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사(捿鶴寺) 가는 길 / 성선경
원래 없는 것들도
없어 서운한 것은
손 닿는 것만이 아니다 라고
한 고비 마음을 따라 오르는 산길
저기 옹이가 많은 남기 마음에 걸리고
자주 발을 거는 돌멩이에 마음이 쓰이고
산은 저긴데 생각은 허공
길은 가는데 마음은 따라주지 않아 괴롭다고
생각이 없는 마음을 풀어 놓으면
문득
하늘을 채웠다가 비워내는 구름과 달
산을 채웠다 비워내는 풀과 꽃
원래 없었던 것들도 돌아와 빈자리를 채우고
원래 채워진 것들도 비워져 빈자리를 만드는
없던 마음과 비워진 생각들이 잊고 지내온
서운한 것들을 만나러 가는 길
서학사(捿鶴寺)에는 학이 살지 않는데
학(鶴)이 운다.
굽은 소나무 한 그루 / 성선경
그래 늘 그곳에 있었지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 사철 풍경을 다 담아내고 있었지 아직도 지게목발 내던지지 못하고 있었지 선산 발치쯤 벌초하는 밀짚모자같이 있었지 낡은 호미같이 등이 굽어 있었지 가끔 소문처럼 새 한 마리 불러들이거나 날려 보내며 헛간의 녹슨 낫같이 오래오래 있었지 그냥 향교 고갯마루를 쳐다보고 있었지 눈곱이 낀 눈으로 가끔 하늘을 쳐다보곤 했었지 아침이나 저녁 꼬리 긴 그림자같이 있었지 너무 오래 그곳에 있어 가끔은 잊고 있었지 망두석같이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 그래 늘 그곳에 있었지
노을이여
주르륵 눈물짓는 옷자락이여
잊었다고 말해도 잊혀질 수 없는
너무 낡은 풍경이여
『진경산수』(서정시학, 2011) 중에서
생각하는 사람 / 성선경
늘 하나의 바위였습니다
비바람 맞으며 검버섯을 피워내는
그냥 하나의 바위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석공의 눈에
턱을 괴고 앉아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위 속에서 오랫동안 고뇌하며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날이었습니다
검버섯을 걷어내고
검버섯처럼 덮고 있는 허물을 걷어내고
오랫동안 고뇌하며 생각한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보게 한 날이었습니다
바위 속으로 들어가 한 천년
생각만 하던 사람이 우리 곁에 와
가만히 자기를 보여주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늘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내 한 번의 눈맞춤이
너에게로 가 천년의 한을 만들었다고
이제 네 눈물과 한들을 모아
불국사 앞뜰에다 연화지
푸른 연못을 하나 파주마고
그리고 나는 석가탑 속으로 들어가 너를 볼테니
너는 저 다보탑 속으로 들어가 또 나를 보라고
연화지 푸른 물빛에 비친
네 얼굴을 내가 보고 내 얼굴은 네가 보라고
한 천년 못다한 얘기나 좀 해보자고
다시 조용히 바위 속으로 들어간 날이었습니다.
흔적없던 바람이 갈잎을 흔들어
조용히 그 자취를 생각하게 한 날이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 / 성선경
그래 우리 기쁘게 만날라치면
아이구 문둥이다 툭사발이
마마 곰보자국의 보리방구다
노름 숭년의 장리쌀 야반도주도
삼사 년 기별없다 돌아온 딸년도
취바리 곰배팔이 얼싸안으며
이 망할 것아 한 마디 툭 던지면
소나기 한마당 시원하게 약 되듯이
찬밥에 땀 흘리는 풋고추도
오뉴월 막장에 배부른 악담도
아이구 문둥아 문둥아 문둥아 달려오면은
보라 비 갠 두 척의 청정한 솔이파리 하나
맺힌 방울들을 썩 걷어치우는 것을
보라 우리가 저 산 같이 성큼 다가서
서로 문드러지도록 맞비빌 수 있다면
청보리면 어떠랴 문둥이면 어떠랴
해방둥이 김서방이 짐서방이 되어도
동란둥이 최서방이 치서방이 되어도
취바리 언청이 문둥이라도 좋을
우리말이여, 경상도 사투리여
그래 우리 기쁘게 만날라치면
아이구 문둥이다, 툭사발이
마마 곰보자국의 보리방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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