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 이근대
나무가지 끝에서 타오르는 단풍처럼 충혈된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남자, 나를 향한 그 남자의 마음과 속살도 붉을까 몹씨 궁금해지던 날, 그 남자의 눈에서 새의 눈물방울같은 호수를 발견했다 나는 늘 호수에 젖어 그 남자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 남자의 외투 호주머니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에게 나를 보내지도 그 남자를 내안으로 불러오지도 못하면서 밤마다 그 남자 향기에 젖어 몸부림쳤다 혼자서 밤을 몸부림친다는 거, 나무가지 끝에서 단풍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거지만 그 남자가 호주머니 속 동전을 만지작거릴 때 나는 그 남자의 하의 호주머니에 숨어들어가 그 남자의 손길과 냄새를 기다린다. 내 남자를 꺼내 그 남자의 눈앞에 놓아두고 싶을만큼 그 남자 앞에서 펄떡거리고 있는 내, 심장 나는 그 남자의 눈빛 한가운데에 서고 싶다. 남자의 향기 / 홍미영 붉은 입술 위로 떨어지는 그대의 낯익은 향기에 잠에서 깹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 설레임으로 다가온 사랑의 진한 향기 그대는 누구십니까? 살며시 사랑의 노크로 가슴을 뒤흔드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포근한 융단을 드리우고 바지 / 문정희 불끈 하며 치밀어 오르는 듯한 만지면 터질 것 같은 바지 사이의 불알 남자는 치마보다 바지 입은 모습이 어울린다 아니 그래야만 알 수 있다 쏟아나는 그 정열의 느낌도 짧은 치마 입은 여자가 지나가면 바지의 그 사이 가운데는 혼자 요동친다 바지여서 멋지고 바지여서 사랑스러운 바지여서 내 사람이고 싶은 바지여서 만지고 싶은 오늘도 불끈하고 쏫아오른 그의 바지 사이로 눈이 간다 바지 입은 남자는 모두 내 남자다 이 남자는 바보 / 김순자 내 남자는 나 밖에 모른다 나만 여자로 본다 나만 부인이라고 부른다 아 네, 하고 내 앞에서는 공손하게 고개 숙인 남자가 된다 아직도 나만 보면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그만의 매력을 가진 남자 남자 앞에서는 힘이 센 기고만장한 사내다운 남자지만 여자 앞에서는 쪽도 못쓰는 남자 목소리도 낮추는 남자 술 한 잔 마셔야 겨우 내 이름 석자를 부르는 남자 바보 남자 이 남자는 내 남자다 나만의 남자이어서 더욱 좋은 남자의 남자이며 여자의 여자 시 쓰는 남자 / 박소란 노트 위에 평생을 골몰했네 힘겹게 써 내려간 다열종대의 행과 행 사이에서 그는 자주 길을 잃었네 어쩌면 마흔 일곱 혹은 여덟 번째로 향하는 급커브에서는 펜을 꺾었어야 했는지도 돌연 야근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떠오르지 않던 부랑의 밤 어둠 쪽으로 한껏 몸을 낮춘 옥상 난간에 서서 그는 실로 오랜만에 휘파람을 불었네 쇳 쇳 쇳소리가 자맥질치는 허공을 응시하다 그래도 풍덩 어둠 속에 온몸을 찔러 넣었네, 넣을 것이었네 그 순간 그가 본 건 한때 꾸었던 푸른 꿈의 심상들 누구나 한번쯤 노래했던 별, 별 같은 것 우수수 아무렇게나 떨어져 야윈 꽁지를 파닥이고 있었네 그는 왜 마침표를 찍지 못했나 이토록 오래 주저해야 했나 어떤 비유로도 건널 수 없는 나날들을 수없이 쓰고 지우며 절망의 습작만을 되풀이하며 그는 살았네 산다는 건 정체불명의 메타포 조악한 모음과 자음으로 띄엄띄엄 써 내려간 비문투성이 시, 아무도 읽은 적이 없는 그는 아직 노트를 덮지 않고 있네 아내의 남자 / 이석현 연애시절 아내의 지갑을 몰래 훔쳐보았을 땐 은발의 리처드 기어가 있었고 결혼 전후 용모 단정했던 내모습이 한참을 자리하고 싶었는데 이내 아들 돌 사진으로 바뀌었더군 허둥대며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한참을 잊고 살다 어쩌다 열어보니 군대 간 작은 아들이 빡빡머리 군기 바짝 든 모습이 자리했다가 얼마 전부터 파마머리 개구쟁이 왼손주 녀석을 넣고 다니며 다아이반지 생긴 듯 아내는 은근슬쩍 여기저기 자랑하더군 몇 년 주기로 바뀌는 아내의 지갑 속 남자들 누굴까 그 다음은
몸 밖의 사내 / 심여수 달구어지기 시작하는 유월의 햇살에도 이미 화상을 입는 환장할 사내가 있었지요 그 사내의 그림자는 한 여자의 꿈의 뒷전을 어지러이 배회하며 희미한 두통과 고통을 흘려 붓곤 했지요 사산의 침상을 불모의 사랑을 폐허의 꿈을, 가져다 주며 내 거처를 하나씩 파먹고는 폭군이었지요 시퍼런 세상 칼끝의 관통에 상처를 입고 변방의 도피처럼 찾아들어 분홍빛 여린 살꽃을 찢고 들어와 수액을 빨아 들이고 죽음을 오르고선 골목길 가물거리는 신새벽 불빛 같은 여린 신생(新生)을 다시 꿈꾸는 그 사내는 어리석은 욕망이 구불구불 서리서리 끼어있는 슬픔이고 절망이고 영원한 비밀구좌로 남겨둔 슬프게도 요요(夭夭)한 그 여자에게 유일하게 신화로 남아있지요 갯바위에 질기에 달라붙는 미역같이 엉겨붙는 그리움으로 계절마다 색쓰고 싶어 할 그 사내에게 이제서야 고백한다네요 당신이 비밀구좌로 남겨 둔 나는 그때도 지금도 불감증이야 날선 불길한 목소리가 베인 채 혼자 잠들기 청하는 바람소리를 어떻게 한 번도 듣지 못한거지?
매일 가방을 싸는 사내 / 심여수 시간과 풍경이 급속하게 흘러간다며, 그래서 그림자를 놓치기 일쑤라며 매일 가방을 싸는 한 사내를 나는 알고있다 거대한 침묵의 옷가지들을, 불안과 우울의 소지품들을, 그의 하루치 남루한 메모지 접듯 꾸깃꾸깃 접어 아픔의 지퍼를 꾹꾹 눌러가며 채운다. 누군가 기다리겠다며 오라는 곳도 없는채로 존재감이 풀린 나사처럼 헐거워진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그림자 하나 덩그라니 또 하나의 짐을 만들 뿐인채로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익명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사내. 세상의 빠른 회로속을 돌진해야함을 알기에 가방처럼 완강하게 닫혀버린 입술 사이로 숨소리가 거칠다. 꽉꽉 매여지고 닫혀진 가련한 침묵이 가방의 내장들을 들썩이게 하더니 무표정의 그늘이 되어 사내를 삼켜버린다. 욕망없이 운반되거나 갈망없이 서로 포개진 채 기다리는 삶의 도중에 덜커덕 방지턱에 걸린 추억과 욕망의 옷가지 몇 벌이 마음과 몸을 뒤튼다. 가방의 심연이 사내의 심연이다. 삶의 바닥이다. '생은 지나치게 나를 문화인으로 등극시켜 버렸지만 난 괜찮아!' 기다림 속에서 내뱉은 미립자의 개체들이 대지 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그 속에서 움직이지도 못할 가방을 사내는 오늘도 싸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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