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수(강남대 교양학부 교수)
상관(相關)·상용(相容)
현재의 나는 현재까지의 삶의 경험이 농축되어 이루어졌다. 현재 내 삶 안에는 나의 지나간 과거가 모두 들어 있다. 과거만 들어있던가? 미래까지도 들어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계획과 목적에 따라 지금의 삶이 움직여지고, 또 그 계획과 목적에 따라 지금의 삶을 꾸려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나의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이, 현재의 삶은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리고 나의 현재 삶은 나 홀로 이루어낸 독자적 삶의 결과가 아니다. 거기에는 나의 과거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 사회, 국가 등 모든 것이 들어있다. 나의 가족,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더 나아가 인류의 전 역사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삶은 서로서로 총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도대체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주위의 상황과 얽혀서 존재한다. 전혀 의식할 수 없던 미소한 일이 전 우주를 바꾸어놓을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사실을 불교가 가장 잘 보여주는 듯 하다. 화엄종의 초조(初祖) 두순(杜順)이 남긴 다음 시구를 예로 들어보자.
"가주(嘉州 - 동부중국)에 있는 소가 풀을 뜯자
익주(益州 - 서부중국)에 있는 말이 배불렀다."
이 시구는 선불교에까지 널리 퍼지면서 하나의 공안으로 이용되어 왔다. 이것은 그저 공안일 뿐이던가? 우리의 일상적 삶의 범위, 우리의 판단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 보니, 우리는 다른 시공간에 있는 사람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동중국의 소와 서중국의 말, 중국 대륙 동쪽의 소가 뜬은 풀과 서쪽에 살던 말은 애당초 별개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한가? 소가 풀을 뜯자 말의 배가 불러졌다는 것은 그저 말장난이 아니다. 세상만사가 서로 얽혀서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의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내게 언젠가 있었던 일 두 가지를 비근한 예로 들어보겠다.
내가 서울 상계동에 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강의 시간이 되어 자가용을 탈 요량으로 집 밖을 나서기 직전, 라디오에서 시내 교통 상황 안내가 있었다. 종로를 지나던 한 시민의 제보에 의하면, 종로가 매우 혼잡하니, 우회하는 것이 좋겠다는 전언이었다. 종로로 가고자 했던 나는 승용차를 포기하고 전철로 발걸음을 향했다. 역으로 가다가 도로 변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가만히 보니 친한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 친구가 차를 몰고 가다가 인도로 걸어가는 나를 보고 차를 세운 것이었다. 그 바람에 좁은 도로에는 순식간에 서너대의 차가 꼬리를 물고 몰려 잠시 정체 소동이 벌어졌다. 뒤에서 빨리 안가고 뭐하냐며 '빵빵'거렸다. 그래서 나는 다시 연락하겠노라 약속하고는 급히 헤어졌다. 나는 다시 전철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도로에서 차들끼리 접촉 사고가 났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아까 나와 동창의 만남으로 잠시 정체가 되지 않았다면, 도로 교통의 흐름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더 큰 사고가 났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10분 전에 종로를 걷던 한 사람의 제보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고, 십분 후에 그 사람은 물론 나와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교통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나로 인해 내 중학교 동창에게 또다른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로 인해 나의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을 일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길을 걸어가던 나로 인해 시내 교통 상황이 바뀌었다. 사고가 안날 곳에서 사고가 났다. 사고가 날 곳에서 안 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흐름은 전 상황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교통 사고로 다친 사람의 가족의 삶도 결정적으로 바뀌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 가족의 평생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교통 사고 나는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 과거 교통 사고로 가족을 잃던 그 장면이 떠올라서 연일 다시 악몽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현재가 그 사람의 과거를 떠올렸고, 이것이 그 사람의 미래까지 영향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종로에 있던 한 사람의 생각이 나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어찌 예상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다른 이야기 하나 더:
몇 년 전 아내의 생일 때였다. 도대체 선물을 할 줄 모르는 나는 이번에야말로 선물을 하나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침 구두를 살 수 있는 상품권이 있어서 구두를 선물하려 했다. 구두를 사러 가기 직전에 확인 차 집 근처에 있는 백화점에 전화 문의를 했다. 그런데 사정이 있어 오늘 임시 휴무라는 것 아닌가. - 그날 저녁 뉴스에서 그 백화점이 순수이익을 남기면서도 계열회사 빗보증을 감당하지 못해 최종 부도처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나는 할 수 없이 계획을 바꿔 꽃을 선물하기로 했다. 저녁 때 꽃집에 갔다. 장미를 몇 송이 사려고 들어갔으나, 들어가자마자 계산대 옆에 놓인 다른 꽃 한송이가 눈에 띄었다. '호접란!" 난의 꽃이 예뻐서 사려던 장미를 한 송이로 줄이고, 대신 호접란을 샀다. 집에 가져오니 아내가 좋아하는 눈치였다. 집안 분위기상 이 난은 T.V. 옆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T.V. 옆에는 마즈나타가 심긴 다른 화분이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옮기고 그곳에 호접란을 두기로 했다. 옮기면서 보니 잎에 먼지가 많아 물로 씻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비가 왔다. 반가운 봄비였다. 옳거니, 화분도 씻을 겸해서 우리는 이 화분에게 봄비 세례를 주기로 했다. 그런데 봄비가 오는 마당으로 들고 나가다가 그만 벽에 부딛히면서 파릇파릇 새순이 돋아나던 마즈나타 가지가 동강 부러지고 말았다. 마음이 아팠다. 한 이년여를 멋지게 키워왔었는데..... 마즈나타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한 보름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자 나는 두고두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즈나타가 죽은 것은 결국 백화점이 부도났기 때문이 아닌가. 백화점 부도난 것 하고 우리집 화분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백화점 계열 회사 운영을 하던 사용자들과 우리집 마즈나타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 매년 돌아오는 아내 생일이 마즈나타 가지를 뿌러뜨린 꼴이기도 하다. 하필 꽃집 주인은 왜 그 호접란 한송이를 자기 계산대 옆에다 두었을까?
마즈나타로서는 치명적일 수 있는 상처가 백화점 부도라는 상관도 없는 사건 때문에 생긴 셈이다. 아니 내가 꽃을 사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니 한정없을 무한한 연결고리들이 떠올랐다.
"가주에 있는 소가 풀을 뜯자 익주에 있는 말이 배불렀다"는 말은 단순한 공안이 아니다. 그저 비논리적인 것도 아니다. "상계동 사는 내가 전철을 타러 가자 신촌 사는 박씨 차가 부서진 꼴이다." "종로 사람이 재채기 하자 상계동 사람이 악몽에 시달리는 꼴이다." '버터플라이 이펙트'(butterfly effect)라 하던가? 북경에서 나비가 날자 샌프란시스코에 홍수가 난 꼴이다.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작은 행위 하나가 전 우주를 움직이고 있을 뿐 아니라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과학적 검증 대상은 못된다. 실험을 하려면 그 실험 대상을 변수(變數)로 놓고 다른 것들은 모두 상수(常數)로 놓아야 하는데, 우리 일상 생활에 상수란 따로 없는 까닭이다. 모두가 변수인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실험대상은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고, 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아니 실제로 북경에서 나비가 날자 샌프란시스코에 태풍이 일고 있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일체의 행위는 크든 작든 자취를 남겨놓는다. "세계-내-존재"(하이데거)인 나는 세계 안에서 무언가를 하는듯 하지만(doing), 사실상 그것은 세계 안에서 그 무언가에 얽혀 그렇게 되는 것이다(becoming). 나는 그렇게 됨으로써 존재하게(being)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과정을 통찰하지 못한 채, 인간은 언제나 타자에 의한 과정 속에서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내가 한다"고 간주한다. '나'의 존재를 당당히 여기며..... 그러나 과연 그런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doing) 행위를 통해 되는(becoming)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 육도(六道)에 윤회하는 인간 존재(being)인 것이다. 업(業)을 덜고자 하는 의지적 행위조차 도리어 타자를 충동하고 타자에 의해 한정되면서 도리어 업을 만들어 가는 꼴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존재이다. 시공간 안에서 일체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카르마)의 원리도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자신만의 것으로 당연시하고, 그렇게 해서 '나'를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그 '나'란 인류 전체, 생물 전체, 세계 전체와 '운명적으로' 엮여있다. 내가 아무리 자의적으로 무언가를 한다 해도 이러한 의지적인 행위가 도리어 '끝없는' 인과의 그물을 짜가는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인과의 그물은 끝이 없다. 무한하다.
앞에서의 작은 이야기에서 그 연결고리들을 찾아볼까? 평면적으로, 단차원적으로 그 고리를 찾노라면 죽도록 해도 못할 것이다. 낱말 하나하나마다 무한한 원인들이 무한한 그물과도 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치기장난하며 놀던 초등학교 운동장의 정글짐을 무한히 확대해놓은 것과도 같다. 모든 방향으로 무한히 뻗어있는 정글짐의 각진 곳마다 무수한 사건들이 하나씩 걸려있는 모습과도 같다. 이처럼 미세한 그물코 하나가 전 우주에 걸쳐 다종다양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 중에 이와 통하는 전형적인 비유 '인드라의 그물' 이야기가 있다. 그 비유는 대강 이렇다:
하늘 위 높은 곳, 인드라 신의 궁전 지붕에 작은 수정 모양의 보석을 한 장식들이 무수히 달려있다. 그것은 아주 복잡한 그물 모양을 이루면서 여러 형태로 섞여 짜여 있다. 빛의 반사로 인해 이 일체의 보석들은 인간계의 대륙과 대양을 포함하여 전 우주를 반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체의 보석마다 반사되는 모든 상들을 빠짐없이 담고 서로를 반사해낸다.
이 비유는 화엄종의 제 삼조(三祖)인 법장(法藏)이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들려주었던 '거울로 도배된 방'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천장도 바닥도 모두 깨끗한 거울로 도배된 방 한 복판에 불상과 횃불이 놓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한 마디로 환상적일 것이다. 모든 거울 안에는 다른 거울 안에 비취고 있는 불상과 횃불이 다시 비쳐지고 있다. 그것도 끝없이..... 거기에다 맑은 수정공을 하나 더 두었다고 하자. 그 수정으로 된 공 안에는 모든 거울에서 반사해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가 빛난다. 화엄철학에서 말하는 일중다(一中多), 다중일(多中一)의 세상이 적나나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운명? 자유?
어떤 사람은 이러한 예에서 운명론과 같은 것을 본다. 그 백화점은 부도가 날 수 밖에 없고 마즈나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사태를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면,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런 점에서는 운명론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확히 그런 점에서만 맞다. 우리 중 그 누가 과연 저 높은 곳에서 '천리안'을 가지고 내려다볼 수 있는가?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러니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면" 하는 가정은 전혀 확인될 수 없는 가정이다. 어디서도 확인될 수 없는 가정을 세우는 일은 애당초 실을 바늘귀가 아닌 바늘 허리에 매는 꼴이다.
어떤 사람은 자유의지에 대해 말한다.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간다고 말한다. 자유를 강조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自由)란 말 그대로 '스스로 말미암음'이다. 인간에게 이런 자유가 있는가? 어떤 인간이 스스로 말미암는가? 자식은 부모로 말미암아, 학생은 선생으로 말미암아, 나는 너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식이고 학생이고 나인 것 아닌가? 인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뿐이다. 나를 나되게 해준 것은 무수히 많다. 나도 무수히 많은 것에 영향을 끼친다. 어떠한 사건이나 사태의 주도적인 원인, 제일원인이란 없다. 모두가 원인이고, 모두가 결과이다. 모두가 원인제공자이고 모두가 책임자이며, 결과적 산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연기(緣起)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연기"(緣起)일 것이다. "연기"란 "연하여(緣) 일어나다(起)", 즉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여러 가지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해 생겨남"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 때문에 저것이 생겨나고 저것 때문에 이것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붓다는 이렇게 가르쳤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나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만물의 존재 원인과 근거가 자기 자신 안에 있지 않고 다른 데 있다는 말이다. B가 있는 것은 A로 인해서이지, 결코 B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다. A 없는 B란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다.
아이는 엄마/아빠가 낳지만, 아이 없는 엄마/아빠도 있을 수 없다. 아이가 있기에 엄마/아빠도 있는 것이다. 남편 없는 아내가 있을 수 없고 아내 없는 남편이 있을 수 없다. 선생 없는 학생이 있을 수 없고 학생 없는 선생이 있을 수 없다. 선생은 학생을 전제하고 학생은 선생을 전제한다. 너 없는 나, 안 없는 밖은 불가능하다. 도대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란 없다. 모두 상호 조건적으로 존재할 뿐, 불변하는 실체도 없다. 산과 강, 식물도 마찬가지이다. 일체의 것이 정확히 다 알 수는 없는 수많은 현상, 사물, 생물이 관련되어 지금 여기 존재한다.
어떤 것도 독자성을 갖지 못하고, 상대적, 조건적, 일시적 존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둥이 없는 집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들은 기둥 없는 집을 얼마든지 연상한다. 전체 집 모양에서 기둥만 빼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관념적 영상(映像), 수량적 개념 속에서나 그려지는 것이다. 기둥이 없는데 그것을 집이라 할 수 있을까? 기둥이 없으면 지붕을 세울 수 없고, 지붕을 세우지 못하면 집이 되지 않는다.
집과 기둥들은 전체 집합, 부분 집합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산술적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부분 없는 전체가 있을 수 없듯이, 기둥 없는 집이란 있을 수 없다. 집이 없으면, 지붕이라는 것도 존재론적으로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둥은 지붕의 존재를 규정해준다. 기둥이 그 근저에서부터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까닭에 기둥이 없으면 집은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역으로 기둥이라는 것 역시 지붕을 받쳐줌으로써만 기둥일 수 있는 까닭에, 지붕 없는 기둥이란 것 역시 무의미하다. 기둥만 지붕을 규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지붕도 기둥의 존재를 그 근저에서부터 규정해준다. 기둥이든, 지붕이든, 집이든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기둥에만 속한 불변의 실체란 없다. 세상 만사가 다 그런 식이다.
그 어느 것도 우주의 최초의 원인일 수 없다. 무상한 제법(諸法)의 상호작용에 의한 생멸(生滅)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불변의 자아가 이러한 생멸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재는 조건적으로 생겨나는 온갖 것들이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붓다의 연기설(緣起說)이다. 그래서 붓다는 "연기를 본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본자는 연기를 본다"고까지 말한다.
연기를 본 자는 진리를 본다. 보기만 할 뿐 아니라, 전적인 실천으로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보는 것(to see)은 그저 시각적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온몸을 관통하는 직관(direct seeing)이다. 이렇게 보는 이는 행한다. 그래서 보는 것(to see)과 행하는 것(to act)은 같다. 가령 아이는 엄마/아빠를 존재론적으로 규정해줄 뿐 아니라 행위까지도 규정해준다. 유태계 프랑스 철학자인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표현을 빌리면, 엄마/아빠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행동까지도 규제된다. 아이의 얼굴은 부모에게 일종의 '계시'와 같다. 부모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규정해주고, 부모를 부모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나 아닌 다른 것이 도리어 나의 주인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인연(因緣)
불교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았다. 세상이 존재하는 원인을 그 다양한 얽힘에서 보았지, 그것을 넘어서는 불변의 것, 아니 그 밖의 존재는 관심 밖이었다. 붓다도 나를 나되게 해준 것을 절대적이고 인격적인 '그분'이 아닌, 일체의 직간접적인 조건들에서 찾았다. 그래서 이를 따르는 불자들 역시 만사를 인연법(因緣法)에 따라 본다. 여기서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며, '연'은 그 원인이 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외적인 '조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여러 가지 원인, 여러 가지 조건들이 결합되어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새로운 원인, 새로운 조건이 생기면, 그에 따라 변화된다. 그래서 인간도 태어나고(生), 그런 뒤에는 늙고(老), 병들고(病), 때가 되면 죽는다(死).
이 때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인지, 일일이 따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붓다도 그것을 따지지 않았다. 마즈나타의 죽음, 상계동에서의 교통사고, 무한히 뻗어있는 인드라의 그물에서 보았듯이, 모두가 원인이고 모두가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과 연에 의해서 새로운 현상들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인연법에 따르면, 가령 같은 사람을 만나고도 모두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사랑하게 되어 있는 사람만이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만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은 그의 내·외적 조건이 다른 사람과 달리 되어 있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인연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다. 전생에서부터 그를 사랑하도록 씨(因)가 뿌려졌고, 지금 그 사람을 만날 연(緣)이 닿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부부들이 자신의 동반자에 대해 무언가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끄덕이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지금의 상황에 신의 섭리 보다는 '인연'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불교적 세계관에 영향받아 사는 한국사람이기에 그럴 것이다.
변화
이런 식으로 세상은 변한다. 나의 작은 경험을 다시 한 번 예로 들어보자.
한 15년쯤 전의 일이었다. 내가 교회 주일학교 고등부교사로 봉사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주일학교 행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 학생이 느닷없이 내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진리가 뭐예요?" 내게 1-2초쯤 후에 멋진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응, 하나님이 곧 진리이지!" 그런데 그 학생은 다른 선생님도 비슷한 대답을 했다며, 별로 신통찮은 대답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집에 가는 길에 계속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멋진 표현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 다음에 만나면 영원불변한 것이 진리라고 대답해주어야지' 생각했다. 나는 "주의 영원불변함 찬송합시다" 하는 찬송가 가사를 읊조리며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 이후 내게는 계속해서 의심이 들었다. '진리가 영원불변한 것은 분명히 맞지만, 인간이 영원불변하지 않은데 어떻게 진리를 알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어제도 다르고 오늘도 다르고 내일도 다를텐데, 내 모습도 생각도 아주 적게라도 끝없이 변화하는데, 어떻게 불변하는 것을 알고 말한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세상 만사는 모두 변한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변한다. 항상 새로운 인과 연이 부가된다. 그래서 무상(無常)이다. 무상이므로 사람은 영원히 젊을을 유지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무상이므로 동시에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한다. 즉, 변화한다. 인생과 자연은 모두 변화하며, 따라서 무상하다. 이를 붓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불렀다. 일체가 무상하므로 '나'도 '자기'라는 존재도 무상하다. 불변하는 그 무엇은 없다. 이것을 붓다는 다시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했다.
모두가 인연에 따른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나'란 없다.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조건을 만나 그렇게 되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그렇게 하는 주체인 '나'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고, 더 많이 누리고, 더 높아지고, 더 오래 살려는 주체가 없으니, 인생은 그 자체로 괴로움(苦)이다. 석존은 이것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불렀다. 일체는 무아이고 무상이며 그래서 괴로움이다.
성기(性起)
수행자들은 이러한 무아를 보고, 무집착을 실천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사태의 흐름을 제대로 보고 그와 일치하고자 한다. 그래서 깨친 스님들은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 꼬이면 풀고 닫히면 연다. 일체 흐름에 철저하게 일치시키는 까닭에 나와 너를 분리시키지 않고 성속(聖俗)을 구분하거나 분리하지 않는다. 속(俗)을 참으로 속(俗)으로 살기에 그에게는 속이 바로 성이 된다. 물론 성이 속이 된다 해도 맞다. 그 때의 속이란 이미 성의 대립으로서의 속이 아니라, 성 바로 그것으로서의 속이기 때문이다. 360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속과 성은 0도와 180도가 아니다. 0도와 360도의 관계이다. 깨친 이들은 그런 식으로 성(聖)을 실천한다. 중생이 부처임을 알고서, 그 귀한 진리를 전한다. 이것이 붓다의 제자 아니, 붓다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인간 및 만물의 진실한 모습이다. 이른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다. 이것을 통찰한 이는 성속이 여일한 삶을 산다. 물론 이렇게 성속이 여일한 삶을 사는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我)이다. 그러나 나는 나이되, 360도로서의 '나', 이기적 자아(0도)가 부정됨으로써 긍정된 나(360도)이다. 자기가 철저히 부정되었기에 일체에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하고 사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모습이야말로 붓다가 탄생하면서 외쳤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그 '나'(我라)고도 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만이 문제가 아니라, 자연물 어디에도 해당하는 이치이다. 그래서 <열반경>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산천초목이 다 그 불성을 이룬다"(山川草木悉皆成佛)고 말한다. 세상만사 끝없이 변화하는 가운데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고유성을 갖추고 있기에, 일체의 존재는 불성으로서의 생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비는 내리고, 바람은 불며, 계절은 바뀌어간다. 끊임없는 자연의 변화는 불성의 생명 활동과 다름없다.
불성의 생명 활동, 즉 화엄의 표현대로 하면 '성기'(性起)이다. 연하여 일어나는 '연기'가 아니라, 불성의 일어남, 즉 "성기"인 것이다. 지금 드러나는 현상 바로 거기에서 생명의 근원을 보는 것이다.
본래진면목
이렇게 불교는 세상만사의 상의상관(相依相關)성을 중시한다. 더 나아가 세상만사에서 불성을 본다. 그리고 만사가 불성의 작용(性起)임을 읽어낸다. 당연한 말이지만, 불성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 불성이 이미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불성은 인간 안에, 일체 중생에 갖추어져 있다. 물론 하나의 개별 실체로서 들어있다는 말이 아니다. 일체 중생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것은 그 중생의 고유한 모습이며, 그 고유한 모습이야말로 불성의 자기 일으킴(性起)이라는 것이다. 중생에게는 그 고유한 모습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애당초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인간이 그것을 보지 못한 채, 사물을 그저 대상화시키고, 주·객을 나누고, 대상을 부리며, '나'의 존재를 당당히 여긴다. 무명에 휩싸여 내가 너로 인해 존재한다는 그 생생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무명의 상태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한다. 사물의 철저한 상의상관성, 그 본래적인 모습을 보라고 강권한다. 그러는 순간 인간은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고, 가아(假我)에서 진아(眞我)로 전환하게 된다고..... 전환이라 하지만, 무언가 거기에 가감되었거나 그래서 달라진 것은 아니다. 원래 있었지만, 보지 못하던 모습의 완전한 회복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원래 있던 그대로이다. 이 원래 있던 그대로를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이라고도 말한다. 원래 그랬던 부처로서의 모습인 것이다.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도 이와 통하는 '구조'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본래 "천주를 모시고 있는", "하늘과 같은 존재"이니, "인간을 섬기되 하늘과 같이 섬겨야 한다"(事人如天)는 가르침을 동학에서는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의 실천을 요구받고 있는 이가 동학교도, 오늘날의 천도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생겨난 것 치고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한 귀중한 피조물이니, 믿음으로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든 동학이든 그리스도교든 모두 본래진면목의 회복을 요청하고 있는 셈이다. 종교들은 본래 주어져 있는 원천적인 모습의 회복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구조적인 차원에서 종교들은 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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