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새 / 캔버스에 유채, 1957/장욱진
스승
임보(林步 ,本名: 姜洪基, 1940~)
1
지난여름 내설악의 계곡에 들어 찬 물에 발을 담그고 한잔씩 기울이면서 거나해 지자 요새 아이들 버르장머리 없다는 얘기로부터 시작하여 지나간 제 스승들 자랑을 했다
우리 조지훈(趙芝薰) 선생은 말일세, 한 학기에 세 번쯤 강의를 하는데 두 번은 개강과 종강을 알리는 강의고, 학기 중간의 한 번은 어쩌다 월급지급일과 겹치는 날이었네.
그분은 아예 학교 출근을 잘 안 하셨는데 지금처럼 온라인 통장이 있었더라면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그 준수한 모습도 못 뵐 뻔했지…. 한 시인의 자랑이다.
우리 스승 장욱진(張旭珍) 선생은 말일세, 강의실이 아예 대폿집인데 제자놈들에게 술만 가르쳤지.
흥이 나면 당신의 고무신짝을 벗어 그것으로 술잔을 했는데 거기다 막걸리를 따라 당신이 먼저 자시고 차례로 돌렸단 말이시. 그런 학교생활도 귀찮다고 일찍 그만두고 말았지만…. 한 화가의 자랑이다.
우리 스승 구자균(丘滋均) 교수는 말일세, 학생들에게는 교재를 읽으라고 지정을 해 주고 당신은 교탁 뒤에 쪼그리고 앉아 책가방에서 소주병을 꺼내 혼자 홀짝이며 술을 즐겼는데, 강의시간이 끝날 무렵쯤엔 너무 취해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단 말이야, 그러면 제자들이 업어다가 연구실에 누여 놓곤 했지…. 한 국문학자의 대꾸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한 스님이 끼어든다
내 스승은 내게 10년 동안 한 말씀도 안 해 주셨는데 하도 답답해서 어느 날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주장자로 내 골통을 내리치더란 말일세. 경봉(鏡峰) 선사 얘기다.
도대체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가?
지나간 스승들은 그렇게 가르쳐서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스승도 제자도 없는 오늘 참 답답도 하다.
나무 / 1987/장욱진
2
새 학기를 맞게 되어
학생들에게 다시 시(詩)를 강의하면서
시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 내가
시에 대한 얘기를 지껄이면서
무엇이 진짜 가르치는 일인가를 곰곰 생각해 본다.
시인 지훈(芝薰)이
화가 욱진(旭珍)이
학자 자균(滋均)이
선사 경봉(鏡峰)이
다 그렇게 하며 지냈던 것은
그랬으리, 그러했으리
그들도 나처럼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회의했으리
학문(學問) ― 그 불확정(不確定)의 덧없음
허황한 지식들
차마 이것들을 진리(眞理)처럼 가르칠 수는 없었으리
그들은 거짓을 거부할 수 있었던 용기로운 선비
양심을 지키는 스승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들은 가르치지 않고도
일만(一萬) 제자들의 스승으로 길이 남았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장욱진(1917~1990)
구자균(1912-1964)
경봉선사(1892~1982)
*바람의 종
'#시 > 영상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일(遮日) / 오탁번 (1943~,충북 제천) (0) | 2015.07.06 |
---|---|
지나간다 / 천양희 (0) | 2015.07.04 |
마침표에 대하여/복효근 (0) | 2015.07.04 |
화살과 노래 (0) | 2015.07.04 |
내가 쓴 서체를 보니 / 조오현(雪岳,霧山 ; 曺五鉉, 1932~) (0) | 2015.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