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시집 <일평생 연애주의>가 예쁜 양장본으로
문학세계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잘가라, 내 청춘>, <당신은 사랑을 몰라요>, <우울한 날의 정사(情死)>, <나태는 미(美)의 원천>,
<남자로 태어난 슬픔>, <사랑 죽이기> 등 60 여 편의 시를 싣고 있는 이 시집은, 마광수 특유의 허무
주의와 퇴폐의 미학을 간결하고 쉬운, 그리고 상징적인 언어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집 끝에 서울대 국문학과 김유중 교수의 <해설>이 실려있습니다.
마광수 문학의 본원(本源)인 시 장르를 사랑하는 분들의 뜨거운 격려와 성원을 바랍니다.
많이들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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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면서도 관능적인 황홀감과 비애감
마광수식 에로티시즘, 마광수 신작 시집 출간!
우리 사회에 존재해 온 육체적 욕망에 대한 이중성을 비판하고 ‘성의 신성화’라는 뿌리 깊은 위선과 기
만에 반기를 들었던 마광수 시인(60)이 신작 시집 『일평생 연애주의』(문학세계사)를 통해 새로운 모
습을 보이고 있다. 그간 시?소설을 넘나들며 에로틱 판타지라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성性을 모든 금기
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즐길 것을 제안하였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 주었던 도발적이고 대담한 성적 담론뿐 아니라 삶이 주는 허망함, 쓸쓸함을 쉽고
명쾌한 언어로 묘사해낸다.
1977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마광수 시인은 시집의 자서自序를 통해
“시는 내 문학의 본원”이며, “감상感傷과 퇴폐頹廢는 내 시의 영원한 화두”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번 시집에 묶인 자신의 시들에 대해 비애감과 황홀감을 느끼는데, “비애감은 주로
늙어감의 슬픔에서 나온 것이고, 황홀감은 주로 관능적 판타지에서 나온 것”이라 고백한다.
마광수식 에로티시즘이 주를 이루는 『일평생 연애주의』는 전통적으로 ‘서정시’가 갖는 장르적 정체
성을 해체하고 창조적으로 넘어서려는 발화 방식을 통해 몽상적인 성적 판타지와 자유로운 담론적 일
탈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 주었던 도발적이고 대담한 성적 담론뿐 아니라 등단 초
기 『광마집狂馬集』과 『귀골貴骨』에서 보여주었던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이
유를 철학적 명상으로까지 이끌어내기도 한다. 이는 올해 환갑을 맞은 마광수 시인의 정신적, 문학적
변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때 한국 문학계에서 ‘예술과 외설’의 문제로 논쟁의 중심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던 마광수
문학은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를 구속으로 몰고 갔던 소설 『즐거운 사라』는 아직까
지 한국에서는 출판이 금지된 채로 남아 있지만, 일본 문단에서는 이 소설을 성장기 여성의 이상 성 심
리를 차별화된 독특한 시각으로 그린 심리주의 성장소설로 받아들여 한때 일본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올해 5월 그의 에세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국내 연극무대에 올
라 새로운 조명을 받기도 하였다.
1. 쾌락, 본능 그리고 에로틱 판타지로의 유혹
마광수 교수의 시세계는 ‘세속의 세계관’과 ‘실용적 쾌락주의’로 다듬어진 견고한 철학적 사유로 무장
되어 있다. 그는 범세계적 보편론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작가들 중에서는 드물게 세계성을 획득
하고 있다. 그는 줄곧 관능적 휴머니즘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우선 인간이라면 자연과 공존해야 하고,
서로 솔직하게 사랑해야 하고, 성적인 것을 갈구하며 상상력이 넘치는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광수 교수의 사상 속에는 한국이 21세기에 들어서 얻은 가장 민중적인 가치관들이 함유되어 있다.
정직한 성, 야한 사랑, 육체 중심의 쾌락주의, 놀이 본능적 사고 등등. 그는 권위적 엘리트주의를 혐오
하며 대중적인 것에 대해 천착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온몸으로 실천한다. 그는 수구적 봉건 윤
리에 바탕을 둔 억압적 성관념에서 벗어나오는 방법으로 개성적 방식의 다형도착(多型倒錯, 이른바 변
태적 섹스들을 고루 섞어서 하기)과 페티시즘, 그리고 당당한 나르시시즘을 제시하면서 ‘천상천하 유아
독존’식의 자아독립을 강조한다. 이런 다원주의적 사고는 궁극적 자유의 획득을 위한 필수 요건이며,
굳어버린 지배적 결정론들에 대한 강력한 거부행위이다.
나는 사랑이 헤픈 여자가 좋다
나는 섹스가 헤픈 여자가 좋다
누구랑 만나도 금세 장미여관 가고
누구랑 헤어져도 전혀 삐치지 않고
늘 마음속은 귀여운 음탕함으로 가득 차 있고
늘 긴 손톱으로 남자의 온몸을 슬글슬근 쓰다듬어주는
아, 꿈에서나 만나볼까, 그런 야한 여자
아니, 내 생애 꼭 만날 거야 그런 자유로운 여자
오오오 그녀의 아름답게 찢어진 순결
아아아 그녀의 헤프디헤픈 터치
오라 자유여, 거리낌없이 발랄한 성욕이여
가자 거기로, 빨가벗고 뛰놀던 에덴 동산으로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 전문
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핥고 빠는 것’
사랑은 ‘영혼의 대화’가 아니라
‘SADO - MASOCHISM의 대화’
사랑은 ‘정신적 신뢰감’이 아니라
‘육체적 재미와 쾌락’
최고의 사랑은 ‘세찬 정력의 삽입성교’가 아니라
‘삽입성교를 싫어하는 변태끼리의 관능적 유희’
――「사랑에 관한 단장斷章」 전문
필화 사건으로 그가 법정에서 구속되고, 다니던 학교에서마저 한때나마 해직당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공식적인 루트로는 절대 표현해서슴 안 될 이러한 사회적 금기 사항들을 앞장서 깨뜨린 데 대한
일종의 괘씸죄가 발동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런 것들은 음지에서나,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서나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퇴폐적이고 음란한 행위들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엄연한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교수가, 차마 입에 올리기 민망한 내용들로 가득 찬 글을 써서 유포시켰
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통념상 받아들여지기 힘든 일이었다.
육체적 접촉이 없는 만남이란 전혀 의미가 없어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귀찮고 따분하게 여겨져
하긴 그런 이유에서 진짜 우정은 반드시
동성애로 발전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지
살을 섞는 만남, 피부끼리의 살갗 접촉(skinship)에 의한
섹시섹시한 만남만이
진짜 이심전심의 만남이 될 수 있어
――「정신적 사랑은 가라」 부분
가게 안에는 그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남자들 서너 명이 역시 같은 종류의 물건을 고르고 있다. 이윽
고 다 찾아낸 그는 탈의실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다. 30여 분 후에는 누구도 몰라볼 정도로 완벽한
여자로 변신해서 나온다. 그후 그는 도심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여자가 된 기쁨을 만끽한다. 거리를
도는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다. 백화점 안에도 들어가보고 싶지만 워낙 여자가 많은 곳이라 아직까지
는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도심의 거리를 돌고 나서 그는 다시 아까의 가게로 돌아온다. 여성으로 변신
하는 데 드는 가발과 팬티와 브래지어, 거들, 스타킹, 블라우스와 스커트. 그리고 몇 가지의 액세서리
등의 대여료와 화장품 등의 사용료는 약 10만 원 정도다. 그는 몸집이 작아서 그나마 다행인 편이다.
――「남자로 태어난 슬픔」 부분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위반의 충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금기란 이미 금기라고 할 수 없다. 강력한
금기일수록 위반에의 유혹은 더욱 강렬할 것이니, 이 경우 금기가 금기일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이미
이와 같은 위반에의 충동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금기란 어쩌면 애초부터 위반을
전제로 함으로써만 의의를 지니는 것이라고 뒤집어 생각해볼 필요는 없을까.
물론, 그리고 당연히, 금기의 위반에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뒤따른다. 그 처벌 가운데 가장 보편적
인, 동시에 가장 가혹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절대 다수의 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미쳤다”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이런 비난을 퍼붓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
다. 역사의 흐름은 때론 이와 같이 금기의 틀을 깨고, 그것에 맞서 도전하는 이단아들에 의해 바뀌어
왔다는 사실이다.
2. 쓸쓸한 사랑 노래, 관능과 몽상의 시학
마광수에게 있어 문학은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꿈꾸기’이다. 마광수는
문학은 ‘상상력의 모험’이며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한다. 문학은 도덕적 설교가 아니고,
당대當代의 가치관에 순응하는 계몽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은 기성 도덕에 대한 도전이어야 하고,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창조적 불복종’이요, ‘창조적 반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광수는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외롭다”고 말한다. 참된 문학은 당세풍當世風의
기득권 윤리에 대한 반발이므로 창조적 문학인은 당연히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죽여 버리고 싶은 놈들도 많아지고
죽여 버리고 싶은 년들도 많아지고
공연히 어줍잖게 혁명도 하고 싶어지고
공연히 촌스럽게 계몽도 하고 싶어지고
사람들이 싫고 이 나라가 싫고 이 우주가 싫고
절망도 어렵고 희망도 어렵고 사랑은 더 어렵고
――「이 서글픈 중년」 부분
무엇이 이토록 그를 미칠 지경에까지 몰아넣었는가. 마광수는 지극히 정상적인 멘털리티를 지닌 사람이
다. 그런 그가 일반인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데는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절대 넘어서서는
안 될 선, 즉 우리 사회 일반의 금기를 넘어선 주장을 서슴없이 자신의 글에 담았기 때문이다. 금기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없다. 금기란 어차피 인간적인 산물이며 인간의 사회적 필요에 의해 창출된 것이
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금기는 지켜져야 하지만, 지켜지는 것이 그 사회의 안정과 존속을 위해 우선
바람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신성불가침의 절대 영역인 것은 아니다. 금기란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위반의 충동을 부르기 때문이다.
돌아오려무나 아무도 모르게
옛 시절의 청춘이여
옛 시절의 사랑이여
나의 행복했던 희망이여
푸른 꿈이여 지금 어디에
자취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느냐 꺼져버렸느냐
나는 늙었다 지쳤다 피곤하다
사랑 없음의 외로움
섹스 없음의 괴로움
돌아오라 내 청춘
돌아오라 내 꿈들
잘 가라 내 고독
잘 가라 내 수음手淫
푸른 꿈이여 ?금 어디에
――「푸른 꿈이여 지금 어디에」 전문
이번 시집에서 그는 유난히 쓸쓸하다. 늙고, 지치고, 피곤하고, 외롭다. 돌아올 수 없는 청춘을 회상하
고 그리워하기도 하며 손가락질받고 법적, 사회적 처벌과 조롱을 힘겹게 견뎌내며 지나온 삶을 후회하
고 반성하기도 한다.
나의 고된 삶 속에서
그나마 한 줌 상상적 휴식이 돼 주었던
그녀와 나의 잠자리가
타락이었다고 그래서 반성한다고
――「내가 쓸 자서전에는」 중에서
3. “그는 반항한다. 고로 그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는 외롭다.”――마광수를 말한다
“그를 구속으로 몰고 갔던 소설 『즐거운 사라』는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출판이 금지된 채 남아 있다.
그러나 일본 문단의 경우만 하더라도, 이 소설을 성장기 여성의 이상 성 심리를 차별화된 독특한 시각
으로 그린 심리주의 성장소설의 일종으로 이해하며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 결과 이 소설의
일어 번역본은 한때 일본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의 본
원적인 욕망을 당당하게 공개된 장소에서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문화 예술계도 리얼한 에로
티시즘의 정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언제가 될는지 미리 점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별로 멀지 않은 시기에 마광수와 그가 남긴 불온한
유산들은 시대를 앞질러간 혁명적인 사건으로 우리의 문화 예술사에 등재될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 그에게 주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가 하루빨리 지난날의 정신적 충격
에서 벗어나 이제까지의 작업들에서 이루어놓은 성과들을 더욱더 정련하고 가치화하는 작업에 몰두해
주길 바란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문화 예술계가 시대의 이단아 마광수를 위해 남겨
놓은 마지막 과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유중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마광수 교수의 커뮤니케이션 행위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지녀온 ‘교육의 신화’를 전면 거부하는
것이었다.”
――조종혁(한국외국어대 교수)
“마광수의 주장은 섹스가 소비의 대상이 된 현실을 직시하자는 요청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섹스를 모든 금기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즐길 것을 제안함으로써 그
간 우리 사회에 존재해 온 섹스에 대한 이중성을 타파하고자 한다. 그는 섹스가 육체와 정신의 자연스
러운 욕구에 부응하는 ‘소비행위’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성의 신성화’라고 하는 우리 시대의 뿌리 깊은
위선과 기만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머지않아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으로 평가받을 게 분명하
다는 걸 인정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그에 대한 ‘마녀 사냥’이 한창 진행되던 때로부터 불과 몇 년
이 지나지 않아 그가 했던 주장은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강준만(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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