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티벳

티벳일기

경호... 2015. 7. 13. 01:24

 티벳일기 1: 중띠엔에서 차마고도를 따라 티벳으로

 


 

후지와라 신야는 <티베트 방랑>(한양출판, 1994)에서 타임 슬립(시간의 흐름을 바꿔 미래나 과거로 건너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타임 슬립이란 동시대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지층연대를 말한다. 가령 티벳을 여행하다보면 느끼게 되겠지만, 그곳에는 아직도 한국의 1960년대가 곳곳에 존재하고, 우리가 현대화 과정에서 잃어버린 시골의 가치와 정서가 엄연히 실재한다. 그러므로 티벳을 여행한다는 것은 순진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다름아니다.

아침 8시. 쿤밍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구름 속을 헤치고 중띠엔으로 날아간다. 기내방송에서는 계속해서 샹그리라, 샹그리라, 샹그리라가 흘러나온다. 중국에서는 이제 옛 티벳의 땅인 중띠엔을 샹그리라(香格里拉)로 부르고 있다. 1933년 영국의 제임스 힐튼(Hilton James, 1900~1954)이 쓴 장편 <잃어버린 지평선 Lost Horizon>에 보면 히말라야 남쪽 티벳의 산중에 영원히 평화롭고 고요한 신비의 땅이 있다고 했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콘웨이)이 찾아간 이 산중의 사원을 '샹그릴라'로 이름붙였다. 이 소설이 널리 알려지면서 샹그릴라는 ‘마음의 이상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중국은 이 소설의 지명을 빌려 중띠엔 인근을 샹그리라로 명명했다.

 

  거대한 꾸이산 마니차.

 

구불구불 사행천이 휘돌아나가는 녹색 습지와 그 너머로 보이는 뭉툭하고 완만한 산마루. 노란 유채와 푸른 밀밭이 펼쳐진 들판. 계곡의 자욱한 안개 속으로 드러난 빛 바랜 촌락의 집들. 그 풍경 속으로 실랑실랑 가랑비가 흩뿌렸다. 비가 오는 샹그리라 공항. 드디어 나는 티벳 여행의 기점인 중띠엔에 도착했고, 중국이 강제로 점령한 옛 티벳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평균 해발 3300미터의 고원도시. 과거 티베탄 마을이었던 이 곳은 이제 대부분 한족이 상권을 장악한데다 티베탄을 몰아내고 도시의 노른자위마저 모두 차지한 상태다. 이는 이미 중국이 티벳을 강제점령했을 때 예견된 일이었다.

시내 허름한 식당에서 떠우지안(콩국물)으로 속을 달래고, 씨판(쌀죽)과 바오쯔(만두)로 배를 채운 뒤 본격적인 중띠엔 구경에 나선다. 복원이 한창인 너와집촌을 지나면 야트막한 언덕에 꾸이싼(구산사) 사원이 자리해 있다. 사원은 볼품없고, 대신 언덕에 자리한 거대한 마니차(안에 경전을 넣어 돌리는 금속으로 된 경전통)가 유명한 곳이다. 거대한 마니차는 혼자서는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육중해서 대여섯 명은 힘을 보태야 겨우 돌아간다. 꾸이싼 언덕에서 바라본 중띠엔은 여전히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있다. 시내를 벗어나면 티벳 사원(곰파)으로는 윈난에서 가장 크다는 쑹첸린 사원을 만날 수 있다. 쑹첸린은 간덴사원을 세운 쫑카파(1357~1419)의 법통을 따르는 겔룩파(티벳 불교의 가장 강력한 종파) 사원으로 '중띠엔의 포탈라'로 통한다. 

 

작은 포탈라라 불리는 쑹첸린 사원의 황금지붕.

 

사실 티벳에서는 사원과 마을이 분리돼 있지 않았다. 사원이 생기면 그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사원이 마을이고, 마을이 곧 사원인 것이다. 쑹첸린도 다르지 않았다. 어디선가 곱향나무(소나무처럼 생긴 향나무)를 피우고 있는지 사원으로 가는 길은 온통 향 냄새가 진동한다. 자욱한 연기와 안개. 분명하지 않은 시야 속에서 쑹첸린은 점점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며 내 눈을 자극한다. 여러 채의 크고 작은 사원과 수많은 부속채로 이뤄진 쑹첸린은 달라이 라마 5세 때인 1679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지만, 80년대 이후 복원된 곳이 대부분이어서 그렇게 오래된 옛빛은 찾아볼 수가 없다.

더구나 지붕의 금칠은 최근에 해 놓았는지 너무 깔끔하고, 찬란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그러나 사원을 둘러싼 라마의 집들과 사하촌 풍경은 오래된 흙벽과 회벽이 그대로이고, 지붕조차 잡풀이 성성한 흙지붕이어서 보는 맛이 은근하다. 시내에 인접한 꾸이싼보다 고도가 높아서 사원 지붕에 올라 바라보는 중띠엔 조망도 훨씬 장쾌하고 넉넉하다. 중국이 샹그리라로 부르는 핵심지역 중띠엔의 볼거리는 사실 이 정도에 불과하며, 진정한 샹그리라 풍경은 중띠엔을 벗어난 미지의 고원과 협곡에 존재한다.

 

 

중국에서 티벳으로 가는 육로는 칭장공로(청해-티벳), 신장공로(신장-티벳), 진장공로(윈난-티벳) 등 크게 세 곳이며, 네팔에서는 주로 국경을 넘어가는 우정공로를 통해 티벳으로 들어온다. 중띠엔에서 티벳을 잇는 진장공로의 노선은 중띠엔-더친-옌징-망캄-팍쇼-뽀미-링트리(빠이)-공푸장따-라싸로 이어지며 총연장 2000여 킬로미터에 달한다. 이 길은 중국의 옛 교역로인 차마고도의 옛길을 따라가는 사연 많은 길로써 지금도 티벳에서는 가장 은밀하고 험난한 길로 알려져 있다. 특히 중띠엔에서 망캄을 잇는 214번 국도는 아직도 대부분이 비포장인데다 수시로 산사태가 일어나 가장 어려운 험로로 통한다.

도로는 해발 3000과 4000의 경사를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리며, 어떤 곳은 100킬로미터를 가도록 마을이 보이지 않고, 어떤 곳은 반나절 이상 5000미터급 산을 넘어야 한다.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탐험이 더 어울리는 길이 바로 214번 국도인 것이다. 중띠엔을 빠져나와 이제 나는 그 길로 들어선다. 차마고도(茶馬古道)를 따라가는 위험하고도 장엄한 길. 옛날(7~8세기) 윈난에서 생산된 차는 오랜 저장을 위해 발효시켜 덩어리로 만든 다음 대발쌈에 싸서 말과 노새에 싣고 리장과 중띠엔, 옌징과 창두, 뽀미, 링트리를 차례로 거쳐 라싸까지 거래되었는데, 주로 티벳과 윈난의 대상이었던 ‘마방’이 이 중계무역을 담당했다. 이렇게 티벳에 온 차는 다시 실핏줄처럼 뻗어 있는 차마고도의 샛길을 따라 네팔과 인도에까지 퍼져나갔다. 

 

쑹첸린 사원 지붕에서 내려다본 샹그리라 핵심지역인 중띠엔 풍경.

 

예부터 이 길은 워낙에 험해서 윈난에서 라싸까지 무사히 간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이들은 파발을 전하듯, 중띠엔에서 더친까지, 더친에서 옌징까지 하는 식으로 중계무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윈난에서 가져온 차는 옌징에서 소금과 교환하였고, 라싸 인근에서는 말이나 산양, 야크 모피와 거래하였다. 아직도 그 옛날 차마고도를 따라 캐러밴을 했던 마방은 소수가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소금 계곡으로 유명한 옌징이 이들의 마지막 활동 거점 노릇을 하고 있다. 

중띠엔을 벗어나 214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 도로 옆으로 펼쳐진 초원과 완만한 산사락에는 산양과 야크떼가 풀을 뜯는 한가로운 풍경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비에 젖은 푸른 골짜기. 얼마 가지 않아 야크떼가 점령한 광활한 습지도 펼쳐진다. 얼핏 보아서는 초원이고 습지인 이 곳은 꽤나 유명한 나파하이 호수다. 겨울에는 그저 드넓은 초원이었다가 우기인 여름이 되면 호수로 변하는 신비한 호수가 바로 나파하이다. 비가 내리는 양에 따라 호수의 크기와 모양은 그때그때 달라진다. 있다가 사라지고, 없다가 생겨나는 신비한 호수.

 

 나파하이 호수.

 

옛날 중띠엔과 더친을 오가던 마방들은 풀들이 무성한 이 나파하이에서 발품을 쉬며 말들을 풀어 풀을 뜯겼다. 그러니까 말들에게는 이 늪지대가 든든한 목초지였고, 마방들에게는 행복한 휴게소였던 셈이다. 지금 말들은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늪지대를 점령한 건 검고 누런 야크들과 돼지들 뿐이다. 야크는 풀을 뜯고, 돼지는 늪을 뒤져 달큰한 수초 뿌리를 캐먹는다. 나파하이를 빠져나온 푸른 국도는 이제 본격적으로 험준한 협곡과 산마루를 치닫는다. 멀리 보이는 등성이마다 연분홍 두견화가 흐드러졌다. 한동안 두견화 핀 세상은 지루하도록 계속되었다.

산굽이와 마루를 몇 개 돌고 넘은 도로는 산을 내려와 진사강(金沙江, 양쯔강의 서쪽 원류)을 거슬러 올라간다. 진사강은 티벳 북쪽의 탕구라산에 발원지를 두고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가 메콩강과 샬윈강 상류와 차례로 만나며, 쓰촨에 이르러 양쯔강을 이룬다. 진사강은 엄청난 급류(상류의 경사는 약 2미터마다 4미터씩 낮아진다)에다 농도가 짙은 황토물이다. 숫제 이건 물길이라기보다 황토모래굽이에 더 가깝다. 계곡마다 둥지를 튼 마을에서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이미 보리를 벤 밭에서는 이모작으로 뿌린 친커(쌀보리)가 시퍼렇게 웃자랐다. 친커는 우리의 쌀과 같은 주식으로, 티벳빵인 ‘빠바’의 원료가 된다.

 

   누렇게 익어가는 칭커밭.

 

경사가 심하면 심한대로 밭은 산자락을 헤치지 않고 다랑이진다. 계단식으로 조성된 다랑이밭들. 이런 풍경은 라싸까지 이어진 산중마을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풍경이다. 차가 다니는 도로는 아직 멀쩡하지만, 그 옛날 마방과 말들이 걸어갔을 위태로운 산굽이 에움길은 여기저기 산사태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 저렇게 아스라한 산비탈과 벼랑끝에 길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저것이 오래오래 사람이 다닌 길이라면 사람이란 얼마나 무모한 길짐승인가. 길은 누군가 가위로 잘라놓은 듯 뭉청뭉청 잘려 있다. 누군가 꿰매놓은 듯 잘린 길이 감쪽같이 기워진 곳도 있다. 그런 곳은 십중팔구 근처에 마을이 있곤 했다. 옛길과 신작로가 강을 끼고 나란히 이쪽 산비탈과 저쪽 산비탈을 빌려 흘러간다.

 

진사강 상류와 물길을 따라 난 사람의 길.

 

한시간을 달려도 마주오는 차가 한두 대에 불과한 심심하고 외로운 길. 이따금 보이던 계곡의 마을도 점점 드물어진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산마루 마을 시어라마스. 마을이라고 해봐야 집들은 계곡에 숨어 있고, 길가에는 서너 채의 집이 고작이다. 그나마 차부가 있고, 길가에 구멍가게가 없었다면 모든 차들이 그냥 지나쳤을 황량한 마을. 잠시 쉬어 가고자 내린 곳에서 만난 구멍가게 주인(48)은 오래 전 이주해온 한족이었다. 그의 가게 선반에 올려진 삐루(맥주)며 과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았다. 유통기한을 알 수 없는 물건들. 이렇게 하루종일 뜨내기 손님 몇 명에게 물건을 팔아서 먹고 살기란 불가능하다. 그는 밀과 옥수수 농사를 따로 짓는다고 했지만, 먹고 입는 것이 해결이 안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둥주린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중의 펀즈란 마을 전경.

 

고도가 높아지면서 진사강 강줄기는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흘러간다. 한동안 그쳤던 비는 다시 흩뿌리고, 급기야 펀즈란 마을에 이르러서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렸다. 중띠엔에서 펀즈란까지 약 80여 킬로미터. 더친까지는 아직 여기서 100킬로미터 이상을 더 달려야 한다. 펀즈란 마을은 둥주린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마루 마을이다. 아늑하고 적막한 산중마을. 사원은 소박하다. 스님들도 소박하고 인정에 넘친다. 사원에서 만난 루쌍창바 스님(25)은 반갑게 낯선 손님을 맞이했다. 그는 나이가 많지 않음에도 이 사원의 주지스님이었는데, 인상이 제법 넉넉해 보였다. 인상적인 것은 불상을 모신 불단 옆에 달라이 라마 사진을 모셔놓은 것이다. 사실 중국의 사원뿐 아니라 티벳의 사원에서조차 달라이 라마를 모시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다. 공안에 발각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럼에도 둥주린에는 달라이 라마 사진이 버젓이 걸려 있다.

 

 펀즈란에서 만난 노인.

 

- 달라이 라마 사진을 걸어 놓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가?

- 문제가 된다.

- 그런데도 이렇게 걸어놓는가?

- 가끔씩 조사가 나온다. 그 때마다 비밀스런 장소에 감춰 놓곤 한다.

- 이 사진은 어떻게 구했는가?

- 어떻게 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1996년 1월 5일에 사진을 모셨고, 그 때부터 그 분은 우리와 훨씬 가까워졌다.

- 달라이 라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 알다시피 그 분은 부처의 화신이 아닌가.

- 여기는 언제 왔는가?

- 열몇 살 때 이 사원으로 왔다.

- 그 때 라마가 되었는가?

- 그렇다.

 

 둥주린 사원의 승려들.

 

속세에서의 그의 이름은 아부였다. 그러나 아부로서의 삶은 사원에 들어오는 순간 저만치 던져 버렸다. 사원 안에서는 모래가루에 염료를 섞어 그린 제법 커다란 ‘만달라’를 만날 수 있다. 정교하게 그려진 모래그림이다. 이런 만달라는 밀랍과 모래를 섞어 그리기도 한다. 불단 양쪽 벽에는 밀랍으로 그린 만달라도 볼 수가 있다. 스님은 사원 마당에까지 나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나그네를 배웅했다. 갈길은 멀다. 산이 깊을수록 길은 점점 더 험악해진다. 비는 그쳤다가 흩뿌리기를 반복하더니 바이망 설산(5137미터)을 비껴가는 고개길에서는 돌연 안개비로 돌변했다. 20미터쯤 앞서 가는 차가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안개다. 해발 4000미터를 감안한다면, 이건 안개가 아니라 구름에 가깝다. 그렇다면 지금 내리는 비는 안개비가 아니라 구름의 알갱이인 것이다. 차는 구름 속을 겨우겨우 헤쳐간다.

 

바이망 설산을 비껴가는 고갯마루에서 바라본 풍경.

 

길가에는 목축으로 떠도는 유목민의 임시거주 천막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그들은 풀이 있는 곳이면 야크와 산양을 몰고 어디든 간다. 그것이 유목민의 오랜 생활방식이다.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걷히고, 하늘이 열리면서 왼편으로 바이망 설산 봉우리가 희미하게 나타난다. 해발 4292미터 고갯마루 정상이다. 언덕에는 쵸르텐(돌무덤, 우리의 성황당)이 쌓여 있고, 쵸르텐을 중심으로 타르쵸(경전을 적은 오색 깃발)가 걸려 파르르 바람소리를 낸다. 이 타르쵸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를 일러 티벳 사람들은 바람이 경전을 읽고 가는 소리라고 말한다. 보통 타르쵸의 색깔은 우주의 5원소, 즉 파란색-하늘(우주), 노란색-땅, 빨간색-불, 흰색-구름(공기), 초록-바다(물)를 상징한다. 보통 티벳의 언덕이나 고갯마루 등 신성한 곳에는 어디에나 쵸르텐이 세워져 있고 타르쵸가 날린다. 사람들은 이 곳을 지날 때 향을 피우고 하다를 걸며, 기원을 적은 룽다를 날려보내기도 한다.

 

바이망 인근에서 채취한 동충하초.

 

바이망 설산이 가까이 보이는 이 곳의 고갯마루에는 유난히 동충하초 상인들이 많다. 이들은 여러 명씩 몰려다니며 관광객과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해 동충하초를 보여주며 살 것을 권유한다. 그들이 팔고 있는 동충하초는 한 주먹에 800위안. 우리 돈으로 10만원쯤 한다. 그들에 따르면 이 곳 바이망 주변이 동충하초가 많이 나는 곳이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아예 고갯마루 근처에 유목민처럼 천막을 치고 몇 달씩 동충하초를 채취하러 다닌다고 한다. 한 주먹을 캐는데 몇 달이 걸린다고 하니, 이들의 말 대로라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바이망 설산을 넘어가면 이제 훼이라이스(비래사)가 지척이고, 훼이라이스를 지나면 더친이 코앞이다. 아침 일찍 중띠엔을 출발해 저녁이 이슥해서야 더친에 도착하였다.

티벳일기 2: 더친에서 쩡궁마을까지

 

 비오는 더친 거리의 마부.

 

중띠엔에서 더친까지의 길은 심한 고도와 굽이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포장구간이 대부분이어서 앞으로 펼쳐질 대책없는 비포장 구간에 비하면 지극히 편한 ‘안전로’나 다름없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더친(德欽)은 주변의 산자락마다 안개를 친친 감은 채 시큰둥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늙스구레한 사냥꾼 한 명이 활을 어깨에 메고 대로를 활보한다. 등뒤엔 날카롭게 벼린 활들을 여러 촉 꽂은 화살통까지 두른 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순간 나는 저걸 찍어야만 해, 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보지만, 날이 캄캄해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만 찍히고 말았다. 그래도 활에다 화살통까지 맨 사냥꾼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의외의 소득을 얻은 셈이다. 내가 보고자 한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누군가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이라고, 요즘에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저만치 던져버린 것들. 어쩌면 나는 그런 것들을 찾으러 티벳으로 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더친 인근의 산중마을.

 

약 6만여 명의 인구가 사는 더친은 중띠엔과 마찬가지로 1950년대까지만 해도 티벳 땅이었으나, 중국이 티벳을 강제점령하면서 중국 땅으로 둔갑한 곳이다. 옛날 티벳말로는 ‘아둰쓰’라 불렀는데, ‘태평한 극락의 땅’이란 뜻이다. 아마도 소설 속의 샹그릴라가 그리고자 한 세계를 티벳인들이 먼저 그려낸 ‘마음의 이상향’이 이 곳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 도심과 마을 어디에도 ‘샹그릴라’다운 면모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애당초 그것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므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에서 말해왔던 유토피아와 동양에서 말해왔던 무릉도원처럼 새롭게 생겨난 샹그릴라도 우리의 관념 속에서만 아름다울 뿐이다.

 

산중마을에서 흔히 만나는 다랑이밭.

 

나의 여정은 이른 아침 다시 시작되었다. 내가 탄 차는 봉고차였는데, 지프차도 넘기 힘들다는 214번 국도를 어떻게 넘어갈지가 걱정이었다. 가파른 협곡이 계속되는 진장공로 주변은 워낙에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해 약간의 공터만 있으면 층층이 뙈기밭을 일구어 다랑이를 이룬다.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산자락은 다랑이밭 차지가 된다. 더친에서 얼마 가지 않아 만나게 되는 훼이라이스 전망대. 어제 오는 길에 만난 훼이라이스와 오늘 만난 훼이라이스는 수십 킬로미터 이상의 거리가 있었지만, 다들 여기도 저기도 훼이라이스라 부른다. 그런데 정작 나는 훼이라이 사원을 만난 적이 없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내가 만난 것이라곤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쵸르텐 뿐이었다.

 

메이리 전망대 마을의 쵸르텐.

 

본래 이 곳은 메이리 설산을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대라고 소문이 나 있지만, 지금은 눈앞에 안개에 폭 잠긴 산자락만 감질나게 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안보이는 메이리 설산을 향해 절을 하고 향을 피운다. 향로에서 피운 곱향나무 연기는 금세 안개와 뒤섞여, 안개에서 은은한 향기가 난다. 향기가 나는 안개! 메이리 전망대 마을을 벗어나 20킬로미터쯤 달리면, 드디어 지루하고 고달픈 비포장 도로가 시작된다. 차는 덜컹거리고 비틀거리고, 툭하면 만나는 산양떼를 피하느라 곡예를 한다. 이 곳의 양떼들은 차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녀석들은 저쪽에서부터 한 발자국도 비키지 않고 곧장 걸어서 온다. 이쪽에서 거칠게 빵빵거려도 저쪽에선 느긋하게 음메거린다. 야크떼는 그래도 약간의 눈치가 있어서 처음엔 안비켜줄 것처럼 곧장 오다가도 빵빵거리면 귀찮다는 듯 몇 발자국 비켜난다. 문제는 몇 발자국만이다. 완전히 비켜나 길을 내주는 것은 야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꼭 이 녀석들은 몇 발자국만 비킨다. 나머지는 차가 비켜가야 하는데, 그렇게 서로 반반씩 비키자는 게 아무래도 야크의 철학인 것같다.

 

메이리 전망대 마을에서 만난 사내.

 

더친을 지나면서 길이 거슬러온 진사강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대신 란창강(瀾滄江)이 진사강을 대신해 구불구불한 협곡을 접수한다. 비포장길이 시작되면서 산사태의 흔적은 곳곳에 방치돼 있다. 국도가 지나는 산자락의 덩치가 제법 크긴 해도 속은 헐겁기만 해서 도로가 지나간 자리마다 툭하면 토사가 흘러내리고 암석이 굴러떨어진다. 이런 사태는 요즘같은 우기 때는 더욱 심해서 큰 비가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길이 끊기고 앞이 막힌다. 그것이 건설해서는 안될 곳에 건설된 214번 국도의 업보이고, 대가인 것이다. 그 옛날 말을 끌고 지나갔던 마방들이 왜들 그렇게 길에서 죽어야 했는지, 저 산과 계곡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이 길은 애당초 구름과 바람에게나 어울리고, 산짐승에게나 통행이 허락된 자연의 길이 아닌가.

 

수시로 사태가 나는 214번 국도.

 

한동안 7~8부 능선을 오르내리던 길은 차츰차츰 고도를 낮춰 란창강에 가까워진다. 급기야 길은 산을 다 내려와 란창강을 바로 옆에 끼고 물길을 따라 흐른다. 그 길에서 만난 한 마부는 내가 출발한 더친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여기서 더친까지는 100여 킬로미터 남짓이지만, 장보기가 마땅찮은 이런 오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거기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하긴 이런 길을 자전거를 타고 넘어오는 바이커도 있고, 처음부터 오체투지로 넘는 사람도 있다. “아마 오늘은 못 갈 거다. 저 앞에 길이 끊겼다.” 마부는 그 말을 남기고 떠그덕떠그덕 사라졌다. 길이 끊겼다고?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앞서 가던 마부를 지나쳐 봉고차는 먼지를 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란창강가에서 만난 마부.

 

10여 분쯤 란창강을 따라 올라가자 양쪽 길가에 수많은 차들이 도열해 있었다. 마부의 말이 맞았다. 그 중의 상당수는 돼지를 싣고 온 트럭들이었다. 돼지는 졸고, 꽤액거리고, 꿀꿀거렸으며, 아예 길가에 드러누워 팔자 좋게 낮잠을 즐기는 돼지도 있었다. 길은 언제쯤 뚫리는가? 모른다. 여긴 언제부터 있었는가? 어제 왔다. 그럼 여기서 밤을 보냈단 말인가? 그렇다. 여기가 무슨 마을인가? 쩡궁마을이다. 사람들은 다들 오늘 안가도 상관없다는 듯 느긋했다. 마치 여기가 숙소인 것처럼 한쪽에선 카드를 치거나 마작을 즐겼고, 한 편에선 컵라면을 먹거나 삐루를 마셨다. 한 외국인 부부(이 부부를 드락순쵸에서 다시 만난다)는 길가 통나무에 걸터앉아 주변의 분위기에는 아랑곳없이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

 

길이 막힌 쩡궁마을(왼쪽). 다리에 옌러우를 내걸고 있다(오른쪽).

 

졸고, 기다리고, 하품하고. 몇 시간이 될지, 아니면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내린 폭우로 전방에 토사가 흘러내려 길이 끊겼고, 지금은 그로 인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여기서 티벳에 가려면 다른 길이 없었다. 다시 길을 돌아나가 칭해성까지 가서 칭장공로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여기서 또 2~3일이 걸리는 일이다. 기다림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마 며칠이 될지도 모른다. 마치 나는 평생을 여기서 기다려 할것만 같았다. 아까 길에서 우연히 만난 마부가 내 앞을 지나쳐 간다. 마부는 때로 말이 차보다 빠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유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막히지 않고 집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란창강가에 걸터앉아 두 시간째 강물소리만 듣다가 일어났다. 란창강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리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들은 방금 잡은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다리에 내걸고 있었다. 냉장고나 냉동고가 없는 이들로서는 빙산에서 흘러왔을 차가운 강물의 수면 위쪽이 일종의 냉장고인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걸어놓은 고기들도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이들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옌러우’라고 하는데, 이렇게 바람에 말렸다가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쓴다. 저렇게 허공에 매달아 놓아도 아주 썩지는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코담배.

 

차가 막혀 가지 못하는 쩡궁마을은 모두 35가구(150여 명이 사는)가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마을이었는데, 위쪽 산마을에는 13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 구경이나 하자고 올라간 산마을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개울가에 나앉은 마을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온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이내 경계심을 풀었다. 할머니 한 분이 손에 들고 있던 코담배를 권했다. 황토색 분말이 담긴 작은 담배 쌈지에서 향긋한 담배향이 났다. 뒤늦게 윗집에서 나온 여자 아이는 불청객을 보자 수줍음을 타는지 엄마 등에 매달려 고개를 묻는다. 이따금 고개를 들 때마다 아이는 수줍게 웃었는데, 입 주변과 이가 모두 새카맣다. 군것질을 따로 할 수 없는 이 곳의 아이들은 ‘하이궈’라는 검은 산열매로 주전부리를 대신한다. 하이궈를 한 주먹 다 먹고 나면 저렇게 입 주변과 이가 새카맣게 변하는 것이다. 메이리 전망대 마을에서 나도 이것을 한 움큼 먹어봤는데, 머루와 버찌를 섞은 듯한 기묘한 맛이 났다.

 

 쩡궁마을의 마굿간.

 

이 곳의 집들은 그 구조가 제주도와 흡사했다. 집과 헛간이 따로 분리돼 있었고, 마당에는 한결같이 마굿간과 돼지우리가 있었다. 이 마굿간과 돼지우리는 닭장의 노릇도 겸했는데, 우리 구석에는 나뭇가지를 결어 만든 닭둥우리가 걸려 있었다. 헛간에 걸친 사다리도 우리와 똑같았다. 통나무를 중간중간 도끼로 쪼아내 만든 이 사다리는 오래 전 경주 양동마을에서 본 것과 너무나 흡사했는데, 집집마다 이런 사다리가 두어개쯤은 있었다. 부엌에는 어느 집을 가든 쑤우오차(야크버터차)를 젓는 차통이 있었다. 차통은 큰것일 경우 거의 1미터에 이르렀다. 두어 시간을 산마을에서 보내고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보니, 여전히 차들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아침에 도착해 저녁이 다 되도록 길은 열리지 않았다.

 

   쑤우오차.

 

돌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2시간을 달려서 다시 메이리 전망대 마을로 왔다. 저녁 8시가 되었는데도 날은 훤하게 밝다. 본래 티벳은 북경과 서너 시간의 시차가 있음에도 북경 시간을 표준시로 삼고 있다. 해서 라싸에서는 9시쯤에야 노을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여기도 별로 다를 게 없어서 8시가 훨씬 넘어서야 날이 어두워졌다. 느긋하게 메이리 설산이나 구경하고자 찾아들어간 카페에서는 한창 쑤우오차를 만드는 중이었다. 차통에 가락을 꽂아 젓고 있는 카페 주인에 따르면 야크 버터를 넣고 이렇게 100번 이상을 저어 주어야 차가 된다고 한다. 처음 맛보는 사람들은 야크 냄새 때문에 고개를 가로젓지만, 먹다 보면 제법 고소하고 맛있다.

 

당나귀의 아침식사.

 

아침으로 쌀죽과 티벳빵인 둥그런 ‘빠바’를 두 개나 씹어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식당 주인은 아직도 길이 열리지 않았다며 점심 때나 가라고 했지만, 가는 길에 메이리를 좀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밍융마을이라도 구경하고 가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214번 도로에서 빠져나와 란창강을 건너가야 하는 밍융마을은 지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밍융빙천’(明永氷川) 즉, 밍융 빙하를 여기서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은 세계에서도 해발이 가장 낮은 2650미터에서도 빙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빙하를 보려면 밍융마을에서도 말을 타고 2시간은 산을 올라가야 한다. 왕복 4시간이면, 쩡궁마을의 길이 뚫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밍융빙천을 품은 메이리는 윈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더친은 물론 윈난과 티벳 남동부에서도 최고의 성스러운 산으로 통한다. 옛 티벳어로는 ‘흰 봉우리’란 뜻의 ‘카와거보’(6740미터)라 불리는데, 주봉은 워낙에 험해서 등정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밍융마을에서 만난 마니차 돌리는 노인(왼쪽)과 수차처럼 돌아가는 마니차(오른쪽)

 

결국 밍융빙천 구경을 포기하고 다시 쩡궁마을로 왔다. 트럭의 행렬은 여전히 길가에 도열해 있다. 길은 뚫렸나? 아직. 언제 뚫리나? 곧. 트럭 운전수 한 명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봉고차는 트럭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내달렸다. 바로 앞에서 불도저 한 대가 힘겹게 흘러내린 토사를 치우고 있었다. 거의 공사는 마무리 단계였다. 봉고차는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불도저가 옆으로 비킨 틈을 타 울퉁불퉁 질척거리는 길을 지프차처럼 넘어갔다. 휘유우~.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 입에서 모두 한숨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길이 열렸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기다려 길이 열린 것이다. 낮 12시 16분. 이제 다시 티벳으로 간다.

 

 

티벳일기 4: 옌징, 원시 소금계곡의 다랑이 염전들 

소금 계곡을 벗어난 마방의 행렬이 오르막을 올라 루띵마을로 가고 있다.

 

옌징에 도착했다. 한자로는 염정(鹽井), 소금우물이란 뜻을 지닌 곳이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주몽>에서 ‘고산국 소금산’이 어디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지명의 의미만 따져볼 때 옌징의 소금계곡이 드라마상의 ‘고산국 소금산’과 가장 흡사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고산국 소금산’은 가상의 지명이 분명하지만, 부여가 존재했던 기원전 1세기보다 앞선 기원전 2세기(중국의 왜곡된 기록에도 이미 기원전 2세기에 티벳 부족이 등장하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티벳 고원에 이들이 살고 있었다) 이전부터 부족 형태의 티벳이 존재했고, 옌징의 소금계곡 또한 티벳 부족이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나시족과 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드라마 <주몽>에서 가상의 지명으로 거론했을지언정 그 시기의 ‘소금산’이라 불릴만한 소문난 소금 생산지는 티벳의 옌징만한 곳이 없었다.

 

말이 지는 소금짐의 무게는 약 60~70킬로그램, 균형을 위해 마부는 정확하게 무게를 재고 싣는다.

 

어쨌든 옌징은 오랜 옛날부터 소금으로 유명했고, 이 곳에서 나는 소금은 중국의 윈난과 쓰촨, 티벳 고원의 중심부인 라싸는 물론 인도에까지 폭넓게 거래되었다. 때문에 차마고도 교역로에서 옌징이 차지하는 비중은 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더구나 고대국가 시대에는 소금이 곧 칼이었고, 권력이었으며, 부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 값진 소금을 바다가 아닌 내륙 깊숙한 협곡에서 생산한다는 것도 옌징의 소금을 유명하게 만든 또다른 이유였다. 정확한 기록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이 곳 염전의 역사는 부족국가시대인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그 때의 원시적인 소금생산 방식을 고스란히 유지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원시적인 소금생산방식을 유지해오고 있는 옌징의 소금계곡. 수백여 개의 다랑이 염전이 있다.

 

옌징의 소금 계곡은 란창강이 흐르는 협곡에 자리해 있다. 이 소금 계곡을 챠카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옛날에는 강을 사이에 두고 나시족 마을과 티벳족 마을이 분리, 대립하고 있었다. 옛 전설에 따르면 티벳족과 나시족(納西族)은 소금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랜 쟁탈전을 벌였다고 한다. 요즘에야 이런 대립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나시족과 티벳족은 소금 계곡의 염전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다. 옛 기록상에는 이 곳의 염전이 50여 개에 이르며, 여기서 나는 소금은 차마고도 교역의 중요한 거래품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재는 소금 계곡에 수백여 개의 염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모양은 마치 계단식으로 펼쳐진 다랑논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건 그냥 다랑논이 아니라 오랜 세월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눈물의 소금밭이다. 하나의 염전은 수많은 나무기둥과 받침대로 이루어져 있다. 빼곡하게 세운 나무받침 위에 돌과 흙을 깔고 그 위에 또 고운 진흙을 이겨 미장을 하고 두렁을 높여 염전을 만드는데, 이 염전들이 수백여 개 어울려 다랑이진 풍경이 오늘날 소금 계곡의 모습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 곳의 소금 생산 방식이다. 약 1억년 전 해저의 땅이었던 지금의 티벳 고원은 두 개의 대륙판이 부딪쳐 융기한 곳으로, 옌징의 천연한 소금 광산은 그것의 가장 확실한 증거물인 셈이다. 그 옛날 해저에 잠겨 있던 소금 성분은 챠카룽의 몇몇 곳에 샘솟는 온천수에 의해 지표로 솟아나는데, 이 물을 증발시키거나 여과시킨 것이 이 곳의 소금이다.

 

소금 계곡의 다랑이 염전. 소금물을 길어오는 소금 우물은 따로 있다.

 

이런 전통방식의 소금 생산과 다랑밭처럼 이뤄진 독특한 염전지대로 인해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에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건의하고 있지만, 중국은 딴청을 부리고 있다. 이유인즉슨 소금 계곡이 있는 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란창강에 곧 수력발전댐 건설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옌징의 소금 계곡이 수장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천년을 대대로 이어온 이 곳의 전통 소금 생산은 최근 들어 위기를 맞고 있다. 바다에서 생산한 미네랄이 풍부한(사실 옌징에서 생산한 소금에는 갯벌에 많은 마그네슘 성분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소금이 싼값에 대량으로 유입되고 있어 경쟁력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래저래 소금 계곡의 운명과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이 곳의 수백여 개 다랑이 염전은 엄청난 양의 나무기둥과 받침이 떠받치고 있다.

 

내가 옌징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시골 읍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옌징의 중심가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차는 거의 보이지 않는데다 거리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사람들은 등짐을 진 말들을 끌고 어디론가 총총이 사라졌다. 시내 한복판에는 ‘차마고도 주점’도 있었는데, 꽤 오랫동안 차마고도 주막 노릇을 해 왔는지 허름하고 오래된 옛빛이 역력했다. 시장은 과거 우리네 장옥같은 분위기가 났고, 소쿠리며 호미, 삽, 야크방울 같은 물건들이 난전에 나와 있었다. 옌징에는 나시족과 티벳족(뵈레)이 어울려 산다고 하는데, 사실 내 눈으로는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다만 좀더 얼굴이 검고 억세 보이는 쪽이 티벳족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옛날 소금과 차를 교역하던 마방들이 들러가던 '차마고도 주점' 오른쪽에 간판이 붙어 있다.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는 티벳족이라고 밝힌 띵정장춰(31) 가족을 만났다. 이 가족들은 동충하초 파는 일을 한다고 했다. 바이망 설산 인근에서도 여러 명의 동충하초 장사꾼을 만났듯 옌징에도 동충하초 장사꾼이 꽤 있다고 했다. 동충하초는 어디서 캐는가? 망캄 가는 길에 훙라 설산이 있다. 거기에 동충하초가 많다. 그럼 이건 어디다 내다 파는가? 중띠엔까지 가서 판다. 버스를 타면 중띠엔까지 3일이 걸린다. 그렇게 멀리까지 가는가? 지금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옛날에는 말 타고 중띠엔까지 갔다고 들었다. 동충하초는 얼마나 하는가? 500그램에 200위안이다. 그걸 캐는데는 얼마나 걸리나? 500그램 캐는데 두세 달 걸린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2만 5천원을 벌기 위해 두세 달이나 산을 헤매다녀야 하는 게 동충하초 장사꾼의 현실인 것이다.

 옌징의 가장 큰 호텔에 짐을 풀고 TV를 켰지만, CCTV1밖엔 나오지 않는다. 오늘은 독일월드컵 한국과 토고전이 있는 날이었지만, 중계방송이 나오는 CCTV5는 시내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하긴 티벳에까지 와서 월드컵을 보겠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리라. 티벳에 온 이상 티벳의 시간을 따라야 한다. 티벳의 시간은  말과 야크가 걷는 것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한국에서는 서울에서 목포까지 4시간 반이 걸리지만, 여기서는 그 정도의 거리를 가자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는 한 시간 늦는 것에 안달을 하지만, 여기에서는 한 시간쯤 늦는 것은 늦는 것도 아니다. 비행기도 제 시간에 떠나는 적이 없고, 버스는 아예 시간표가 무의미하다. 티벳에서 급하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한국 사람들이다.

 

옌징 거리의 아이가 야크의 꼬리를 잡고 걸어간다.

 

아침 일찍 어제 보지 못한 염전을 보러 란창강을 향해 간다. 멀리 산등성이에 자리한 루띵마을이 안개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절벽과 벼랑 아래로 황토색 란창강이 거칠게 흘러간다. 그런데 절벽을 따라 가로로 길게 실오라기처럼 이어진 것이 있다. 길이다. 까마득한 벼랑에 걸린, 한발만 삐끗하면 바로 란창강이 집어삼키는 위태로운 길이다. 그 위태로운 길을 건너편에서 보고 있자니 내 오금까지 저려온다. 염전을 향해 조금 더 협곡을 내려가자 아, 입이 쩍 벌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건너편의 실오라기같은 길로 10여 마리의 말이 소금짐을 싣고 간다. 그 뒤로는 마방(말이나 노새, 당나귀를 이용해 차와 소금 등을 거래하고 운반하던 상인조직)으로 보이는 세 명의 마부가 뒤따르고 있다. 사실상 옌징에 남은 마방은 옛 차마고도의 전통을 지키는 마지막 마방이나 다름없고, 옌징을 마지막 근거지로 삼고 있는데, 당연히 이 곳의 소금이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위태로운 낭떠러지 벼랑길을 걸어서 마방들은 루띵마을로 간다.

 

소금 짐을 싣고 궁궁을을 뻗친 오르막을 다 올라온 마방의 행렬은 루띵마을로 이어진 낭떠러지 벼랑길을 위태롭게 이동하고 있다.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벼랑길에서 마부들은 짐을 싣지 않은 말일지라도 절대로 타지 않는다고 한다. 고원에 부는 잦은 회오리바람에 말이 몸을 가누지 못해 마부를 벼랑으로 떨어뜨렸다는 웃지 못할 사건이 이 곳에서 종종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실 옛 차마고도의 길이 대부분 저랬다고 보면 맞다. 해서 차와 소금을 나르던 마방들이 숱하게 길에서 죽어야 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방의 행렬이 루띵마을까지 무사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소금 계곡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곳에서는 증발지 소금(오른쪽)보다 여과를 통해 고드름처럼 달린 소금(왼쪽)이 더 유명하다.

 

에움길을 돌아서자 말로만 듣던 다랑이 염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S자로 휘돌아나가는 란창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계곡에 빼곡하게 들어선 것들이 모두 염전이다. 염전을 바로 발 밑에 두고 소금을 나르는 소금꾼의 행렬도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바로 내 눈앞에서 말들을 몰고 산길로 올라섰다. 이 곳이야말로 말이 걷는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곳이다. 나도 천천히 말이 걷는 속도로 염전에 도착했다. 사내들은 보이지 않고 몇 명의 아낙들만 염전을 오가며 두렁에 미장을 하고 있었다. 우기에 내린 비가 상당수의 염전을 망쳐놓았기 때문이다.  

 

다랑이 염전 두렁에 미장을 하고 있는 나시족(추정) 여인.

 

- 여기에 소금 우물이 정말 있는가?

- 온천처럼 소금물이 솟아나온다. 물동이로 그 물을 퍼서 날라다 소금연못(1차 염지)에 채우고, 그 물을 다시 소금밭에 붓는다.

- 이 흙바닥에 그냥 부으면 소금이 더럽지 않은가?

- 그 위의 소금은 주로 가축에게 먹인다(물론 이 소금이 가축을 위한 소금은 아니지만, 티벳인들은 이 소금이 가축의 다산을 돕는다고 믿는다).

- 그럼 사람은?

- 이 아래(나무기둥이 받치고 있는 곳)를 보라. 저기 고드름처럼 매달린 것이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수확한다.

- 그렇다면 이 위의 소금밭은 증발지가 아니라 여과지란 말인가?

- 그렇다. 여기에 소금물을 부으면 일부는 위에서 증발하고, 일부는 이 밑으로 스며들어 저기 천장(밑에서 봤을 때)에 고드름처럼 매달리게 된다.

- 그럼 이 소금밭은 당신 것인가?

- 내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여러 구역 중 한 구역을 가리킴)의 소금밭을 모두 스무 가족이 같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 공동소유?

- 그런 셈이다. 한때 이 곳의 소금밭은 중국에 의해 국영으로 운영(중국이 티벳을 점령한  이후 모든 것은 대부분 국영으로 운영되었으며, 80년대 이후 민간에도 조금씩 양도되었다)된 적도 있다. 다시 우리에게 넘어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 남자들은 왜 보이지 않는가?

- 나도 모르겠다.  

 


옌징의 미래는 이 아이의 눈처럼 밝지가 않다.

 

소금밭에서 일하는 소금꾼은 거개가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소금을 나르거나 내다파는 일을 한다고 하지만, 소금물을 퍼나르거나 소금밭을 고르고 생산하는 힘든 일은 대부분 여자가 담당한다. 티벳에서는 도대체 남자들은 뭐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여자가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 옛날 기록에 따르면 나시족은 모든 힘든 일을 여자들이 도맡아 하는 대신, 1950년 이전까지만 해도 철저한 모계사회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머니는 알지만, 아버지는 알지 못했으며, 여성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고, 재산이나 아이에 대한 소유권이나 양육권도 여성에게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나시족(중국과 티벳에 현재 2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은 진사강과 란창강, 얄룽강 유역에 주로 살고 있는데, 리장에 나시족 자치현이 세워져 있다. 이들은 티벳인들과 달리 지금도 물과 바람, 산과 같은 물신을 숭배하며, ‘동파’라고 불리는 무당이 여전히 존재한다. 과거 일처다부제 생활을 했던 티벳인과 비슷한 면이 많지만, 종교와 생활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난다. 그러나 나시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갔던 나는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시족인지 티벳족인지 알지 못했고,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공부 좀 할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티벳일기 5: 옌징에서 훙라산까지

 


 

차와 소금을 교역했던 차마고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역로이자 가장 위험하고 복잡한 문명통로였다. 어떤 이들은 차마고도가 실크로드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주장하지만, 알 수가 없고, 다만 실크로드의 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당나라(7~10세기) 때 차마고도의 교역도 활발하게 전개된 것만큼은 사실이다. 우리에겐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교역로와 문명통로를 대표하던 길이 바로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였다. 현재 티벳에 남은 차마고도의 흔적은 군데군데 남은 옛길과 옛길을 따라 낸 도로들을 제외하면 옌징의 염전과 이 곳을 무대로 근근히 활동하는 마방이 가장 확실한 차마고도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학교에 갔다가 윗옌징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아이들.

 

수없이 많은 마방이 걸어갔을 옌징의 황토 에움길을 나는 편히 차를 타고 달린다. 옌징을 벗어나면 곧바로 또다른 옌징을 만나게 된다. 옌징(해발 3109미터)은 윗옌징, 아랫옌징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랫옌징에 살고 있다. 옌징에서 고작해야 차를 타고 5분도 걸리지 않는 윗옌징에는 티벳의 유일한 외래종교이자 유일한 천주교 교회가 자리한 곳이다. 약 130여 가구, 600여 명이 사는 윗옌징에 천주교 신자는 의외로 많아서 약 3분이 1이 교회에 다닌다고 한다. 교회는 외관이나 건물 형식은 물론 벽화나 단청의 무늬까지 티벳 사원풍을 고스란히 따랐다. 그러나 예배당에는 분명하게 십자가가 걸려 있고, 입구에는 경전의 문구 대신 주기도문이 적혀 있다. 이 곳에도 여느 천주교처럼 주말 미사가 있는 날이면 사람들이 어김없이 예배를 보러 온다. 티벳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일 수밖에 없다.

 

윗옌징에 자리한 티벳의 유일한 천주교 교회.

 

옌징을 떠나기에는 말과 야크의 속도로 떠나는 것이 어울리지만, 개념 없는 봉고차는 고약한 흙먼지를 날리며 순식간에 옌징을 벗어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옌징다운 풍경을 다시 만났다. 마방의 행렬이었다. 3명의 마부와 6마리의 말로 이뤄진 마방의 행렬은 잠시 쉬었다 가려는지 길가의 너른 공터에 짐을 풀었다. 미라 씨(53) 일행이다. 갈색 마포자루를 내리고 마구를 내려 말도 쉬게 하고, 마부 한 명은 나무를 해오고 또다른 마부는 아궁이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는 때가 시커멓게 낀 양재기를 올렸다. 여기에 미라 씨는 역시 때가 시커먼 주전자에서 물을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 

 


길에서 짐을 푸는 마방. 미라 씨 일행.

 

- 물은 왜 끓이는가?

- 물을 끓여야 차를 마시지 않겠는가

- 이렇게 다니면서 늘 차를 마시는가?

- 그렇다. 차는 지친 몸을 풀어주고, 영혼을 맑게 한다.

- 아까 말에서 내린 짐은 무엇인가?

- 옌빠(소금)다(미라 씨는 짐을 풀어 소금을 보여 준다).

- 아, 이건 붉은 소금이 아닌가.

- 그렇다. 옌징의 염전에서는 홍염과 백염을 다 생산한다.

- 왜 다른 색깔의 소금이 나오는가?

- 강 이쪽의 소금은 백염이고, 저쪽은 홍염인데, 저쪽은 흙(증발지의)이 붉은색이어서 홍염이 된다.

- 이걸 싣고 어디까지 가는가?

- 마캄까지 간다.

- 옌징에서 얼마나 걸리나?

- 4일 걸린다.

- 옌징에서 마캄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나?

- 120킬로미터(112km)쯤 된다.

- 이걸 가져가면 거기서 얼마나 받나?

- 100근(한근에 600그램)에 45~50원 받는다.

- 그것밖엔 안되나. 그런데도 마캄까지 가야 하나?

- 가야 한다. 이제껏 그렇게 살았다.

   옌빠(소금) 짐과 차주전자.


미라 씨 일행은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주루막같은 보따리에서 커다란 빠바를 꺼내 권했다.  손으로 한주먹 뜯어 입에 넣었으나, 먹기가 쉽지 않다. 내내 먼지가 날리는 길을 온 터라 빠바에서는 모래와 먼지가 아작아작 씹혔다. 이건 숫제 먼지빵이다. 내가 빠바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자 목이 메인줄 알고 티벳에서 김치처럼 먹는 나물무침(‘양유’라 한다)을 건넨다. 포우싼에서도 양유를 입에 넣었다가 너무 짜서 인상을 찡그린 기억이 있어 나는 손을 내저었다. 모래가 서걱이는 빠바를 억지로 삼키고는 미라 씨 일행과 헤어졌다.

 

미라 씨 일행이 불을 피워 덩어리차를 끓이고 있다.

     

모래가 서걱이는 빠바(왼쪽)와 양유(소금에 절인 나물무침, 오른쪽).

 

계속되는 비포장길. 차는 덜컹거리고, 탈탈거리고, 쿵쾅거렸다. 갈수록 풍경은 기가 막혀 아! 우와! 쩌억, 짜악, 크아! 계속해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갈수록 날씨도 좋아져, 전형적인 티벳의 푸른 하늘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덩달아 사진을 찍는 나도 신이 나서 덜컹이는 차가 폐차가 되든 말든 정차, 출발을 연발한다. 사실 중띠엔에서 옌징까지 오는 길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처음 이틀은 비가 왔고, 이후에는 계속 먹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지루한 우기를 벗어나 이제야 제대로 된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옌징을 벗어나 만난 란창강가의 칭커밭.

 

그런데 이 길을 자전거로 넘는 사람들이 있다. 오체투지로 넘는 스님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자전거로 라싸까지 간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옌징을 벗어난 지 2시간이 지나 두 명의 바이커를 만났다. 59세의 판웨이선 씨와 26세의 황샤오라이 씨. 둘은 일행이 아니라 오다가 만난 사이란다. 둘다 자전거로 차마고도 답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자전거를 타고 차마고도 답사중인 바이커가 67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런 자전거 여행이야말로 자전거와 한몸이 되지 않고는 넘을 수가 없는 여행인 것이다.

 


훙라산 가는 길에 만난 풍경. 한족 옷을 입은 티벳 아이가 덩치 큰 야크를 끌고 간다.

 

- 어디서 왔는가?

- 랴오닝 다롄(대련)에서 왔다.

- 언제 출발했는가?

- 올 2월 19일에 처음 페달을 밟았다.

- 그럼 넉달째 이러고 있는 건가?

- 그렇다. 다롄에서 산둥과 강소성, 윈난, 따리, 리장, 중띠엔, 더친, 옌징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1만 620킬로미터를 달렸다.

- 그럼 하루에 얼마나 달리는 건가?

- 산길에서는 하루 50~60킬로미터, 평지와 내리막에서는 190킬로미터를 달린다.

-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가?

- 퇴직을 하고 집에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행은 또다른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 이렇게 힘들게 만날 필요는 없지 않은가?

- 힘들다고 여겼으면 여기까지 왔겠는가.

- 이제 어디로 가는가?

- 마캄을 거쳐 라싸까지 갈 거다. 라싸에서는 다시 북쪽으로 길을 잡아 칭장공로를 따라 갈 것이다. 지금 계획으로는 북쪽으로 더 올라가 내몽골을 거쳐 외몽골까지 가볼 생각이다.

 


넉달째 차마고도 자전거 여행중인 판웨이선 씨.

 

판웨이선 씨는 분명 미쳤다. 그의 여행은 모험에 가깝다. 심지어 그는 몽골까지 다녀온 뒤에는 장강을 따라 배를 타고 미얀마까지 표류할 계획까지 짜놓았다. 그런데 미쳐보이는 그가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뭔가. 그건 그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지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즐겁고 기구한 운명의 여행자인가. 나는 그가 여기까지 바람을 헤치며 달려온 자전거 안장에 올라앉아 기나 긴 길의 흔적을 느껴본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땀과 관절의 통증까지 다 배어 있는 자전거는, 얼핏 보기엔 그냥 자전거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냥 자전거는 그와 한몸이 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훙라산 고개에서 만난 산양. 무리의 대장 노릇을 하는 숫놈이다.

 

길은 이제 점점 고도를 높여 산으로 올라간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눈 덮인 봉우리가 산 너머로 펼쳐진다. 제법 덩치가 큰 이 산은 훙라 설산(4470미터)이다. 차는 훙라 설산의 고갯마루를 향해 힘겹게 올라선다. 겨우겨우 올라온 훙라산 고갯마루에서는 사방으로 펼쳐진 산자락의 바다가 장엄하다. 길이 지나는 고갯마루 인근은 천연한 목장이어서 한쪽에는 야크가, 한쪽에는 산양이 떼를 지어 풀을 뜯는다. 고개에 내려 도망치는 산양 사진을 찍느라 잠시 초원을 달렸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거린다. 아직 심각한 고산증세는 없었지만, 이 곳이 고산이라는 것을 호흡이 먼저 느끼고 있다. 내가 헉헉거리는 모습을 보자 산양의 무리 가운데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은 멀찌감치 나를 노려보며 고소하다는 듯 음메에~거렸다. 다른 산양들도 일제히 나를 향해 음메에~ 한다. 여기서 마캄까지는 아직도 60킬로미터가 더 남았다. 

 

 

티벳일기 6: 훙라산에서 마캄까지


훙라산을 넘은 길은 다시 올라온만큼 고개를 내려간다. 산을 다 내려와 처음으로 만난 마을은 빠라마을이었다. 빠라마을 인근은 온통 칭커밭이 에둘렀다. 칭커는 쌀보리의 일종으로 티벳인의 주식인 짬빠(짬바, 볶아서 가루로 만든 것 또는 가루를 버터나 뜨거운 물에 반죽해낸 것)의 재료가 되며, 밀가루와 섞어 빠바를 만들기도 한다. 칭커밭마다 김을 매러 나온 아낙들의 모습이 보이고, 놀러 나온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은 차가 지날 때마다 손을 흔든다. 이 곳에서는 이따금 지나가는 차조차 반가운 손님이다. 차창을 열고 손을 흔들어 주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따라오면서까지 손을 흔든다. 전원적이고 목가적이며 행복한 풍경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마캄 가는 길, 빠라 마을에서 만난 아이.

 

군데군데 남자들은 밭갈이에 한창이다. 빠라마을의 밭갈이를 보니 우리네 겨리쟁기질과 똑같다. 두 마리의 야크를 봇줄에 매어 앞세우고 농부는 뒤에서 쟁기질을 하며 따라간다. 남자가 들판을 갈아엎고 나면, 여자는 번지(흙덩이를 고르는 도구)로 흙덩이를 으깨며 고랑을 고른다. 티벳인들에게 야크는 가축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선 야크는 밭갈이를 하거나 수레를 끌거나 짐을 나르는 일에 동원된다. 그리고 티벳인들은 야크 고기를 구워먹고, 말려먹고, 끓여서 스프처럼 먹기도 한다. 또 야크 우유를 마시고, 이 우유로 버터를 만들며, 버터는 다시 티벳에서 즐겨 마시는 쑤여우차(쑤우오차)가 된다. 야크 버터는 사원에서도 유용하게 쓰이는데, 사원에서 불을 밝힐 때 야크버터를 녹여 기름처럼 쓴다.

 

빠라마을 야크 밭갈이.

 

야크의 가죽으로는 옷과 이불과 유목민의 텐트를 만들고, 뿔은 대문의 장신구가 되기도 하고, 사원의 마니단을 장식하는 성스러운 제물이 되거나 그 두개골에는 마니석을 대신해 ‘옴 마니 팟메 훔’을 적어놓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야크의 똥은 잘 말려 놓았다가 불쏘시개로 사용하며, 이것을 티벳에서는 ‘쭤’라고 한다. 쭤는 그냥 야크 똥만 말린 것이 아니라 칭커짚을 똥에 섞어 마치 흙반죽을 만들 듯 둥그렇게 만든 덩어리를 가리킨다. 야크가 많은 동네에서는 어디를 가나 집담이나 옥상에 쭤를 붙여 말리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티벳에서는 이렇게 쓰임 많은 야크를 그냥 ‘야’라고 부르며, 가장 친근한 가축으로 친다.

 

빠라마을 아이들.

 

빠라마을에서 만난 아이들은 한마디로 꾀죄죄, 꼬질꼬질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씻지 않은 모습이다. 요즘에야 달라지고 있지만, 본래 티벳인들은 씻지 않는 게 전통이다. 그들의 씻지 않는 전통은 티벳의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도가 높은데다 건조하고 햇볕이 강렬해 말끔하게 씻을수록 되레 자외선에 의한 피부 손상이 심해지는 것이다. 거개의 티벳 사람들이 모자를 쓰거나 터번을 두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흔히 중국에서는 티벳인을 구별할 때 ‘고원홍’이 있느냐를 먼저 살핀다고 한다. 고원홍이란 얼굴의 광대뼈 부분과 코가 검붉게 탄 것을 일컫는 말인데, 고원의 티벳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원홍’이 생길 수밖에 없다. 티벳의 태양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얘기다. 나 또한 옌징에서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잠깐 사이에 얼굴이 익은 감처럼 된 적이 있다.

 

빠라마을에서 마캄으로 가는 길.

 

왠지 나는 ‘꼬질꼬질’한 빠라마을의 아이들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별로 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들을 보는 순간 어린시절이 자꾸 떠올랐고, 내가 어린시절을 보낸 1970년대가 바로 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타임슬립한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었다. 티벳에 깊숙이 들어올수록 자꾸만 과거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오래된 과거로 시간여행중인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이 곳에서는 현재이며, 이 곳에서의 현재가 우리의 과거인 것이다. 그러나 잘 나가던 과거로의 여행은 얼마 뒤 순식간에 분위기를 잡치고 말았다.

 

마캄 인근의 마을.

 

빠라마을에서 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조그만 마을을 지날 때였다. 우리의 타임머신 봉고차는 질풍노도와 같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느닷없이, 순식간에 저쪽에서 세 명의 아이가 달리는 차 앞으로 와락 뛰어들었다. 미처 빵빵거릴 겨를도 없이 운전수는 끼이이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차는 이 녀석들을 불과 10센티미터 정도 앞에 두고 간신히 섰다. 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운전수가 화가 나서 차창을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저쪽에 앉아 있던 아이들까지 우르르 차창 앞으로 몰려왔다. 앞에서는 3명의 아이가 차를 가로막고 옆에서는 다른 아이들이 다가와 다급하게 무슨 말인가를 하며 차문을 열려고 한다. 이건 숫제 칼만 안들었지, 노상강도에 날강도가 아닌가.  그 중의 한 아이는 채 다섯 살도 안되는 어린아이도 끼어 있었다.

 

마캄 중심부에 자리한 웨이서 사원과 라마.

 

아이들의 요구는 이것이었다. 돈을 내놓던가, 담배를 내놓아라. 아니면, 먹을 거라도 내놓아라. 마치 아이들은 통행세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 큰소리를 치며 달려들었다. 그건 분명 구걸하는 자세가 아니라 강탈하려는 자세였다. 아이들이 뛰쳐나온 쪽을 살펴보니 4명의 어른이 어슬렁거렸고, 그 중 하나는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하나는 서서 우리를 구경하고, 두 명은 한발한발 발걸음을 옮겨 이리로 다가왔다. 결국 우리는 가지고 있는 담배를 내놓는 것으로 흥정(사실은 강탈)을 마무리했다. 아이들은 부업삼아 이 짓을 하는 것같았지만, 이것이 직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입이 짭짤해지면 이 녀석들은 이제 학교도 가지 않고, 이 곳에 죽치고 앉아서 지나가는 차마다 달려들어 이런 강탈을 직업삼아 일삼을 것이다. 이것이 티벳의 낭만과 경치만 보고 온 내 눈에 비친 티벳의 또다른 슬픈 현실이었다.

 

마니차를 돌리며 법당을 코라하는 순례객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마캄(망캉)에 도착했다. 여기서 라싸까지는 아직도 1200킬로미터 이상이 남았다. 마캄(해발 3900미터)은 지금까지 달려온 진장공로가 쓰촨 쪽에서 올라온 천장공로와 합류하는 곳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현(군) 소재지로서 제법 규모가 큰 도시다. 티벳의 도시가 대체로 그렇듯 규모가 클수록 티벳다운 풍경은 사라지고, 중국화가 다 되어 여행자에게는 별 매력 없는 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그나마 마캄에는 중심부에 겔룩파 사원인 웨이서 사원이 자리하고 있어 도시에서 받은 실망감을 보상해 준다. 사원은 어른들에게는 기도와 순례의 장일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놀이터 이상의 의미가 없다.

 

             

웨이서 사원 입구 마니차와 법당 마당에서 만난 극성스러운 아이들.

 

웨이서 사원에서 만난 아이들은 어디서 났는지 물총을 가지고 2층 회랑에 올라 법당으로 향하는 순례객들에게 장난을 친다. 이 녀석들 어찌나 짓궂고 극성맞은지 내가 카메라로 법당과 순례객을 찍는 것을 발견하자 우르르 몰려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법석이다. 안 찍어주면 찍어줄 때까지 앞을 가로막고 촬영을 방해한다. 결국 녀석들에게 나는 몇 장 찍어주고 검사까지 받고서야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마캄을 벗어나면 이제껏 함께 한 214번 국도는 318번 국도에게 라싸행 임무를 넘겨준다. 길도 한결 좋아져 모처럼 아스팔트길이 푸른 골짜기를 향해 뻗어 있다. 덜컹거리던 차가 잠잠해지니 어쩐지 엉덩이가 허전하다.

 

 

티벳일기 7: 마캄에서 조공까지


지금까지의 노정: 중띠엔-(190km)-더친-(181km)-옌징-(112km)-마캄-(158km)-조공

앞으로의 노정: 조공-(201km)-팍쇼-(219km)-보미-(89km)-퉁마이-(146km)-링트리/빠이-(120km)-드락숨쵸-(50km)-공푸장따-(274km)-라싸-(280km)-시가체-(146km)-간체

라싸에서의 노정: 라싸-(195km)-남쵸  * 붉은색은 왕복노정

 


 

마캄을 벗어난 길은 다시 펑퍼짐한 고개를 넘는다. 봉우리는 밋밋하고 산자락은 부드럽게 흐른다. 나무는 드물어서 고갯마루가 천연한 초원의 언덕이다. 만만해 보이는 이 언덕도 해발 4000미터가 훨씬 넘는 곳인데, 고갯마루에는 역시나 타르쵸가 바람에 펄럭인다. 펄럭이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찢어질 듯 바람이 거세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라체(돌을 쌓아 만든 탑)가 쌓여 있고, 타르쵸가 날리는 풍경이 이제는 익숙할 법도 하건만, 여전히 고개마다 그 감흥은 색다르다. 타르쵸가 날리는 언덕에서 무심하게 풀을 뜯는 양떼들. 젊은 양몰이꾼은 활 대신 이제는 엽총을 등에 매고 언덕을 어슬렁거린다.

 

마캄 인근의 언덕길.

 

언덕을 넘어가면 한동안 보지 못했던 란창강과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을 마지막으로 란창강과는 이별이다. 여기서 5천미터급 산을 넘어가면 미얀마로 흘러들어 샬윈강이 되는 노강을 만나게 되고, 조강에 이르면 다시 유추강을 따라가게 된다. 이제 318번 국도는 란창강을 건너면서 다시 비포장길로 바뀐다. 티벳에서 비포장길이란 말 그대로 포장할 수 없는 구간이란 뜻이고, 그만큼 난구간이란 의미가 된다. 여기서 조공으로 가려면 두 개의 산을 넘어야 하는데, 그 중 하나는 해발 4000미터 남짓한 고개이고, 다른 하나는 해발 5008미터의 둥다라 산이다. 이제껏 지나온 산 중에 가장 높은 산을 넘어야 한다.

 

마캄 인근 언덕의 타르쵸.

 

문제는 벌써 시간이 저녁 6시가 넘어서 필경은 한밤중에 저 산길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의식해서인지 봉고차는 최대한으로 속력을 내보지만, 오르막길인데다 굽이가 심한 길이어서 속도는 느림보 트럭과 다를 바 없다. 올라갈수록 길은 급경사의 벼랑길이다. 오른쪽은 금세라도 사태가 날 것만 같은 절벽이고, 왼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다. 겨우겨우 산 하나를 다 올라와 내려다보니 산 아래로 흐르는 란창강 줄기가 실오라기처럼 보인다. 날은 거의 저물어 산그늘이 지나온 에움길을 다 지워버렸다. 이제 차는 어둠을 뚫고 산을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봉고차 운전수는 전조등을 켜지 않는다. 뒤에서 불좀 켜고 달리자 해도 운전수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고는 기어이 그 위험한 산길을 전조등도 없이 넘었다.

 

엽총을 맨 목동과 양떼.

 

캄캄한 계곡에서 5분간 휴식. 다시 출발. 하지만 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차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짤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두 번, 세 번, 네 번째가 되어서야 시동이 걸렸다. 뒤늦게 운전수는 배터리가 거의 소진됐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아까 산을 넘을 때 전조등을 켜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조금 전에 넘은 산은 4000미터 남짓한 고개였고, 이제 넘어야 할 산은 5008미터였다. 그것도 전조등도 없이 캄캄한 밤에 넘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해서 차에 탄 일행들은 설령 가다가 서는 한이 있어도 전조등을 켜고 달리자고 애원했고, 운전수도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산 위에서 본 다랑이밭.

 

한밤중 둥다라 산길엔 이제 흐릿한 전조등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차가 불을 켜고 달리는데도 차안에서는 이따금 으악, 꺄악, 어어어, 어머나 하는 비명이 합창하듯 울려퍼졌다. 그렇게 한 시간쯤이 지나자 공포의 비명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쿨쿨, 푸아, 드르렁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똑같은 공포의 반복에 사람들은 둔감해졌고, 결국 계속되는 공포의 리듬이 오히려 사람들을 피곤한 잠속으로 이끈 것이다. 저녁 10시 30분. 차는 둥다라산을 넘어가 둥다마을에 닿았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차가 멈추자 사람들도 일제히 잠에서 깨어났다.

 

저 위태로운 벼랑길을 봉고차로 달려왔다.

 

비몽사몽간에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또다시 으악, 꺄악, 이럴 수가를 연발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비명소리가 아니라 감탄사였다. 바로 하늘에 뜬 별을 보고 내지른 소리였다. 정말 별천지였다. 하늘이 온통 별로 뒤덮여 눈꼽만큼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일찍이 한국에서 보아온 별들의 백배천배는 돼 보였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별은 처음 봤다. 아무리 해발 5천미터급 산밑에서 보는 별이라지만,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별들이 본래 저렇게 많았단 말인가. 우주에 떠 있는 모든 별이 저 하늘에 다 모여있는 것만 같았다. 이후 티벳에서 꽤 많은 밤을 보냈지만, 둥다라 산밑에서 보았던 별만큼 압도적인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둥다라 가는 길에 본 풍경.

 

별천지 아래를 달려 차는 조공을 향해 간다. 산을 넘는 동안 비포장이었던 길은 다시 아스팔트로 바뀌었다. 11시가 넘어 드디어 조공(해발 3800미터)에 도착했다. 한밤중에 도착한 조공은 생각보다 크고 화려했다. 애당초 이 곳은 티벳의 도시가 아니라 중국이 건설한 인공 군사도시인지라 티벳다운 면모는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군인들을 위한 위락시설과 식당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삭막하게 느껴지는 도시다. 힘겹게 비포장 산길을 넘어온 탓인지 물티슈로 얼굴을 닦아내자 티슈는 금세 검붉은 황토 먼지로 얼룩진다. 입안에서는 먼지가 서걱거리고, 눈은 따끔거리며 아팠다. 너무 늦게 온 탓인지 빈방이 남아 있는 숙소가 거의 없었다. 몇 군데 ‘삔관’을 돌아다닌 끝에 겨우 도미토리 방을 얻었다. 바닥은 그냥 먼지가 뽀얀 시멘트 바닥이었고, 다섯 개의 삐걱이는 침대가 아무렇게나 놓인 방이었지만, 짐을 풀고 나자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둥다라산의 구름.

 

그런데 피곤해서 잠은 밀려오는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산소 부족 증세가 심해지면서 호흡곤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두통은 없었지만,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숨이 막혀 괴롭기만 했다. 이것이 고산증세라는 걸 난 다음 날에야 알았다. 어쨌든 나는 잠을 설치며 40여 분간을 침대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좀 괜찮아진듯하여 잠자리에 들었으나 이번에는 자다 말고 수면 중에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났다. 나는 다시 일어나 30분 넘게 심호흡을 하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고산증을 경험한 사람에 따르면 이 정도는 아주 경미한 증세에 불과하다고 한다.

 

아침 7시의 조공 시내 풍경.

 

심할 경우 고산증은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프고, 되게 차멀미라도 한 듯 속이 메슥거리면서 결국 속엣것을 다 토하고, 정신은 혼미해지고, 숨은 막혀서 죽을 것처럼 답답하고, 여기서 더 심하면 폐에 물이 차서 생명까지 위험하다고 한다. 너무 심한 경우 고산증은 지대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지만, 토하고 어지러운 정도의 고산증은 대개 3~4일이 지나면 한결 나아진다. 중국이나 티벳의 약방에 고산증에 먹는 알약이 있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증세를 다소 완화시킬 뿐 치료약이 되지는 못한다. 다행히 아침에 일어나서는 더 이상의 고산증세 없이 가뿐했다.

 

라싸로 가는 침대버스.

 

숙소에서 나와 밥을 먹으러 가는데, 라싸로 가는 침대버스가 거리에 정거해 있다. 오는 동안 어쩌다 마주치는 침대버스가 궁금하던 차에 잠시 침대버스를 구경했다. 침대버스는 2층으로 되어 있다. 높이를 높여 2층으로 만든 것이 아니므로 버스 침대에서는 일어나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라싸까지는 어떡하든 누워서 가야 하는 것이다. 조공에서 만난 침대버스는 이틀 전 중띠엔에서 출발했는데, 기사 2명이 교대로 운전하면서 밤에도 쉬지 않고 달려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이렇게 2교대로 쉴새없이 달리면 라싸까지 4일이면 간다고 한다.

 

   

이얼빠와 쭝지(왼쪽). 침대버스 내부(오른쪽).

 

침대버스 앞에는 승객들에게 먹을 것을 팔려는 장사치가 이른 아침부터 진을 쳤다. 보아하니 찐빵같은 것과 찰밥같은 것을 팔고 있었다. 찐빵처럼 생긴 것은 ‘이얼빠’라 하고, 댓잎에 싸서 찐 찰밥은 ‘쭝지’라 불렀다. 쭝지는 언젠가 담양에서 사 먹었던 댓잎찰밥과 모양새가 똑같았다. 중국에서는 보통 단오 때 쭝지를 먹는다고 하며, 이날은 시인 굴원(중국 초나라 때의 시인, 여러 번 유배를 당한 끝에 굴원은 돌을 안은 채 강물에 몸을 던졌다. 중국에서는 5월 5일에 굴원을 추모하는 용선축제를 벌이기도 한다)이 빠져죽은 날이기도 해 쭝지를 만들어 강물에 뿌리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굴원이 죽은 날 쭝지를 강물에 뿌리는 것은 물고기가 시체를 뜯어먹는 대신 이 쭝지를 먹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란다. 중국화된 티벳의 도시에서 중국 음식을 팔고, 한족이 더 활개치는 풍경은 이제 티벳의 어디를 가나 만나는 풍경이 되었다.

 

 

티벳일기 8: 조공에서 팍쇼까지-아흔아홉 굽이 감마라 산을 넘어

 

감마라 산의 아흔아홉 굽잇길.

 

조공(左貢)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아침 식사도 거르고 배터리를 손보기 위해 정비소로 떠난 운전수는 2시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짐을 모두 챙겨 정비소를 찾아 나섰다. 정비소는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문제는 배터리를 손봐야 한다던 봉고차였다. 만일 배터리를 교체해야 하는 거라면 30분도 걸리지 않는 작업이었지만, 아무래도 문제는 배터리에만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결국 1시간을 더 정비소 앞에서 기다린 끝에 운전수가 차를 몰고 나왔다. 11시 30분. 3시간 30분을 순전히 차를 고치기 위해 밍숭맹숭 기다린 것이다.

이제 318번 국도는 조공을 벗어나 유추강을 따라간다. 유추 강변을 따라 내내 푸르고 시원한 칭커밭이 펼쳐진다. 칭커밭엔 붉은색과 분홍의 터번을 쓴 아낙들이 김매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도 김매기, 저기서도 김매기, 칭커밭마다 너댓 명의 아낙들이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자 아낙들은 아예 고개를 들지 않는다. 보리싹처럼 올라온 이것이 칭커 맞느냐고 묻자,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칭커, 칭커라고만 대답한다. 결국 내가 칭커밭을 다 벗어났을 때쯤에야 이들은 고개를 들고 나를 본다. 그러나 다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감춘다.

 

유추강변 칭커밭에서 김매기를 하고 있는 아낙들.

 

유추강은 생각보다 유순하게 흐른다. 그동안에 만난 진사강이나 란창강에 비하면 유추강은 밋밋하고 부드럽다. 진사강이나 란창강이 단 한치의 농토도 허락하지 않는 것에 비해 유추강은 강변을 따라 칭커밭이 즐비하고, 제법 터가 너른 마을도 끼고 있다. 한동안 유추강을 따라가던 길은 해발 4000미터 이상을 올라가 폼다 갈림길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북쪽으로 길을 잡아 가면 폼다와 참도가 나오고, 서쪽 길을 택하면 감마라 산을 넘어 팍쇼(八宿)에 이르게 된다. 라싸로 가는 318번 국도는 여기서 왼쪽으로 뻗어 있다. 보이는 건 희끗희끗한 설산 봉우리와 첩첩이 펼쳐진 산자락 뿐이다.

감마라(4618미터) 가는 길에 쓰촨에서 왔다는 런저 스님(37)을 만났다. 그는 한낮의 뙤약볕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오체투지로 뜨거운 아스팔트를 따라가고 있었다. 본래 오체투지(五體投地)란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부처에게 예를 올리는 것인데, 실제로는 배와 가슴, 허벅지까지 땅에 닿게 하여 전체투지 모양을 띤다. ‘오체투지’를 티벳 스님들은 ‘차체’라고 부른다. 보통 티벳의 스님들은 차체를 할 때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사실은 더 많은 오체투지를 하기 위해) 앞에는 앞치마같은 야크가죽를 걸치고, 손과 발, 팔꿈치에는 나무와 가죽으로 된 보호대를 착용한다. 런저 스님도 그런 모습으로 차체를 하며 아스팔트를 따라가고 있었다. 

 

  런저스님.

 

- 어디서 왔는가?

- 타궁에서 왔다.

- 어디로 가는가?

- 라싸로 간다.

- 라싸는 왜 가는가?

- 라마로서 한번은 가야만 하는 길이다.

- 그렇게 오체투지로 말인가?

- 그렇다. 다들 이렇게 간다.

- 이렇게 가면 라싸에 언제 도착하는가?

- 1년쯤 걸릴 것이다. 더 걸려도 상관없다.

- 타궁에서 여기까지는 얼마나 걸렸나?

- 4개월 걸렸다.

- 혼자 가는가?

- 혼자 간다.

- 다른 스님들은 뒤에서 식량을 들고 따라오는 보급 스님을 두지 않는가?

-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나까지 그래야 하는가.

- 밥은, 또 잠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 저기 뒤로 보이는 마을에 짐수레가 있다. 거기에 내가 먹을 식량과 필요한 것들이 실려 있다. 마을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냥 길에서 잔다.

- 그럼 다시 저 마을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1킬로미터를 다시?

- 그렇다. 내가 가고자 한 만큼 오체투지로 가서 올 때는 걸어서 수레까지 온다. 수레를 끌고 다시 여기까지 와야 하니까.

-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뭔가?

- 이건 라마로서 경전을 읽는 것과 같다.

 

스님에게 나는 10원짜리 지폐를 가죽치마에 찔러주고는 고개를 숙여 합장했다. 보통 오체투지를 하며 라싸까지 가는 스님들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공양하는 돈과 식량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간다. 다행히 티벳에서는 이렇게 오체투지하는 스님들에게 기꺼이 공양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가난하고 쪼들리는 사람들이지만, 자신이 해야 하는 오체투지를 ‘그’가 대신해 주고 있으므로 ‘그’에게 하는 공양은 곧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2~3일이면 나는 흔들리는 차에 실려 라싸에 가 있을 것이지만, 그는 여전히 몸으로 경전을 외우며 저 팍팍하고 뜨거운 길 위에 육체의 모든 끝을 비비며 갈 것이다.

 

 감마라 318 국도 원표.

 

사실 그가 라싸에 가려는 이유와 내가 라싸에 가려는 이유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생각하는 라싸까지의 물리적 거리와 내가 생각하는 물리적 거리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차를 타고 가는 나의 라싸보다 되레 오체투지로 가는 그의 라싸가 훨씬 가까워보였다. 그가 라싸를 멀게 느꼈다면 애당초 이런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모험도 여행도 아닌 수행이며 참선이고 독경인 것이다. 아마도 나는 평생을 가도 그가 만나려는 라싸를 만나지 못하리라. 라싸에 도착해서까지 나는 라싸에 가기 위해 내내 차를 타고 있어야 하리라. 그렇다면 여기서 라싸는 얼마나 먼가. 런저 스님은 환하게 웃었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오체투지하는 그보다 차에 올라앉은 내가 더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라사원에서 본 길풍경.

 

한낮의 태양이 해발 4천미터의 땅거죽을 뜨거운 양철처럼 달구어 놓았다. 더위 탓인지 차창 밖으로 간간 보이는 설산 봉우리가 시원하기만 하다. 길은 다시 고도를 높여 해발 4618미터의 감마라 산(이에라 산)을 넘는다. 어느 새 아스팔트는 흙길로 바뀌어 있다. 타르쵸가 날리는 고갯마루에서 잠시 휴식. 여기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곧 후회하게 된다. 라싸까지의 노정에서 가장 심하고 어렵고 지루한 굽잇길을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감마라 굽잇길은 더러 여행자들에게도 알려져  영문책자나 안내서마다 굽이의 숫자가 다르다. 어떤 책에는 일흔두 굽이라 하고, 어떤 책에는 아흔아홉  굽이라 소개해 놓았다. 어차피 몇 굽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굽이가 많은 길을 심리적 굽이로써 아흔아홉 굽이라 하였으니, 이 곳의 굽이는 아흔아홉 굽이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도라사원의 일주문.

 

감마라의 아흔아홉 굽이는 멋들어진 굴곡의 본새로 궁궁을을 산자락을 내려간다. 내려가면서도 까마득한 길이다. 한참 졸다가 깼는데도 여전히 굽잇길이다. 팍쇼가 해발 2600미터라고 하니 감마라 고갯마루에서 무려 2천 미터 고도를 굽이굽이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감마라를 다 내려가면 잠시 노강과 만났다가 노강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군사지역인 관계로 다릿목에는 몇 명의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여기서 무모하게 노강 사진을 찍으려던 나는 보기 좋게 총을 든 군인들에게 걸려 군소리 없이 차에 타야 했다. 티벳에서는 다리를 찍거나 다리에서 강을 찍는 것이 금지돼 있다. 티벳에서 다리는 중요한 군사시설이기 때문이다. 

    

도라사원 마니단의 야크뿔.

 

감마라 산을 넘고 노강을 건너면 팍쇼 가는 길에 만나는 아담한 사원이 하나 있다. 뚜어라션산에 있는 도라사원이 그곳이다. 도라사원은 규모는 작지만 꽤나 인상적인 사원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마니석과 야크뿔을 잔뜩 쌓아놓은 마니단이 있는데, 뿔이 달린 야크의 해골뼈에는 마니석에 적어놓은 것처럼 ‘옴 마니 벳메 훔’이나 경문을 적어놓았다. 티벳에서는 종종 마니단이나 대문 위 또는 지붕을 야크뿔로 장식한 모습을 만날 수 있는데, 아마도 이는 잡귀를 쫓으려는 민간신앙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마니단 뒤쪽에는 마니차 순례길과 쵸르텐이 있고, 마당을 건너면  크고 오랜 마니차를 보관한 마니라캉이 있다. 마니라캉에는 원색의 붉은색으로 칠한 마니차가 천장에 걸려 있는데, 붉은색과 어울린 용그림이 눈길을 끈다.

 

     마니차와 법당 입구.

 

도라사원의 법당은 전망 좋은 언덕에 자리해 있다. 법당 앞에서 만난 스님은 두 명의 난장이 스님이다. 나를 보더니 법당 뒤로 숨어버린 스님도 난장이 스님이고 보니 이 사원에는 난장이 스님이 꽤 있는 듯했다. 저리 스님(22)과 뎀바 스님(23). 20대 초반인 두 스님의 얼굴은 나보다도 훨씬 늙어보여 적어도 40대 후반이나 50대로 보였다. 이들은 사원에 나타난 외국인 손님이 낯설고 처음인 듯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며 이야기를 시켜도 뒤돌아서곤 했다. 그러나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나서는 허리춤에 찬 상징메달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우리의 십이지간지 동물을 빼곡하게 그려넣은 만물영생 상징물이었다.

 

짬파로 둥글게 빚은 토르마.

 

법당의 단청은 다양한 원색 채색과 금색 치장으로 화려하다. 법당 안쪽도 벽은 노란색으로 칠해 눈이 부셨고, 천장은 붉은 기둥과 파란 서까래가 한눈에 들어왔다.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고 그 앞에는 낡고 오래된 북이 걸려 있다. 불단 양쪽에는 불경이 잔뜩 쌓여 있고, 불단 앞 스님이 앉는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붉은 물감을 칠한 토르마(짬파로 만든 부처에게 바치는 제물용 음식)와 잉크병이 놓여 있었다. 사원 안에는 두 명의 비구니가 있었는데,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묻자 조화가 분명한 조잡스런 화병을 앞에 갖다 놓는다. 아마도 두 비구니 스님은 앞에 꽃이 있으면 더 예쁘게 사진이 나온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해서 내가 일부러 자리를 옮겨 사진을 찍자 금세 그쪽으로 조화 화병을 옮겨놓는다.

 

팍쇼 소학교 아이들.

 

도라사원을 나와 318번 국도를 조금만 더 따라가면 이제 팍쇼가 나온다. 도심 외곽에 숙소를 잡고 짐을 푼 뒤, 저녁을 먹으러 중심가로 걸어간다. 팍쇼 소학교 앞을 지나는데, 10여 명의 아이들이 극성스럽게 내 앞으로 몰려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녀석들이 내 목에 매달린 카메라를 발견한 것이다. 조금 어둡긴 했으나, 녀석들의 요구대로 셔터를 몇 번 누르자 아이들은 우르르 카메라 앞으로 바싹 다가선다. 뒤에 선 녀석들은 아예 펄쩍펄쩍 뛰어오른다. 극성스러움을 넘어 녀석들은 밥 먹으러 가는 나에게 들러붙어 계속 치근덕거린다. 팍쇼는 도로를 따라 길게 도심을 이루고 있다. 넓은 편은 아니지만 긴 편이다. 물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가는데, 15분이면 충분하지만.

 

이동용 길거리 푸줏간.

 

이튿날 아침 숙소를 나오는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낮달이 떠 있다. 한국에서 보았던 달보다 훨씬 큰 달을 망원으로 들여다보니 아쉬운대로 달표면까지 다 보인다. 하늘이 가까우니 달도 크다. 이른 아침 거리에는 이동용 푸줏간 수레가 돼지고기를 싣고 지나며 호객을 하고 있었다. 손님이 오면 남자는 손저울로 달아 고기를 팔고, 여자는 옆에서 돈을 받고 거슬러주며, 장부에 적는다. 푸줏간 주인과 경리가 함께 거리 장사를 하는 셈이다. 이 이동용 푸줏간은 장사가 제법 잘 되는 편이어서 내가 지켜본 10분 동안 무려 4명의 손님이 고기를 사들고 갔다. 저렇게 많은 고기를 싣고 나온 걸 보면 저걸 오늘 아침에 다 팔려는 생각인 모양이다.

 

 

티벳일기 9: 빙하호수 라웍쵸와 도둥 사원(팍쇼-포미 구간)

 


팍쇼를 지나면 다시 길은 차츰차츰 고도를 높여 간다. 길 옆에는 여전히 칭커밭이 펼쳐져 있고, 드문드문 유채밭이 노란꽃을 피우고 있다. 녹색의 칭커밭과 샛노란 유채밭과 멀리 보이는 흰 설산과 푸른 하늘의 어울림. 자연의 빛깔은 어떤 식으로 어둘리든 아름답기만 하다. 영문판 안내서에는 여기서부터 걸라설산(5768미터)을 앞에 두고 달리게 된다, 고 설명해 놓았지만, 앞쪽으로 보이는 설산이 한두 개가 아니어서 어떤 것이 걸라설산인지는 알 수가 없다. 길은 점점 설산 쪽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제 풍경은 푸른 칭커밭에서 김을 매는 아낙과 뒤로 보이는 설산이 어우러진 정말로 티벳다운 풍경이 한동안 펼쳐진다.

 

안주라 언덕으로 이어진 318번 국도.

 

이런 풍경을 만나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티벳을 왜 여행하는지가 의심스러울 것이므로, 나는 차에서 내려 정신없이 칭커밭과 설산을 찍고, 김을 매는 할머니와 뛰어노는 아이들을 찍는다. 김을 매던 할머니 한 분은 웬 이상한 녀석이 칭커밭을 돌아다니나, 하고 한참이나 내가 하는 짓을 구경한다. 밭에서 놀던 아이들도 잠시 나를 구경한다. 아이들에게는 이 푸른 칭커밭과 뒤로 보이는 설산 언덕이 놀이터이고 쉼터이다. 솔직히 말해 이런 곳에서는 모든 일정을 접고 그냥 하루쯤 놀다가 가고 싶다. 혼자 돌아다니는 여행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했을 테지만, 갈 길이 먼 봉고차는 시동을 걸어놓고 자꾸만 재촉을 한다.

 

세로로 세워진 깃발을 룽다라 하는데, 언덕에서 기원을 빌며 던지는 종이도 룽다(달리는 말)이다.

 

고도를 높여온 길은 이제 해발 4618미터의 안주라 언덕을 올라간다. 티벳에서는 안주라 언덕처럼 5천미터 안팎에 이르는 언덕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뾰죽한 봉우리가 없으니 고도가 높아도 그냥 ‘언덕’인 것이다. 티벳어로 ‘라’는 언덕을 뜻한다. 반면 산은 ‘리’를 붙인다. 계곡은 ‘룽손’, 강은 ‘창포’, 좀더 작은 샛강은 ‘추’, 호수는 ‘쵸’, 길은 ‘람’이라 한다. 안주라 고갯마루에는 어김없이 오색의 타르쵸가 날리고 있다. 왼쪽에는 습지와 호수가 이어져 있고, 오른쪽에는 설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고갯마루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설산에서 흘러내린 유빙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이 빙하는 조금씩 녹아서 계곡의 지천으로 흘러드는데, 계곡물이 천연한 빙하수가 되는 셈이다.

 

안주라 언덕에서 만난 빙하와 빙하수 계곡.

 

안주라 언덕을 내려오면 제법 운치있는 호수인 라웍쵸(3859미터)를 만나게 된다. 라웍쵸는 318번 국도에서 라웍 마을을 앞에 두고 왼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십리 넘게 따라가야 만날 수 있는데, 호수의 둘레를 산자락이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라웍쵸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바로 길 옆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보라를 일으키는 두 줄기 폭포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라웍 마을을 에두른 응안쵸로 흘러드는데, 응안쵸는 다시금 파룽 강으로 물길을 낸다. 간혹 라웍 마을을 지나는 초행자들은 이것이 라웍쵸인줄 착각할 때가 많다. 사실 응안쵸나 라웍쵸 정도의 호수는 티벳에서 그리 큰 축에 들지 못한다. 티벳에는 남쵸를 비롯해 자리남쵸, 세르링쵸, 얌드록쵸와 같은 거대한 호수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라웍쵸 폭포.

 

라웍 마을(인구 2000여 명)은 팍쇼에서 90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마을 앞을 둥그렇게 휘돌아 나가는 응안쵸는 주변을 둘러싼 설산 봉우리로 인해 어느 쪽에서 바라보든 인상적인 그림을 연출한다. 응안쵸 호숫가는 늪지와 초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데, 호수를 배경으로 무리지어 풀을 뜯는 야크떼도 만날 수 있다. 마을과 응안쵸 사이에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숙덴 사원도 만날 수 있다. 폐허가 되었을지언정 멀리서 바라보는 숙덴 사원의 풍경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사원 앞에는 노란 유채밭이 펼쳐져 있고, 유채밭으로 가는 길가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꽃들이 피어 있다. 이 꽃밭은 마을 아이들에게 종종 놀이터가 되고, 운동장이 되어 준다. 숙덴 사원에서 그나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호숫가로 한발 나앉은 쵸르텐인데, 이 곳에서 바라보는 호수와 설산 풍경이 제법 그럴싸하다. 

 

빙하호수인 라웍쵸 호수.

 

라웍 마을은 318번 국도변을 따라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거리에는 중간중간 당구대를 내놓았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티벳의 당구장이다. 이런 야외 당구장 풍경은 작은 시골 마을까지 흔하게 보는 풍경이다. 라웍 마을을 지나면 길은 파룽 강을 따라 구불구불 흘러간다. 파룽 강은 이제까지 보아온 강물의 빛깔과는 사뭇 다른 빛깔을 띤다. 이제까지의 강물이 황토색이었다면, 파룽의 물빛은 연한 비취색이다. 이는 설산의 빙하가 녹아내린 빙하수의 빛깔이다. 빙하수가 에메랄드나 비취색을 띠는 까닭은 돌가루 때문이다. 이것을 과학적으로는 ‘락플라워 현상’이라고 하는데, 빙하가 천천히 녹아 흘러내리면서 빙하수가 지표면의 돌가루를 함께 실어날라 이런 아름다운 빛깔을 띠게 되는 것이다.

 

라웍마을 쑥덴 사원(위)과 쵸르텐(왼쪽 아래). 사원 언덕에서 노는 아이들(오른쪽 아래)

   

 

옥빛 물길에 뒤로는 설산이 펼쳐져 있고, 산자락을 따라 침엽수가 뒤덮은 이런 풍경은 얼핏 보아서는 캐나다에서나 봄직한 풍경이다. 파룽 강가에서 자라는 침엽수는 거개가 냉삼나무(렁쌍나무, 삼나무 종류)다. 냉삼나무는 올곧게 솟아오른 모습도 멋지거니와 붉은빛이 감도는 솔방울이 무엇보다 아름답다. 어지간한 꽃보다는 냉삼나무의 솔방울이 훨씬 화려하고 자극적이다. 특히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적갈색 솔방울이 방울방울 매달린 풍경은 일부러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게 만든다. 냉삼나무뿐만 아니라 설산 쪽 기슭에는 다른 수종의 침엽수도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다. 라웍을 지나면서 유난히 많은 너와집을 만나게 되는 까닭도 바로 주변의 풍부한 목재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티벳을 황량한 고원으로 인식할 때가 있지만, 사실은 목재가 풍부해 중국에서는 티벳의 목재를 우라늄만큼이나 중요한 자원으로 여기고 있다.

 

라웍을 지나 만나는 캐나다다운 풍경.

 

잠깐 졸다가 깨어보니 어느 새 차는 포미에 도착해 있다. 제법 규모가 큰 포미(2740미터, 11,000여 명 거주) 시내는 중국의 여느 도시의 풍경과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중국화가 이루어져 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중국이 도시마다 반드시 건설하고야 마는 중국식 광장까지 들어서 있다. 팍쇼가 그렇듯 포미에서도 티벳다운 풍경을 만나려면 시내를 벗어나야 한다. 포미를 벗어나 약 십리쯤 왼쪽 산길을 타고 오르면 도둥 사원을 만날 수 있다. 때마침 도둥 사원은 1년에 한번 일주일 동안 불경을 외우는 ‘배젠신주’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는 오로지 불경을 외우는 데 모든 시간을 바친다. 스님들이 불경을 외우는 동안  주방스님은 빈 찻잔을 찾아 돌아다니며 일일이 차를 따라준다. 배젠신주 기간 동안 주방스님은 거의 하루종일 차를 끓이고 가져와 따라주는 게 일이다.

 

 붉은 냉삼나무 솔방울.

 

도둥 사원은 게사르 왕에 대한 벽화로 유명한 절이다. 게사르는 티벳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실존 인물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영웅이다. 티벳의 <게사르 왕 이야기>는 세계에서 가장 긴 영웅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구전으로 떠돌던 이야기가 사람과 사람을 거쳐 시대와 시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보태져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양의 이야기로 탄생하였다. 이야기는 고원의 나라 ‘링’에 마귀가 창궐하자 하느님의 아들 게사르가 링으로 내려와 중생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사원에서는 부처나 미륵불이 아닌 다른 인물이 세상으로 내려와 중생을 구한다는 내용을 달가와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사원에서 게사르에 대한 벽화를 그려놓은 것은 그만큼 게사르가 티벳 중생의 메시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직도 티벳에서는 게사르 왕 이야기를 전하며 돌아다니는 ‘이야기꾼들’(설창꾼)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소설가이고 시인이 아닌가.

포미에 있는 도둥 사원.

 

도둥 사원은 800년 전에 지어진 절이지만,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60년대 후반)에 파괴되었다가 25년 전 다시 복원되었다고 한다. 티벳의 사원은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 중국이 티벳을 침략하고 식민지화시킨 1950년대 초반은 물론이고 극렬한 독립투쟁이 있었던 초창기 라사봉기(1959년) 때에도 수많은 사원이 파괴되었다. 마지막으로 60년대 후반 문화혁명기 때 중국은 또 한번 대대적인 티벳사원 파괴를 일삼았다. 중국은 사원에 다이나마이트를 설치해 폭파시키는 방법으로 사원을 철거시켰는데, 폭파 이전에 사원에 있던 문화재는 중국으로 대량 유출되었다.

 

  

도둥사원 마니차 순례길과 향촛불.

 

사원을 파괴하면서 티벳에서는 종교활동 또한 금지되었는데, 이 때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수많은 지도층 승려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다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1984년이며, 티벳 내 사원이 복원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 이후 부터이다.  사실 중국이 티벳의 모든 도시를 중국화시키고, 한족을 이주시켜 상권을 장악한 지금도 티벳인들의 생활이자 운명인 종교만큼은 중국화시킬 수가 없었다. 티벳 불교는 티벳의 정신이고, 티벳의 정신이 살아있는 한 티벳은 중국이 아닌 것이다.    

 

                                     -- 10편에서 계속. 글/사진: 이용한

 

 

티벳일기 10: 에메랄드빛 드락숨쵸 가는 길(포미-라싸)

 


photo by Lee yonghan

 

포미를 벗어난 길은 파룽 강을 따라 시원하게 내달린다. 고도는 점점 낮아져 해발 2천미터 밑으로 내려가고, 길은 평탄해서 이제까지 보아온 험한 풍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파룽 강의 강폭도 넓어져 드문드문 생겨난 모래섬마다 생명 질긴 나무들이 어울려 숲을 이루었다. 포미에서 35킬로미터쯤 강을 따라 달리면 거의 폐허가 다 된 오겐상가추링 사원을 만날 수 있다. 도로에서 출렁거리는 나무다리를 건너가 만나는 섬 안의 절. 스님들이 바카르 곰파라고 부르는 이 곳은 800년이나 된 유서깊은 사원이지만, 법당 앞 마당에는 이제 잡풀만 무성하고, 사람들도 거의 찾지 않는 적막한 곳이 되었다.

 

바카르에서 본 짜룽 설산에 걸린 무지개. by yonghan

 

때마침 내가 출입을 금지한 철문을 열고 바카르 법당 마당에 올라섰을 때, 안개에 덮인 호수 저편 짜룽 설산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어린시절 고향에서 본 뒤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무지개를 티벳에 와서 보게 된 것이다. 바카르의 스님인 아니 스님(35) 또한 어느 새 다가와 말없이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싸에 가 본 적이 있는가?” 라싸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나는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물론이다.”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3년 전, 차체(오체투지의 티벳말)로 라싸까지 갔다. 여기서 넉달 반이 걸렸다.” 차로 신나게 달리면, 하루에도 갈 거리를 4개월 넘게 그는 오체투지로 라싸까지 간 것이다.

 

 

바카르 앞에서 만난 아이. 학교에 다녀오는 중이었다. by yonghan

 

“왜 스님들은 힘들게 오체투지로 라싸에 가는가?” “차체로 라싸에 가는 것은, 평생 읽어야 할 경을 다 읽은 것과 같다.” “그렇게 가혹하게 온몸으로 경을 읽어야만 하는가?” “처음엔 나도 내가 왜 하는지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싸에 도착한 순간, 기뻐서 눈물이 났다. 그건 경을 읽고 깨우칠 때 흐르는 눈물과 같다.” 젊은 스님은 고개를 돌려 짜룽 설산에 걸린 무지개를 다시 바라보았다. 나중에 그는 티벳이 티벳말로 ‘뵈종’(뵈)이라는 것과 티벳인을 ‘뵈레’라 부른다는 것도 내게 알려주었다. “중국이 지배하는 지금도 학교에서 티벳말을 가르치는가?”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민족어(티벳어)을 우선적으로 배운다. 물론 중국어와 영어도 배운다. 티벳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학교에서 배우지만, 중국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빠이 외곽의 풍경.

 

사실 중국은 교육기관에서 티벳어를 가르치는 것을 빼면, 모든 것이 중국식 교육이다. 과거 포탈라궁을 지을 때도 청나라 황제가 허락을 해서 지었다고 가르친다. 과거 일제가 창경궁에 동물원을 두어 창경원이라 했던 것처럼 중국도 라싸의 노블링카 궁(여름 궁전) 안에 동물원을 두어 구경거리로 삼고 있다. 또한 현재 티벳의 모든 문화재와 유물은 ‘중국문화유물’로 지정돼 있다. 그러니까 중국은 언어와 종교(84년 이후)를 인정하는 대신, 나머지 모든 것을 중국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빠이에서 30km 거리에 있는 라마링 사원.

 

바카르 사원을 나와 탕미로 가는 길. 한동안 잘 나가던 길이 막혀버렸다. 길 양쪽 차선을 다 막고 도로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저녁 7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9시나 되어야 공사가 끝난다고 한다. 이쪽에서 가는 차와 저쪽에서 오는 차가 공사구간을 두고 길게 늘어서 있다. 안내판도 안내원도 없건만, 9시에 공사가 끝날지도 의문이건만, 여기 사람들은 다들 기다리는데 익숙해 있다. 2~3시간쯤 기다리는 건 식은죽먹기다. 예정대로 9시쯤 길이 열렸다. 그러나 얼마 못가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포장길이 구불구불 산으로 올라간다. 산 넘고 11시가 넘어 루낭마을에 도착했지만,  늦은 저녁을 먹고, 우리의 쉴줄 모르는 봉고차는 자정 넘어 다시 길을 떠난다. 

   

       

라마링 앞의 남근상과 법당 문장식.

 

루낭에서 링트리(린쯔)와 빠이까지는 비포장 산길로 50킬로미터 이상을 더 가야 하고, 해발 4515미터의 험준한 세르킴라 산을 넘어야 한다. 사실 이 구간은 풍경을 음미하며 낮에 넘어야 제격인 구간이다. 영문으로 된 안내서에는 “이 구간을 밤중에 넘는 것은 미친 짓이다.”라고 했지만, 이미 차는 세르킴라 산을 넘고 있었다. 산 중턱 왼편에는 전망대가 자리해 있는데, 이 곳에서 해발 7756미터 남체 바르와 설산과 해발 7151미터 갸라펠리 설산과 얄룽창포 대협곡의 일부를 조망하게 되어 있다. 얄룽창포 대협곡은 세계 제일의 협곡으로 사계절의 풍경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다. 두견화 핀 능선과 녹음이 짙은 숲, 누렇게 익은 칭커밭과 만년설이 뒤덮인 설산. 차마고도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조망을 자랑하는 이 곳을 한밤중에 넘자니, 공연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티벳의 대장금 얼음과자.

       

하지만 밀려오는 잠은 어쩔 수가 없어 산을 넘는 동안 나는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덜컹거리는 차량의 진동에 몸을 맡겼다. 급기야 세르킴라 산을 넘어온 차는 링트리를 지나쳐 빠이에 도착했다. 새벽 5시. 운전대를 잡은 운전수도 졸면서 온 일행도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링트리(해발 3000미터)와 빠이는 거리가 채 20킬로미터도 안되는데, 이 지역을 묶어 티벳에서는 린쯔지구라 부른다. 빠이는 링트리 인근에 중국이 건설한 인공 군사도시다. 중국에서는 인민해방군 건군절이 8월 1일인데, ‘빠이’(해발 2900미터)라는 지명은 거기에서 온 것이다.  새벽 5시, 숙소에 들자마자 곧바로 나는 곯아떨어졌다. 새벽에 도착한 탓에 빠이에서의 일정은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드락숨쵸 가는 길에 바라본 하늘과 구름. by yonghan

 

빠이를 떠난 차는 3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라마링 사원에 도착했다. 라마링 사원은 티벳 불교 최초의 종파인 닝마파 종정 두쫌 링포체가 기거하던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한 것은 사원 본당으로 가는 길 양쪽에 나무로 적나라하게 조각된 남근상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남근상은 드락숨쵸의 쪼종사원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티벳이 불교를 받아들이기 이전 무속적인 뵌교와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비롯된 민간신앙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 곳의 남근상은 우리의 남근상에 비해 훨씬 적나라하게 남근을 표현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8각 지붕을 인 법당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다 티벳의 다른 법당과는 달리 중국식 건물풍이 느껴져 그리 정감은 가지 않는다.

 

드락숨쵸 가는 길의 강굽이와 유채밭. by yonghan

 

라마링 사원을 나와 이제 드락숨쵸를 향해 달린다. 빠이에서 드락숨쵸(빠순쵸)까지는 130킬로미터가 넘지만, 험한 길이 아니어서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드락숨쵸 가는 길은 빠이에서 98킬로미터 떨어진 바헬에서 길이 갈라진다. 드락숨쵸를 드나드는 길목인지라 바헬에는 온통 식당과 상가로 꾸며져 있다. 바헬에서 드락숨쵸로 가는 길은 에메랄드 강물과 초록의 들판과 드문드문 펼쳐지는 설산 자락과 노란 꽃이 흐드러진 유채밭이 어울려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길가에 펼쳐진 유채밭은 드락숨쵸에 이르는 길까지 내내 펼쳐져 어디서 카메라를 꺼내야 할지 고민스럽게 한다.

 

에메랄드빛 드락숨쵸 호수. 한가운데 섬이 자리해 있고, 사원도 있다. by yonghan

 

매표소를 지나면 풍경은 더욱 환상적으로 변한다. 드락숨쵸에서 흘러온 에메랄드 물빛이 바위 계곡에 부딪쳐 연한 옥빛으로 부서져 내리는 모양은, 멀리 해발 6천미터급 설산 봉우리와 어울려 식당에 흔하게 걸린 달력사진을 그대로 연출해낸다. 그러나 티벳에서도 이런 풍경이 결코 흔한 것은 아니다. 드디어 드락숨쵸(해발 3540미터)에 이르면 드넓게 시야가 트이면서 빙하호 특유의 빛깔인 에메랄드빛 호수가 펼쳐진다. 호수 중간에는 쪼종 섬이 몽환적인 호도를 이루고, 출렁거리는 나무다리가 길게 호도를 연결하고 있다. 섬에는 쪼종 사원이 자리해 있는데, 워낙에 화려한 풍경에 깃들어 있다보니, 상대적으로 사원은 소박하고 간결하다.

 

만숭라 산에서 라싸 쪽으로 바라본 저녁 하늘. by yonghan

 

드락숨쵸로 빠졌던 길을 돌려 바헬에서 다시 318번 국도로 접어들면 공푸족이 많이 사는 공푸장따와 메드로 공카가 지척이다. 메드로 공카에서 라싸까지는 75킬로미터. 저녁이면 라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탄 차는 공푸장따를 지나 해발 4865미터의 만숭라 산을 넘지 못해 멈춰서고 말았다. 한번 손을 봤다는 배터리가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시동이 걸리지 않아서 차에 타고 있던 일행은 모두 밖으로 나와 차를 밀어보았으나, 엔진은 천식환자처럼 그르렁거릴 뿐이었다. 오르막길에서 1시간이나 차를 밀었더니, 모두들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급기야 운전수는 산 중턱에 차를 세워놓고, 다음 마을인 메드로 공카까지 갔다 올 태세였다. 그가 그 마을까지 갔다 온다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돌아온다 해도 그곳에 카센터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세삼 전화만 하면 자동차 보험회사에서 금세 달려오는 우리나라가 살기에는 꽤 괜찮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싸의 포탈라 궁. by yonghan

 

마지막으로 우리는 힘을 모아 차를 밀었다. 거짓말처럼 시동이 걸렸다. 저녁 10시 30분. 하늘에는 반짝이는 은하수가 라싸로 흘러가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키츄 강도 부드럽게 계곡을 에둘러 간다. 강 건너 멀리 졸음 속에 깜박이던 불빛들도 점점 또렷하게 다가온다. 그 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운전만 해오던 운전수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라싸! 라싸!”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그 말을 받아 “라싸! 라싸!” 소리쳤다. 드디어 라싸에 도착한 것이다. 자정을 10분 앞두고, 중띠엔을 출발해 차마고도를 달린 지 일주일만에 라싸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무슨 일주일간 오체투지라도 한 양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11편에서 계속. 글/사진: 이용한   

 

 

 

 

티벳일기 11: 라싸! 포탈라와 조캉사원

 

포탈라 앞의 기도하는 순례자. by yong-han

 

라싸의 아침은 일주일간의 노정으로 몸이 무거웠다. 쇳덩어리 차도 여러 번 고장을 일으켰는데, 몸이 멀쩡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단지 몸이 무거운 건 몸의 무게 때문이 아닌, 영혼을 잡아당기는 중력의 무게에 있는 것만 같다. 해발 3658미터. 지금 나에게 희박한 건 산소가 아닌, 영혼이었다. 영혼이 중력을 이기지 못해 나는 자꾸만 가라앉았다. 숙소를 나와 공복에 담배 한 대를 쭉 빨아들이자 머릿속이 금세 뿌얘졌다. 중띠엔으로부터 달려온 약 1800여 킬로미터의 길도 머릿속에서 흐릿해졌다. 흐릿한 채로 나는 길을 나선다. 하늘의 구름과 라싸의 실체도 아직은 불분명하다.

 

용왕담 공원 연못에 비친 포탈라 궁. by yong-han

 

이른 아침의 포탈라궁은 벌써 수많은 순례자들과 구경꾼들이 점령했다. “예약은 하셨나요? 그렇다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매표소 직원에 따르면, 최근 포탈라궁을 구경하려면 외국인일 경우 최소한 일주일 전에는 예매를 해야 표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더구나 입장객(현지인은 누구나 출입 가능하다)은 하루 1천명으로 제한을 두고 있다. 이는 포탈라의 건물과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최근 칭장철로 개통 후 포탈라의 하루 입장 정원수는 슬그머니 1600명으로 늘어났다. 아무래도 티벳인이 아닌, 중국 관리들에게는 문화재보호보다 돈벌이가 우선인 것이다.

 

흙과 돌과 나무로만 지은 포탈라는 300년 티벳의 시간이 깃들어 있다. by yong-han

 

설령 포탈라에 들어간다고 해도 관광객에게 공개하는 공간은 홍궁의 1, 3, 4층(2층에는 달라이 라마와 관련된 중요한 벽화가 있어 공개하지 않고 있다)으로 아주 제한적이고, 촬영은 전면 금지되어 있다. 홍궁 1층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국내에 최근 3.7톤의 황금영탑으로 소개된 달라이 라마 5세 영탑이다. 포탈라에 안치된 8개의 역대 달라이 라마 영탑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영탑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 영탑은 약 15미터 높이에 황금 외에도 진주와 비취 등 수만 개의 보석으로 장식돼 있는데, 티벳인들은 이것을 ‘세계 최고의 장식’으로 여기고 있다. 달라이 라마 5세(1617~1682)의 영탑을 이렇게 화려하게 치장한 데에는 그의 뛰어난 공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교일치의 통치이념을 수립하면서 티벳이라는 국가의 틀을 다지고, ‘하늘 위의 궁전’이라 할만한 지금의 거대한 포탈라궁을 지었다.

 

인체로 표현한 티벳 지도. 둥그렇게 심장을 표시한 부분이 조캉사원이다. by yong-han

 

보타산(뿌따라까산, 관세음보살이 사는 산)에 돌과 나무로만 지었다는 포탈라는 가장 높은 건물이 13층이고, 높이가 118미터, 1천여 개의 방을 갖췄으며, 크게 달라이 라마가 거처하던 백궁과 역대 달라이 라마의 영탑을 모신 홍궁으로 나눠진다. 현재 이 곳에는 수십만 점의 불상과 유물이 아직 남아 있지만, 중국의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대부분은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중국은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한 1959년 이후 오랜 동안 포탈라를 폐쇄해 왔고, 박물관으로 개방(1980년)한 이후에도 달라이 라마가 거처하던 백궁만큼은 철저한 문단속을 하고 있다. 티벳인들에게 달라이 라마가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아는 중국으로서는 그의 존재를 아예 ‘부재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이 현재 중국에서 임명한 판첸라마를 티벳의 지도자로 앉혀, 포탈라가 아닌 시가체의 타시룬포에 둔 것도 그 때문이다. 

 

 

바코르에서 본 조캉사원. by yong-han

 

포탈라 전경을 감상하기에는 건너편에 자리한 착포리 언덕이 제격이지만, 이른 아침엔 역광으로 포탈라를 바라보아야 하므로 사진을 찍기 위해선 오후에 오르는 것이 좋다. 포탈라 앞 광장을 끼고 자리한 용왕담 공원에서 바라보는 포탈라도 운치가 그만이다. 이 곳에서는 연못에 비친 포탈라궁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데,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슬픔에 잠긴 티벳과 포탈라가 보인다. 외국인의 눈에는 포탈라궁이야말로 티벳의 역사와 문화, 정치와 종교가 총결집된 ‘티벳의 모든 것’이라 여길지 모르겠지만, 티벳인들에게는 사실 포탈라보다 조캉사원이 ‘종교의 구심점’이자 ‘정신의 구심점’ 노릇을 하고 있다.

 

조캉사원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자들. by yong-han

 

흔히 ‘티벳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조캉사원은 티벳 불교의 총본산이자 최고의 성지로 티벳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조워 불상(석가모니)을 모신 곳이다. 조캉이란 이름도 ‘조워를 모신 라캉’이란 뜻에서 조캉이 되었다. 조캉은 당나라의 공주였던 문성공주와 인연이 깊은 절이다. 본래 조캉은 7세기 640여 년쯤 당시 토번 왕국(Thubet, 투베트는 몽골어로 ‘눈 위의 거주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의 송첸 감포 왕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당시 토번의 힘은 매우 강력해서 당나라와 네팔에서는 공주를 왕비로 바쳐야 했다. 이에 문성공주(당나라 현종의 딸)가 티벳으로 가지고 온 불상이 바로 석가모니 불상이었다. 이 불상은 처음에 라모체 사원에 모셨으나, 송첸 감포 왕이 죽은 뒤 불상의 보호를 위해 조캉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캉의 바코르를 따라 코라를 도는 순례자들. by yong-han

 

그러나 중국이 티벳을 점령하고 문화혁명 기간(1966년 무려 6천여 개의 티벳 사원이 파괴되었다)을 거치면서 조캉은 한때 폐허(중국은 티벳의 심장인 조캉을 한때 돼지우리로 사용하게 했다)가 되다시피했고, 1979년 이후 조금씩 재건돼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과거 ‘양(Ra)의 거주지’란 뜻의 라싸(Rasa)가 ‘신의 거주지’란 뜻의 라싸(Lhasa)가 된 것도 문성공주 시절 조캉의 건립과 무관하지 않다. 티벳에서 불교가 국교로 자리잡고 수많은 사원이 건설된 것이 바로 그 시절이다. 조캉은 이른 아침부터 붐빈다. 포탈라궁이 순례자만큼이나 많은 관광객들로 붐빈다면 순전히 이 곳은 티벳 각지에서 온 경건한 순례자들로 붐빈다. 순례자들은 코라(마니차를 들고 시계 방향으로 사원을 한 바퀴 도는 의식)를 돌거나 조캉의 문앞에서 염려스러울 정도로 오체투지를 한다. 이들의 오체투지는 거의 필사적이다. 필사적으로 붓다에게 마음을 바친다. 열린 문틈으로는 끊임없이 버터기름 냄새와 신성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조캉사원 마당에 있는 버터 촛불(위)과 대법전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아래). by yong-han  

 

티벳의 심장, 조캉사원


조캉사원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뤄랑자두 스님(25세)을 만났다. 쓰촨에서 오체투지로 조캉까지 왔다는 스님은 그동안의 오체투지로도 부족했는지 계속해서 온몸을 바닥에 부비며 ‘옴마니반메훔’을 중얼거렸다.

 

 뤄랑자두 스님.

   

- 언제 이 곳에 왔는가?

- 6개월 전인 올 2월에 도착했다.

- 얼마나 걸렸나?

- 2년 걸렸다. 쓰촨에서 빠이를 거쳐 링트리를 지나 라싸까지 오는데 총 3000km쯤 오체투지로 왔다.

- 왜 그런 고행을 하는가?

- 꼭 한번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체투지로 라싸에 오는 것은 일생의 불경을 다 읽는 것과 같으니까. 오체투지로 라싸에 오는 것은 한 단계 높은 승려가 된다는 의미다.

- 그럼 라싸는 처음인가?

- 아니다. 네 번째다. 하지만 오체투지로는 처음이다.

- 차 타고 왔을 때와 오체투지로 왔을 때의 심정은 어떻게 다른가?

- 조캉사원에 도착해 조워 석가모니불을 봤을 때, 가슴이 먹먹하고 미어졌다.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 지금 마시는 차는 누가 준 것인가?

- 내가 입고 있는 이 옷도, 그리고 이 차도 순례자들이 가져다 준 것이다.  이렇게 오체투지로 온 스님들에게 조캉사원은 숙소를 제공한다.

- 그럼 이제 돌아가는가? 아니면 계속 여기 머무는가?

-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았다. 오체투지로 시가체까지 갔다가 카일라스까지 가볼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조캉에 머물며 쉬는 중이다.

 

노스님의 늙은 손이 들고 있는 얼룩이 진 불경. by yong-han

 

그에게는 조캉사원 앞에서 매일같이 오체투지를 하는 것이 쉬는 것이라고 한다. 잠시 몸을 추스르고 나면 다시 시가체로 떠날 것이란다.

 

조캉사원 1층 법전으로 가는 길(위). 조캉사원의 황금지붕(아래). by yong-han  

 

조캉의 순례자들은 문이 열리는 아침 8시 이전부터 정문 앞에 줄을 서는데, 문이 열리면 마치 100미터 달리기라도 하듯 사원으로 뛰어들어간다. 남보다 먼저 조워 석가모니불을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외국의 관광객들이 조캉에 들어가려면 무려 70원이나 하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70원을 내고도 아깝지 않은 곳이 조캉사원이다. 흔히 포탈라와 조캉을 다 둘러본 관광객들은 포탈라의 입장료는 아까워하지만, 조캉의 입장료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만큼 티벳의 진면목을 조캉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캉에 들어가면 우선 내부 광장을 지나 대법당을 만나게 된다. 1층 대법당은 조워 석가모니를 모신 조캉의 핵심인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미륵불(Jampa), 왼쪽에 구루 링포체(Guru Rinpoche, 8세기 티벳에 불교를 전파한 인도 현자, 제2의 부처로 여김)를 모시고 있다. 또한 이들 불상을 모신 1층 대법당을 중심으로 18개의 법당이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다. 

 

조캉사원 바코르 골목에서 만난 탕카(탱화) 그리는 소년(위). 티벳에서는 아이들에게 엉덩이가 뚫린 바지를 입힌다(아래). by yong-han

 

 

2층에도 법전이 여러 개 있으며, 2층을 거쳐 3층으로 올라가면, 조캉사원의 화려한 황금지붕탑을 만나게 된다. 또한 이 곳은 사원의 옥상 전망대 노릇을 하고 있어 조캉 앞 바코르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정문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자들의 모습도 위에서 곧바로 내려다보일 뿐만 아니라 멀리 포탈라궁은 물론 사방으로 펼쳐진 라싸 시내의 풍경까지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만약 오후에 조캉을 방문했다면 순례자 입장시간인 오후 6시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을 따라 조워 석가모니불을 만나고 낭코르(사원 내부를 한 바퀴 도는 의식)까지 함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무너지는 라싸의 구시가 골목. 라싸에서도 티벳 전통구역은 4%밖에 남지 않았다. by yong-han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티벳다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 라싸를 찾아온다. 그러나 라싸에 남은 극히 일부분의 전통 티벳구역(라싸 전체의 4%)과 조캉사원, 세라사원, 드레풍사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빠르게 중국다운 풍경으로 변모하고 있다. 칭장철로가 개통하기 이전의 모습도 그러한대, ‘트로이의 목마’로 불리는 중국의 열차가 매일같이 수많은 중국인과 외국인을 실어나르는 지금의 라싸가 어떻게 변모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사실 라싸에 수많은 관광객이 들끓는다 해도 티벳인들의 삶은 별로 나아질 것이 없다. 어차피 라싸 관광으로 얻는 이득의 90% 이상은 중국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모든 관공서와 상권과 심지어 택시까지도 한족이 거의 다 차지하고 있다. 고작해야 티벳인들은 조캉사원 앞에서 구걸을 하거나 좌판을 벌여 물건을 팔거나 인력거로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것으로 근근히 삶을 유지해가고 있다. 이제는 그들에게 또다시 옛날과 같은 라싸봉기를 일으킬 여력조차 없어 보인다. 이미 라싸는 티벳인들보다 한족이 더 많이 사는 한족 도시가 다 되었다.

 

                                              -- 12편에서 계속. 글/사진: 이용한

 

 

 

 

 

영혼의 라싸, 세라사원과 드레풍
 

 
 

티벳일기12: 영혼의 라싸, 세라사원과 드레풍

 


세라 응악파의 법당 입구. by yong-han

 

티벳에 간 이상 사원을 둘러보지 않고는 티벳을 느낄 수가 없다. 티벳에서 사원은 종교이기 이전에 모든 티벳인의 생활의 일부이다. 티벳의 심장인 조캉사원 말고도 라싸와 시가체 주변에는 티벳인들에게 특별한 성지로 여겨지는 사원들이 있다. 세라 사원과 드레풍 사원, 간덴 사원, 쌈예 사원, 타시룬포, 팔코르 사원 등이 그것이다. 라싸 북단에 위치한 세라 사원은 티벳 최대의 불교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5개의 교육기관에 7000여 명의 승려가 거주했던 거대한 사원은 현재 3개의 대학에 300여 명 정도의 승려만이 남았는데, 중국의 문화혁명기(1959년)를 거치면서 승려들의 숙소가 거의 파괴된 데다 달라이 라마가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할 당시 상당수의 승려가 길을 따라나섰기 때문이다.

 

세라사원 대법당(위)과 순례자들(아래). by yong-han

 

세라 사원은 1419년 총카파(1357~1419, 티벳불교의 중심세력인 겔룩파의 창시자) 제자인 사캬 예쉬가 세운 사원이다. 사원 안에는 대법당(촉첸)을 비롯해 세라 메, 세라 응악파, 세라 제 대학과 13개의 캉첸(승려 숙소)이 들어서 있다. 시계방향으로 사원을 돌다 보면 세 번째로 만나는 대학이 세라 제인데, 이 곳은 티벳에서 가장 유명한 교리문답 토론장이기도 하다. ‘최라’(Chora)로 불리는 교리문답(또는 선문답) 토론은 보통 오후 3시 30분부터 약 1시간 정도(일요일은 열리지 않는다) 열리며, 세라 제 앞마당 정원이 토론장 노릇을 한다. 승려들의 교리문답은 보통 1:1로 한 승려가 질문을 하면 곧바로 상대 승려가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때로 논쟁이 과격하고 급박해 이들이 토론하는 모양은 꼭 윽박지르고, 삿대질하고, 싸우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세라사원에서 오체투지(위)와 마니차를 돌리는 순례자(아래). by yong-han

 

이 때 승려들이 하는 특이한 행동이 하나 있다. 한손을 밑에 받치고 다른 한손을 높이 들어 힘껏 내리치는 손뼉치기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이는 이것이 윗손이 천당을 상징하고, 아랫손이 지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진리와 교리의 충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재미있는 행동으로 인해 세라의 교리문답 시간은 오늘날 외국인에게 인기 있는 관광상품이 되었을 정도다. 이런 특이한 토론방식은 티벳불교 특유의 학습방법으로, 항상 상대방보다 더 우월한 교리와 철학을 지니기 위한 수행방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런 토론에서는 지적 순발력과 함께 상대방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논리도 필요했지만, 우습게도 상대방을 압도하는 목소리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었다.

 

세라사원 대법당 지붕의 장식들. by yong-han

 

최근 이 교리문답 시간이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자 세라사원과 드레풍사원 등에서는 최라 사진을 찍거나 구경하는 것에 따로 돈을 받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면 최소한 70원을 내야 하는 것이다. 세라사원 코라 순례길은 한 시간 남짓 걸린다. 탕카를 거는 벽과 암벽에 조각된 불상들을 이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코라를 돌다 보면, 조장터로 오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제 조장(鳥葬)은 철저하게 외국인의 관람과 취재를 금지하고 있다. 만일 조장을 촬영하다 중국 공안에게 걸리면 곧바로 티벳에서 추방당한다.

 

벽화에 그려진 법륜과 태극무늬. by yong-han

 

세계에서 가장 큰 사원, 드레풍

 

드레풍 사원에서 쵸르텐(불탑) 순례중인 노스님. by yong-han

 

세라 사원이 라싸 시내에 인접해 있는 반면, 드레풍 사원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터를 잡고 있다. 중국이 티벳을 점령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드레풍 사원은 1만여 명의 승려를 거느린 전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원이었다. 지금도 그 규모는 전세계 최고를 자랑하지만, 거주하는 승려의 수는 500여 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드레풍 사원은 1416년 총카파의 제자 잠양 초제(Jamyang Choje)가 설립했다고 전해온다. 포탈라궁이 완성되기 전까지 드레풍 사원은 달라이 라마(2, 3, 4대)의 거처이자 실질적인 정치와 종교의 본당 노릇을 해온 중요한 곳이다. 사실 지금도 드레풍 사원의 규모는 사원이라기보다 하나의 소도시에 가깝다.

 

드레풍 사원과 멀리 보이는 라싸 외곽 풍경(위), 물통을 지고 간덴궁으로 오르는 비구니(아래). by yong-han

 

아침 일찍 사원에 들어간다 해도 저녁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구경이 끝날 정도이다. 이 곳의 길과 골목은 복잡한 미로처럼 얼켜 있어,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다. 교육기관 역할도 함께 수행했던 드레풍에는 간덴궁(달라이 라마가 거처하던 과거의 티벳행정부)과 대법당 외에도 응악파(탄트라를 연구하는 대학), 로세링, 고망, 데양 등 4개의 승가대학이 자리해 있다. 사원 내 길을 따라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 첫 번째로 만나는 큰 건물이 간덴궁이고, 간덴궁 위쪽에 응악파 대학이 자리해 있으며, 응악파 오른쪽에 대법당이 자리해 있다. 나머지 3개 대학은 대법당 오른쪽 아래 몰려 있다.

 

간덴궁 입구(위), 로세링 대학의 최라(교리문답 토론의 장, 아래). by yong-han 

 

드레풍에서도 오후 3시가 되면 로세링 대학 최라에서 교리문답 토론의 장이 열린다. 세라사원의 최라보다 붐비지는 않지만, 토론의 열정만은 그에 못지 않다. 물론 이 곳의 최라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하고, 촬영을 하려면 70원, 비디오 촬영은 120원을 내야 한다. 만일 몰래 찍다가 걸릴 경우 물벼락을 맞고 쫒겨난다. 무엇보다 드레풍 사원은 라싸 시내의 사원들과 달리 붐비지 않는다는 것이 매력이다. 대법당 앞마당은 때때로 관광객이 아닌 염소와 양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미로형 골목에서도 길 잃은 양들을 만나는 것이 대수롭지 않다.

 

드레풍 사원의 대법당. by yong-han

대법당 앞의 높게 치솟은 룽다(와)와 대법당을 지나 사원을 내려가는 양떼들(아래). by yong-han

 

드레풍 사원의 코라는 세라 사원보다 훨씬 경사가 심하고, 그만큼 조망도 훌륭한 편이다. 암벽에 조각된 불상과 탕카를 걸어놓는 벽, 외떨어진 암자들도 코라 순례길에서 만날 수 있다. 라싸에서 드레풍까지는 미니버스가 운행(시내에서 택시로 20분, 택시요금 30원)하고 있지만, 사원까지 버스가 올라가지 않아 걸어서 30여 분이나 올라가야 한다. 당연히 내려오는 길도 대중교통이 없어 천상 걸어서 내려와야 한다. 하지만 교통의 불편함은 드레풍 사원을 라사 시내의 사원들과 다른 적막한 분위기로 만들었고, 오히려 이런 점이 드레풍 사원의 매력이 되고 있다.

 

쵸르텐의 벽화 불상. by yong-han 

코라 순례길에서 만나는 암벽화(위)와 버터 그을음이 앉은 사원의 벽화(아래). by yong-han  

 

드레풍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나는 독일에서 왔다는 니콜라스를 만났다. 그는 1개월째 티벳에 머물며 여행하는 중이라고 한다. 보름에 걸쳐 카일라스를 다녀왔고, 구게왕국도 둘러보았다고 했다. 그는 보름 정도 더 티벳에 머물다 동경을 거쳐 서울에 갈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오래 전 한국에 온 적이 있는데, 부석사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 때 먹었던 비빔밥도 잊을 수 없어 어제는 라싸의 한국식당인 아리랑에 가서 ‘돌솥비빔밥’도 먹었단다. 그와 나는 드레풍에서 함께 큰길까지 내려와 택시를 탔다. 그는 내가 티벳박물관으로 간다고 하자 그곳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바낙숄 호텔로 돌아갔다. 어쩌면 그는 지금쯤 한국을 여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13편에서 계속. 글/사진: 이용한

 

드레풍 사원의 미로형 골목. by yong-han 

쵸르텐을 도는 노스님(위)과 법당 지붕에 앉은 부리가 붉은 가마귀(아래). by yong-han 

 
 
 
라싸 뒷골목 기행
 

 
 

티벳일기 13: 라싸 뒷골목 기행

 


조캉사원 뒷골목에서 만난 한 아이가 실뜨기를 하고 있다. by yong-han

 

사실 라싸는 하루에 다 둘러보기가 불가능한 곳이다. 규모가 큰 사원만도 조캉을 비롯해 세라사원과 드레풍사원 등이 있고, 달라이 라마의 여름 궁전인 노블링카와 티벳박물관, 회족 모스크, 수공예단지를 비롯해 조캉 인근의 시장골목과 구시가 거리처럼 헐겁게 둘러보아도 최소 사흘 이상은 걸린다. 티벳의 길안내를 맡고 있는 현지인 가이드에 따르면 제대로 라싸를 둘러보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 아직 나는 라싸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았을 뿐이다. 티벳의 심장 조캉사원은 라싸에 남은 티벳 전통구역의 중심이기도 한데, 이 곳을 중심으로 옛빛 그득한 오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라싸 구시가의 과일장수. by yong-han

 

티벳은 위험하지 않나요? 라싸에 소매치기는 없나요? 내가 티벳에 다녀온 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질문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티벳은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가운데 한 곳이다. 거의 대부분이 티벳 불교 신자인 티벳인들은 처음부터 강도나 소매치기를 할 생각이 없다. 따라서 어디를 가든 범죄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다만 유명한 사원 주변에는 구걸하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많다. 라싸가 한족도시화되면서 유목하던 들판도 잃고, 경제권도 잃은 극빈자들 중 상당수는 구걸로 생활을 유지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1원씩 주다보면 주변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어 금세 100원이 나가고 1000원이 나갈 수 있으니, 정 이들을 도와주고 싶을 땐 아무도 모르게 슬쩍 찔러주는 수밖에 없다.

 

티벳박물관. by yong-han

 

한번은 내가 조캉사원을 나와 시장 골목을 싸돌아다니다 좌판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1원을 주었다가 우르르 몰려든 아이들에게 모두 120원을 강탈(?)당한 경험이 있다. 어쨌든 구걸하는 사람은 많아도 치안은 잘돼 있는 곳이 티벳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의 공안들이 혹시라도 제2의 라싸봉기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24시간 티벳을 감시하고 있으니 티벳의 안전은 역설적으로 중국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은 이런 안전이 티벳인들에겐 엄청난 불안요소에 다름아니다. 심지어 중국의 공안들은 외국인을 집안으로 끌어들여서는 안된다고 티벳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혹시라도 외국인들이 그들에게 달라이 라마의 근황이라도 알려줄까, 프리티벳을 주장하며 티벳인들을 부추기지 않을까, 하는 의심 때문이다. 당연히 티벳에서는 외국인일지라도 달라이 라마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사진을 지니고 다니다 공안에게 걸리면, 추방을 당하기 십상이다. 

 

티벳박물관에 전시된 화살통(위)과 수공예단지에 전시된 육현금 잠예(아래). by yong-han.

 

어느 정도 라싸의 사원을 둘러보았다면, 이제 많은 여행객들이 놓치는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놓치면 후회할 곳들을 둘러볼 차례다. 달라이 라마의 여름 궁전인 노블링카 앞에 자리한 티벳박물관은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외면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이 곳에는 티벳의 역사와 문화, 종교와 복식, 유목문화와 생활도구 등을 전시하고 있는데, 티벳의 진면목을 알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특히 우리가 잘 몰랐던 티벳의 의학기구와 전통악기, 유목과 관련된 각종 도구와 전통 의복 전시는 꽤 볼만하다. 이 곳에서 내 관심을 끈 것 중 하나는 잠예라는 악기다. 잠예는 기타처럼 생긴 육현금 악기로, 흔히 조캉사원 앞에서도 잠예를 연주하는 걸인과 승려들을 더러 볼 수가 있다.

 

조캉 바코르 골목에 탕카화가들과 탕카가게들이 있다. by yong-han

 

때마침 저녁 무렵에 들른 조캉사원 바코르에서 나는 잠예를 연주하는 노스님을 만났는데, 노스님은 내게 1원을 요구했다. 1원에 얼마든지 잠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했다. 바코르에서는 해금을 연주하는 걸인들도 많은데, 이들의 연주는 모두 수준급이다. 또한 바코르 골목에서는 전통 탕카를 그리는 ‘탕카 화가’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어떤 탕카 화가는 10대 초반의 소년을 수제자로 두었는데, 소년의 솜씨가 심상치 않았다. 시장을 둘러보다 보면 차마고도를 따라 운반돼 온 윈난산 차 도매상도 흔하게 만난다. 지금은 중띠엔으로부터 그래도 차가 다닐 수 있는 차도를 따라 운반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말과 나귀만 다니던 차마고도를 따라 라싸까지 운반되던 귀한 차다.

 

바코르 골목의 차도매상(위)과 야크버터를 파는 가게(아래). by yong-han.

 

시장을 벗어난 골목에서는 고무줄 놀이를 즐기거나 실뜨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어린시절에 했던 놀이와 놀랄 정도로 똑같다. 내가 실뜨기 놀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다 똑같이 따라하자 아이들은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리고 내가 녀석들의 실뜨기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실뜨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통에 한동안 나는 겹겹이 아이들에게 둘러쌓이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아줌마와 청년도 ‘나도 할 수 있다’며 아이들 틈에 끼어들었다. 이래저래 골목은 실뜨기 열풍으로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뒷골목에서 만난 한 아이는 내가 한국에서 온 줄 어떻게 알고, 태극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자랑스럽게 보여주기도 했다.

 

라싸 뒷골목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다. by yong-han.

 

티벳에서는 우리와 흡사한 놀이나 문화를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실뜨기나 고무줄놀이뿐만 아니라 나무에 그네를 걸어 타는 것도 우리와 똑같은 모양이다. 고갯마루에 돌무덤처럼 쌓은 쵸르텐은 우리의 돌서낭과 흡사하고, 음식을 먹을 때 조금씩 떼어서 신에게 바치는 것도 우리네 ‘고시레’ 풍습과 다르지 않다. 티벳에는 또한 우리네 막걸리와 같은 ‘창’이라는 술도 있다. 사실 티벳에 사는 약 600만 명의 티벳인들은 우리와 혈통이 비슷한 몽골 계통의 인종이다. 그러나 중국의 점령 이후 티벳인들은 그저 중국 내 50개 이상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국에서는 티벳족을 장족이라 부르며, 티벳을 그들의 자치구 중 하나인 ‘서장 자치구’로 부르고 있다.

 

회족 거주지에서 만난 아이(위)와 이슬람 모스크(아래). by yong-han.

 

라싸에는 생각보다 많은 회족(이슬람교도)들도 산다. 티벳 사원보다 규모는 작지만 꽤나 큰 모스크도 만날 수 있고, 온통 머리에 흰 모자를 쓴 회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회족 거주지도 구시가 외곽에 자리잡고 있다. 라싸에서 머리에 흰 모자를 쓴 사람을 보았다면, 보나마나 회족이 분명하다. 그러나 티벳의 구시가에 이런 회족 거주지와 모스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국의 여행객들은 대부분 모르고 있다. 이슬람 모스크에서 100여 미터 위로 올라간 곳에는 티벳의 전통 수공예단지가 자리해 있다. 이 곳에서는 금동불상조각에서부터 옷감짜기, 장신구, 각종 조각품을 만들고 전시하고 있지만, 사진 촬영은 기본적으로 금지돼 있다.

 

조선족의 동행자 찾기 쪽지(위)와 여행자 숙소로 유명한 야크호텔(아래). by yong-han. 

 

라싸에는 바낙숄 호텔과 키에리 호텔, 스노우랜드 호텔, 야크 호텔과 같은 여행자 숙소가 들어서 있으며, 라싸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는 야크 호텔이 가장 유명하다. 방값은 도미토리 30원에서 트윈룸 380원까지 다양하다. 이 곳의 야외 게시판은 여행 동행자를 구하는 메모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내가 야크 호텔에 머물 때 한 조선족이 수미산 여행 동행자를 구하는 한글 메모를 보고 반가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호텔에는 인터넷 카페가 있어 외국인들은 이 곳에서 모든 소식을 주고받는다. ‘야크’는 티벳 발음으로 ‘야’라고 하는데, 인력거꾼들에게도 야 호텔 또는 야빈관이라 해야 알아듣는다. 여기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한국식당인 아리랑 식당이 있다.

 

윤회와 영원무궁을 상징하는 '영원의 무늬'. 문막이천과 커튼에 두루 쓰인다. by yong-han

 

중국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내세웠던 논리처럼 중국의 티벳 지배가 티벳의 발전과 근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래서 티벳이 더 행복해졌는가, 라고 묻는다면 티벳인들은 모두들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들이 살아있는 부처로 추앙하는 달라이 라마는 티벳에 있지 않고, 광활했던 영토는 상당 부분이 중국 땅에 편입돼 자치구 국경이 그어졌으며, 전통적인 티베탄 마을까지 하나 둘씩 한족의 거주지로 변하고 있는 게 티벳의 현실이다. 중국은 ‘백년지대계’(이런 표지판이 교육기관 앞에 세워져 있다)를 내세우며, 티벳의 아이들을 문맹에서 벗어나게 하고, 무상으로 의무교육을 시킨다고 자랑하지만, 그들은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식 교육을 통해 중국인민화를 꾀하고 있을 따름이다.

 

라싸 구시가에서 바라본 일몰 풍경. by yong-han.

 

중국은 점령 이후 문화혁명기를 거치며 티벳인들이 그렇게 신성시하던 사원들을 무참히 폭파했고, 그 많은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켰으며, 일체 종교활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종교가 곧 생활이었던 티벳인들은 20여 년간의 종교박해 속에서도 신성을 버리지 않고 그들의 종교를 지켜냈다. 사실 티벳인들의 삶은 우리와 비교해보면 거의 난민 수준으로 사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물질적 풍요는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애당초 그들은 돈과 명예와 영광에 의한 ‘잘 사는 것’보다 ‘제대로 사는 것’, 즉 다음 환생을 살기 위해 죄 짓지 않고 이번 생을 건너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 14편에서 계속. 글/사진: 이용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호수, 티벳의 남쵸
 
 
 

티벳일기 14: 세계에서 가장 높고 신성한 하늘호수, 남쵸

 

한 노인이 마니차를 돌리며 남쵸 호수를 따라 코라를 돌고 있다. 

 

라싸에서 며칠을 보내고 이제 칭장공로를 따라 남쵸로 간다. 중국의 칭하이와 라싸를 잇는 칭장공로는 중국이 티벳을 지배하기 위해 최초로 건설한 포장도로이다. 도로의 고도는 해발  5000미터를 넘나들고, 겨울이면 눈으로 뒤덮여 종종 포장도로의 기능을 상실하지만, 중국은 이 길을 통해 지금껏 군인들과 이주민을 실어왔고, 티벳의 자원과  물자를 실어갔다. 이제 이 기능은 올해 새로 개통한 칭장철로가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칭장철로는 칭장공로를 따라 나란히 뻗어서 하루 수천명의 관광객과 이주민을 라싸로 실어나른다. 중국은 이 철로의 개통이 낙후된 티벳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티벳의 발전이란 누구를 위한 발전이란 말인가. 티벳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그것의 혜택은 결국 티벳인이 아닌 한족에게 돌아갈 것이란 걸 코흘리개도 다 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남쵸 주변의 산자락(위)과 라겐라 고개의 휘날리는 타르쵸(아래).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탄 차의 운전기사는 한족이었고, 가는 내내 나는 일행과 함께 중국을 씹어대고 있었다. 내 뒷담화에 골치가 아팠던 것일까. 남쵸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 담슝마을에 이르러 운전기사는 두통을 호소하며 식은 땀까지 흘렸다. 결국 참을 수가 없었는지, 운전수는 문을 열고 나가 약국을 찾아다녔다. 잠시 후 그는 가루약과 호랑이 기름을 사갖고 돌아왔다. 고산증이었다. 그의 증세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어서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프다고 호소했고, 어지럼증에 이따금 구역질까지 해댔다. 가루약을 먹고 나자 그는 일행 중 한 명에게 민간치료를 요구해왔다. 고산증을 극복하는 그의 민간요법은 이런 것이다. 우선 목 뒤에서 어깨와 등으로 내려가는 부위를 동전으로 피가 맺힐 때까지 긁어내린 뒤, 그 위에 호랑이 기름을 바르는 것이다. 남쵸에 가려면 어쩔 수 없이 그가 제시한 민간요법을 해야만 했다.

 

라겐라 고개의 구걸하는 아이들(위)과 남쵸마을에서 관광객의 선글라스를 빌려 쓴 아이(아래). 

 

일행 중 한 명이 그가 말한 대로 목 뒤를 피멍이 들 때까지 긁은 다음, 호랑이 기름을 발라 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거짓말처럼 그는  좀 나아졌다고 하며 다시 시동을 걸었다. 담슝에서 남쵸까지는 약 40여 킬로미터. 남쵸는 해발 4718미터에 자리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이자 티벳에서 가장 넓은 호수일 뿐만 아니라 티벳에서 가장 신성한 호수로 알려져 있다. 담슝에서 남쵸를 넘어가자면 해발 5190미터의 라겐라 언덕을 넘어가야 하는데, 고산에 적응되지 않은 채로 넘을 경우 십중팔구 고산증에 걸리게 된다. 때문에 라싸에 왔던 관광객들이 남쵸에 오를 때에는 최소한 5일~7일 정도 라싸에 머물며 적응기간을 거친 뒤, 남쵸를 오르는 게 좋다. 물론 그런 적응기간을 거쳤더라도 고산증이 오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 일행과 함께 한 운전수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는 줄곧 중띠엔에서부터 우리와 동행하며 라싸에서도 며칠 머물렀으나, 이렇게 고산증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라겐라 고개에서 바라본 남쵸 호수(위)와 남쵸로 뻗어 있는 도로(아래). 

 

운전수의 증세가 호전된 것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는 겨우겨우 언덕을 올라 라겐라 고갯마루에 차를 세웠다. 라겐라 고갯마루는 멀리 남쵸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고원의 평야와 산자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남쵸로 넘어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 가는 곳이다. 남쵸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라겐라 고갯마루는 언제나 칼바람이 분다. 여름인데도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주변의 산자락에는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고, 하나같이 밋밋하고 부드럽다. 아예 이 곳은 나무가 살 수 없는 생육환경이다. 때문에 산자락이며 고원의 들판은 온통 잔디를 깔아놓은 듯 푸른 초원이고, 높은 산봉우리에는 잔설이 희끗희끗 덮여 있다. 물론 해발 5100미터가 넘는 산봉우리의 눈은 대부분 만년설이다. 멀리 만년설이 보이고, 희미하게 호수가 보인다.

 

남쵸 가는 길에 만난 유목민 가족(위)과 초원의 양떼들(아래). 

 

이렇게 높은 남쵸와 라겐라 주변에는 꽤 많은 유목민들이 흩어져 산다. 이들은 주로 야크와 양떼를 데리고 초원을 떠돌아다니는데, 남쵸 주변의 풍부하고 드넓은 풀밭이 이들을 먹여 살리는 셈이다. 산 밑의 마을에서는 흙으로 지은 집이 대부분이지만, 이 곳은 유목민의 거처답게 임시 가옥인 천막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다. 혹독한 한겨울이면 짐을 꾸려 가축을 데리고 좀더 따뜻한 곳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라겐라 고개에는 동냥을 나온 유목민의 아들 딸들도 10여 명을 훌쩍 넘는다. 이 아이들은 양떼를 몰지도, 야크 똥을 찾아헤매지도 않는다. 대신에 어린 양을 가슴에 안고 라겐라 고갯마루에 올라 구걸을 한다. 그런데 이 녀석들의 구걸이 제법 당당하다. 관광객들이라면 누구나 이 곳에 내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녀석들인지라 아이들은 관광객들에게 모델을 자처하고, 그 대가로 손을 내민다. 사진 한 장에 1원.

 

다양한 푸른색을 띠는 남쵸 호수(위)와 남쵸마을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또다른 호수(아래). 

 

하지만 나는 사진을 찍힌 아이들에게 1원 한푼 주지 않았다.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에 녀석들이 억지로 고개를 들이밀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돈을 주고 사진을 찍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는 차에 비상식량으로 싣고 온 과자와 초콜릿을 나눠주었는데, 주고 보니 20원 어치가 넘었다. 차라리 1원씩 주고 10원으로 해결하는 게 나았을까, 도 싶지만 돈을 주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라고 결론내렸다. 돈을 주거나 먹을 것을 주는 게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그나마 먹을 것을 사서 주는 것은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가, 라고 나는 좋게 해석했다. 그러나 마음은 좋지 못했다. 무엇이 녀석들을 이 고갯마루로 내몰았는지, 이렇게도 티벳 유목민의 현실이 궁핍한 것인지. 어쨌든 이 아이들이 구걸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온전한 유목민의 아들 딸로 살아가기를 나는 진정으로 빌었다. 

 

남쵸마을에 자리한 룽다(위)와 호수를 보며 자리한 쵸르텐(아래).  

 

라겐라 고개를 넘은 길은 아득하게 호수 쪽으로 뻗어 있다. 야크떼는 느릿느릿 초원을 이동하며 풀을 뜯는다. 그리고 드디어 눈앞에 하늘과 맞닿은 남쵸 호수가 펼쳐졌다.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하늘호수’라 불리는 남쵸. 호수의 빛깔도 하늘을 닮아 있다. 티벳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호수답게 남쵸에는 꽤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온다. 덩달아 하늘호수를 보러 오는 관광객들도 해마다 늘어나 이제는 제법 남쵸가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남쵸는 워낙에 넓은 호수인지라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만도 20여 일이 걸린다고 한다. 그럼에도 남쵸에는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코라 순례객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호수를 한 바퀴 오체투지로 도는 순례객까지 있다.

 

남쵸마을의 마부들(위)과 남쵸 순례를 온 스님(아래). 

 

남쵸 호수 앞에 자리한 남쵸마을은 천막촌이다. 이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음식을 팔고 잠자리를 내주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에게 말을 태워주고 돈을 받는 것도 이들의 주 수입원이다. 호수에 도착하면 남쵸마을의 마부들이 몰려들어 호객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못본채 천막을 골라 들어가서는 뚝바(티벳국수)로 요기를 하고, 창아모차(야크 우유에 홍차를 섞은 차, 야크 버터로만 만든 차는 뵈차라 하며, 야크 버터를 저어 녹차를 섞은 것은 수유차라 한다)를 마셨다. 마부들은 차를 마시는 내내 내 앞을 왔다갔다 하며 말을 탈 것을 부탁했다. 그러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여 사진을 몇 컷 찍었는데, 알고 보니 내 앞에서 서성거리던 마부의 아내였다. 그 아내는 사진을 찍었으니 말을 타야 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말을 타고 호숫가로 조금 가다가 내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5원 어치밖에는 안탔으니, 더 타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내가  그냥 탄 걸로 할 테니, 다른 사람에게나 가 보라고 손짓을 하자 그는 5원 어치쯤 빚진 듯한 표정으로 기수를 돌렸다.

          

티벳 국수 뚝바(왼쪽)와 연료로 쓰기 위해 모아놓은 야크똥(오른쪽). 

 

호수로 내려가 물속에 손을 담그자 얼음물에라도 담근 듯 손이 시리다. 해발 4718미터에 길이 70킬로미터, 폭 30킬로미터, 수심 약 35미터. 이것이 남쵸의 실체다. 그러나 남쵸의 본질은 이 곳이 지상의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하는, 하늘과 맞닿은 ‘하늘호수’라는 것이고, 티벳인의 관념 속에 가장 신성한 호수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그토록 남쵸를 신성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남쵸에 가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남쵸에 이르러 호수와 하늘, 만년설 연봉을 보고 있노라면, 숨이 턱 막히고 입은 할말을 잃고 연방 감탄사만 연발한다. 호수의 빛깔은 실로 신비롭다. 푸른색이 낼 수 있는 모든 다양함과 아름다움을 호수는 모두 품고 있다.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보석!

 

            

해발 4718미터 남쵸 호수 주변에서 만난 고산식물들. 여름을 맞아 활짝 꽃을 피웠다.

 

남쵸에서 차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남쵸마을이다. 이 곳은 남쵸 호수와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또다른 호수 사이에 자리해 있는데, 마을 양쪽으로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 펼쳐져 있다. 이 언덕에 올라가면 양쪽의 호수를 모두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남쵸에 도착한 많은 사람들은 호수에 이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서 대부분은 언덕의 멋진 풍광을 놓치고 만다. 나를 태우고 온 한족 운전수도 남쵸에 도착하자마자 식사도 거른 채 드러눕고 말았다. 호랑이 기름도 고산증 앞에서는 별 효력이 없는 모양이다. 남쵸마을 언덕에 올라 나는 30분쯤 바위에 걸터앉아 호수만 바라보다 내려왔다. 호숫가를 따라 코라를 도는 노인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쉼없이 오른손으로 마니차를 돌리고 있었다. 호수의 푸른색과 그가 입은 붉은색 옷이 행복하게 어울리고, 그가 중얼거리는 옴마니벳메훔이 하늘의 소리처럼 그윽한 오후였다. 

 

                      -- 글/사진: 이용한  http://blog.daum.net/binkond

 

호숫가 쵸르텐 앞에 쌓여 있는 마니석. "옴마니벳메훔"을 적어 놓았다.

 

<라싸에서 남쵸(240킬로미터)로 가는 대중교통은 칭장철로를 타고 담슝으로 가거나 지프차(4명 기준, 1박2일에 1000~1500원)를 빌려서 가야 한다. 라싸에서 담슝까지 운행하는 미니버스가 있지만, 담슝에서 라싸로 가는 대중교통은 없다. 담슝에서 남쵸 호수로 들어가는 입구에 매표소가 있으며, 입장료는 80원이다. 차를 타고 갈 경우 라싸에서 담슝까지 3시간이 넘게 걸리고, 담슝에서 남쵸까지 1시간이 더 걸린다. 아침 일찍 라싸를 출발하면 저녁 늦게는 돌아올 수 있지만, 담슝에서 1박하는 것도 괜찮다. 고도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로 남쵸에 오르는 것은 고산증을 몸소 체험하는 것밖엔 안된다.> 

 

 

 

티벳일기 15: 티벳의 옛 수도, 시가체

 

 

 

산자락의 타시룬포 사원과 시가체 전경.

 

라싸에서 280km, 버스를 타면 약 5시간 거리에 티벳 제2의 도시, 시가체가 자리해 있다. 하루 전 티벳여행을 함께 왔던 일행과 헤어진 뒤, 나는 라싸 버스터미널에서 혼자 시가체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는 한족을 제외한 외국인이라곤 나밖에 없어서 맨 뒷자리로 이동하는 나를 다들 신기한 듯 쳐다보며 수군거린다. 좌석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바닥이 온통 해바라기 씨앗 껍질에다 침과 담배꽁초로 지저분하다. 티벳에서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버스 안에서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침을 뱉고,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 4시간 넘게 이런 버스를 타고 가자니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 ‘뽕짝’처럼 흘러나오는 티벳 노래가 잡친 마음을 다독였다.

 

시가체 가는 길에 바라본 얄룽창포와 계곡.

 

버스는 예정시간보다 40분 늦게 라싸를 출발, 시가체로 향했다. 길을 따라 궁궁을을 내내 이어진 강, 강을 따라 가파르게 솟은 산자락들. 거의 300도에 가까운 굽잇길에서도 버스는 추월을 감행하는데, 승객들은 이골이 났다는 듯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부르다 못해 아예 합창까지 해댄다. 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 이 사람들 전부가 가수다. 다들 어찌나 목청이 좋고 노래를 잘 하던지. 나만 버스 맨 뒷좌석에 쳐박혀 꿀 먹은 벙어리 신세다. 툭하면 산사태가 나고, 이동하는 군용 트럭을 만나 제 속도로는 가기 어려운 길. 1시간 30분을 달려 버스는 노천 휴게소에서 10분간 정차했다. 건물이라곤 과자 부스러기와 음료수를 파는 쓰러져가는 흙집이 한 채 있고, 화장실도 없는 곳. 남자들은 죄 강을 향해 소변을 보고, 여자들은 건물 뒤로 돌아가 일을 본다.

 

시장 좌판에 나와 공부하는 아이들(위). 티벳 전통구역의 전통가옥(아래). 

 

냥추 강과 얄룽창포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시가체는 라싸보다 고도가 높은 해발 3900미터(평지 산소량의 67%)에 위치해 있다. 시가체가 가까워질수록 라싸까지는 볼 수 없었던 사막 지형이 강을 따라 펼쳐진다. 서너 개의 야산이 아예 휑덩한 모래언덕인 곳도 있다. 라싸를 출발한 지 4시간 50분, 드디어 시가체에 도착했다. 티벳 제2의 도시라지만, 시가체는 라싸에 비해 훨씬 조용하고, 전혀 번잡하지 않다. 관광객들의 모습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딱 원하던 분위기다. 1시간쯤 숙소를 찾아 헤매다 들어간 호텔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와보니 오후 5시가 넘었다. 호텔은 한족 거주지에 몰려 있어 티벳 전통구역으로 가려면 여기서 시가체 북쪽으로 길을 잡아 가야 한다.

 

                     

티벳 전통구역과 타시룬포 사원 가는 길에 만난 아이들.

    

  

본래 시가체 북쪽 산자락에는 과거 창 지방을 지배했던 왕의 궁전인 시가체 종(1613년 건설)이 있었으나, 1959년에 있었던 극렬한 봉기(시가체는 가장 극렬하게 중국에 저항했던 곳)로 인해 시가체 종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애당초 라싸의 포탈라궁은 이 시가체 종을 모델로 삼은 것이고, 16세기까지만 해도 시가체는 티벳의 수도 역할을 담당했었다. 시가체의 번성은 제1대 달라이 라마 겐덴 드룹(Genden Drup, 겔룩파를 창시한 총카파의 제자)이 1447년에 세운 타시룬포(Tashilhunpo, 짜쉬룬포, 타쉴훈포라고도 발음한다) 사원에서 비롯되었는데, 17세기 라싸를 중심으로 한 겔룩파의 성장과 권력다툼으로 티벳의 수도는 오늘날의 라싸로 옮겨졌다. 하지만 시가체는 여전히 창 지방의 중심지이며, 판첸 라마의 거주 사원으로 라싸의 조캉사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지로 통한다.

 

시가체 근교의 들판. 저녁이 되어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시가체 북쪽에 자리한 티벳 전통구역 입구에는 재래시장과 일반시장이 ‘ㄴ'자로 펼쳐져 있다. 타시룬포 쪽으로 재래시장이 자리해 있다면, 시가체 종 방면으로는 일반시장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 곳의 재래시장은 관광지인 라싸보다는 장삿속이 훨씬 덜하고, 상인들도 라싸에 비해 순박한 편이다. 똑같은 마니차를 두고도 라싸에서 파는 가격의 30~40%쯤 이 곳이 저렴하다. 나는 시장 골목을 한 바퀴 돌아 티벳 전통구역을 구석구석 기웃거렸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은 골목에서 나를 만나자 신기하다는 듯 졸졸 내 뒤를 따라다녔다. 1시간쯤 티베탄 마을을 돌아다니다 도시 외곽의 들판으로 향했다.

 

시가체 근교 들판의 유채밭.

 

유채꽃밭과 감자밭이 펼쳐지고, 칭커밭이 에두른 시가체 들판은 내가 어린시절에 보았던 우리나라의 시골보다 훨씬 시골다웠다.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우마차가 다니는 농로가 길게 뻗어 있다. 그 곳으로 어떤 농부는 마차를 끌고, 어떤 농부는 당나귀를 데리고, 어떤 아낙은 푸성귀가 가득한 망태기를 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손을 흔들면 이웃이라도 된다는 듯 반갑게 손을 흔들어준다. 너른 들판을 배경으로 유난히 황금색으로 빛나는 산이 하나 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이 산은 한낮에는 그냥 황토빛이었다가 해질 무렵이 되면 황금색으로 빛난다. 해서 나는 이 산을 황금산이라 이름붙였다. 원래 산 이름이 뭔지는 알 필요도 없이 이제부터 이 산은 나한테 황금산이었다. 시가체의 황금산.

 

저녁이면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 내가 황금산이라 이름붙인 산.

 

나는 이 황금산이 보이는 시가체 근교에서 밭에 나갔던 농부들이 다 돌아올 때까지 그 산만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티베탄 마을에서는 어디선가 흥겨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고, 나는 무작정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들어갔다. 집안에 모인 마을 아낙들과 아저씨들이 둥그렇게 모여앉아 창(티벳 막걸리)을 마시며 노래를 합창하고 있었다. 내가 사진기를 들이대자 처음에는 얼굴을 가리며 쑥스러워 하더니, 금세 본래의 음주가무로 돌아가 집안은 다시금 시끌벅적해졌다. 내가 찍은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마당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선 깔깔거리며 서로 손가락질을 한다. 집 주인인 남자는 내게 마음을 열었는지 방안을 구경시켜주겠다고 손짓을 한다.

 

마을 사람들이 둘러앉아 창을 마시고(위) 노래를 부르며 어울린 마당(아래).

  

하지만 주인댁 여자는 남편에게 호통을 치며 손사래를 친다. 사실 중국 공안은 아직도 티벳인들에게 외국인을 집안으로 끌어들여서는 안된다는 지침을 내려놓고 있다. 여자는 그것이 무서웠던 것이고, 남자는 잠시 그것을 잊었던 것이다.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어 나는 마트에 가서 컵으로 된 신라면(2개에 10원)과 사과(2개에 9원), 살구(6개에 6원)를 샀다. 저녁으로 라면을 먹고, 디저트로 살구까지 먹었더니 좀 살 것같았다. 티벳의 과일은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거나 티벳에서 난 것일지라도 고원에서 재배한 탓에 작고 볼품없지만, 시가체에서 맛본 살구맛은 내가 먹어본 살구 중엔 최고의 맛이었다. 

 

 

 

번잡한 라싸를 벗어나 시가체에 당도한 뒤부터 비로서 나는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최대한 티벳의 시간을 즐겼다. 자동차보다는 말과 야크가 걷는 속도로 흘러가는 티벳의 시간을. 티벳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소금계곡이 있던 옌징과 함께 나는 시가체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라싸보다 훨씬 티벳답고, 붐비지 않으며, 심심하기까지 한 시가체에서 나는 모처럼 혼자만의 2박 3일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두 번이나 타시룬포 사원에 갔고, 두 번이나 근교의 들판을 찾았다. 시내에는 인력거가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시가체의 모든 곳을 걸어서 다녔다. 어디서건 반짝이는 타시룬포의 황금지붕이 눈에 들어왔고, 그것은 내게 찬란했던 티벳의 옛날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글/사진: 이용한 http://blog.daum.net/binkond  16편에서 계속.

 

 

 

 

티벳일기(마지막회): 티벳 최고의 불탑, 간체 쿰붐

 

 

지금까지의 노정: 중띠엔-(190km)-더친-(181km)-옌징-(112km)-마캄-(158km)-조공-(201km)-팍쇼-(219km)-보미-(89km)-퉁마이-(146km)-링트리/빠이-(120km)-드락숨쵸-(50km)-공푸장따-(274km)-라싸<-(280km)->시가체<-(146km)->간체

라싸에서의 노정: 라싸-(195km)-남쵸  * 붉은색은 왕복노정

 

샬루파 사원 지붕에서 바라본 팔코르 사원과 간체종, 티벳 전통구역 전경.

  

간체(Gyantse, 해발 3950미터)는 네팔이나 인도에서 올라온 여행자들이 처음으로 만나는 티벳의 여행지다. 네팔과 인도, 부탄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 네팔에서는 니얄람이 가장 가깝고, 인도의 시킴 지역에서는 감파, 부탄에서는 로닥이 가장 가까운 티벳 땅이지만, 간체는 바로 이 세 곳을 두루 아우르는 지점에 위치하며, 과거에는 티벳 제3의 도시(현재는 제6의 도시로 전락)로써 15세기 이전만 해도 중국과 인도, 네팔과 부탄을 연결해주는 무역거점이자 교통의 관문 노릇을 했다. 시가체에서는 146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지만, 티벳에서 가장 편평하고 직선으로 뻗은 포장도로(티벳의 유일한 고속도로나 다름없다)가 나 있어 차를 타고 갈 경우 시간은 1시간 30분밖엔 걸리지 않는다.

 

티벳 최고의 불탑으로 불리는 8층 간체 쿰붐.

 

시가체에서 간체에 가기 위해 나는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버스 터미널을 찾았다. 터미널이라고 해봐야 우리나라의 70년대 차부와 다를 바 없다. 당연히 나는 라싸행 버스가 내리는 곳에 간체행 버스가 있을 줄 알았으나, 차부의 한족 매표원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간체, 간체’라고 또박또박 물어보아도 시큰둥하게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 때 한족에게는 간체를 ‘장쯔’라고 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 다시 이번에는 ‘장쯔, 장쯔’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반응을 보이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길을 일러 주었다. 그가 일러준대로 길가의 작은 차부를 찾아갔지만, 그곳엔 간체행 버스가 없었다. 또 다시 헤맨 끝에 더 허름한 차부 앞에 이르러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니, 역시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런데 하필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람 중에 한 명이 마침 자기 차가 간체를 가니 타라고 하는 것이었다.

 

간체 쿰붐의 황금돔과 벽에 그려진 부처의 눈(보호의 눈).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간체행 버스가 서는 차부에서 간체 가는 손님을 상대로 자가용 영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영업 허가가 있을 리 없다. 간체까지 25원. 원래 버스요금은 간체까지 20원인데,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 요금이었다. 더구나 자가용을 타고 가면 버스보다 30~40분은 빨리 도착할 수가 있다. 다만 4명의 승객이 다 찰 때까지 자가용은 출발하지 않는다. 15분쯤 기다려 4명의 승객이 채워지자 한족 운전수는 자동차 시동을 걸고, 불법 복제된 것이 분명한 테이프를 요란하게 틀어놓았다. 승용차는 두명의 한족 손님과 한 명의 티벳족, 한 명의 한국인을 태우고 시가체를 벗어나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계를 보니 120킬로미터를 넘나들었다. 티벳의 도로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속도임에 분명했다. 운전수는 도로에 나와 있는 모든 차를 추월했다. 더 이상 추월할 것이 없자 그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추월하려는 듯 엄청난 속도로 도로를 질주했다. 워낙에 길이 좋은데다 굽이와 고개도 없으니, 그에게는 이 길이 고속도로나 다름없는 것이다.

 

팔코르사원 간체 쿰붐과 대법당에서 잠시 쉬고 있는 순례객들. 

  

그러나 길밖의 풍경은 승용차의 속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들판의 사람들과 거리의 마차는 거의 정지한 듯 슬로모션으로 움직였다. 도로 양쪽에는 온통 푸른 칭커밭과 드문드문 유채밭이 펼쳐져 있다. 승용차는 그 좋은 길을 총알택시처럼 달려 1시간만에 간체에 도착했다. 시가체보다도 한적한 소읍의 분위기. 거리에는 유난히 마차가 많다. 그동안 티벳에서 만난 모든 마차의 수보다 훨씬 많은 마차를 나는 간체에서 만났다. 차보다도 인력거보다도 마차가 훨씬 많아서 가는 곳마다 마차가 눈에 띄었다. 네팔이나 인도에서 티벳으로 오는 여행자나 티벳에서 인도와 네팔로 넘어가는 여행자들이 처음과 마지막에 들르는 곳. 순전히 그것은 간체에 있는 팔코르 최데(Palkhor chode) 사원 때문이다. 사원을 알리는 입간판에는 줄여서 ‘팔최’(Palcho)로 적어놓았다. 팔코르 사원은 여행자들이 경탄해마지 않는 티벳 최고의 불탑(스투파), 간체 쿰붐(Gyantse Kumbum)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팔코르 최데 사원의 대법당.

 

‘십만탑’이란 뜻을 지닌 간체 쿰붐은 8층(기단 포함해 9층)에 그 높이가 35미터에 이르며, 층층이 이뤄진 법당이 총 108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108개는 상징적인 숫자일 뿐이며, 실제로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거대한 만달라를 상징하는 쿰붐의 모양은 주요 법당이 자리한 5층까지는 8각형을 이루고, 위층은 원형으로 이뤄져 맨 꼭대기에는 거대한 황금첨탑을 얹어놓았다. 또한 쿰붐의 6층에는 간체와 중생을 굽어살피려는 듯‘보호의 눈’이라 불리는 부처의 눈을 사방에 그려 놓았다. 1427년 건축된 이 불탑은 네팔 양식에 따라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일반인에게는 6층까지 약 30여 개의 법당만 개방하고 있다. 팔코르 사원의 입장료는 40위안이고, 쿰붐과 대법당 내부 촬영은 카메라에 따라 10~20위안 정도를 더 받는다.

 

       

팔코르 사원 대법당 내부(위왼쪽)과 한줄기 빛이 스며드는 옥상으로 이어진 계단(위오른쪽).

 

간체 시가지에서 팔코르 사원으로 이어진 길가의 집들은 모두가 무언가를 파는 가게들이다. 이 많은 가게가 제대로 운영될 리가 만무하지만, 가게마다 비슷비슷한 물건들이 잔뜩 전시돼 있다. 거리의 좌판도 거개는 비슷비슷한 물건을 판다. 신발과 옷, 철물과 과일, 차와 같은 것들은 주로 점포에서 팔고, 잡화와 농기구, 마구, 온갖 장신구와 불교용품은 좌판에 펼치고 있다. 게중에는 10 초반의 소녀까지도 거리에 나와 팔릴 것같지 않은 물건을 팔고 있다. 사원이 가까울수록 좌판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점포는 열이면 열 한족이 운영한다면, 좌판은 티벳인의 몫이다. 티벳인들은 외국인을 보면 물건값을 4배 이상 높게 부른다.  10원에 살 수 있는 팔찌를 50원으로 불러놓고는 흥정을 하면 10원까지 내려간다. 30원짜리 마니석도 10원, 외국인이 꼭 하나씩은 사 가는 마니차는 200원 이상을 부를 때가 많지만, 60~80원이면 살 수 있다.

 

샬루파 사원에서 바라본 간체종(위)과 간체 주변의 들판(아래).

 

사실 좌판에 나온 티벳인들은 외국인들에게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외국인에게 처음에는 몇 배 이상 가격을 불러 사면 큰 이득이고, 안사면 흥정을 통해 사게 만든다. 이들은 실로 팔려고 하는 의지가 눈물겨울 정도다. 제대로 된 가게는 한족이 모두 차지하고 있으니, 거리에서 작은 것이라도 팔아넘겨야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이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악착같이 달라붙어 물건을 파는 행위는 절실한 생존의 모습인 것이다. 시내에서 사원으로 이어진 길에는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을 빙 둘러쌓은 고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간체종(왕궁과 성)이다. 간체종은 본래 있던 산성을 14세기 들어 팍파 펠장포(Phakpa Pelzangpo)가 요새형 궁전으로 만든 곳인데, 9세기쯤 얄룽 왕조의 마지막 왕인 팔코르첸(Palkhortsen)의 궁전도 이 곳에 있었다고 한다.

 

마차와 마부 너머로 간체종이 보인다.

 

이 곳은 과거 라다크(Ladak)를 비롯한 주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요새로써, 오랜 동안 함락되지 않는 성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1904년 영국군의 침공으로 성벽과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중국 점령 이후 또 한번 파괴되어 성벽 일부를 제외하곤 옛 모습(현재 복원중)을 거의 잃었다. 그럼에도 간체를 찾는 많은 여행자들은 한번씩 간체종을 올라가곤 한다. 이 곳이 팔코르 최데 사원을 조망하는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팔코르 사원은 이 간체종을 오른쪽에 끼고 걸어서 채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팔코르 사원은 9세기 팔코르첸의 집권 시기에 처음 지어졌지만, 15세기 들어 다양한 종파의 사원이 팔코르에 들어서면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중국 점령 이후 남아 있는 사원 건물은 현재 두 곳(샤카파 사원과 샬루파 사원)에 불과하다.

 

티벳 전통구역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 

 

매표소를 지나면 오른편에 대법당이 있고, 왼쪽에 거대한 간체 쿰붐이 자리해 있다. 간체 쿰붐을 돌아 대법당 뒤쪽으로 올라가면 샬루파 사원이 자리해 있는데, 지금은 건물의 뼈대만 남아 내부는 텅 비어 있다. 하지만 이 사원의 지붕에 올라가면 팔코르 사원과 간체종, 간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최고의 전망대 노릇을 한다. 나는 이 곳에 올라 한시간쯤 하늘과 들판과 사원과 구름만 구경하다 내려왔는데, 개인적으로는 간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다. 날씨는 뜨거웠고, 오랜 동안의 여정으로 내 몸은 지쳐 있었다. 내 눈은 계속해서 간체 쿰붐의 사방에 그려진 부처의 눈과 마주쳤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단지 나는 쿰붐에 그려진 눈과 마주쳤을 뿐인데, 죄인처럼 자꾸만 나는 눈을 피해 달아났다. 그 눈은 지난날의 내 모든 치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티벳 전통구역에서 만난 빨래하는 아낙들.

 

어쩌면 내가 폐허가 된 사원 지붕에 더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서둘러 내려온 것도 나를 보는 부처의 눈 때문일지 모른다. 눈을 피해 나는 캄캄한 대법당 안으로 피신했다. 한낮에도 법당은 한밤중처럼 어두웠고, 종종 하늘로 열린 계단을 통해 한줌의 빛이 겨우겨우 쏟아져내렸다. 거기서 나는 아주 인상적인 풍경을 보았는데, 중국 인민복을 입은 티벳 소년이 계단에 비스듬히 기대 그 겨우 쏟아지는 빛을 한참이나 쳐다보는 풍경이었다. 그것은 마치 소년의 어두운 현실에 필요한 한 줄기 간절한 빛과 같았다. 식민지 티벳의 어두운 현실에 겨우겨우 스며드는 한 줄기 빛을 나는 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피하려고 했던 ‘부처의 눈’이었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지붕과 대문에 흔하게 장식하는 야크뿔.

 

팔코르 사원에는 유난히 개가 많다. 사원의 개들은 그늘이란 그늘을 다 차지한 채 누워 있다.  말은 마차를 끌어주고, 야크는 젖과 고기를 제공하며, 산양은 털과 유제품을 사람에게 주지만, 티벳에서 개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이 땡볕에 가장 편하게 쉬는 녀석들이 바로 이 녀석들이다. “아무것도 주지 않다니요. 시체를 뜯어먹지요.” 한 순례객은 개의 쓸모가 야크와 같다고 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티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조장(鳥葬)을 하거나 수장(獸葬)을 하는 것이 오랜 전통인데, 수장 즉 짐승에게 주검을 맡기려면 ‘개’(들개)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티벳에서의 매장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장법이다. 날씨가 건조해 매장을 하게 되면, 시체가 잘 썩지 않기 때문이다. 시체가 썩지 않는다는 것은 환생을 믿는 이들에게는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나의 관점에서는 시체를 들개에게 내어준다는 것이 썩 유쾌한 방법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난전에 앉아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들(왼쪽). 그 옆에서 얌전하게 기다리는 말(오른쪽).

 

팔코르 사원을 한바퀴 둘러본 뒤 나는 사원 앞에서 시가체종까지 펼쳐진 티벳 전통구역을 한참 떠돌았다. 이 곳은 티벳의 도심에 존재하는 티벳 전통구역 가운데 가장 티벳다운 풍경이 존재하는 곳이나 다름없다. 흙벽돌로 된 2~3층의 집들은 대체로 모든 벽에 흰색 회칠을 해놓았다. 1층은 따로 외양간이나 마굿간으로 사용하는 집도 있지만, 상당수의 집들은 골목과 집 사이가 그냥 외양간이고 마굿간이다. 해서 티벳구역 골목에서는 유난히 많은 소들이 눈에 띈다. 집의 담과 벽에는 ‘쭤’를 붙여놓은 풍경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담과 옥상 벽에 쭤(야크나 소똥을 칭커짚과 이긴 덩어리)를 붙여놓은 티벳 전통가옥.  

 

‘쭤’란 야크나 소똥을 칭커짚과 섞어 흙반죽을 하듯 둥그렇게 만든 덩어리를 가리킨다. 이 쭤는 볕이 잘 드는 벽이나 담에 붙여놓았다가 다 마르면 불쏘시개로 사용한다. 지붕에는 나뭇가지에 타르쵸를 걸어놓은 룽다가 집집마다 걸려 있고, 대문에는 티벳불교를 상징하는 해와 달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다. 내가 골목을 배회하며 자꾸만 셔터를 누르자 멀리서 나를 보고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던 아이들이 금세 대여섯명으로 늘어나 졸지에 나는 아이들을 이끌고 이 골목 저 골목을 쏘다녔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검사를 맡아야 했다. 아, 이 귀여운, 무서운 녀석들!

 

라마불교를 상징하는 해와 달을 그려놓은 대문.

 

아침에 간체에 도착해 저녁이 다 돼 얼추 구경이 끝났다. 가는 길에 시가체로 간다는 택시를 집어탔으나, 택시 기사는 능청맞게 50원을 부른다. 25원에 시가체에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는 내게 바가지를 씌우려 했던 것이다. 내가 택시를 세우고 25원 아니면 안가겠다고 하자 택시기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택시기사는 4명의 손님을 채우기까지 무려 50분이나 간체 시내를 돌아다녔다. 갑자기 하늘에서는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한바탕 소나기를 퍼부어댔다. 택시는 그 소나기를 뚫고 시가체를 향해 달렸다. 역시 택시는 아침의 자가용이 그런 것처럼 단번에 시속 100킬로미터를 넘어섰다. 졸음이 밀려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느 새 택시는 시가체에 당도해 있었다. 이제 티벳에서의 날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비가 그친 하늘에서는 슬프고 아린 초승달이 돋았다.

 

= 글/사진: 이용한 http://blog.daum.net/bink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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