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시 : 류시화
도둑이 온다면
큰 길로야 오지 않겠지
그가 온다면 내 집 뒤 작은 오솔길
풀 몇 줄기 쓰러뜨리며 오겠지
그러면 나는 불을 끄고 잠든 척 해야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려니 하면서
어떤 새가 밤의 풀섶에서
새끼를 치는 것이려니 하면서
도둑이 온다면
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오겠지
그가 온다면 내 깊고 깊은 잠
꿈의 강을 건너 오겠지
그러면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든 척 해야지
잠든 척 하는 자를 누가 깨울 수 있으랴
그는 이미 깨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