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룡본난정서
왕희지가 썼다는 불후의 명작 <<난정서>>는 지금 임모본(진본을 보고 배껴서 쓴 글)은 남아 있지만, 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 왕희지가 <<난정서>>를 가전의 보물로 대대로 전해주고, 왕희지의 7대손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진 것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지영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가하여 중이 되었고, 후손을 남기지 않았으며, 왕희지의 <<난정서>>를 제자인 판재화상(辦才和尙)에게 전했다고 한다.
2. 당나라 초기에 들어, 당태종 이세민은 왕희지의 글을 매우 좋아하여 전국의 왕희지의 글씨를 수집하고, 왕희지의 글을 가지고 서예를 연습하였다. 특히 <<난정서>>의 진본은 매우 귀하게 여겨 여러차례에 걸쳐 높은 대가를 내걸고 진본을 구하였으나, 얻지를 못하였다. 나중에 <<난정서>>의 진본이 회계의 변재라는 화상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당태종은 그에게서 <<난정서>>진본을 빼앗아오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난정서>>가 당태종의 사망시 그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 때에 이러한 내용을 기재한 글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유송(柳悚)의 <<수당가화(隋唐嘉話)>>라는 글인데, 거기에 의하면 "왕우군의 <<난정서>>는 .... 제자인 중 변재가 얻었다. 태종이 진왕이 된 후에 탁본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여 고가를 걸고 구했으나 결국 얻지 못하였다. 나중에 변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소익을 월주로 보내서 얻도록 하였고, 무덕4년에 진왕 이세민의 손에 들어왔다. 정관 10년 탁본 10개를 만들어 가까운 신하들에게 선물하였다. 황제가 죽자, 중서령 저수량은 난정은 선제께서 아끼시던 물건이니 세상에 남겨둘 수 없다고 하고 비밀리에 소릉(당태종의 능)에 묻었다."
또 하나는 <<태평광기(太平廣記)>>인데 내용은 수당가화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정관시대에 태종은 이왕의 서법을 뱅고자 하였고, 진본, 모사본이 많이 있었으나, 오직 난정서만 구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변재에게 있는 것을 알고 3번이나 보여달라고 하였으나, 변재는 전란중에 잃어버려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거짓을 고하였다. 방현령이 감찰어사 소익을 보내어서 지혜로 이를 얻게 하였다. 소익은 신분을 감추고 낙척서생인 것처럼 하여, 변재에게 접근하여 바둑을 두고 시를 읊었고, 글과 그림을 같이 하며 망년지교가 되었다. 나중에 변재가 자신이 수장하고 있는 물건들을 자랑하며 서까래에서 난정서 진본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소익이 후에 몰래 난정서 진본을 꺼내서 장안으로 가지고 왔다. 태종은 몇개의 탁본은 태자, 여러 왕, 가까운 신하에게 주었다. 임종때 이치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한테 한가지 물건만 부탁하자. 너는 효자이니, 내 말을 어기지는 않겠지. 어떠냐"라고 하며 난정서를 원했고, 난정서 진본은 소릉에 부장되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변재의 제자인 원소(元素)가 영흥자 지영선사의 친척에게 직접 얘기하는 것을 들은 것이다.
두 책의 내용은 비록 구체적인 점에서는 약간 다르지만, 대체로 같으며, 특히 당태종의 소릉에 부장되었다는 점은 완전히 일치한다.
3. <<신오대사. 온도전>>에 따르면, 후량의 요주절도사인 온도는 소릉을 도굴했다고 한다. "온도는 ... 종왕의 필적을 보니 종이와 글씨가 새 것과 같았고, 온도는 이를 취하여서 후세에 전하였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왕희지의 난정서는 온도에 의하여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4. 송나라 때의 채정의 발문을 보면 난정서를 부장할 때, 이세민의 누이와 여동생은 가짜로 바꿔치기를 하여, 진본은 세상에 남겨두었다고 한다. 이후에 진본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하여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수수께끼중의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5. 현재 전해지는 <<난정서>>는 모두 진본이 아니고, 석각본, 모본(摹本) 또는 임본(臨本)이다. 유명한 것으로는 "정무난정(亭武蘭亭)"으로 구양순이 진본을 보고 배껴서 ㄱ돌에 새긴 것이라고 한다. 북송시대에 하북 정무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정무난정이라고 한다. "신룡본난정(神龍本蘭亭)"은 당나라때 모본에 '신룡'이라는 작은 도장이 찍혀있어서 신룡본이라고 한다. 당태종이 풍승소에게 명해서 쓰게 한 것이다. 이 신룡본은 송나라때 고종의 손에 들어갔다가, 원나라초에 곽천석이 얻었고, 나중에 항원변에게 넘어갔다가, 청나라때 건륭의 손에 들어갔으며, 현재 북경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