용할 수 있을 테고, 특히 아이들에게 들려주어 그네들의 불심을 함양케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의 연재를 진행하고자 한다. 또한 음악 관련 연재이고, 미주현대불교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볼 때, 인터넷만 활용하면 금방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다수 찾아내어 실제 들어보고 느껴보고, 나아가 따라 불러볼 기회를 많이 제공하는 게 좋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네이버, 다움, 구글을 부지런히 검색해 좋은 음원(音源)을 많이 발굴해 내는 것도 이 연재에서 중요한 필자의 과제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현재 필자가 생각하는 연재의 순서를 소개한다. 연재과정에서 양이 너무 많아 둘로 나눠져야 할 주제도 있고, 자료가 부족하고 너무 전문적이어서 삭제되어야 할 주제도 나올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 그리는 윤곽이다.


연재 전체 제목: 한국의 불교음악과 그 감상


1. 불교와 음악, 그리고 연재의 방향

2. 불교음악의 전래

3. 범패(梵唄; Beompae; a solemn chant for a Buddhist ritual)1과 감상 ― 안채비

   (anchaebi; sutra style chant),  바깥채비(baggatchaebi; 홋소리와 짓소리: hotsori

   [short style chant] and jitsori [long style chant])

4. 범패2와 감상 ― 화청(和請; hwacheong; secular Buddhist ritual chant)

5. 불교음악으로서의 향가(鄕歌) 감상

6. 이조(李朝)의 불교음악과 세종대왕의 창작 불교음악

7. 영산회상과 감상

8. 회심곡, 보렴, 산염불과 감상

9. 자웅금, 불교취타악 등과 감상.

10. 창작 찬불가와 감상

11.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타주춤과 감상

 

  필자는 몇 년 간 국악공부를 거의 못하다가, 작년 말부터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하루 2,3시간 그렇지 못할 때는 1시간 정도 매일 대금을 불고, 노래를 부르며 국악공부를 한다. ‘영산회상’을 대금으로 연주하고, 정가(正歌)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불러보며 마음을 다스리고 좋은 선율을 익힌다. 그러다 간혹 좋은 곡이 떠오르면 녹음기에 구음(口音)으로 읊어 녹음하고 이를 악보화시켜보기도 한다. 이러던 차에 맡게 된 이번 연재가 필자의 국악공부와 맞물려 각각 상승작용을 일으키길 염원해본다. 이런 상승작용으로 생긴 더욱 커질 음악적 힘이 있다면, 이를 바탕으로 무엇보다 독자 여러분에게 불교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데 쓰고자 한다.

 

  이번 글에서 구체적인 불교음악을 소개한 건 없지만, 그럼에도 앞서 말씀드렸듯이 독자들에게 실제 불교음악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게 언제나 중요하리라 보기 때문에, 첫 번째 연재글에서도 예외없이 적용하고자 한다. 1분 안에 인터넷에서 찾아 불교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이트를 소개한다. 불교음악하면 독자들이 ‘범패’요, ‘찬불가’를 떠올리지 않을까싶다. ‘www.naver.com'(네이버)나 ‘www .daum.net’(다움), 또는 ‘www.google.co.kr’(구글)에서 ‘범패’와 ‘찬불가’를 검색창에다 쳐보시라.

 

  네이버의 검색창에 ’범패‘를 치면 사이트 항목에 ‘범패연구소(http://www.pompae.com/)’, ‘영남 불음원(http://cafe.daum.net/jrjr777/)’, ‘범패와 작법무(http://www.bumpae.org/)’, ‘영산재(http:// www.ilun.net/)’, ‘범패 불교무용과 영산재(http://www.pompae.or.kr/)’가 나온다. 예를 들어 ‘범패연구소’로 들어가보자. ‘전체 글보기’에서 세 번째 란에 ‘영상자료’가 나온다. 여기를 클릭해 들어가보면, 범패 무형문화재 제 9호이신 문구암 스님의 다양한 범패를 동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최소한 스스로 ‘입정’을 하거나 ‘반야심경’을 읽어 마음을 추스르고 들어야 제대로 들을 수 있다).

 

  또한 네이버 검색창에 ‘찬불가’를 치면 사이트 항목에 ‘불교음악방송(http://www.bulmusic .com/)’, ‘찬불가를 사랑하는 모임(http://cafe.daum.net/sindo108/)’, ‘좋은 벗 풍경소리(http://www .budsori.or.kr/)’, ‘부처님 나라 카페(http://cafe.daum.net/gotobuddha/)’, ‘성불로 가는 도반들(http ://cafe.daum.net/amicibud/)’이 나온다. 여기서 ‘성불로 가는 도반들’로 들어가면 다양한 찬불가를 들을 수 있다. 특히 ‘음악과의 만남’ 항목에서 ‘불교음악과 찬불가’를 클릭하면 많은 찬불가와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서양음악적이라 찬송가를 듣는 것 같을지라도(이에 대해서는 연재의 10번째에서 다룰 것이다), 그 음악적 정신을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고, 많지는 않아도 국악적인 작품도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음악을 들으며 고요한 자기 방에서 따라불러보는 것도 좋은 음악적 체험이 되리라는 점도 말씀드린다.

 

  다음 달에 두 번째 연재물 ‘불교음악의 전래’를 통해 다시 독자 여러분과 만나고자 한다. 끝으로 지면을 제공해주신 김형근 님 등 편집진께 감사 말씀 드리고, 독자 여러분께 새해 인사 올린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도안 한창호 합장 _()_



참고자료(경전 제외 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