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마지막을위한이야기

완전 연소하는 삶/월호스님

경호... 2008. 9. 4. 17:38

잘 살기(wellbeing)에 관한 관심과 더불어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잘 죽기(welldying)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웰빙의 끝에 웰다잉이 놓여있으므로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웰다잉을  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잘 벗기'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벗는다고 하면, 옷 벗는 것을 연상하게 되지요, 참으로 옷은 잘 벗어야 합니다. 몸뚱이는 그야말로 마음의 옷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부인이 넷인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선고받은 그는 평상시 첫째로 애지중지하던 부인에게 죽음에의 동행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색을 하며 "살아서는 함께 떨어질 수 없었지만, 죽음까지는 결코 동행할 수 없다" 고 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도 낙심한 사나이는 둘째로 사랑하던 부인에게 말했으나, 대답은 역시 마친가지 였습니다. "가장 아끼던 부인도 안 가는데 내가 왜 갑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부인에게 말하니, "장지까지는 따라가지요"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평상시에는 돌아보지도 않던 넷째부인에게서 사나이는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끝까지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나이는 ,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당신에게  가징 큰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어야 하는 건데...."하고 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비유에서 첫째로  애지중지하던 부인이란, 다름 아닌 몸뚱이를 말합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가꾸어주고자 한평생 애를 쓰지만, 죽어서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둘째로 사랑하던 부인은 재물입니다. 어떤 부자는 자신의 임종에 즈음하여 장례식에서 자신의 빈손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죽을 때는 결국 빈손으로 가야함을 밝힌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어떤 이는 죽으면서도 재물에 애착하여, 아끼던 보배반지들을 열 손가락에 끼고 예금통장을 움켜쥐고 죽었답니다. 죽고나니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 자손들로 하여금 억지로 손가락을 잘래내는 불효를 저지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셋째로 사랑하던 부인이란 일가친척과 친지 등을 말합니다. 죽고 나면 장지까지는 따라오지만, 관 속에까지 따라 들어오는 이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돌아보지도 않던 부인이란, 바로 마음을 뜻합니다. 몸뚱이는 옷 갈아입듯이 갈아입을 수 잇지만 마음은 그대로 가져가야 하는 것이빈다. 닦았으면 닦은 대로 , 못 닦았으면 못닦은 대로 업장을 짊어지고 가야 하지요.

 

그러므로 불가에서는 죽는 것을 '몸 벗는다' 혹은 '몸 바꾼다'고 말합니다. 한평생 쓰던 몸뚱이를 벗어놓고 다른 몸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죽음이란 그 자체로서는 기뻐할 일도 아니며 통탄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맞추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 때문이지요. 더 좋은 옷으로 갈아입는 경우, 죽음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 됩니다. 이런 경우를 이른바 '웰 다잉'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생전 복덕을 많이 지었거나, 마음공부를 잘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박수 치고 기뻐할 일입니다.  다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여한이 있어 슬프겠지만, 이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는 잘된 일입니다. 인생이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입니다.더 나쁜 옷을 갈아입는 경우의 죽음은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살아생전 제대로 복을 짓지 않았거나, 마음공부를 소홀히 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슬픕니다. 가엾습니다.

 

다른 이의 죽음은 내 차례에 대한 예행연습이빈다. 늙고 병들고 죽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시행착오가 용납되지 않는 죽음을 언제라도 담담하게 맞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죽음과 삶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태어남이 있기에 죽음이 있으며, 죽음이 있기ㅣ에 태어남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찍이 '나고 죽는 하나의 커다란 일', 즉 '생사일대사 生死一大事'라는 말을 즐겨 사용해왔습니다. 부처님의 출가동기도  생사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함이며, 근대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선사도 생사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해 참선에 매진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웰빙과 웰다잉이라는 주제는 일찍이 불교에서 다루어왔던 가장 핵심이 되는 주제가 이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웰다잉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일차적으로 편안한 죽음, 더 좋은 옷으로 갈아입음을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태어남은 또 다른 죽음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려면 '완전 연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완전 연소해야 찌꺼지가 남지 않기 때문이지요. 못하한 한恨이라든가 남겨진 용망이 있는 한, 이에 걸맞는 몸을 찾아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한풀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을 완전 연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잡아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일에 대해 근심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집착하지 마라. 현재에 얻어야 할 것만을 따라 바른 지혜로 최선을 다할 뿐, 딴 생각을 하지 마라. 미래를 향해 마음을 달리고, 과거를 돌아보며 근심 걱정하는 것은 마치 우박이 초목을 때리는 듯 어리석음의 불로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이른바 '바로 지금 여기'에 철저할 뿐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밥먹을 땐 밥 먹을 뿐! 잠잘 땐 잠잘 뿐! 일할 땐 일할 뿐! 놀 땐 놀 뿐! 죽을 땐 죽을 뿐! 이렇게 살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삶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웰빙이요, 웰다잉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곳, 이 순간에서 최선을 다 하는 삶, 후회도 없고 찌꺼기도 남지 않으며 욕망이나 사랑조차도 남지 않는 , 완전 현소하는 삶. 것이야말로 더 이상 다음 생을 받지 않고 불생불멸의 경지에 노니는 최상의 웰다잉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