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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교의 죽음관의 전개와 <티벳 사자의 서>에 나타난 죽음관의 전개

경호... 2016. 2. 10.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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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죽음관의 전개와 티벳 사자의 서에 나타난 죽음관의 전개*

 

 

곽만연(동아대)

 

 

[한글 요약]

 

인간은 태어나서 자라며 발전하고 성숙하며 노쇠하여 죽는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문화가 생겨나면서부터 모든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문제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서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독특하면서도 절대적인 경험이며 되풀이 될 수 없는 일련의 사건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일회적인 것이며 경험의 세계를 초월하여 있다.

 

죽음을 심각하게 의식한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주체의식이 깨어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생명의 각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교적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사랑하게 만든다. 죽음은 삶의 과정이며, 결과이다.

 

불교는 해탈을 위한 종교로서 인간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며 그 가운데 죽음의 고통과 근본적으로 대결한다. 불교에서는 생과 사를 따로 떼지 않고 언제나 생사하고 표현하며 생자필멸을 필연의 법칙으로 본다. 또한 죽음의 문제는 오늘날 생명윤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이는 뇌사, 장기이식과 안락사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문제다. 그러나 불교가 이렇듯 인간의 죽음의 고통을 성찰하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에서는 아직 죽음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부족하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에서 티베트 불교의 죽음관을 살펴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자 한다. 티베트의 밀교는 인도 대승불교의 전래 이기 때문에 초기불교, 부파불교, 유식불교의 죽음관을 살펴보고 티베트의 사자의 서에 나타난 죽음관을 살펴보려고 한다.

 

주제분야 : 불교생명윤리

주 제 어 : 초기불교죽음관, 부파불교의 죽음관, 사자의 서에 나타난 죽음관

 

 

Ⅱ. 불교의 죽음관의 전개

 

1. 초기 불교의 죽음관과 죽음의 극복

 

1) 초기불교의 죽음관

 

죽음에 대한 초기 경전의 기본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낱낱의 중생의 유형에 따라 낱낱의 중생이 죽고, 멸망하고, 파괴되고, 사멸하고, 목숨을 다하고, 모든 존재의 다발(五蘊, pacakkhandha: 色受想行識)이 파괴되고, 유해가 내던져지는데,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1]

 

여기서 ‘죽고, 멸망하고, 파괴되고, 사멸하고, 목숨을 다하고’는 죽음의 동의어이므로 실제적으로 죽음을 설명하고 있는 단어는 중생들이 그 유형에 따라 “존재의 다발(五蘊)이 파괴되고, 유해遺骸가 내던져지는 것(khandhnaṃ bhedo kalebarassa nikkhepo)”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생들의 ‘유해가 내던져지는 것’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죽음을 의미한다면,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불교적인 해석상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유해가 내던져지는 것’이 죽음이라는 관점을 살펴보자.

 

경전에 의하면,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수명(壽命, yu), 체열(體熱, usm), 의식(意識, viṇa)이 포기되면 육체는 더 이상 육체가 아니라 고기로서 동물을 위한 희생물로 버려진다.2]

생명과 관련하여 이 수명, 체열, 의식이라는 말을 분석해 보면, 수명은 생명을 나타내는 동어반복인 말이고 실제로는 생명은 체열과 의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봐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완전한 지멸을 성취한 아라한에게는 의식을 비롯한 정신적 현상이 사라지고 수명과 체열, 감관의 청정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아라한의 사라진 의식은 가역적 조건적으로 다시 생겨날 수 있다. 그래서 감관의 청정이 존재한다고 한 것이다. 생명의 필수조건에는 의식의 지속적인 존재성은 포함되지 않지만, 의식의 가역적 조건적인 존재성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완전한 지멸을 성취한 아라한에게는 의식을 비롯한 정신적 현상이 사라지고 수명과 체열, 감관의 청정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아라한의 사라진 의식은 가역적 조건적으로 다시 생겨날 수 있다. 그래서 감관의 청정이 존재한다고 한 것이다. 생명의 필수조건에는 의식의 지속적인 존재성은 포함되지 않지만, 의식의 가역적 조건적인 존재성은 필수적인 것이다.

 

1]SN II 43: y tesaṃ tesaṃ sattnaṃ tamh tamh sattaniky cuti cavanat bhedo antaradhnaṃ maccumaraṇaṃ klakiriy khandhnaṃ bhedo kalebarassa nikkhepo idaṃ vuccati maraṇaṃ. 잡아함 14권 13(대정장 2 99c, 잡355) 참조

2] SN III 143: pahn tiṇṇam dhammnaṁ. rpam passatha chaḍḍitaṁ yu sma ca viṇam. yad kyaṁ jahantinam apaviddho tad seti parabhattaṁ acetna-ṁ. “세 가지의 법을 버림으로써 육체를 버려진 것으로 관찰하라. 목숨과 체열과 의식, 만약 버려진 이 몸을 떠나면 생각할 것도 없이 남의 밥이 되고 만다.”

 

 

"벗이여, 죽어서 목숨이 다한 자와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이 있는데, 이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벗이여, 죽어서 목숨이 다한 자에게는 신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언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정신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수명이 다하고, 체열이 소모되고, 감관들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도 신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언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정신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지만,3] 수명이 다하지 않고, 체열이 다 소모되지 않고, 감관들은 아주 청정해집니다.

 

벗이여, 죽어서 목숨이 다한 자와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이 있는데, 이들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있습니다.(MN 1 296)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게 하고, 사라지게 해서 해탈한다. 그가 해탈할 때에, 그에게 ‘해탈되었다’는 궁극적인 앎이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SN II 248) "

 

3] 신체적 형성은 호흡呼吸을 말하고, 언어적 형성은 사유思惟와 숙고熟考를 말하고, 정신적 형성은 느낌과 지각知覺을 말한다. MN #44 「교리문답의 작은 경Cḷavedallasutta」 참조.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감각능력은 감각적 대상에 영향을 받아 시달리고 사거리에 놓인 거울처럼 더럽혀져 있지만, 멈춤을 성취한 사람의 감각능력은 곽 안에 있거나 상자 안에 놓인 거울처럼 맑아진다.

 

 

아라한에게서는 죽은 자와는 달리 감관이 파괴되지 않고 아주 청정해 있다는 것은 의식을 비롯한 정신적 현상이 다시 조건에 따라 그 청정해진 감관에 나타날 수가 있다는 의식 출몰의 가역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는 감관의 파괴로 인해 의식의 출몰은 불가역적으로 완전히 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생명의 필수조건은 ‘체열이라는 물질대사’와 ‘가역적 조건적 의식의 출몰’이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결여되면 ‘유해로서 버려지는’ 죽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아라한이나 죽은 자에게 모두 신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언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정신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진다. 아라한의 특수성을 제외한다면 상기의 조건들은 죽은 자에게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다음은 두 번째의 관점인 중생들의 ‘존재의 다발의 파괴’라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것은 유위법적 사유의 근본구조 −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 참으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 − 속에서 결합된 정신 신체적인 존재의 다발(五取蘊)의 파괴를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실재하는 사건으로 체험할 수 없다. 우리는 남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죽음을 사유할 뿐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죽음은 죽음에 대한 사유 또는 죽음에의 접근에 대한 사유나 체험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사유하면서 존재의 다발의 결합을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로 동일시하여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해서 사유하는 자아와 동일시되는 존재의 다발의 결합을 다시 죽음과 동일시한다.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라는 유위법적인 결합구조 속에서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죽음(死, maraṇa)으로 시설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 더 이상 존재의 다발과 동일시되는 자아를 갖고 있지 않은 아라한의 체험 속에는 변화와 소멸은 지각되지만 늙음과 죽음은 시설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에게서의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내려놓음(jīvita pariydna)’이라고 불리운다. 아라한의 체험에는 구조적으로 불사不死가 수반된다.

 

존재의 배후에 실제로 영원히 존속하는 자아나 영혼이 없이도 유위법적으로 생성되는 존재는 그 요소의 조건적 생성과 소멸의 무상성과 더불어 존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연속적으로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 따라서 존재의 다발이 파괴되고 유해가 버려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정의했지만, 이러한 죽음은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허무주의적이고 단멸론斷滅論적인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인과 사슬의 마지막 고리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노사老死의 결과는 새로운 조건 연쇄의 출발점이 된다. 이때 의식(識)이 두 생사의 존재론적 계기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이 의식은 결코 독자적으로 잔존하는 의식이 아니라 인과적으로 다른 요소들(色受想行識)을 수반하며 생성 소멸하는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서 존재의 다발의 파괴에 따르는 윤회이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결코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학자들 가운데에는 이것을 사후의 의식의 소멸을 의미하는 허무주의로 이끌어 가기도 하는데, 이는 초기불교의 경전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붓다는 “수행승들이여, 존재의 다발(五蘊)이 생겨나고 쇠퇴하고 죽을 때마다 너희들은 태어나고 쇠퇴하고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4]

자아는 단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신 신체적인 다발들의 인과적 수반에서 어느 하나를 자아개념과 일치시켰을 때, 나타나는 실제적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이러한 존재의 다발의 상속에 의한 생사의 윤회를 소멸하고 해탈하는 데 있다. 존재의 다발의 파괴는 죽음이지만 죽음을 초극하려면, 생사의 윤회 자체를 소멸시켜야 하는데 그 윤회 자체의 소멸의 길로 이끄는 길이 바로 팔정도이다.

 

중요한 것은 초기불교에서 이 생에서 저 생으로의 윤회는 어떤 독립하여 잔존하는 의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떠한 형태로든지 정신 신체적 과정을 수반하는, 즉 육체에서 분리된 존재로서의 의식이 아니라 그것을 수반하는 의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5]

또한 재생과정에서 위의 건달바가 모태에 탁태托胎되는 것을 표현한 팔리어 ‘okkamati’를 초기불교의 학자들이 서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도 재생의 관점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다. okkamati를 descend, 즉 하강의 의미로 해석하면 결과적으로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가정하는 것이고 develope, 즉 전개의 의미로 해석하면 영혼과 육체의 비분리를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의 영혼과 육체는 일이중도一異中道이지만 연기론적으로 후자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윤회하는 간다바는 존재의 다발로서의 복합체, 즉 오온(五蘊, pacakkhandha)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아비달마에 의하면 오온 가운데 의식이 죽어 가는 자에게는 죽음의식(死心, cuticitta)으로 모태에 탁태되는 자에게는 재생의식(結生心, paṭisandhicitta)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그러나 죽음의식이나 재생의식이라는 용어는 아비달마적인 것이지, ?니까야(Nikya)?의 어느 곳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용어는 형식적으로는 경장(經藏, Suttapiṭaka)에 소속되지만 실제로는 아비달마에 속하는 ?무애해도(無礙解道, Paṭisambhidmagga)?에 최초로 등장한다. 6]

여기서 의식은 윤회하는 의식으로 전생과 현생, 현생과 내세를 연결하는 의식으로 묘사된다. 북전 아비달마를 연구했던 스체르바스키는 십이연기의 의식을 에테르적인 화현(中陰神, gandharva)으로서의 중간적인 존재(中有, antarbhava)로 규정했는데, 7] 이처럼 의식을 이 생과 저 생 사이의 중간적 존재로 가탁해야 할 필요성은 연기 형식을 시간적 계기로 해석하려는 아비달마적 시도가 이루어짐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결생식의 존재에 대한 초기 경전상의 근거가 됨직한 가르침이 있기는 하다.

 

4]Pj I 78 khandhesu jyamnesu jīyamnesu mīyamānesu ca khaṇe khaṇe tva bhikkhu jyase ca jīyase ca mīyase ca

5] Kalupahana, D. J., Causality: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 p. 83.

6]Patis I 52

7]Karunaratne, W. S., The Theory of Causality in Early Buddhism, p. 41.

 

 

“아난다여, 의식이 모태에 나타나지 않을 때에도 명색名色이 모태에 결생하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여, 의식이 모태에 나타났다가 소멸하여도 명색名色이 이와 같은 상태로 출현하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8]

 

그러나 이 가르침은 의식이 어딘가(母胎)에 나타날 때 명색이 생겨난다는 식연명색識緣名色의 인과관계를 구체적 윤회과정에 적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다른 존재의 다발들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영혼과 같은 것을 윤회현상에 개입시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위 경전구절은 그대로 십이연기의 두 지분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십이연기 각 고리에 오온이 수반된다고 볼 때에 의식은 단지 강력한 원인이나 조건으로 작용하는 인자로서 육체를 수반하는 생명(名色)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8]DN II 63: viṇaṁ v hi Ānanda mtu kucchiṁ na okkamissatha api nu kho nmarpaṁ mtu kucchismiṁ samucchissathti? no h'etam bhante. viṇaṁ v hi Ānanda mtu kucchiṁ okkamitv vokkamissatha, api nu kho nmarpaṁ itthattya abhinibbattissathti? no h'etaṁ bhante

 

 

2) 죽음의 극복과 정․성

 

인간은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가슴은 무겁기만 하다. 이생에 닥칠 한 번의 죽음도 그토록 두려웠는데 끝없이 받아야 할 나고 죽음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아가 존재의 다발을 주축으로 삼는 인간은 나고 죽는 것 외에도 병과 늙음 및 대인관계․사회생활을 통하여 언제나 숱한 ‘괴로움(苦, duḥkha)'을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할 때 인간의 괴로움은 자유로운 여섯 계층(六界)의 일시적․부분적 ‘형체’를 나라고 집착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아집의 존속을 위해 떨어진 상․하 두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 ‘합쳐올림(集起)’에 기인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합쳐올라 하나의 개체를 고수하며 괴로움을 야기하는 형체․느낌․생각․결합․식별 등의 다섯 존재의 다발(五蘊)을 ‘멸함(滅, nirodha)으로써 괴로움의 근원적 극복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집기’한 다섯 가지 근간의 ‘멸함’이란, 주위 존재의 세력을 견디지 못한 붕괴와는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붕괴는 죽음에 해당하며 여전히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를 초극하기 위한 근원적인 방법으로 취해질 다섯 근간의 ‘멸함’을 위해서는 올바른 수행의 ‘길(道, mārga)'이 필요해진다. 그 길은 우선 인간의 성립과 죽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런 뒤 이를 바탕으로 바른 생각, 바른 언어, 바른 직업, 바른 삶, 바른 정신, 바른 기억 등의 일련의 행위를 확실히 수습케 하고 끝으로 바른 삼매에 듦으로서 다섯 근간의 ‘멸함’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다름 아닌 아함의 도처에 설해지고 있는 네 가지 성스런 사실(四聖諦) 및 여덟 가지 바른길(八正道)의 교설내용이다. 네 가지 사실 및 여덟 가지 바른 길의 진의를 철저히 파악하고 그에 입각해 완벽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영겁의 생사고를 뛰어 넘는다. 그래서 아함은 네 가지 사실 및 여덟 가지 바른 길에 의해 수행하는 수행자가 얻는 과보(道果)를 넷으로 갈라 설하고 있다. 곧 예류(預流:흐름에 이른 자)․일래(一來:한번이 있는 자)․불환(不還:옴이 없는 자)․아라한(阿羅漢:동등한 자)으로 구성된 沙門四果가 그것이다.

 

결국 아함은 여섯 계층의 교설(六界說)과 다섯 근간의 교설(五蘊說)이라는 이론(解)을 우선 바탕으로 한다. 그 뒤 네 가지 사실과 여덟 가지 길의 교설 및 沙門四果라는 실천원리(行)를 제시함으로서 하나의 완벽한 교리조직을 제시한다. 그것은 마치 열두 포섭처의 교설을 이론적 근거로 하여 業說이란 실천원리가 설해진 것과 같다.

 

그런데 업설이 선․악을 취급하는 데 대해 여덟 가지 길의 교설은 정․사를 문제 삼는다. 선․악이 상대적이라면 정사는 절대성을 띠고 있다.

 

선․악의 업설은 천국에 나는 것(生天)을 최고 목적으로 하여 괴로움의 상대적인 소멸을 꾀한다. 이에 대해, 네 가지 사실 및 여덟 가지 교설은 천국에도 남겨져 있는 생․사의 괴로움과 같은 절대적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 가지 성스러운 사실’을 수식하는 聖이란 술어도 눈길을 끈다. 서양의 종교학자들은 흔히 종교를 ‘성스러운 것과의 만남’이라고 말한다. 성스러운 것은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지고의 존재이며 최고의 신앙대상인 성부․성자․성신의 삼위(三位)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성스러운 실체인 삼위는 그 앞에서 원죄를 시인하며 기도하고 희생을 바치는 피조물들을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함으로써 참된 가치를 스스로 부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네 가지 성스런 사실의 성은 자못 사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사실(諦, satya)을 수행함으로써 죽음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음을 살폈다.

그런데 四聖諦와 八正道의 수행을 통하여 생사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욕망 속에서 산다면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

 

 

2. 부파불교의 죽음관

 

부파불교에서는명근(命根)이라는원리를세운다.명근jīvita-indriya」이란 인간의 생명을 유지․보존시키는 힘(능력)이라는 의미로, 『구사론(俱舍論)』에서는 14개의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중의 하나이고, 실유(實有)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명근의 본질은 수이고, 능히 난과 식을 가진다(구사론)」 「명근은 삼계의 수이다(발지론)」고 하여 육도윤회를 거듭하는 인간의 생명의 본질이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난과 식을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명근이 끊어지면 식과 난의 움직임은 없어진다. 즉 인간의 죽음을 의미된다.

 

또한 5세기경의 대주석가 붓다고사(佛音, Buddhaghosa)는 『청정도론(淸淨道論)』 제8장 수념업처 중의 사념에 대한 설명 중에서 죽음을 「하나의 존재에 있어 명근의 단절」로 정의하고 있다. 9]

따라서 부파불교에서는 생명의 근원체를 명근으로 삼았다. 따라서 부파불교에서는 명근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고, 명근이 기능을 상실할 때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고 볼 수 있다.

 

9] 죽음의 종류에 대해 복(福)과 수(壽), 또는 양쪽 전부가 떨어졌을 경우의 시사(時死)와 지금까지의 업(業)을 단절한 별도의 업(業)에 의한 비시사(非時死)로 구분하였다. 복(福)이 다 떨어진 경우의 죽음이란 생명을 존속시키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도, 다음의 생(生)을 초래할 업(業)의 결과에 의해 일어나는 죽음이다.

시대․음식․지역에 의해 백살의 수명이 다하는 것에 의한 죽음이 수(壽)가 다 떨어지는 것에 의한 죽음이다. 어떤 장소에서 죽는 결과를 초래한 업(業) 때문에 칼에 찔려죽는 것이 비시사(非時死)이다. 「팔리불교와 생명윤리」, 『인도학불교학연구』 제48권 제2호

 

 

3. 유식사상에서의 생명과 죽음관

 

부파불교에서는 생명유지의 근원을 명근으로 삼았지만, 유식에서는 「아라야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였다. 우선 아라야식에 대해 세친(Vasubandhu)의 『유식삼십송』 10] 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 중에서 변화적 성숙태(異熟)라고 하는 것은 아라야라고 불리우는 인식작용이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종자(種子)를 가지고 있다.

그것에 있어서 <내재적인> 소재(素材)에 관한 인과관계와 <외래적인> 장소의 인식을 명확히 감지할 수가 없다.11]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1) <대상과의> 접촉, (2) <대상에로의> 지향(志向), (3) <대상의> 감수, (4) <대상의>표상, (5) <대상에 대한> 심적인 움직임을 동반한다.

다만, 그곳에 있는 (3) 대상의 감수는 <감성적으로 즐거움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닌> 무기(無記)이다. 또한 이것은 궁극적인 이상의 실현을 방해하지 않는 「무복무기(無覆無記)」이다.

똑같이, <이것 이외의> (1) 대상과의 접촉 등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그것은(아라야) 강의 급류와 같이 변화를 계속한다.

그것(아라야식)은 아라한에 도달했을 때, <그> 기능을 잃는다. 12]

 

 

10]산스크리트어 제목은 Triṃśikāvijñaptimātratā-kārikā 「인식작용(識)에 관한 三十詩句」이다.

『유식삼십송』은 산스크리트어본․티베트어역․한역이 현존하고, 그 저자는 세친(世親 또는 天親Vasubandhu, 400-480)이다. 한역본은 현장(玄奘, 600-664)이 번역하였다.

『유식삼십송(Triṃśikāvijñaptimātratā-kārikā)』은, 제1송부터 제16까지는 아라야식(ālaya- vijñāna)을 중심으로 마나스(manas, kliṣṭa-manas, 말나식), 제육의식(viṣayasya vijñaptir)을 설명하고 있고, 제17송부터 19송까지는 유식무경(vijñaptimātra)의 논증, 20송에서 25송까지는 삼성설(tri-svabhāva)및 삼무자성(三無自性), 제26송부터 30송까지는 유식의 실천과정을 밝히고 있다.

현재 『유식삼십송』에 대한 1차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곳이 있다.

1. 산스크리트어본: Triṃśikā-vijñapti-kārikā by S. Lévi, Pari, 1925.

2. 티벳트역본: 북경판113-231,1-3b1

3. 한역본: 『고려대장경』 17-484, 『대정신수대장경(이하 대정장)』 31-60

11]<소연(所緣)>은 不可知(불가지)의 執受(집수, 종자․유근신)와 不可知의 處(기세간)이다. <능연(能緣)>은 不可知의 요별(了別)의 <마음>이다.

12]<산스크리트어>

tatrālayākhyaṃ vijñānaṃ vipākaḥ sarvabījakam//2cd//

asaṃviditaka-upādi-sthānavijñaptikaṃ ca tat/

sadā sparśa-manaskāra-vit-saṃjñā-cetanānvitam//3abcd//

upekṣā vedanā tatra-anivṛtākhyākṛtaṃ ca tat/

tathā sparśādayas tac ca vartate srotasaughavat//4abcd//

tasya vyāvṛtir arhatve(5a)

<한역>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2cd)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3abcd)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4abcd)

 

 

『유식삼십송』에서의 아라야식에 대한 정의를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① 아라야식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종자(bīja)가 머무는 곳이고, 일체의 종자를 가진 것이므로 일체종자식(sarva-bījaḥ vijñānam)이라고도 한다.

② 아라야식은 과거세의 행위(업)에 의한 훈습(vāsanā)을 받지만,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고 무기(無記)이므로 이숙(vipaka)이라고도 한다.

③ 인간의 생존의 근저에 있으면서 매 순간마다 작용하여 식의 흐름을 형성한다. 따라서 윤회적인 생존은 이렇게 부단히 흐르는 아라야식을 근거로 한다(윤회의 주체)

④ 아라야식은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서 찰나마다 상속을 지속하므로 잠재의식 또는 심층의식이라고도 부른다. 반대로 마나식(자아의식)과 육식은 현세적인 식(pravṛtti-vijñāna)이라고 한다. 과거의 행위에 의해 아라야식에 훈습이 남겨져 그 잠재력이 즉, 그 힘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현세적으로 나타난 것이 마나식과 육식이다.

현세화된 육식과 마나식은 기능함과 동시에 그 훈습(여습)을 아라야식 중에 남긴다. 이렇게 하여 아라야식과 현세적인 마나식과 육식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관계를 이룬다.

 

그런데 아라야식의 설명 중에 인간의 생존과 죽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제3게송의 「불가지집수처(不可知執受處)(3ab)」13]이다. 여기서는 아뢰야식의 대상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라야식의 대상은 집수(執受upādi 또는 upādāna) 와 처(處 sthāna, 세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식작용은 반드시 대상을 가지고 대상에 작용한다. 인식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은 동시에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각각의 인식작용에 의해 다르다. 예를 들어 안식(眼識)의 대상은 색경(色境)이지, 그 이외의 것은 아니다. 붓다의 경지에서는 모든 감각기관이 서로 작용하여 인식작용과 대상 사이에 자유로운 관계가 인정된다. 14]

그러나 평범한 인간의 단계에서는 각각의 인식작용과 대상과의 관계는 정해져있다. 그렇다면 아뢰야식의 대상은 무엇인가? 어떠한 심층적인 의식이라도 아뢰야식이 하나의 인식작용인 한, 역시 대상은 정해져 있다.

 

아뢰야식의 대상은 「집수(執受)」와 「처(處)」이다. 집수에 대해 『성유식론술기』에서는 「집섭(執攝)」 「집지(執持)」라고 하였다. 15]

 「집(執)」이라는 것은, 아뢰야식이 종자를 「간수하다」 하고, 종자를 「보존하다」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아뢰야식의 대상이 된다.

 「수(受)」라는 것은 「수령(受領)」․「각수(覺受)」의 의미라고 하였다. 16]

종자와 신체를 수령하여, 그것을 대상으로 하고, 유근신(身體)에 감각이나 마음의 움직임을 일으킨다. 간단히 말하면 아라야식의 대상은 「종자」와 「유근신」이다. 「종자」는 「선험적인 소질․능력․기근(機根)의 본유종자」와 「성장의 과정 속에 학습하고 몸에 붙은 신훈종자」로 구분한다.

이것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것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관계한다는 것은 동시에 집착한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심저(心底)에서 자신의 소질에 집착하고, 자신의 경험, 즉 과거에 계속해서 구애받는 존재라는 인간 인식에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소질이나 경험에 바탕을 둔 인생의 확립을 나타내기도 하였지만, 반면 자신의 인생의 한계에 대한 자각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유근신은 신체이다. 인간은 심저에서 자신의 신체를 내면으로부터 감지하고, 그것에 관계하면서 살아간다.

 

13]saṃviditaka-upādi-sthāna(3ab)

14]유식사상에서는 이를 「諸根互用」이라고 한다.

15] 『대정장』 43, 315c10-11

16]

1. 執(집) : 아라야식은 종자를 유지․보존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종자가 아라야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2. 受(수) : 受領한다는 의미이다. 아라야식은 有根身(신체)을 수령하고,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신체에 感覺이나 마음의 움직임을 일으키게 한다.

 

 

따라서 인간은 아라야식이 신체를 대상을 삼아 집수할 때만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한다. 반면 아뢰야식이 신체를 대상으로 삼지 않을 경우에는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성유식론』 권3 17] 에서는 여러 가지의 각도로 아뢰야식에 대한 논증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일반적인 상식의 논리(理證)로서 아라야식을 논증하는 것 중에서 4번째의 논증은 「선업에 이끌여 무기인 제팔식(아라야식)이 근원이 되어 우리들의 신체는 감각, 지각 등의 활동을 한다」 18] 고 하였고, 5번째 논증에서는 「수․난․식은 서로를 의지하며, 상속하고 지속한다. 그리고 수와 난를 가지고 끊어짐이 없이 지속시키는 것이 식(아라야식)이다」 19] 고 하여 우리들의 신체를 유지시키는 것을 아라야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아라야식의 6번째 논증 중에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17]『대정장』 31, p. 14a-17b

18]『대정장』 31, 16b20-16c5

19]『대정장』 31, 16c6-16c23

 

 

「또한 죽음을 맞이할 때는 선악(善惡)의 업에 말미암아 하반신부터 상반신에 냉촉이 점차로 일어난다.」20]

20]又將死時由善惡業 下上身分冷觸漸起 若無此識彼事不成......(『대정장』 31, p. 17a, 13-14)

 

또한 『유가사지론』 권1에는

「장차 임종을 맞이할 때 악업을 짓은 자는 (中略) 상체는 점차로 냉촉(冷觸)이 일어난다」 21]

21] 「將終時 作惡業者 識於所衣從上分捨. 卽從上分冷觸隨起」

 

『섭대승론』에서도

「악업을 짓고 선업을 짓어 장차 죽음을 맞이할 때, 혹은 하체(下體), 혹은 상체(上體)의 소의가 점차로 차가워진다」 22]

22]「將沒時造善造惡. 或下或上所衣漸冷」

 

그리고 『섭대승론』을 주석한 무성23]과 세친24]의 양주석서(兩註釋書)에서도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주석하고 있다.

23]「將沒時者 謂將死時 若造業者. 卽於其身下分漸冷」(『섭대승론석』권3, 無性著)

24] 「將捨命時 造善造惡. 或下或上身分漸冷」(『섭대승론석』권3, 세친著)

 

 

이와 같이 유식논서의 대부분은 인간의 육체가 죽어 갈 때는 상체와 하체가 차갑게 된다는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때 신체가 차갑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계속해서 『성유식론』권3에서는

 

「오직 이숙심(아라야식)만이 먼저의 업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두루 상속하여 신체를 집수한다. 집수(執受)를 버린 처(處)에 냉촉(冷觸)이 생기한다. 수․난․식의 3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이하생략)」 25]

25] 唯異熟心 由先業力 恒遍相續執受身分 捨執受處冷觸便生 壽煖識三不相離故(『대정장』31, p. 18-20)

 

라고 하여 아라야식이 신체를 집수(執受)하면 신체를 유지하지만, 아라야식이 신체를 집수하지 않을 때는 처(處-감각기관)가 차갑게 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유식사상 입장에서의 인간의 죽음은 아라야식이 신체의 집수를 버릴 때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아라야식으로부터 집수를 받지 못하여 냉촉(冷觸)이 일어나면 인간의 신체는 다음과 같이 된다고 『성유식론』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즉, 「냉촉이 일어난 處(신체)는 비정(非情)이 된다. 아라야식이 변연(變緣)한 것이지만, <아라야식이> 집수하지 않은 것이다」 26] 고 하여 신체가 차가워진 상태는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또한 아라야식으로부터 변현한 것이지만 아라야식으로부터 집수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유식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포함한 세계는 아라야식의 변현이다.

그러나 인간과 器世界(세계)의 차이점이 있다. 인간도 세계도 아라야식으로부터 변현된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세계는 아라야식에 집수되지 않지만, 우리들의 신체는 아라야식에 집수된다는 것이다.

아라야식의 집수에 의해 우리들의 신체는 체온을 유지하여 차갑게 되지 않는다. 즉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야식이 신체의 집수를 포기하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개체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26] 冷觸起處 卽是非情 雖變亦緣而不執受(『대정장』 31, p. 17a19-20)

 

 

Ⅲ. 불교의 육도윤회설

 

불교에서는 깨치지 못하면 죽어서도 윤회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윤회설을 검토해보자.

 

윤회설은 말한다.

“네 전생을 알려거든 현재의 삶을 보아라. 그리고 내생을 알고자 하거든 현재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을 보아라.”

 

이처럼 윤회설은 자신의 모든 잘잘못의 책임을 스스로 지게 되며, 세상의 모든 일은 因果의 엄정한 법칙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므로 인간은 그 법칙을 알아 지혜롭게 살아가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부와 명예와 건강은 모두 지난날의 선한 행위와 노력에 의한 것이고, 가난과 천함과 질병은 게으름과 오만함 등 악한 행동에 따른 결과이다. 따라서 보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악한 의지와 행동을 반성하고 선해지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윤회설을 교리의 중요한 부분으로 채용하고 있는 불교에서는 생명체가 나고 죽는 과정과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점철된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들에 관한 자료들은 소멸되지 않고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쌓여 항공기의 블랙박스 기록처럼 보조된다.

그렇게 보존된 자료들은 다음 생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자료의 질과 양에 따라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여섯 갈래로 태어나게 된다.

 

지옥은 온갖 고통이 심하 세계로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열 가지 나쁜 업을 저지른 결과로 이르게 되는 곳이다. 아귀는 배고픔의 세계로 지나치게 음식을 탐하고 남에게 인색한 사람이 가는 곳이다. 소나 말, 돼지 등 동물의 세계인 축생의 세계는 감정에만 치우쳐 아주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 사람이 가는 세계이다.

이들 지옥, 아귀, 축생은 육도 가운데서 고통만을 받은 세계이므로 三惡道라고도 부른다.

 

아수라는 싸움을 좋아하여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교만하고 성내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게 된다. 삼악도보다 지혜는 있으나 나라는 자의식이 강하기에 고통이 심한 세계이다. 고통과 즐거움이 공존하고 있는 인간계는 크게 고통을 받을 만한 악행이나 행복만을 약속받을 만한 뛰어난 선행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경우에 태어나게 된다.

 

다른 세계에서는 지은 바 복과 죄에 따른 보상과 벌이 있을 뿐인데 비해, 고통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인간계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고통과 즐거움을 맞볼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천상에 나거나 지옥에 나게 하는 선업과 악업을 짓는 것은 오직 인간계에서만 가능하고, 수행을 통해서 성불을 하는 것도 인간계에서만 가능하다.

 

인간계보다 한 단계 위인 천계는 괴로움은 적고 평화롭고 즐거움으로 가득찬 세계이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만 하면 해결된다는 천계는 열 가지 착한 업(십선업)을 지으면 태어날 수 있다.

 

선한 업을 많이 지으면 향상의 세계, 즉 하늘 세계에 태어나 즐거움을 누리고, 악한 업을 지으면 지옥이나 아귀, 축생 등의 삼악도에 태어나 고통을 받는다는 불교의 이러한 윤회설을 육도 윤회설이라고 한다.

 

 

 

Ⅳ. 티베트 불교사의 전개와 티베트 사자의 서에 나타난 죽음관

 

논자가 고찰하자고하는 사자의 서는 티베트 불교의 진언밀교의 성전이다. 사자의 서에 나타난 죽음관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사자의 서에 나타난 티베트불교의 죽음관

 

티베트의 사자의 서는 1.200년전 파드마삼바바라는27] 인도의 승려가 히말라야 설산에서 발견한 몇 안되는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남긴 인도의 고문서를 번역하여 100권에 달하는 책을 만들었는데 그중 한 권이다.28]

그러나 그는 이것이 세상에 나올 때가 아니라 판단하여 히말라야 동굴속에 각각 숨겨 놓고 그 제자들 중 환생의 능력을 전수받은 자들에게 적절한 시기에 환생하여 이 책들의 진실이 밝혀지도록 하였다.

시대가 흘러 환생한 제자들에 의해 하나둘 그 책들이 세상에 빛을 보기 시작한바 이들을 테르퇸(보물을 찾아내는 자)라 명하며 그들이 찾아낸 책들만 해도 65권에 이르고 있다.

 

그중 가장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 칭해지는 퇴르텐 릭진 카르머 링파가 찾아낸 비밀의 책이 바로 가장 심오한 뜻과 진리를 갖고 있다 칭송되고 있는 <티벳의 死者의 書>이다.

 

27]파드마삼바바는 티벳어로 ‘연꽃 위에서 태어난 자’란 뜻이다. 그래서 파드마삼바바는 연화상생사로 흔히 번역된다. 연꽃 위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순수하고 순결한 상태에서 태어났음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티벳인들은 그를 구루 린포체 곧 ‘소중한 구루’라고 부르며, 단순히 구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파드마삼바바의 추종자들은 그를 고타마 붓다의 화신으로 여긴다. 그는 티벳 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학파인 닝마파 종의 중심 인물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북인도 지방에서 기적을 보이면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인도 전역을 여행하면서 여러 대스승 밑에서 배웠으며, 마침내 탄트라의 명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자 티벳의 티송데첸 왕이 그를 초정해 불교를 전파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물리치게 했다. 그는 티벳과 인접 지역들을 유랑하면서 많은 비밀 경전들을 여러 곳에다 숨겨 두었다. ‘테르마’라고 불리는 이들 보물들은 그의 계획대로 훗날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인물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28]목판과 그 밖에 티벳 자료들을 통해 볼 때 『티벳 사자의 서』는 서기 8세기 파드마삼바바의 시대로부터 유래된 것임을,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시대에 처음으로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파드마삼바바가 직접 지은 것이기라기보다는 고대로부터 구전되어 내려온던 내용을 그가 최초로 기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전은 그 후 줄곧 숨겨져 있다가 세상에 알려질 때가 되었을 때 릭진 카르마 링파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

 

 

사자의 서는 그 원제목이 <바르도 퇴돌>이었다. 이 뜻은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길’이란 것으로 인간이 환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사후의 유일한 기회에 대해 적혀있다.

 

사자의 서의 가치를 다시 정리해 본다면 티베트의 밀교승들은 죽음의 세계까지도 분석하였다. 그것은 이집트 사람을 제외하면 유일한 본격적인 분석이었다.

티베트밀교는 우리에게 「죽음을 배워라. 그러면 삶까지도 배우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티베트밀교에 의한 죽음의 세계를 탐구한 사자의 서(Book of Dead)는 29] 수천년 동안 티베트에 비밀로 전해오다가 서양의 학계에 소개되어 커다란 충격을 주었는데, 그 충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음천도밀법」은 일천 수백년 동안 전해져 온 진언밀교의 성전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임종, 그리고 재탄생까지 49일간의 모습이 선명한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영혼이 육체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고, 영혼이 육체의 모습을 갖지 않은 상태인 죽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것이고 다만 영혼의 무한한 여행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갓난 아기가 이 세상에 눈을 떠서 이 세계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듯 죽은 자는 사후세계에 눈을 떠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 책을 깊이 연구한 W․Y․웬즈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이 넌즈시 가르쳐 주는 참다운 과학적, 요가적 방법에 의한 인간이라고 하는 그 알지 못할 존재에 대한 탐구야말로, 지구 밖의 세계를 탐험한다고 자랑스러워 하는 그런 차원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육체가 달 또는 금성 그리고 그 어떤 천체 위에 서 본다는 것은 아마 인간의 지식에 보탬이야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수롭지 못한 지식을 좀 더 걷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이 책에서의 현인(guru)의 가르침처럼 사물을 넘어선 초월, 바로 그것이다.」라고 격찬하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이 사후 다른 생을 얻기까지 49일동안 흔히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상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티벳 사자의 서』가 요가에 바탕을 둔 하나의 의식이며 주된 내용이 탄생과 죽음과 환생의 과학이고 우주에 살고 있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한. 비록 엄격히 말해서는 탄트라는 아닐지라도 탄드라적인 작품이라고는 할 수 있다.

 

29] 티베트의 「사자의 서」는 불교적 시간관에 기초를 둔 것이지만, 사람이 죽은 후 49일 동안의 의례를 통하여 처음에는 사자가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열반에 들도록 도와주고, 후에는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돕는 책이다. 파드마삼바바가 지었으며, 1927년 에반스 웬즈에 의하여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되어 서구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국내에서는 두 가지 번역본이 있다.

백봉호, 『티베트 사자의 서』, 경서원, 1984.

류시하, 『티벳 사자의 서』, 정신세계사, 1995.

 

 

1) 죽음에 임하는 자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많은 인간과의 만남과 재화를 소유한다. 그러나 죽을 경우 이 모든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를 가지고 떠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죽는 인간은 오직 영혼인 진정한 자아만을 가지고 떠난다. 인간이 죽어갈 때 그는 그 어떤 이승에 대한 집념과 아집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 집념과 아집, 즉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지고 있는 물건에의 욕심, 이루고자 하는 일에 대한 집착, 등 비록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던 부정적인 것이던 사후의 순수한 영혼에 욕망이 되어 업과의 관계로 이끌려 지게 되기 때문이다. 30]

인간은 스스로가 죽음에 임박했음을 알 수 있을 경우 미리 슬픈 이별의 인사를 끝내고 재화를 청산하며 이승에 아무런 미련이 없어야만 한다. 죽음에 임박할 경우 친지나 가족들이 옆에 있는 것은 사자의 미련을 불러 일으켜 환생의 길로 접어들게 함으로 금지하는 것이 좋다. 31]

그러나 그의 정신적 스승인 ‘포와 수행의 스승’만은 곁에 두어야한다. 그 스승은 생전의 정신적 인도자로써 그 포와 수행의 방법으로 인해 사자의 영혼을 머리끝에 있는 정수리(天門)로부터 영혼이 빠져나가 좀 더 해탈의 빛과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며 죽은 자에게 사자의 서를 읽어주어 죽음으로 인해 베풀어지는 마지막 해탈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준다.32] 이 때 시신의 몸에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의 귀에 대고 이 사자의 서를 읽어 주어야 한다.

 

죽음에 임하는 자는 평온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현재까지의 삶에 무엇보다 만족을 가져야만 하고 더 이상의 욕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30]류시화 『티벳 사자의 서』, 정신세계사, 1995, p. 73.

31]티벳 불교뿐 아니라 티벳인들 대부분이 임종하는 자의 몸을 만져서는 안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의식체의 정상적인 이탈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들은 의식체의 정상적인 이탈은 머리 정수리에 있는 브라흐마의 구멍을 통해서 일어나야만 한다고 믿는다. 만일 브라흐마의 구멍을 통해서 이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체의 다른 구멍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고, 따라서 인간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32] 백봉초 『사자의 서』, 경서원, 1984, pp. 26-27.

 

 

2) 죽음의 과정과 사후의 세계

 

(1) 육체와 정신의 분리

 

인간의 몸과 정신은 죽음과 함께 그 해체의 국면을 맞게 된다. 죽음이란 의학적으로 외적인 호흡이 멈추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나 불교의 관점에서는 내적 호흡의 멈춤이 진실된 죽음의 시작이다.

 

죽음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즉 이별의 슬픔이나 세상에의 미련에 의한 고통일 것이다.

이에 외적 해체가 시작되는바 외적 육체의 해체는 우리의 사물을 느끼는 다섯 가지 감각의 둔화와 상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몸을 구성한다는 5요소인 地, 水, 火, 風, 空의 점진적 해체가 이루어진다.

 

먼저 땅의 정기로 나타난 살과 뼈 냄새를 맡는 기관에 이상에 생겨남에 육신의 힘이 떨어진다.

두 번째로 혈액 등 몸안의 체액을 구성하는 水의 기운이 다해 그 배설이나 눈물의 통제력이 없어지고

세 번째로 火의 인자에서 비롯되는 몸의 온기와 혈색이 사라진다.

네 번째로 몸의 활력을 상징하는 에너지의 발원체인 風의 기운이 다해 사고의 감각이 없어지며 호흡이 어렵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 空으로 그 육체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33]

 

33]죽음의 세 가지 중요한 현상들이 여기에서 몇 개의 원소들로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첫째, 신체의 압박감을 ‘흙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둘째, 몸이 마치 물 속에 잠기듯이 신체의 끈적끈적하고 차가운 느낌은 점차 뜨거운 열의 느낌으로 녹아드는데, 이것을 ‘물이 불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셋째, 몸이 원자들로 날아가 버리는 듯한 느낌을 ‘불이 공기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각각의 징후에는 신체의 외적 변화가 따른다. 이를테면 안면 근육을 조절하는 기능이 상실된다든가, 청각을 잃는다든가, 시력을 잃는다든가, 의식의 상실 직전에 숨을 헐떡거린다든가 하는 것 등이다.

 

 

이후 내적호흡이 멈추기까지 인간 영혼의 해체가 시작된다.

이것은 순수한 영혼의 해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이승의 삶으로 인해 첨가되어 있는 사상의 가치관이나 감정을 말한다. 즉 학습과 수행으로 닦아낸 모든 이성의 해체를 말하는 것이다.

내적 해체는 임신의 과정을 역으로 나타냄과 같다. 어머니의 뜨거운 정수와 아버지의 차가운 정수가 심장에서부터 갈라져 분리되고 희노애락의 감정이 사라지며 死者는 무의식의 혼미한 상태로써 자신의 존재마저 깨닫지 못하고 단지 의식 없는 영혼의 존재만이 빛으로 남는다.

이 시점부터의 죽음의 과정은 모든 세상만물에게 나타나며 이 순간부터 영혼이 해탈을 가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2) 사자의 힘든 여행 - 바르도의 세계

 

내적 해체가 거의 끝에 다다를 무렵 영혼은 미약하나마 스스로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의식을 갖은 상태가 되어 있다. 이때부터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 즉 인간계와 사후5계의 경계선을 의미하는 바르도라는 세계가 시작된다. 인간이 이 바르도의 세계에 머무는 시간은 49일이다.

 

먼저 머리 위로부터 투명한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광명의 빛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상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인간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관념이다. 그 잘못된 관념에서 나온 생각들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관념이다. 그 잘못된 관념에서 나온 생각들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한 그는 정신적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종교에서는 그 정신적 장애를 무지 또는 무명이라고 부른다. 이 무지는 참 지식을 얻는 데 방해가 된다.

불분명하고 잘못된 과념들을 모두 치워 버렸을 때만이 비로소 무지의 생각들이 지배하지 않는 마음의 근본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을 때 『티벳 사자의 서』에서 말하는 다르마카야의 최초의 투명한 빛이 밝아 온다.

 

무지로 어두워진 인간의 마음은 곧잘 두터운 먼지로 덮인 거울이나 흙탕물로 가득한 수정 꽃병에 비유하기도 한다. 요가는 거울에서 먼지를 닦아내고 물에서 흙 알갱이를 걸러내는 과학적인 방법이다. 마음의 그런 식으로 맑고 투명해졌을 때만이 마음은 비로소 존재의 근원에서 비치는 빛을 반사할 수 있다. 그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

 

이 빛은 어떠한 세계를 의미하는 구성된 천국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빛은 순수한 만물의 근원 그 자체이다. 이것이 해탈의 길이며 이를 따라가는 사자의 영혼은 영원한 환생의 굴레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34]

 

“그러나 내적 해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사자는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너무도 희미하고 무엇보다 그 빛을 따라가려 해도 영혼은 육체와 같은 물리력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마음에 집중력과 목표의 지향을 갖고 혼신의 힘을 다해 떠올려야 비로소 움직이게 되는바 그 빛을 잡기란 너무도 힘든 것이다.” 35]

 

광명의 빛이 사라지면 여러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시점이 다르마타 바르도라 불리는 사자의 힘든 49일의 여행의 시작이다. 36]

이 순간 사자는 영혼과 분리된 스스로를 인지하는 감정을 되찾게 된다. 그는 그의 현재 이전의 전생을 알게 되고 그가 영혼의 상태임을 깨닫게 된다. 이에 사자는 자신의 죽은 시체를 돌아보게 되고 그 시신의 안으로 들어가려 하기도 하며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접근을 시도한다.37]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소용없음에 절망과 슬픔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먼저 행복과 기쁨의 42신, 그리고 분노와 슬픔의 58신이 만물의 근원이자 형태라 하는 만다라를 구성하여 사자에게 보여지게 된다. 38]

만다라란 세 개의 중심 차크라와 관련해서 세 개의 중심 만다라가 있다. 신비한 신들의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만다라들은 다시 열네 개의 만다라로 나누어진다. 그것들은 우리의 경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르도의 처음 14일(7일+7일)에 해당한다.

 

34] 류시화, 『티벳 사자의 서』, 정신세계사, 1995. p. 86.

35]위의 책, p. 86. 36]앞의 책, p. 268. 37]위의 책, pp. 86-87. 38]위의 책, pp. 492-493.

 

 

세 개의 중심 만다라 중에서 첫 번째 것은 42명의 신들을 담고 있다.

이 만다라는 여섯 개의 만다라로 나뉘며, 이것은 초에니 바르도의 처음 6일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은 가슴 에너지 센터(아나하타 차크라)로부터 나온다.

 

두 번째 만다라는 열 명의 중심이 되는 신들을 담고 있으며, 일곱째 날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은 목 에너지 센터(비슈타 차크라)로부터 나온다.

 

세 번째 만다라는 58명의 중심 되는 신들을 담고 있고, 일곱 개의 만다라로 나뉘며, 초에니 바르도의 처음 6일에 해당한다. 이들은 머리 에너지 센터(사하스라라 파드마)에서 나온다.

 

처음의 42신과 마지막의 58신이 합쳐져 100명의 최고신들로 이루어진 대만다라를 만든다. 이들 42신은 평화의 신들이라 불리고 58신은 분노의 신이라 불린다. 그리고 나머지 열 명의 신들은 목 에너지 센터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들은 가슴 에너지 센터의 42신과 머리 에너지 센터의 58신들의 중간에 나타나며, 42 평화의 신들과 함께 분류된다. 이들의 모두 합쳐지면 110명의 신들로 이루어진, 초에니 바르도 전체의 더 큰 만다라를 형성한다.

 

사자는 그들의 모습과 그들이 사자에게 쏘아내는 빛에 무한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 순간 그 신들의 빛 뒤에는 사자가 인지 할 수 있으며 신의 만다라에서 쏘아내는 두려울 정도로 강렬한 노란색의 빛에 비해 은은하며 희미하고 친숙한 빛이 유형의 통로를 형성해 나타난다.

그 빛들은 각각 흰색, 희미한 노란색, 녹색, 빨간색, 파란색, 그리고 검은색으로 성냄, 탐욕, 무지, 욕망, 질투, 자만심을 근원으로 하여 6계에 환생의 통로가 된다.

사자의 감정은 신에의 두려움에 자신의 전생에 친숙했던 것으로 기울고 그것이 그의 탐욕이었던 이기심, 자만심, 질투, 또는 선한 마음이던 간에 그의 영혼을 이끌게 된다. 사자의 이승에서 지배적이었던 감정은 필연적으로 신의 만다라 뒤에 나타나는 종류별의 색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이 죽음으로 인해 전생의 업과 일순간 분리되었던 순수한 본성의 영혼이 다시 그 업과 맺어지는 이유이고 인간 윤회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에 사자가 흰색의 빛을 따라가면 신계로, 녹색을 따라가면 아수라계, 희미한 노란색은 축생, 빨간색은 아귀계, 그리고 검은빛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 그중 파란빛이 인간계로의 환생이다.

 

사자가 신의 만다라에서 받은 공포에 의해 도망을 결정하고 6가지 희미한 빛을 따르는 바 이시점이 49일의 끝에 해당하며 사자의 영혼은 인과율과 업에 의해 운명 지워진 부모의 수정을 통해 자궁에 들어가거나 타계로의 환생으로 다시 윤회의 굴레를 겪는 것이다.

 

 

3) 죽음에의 대비

 

(1) 죽는 자의 목적

 

사자의 서에 기초할 경우 우리는 삶의 최대 비극인 죽음을 맞이할 때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을 이룰 수 있는, 모든 고뇌의 늪을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해탈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 39]

우리는 수많은 죽음과 삶을 영겁의 세월을 통해 경험했으며 매번 그 해탈의 기회를 무지함과 아집으로 놓쳐버렸기에 지금 인간세에, 다른 5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해탈의 기회를 잡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자의 서는 또 티벳의 고승들은 하나같이 수행으로 인한 인간정신의 고양과 무아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 인간정신의 수행이 엄청나게 많은 방법이 있으며 그것은 불교와 각종 종교의 고된 수행이나 이타적인 삶, 계율에 복종하는 삶 등으로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사자의 서에는 포와 수행이라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나 가장 고되고 힘든 것이며 무엇보다 엄격한 수행의 경지에 이른 스승의 가르침 없이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스스로 생각해서 수행을 할 경우 인간정신의 파탄을 가져와 영원히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포와 수행만을 통해 또 힘든 수행만을 통해 바르도의 광명의 빛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세상에서 선하고 성실한 마음 즉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는 불교의 무아, 무심의 경지를 갖는 인간은 죽음의 순간 희미한 무의식 속에서 오랜 그의 삶에 습관으로 인해 영혼 깊숙이 자리 잡은 영혼의 본질을 상기해내 그와 가장 친숙한 광명의 빛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이다.

 

39] 앞의 책, p. 94.

 

 

(2) 이승에서의 해탈의 구체적 방법

 

우리는 살아가면서 욕심을 절제하고 인간의 삶에 덧없음을 깨달아 자연스런 죽음의 때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을 경우 그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를 마음깊이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 그의 가르침과 존재가 사후에 희미한 의식 속에서 하나의 지표가 되어 광명의 빛을 잡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광명의 빛은 인간의 감정에 얽히지 않은 순수한 본성에 상징이며 그것이 구현된 것이고 따라서 훌륭한 인간 스스로의 본성의 자각과 일치되기에 이를 따르면 구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죽음에 이르러 죽는 자세도 중요한바 싯타르타의 옆으로 누워 있는 자세가 상징하는 것이 바로 죽는 자의 자세로 이상적이다. 물론 깨우친 자는 죽음에 이르러 ‘사자의 잠자는 자세’로 죽는다. 40]

그는 사자와 같이 앉은 채 웅크려 시선은 빛이 비치는 정면을 향한다. 그는 광명의 빛이 비치는 바를 두 눈으로 정확히 인지할 수 있고 혼미한 의식의 분해 순간에도 스승과 자신의 깨우친 본질적 진리를 놓지 않을 수 있다. 이승에서의 엄격한 수련이 그를 그렇게 강한 의지와 집중력의 소유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에 비해 수련이 약한 자는 옆으로 누워 자는 자세로 죽음에 임해야 한다. 영혼이 분해를 겪어 육신에서 빠져나갈 때 머리위의 정수리를 통한 天門을 거치지 않고 다른 신체의 구멍을 통할 경우 환생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이에 옆으로 누운 자세에서 항문이나 생식기의 통로를 봉하고 오른쪽으로 누워 오른손으로 턱을 괴어 오른 콧구멍을 봉한 자세에서 천문을 위로 향할 경우 가장 해탈의 빛을 감지하기 쉽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승에서의 모든 집착과 미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티벳의 경우는 뛰어난 포와 수련의 스승이 사자의 영혼을 정수리에서 그의 수련력으로 뽑아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혼이 천문을 통해 나온 뒤 광명의 빛을 찾아 뛰어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사자의 정신력 여부에 달렸고 스승은 오직 좀 더 가까운 위치에 그의 영혼을 이끌어 줄 뿐이다. 지금 우리 삶에서의 정신력과 탐욕의 절제가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40] 위의 책, p. 242.

 

 

4) 죽은 후 해탈의 방법

 

해탈이란 죽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그 해탈의 방법을 배웠다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와 함께 망각해 버린다. 이에 그 광명의 빛을 인지하지 못하고 또 바르도의 49일의 여행기간 중에도 계속 나타나는 신의 본질을 알지 못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여 끝내 자신의 업을 스스로 찾아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사자는 알아야만 한다. 아니 알도록 노력하고 죽는 직전까지 마음깊이 새겨야 한다.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죽은 후에 영혼은 순간적으로 가장 순수한 본성으로 돌아오게 되고 여기서 그 업과 철저한 분리를 겪는다. 물론 이 순간은 아주 짧아 손가락을 세 번 퉁기는 정도의 시간이다. 이후 49일의 여행에서 이승에서의 자신의 삶을 철저히 하나하나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많은 신들과 빛을 경험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죽은 후에도 자신의 근본적인 영혼의 본성이 모든 자신의 인간세계에서의 가식과 조작된 영혼을 돌아보게 되고 나타나는 모든 신들 역시 스스로의 영혼의 본성이 발현된 진리인 것이다.

이에 나타나는 모든 빛이 공포스러움과 신들의 모습은 자신의 영혼이 나타나는 진리의 일면이기에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말고 그 안에서 스스로의 영혼을 쉬게 해야 한다.

더없이 평안한 마음가짐으로 그들을 지향할 때 비로소 영혼은 광명의 빛을 향하는 것이다. 이렇듯 바르도의 세계는 49일간 꾸준히 해탈의 기회를 제공하나 인간은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기에 사자의 서를 통해 미리 가슴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Ⅴ. 사자의 서에 나타난 죽음관의 현대적 의의

 

결론적으로 우리는 때때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궁금해 한다. 그 마음 상태가 어떠하든지 지금 우리의 마음상태 그대로,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가 지금 사는 모습 그대로와 다름없다고 답한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바로 지금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죽음의 순간에, 죽음 이후에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

누구나 그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죽게 마련이다. 그러한 까닭에 지금 이 삶에서 할 수 있는 한 마음의 흐름을 정화하고 자기 자신과 그 성격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즉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죽음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죽는 그 순간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가?

우리가 삶의 시간 동안 부정적인 업을 많이 축적했을지라도 죽는 순간 진정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미래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왜냐하면 죽는 순간 카르마를 정화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강력한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 마음의 상태는 매우 중요하다.

 

불교 가르침의 근본 메시지는 우리가 죽음을 제대로 준비한다면 죽음과 삶 모두에 커다란 희망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불교는 삶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아무런 한계 없는 자유를 성취할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데, 그런 자유는 바로 지금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 죽음을 준비하고 수행을 충실히 닦은 사람에게 죽음은 패배이기는 커녕 승리, 삶의 가장 영광스런 성취의 순간이다.

 

사자의 서에 담겨있는 중요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을 것이다.

 

 

“1) 윤회계의 모든 존재들이 처한 상황과 장소와 조건들, 그리고 인간계와 천상계와 지옥계들은 모두 전적으로 현상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단지 현상(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2)모든 현상은 윤회하는 마음에게만 나타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덧없는(영원하지 않은) 것이고, 환영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3) 천신들이나 악마들이나 신령들이나 중생들과 같은 존재들은 사실 어떤 곳에도 없다. 이 모두는 원인에 의존한 현상일 뿐이다.

 

4) 이 원인이란 육체적인 감각과 변하기 쉬운 윤회의 삶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5) 이 원인이 완전한 깨달음(대지혜)으로 극복되지 않는 한 죽음은 태어남을 뒤쫓고 태어남은 죽음을 뒤쫓아, 현명한 소크라테스까지도 믿었듯이 그것은 끝이 없다.

 

6) 사후세계는 그 조건만 다를 뿐 인간 세상에서 만들어진 현상들의 연속이다. 이 두 세계는 똑같이 카르마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7) 죽음과 환생 사이의 중간 상태(바르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이 생에서 어떤 행위들을 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8)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꿈의 연장이다. 일종의 4차원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곳에서, 꿈꾸는 자의 생각에 담긴 내용들이 곧바로 환영으로 나타난다. 그런 영상들이 그곳에는 가득 차 있다. 만일 좋은 카르마를 지녔다면 행복하고 천국 같을 것이고, 나쁜 카르마라면 비참하고 지옥 같은 환영들일 것이다.

 

9)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않으면 카르마 법칙에 따라 천상계나 지옥계로부터 또는 바르도 세계로부터 곧바로 인간 세계에 환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10) 완전한 깨달음은 윤회계가 또는 존재 그 자체가 하나의 환영이며 실재하지 않는 허상임을 깨닫는 데서 얻어진다.

 

11) 이런 깨달음은 인간 세계에서도 가능하고, 인간 세계에서 맞이하는 임종의 중요한 순간에서도 가능하며, 사후세계의 전과정 곧 바르도 상태에서나, 아니면 인간계가 아닌 어떤 다른 세계들에서도 가능하다.

 

12) 명상 수행, 다시 말해 ‘바른 지식’에 이르기 위해 마음을 집중 할 수 있도록 사념을 조절하는 수행은 필수적이다.

 

13) 이 명상 수행은 스승 또는 교사의 가르침을 받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14) 이번 세계의 주기에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위대한 스승은 고타마 붓다이다.

 

15) 그의 가르침은 그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죽음과 환생의 순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윤회의 대양을 건너 니르바나에 이르기 위해 아득한 세월 이전부터 수많은 붓다들이 인간세계에 폈던 것과 똑같은 가르침이다.

 

16) 아직 환영의 그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이 세계나 다른 세계들에 존재하는 영적으로 더 많은 깨달음에 이른 보디사트바(보살)들이나 스승들은 자신들보다 뒤쳐져 도(道)의 길을 걸어오는 제자들에게 거룩한 축복과 능력을 베풀 수 있다.

 

17)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회계로부터 해방이며,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있다.

 

18) 이 해방은 니르바나(모든 고통과 번뇌가 끊어진 경지)를 실현하는 데서 얻어진다.

 

19) 니르바나는 극락과 천상계와 지옥계와 그 밖의 모든 세계들을 초월한 경지이며, 윤회에서 벗어나 있다.

 

20) 그것(니르바나)은 온갖 슬픔의 소멸이다.

 

21) 그것은 존재의 근원이다.” 41]

 

 

41] 류시화, 『티벳 사자의 서』, 정신세계사, 1995, pp. 139-141.

 

 

마지막으로 사자의 서의 내용을 현대인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부분을 현대적 언어로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 인간들에게 가르친다. 모든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임종 때, 호흡이 끊어지면 영혼은 육체의 중추에서 떠나가는 것이다.

 

육체로부터 떠나간 영혼은 처음에 희미한 어둠 속에 떠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대개는 곧 밝고 맑은 빛을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하여 영혼은 아픔으로부터 해방된 매우 평온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굉장한 소리가 들린다.

 

많은 영혼은 그것을 겁낼 것이다. 즉, 영혼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육체는 죽었지만 새로운 몸이 생겼다고 많은 영혼은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몸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투명하게 무게가 없으며 공중에 떠서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는 육체의 죽음을 알고 절망하거나, 혹은 육체가 죽은 것을 잘 모르고 죽은 곳에서 헤매고 있는 영혼도 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은 빛속을 더욱 날아가서 전에 죽은 육친과 친구들의 영혼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말없이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다.

 

그 후 영혼은 이상한 거울도 보게 될 것이다. 이 거울에는 생전에 그 사람이 행한 행위와 생각의 모든 것이 비쳐진다.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이 비쳐질 때 영혼은 편안해 진다.

그러나 나쁜 행위와 나쁜 생각은 비쳐질 때 영혼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 시련을 불에 데는 것처럼 느끼는 영혼도 있다. 견딜 수 없는 목마름과 무서운 한랭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또한 더욱 밝은 빛속으로 날아가는 영혼도 있다.

 

이 여행은 길다. 혹은 짧다. 도중에 암흑과 빛이 번갈아 나타난다. 그리고 조만간 많은 영혼이 무한한 하늘을 빠져나가 마지막 어두운 길에 들어가게 된다. 그 길은 좁고, 괴롭고, 길고, 혹은 짧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둡고 좁은 그 길의 저 쪽에 다시금 빛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영혼의 세계의 빛이 아니라 다시금 이 세상의 빛이다. 많은 영혼은 이렇게 하여 다시금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전에 살고 있었던 것과 같은 곳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많은 영혼이 아주 다른 곳에 닿는다. 그리고 다시금 어둡거나 혹은 밝고, 길거나 혹은 짧은 육체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에 표현된 밝음․어두움․길․거울․번개불 등은 모두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생을 마치고 다음 생을 받기 위하여 생전에 자기 자신이 지은 業(Karma), 즉 카르마의 환각을 체험하며 49일간의 중음계를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49일간의 하루하루는 자기 자신의 의식구조 속에 고여 있던 이 세상에서의 업이 가시적 환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살아서 이웃에게 베풀고 착하게 산 사람은 역시 죽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고, 악하게 산 사람은 그 업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자기심판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자의 서」에 있어서는 궁극적인 목적은 중음계를 여행하는 사자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이 모두 환각임을 자각시키는 일이다. 더불어 그 어느 환각에도 휩쓸리지 않는 생명의 비밀을 깨달아서 지혜를 얻자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서구에서는 인간의 초심리 현상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나온 보고서를 보면 「사자의 서」와 통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이 점이 서구인들을 경탄케 하고 있다.

 

아래와 같은 귀절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풍요 속에서 살면서도 빈곤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어머니의 자장가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날 자여, 연속되는 환각으로 하여 슬픔과 기쁨의 소용돌이에서 너는 길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감정에도 물들게 하지 말라. 네가 보다 높은 세계에 태어날 운명이라면 그 세계의〈비전〉이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다시 태어날 자여, 네가 이 세상에 남기고 온 재물들과 소지품들이 타인의 손에 넘어감을 보고 너는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는 너를 어둠과 괴로움의 세계로 끌고 갈 뿐이다. 설령 너에게 속계의 재물을 준다 해도 너는 가질 수 없다. 집착을 버려라…」

 

 

 

Ⅵ. 맺는 말

 

논자는 초기 불교, 부파불교, 유식불교, 그리고 티벳트불교의 죽음관을 살펴보았다. 모든 불교의 죽음관을 통하여 이런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고 본다. 죽음의 문제가 마음의 문제라면 궁극적으로 불교 최고의 경지인 열반에 도달해야 한다. 불교는 항상 허무주의에 대항하여 왔다.

따라서 허무주의의 극복이라는 불교 전반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죽음의 문제도 이해되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죽음도 곧 삶이며, 열반’이라는 인식의 대전환이 이루어질 때 죽음의 문제는 극복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原典類 : 『中阿含』 卷3, 『雜阿含』 卷13, 『長部』 26, 『轉輪聖王獅子吼經』, 『維摩經』

토인비, 『죽음, 그리고 삶』, 범양사 1980.

한국종교학회편, 『죽음이란 무엇인가?』, 창 1992.

불교신문사편, 『불교에서 본 인생과 세계』, 홍법원 1988.

칼루피히니, 『불교철학』, 천지 1992.

백봉호, 『티베트 사자의 서』, 경서원 1984.

류시하, 『티벳 사자의 서』, 정신세계사 1995.

 

 

 

[Abstract]

 

The Development Of the Viewpoint on Death in Tibetan Buddhism

 

Kwak, Man-Youn(Dong-A Univ.)

 

Today, as a result of medical technology, views on death have changed. Conventionally when the breathing and the beating of ones heart stop, it was considered as dead. once such essential functions stop, immediate breakdowns in all other organic systems follow. This meant when one came close to death, it was appeared as a complete death of that individuals entire body to the observers. Within the current few decades, this kind of common view has been challenged by the development of machines to artificially maintain body organs. Use of such machines put an end to the breakdown of both breathing and heart beating at the same time. This kind of situation is commonly found in the cases of almost every patients receiving concentrated medical treatment. These patients are getting artificial pressure from various mechanical devices. A complete breakdown of the entire body organs is the basis of the conventional view on death. But if it doesnt involve all the organs of the body, the question is that functioning of which organ plays the main role in deciding the time of death.

In problems regarding brain death, Buddhist beliefs also show accordance with the brain death and this can be illuminated through various concepts in Buddhist beliefs. For instance, human philosophy in Buddhism related to the concept of selflessness no doubt supports the idea of organ transplant. Confucian idea of human body have dominated the root of Koreans minds and values for a long time and many positive elements can be found in their own way however they, can also be seen as hazards particularly regarding brain death and problems associated with organ transplant. To overcome various existing elements of hazards at a principle level, an introduction of new values were suggested. The idea of mercy in the Buddhists ethic was presented for that. The fundamental mind of Buddhism lies in the thought of removing pain. Illness is perhaps the most painful of all. Therefore, in this paper the organ transplant will be seen as a positive solution to remove illnesses at a fundamental level. Tibetan popular religion may perhaps be charicterized as an infinitely varied attempt to cir-cumvent, or at least mitigate, the mechanism of the law of moral causality. According to orthdox Buddhist doc-trine, this law is inexorable and its justice cannot be avoided; however, since one cannot know what acts one has commited in the past for which one may have to suffer in the future, the intolerable rigor of the law of cause and effect is in practice modified by a religious worldview in which the destiny of the individual also depends on ritual acts and on spritual beings—benev-olent as well as malevolent—who may at least be ap-proched and at best be manipulated

 

Key Words : View point on Death in early Buddhism, View point on Death in Abidarma, View point on Death in Book of Dead

 

 

투 고 일 : 2007년 2월 20일

심 사 일 : 2007년 3월 10일

게재결정일 : 2007년 4월 14일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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