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라.’ 하고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은 노래했다. 봄날의 뭇 꽃들을 보면서 그녀는, 이미 예감된 이별을 아파한다. 꽃들은 난만히 피어서 온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지만, 지상에 머무는 그들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산에서 사는 족도리풀도 이 봄에 꽃을 피운다. 우리나라 산지 전역에 아주 흔한 풀이어서, 따뜻한 남쪽에선 고사리를 꺽거나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는 4월 중순쯤이면 쉬 꽃을 볼 수 있다. 숲지의 비탈진 나무 그늘이나 물기있는 응달에서 잘 자란다. 추운 지역에서도 5월쯤이면 꽃이 핀다.
그 꽃모양이 옛날에 신부가 시집갈 때 머리에 이던 족두리를 닮았다고 해서 족도리풀, 또는 쪽도리풀이다. 쥐방울덩쿨(마두령)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뿌리를 채취하여 약용한다.
중국에서도 알아준 우리나라 특산 약재, 세신(細辛)
족도리풀, 또는 쪽도리풀. 필자에겐 족도리보단 쪽도리의 된 발음 사투리가 더 예쁘다. 사실 족도리풀 꽃은 예쁘기보다는 특이하다. 도무지 나에겐 족두리같이 안보여서 좀 궁금하기도 하다. 어째서 우리나라 여자들은 족도리풀의 그 질박한 꽃에서 시집갈 때 쓰던, 곱디고운 ‘쪽도리(족두리)’를 보았을까. 꽃피는 봄날, 산나물 뜯던 처녀들은 연지 찍고 족두리 쓰고 시집가길 바랬을 테고, 나이 먹은 아낙들은 고왔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했겠다. 그래서 그렇게도 보였던 걸까.
4월말 휴일을 틈타 산에 올랐더니 그 족도리풀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넓직한 하트형의 이파리들이 인상적이다. 무성한 제 잎사귀들 밑에 숨어 보라색의 꽃이 핀다. 애써 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규방에 꼭꼭 숨어사는 여인같다. 아닌게 아니라 족도리풀의 꽃말이 ‘새색시’다.
족두리는 원래 몽고인들이 머리에 쓰던 ‘고고리(古古里)’가 원형이다. 원의 고려 침탈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족두리가 됐다고 한다. 그래서 족두리는 그 의미가 다중적이다. 꽃다운 신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엔 종속국의 여성들이 겪어야했던 한과 슬픔이 담겨있다. 꽃같은 나이에 시집도 못가고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던 수많은 처녀들의 한이 족도리풀이 되어 피어났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니, 족도리풀이라는 이름에서 혼례때 쓰는 고운 장신구만 연상할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냥 필자의 생각일 뿐이다.
족도리풀의 생약명은 세신(細辛)이다. 세신이라는 이름 그대로, 가늘고 긴 뿌리(細)가 얼큰하니 매운 맛(辛)이 난다. 또 은단 냄새같은 독특한 향이 진하다. 씹어보면 혀끝이 곧 얼얼해지고 마비감이 든다. 이 맵고 얼얼한 기운과 자극적인 방향성이 약이 된다.
이 세신은 예부터 우리나라의 산지에서 나오는 것이 약성이 뛰어나 중국의 옛 문헌에도 그 이름이 자주 보인다. 5세기경 중국 남조시대의 유명한 도사이자 의가인 도홍경(陶弘景)의 <본초경집주>에도 나온다. 고구려와 백제에서 생산되는 귀중한 특산 약재로 인삼과 금설(금가루), 오미자, 백부자(돌쩌귀 뿌리), 오공(지네), 곤포(다시마), 무이(느릅나무 씨) 등과 함께 세신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세신이 무려 1천6백년전 중국과 조공품이나 교역품으로 바다를 건너는 귀한 대접을 받았던 것. ‘고려삼(蔘)’만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고 족도리풀의 뿌리, 세신도 그랬다.
찬 기운을 몰아내는 봄의 기운같은 약
<동의보감>에 세신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몹시 맵지만 독이 없다. 풍습으로 인해 몸이 저리고 아픈데 쓴다. 뱃속을 데우고 기운을 내린다. 찬기운에 상해 목구멍이 붓고 아픈 것, 코가 막힌 것을 치료한다’고 했다. 또 ‘머리가 자주 아프고 메스껍고 어지러운 증상이 나타나는 두풍(頭風)을 없애고, 눈을 밝게 하며, 치통을 멎게 하고, 담을 삭히고, 땀이 나게 한다’고 적고 있다.
세신은 감기에 가장 많이 쓴다. 초기 감기에도 쓰지만, 체질이 약하고 추위를 많이 타는 노약자의 콧물 감기 등에 주로 쓰인다. 세신에 마황과 부자를 넣은 마황부자세신탕은 원기가 약해 늘 피로해 하는 허약자의 감기에 즉방이다.
필자는 조금만 날씨가 춥거나 찬바람을 쏘이면 그냥 감기에 걸리는, 원래부터 수족이 차고 추위를 많이 타는 이들의 유행성 감기나 기관지염, 천식에 주로 쓴다. 몸은 오실오실 춥지만 크게 열도 없고 땀도 나지 않고 콧물과 제체기가 심한 증상이나, 만성적인 알러지 비염, 천식에도 세신을 넣은 이 약은 거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낸다. 병원에서 손을 든, 수십년된 비염과 천식이 이 약으로 완치된 사례가 꽤 된다. 영감강미신하인탕, 소청룡탕 등도 세신이 들어가는 약이다. 역시 급만성 감기와 비염 등의 명약이다.
겨울의 찬 기운에 꽁꽁 얼어붙은 시냇물을 맵고 뜨거운 힘(辛熱)으로 녹이고 풀어서 졸졸졸 흐르게 하는, 무르익은 봄의 기운같은 약이라고 할까. 비유하자면 세신이 바로 그런 약물이다. 고전적인 표현을 빌리면 ‘찬기운이 뭉친 얼음(寒鬱)을 녹여서 수원(水源)을 통하게’ 하는 약이다.
세신은, 그러나 감기와 비염, 천식에만 쓰이는 약은 아니다. 뱃속의 오래된 숙음(宿飮)으로 늘 배가 아프고 차가운 고질병과, 만성적인 냉증으로 관절 등이 쑤시고 아픈 내외과의 제반 통증 질환에도 많이 쓰인다. 류마티스성 관절염이나 급만성 좌골신경통, 삼차신경통같은 증상은 세신이 없으면 안된다.
세신은 또 항균작용도 뛰어나서 구강점막의 염증이나 치은염에 세신을 가루내어 참기름이나 꿀에 개어 바르면 효과가 좋다. 화농성 감염증에도 세신가루를 바르면 잘 아문다. 치아의 신경통에도 좋고, 입에서 냄새가 나는 구취증에도 좋다. 한번에 6g정도를 끓여 자주 입에 머금으면 구취가 없어진다.
세신에는 진정작용을 하는 메틸 오이게놀과 페놀 등 휘발성 정유성분이 있다. 또 진통, 진해, 해열작용을 하는 성분도 있다. 세신의 정유성분은 마취효과도 낸다. 주의할 것은 다량으로 쓰면 호흡마비를 일으켜 사망케 하기도 한다는 것. 명나라때의 의서 <본초강목>은 ‘세신을 단방으로 쓸 때는 2g을 넘어서는 안된다. 만일 많이 쓰면 숨이 답답하고 막혀서 죽을 수 있다’고 했다. 단방으로 쓸 때는 반드시 유념할 일이다.
곤충학자 정부희씨의 <곤충의 밥상>이란 책을 봤더니, 마침 족도리풀에 관한 얘기가 있어 재미있다. 호랑나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몸집이 좀더 작은 애호랑나비가 애벌레시절에 유일하게 먹고 자라는 풀이 이 족도리풀이다. 성충인 애호랑나비는 애벌레들의 먹이인 족도리풀에 알을 낳고, 애벌레는 족도리풀 밥상에서 푸짐하게 식사를 하고 자라서 나비가 된다. 애호랑나비는 족도리풀만 먹고 자라도록 적응이 되었기 때문에 족도리풀이 없어지면 애호랑나비도 생존할 수 없다고 한다. 애호랑나비의 생존전략이 족도리풀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되고말았다. 아쉽게도 족도리풀의 꽃은 애호랑나비의 차지가 아니다. 땅에 붙다시피 꽃이 피고 향기도 좋지 않아서 나비나 벌이 꼬이지 않는다. 대신 파리가 단골손님이라고 한다. 족도리풀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사뭇 궁금하다.
세신은 가격이 꽤 비싼 한약재다. 수입산도 한근에 2만원이 넘는다. 국내농가의 수익작물로 재배를 해볼 수는 없을까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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