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健康및生活常識]/藥草의 常識

번루, 별꽃, 그리고 검범부리

경호... 2015. 7. 7. 03:57

번루, 별꽃, 그리고 검범부리

 

 

 

 

 

 

 스무살즈음에 어쩌다가 일본 근대시를 공부한 적이 있다. 애써 일본어 고어사전을 찾아가며 읽었었다. 시마자키 후지무라의 ‘코모로 고성 주변’이라는 시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코모로 고성의 주변, 구름은 희고 나그네는 슬프다. 연푸른 빛 번루(?蔞)들의 새싹도 보이질 않고 어린 풀들도 돋아나질 않는구나 ……” 대략 이렇게 시작되는데, 우울하고 비통한 정조가 시 전체에 넘쳐흘렀다. 화창해야 할 20대에 왜 이런 ‘글루미’한 분위기가 좋았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엔 이 시에 나오는 번루라는 식물 이름이 뭔질 몰랐다. 뭐, 고성 주변이나 언덕빼기에 나는 그런 식물이 있겠지. 크게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번루와 다시 만난 것은 10여년간의 기자생활을 정리하고 한의학을 하게 되면서다. 타계하신 원로 한의사의 처방집을 읽다가 우연히 수전증에 쓰는 약에서 그 이름을 보게 됐다. ‘가미완수탕’이란 이름의 처방이었는데, 번루가 이 처방의 임금격인 군약(君藥)으로 쓰인다. 물론 신하격인 다른 약물도 10여가지나 들어간다. 번루가 든 가미완수탕이란 이 처방은 손이 떨리는 수전증에 정말 탁효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분은 ‘수전증을 백발백중 완치한다. 필자의 숙부가 손이 떨렸는데 백약이 무효하더니 이 약 2제로 완치되었다’고 적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수백가지가 넘는 약물이 실린, 한의사가 늘상 보는 본초서들에는 번루라는 약물은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번루가 뭐지 하며 안달이 나서 동의보감과 본초강목을 비롯한 이런저런 문헌을 찾았다. 그랬더니 그 결과가 좀 우습다. 번루는 이른 봄에 시골 들판이나 길섶에서 흔히 보는 잡초였다. 우리말 이름으로 별꽃, 또는 개별꽃이다. 별같이 생긴 흰색의 조그만 꽃들이 4~5월에 귀엽게 피는 풀이다. 식물도감을 들춰보니 더 확실하다. 아니 번루가 그 별 것도 아닌 별꽃이란 잡풀이었어? 이런 참. 그러나 이것보다 더 무참한 것은 번루가 흔히 먹는 봄나물중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한참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전라도 지역에선 ‘검범부리’라고 하는 봄나물이 있다. ‘곰밤부리’라고도 하는데 타 지역에선 ‘콩버무리’ 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쯤에서 ‘아하!’ 하시는 분들이 있을 듯 싶다. 그렇다. 번루가 흔해빠진 그 검범부리 나물이다.

 검범부리는 꽃이 피기 전 초봄에 나는 어린 순을 잘 씻어서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풋마늘과 간장 등을 넣고 무쳐먹는다. 봄철 나물의 대명사격인 냉이나 달래의 맛과 향에 미칠 바는 못되나 상쾌하니 씹히는 맛이 나름대로 풍미가 있다. 보리싹과 함께 된장국을 끓여도 그 맛이 각별하다. 그 검범부리가 번루였다.

 

 처의 작은 아버님이 마침 수전증으로 십수년간을 고생하고 계셨다. 한의사가 된 필자에게 그 고통을 여러번 호소하셨다. 눈이 번쩍 뜨였던, 번루가 든 예의 수전증 처방을 썼다. 약을 쓴지 보름쯤 되었다. 번루 따위가 든 처방이 얼마나 효과가 있으랴 싶기도 했는데, 작은 아버님이 전화를 주셨다.

 

 “자네, 그 약을 먹고 내 수전증이 말이야, 80~90%가 좋아졌네, 어떻게 이런 신통한 일이 있는가. 명의일세. 자네는 명의야”

 

 우쭐해진 나는 처방을 바꾸어 약을 한재 더 썼다. 때맞춰 번루를 구하기 어려워 다른 처방으로 바꾸었는데 이번에는 명의 소리를 안하셨다. 약을 더 해달라는 말씀도 없고 해서 나중에 번루를 구해 제대로 약을 써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속절없이 2~3년의 시간이 가버렸다. 수전증은 살필 겨를도 없이 작은 아버님은 다른 중병에 걸려서 허망하게 대학병원의 병동에서 세상을 뜨셨다.

 

 ‘동의보감’을 보면 채소들을 다룬 ‘채부’편에 번루가 나온다. 번루는 ‘성질이 평하고 맛이 시다. 달면서 짜다고도 하기도 한다. 종기로 인한 독을 낫게 하고, 오줌이 지나치게 나오는 것을 그치게 하며, 어혈을 풀고 오래된 악창을 치료한다’고 하였다. 또 ‘계장초라고도 하는데 곳곳에서 많이 난다. 줄기가 넝쿨을 이룬다. 그 줄기를 잘라보면 가는 실같은 것이 있고 속이 비어있다. 그 생김새가 닭의 창자와 흡사해 계장초라고 한다’고 했다.

 

 이 번루는 민간에서 여성의 해산후에도 썼다. 역시 동의보감에 나오는 내용이다. 산후에 나쁜 피가 덩어리가 되어 나오지 않고 복통을 일으키는 경우에 쓴다. 번루를 찧어 즙을 내서 어린 아이 오줌에 타서 먹으면 나쁜 피가 다 나온다.

 

 번루는 영양가가 높은 나물이다. 비타민C나 베타카로틴, 플라보노이드가 풍부하다. 또 칼슘과 쿠마린(항응혈제), 암성장을 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제니스타인, 리보플라빈, 티아민, 비타민B3, 모세혈관을 튼튼히 하는 루틴, 감마리놀렌산 등이 있어서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는데도 좋지만 암과 같은 흉악한 질환의 예방에도 좋다.

 

 서양에선 이 번루를 ‘칙 위드(Chick weed)'라고 하는데 닭이 잘 쪼아먹는 풀이기 때문이다. 토끼도 이를 좋아해서 ’래빗 위드‘라고도 하고, 꽃이 별처럼 생겨서 스텔라리아(stellaria)라고도 한다. 그들 역시 지혈과 수렴, 구풍, 진통, 이뇨, 거담, 해열제로 쓴다. 또 습진이나 피부가 튼데, 곤충에 물렸을 때, 귀저기를 차서 피부가 헌 데 등 피부의 소양증과 상처에 번루의 즙을 쓰기도 한다. 일본에서도 봄철의 7가지 풀이 몸속의 사기를 몰아내고 질병을 예방해준다고 믿고 있는데, 그 봄의 칠초(七草)중에 번루가 들어간다.

 

 번루의 꽃, 별꽃의 꽃, 검범부리의 꽃이 피면 계절의 문턱을 넘어선 따사로운 봄의 기운이 산야와 들판에 넘실댄다. 그 앙징맞은 흰 꽃들은 어김없이 피지만, 세상은 어둡기만 하다. 부디 모두에게 봄의 따사로움이 전해지길. 한해살이 풀인 석죽과의 번루는 약용할 때는 넝쿨이 제법 억세어진 5~8월 경 전초를 채집하여 햇볕에 말려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