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起와 性起의 관계
- ?華嚴經問答을 중심으로 -
장진영(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차 례>
Ⅰ. 머리말
Ⅱ. ?乘緣起의 성립
1. 三乘緣起와 ?乘緣起의 차이
2. 緣集說에서 自體의 의미
3. 自體에서 性起로
4. 法界緣起의 染門과 三乘緣起
5. 法界緣起의 淨門과 ?乘緣起
Ⅲ. ?乘緣起와 性起
1. 緣起와 性起의 병립
2. 修生과 本有의 관계
3. 無住法性인 性起
Ⅳ. 맺음말
국문요약
緣起와 性起의 사상은 華嚴敎學의 중심사상이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智儼(602~668)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는 地論敎學의 緣起說인 緣集說을 三乘의 연기설로 비판하고, 一乘의 연기설인 法界緣起說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연기의 이면에 性起를 제기하고 있다. 당시 지론교학 내에서는 ‘自體’의 의미에 대한 좀 더 발전된 논의가 진행된 것으로 이해된다. 기본적으로 ‘자체’는 如來藏과 같은 의미이다. 여래장은 여래의 잠재태인 因의 입장으로 이해되지만, 그 의미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여래의 현실태인 果의 입장에 대한 이해도 나타나고 있다. ‘자체’라는 용어에서 우리는 여래장사상에서 성기사상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지엄은 이를 수용하여 자체를 성기와 통용하고 있다. 하지만 義相(625~702)은 자체와 성기를 구분하여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으며, 자체연기를 일승연기와 구분하는 과정에서 성기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하고 있다.
성기사상은 지엄으로부터 발현된 것이지만, 지엄은 법계연기의 체계 안에 성기를 포함하여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의상도 법계연기의 사유를 수용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다만 법계연기의 淨門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의상은 정문의 本有와 本有修生, 그리고 修生과 修生本有를 각각 성기와 연기로 병립하여 이해하고 있다. 이는 行을 중심으로 법계를 이해했던『법계도』의 체계를 계승한 것이다.
의상은 증분[성기]과 연기분[연기]의 관계를 無住中道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다. 의상은 성기가 곧 無住의 法性임을 밝히고 법성을 중심으로 법계를 노래하고 있다. 의상은 연기의 이면에서 성기를 밝혔던 지엄의 법계연기의 사유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법성성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의상은 중생의 근기에 따른 수행을 중시함과 동시에, 성기를 연기의 이면에서 전면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의상은 性起사상을 중심에 내세움으로써 그의 실천수행을 중시하는 입장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주제어: 智嚴, 義相, 法界緣起, 自體, 緣起, 性起, 法性, ?華嚴經問答?
Ⅰ. 머리말
緣起와 性起(혹은 緣性二起)의 사상은 화엄교학의 중심사상이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智儼(602~668)으로부터 비롯된다. 지엄은 12세때 杜順(557~640)의 문하에 들어가 法界觀을 익히고, 法常(569~645)에게 攝論敎學을 배웠으며, 地論南道派의 智正(559~639)에게『화엄경』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특히 光統(慧光, 468~537)의 疏에서 ‘別敎一乘無盡緣起’의 사상을 깨쳤다고 한다.1)
당시 27세였던 지엄은 ‘立敎分宗’의 저술인『搜玄記』를 통하여 法界緣起說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지론교학의 연기설을 三乘의 연기설로 비판하고, 一乘의 연기설인 법계 연기설과 그 구경의 경지인 性起說을 주장한 것이다. 연기설은 일찍부터 불교의 핵심주제로 중시된 것이지만, 성기설은 지엄에 이르러 비로소 사상적으로 정립된 것이다. 이후 성기사상은 화엄교학의 한 축을 이루며 의상을 비롯한 화엄사상가들과 실천수행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연기와 성기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화엄교학의 주요 교설의 하나인 법계연기를 중심으로 하면서 성기를 함께 다루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2) 반면에 성기사상을 중심으로 한 연구 성과는 대략 3가지 정도로 살필 수 있다.
첫째는 성기사상의 연원에 대한 연구이다. 이는『화엄경』의 ?寶王如來性起品?과 ‘性起’의 어원을 중심으로 한 연구,3) 성기사상의 성립배경에 관한 연구4)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둘째는 지엄을 비롯한 화엄사상가들의 성기사상에 대한 연구이다. 1980년대 이후 성기사상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다수 진행되면서 기존의 (법계) 연기를 위주로 하면서 성기까지 다루는 방식을 벗어나고 있다.5)
鄭舜日은 화엄성기사상에 대한 일련의 논문을 통하여 지엄, 법장을 비롯한 중국화엄사상가들의 성기사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6) 張戒環도『화엄경』에서부터 중국화엄교학에 이르기까지 성기사상의 성립과 전
개과정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며,7) 石井公成도 지엄이 지론교학의 여래장사상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성기 중심의 사상을 전개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성기설의 성립을 중심으로 법계연기설을 다루고 있어 기존의 서술 방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8)
비슷한 시기에 全海住는 義相(625~702)과 의상계의 성기사상을 중심으로 한국화엄의 실천적 경향과 후대의 영향에 대하여 검토하였다.9) 마지막으로 天台敎學의 性具思想 등 타 사상과의 비교 연구10)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1) 法藏, 『華嚴經傳記』卷3(?大正藏?51, 163c).
2) 관련 연구로 이 분야의 선구적인 연구서인 湯次了榮, 『華嚴大系』(法藏館, 1915, 復亥板, 東京: 國書刊行會, 1975), 지엄의 문헌을 중심으로 법계연기설의 원형을 정리하고 있는 연구인 木村淸孝,『初期中國華嚴思想の硏究』(東京: 春秋社, 1977), 그 외에 법계연기에 대한 연구로는 小林實玄, ?法界緣起の硏究序說?, 『南都佛敎』 19(奈良: 南都佛敎硏究會, 1966); 石橋眞誡, ?法界緣起思想の系譜?,『宗敎硏究』 64 - 4(東京: 日本宗敎學會, 1991); 織田顯祐, ?『搜玄記』の法界緣起說?,『佛敎學セミナ-』 61(京都: 大谷大學 佛敎學會, 1995) 등이 있다.
3) 鍵主良敬, ?華嚴性起品の硏究?,『大谷大學硏究年報』 25(京都: 大谷大學大谷學會, 1972), 72 - 153면, 高崎直道, ?華嚴敎學과 如來藏思想?, 中村 元 外, 釋元旭 譯, 『華嚴思想論』, (서울: 文學生活社, 1988), 149 - 200면.
4) 鎌田茂雄, ?性起思想の成立?,『印度學佛敎學硏究』 5 - 2(東京: 印度學佛敎學硏究會, 1957), 195 - 198면; 平川彰 외, 鄭舜日 譯,?唯心과 性起?, 『華嚴思想』(서울: 경서원, 1988), 238 - 278면.
5) 성기사상에 대한 일본의 연구성과로는 ...... 玉城康四郞, ?華嚴の性起について?, 中村元 外, 『印度哲學と佛敎の諸問題』(東京: 岩波書店, 1951), 281 - 309면; 鍵主良敬, ?智儼における性起思想の?特質?, 『大谷大學硏究年報』 39(京都: 大谷大學大谷學會, 1986), 47 - 91면.
6) 鄭舜日, ?華嚴性起思想史硏究- 中國華嚴宗을 중심으로 - ?(익산: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a), ?智儼의 華嚴性起思想?,『韓國佛敎學』12(서울: 韓國佛敎學會, 1987), 99 - 128면, ?法藏의 華嚴性起思想?,『韓國宗敎』 11(익산: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88b), 11 - 42면.
7) 張戒環, ?中國 華嚴敎學의 性起思想 연구?,『佛敎學報』30(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993), 241-261면.
8) 石井公成, ?智儼の華嚴敎學?, 『華嚴思想の硏究』(東京: 春秋社, 1996), 79 - 169면.
9) 全好蓮(海住), ?新羅 義湘의 華嚴敎學 硏究: ?乘法界圖의 性起思想을 中心으로?(서울: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義湘華嚴思想史硏究』(서울:민족사, 1993); ??乘法界圖에 나타난 義湘의 性起思想?,『韓國佛敎學』13(서울: 韓國佛敎學會. 1988), 107 - 135면; ?화엄성기사상이 보조선에 미친 영향?, 『韓國佛敎學』? 14(서울: 韓國佛敎學會, 1990), 143 - 170면; ?의상의 法性과 法界觀?, 『한국불교학결집논집』 제1집 상권, 한국불교학결집대회 조직위원회, 2002, 47 -65면; ?『?乘法界圖』에 나타난 義湘의 法界觀?, 『韓國佛敎學』? 59(서울: 韓國佛敎學會, 2011), 47 - 65면.
10) 坂本幸男, ?性起思想と惡について?, 『印度學佛敎學硏究』 5 - 2(東京: 印度學佛敎學硏究會, 1957), 141 - 149면; 唐君毅, ?華嚴의 性起와 天台의 性具思想?, 中村 元 外, 釋元旭 譯,『華嚴思想論』(서울: 文學生活社, 1988), 315 - 346면; 唐君毅, ?華嚴의 性起와 天台의 性具思想?, 中村 元 外, 釋元旭 譯, 앞의 책,315 - 346면.
화엄교학의 성기사상을 다룰 때, 일반적으로 연기를 중심으로 하는 경우는 아무래도 性起의 세계가 부처의 正覺 후 三昧 중에서 설한 경지로 不可說인 證分의 세계라는 점이 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증분인 성기 세계로 바로 들어가기 보다는 可說인 緣起分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연기를 중시하는 중국화엄에 의지하여 온 그동안의 연구 경향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대체로 중국화엄은 이론적 경향이 강하다는 평이 있다.11) 이에 반해 한국화엄은 실천적 경향이 강한 것으로 파악된다. 지엄 이후 唐의 法藏(643~712)은 법계연기설을 발전시켜 화엄교학의 이론 체계를 정립하는 데 집중한 반면에, 신라 의상은 성기사상의 실천수행에 전념한 점에서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12)
특히 의상이『一乘法界圖』를 自利行, 利他行, 修行方便과 得利益 등 실천수행을 중심으로 구성한 점13), 자리행에서도 증분[성기]과 연기분을 병립적으로 파악한 점, 盤詩에서도 시작인 ‘法性’을 마지막인 ‘舊來佛’과 일치시켜 법성중심의 성기사상을 제시한 점14) 등에서 성기사상 중심의 실천적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吉津宜英은 그동안 성기와 연기의 관계를 연구할 때 많이 사용되었던 문헌인『화엄경문답』이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같이 法藏의 문헌이 아니라 지엄교학의 강한 영향 하에서 신라에서 편집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는 문제를 제기하였다.15) 이후 石井公成과 김상현 등에 의해 이 문헌이 법장의 저술이 아니라 의상의 강의를 智通이 기록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16) 의상의 성기사상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17)
이에 본고에서는 ?화엄경문답?에 제시된 일승연기의 의미, 연기와 성기의 관계를 지론교학의 緣集說, 지엄의 저술, 그리고 의상의『법계도』와 관련하여 검토해 보고자 한다.
11) 권탄준은 “중국 화엄교학의 성기관에는 인간관의 본질적인 방향을 정립함에 모든 인간이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이론적으로 완성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기사상 일반에는 모두 본질론, 혹은 이상론에 치우친 경향이 많다. 현실의 미망과 차별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눈을 돌려서 현실 속에서 비원을 가지고 법계를 실현해 나아가는 보살도의 구체적인 내용구명이 적다는 점이다.”라고 하여 기존의 60권 화엄을 중심으로 한 성기사상 연구가 한편에 치우쳐 있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權坦俊, ?華嚴經의 如來出現思想 硏究?(서울: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10면.
12) 지엄이 의상에게 ‘義持’라는 호를 주고, 法藏에게 ‘文持’라는 호를 준 것도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體元,『 百花道場發願文略解』(『韓佛全』 6, 570c), “儼公 號法師爲義持 號賢首爲文持.”
13) 高翊晋, 『韓國古代佛敎思想史』(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989), 283 - 292면 참조.
14) 全好蓮(海住), 앞의 논문, 2011, 47 - 65면 참조.
15) 吉津宜英, ?舊來成佛について- 性起思想硏究の?視點- ?, 『印度學佛敎學硏究』32 - 1(東京: 印度學佛敎學硏究會, 1983).
16) 石井公成, ?『華嚴經問答』の著者?, ?『印度學佛敎學硏究? 33 - 2(東京: 印度學佛敎學硏究會, 1985), 178 - 181면; 金相鉉, ?『錐洞記』와 그 異本 『華嚴經問答』?,『한국학보』 84(서울: ?志社, 1996), 28 - 45면; 張珍寧(眞修), 『華嚴經問答』 硏究?(서울: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참조.
17) 이에 대하여 박태원은 앞서 관심을 보여『華嚴經問答』을 ‘성기와 연기’, ‘연수인과와 성기인과’, ‘본유와 신생’, ‘성기와 중생구제’의 문제로 검토하고 있다. ...... 朴太源, ?의상의 성기사상 - 『화엄경문답』을 중심으로 - ?, 『哲學』 49(서울: 한국철학회, 1996), 5 - 31면.
Ⅱ. 一乘緣起의 성립
1. 三乘緣起와 一乘緣起의 차이
『화엄경문답』은 대략 163개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헌은 일정한 저술의도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문헌은 아니다. 소백산 錐洞에서 90일간 열린 의상의『화엄경』강의를 제자 지통이 주요 문답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가운데 약 40여개 문답에서 연기와 성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18)
『화엄경문답』은 전반적으로 一乘普法의 입장에서 三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연기와 성기에 대한 문답의 서두에서도 三乘緣起와 一乘緣起의 차이를 먼저 구분하고 있다.
[문] 삼승연기와 일승연기는 어떻게 다른가?
[답] 삼승연기는 연이 모이면 있어지고, 연이 흩어지면 없어진다. 일승연기는 그렇지 않다. 연이 모인다고 있어지는 것도 아니고, 연이 흩어진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19)
19)華嚴經問答(大正藏 45, 608c),
“問 三乘緣起 一乘緣起有何別耶
答 三乘緣起者 緣集有 緣散卽無 一乘緣起卽不爾 緣合不有 緣散不無”
이 문답은『孔目章』의 “三乘緣起 緣聚?有 緣散則離 一乘緣起 緣聚不有 緣散未離”20)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의상도 지엄의 견해를 계승하여 일승연기는 연의 집산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대체로 삼승연기는 ‘연을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반드시 그 所依[의지처]를 가지게 된다.21)
삼승의 ‘理’와 ‘事’로 논한다면, 이는 곧 ‘理’ 에 해당한다. 그리고 緣을 따라서 나타나는 이합집산의 현상은 곧 ‘事’ 에 해당한다. 삼승연기는 이처럼 理와 事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반면에 일승연기는 따로 ‘理’와 ‘事’를 정하지 않는다. 所依와 能依를 정하지 않는 無住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18) 장진영(진수), 앞의 논문, 56 - 60면 참조.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삼승연기와 일승연기, 返情과 일승연기, 緣修因果와 性起因果, 본유와 수생, 성기와 중생이익, 성기와 연기의 관계, 性起智, 본유와 신생, 이승회심과 성기과약의 문제 등이다.
20)『孔目章』(『大正藏』45, 586a).
21) 지론교학에서도 이를 佛性, 如來藏, 阿梨耶識, 眞識, 眞如 등 여러 용어로 부르고 있다.
"(일승)普法의 ‘事? 理’는 理가 곧 事이고 事가 곧 理이며, 理에 事가 있고 事에 理가 있어서, (理事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卽’[相卽]과 ‘中’[相入] 가운데 자재하는 것이다.
비록 事와 理가 섞이진 않지만 아득하여[분별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이와 사가) 둘이 아니다. (‘事’라 하면 事에 이 ? 사가 전부 다하고, ‘理’라 하면 理에 이 ? 사가 전부 다하는 것처럼) 부르는 대로 ‘전부 다한다’[全盡].
(또한) 전부 다하면서[全盡] ‘전부 다하지 않는다.’[全不盡] 理와 事, 事와 事(의 관계)도 역시 그러하다. … 왜냐하면 ‘연기다라니의 무장애법’[緣起陀羅尼無障?法]은 하나의 法을 들면 一切를 남김없이 거둬들여 무애자재하고, 하나가 없으면 일체도 또한 없기 때문이다."22)
22) 『華嚴經問答』(大正藏 45, 598b),
“普法中 事理者 理卽事 事卽理 理中事 事中理 卽中中恣
雖事理不參 而冥無二 隨言全盡 全盡而全不盡 如理事事事亦爾
… 所以者何 緣起陀羅尼無障?法 隨??法盡攝?切 無?自在故 ?無?切無故”
이처럼 일승의 입장은 理와 事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필요[須]에 따라 理와 事(혹은 事와 事)가 정해지므로 고정된 理와 事가 없고, 연을 따라 성취되므로 理와 事가 서로 걸리고 막힘이 없다. 그러므로 일승 연기는 住할 만한 理 혹은 自性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연의 집산에 따라 연기를 논하지 않는다. 오직 필요[須]에 따라 연기를 논할 뿐이다.
여기서 ‘須’는 緣成23)을 뜻하는 것으로 ?법계도?에서는 일승연기를 설명하는 표현이기도 하다.24)
이상에서 일승과 삼승의 연기에 대한 입장차를 살펴보았는데, 일승 연기의 입장에서 삼승연기까지도 포괄하려는 시도가 바로 지엄의 법계연기설이다. 지엄의 법계연기설이 地論南道派인 淨影寺 慧遠(523~592)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이미 지적된 바이다.25) 지엄은 혜원의 眞識의 구조에 영향을 받아 여래장을 법계연기 안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여래장을 근본으로 하는 연기문은 여래장이 수연하여 생사가 된다고 하는 染緣起 쪽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지엄은 혜원의 여래장연기가 참된 淨緣起[일승연기]가 아니고 染緣起[삼승연기]의 구조를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혜원의 연기설을 비판하고 있다.26)
다음 장에서는 일승연기의 주된 비판의 대상이라고 여겨지는 지론교학의 연기설[緣集說]이 법계연기의 체계와 성기사상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3) ?法界圖(大正藏?45, 714c), “須者緣成義”
24) ?法界圖(大正藏?45, 714c), “須盡?盡 須不盡?不盡故”;(大正藏?45, 715a),“須圓?圓 須前後?前後”
25) 鎌田茂雄, 앞의 논문 1957, 195-198면; 鄭舜日, 앞의 논문 1987, 111 - 113면.
26) 鄭舜日, 앞의 논문 1988a, 57면.
2. 緣集說에서 自體의 의미
최근 靑木隆의 연구에 따르면, 지론교학의 연기설로 ‘緣集說’이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27) 연집설은 지론남도파의 연기설로서 법계연기설의 원류가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28) 지론교학에는 2종, 3종, 4종연집설 등이 등장하는데, 혜원은『 十地經論義記』에서 有爲緣集, 無爲緣集, 自體緣集의 3종연집설29)을 소개하고 있어 주목된다.
27) 靑木隆, ?中國地論宗における緣集說の展開?, 『フィロソフィア』 75(東京: 早稻田大學 哲學會, 1988), 147 - 161면.
28) 靑木隆, ?돈황사본에서 본 지론교학의 형성?,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편, 『지론사상의 형성과 변용』?(서울: 씨아이알, 2010), 81면 참조.
29)『十地經論義記』(『卍新纂續藏』 45, 34c), “?是有爲 二是無爲 三是自體.” 慧光의 3종연집(연기)은 법장의 저술에 전한다. 『探玄記』卷18(『大正藏』35, 444b), “光統云 嚴空表無爲緣起 嚴園表有爲緣起 嚴閣顯自體緣起故也”
‘有爲’는 生死의 法이다. 體가 無常하여 생멸이 있으므로 ‘유위’라 한다.
업과 번뇌를 따라 인연하여 있어지므로 ‘인연’이라고 한다.
‘無爲’는 이를테면 涅槃(법)이다. 體가 생멸하지 않으므로 ‘무위’라고 한다.
道諦를 따라 있어지므로 ‘인연’이라고 한다.
이 두 법은 모두 앞의 因을 따라 뒤의 果를 集起하므로 이를 ‘事의 연기’라 한다.
‘自體’⑴는 앞의 생사와 열반의 법 그 법 그대로[當法]의 自性이 모두 다 연기이다. 그 모습은 어떠한가?
마치 생사의 본성이 여래장이라고 한 것과 같이 여래장에 모든 恒河沙의 불법이 구족한 것이다.
이 모든 법은 동일한 체성으로 서로 연집할 뿐 한 법도 홀로 자성을 고집할 수 없다.30)
30)『十地經論義記』(『卍新纂續藏』45, 34c),
“言有爲者 生死之法 體有無常 生滅所爲 故名有爲
從業煩惱 因緣而有 故名因緣
言無爲者 所謂涅槃 體非生滅 名曰無爲
藉道而有 故曰因緣
此之二法 皆從前因 集起後果 是事緣起
言自體者 ?前生死 涅槃之法 當法自性 皆是緣起 其相云何
如說生死 本性?是 如來之藏 如來藏中 具足?切 恒沙佛法
而此諸法 同?體性 互相緣集 無有?法獨守自性”
유위연집은 생사법에 해당하고, 무위연집은 열반법에 해당한다. 이에 대하여 자체연집은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두 법을 연기케하는 여래장의 입장이다. 여기서 유위연집과 무위연집은 ‘事의 연기’라고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자체연집은 ‘理의 연기’라고 볼 수 있다. 삼승의 理는 ‘평등진여’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자체’는 ‘여래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自體’⑴는 다시 有爲如來藏, 無爲如來藏, 自體⑵로 나뉜다.
"自體⑴에 다시 3가지가 있다.
하나는 有爲의 如來藏이니, 妄을 따라 染이 되는 것이다.
둘은 無爲의 如來藏이니, 妄을 떠나 淨이 되는 것이다.
셋은 自體⑵이니 緣을 廢하고 實을 논하는 것이다.31)
31)『十地經論義記』(『卍新纂續藏』45, 34c),
“此自體中 復有三種
?者有爲 如來之藏 隨妄爲染
二者無爲 如來之藏 離妄名淨
三者自體 廢緣論實”
‘自體⑴’이 유위의 생사법과 무위의 열반법을 모두 포함하는 일체의 依持로서 여래장을 밝힌 것이라면, ‘自體⑵’에서 ‘緣을 廢하고 實을 논하는’ 자리를 말하고 있다. 이상의 3종연집설의 내용을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표1> 3종연집설
自體⑵는 ‘緣을 폐한다는 것’[廢緣]은 緣의 集散에 따라 연기의 有無를 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實을 논한다는 것’은 緣에 의지하지 않고 바로 法의 진실된 경지에 직접 들어간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혜원은 ‘廢緣論實’이란 표현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하고 있다.32) 특히『 대반열반경의기』에서는 緣과 實에 대한 설명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32)『 大乘義章』의 경우 ‘廢緣’은 ‘과거 ? 현재 ? 미래의 3세가 무분별하다.’는 의미로, 혹은 ‘眞如의 性이 平等하고 無分別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大乘義章 卷14(『大正藏』 44, 746a),
“廢緣論實三世無及 實從緣起成佛果德 名?切智 此智能解?切諸法 說之爲入 廢緣論實如性平等無有分別”
"緣의 입장에서 實을 분별한다. 緣에는 染과 淨이 있으나 實은 곧 항상 맑은 것이다[常湛].
⑴實이 染의 緣을 따르면 因이라고 한다. 因은 범부로 있을 때이다.
⑵實이 淨의 緣을 따르면 果라고 한다. 果는 (實이) 드러날 때이다.
⑶緣을 廢하고 實을 논하면 實 밖에 緣이 없다. 연이 이미 있지 않은데, 다시 어찌 因인지 果인지 알 것인가? 진실로 實의 입장에서는 因도 果도 아니기 때문이다."33)
33)『大般涅槃經義記』卷7(?大正藏? 37, 792b),
“約緣就實分別 緣有染淨 實則常湛
實從染緣說之爲因 因在凡時
實從淨緣說之爲果 果在顯時
廢緣論實 實外無緣 知復約何說因說果
良以就實非因果故”
여기서 ‘緣을 廢하고 實을 논한다’는 것은 염이든 정이든 연을 따라 있거나 없거나, 혹은 因이 되거나 果가 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實이 그 자체로 염과 정, 因과 果의 상대적인 입장을 초월하여 항상 맑은[常湛] 경지를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법장은 “緣의 입장에서 起를 밝힌다면, 起는 이미 緣을 따르지 않고 자성에 수순한다. 그러므로 연을 폐한다는 것은 다만 성기를 말한 것이다”34)라고 하여 ‘廢緣’을 ‘性起’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체⑵’에서 ‘연을 廢한다’는 것은 삼승연기가 연의 집산에 따르는 것과는 다르며, 연의 집산에 구애되지 않고 바로 實을 논하는 것이므로 일승연기의 입장으로 나아가는 한 과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엄의 法界緣起에서 淨門은 여래장의 染緣起에 의한 因位의 입장은 물론 淨緣起에 의한 果位의 입장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래장의 인위와 과위의 상대적 입장을 벗어나 오직 淸淨한 세계, 즉 일승의 연기와 성기에 대한 입장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지론교학 내에서 자체=여래장의 의미가 분화되고 확장되는 과정이 진행된 것으로 보이고 이후 지엄이나 의상의 사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다음 장에서 自體라는 용어가 性起의 의미로까지 확장되는 과정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34)『探玄記』卷16(『大正藏』35, 405b), “約緣明起 起已違緣而順自性 是故廢緣但名性起”
3. 自體에서 性起로
지론교학에서 ‘自體’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여래장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는 ‘성기’의 의미와도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지엄의『수현기』에서는 ‘自體因果’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의상의『화엄경문답』에서는 五門論者의 ‘自體緣起’가 나온다.35) 뿐만 아니라『화엄경문답』에서는 의상계의 독자적인 전승인 ‘自體佛’에 대한 논의도 제기되고 있다.
먼저 지엄은『수현기』에서『화엄경』의 3분설을 제시하는 과정 중 ‘자체인과’를 언급하고 있다. 즉 ?명난품?이하 ‘修因契果生解分’을 둘로 나누어 ?소상광명품?까지를 방편대치의 ‘修成因果’로, ?보현보살품?에서 ?성기품?까지를 ‘自體因果’로 보고 있는 것이다. ‘修成’이라고 한 것은 聞熏에 의지하여 닦아 일어나기 때문이고, ‘性起’와 ‘修顯’이라고 한 까닭은 (性起는) 本性이고, (修顯은) 지금 성취되기 때문36)이라고 한다. 지엄이 ‘자체’를 ‘性起’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은『화엄경문답』에서 ‘자체인과’ 대신 ‘性起因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의상도 지엄의 분과설을 계승 발전시켜, ?명호품?에서 ?소상광명품?까지를 ‘緣修因果’로, ?보현보살행품???성기품?의 2품을 ‘性起因果’로 밝히고 있다.37) 여기서 ‘修成’은 ‘緣修’로, ‘自體’는 ‘性起’로 바꾸어 있는데,38) ‘자체’를 ‘성기’로 대체하고 있어 주목된다. 지엄이 자체의 의미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자체와 성기를 구분 없이 사용한 것과는 달리 의상은 자체를 성기와 구분하고 있다. 또한 五門論者의 ‘自體緣起’를 비판하여 지엄의 별교일승의 입장과 구분하고 있다.
35) 自體緣起와 五門論者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石井公成, 『華嚴思想の硏究』(東京: 春秋社, 1996), 181 - 182면 참조; 여기서 五門은 法上시대에 흥기한 사상으로, 五門論者란 동위나 서위에서 활동한 지론남도파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5문은 佛性門, 衆生門, 修道門, 諸諦門, 融門을 말한다. 이 가운데 융문의 마지막에 나온 ‘법계체성문’을 최고의 법문으로 여겼다. 靑木隆, 앞의 논문, 2010, 78 - 79면 참조.
36)『探玄記』卷1(『大正藏』35, 28a), “文修因契果生解分中分二 初訖小相已來明方便對治修成因果 二普賢菩薩品下訖性起品明自體因果 釋意可知 初爲修成者 依聞熏修起故 所以名性起修顯者本性今成故”
37)『華嚴經問答』(『大正藏』 45, 609c).
38) 법장은 이를 다시 所信因果, 修生因果, 修顯因果, 成行因果, 證入因果의 五周因果로 연결시키고 있다. 특히 ‘修因契果生解分’는 ‘修生因果’와 ‘修顯因果’로 나누어 그 인과를 달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수생인과’는 ‘差別因果’로, ‘수현인과’는 ‘平等因果’로 보고 있는데, 지엄과 같이 ‘자체인과’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探玄記』卷16(『大正藏』35, 403a).
[문] 오문론자들은 자체연기의 입장에서 圓明具德無?自在의 의미를 밝히고 있는데, 지엄사의 별교일승보법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이 뜻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다소의 방편이 있다.
이를테면 저쪽의 스승[오문론자]들은 相融離性의 自體門에서 무애자재의 뜻을 밝힌 것이지 相(事)의 입장에서 如如無?의 뜻을 밝힌 것은 아니므로, 同敎의 分際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지엄사]은 곧 相의 입장에서 無障?의 뜻을 밝히고 있으므로 마땅히 別敎의 分際에 들어가야 한다.39)
39)『華嚴經問答』(『大正藏』 45, 602b),
“問 五門論者等 約自體緣起中 明圓明具德 無?自在義 與嚴師別敎?乘普法 有何別乎
答 此義難別 然少有方便
謂彼師等 約相融離性自體門 明無凝自在義 非卽約相事 明如如無?義故 在於同敎分齊
此師等卽 約相 明無障?義故 當別敎分齊耳”
의상은 오문론자의 자체연기를 相融離性의 自體門으로 보고 있다.
‘상융이성’이란 무엇인가? 지론교학의 三乘別敎? 通敎? 通宗의 교판에서는 通敎의 ‘通’은 相融의 의미로, 通宗의 ‘通’을 體融의 의미로 보아40) ‘상융’보다 ‘체융’을 높게 보고 있다. 또한 佛陀三藏의『華嚴經兩卷旨歸』에서는 ‘相融無碍’과 ‘體融無碍’의 입장을 대비하여 ‘相이 융화하지만 體가 융화하지 않는 무애의’인 ‘相融無碍’를 ‘體融無碍’의 『화엄경』에 미치지 못한 것41)으로 보고 있다. 아마 의상도 이러한 관점을 빌어 自體(緣起)門에서 상융과 체융의 구분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오문론자의 相融離性의 자체문은 相의 입장에서 융화하지만 性[體]의 입장에서는 융화하지 않아서 여래장 자체의 무애 자재함을 밝힌 데 그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를 동교의 분제로 본 것이다. 반면에 지엄의 별교일승에 대해서는 ‘體融’의 입장에서 ‘相과 性이 서로 융화하고 相과 相이 서로 무애 자재함 밝힌 것으로 보아 이를 별교의 분제로 본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자체연기가 여래장 자체의 무애 자재함을 밝힌 것이라면 왜 熟敎(終敎)에 해당하지 않고 同敎의 분제에 해당한다고 하는가를 되묻고 있다.
40) 靑木隆, 앞의 논문, 2010, 73 - 74면.
41) 石井公成, 앞의 책, 182면; ?資料篇 三藏佛陀撰『華嚴經兩卷旨歸』 校注?, 같은 책, 537면.
[문] 如來藏 自體의 無碍自在함을 밝힌 것이므로 熟敎의 뜻인데, 어찌하여 同敎의 분제가 되는가?
[답] 이들[오문론자의 주장]은 別敎의 분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一乘別敎의 뜻은 여래장의 상[藏의 相]의 입장에서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들[오문론자]의 뜻은 다만 여래장의 체[藏의 體]의 입장에서만 一乘과 같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同敎의 分際에 속한다.42)
42)『華嚴經問答』(『大正藏』 45, 602b),
“問 如來藏自體中 明無?自在卽是熟敎等義 何故爲同敎分齊乎
答 此師等不別敎分齊故 ?乘別敎義 在於藏相明也
此義但在於藏體 同?乘 是義故同敎分齊耳”
화엄경양권지귀에 따르면, 화엄경은 ‘體融’의 입장으로 ‘여래장의 相에서 무애 자재함을 밝힌 것’[藏相明]이고, 오문론자의 ‘자체연기’ 는 ‘相融’의 입장으로 ‘여래장의 體에서 무애 자재함을 밝힌 것’[藏體明]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三乘에서는 理와 事를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理와 事가 무애하여 걸림이 없지만 (理와 事가 정해져 있으므로) 理가 事로 되거나 事가 理는 될 수 없다.43)
반면에 ?乘의 입장에서는 理와 事를 고정적으로 보지 않으므로 理와 事가 어느 한 편에 머물지 않고 필요[須]에 따라 理가 되기도 하고 事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體融’의 입장은 일승의 입장과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정해진 體[理]가 있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無住의 입장에서 보면, 理와 事가 相卽하고 相入하는 것이다. 물론 ‘相融’의 입장에서도 무애 자재의 뜻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理[性, 體]인 如來藏(自體)의 무애 자재함을 밝힌 것으로 삼승의 입장에 더 가까운 것이다. 다만 여래장의 ‘體’의 입장에서만 일승과 같다는 취지로 동교의 분제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화엄경문답』에서는 ‘자체’와 ‘성기’의 의미를 구분하고 있다. 지엄이 지론교학의 전통에서 ‘자체인과’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와 사용한 것에 대하여, 의상은 자체와 성기의 의미를 구분하여 그 의미를 신중히 사용하고 있다. 당시 오문론자와 같이 지론교학 내에서도 자체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달라 그 우열을 따지는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4)
의상은 이 과정에서 자체연기와 구분되는 ‘일승연기’와 ‘성기’의 입장을 좀 더 분명하고, 나아가 별교일승의 의미도 좀 더 선명히 한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의상은 동교의 분제로 파악한 자체의 의미마저도 적극 수용하여 독자적인 ‘자체불’ 사상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이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45)
당시 지론교학 내에서 ‘자체(혹은 여래장)’의 의미에 대한 분화된 논의가 진행되면서 그 함의가 매우 확장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인 견해를 따라 ‘여래장’은 因位이고 잠재태라는 의미로만 ‘자체’의 의미를 국한하지 않고, 果位이고 현실태인 여래법신의 현현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화엄교학의 ‘성기’가 좀 더 명확해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변화의 흔적이 지론교학의 ‘自體’라는 용어에 담겨있다. 이는 기존의 여래장사상에서 성기사상으로 발전해가는 한 과도기적 흔적이라고 생각된다.46) 그렇다면 지론교학의 연집설이 법계연기의 성립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자.
44)『華嚴經問答』지론의 교판에서도 이러한 고심의 흔적이 나타난다. 지론교학의 4종판에서 眞宗(=顯實宗)은 불성이나 여래장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여기고 있다. 이는 삼승별교 ? 통교 ? 통종의 3교판에서는 通宗에 해당하는 것이다. 통종에서는 다시 불성 3가지 현현의 모습에 근거하여 漸(열반경, 自類因果), 頓(화엄경, 自種因果), 圓(대집경, 自體因果)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靑木隆, 앞의 논문, 62 - 78면. 이밖에도 大集經尊重派, 오문론자에 대한 논의에서도 자체나 여래장의 의미를 둘러싼 지론교학 내부의 논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石井公成, 앞의 책, 181 - 182면 참조.
45) 自體佛에 대한 논의는 ?화엄경문답?에서 수용하고 있는 三階敎의 如來藏佛, 普法思想 등과 함께 별도의 검토가 요구된다. 삼계교도 지엄에 의해서 동교분제로 판정되고 있으며, 여래장불은 과위의 입장이 강조된 것으로 이해되고, 보법도 특히 의상계에서 ‘일승보법’이라 하여 교판상 중시되고 있다.
46) 일반적으로 여래장은 因의 입장이라면, 성기는 果의 입장으로 볼 수 있는데, 여래장사상이 성기사상으로 발전되었다는 의견에 대하여 高崎直道는 성기사상에서 여래장사상으로 발전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高崎直道는 ‘성기’(=여래출현)의 의미를 3가지로 해명하고 있는데,
첫째는 成覺(지혜의 완성)으로 ‘性’은 여래성으로 因(여래장)이고, 法身은 그것의 ‘起’ 즉 果라는 입장,
둘째는 법신의 현현(자비의 시현)으로 ‘性’은 법신이고, 여래공덕과 업이 그것의 ‘起’(중생도 ‘성기’의 한 부분)라고 보는 입장,
셋째는 진여 ?법성의 현현으로 ‘性’은 진여이고, 여래도 중생도 모두 함께 그것의 ‘起’라는 입장이다.
이 가운데 여래장을 因으로 보는 첫 번째 입장은 性起經에는 나타나지 않던 의미가 후대 보성론 등 여래장계 경전을 거치면서 나타나 ‘正覺’의 의미를 보편화시켰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 高崎直道, 앞의 논문, 中村 元 外, 釋元旭 譯, 앞의 책, 188 - 189면.
이 견해는 경전성립과정에서 보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화엄교학은 ?화엄경?성립 이후 수백
년이 지나서야 교학으로 정립된 것으로 교리성립과정에서 보면 성기사상이 후대에 발전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4. 法界緣起의 染門과 三乘緣起
지론교학에서는 佛性緣起, 眞性緣起, 眞識緣起, 眞心緣起, 法界緣起등 연기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47) 이미 ‘법계연기’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지론교학에서 법계연기라는 말은 처음에는 연집설과 별개로 사용된 것이다. 이 말은 ?화엄경문답?에 등장하는 ‘五門’ 중 ‘融門’의 최고법문에 해당하는 ‘法界體性門’48)과 관련된 것으로 이 법계체성에서 만법이 연기하는 것을 ‘법계연기’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후 앞에서 설명한 3종연집설에 ‘法界緣集’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법계연집은 유위, 무위, 자체의 3종 연집보다 상위 개념으로 諸法이 融卽하여 無障碍하다는 뜻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49)
지엄은 光統의 疏로부터 ‘別敎?乘無盡緣起’의 이치를 깨친 후『수현기』에서 법계연기설을 새롭게 제시하는데, 여기서 ‘無盡緣起’는 ‘일승연기’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법계연기’도 일승연기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지만, 이는 삼승연기까지를 모두 포함한 것이라 할 수 있다.50)
법계연기에서는 ‘染門’과 ‘淨門’의 2문을 별립하고 있는데, 특히 정문을 통하여 ‘本有’, ‘本有修生’, ‘修生’, ‘修生本有’의 4문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51) 이는 지론교학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染門’에서는 ‘緣起?心門’과 ‘依持?心門’을 나누고, 다시 연기일심문에서 ‘眞妄緣集門’, ‘攝本從末門’, ‘攝末從本門’의 3문을 나누고 있다.52) 지엄은 지론교학의 染緣起와 淨緣起의 내용을 모두 삼승연기라 하여 ‘染門’으로 낮추고, 별교일승만의 唯淨의 세계를 ‘淨門’으로 시설하여 독자적인 법계연기의 체계를 구성한 것이다.
47) 吉津宜英, ?慧遠の佛性緣起說?,『駒澤大學佛敎學部硏究紀要』 33(東京: 駒澤大學, 1975), 193면.
48) 각주35) 참조.
49) 靑木隆, 앞의 논문, 2010, 84 - 86면 참조.
50) 鄭舜日, 앞의 논문 101면.
51)『探玄記』 卷3, ?十地品?(『大正藏』35, 63a), “法界緣起乃有?多 今以要門略攝爲二 ?約凡夫染法以辨緣起 二約菩提淨分以明緣起 約淨門者 要攝爲四 ?本有 二本有修生 三名修生 第四修生本有”
52) 『探玄記』卷3, ?十地品?(『大正藏』35, 63b), “第二染法分別緣生者 有二義 ?緣起?心門 二依持?心門 緣起門者 大分有三 初眞妄緣集門 二攝本從末門 三攝末從本門”
染門에서 ‘연기일심문’은 삼승연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첫 번째 ‘진망연집문’부터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緣集’이라는 것은, 總相의 입장에서 12인연을 논한다면 ‘一本識의 작용으로 眞과 妄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마치『起信論』에서 ‘一心法에 의지하면 2문[진여문,생멸문]이 있으나 이 2문이 서로 떠나지 않는다[不相離]’라고 한 것과 같다. 또는 이 화엄경에서 ‘오직 마음이 변한 것[轉]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는『기신론』?에서 ‘眞과 妄이 화합한 것이 阿梨耶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오직 眞만으로도 일어나지 않으며, 홀로 妄만으로도 성립되지 않아서 진과 망이 화합하여야 비로소 있게 된다. 마치 ‘꿈’에서 일어난 일처럼, ‘앎’이 ‘잠’과 함께 화합하여야 비로소 (연이) 集起할 수 있다. 이것이 진망연집의 문이다."53)
53)『探玄記』卷3(『大正藏』35, 63b),
“言緣集者 總相論十二因緣 ?本識作 無眞妄別. 如論說 依?心法有二種門 以此二門不相離故又此經云唯心轉故 又如論說 眞妄和合名阿梨耶 唯眞不生單妄不成 眞妄和合方有所爲 如夢中事知與睡 合方得集起
此是眞妄緣集之門 唯眞不生 單妄不成 眞妄和合 方有所爲 如夢中事 知與睡合 方得集起 此是眞妄緣集之門”
‘연집’이란 용어만 보면 지론교학의 연집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여래장을 眞識이 아닌 眞妄和合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지론남도파의 심식설은 眞識을 ‘阿梨耶識’이라 하고, 妄識은 ‘阿陀那識’이라고 한다. 혜원은 말년에 섭론교학을 수용하여 ‘아리야식’ 을 진망화합의 식으로 보기도 한다. 아마도 지엄은 그 영향을 충분히 이해하고 진망화합의 입장에서 ‘眞妄緣集’의 문을 시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서 자체연집에서 “생사와 열반의 법 그 법 그대로의 자성이 모두 다 연기이다”라고 한 자체⑴의 입장과 기본적으로 통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어서 ‘攝本從末門’[本을 거두어 末을 따르는 문]은 “오직 妄心의 작용이기 때문”54)이고, ‘攝末從本門’[末을 거두어 本을 따르는 문]은 “12인연이 오직 眞心의 작용이기 때문”55)이라고 한다. 즉 染을 상대하여 淨을 논한 것이므로 모두 染門에 속한 것이다. ‘섭본종말문’과 ‘섭말종본문’은 각각 자체연집의 ‘자체⑴’에서 다시 ‘유위의 여래장’[隨妄爲染]와 ‘무위의 여래장’[離妄名淨]의 입장과도 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지엄은 지론교학의 연집설의 입장을 발전시켜 연기일심문에서 포용하고 이를 삼승연기의 염문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다.56)
다음 ‘依持?心門’에 대해서는 “6식과 7식 등이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에서 12인연이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생긴다고 하여, 아리야식으로써 通因을 삼고 있다”57)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엄경문답에서도 12인연을 能依持로 보고, 梨耶?心을 所依持로 보아 이를 ‘依持?心’이라고 하고 있다.58)
54)『探玄記』권3(『大正藏』35, 63b), “二攝本從末者 唯妄心作故 論云名種子識及果報識 對治道時本識都盡 法身流轉五道名爲?生 隨其流處成其別味 法種?苦如此非? 故知攝本從其末也”
55)『探玄記』권3(『大正藏』35, 63b), “三攝末從本者 十二因緣唯眞心作 如波水作 亦如夢事唯報心作 以眞性故 經云五陰十二因緣無明等法悉是佛性 又此經云 三界虛妄唯?心作 論釋云第?義諦故也”
56) “지엄 성기의 사상사적 의의는 혜원을 비롯한 지론학파의 여래장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나 법계연기적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여래장연기인 섭말종본문은 참된 淨緣起가 아니고 染緣起의 구조를 보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힌 것이라 한다. 즉 여래장연기가 참된 정연기가 아니라는 말은 지엄의 혜원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鄭舜日, 앞의 논문 1988a, 57 - 58면.
57)『探玄記』3(『大正藏』35, 63b), “二依持?心門者 六七等識依梨耶成 故論云 十二緣生依梨耶識 以梨耶識爲通因故”
58)『華嚴經問答』 卷1(『大正藏』35, 605b), “第二依止?心觀者 釋名者依止?十二因緣 此爲能依止 以梨耶?心爲所依 故名爲依止?心觀”
‘緣起’와 ‘依持’는 혜원교학의 중핵을 이루는 표현59)으로 지엄은 법계연기의 체계에서 이를 수용하여 ‘연기일심문’, ‘의지일심문’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를 모두 염문의 체계에 둠으로써 혜원 등 지론교학의 연기설을 삼승연기라 하여 직접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한편 혜원은 眞識을 ‘阿摩羅識’[無垢]과 ‘阿梨耶識’[無沒]으로 구분하여 각각 起信論의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에 연결시키고 있다.60) 여기서 아리야식은 바로 ‘여래장의 불생불멸과 생멸이 화합한 것’을 말하므로 앞서 진망연집문에 해당한 것으로 이를 ‘진망화합의 ‘阿梨耶’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純淨의 無垢識인 ‘아마라식’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섭론교학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기존의 ‘연기일심문’이나 ‘의지일심문’에서는 적절히 수용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아마라식과 아리야식의 관계가 화엄교학의 법계연기의 체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더 연구할 과제이다. 다음은 법계연기의 淨門에 대한 것이다.
59) 吉津宜英, ?혜원과 길장의 不二義 비교 논고?,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편, 지론사상의 형성과 변용?(서울: 씨아이알, 2010), 367면. 吉津宜英은 緣起는 ‘體用論’으로서, 依持는 ‘眞妄論’으로서 혜원 교학의 종횡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혜원의 大乘義章, ?八識義?에서는 기신론에 근거하여 眞識을 體大, 相大, 用大로 나누고 用大에서 淨用과 染用을 두어 染用에 緣起用과 依持用을 나누고 있다. 大乘義章 卷3(大正藏 44, 530a-b), “二開眞合妄 以說四種 眞中分三 如起信論說 ?者體大 … 二者相大 … 三者用大 用有二種 ?者染用 二者淨用 染用有二 ?依持用 … 二緣起用 … ”
60)『 大乘義章』卷3(?大正藏? 44, 530b), “三眞妄俱開 以說四種 眞中分二 ?阿摩羅識 此云無垢 亦曰本淨 就眞論眞 眞體常淨 故曰無垢 此猶是前心眞如門 二阿梨耶識 此云無沒 ?前眞心 隨妄流轉 體無失壞 故曰無沒 故起信論言 如來之藏 不生滅法 與生滅合 名爲阿梨耶 妄中分二 謂妄與事 眞妄各二故 合有四”
5. 法界緣起의 淨門과 ?乘緣起
법계연기의 淨門은 크게 말해서 생사에 매몰된 중생에게 보리심이 일어나는 그 구조를 논리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61) 정문은 本有, 本有修生, 修生, 修生本有의 4문으로 구성된다.62)
61) 織田顯祐, ?搜玄記の法界緣起說?, 佛敎學セミナ-? 61(京都: 大谷大學 佛敎學會, 1995), 23면.
62) 搜玄記 卷3(大正藏 35, 62c), “二約菩提淨分 以明緣起 約淨門者 要攝爲四 ?本有 二本有修生 三名修生 第四修生本有”
⑴ ‘本有’란 연기의 본래 진실한 體가 ‘妄情’을 떠나서 법계에 그대로 드러나서[顯然] 三世에 不動한 것이다. ?성기품?에서 “중생심 가운데 微塵經卷이 있고 菩提大樹가 있어 뭇 성현과 함께 증득한다.”고 한 것이다.
사람의 증득은 그 前後가 서로 같지 않고, 그 나무는 서로의 차이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유임을 아
는 것이다.63)
63)『探玄記』권3(『大正藏』35, 62c-63a),
“言本有者 緣起本實體離謂情 法界顯然三世不動故 性起云 ?生心中 有微塵經卷 有菩提大樹 ?聖共證
人證前後不同 其樹不分別異 故知本有”
⑵ ‘本有修生’이란 모든 정품이 본성에 있어서 서로 다르지 않다. 여기서 모든 연에 의해 새롭게 善이 발생하고 모든 연에 의해 妄法이 발하는 것이지만, 眞智는 곧 普賢과 합한다.
性의 體는 본래 분별이 없으므로 智를 닦음에도 분별이 없다.
그러므로 智는 理에 수순하는 것이지 緣에 수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修生이 곧 本有와 같은 본성을 따라서 발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기품?에서 “菩提心이 性起”라고 한 것이다.64)
64)『探玄記』권3(『大正藏』35, 63a),
“言本有修生者 然諸淨品本無異性 今約諸緣 發生新善 據彼諸緣乃是妄法所發 眞智乃合普賢
性體本無分別 修智亦無分別
故智順理不順諸緣 故知修生?從本有同性而發 故性品云名菩提心爲性起故”
⑴ ‘本有’는 緣起의 본래 진실한 體로 ‘妄情’ 따위를 떠난 자리이다.그 자리는 법계에 그대로 드러나며 삼세에 걸쳐 움직이지 않는다.
⑵‘本有修生’은 그 본성은 본유와 같은 것이나 다만 그 본성에서 新善과 妄法이 緣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그 발하는 것도 眞智로서 보현의 경계와 합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智는 곧 보리심을 말하는 것으로,보리심을 발하는 것은 비록 연을 따르는 것이지만 같은 본성에서 발하는 것이다.
즉 ‘性’은 體이며 ‘起’는 곧 心地에 現在하는 것65)이므로 ‘일어나지 않으나 일어나지 않음이 없는 것’[不起의 起]을 ‘본유수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성기품?에서 “菩提心을 性起”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菩提心’은 곧 ‘智’로 이것이 성기의 본질임을 알 수 있다.66) 이상 2구는 ‘성기’의 입장으로 일승연기의 구경을 밝히고 있다.
65)『探玄記』권4(『大正藏』35, 79b-c).
66) 그러나 여기서의 菩提心은 菩提와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菩提心이란 智에 의해서 촉발되는 初發心과 상통하는 것이요, 菩提는 바로 唯淨의 佛性起로서 果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鄭舜日, 앞의 논문, 1987a,120면.
⑶ ‘修生’이란 信 등의 善根이 먼저 앞에 나타나기 이전에 지금의 청정한 가르침을 대하여 緣을 따라서 비로소 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新生’이라 한다.67)
67)『探玄記』 권3(『大正藏』35, 63a),
“三修生者, 信等善根先未現前, 今對淨?, 賴緣始發, 故說新生. 故論云彼無無分別智故.”
⑷ ‘修生本有’란 如來藏性이 번뇌 속에 숨겨져 있다. 범부는 미혹한 처지라서 (이를) 깨닫지 못한다. 만약 미혹함을 대할 때라면 (여래장이) 있다고 할 수 없다.68)
68)『探玄記』권3(『大正藏』35, 63a),
“四修生本有者 其如來藏性隱在諸纏 凡夫?迷處而不覺 若對迷時不名爲有故”
⑶ ‘修生’은 비록 보리심을 발하기 이전이지만 善根 등에 의해서 청정한 가르침이 緣을 따라서 비로소 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新生’이라 한다.
⑷ ‘修生本有’는 여래장성이 번뇌에 덮여있으므로 미혹할 때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전히 미혹한 입장에 처해 있다면 여래장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실천에 의하여 여래장의 본래 청정성을 나타나게 하므로 이를 ‘수생본유’라고 한 것이다.69) 이상 2구는 淨門에서도 ‘연기’의 입장에 해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69) 鄭舜日, 앞의 논문, 1988a, 44면.
<표2> 법계연기설
이상에서 지엄은 ⑴本有와 ⑵本有修生을 ?性起品?에 근거를 두고 있어 성기문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⑶修生과 ⑷修生本有는 ?十地品?의 10番緣生에 근거를 두고 있어 연기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연기문은 일승연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孔目章에서도 性起를 ‘?乘法界緣起의 實際’로 보고 있는데, 일승연기의 입장을 별립하여 淨門으로 설정하면서 이를 다시 성기문과 연기문으로 구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지엄과 의상의 입장의 차이가 이는데, 이 부분은 뒤에서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화엄경문답』에서 제시된 삼승연기와 일승연기에 대한 관점을 바탕으로 지론교학의 연기설[연집설]에 대한 지엄의 비판과 수용, 그리고 삼승연기와 일승연기를 포괄하는 법계연기의 성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일승의 입장에서 본 연기와 성기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Ⅲ. ?乘緣起와 性起
1. 緣起와 性起의 병립
의상은 ‘일승연기’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할 뿐, 법계연기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다. 법계도에서도 증분과 연기분을 병립하고 있어 연기의 구경에 성기를 두어 성기를 연기에 포섭시키고 있는 지엄의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전해주는 지엄과 의상의 법계관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다.
"지엄의 緣性二起說에서 볼 때 법계연기의 극치가 성기이므로 연기와 성기 사이에는 본질적인 상위는 없으나, … 성기를 연기에 포섭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상은 증분의 법성을 진성의 연기분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다. 의상은 증분과 연기분을 자리행의 두 영역으로 분류하고 연기분의 진성을 통해서 증분의 법성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다. … 오히려 법성성기가 진성연기를 포섭한 것이라 하겠다.70)
70) 全好蓮(海住), 앞의 논문, 2011, 56 - 57면.
연기와 성기의 관계에 대한 의상의 인식이 지엄의 태도와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화엄경문답에서도 연기와 성기를 병립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 법계도의 입장과 상통한다.
지엄은 법계연기에서 일승만의 淨門을 별립하고 연기와 성기의 관계를 수생 ?수생본유[연기문], 본유 ? 본유수생[성기문]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화엄경문답에서도 본유와 수생의 관계, 또는 ‘緣修’와 ‘性起’(혹은 ‘緣修因果’와 ‘性起因果’)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緣修’는 지론교학의 주된 용어 중 하나이다. 화엄경문답에서는 화엄경의 구조와 관련하여 ‘緣修因果’와 ‘性起因果’를 설명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엄은 이를 ‘修成因果’와 ‘自體因果’로 나누어 보고 있다. 지론교학에서 ‘緣修’는 妄識에 의해 닦는 것을 말하고, 상대적으로 ‘眞修’는 眞識에 의해서 닦는 것을 말한다. 지엄도 ‘緣修’를 ‘自體’ 혹은 ‘性起’와 상대하여 사용하고 있으며71), 의상은 ‘緣修’를 일승연기의 ‘修生’의 의미로 가져오고, ‘性起’는 ‘本有’의 의미를 포괄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지엄의 설명을 살펴보면, 그는 ?보현보살행품? 이전을 ‘수성인과’로, ?보현보살행품?과 ?성기품?을 ‘자체인과’로 구분하고 있다.
71)『探玄記』권4(『大正藏』35, 78c - 79a).
[문] (?보현보살품?이 다음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답] (그 이유에는)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의문이다. ‘앞의 인과[修成因果]는 무엇을 體로 삼고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둘째는 自體因果이다. 이 품(?보현보살행품?)은 因이고 ?성기품?은 果이다.
(그렇다면) 이 인과[自體因果]와 앞의 修成(因果)는 어떻게 다른가?
만약 緣의 분제의 입장에서 보면 곧 앞쪽[수성인과]에 속하고, 성품을 여의고 始終을 잊으면 곧 이편[자체인과]에 속하게 된다.72)
72)『探玄記』권4(『大正藏』35, 78c),
“何故來
有二
?疑者 云向前因果以何爲體依何以成 爲決此疑也
此?第二自體因果 此品是因 性起是果
此因果與上修成 云何取別
若約緣分齊取 ?屬上 離性泯始終 ?屬此”
‘자체’라는 용어는 앞서 밝혔듯이 여전히 여래장과 가깝게 인식될 수 있지만, 수현기를 저술할 당시에 지엄은 성기의 입장과 무리 없이 통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의상의 화엄경문답에서는 이 ‘자체인과’란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성기인과’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지엄도 수성인과를 연기문의 입장에서 보고 있고, 자체인과를 성품을 여의고 시종을 잊은 성기문의 입장에서 보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기는 오직 果位의 입장으로 證分의 경지인데, 어찌하여 성기에서 다시 因果를 논하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문] 性起는 말이 끊어지고 相을 여의었는데, 어찌하여 因果가 있는가?
[답] 2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화엄경에서 因 가운데 性起를 판별하고, 果 가운데 性起를 밝히기 때문에 (인성기와 과성기의) 둘이 있다.
둘째는 性이 不住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起]이므로 일어난다는 相을 여의고 法을 수순하기 때문에 인과가 있는 것이다.73)
73)『探玄記』권4(『大正藏』35, 78c),
“問 性起?言離相 云何有因果
有二意
?爲經內因中辨性起 果中明性起故二也
二性由不住故起 起時離相順法 故有因果.”
여기서 因性起와 果性起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즉 ?보현보살행품?도 성기이고, ?성기품?도 성기를 나타내지만, 각각 因에서의 성기와 果에서의 성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74) 또한 ‘性’은 不住[=無住]이기 때문에 비로소 ‘起’하는 것이므로 인과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無住緣起의 인과라 할 수 있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다는 일반적인 인과와는 달리 無住, 즉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낳는 정해진 원인이 따로 있지 않다는 입장에서 분별없이 그대로 일어나는 인과를 말하는 것이다. 성기의 起는 그것이 무주이기 때문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것은 相을 여의고 法에 수순하므로 인과가 있다고 한 것일 뿐, 정해진 인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74) 다만 법장에게는 ‘성기인과’란 표현은 없다. 다만 법장 역시 理성기, 行성기, 果성기의 3성기를 모두 인정하고 있으며, “이성기는 因位의 관점이라면, 행성기는 聞熏과 發生의 과정에서의 내용이며 과성기는 이와 행의 수생을 겸하여 과위에 이르러 화용에 응기함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鄭舜日, 앞의 논문, 1988a, 71면.
그렇다면 일승에서 성기와 연수의 차이를 어떻게 논할 것인가?
[문] (性이) 일어날 때[起] (相을) 여의는 것과 緣을 따라 닦는 것[緣修]는 어떻게 다른가?
[답] 緣修은 연을 떠나면 성취할 수 없지만, 性起는 緣이 없어도 손실이 없기 때문에 구별된다.75)
75)『探玄記』 卷4(『大正藏』 35, 78c),
“問 起時離與緣修何別
答 緣修離緣則不成 性起無緣?不損故別也”
앞서 삼승연기와 일승연기를 구분할 때, 연의 집산에 따르는지, 혹은 정해진 依持가 있는지에 따라 구분하였는데, 다시 일승 내에서 연기와 성기를 구분할 때는, 기본적으로 연기도 무주이고, 성기도 무주이기 때문에 성기와 연기에 대한 신중한 구분이 요구된다. 그러나 일승이라 할지라도 ‘연기(연수)’도 연을 따라서 닦아서 이루는 것이지 연이 없다면 닦을 수도 성취할 수도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연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성기는 연이 없어도 그대로 온전히 이루지 않은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화엄경문답에서는 연수인과와 성기인과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피고 있다.
"聞薰習 등 3혜 방편의 연을 따라 수행하여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에서 ‘緣修因果’라 한다. 이 ‘연수인과’는 法에 따르는 것이고 스스로 實性에 머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연을 따라 나타는 것이지만 본래부터 나타난 바가 없다.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을 따라) 나타난 것이 곧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상[不生相]조차도 얻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性起因果’라한다."76)
76)『華嚴經問答』(『大正藏』45, 609c),
“從聞熏習等三慧方便緣 以修行所生顯之義 名爲緣修因果 卽此緣修因果法順 自不住實性故
雖隨緣生顯 而從本不生 不生故生卽不生 不生相不可得之義等 名爲性起因果”
‘緣修’란 말 그대로 ‘연을 따라’, 聞? 思? 修 3혜를 닦는 것이다. 다만 이는 법을 따르는 것이지만 따로 그 법의 자성(實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 住하여 닦는 것이 아니므로, 삼승의 연기와는 명확히 구분된다. 반면에 ‘性起’는 비록 연을 따라 나타나긴 하나 본래 나타난 것이 아니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상조차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와 성기, 성기와 연기의 관계는 어떠한가?
"연수가 없으면 곧 성기도 없고, 성기가 없다면 연수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곧 연수가 相을 떠나 體에 따르므로 性起가 되고, 성기가 곧 緣을 따르기에 緣修가 된다.
비록 體가 둘이 아니지만 두 가지 뜻이 서로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77)
77)『華嚴經問答』(『大正藏』45, 609c),
“答 實爾 其無緣修卽無性起 無性起卽不成緣修
然卽其緣修 是離相順體故 爲性起. 性起卽是隨緣故爲緣修
雖無二體二義不相是也”
비록 연기문와 성기문을 병립하여 살피고 있지만, 둘은 서로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없어서는 성립할 수 없는 관계이다. 연수가 없으면 성기가 없고, 성기가 없으면 연수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연기와 성기가 동체라는 것이다. 다만 연수는 연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으며 다만 체를 따르므로 ‘성기’가 되는 것이고, 성기는 연을 떠나도 줄어들지 않지만 성기가 연을 따르기 때문에 그것을 ‘연수’라고 한다.78)
그러므로 성기와 연기라는 구분조차도 정해진 것이 아니다. 이상 화엄경문답에 따르면, 의상은 연기와 성기, 성기와 연기를 병립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연기(연수)의 입장에서 보면 성기도 연을 따르기 때문에 연기(연
수)이며, 성기의 입장에서 보면 연기도 모두 體에 따르므로 성기 아님이 없는 것이다.
78) 『華嚴經問答』(『大正藏』45, 609c - 610a),
“問 其緣修德卽離性相 故與體無差別與性起離相有何別耶
答 雖二俱離性相 而緣修離緣不成 性起離緣不損 故有別也”
2. 修生과 本有의 관계
화엄경문답은 지엄의 사유인 수생과 본유의 관계를 다시 연수와 성기의 입장과 연결시키고 있다.
먼저 본유와 수생에서 본유를 근본, 수생을 지말로 보려는 입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문] 만약 그렇다면, 연수가 아니면 성기는 없고, 성기가 아니면 연수가 없다. 성기가 아니면 연수가 없으므로 修生을 연유로 하지 않는다면 本有도 없다.
연수가 아니면 本有도 없으므로 本有가 아니면 修生도 있을 연유가 없다.
(그러므로)이미 그 힘이 서로 대등한데, 어찌하여 본말의 뜻이 있는가?
[답] 이와 같은 緣起無分別의 法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무엇(본유든 수생이든)을 먼저 들어 근본을 삼더라도 걸림이 없을 것인데, 어찌 본말의 뜻이 따로 정해져 있겠느냐?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79)
79)『華嚴經問答』(『大正藏』45, 610a),
“問 若爾者 卽非緣修無性起 非性起無緣修 非性起無緣修故 修生由無不本有
非緣修無本有故 本有非修生無由
旣其力齊 何故其有本末義
答 如是緣起無分別法中 其能隨順解者 隨先擧爲本 無?之 何有定本末之義乎 可思解也”
이상의 성기와 연기의 관계를 볼 때 본유와 수생도 그 힘이 대등하다고 볼 수 있으므로, 본말의 구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유와 수생도 연기무분별법의 입장에서 본말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면, 법계연기의 淨門에서 ‘本有’와 ‘修生’만의 연기법이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이어지고 있다.
[문] 본유, 본유수생, 수생, 수생본유의 4구 중 ‘수생본유’와 ‘본유수생’의 2구는 연기법으로 본유가 아니면 수생은 없고, 수생이 아니면 본유가 없으므로, 이들 2구의 인연법은 (수생의 본유, 본유의 수생과 같이) 이해가능하다. 그런데 오직 ‘본유’와 ‘수생’의 2구만을 어떻게 인연법이라 할 수 있는가?
만약 수생에 의하지 않아도 본유가 있는 것이라면 더불어 習種性 이전에 본유가 있었다는 뜻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80)
80) 『華嚴經問答』(『大正藏』45, 610a),
“問 本有修生等四句中 有修生本有本有修生二句 其卽緣起法故非本有無修生 非修生無本有 此二句因緣法可解 唯本有但修生此二句 何爲因緣法乎
若非由修生而有本有者 與習種以前有本有之義有何別乎”
[답] 성자는 근기에 따라 이익을 보기 때문에 4구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모두 善說이다. 만약 어떤 기연중생이 性種性을 앞으로 하고 習種性을 뒤로 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면, 본유가 이전에 있고 수생 이후에 있다고 설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중생이 수생을 이전으로 하고 본유를 이후로 하여 이익을 얻는다면, 곧 性種性이 뒤가 되고 習種性이 앞이 된다고 한다.
다만 근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 말한 것이니, 법이 본래부터 전후가 정해져 있다고 보지 말라.
그 법에 전후가 없기 때문에 善說에도 마땅히 선후가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교의 말씀은 전후가 정해져 있지 않다.81)
81)『華嚴經問答』(『大正藏』 45, 610a),
“答 聖者能見機益故四句此善說 若有機緣衆生 以性種爲前 習種爲後 利益 卽說本有前 有修生後
有若有衆生 以修生爲前 本有爲後 利益 卽說性種爲後 習種爲前
但隨機處中說耳 勿見法定本有前後
以其法無前後故 卽善當於先後耳 是故諸聖敎之說前後不定”
물론 의상도 ‘본유’와 ‘수생’을 모두 聖說로 인정하고 있다. 4구가 모두 중생의 근기에 따라 이익을 주기 위해 설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에 따라 性種性이 먼저라고 하면 본유를 수생의 앞에 두는 것이고, 習種性이 먼저라고 한다면, 수생을 본유보다 먼저 두는 것일 뿐, 정해진 본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엄의 공목장에서는 ?乘佛을 성취하는 種性의 뜻을 性種性과 習種性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성종성은 本性을 기준하여 설한 것이고, 습종성은 修習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며, 또한 성종성은 本有性이고, 습종성은 修生性이라고 한다.82)
다만 성종성과 습종성의 선후, 혹은 본유와 수생의 본말에 대한 논의가 자세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혜원의 대승의장 ?二種種姓義?의 해석이 주목된다.
82) 孔目章 卷2, ?第三會十住品內本分首種性章?(『大正藏』45, 549c),
“性種性者 約本性說 習種者 約修習說 亦有解者 性種性者 是本有性 習種性者 是修生性”
"行位의 의하여 (종성의) 先後를 판별하여 정한다.
(여기서) 2가지 종성이란 첫째 습종성이고, 둘째 성종성이다. 이 2가지 종성은 位을 들어서 말하면 습종성이 선이 되고 성종성은 후가 된다.
만약 行을 취하여 논하면 성종성과 습종성은 同時가 된다. 동시가 되기 때문에 前後가 정해진 것이 아니다.
體에 의지하여 用을 일으키면 성종성을 먼저 밝히고, 습종성을 나중에 밝힌다.
用을 찾아서 體를 취한다면 습종성을 먼저 밝히고 성종성을 나중에 밝힌다."83)
83)『大乘義章』卷9(『大正藏』44, 650c - 651a),
“約就行位辨定先後
二種性者 ?習種性 二性種性 此二種性 若據位分習種在前性種在後
若就行論 性習同時 以同時故 前後不定
依體起用 先明性種後明習種
尋用取體 先明習種後明性種”
혜원은 位의 입장에서는 습종성에 의해서 성종성으로 나간다고 보지만, 行의 입장에서는 그 先과 後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體와 用에 대한 접근 방식에 따라 그 선과 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물론 화엄교학의 ‘一位一切位’의 입장에서는 位를 고정된 次第나 선후로 보지는 않는다.84)
84)『華嚴經問答』卷2(『大正藏』45. 607b),
“若普法正位?無位無不位 一切六道三界一切法界法門皆無不普法位 又一位一切位 一切位一位 如位法門一切行?義等法門皆爾 可思”
다만 혜원이 行의 입장에서 밝힌 것처럼 성종성과 습종성의 전후가 정해진 것이 아니지만, 혜원의 경우도 體를 중심으로 보면 성종성이 먼저이고, 用을 중심을 보면 습종성이 먼저라고 하여 체용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엄경문답이 체용마저도 고정하지 않고 오직 필요에 따라 그 전후가 결정된다고 한 점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지엄의 법계연기에서 등장한 정문 4구를 의상도 화엄경문답에서 모두 성자의 善說로 긍정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이 4구를 각각 성기문[본유와 본유수생]과 연기문[수생과 수생본유]으로 병립하고, 성기와 연기의 관계를 고정된 선후와 본말의 관계가 아닌 필요에 따라 그러한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는 의상의 법계도에서 緣起分[敎分]과 證分을 설정하여 각각 연기문과 성기문을 병립하여 파악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 매우 유사하다. 이 내용을 법계도의 구조에서 확인해보고 그것이 화엄경문답에서도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3. 無住法性인 性起
지엄이 ‘別敎?乘無盡緣起’, 즉 법계연기의 체계를 세우고 그 안에서 性起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의상은 性起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를 실천수행으로 연결시키고 성기를 중심으로 연기를 포함하는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상은 行을 중심으로 證과 敎[性起와 緣起]의 2문을 병립하고 있다.
그는 법계도에서 法界를 자리행, 이타행, 수행방편과 得利益의 3문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시 자리행에서 證分과 緣起分을 두어 각각 성기와 연기를 연결시키고 있다. 법계와 법성은 의상에게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85)으로 法界를 ‘法性偈’로 읊고 있는 것이다.
85) 화엄경문답에는 十佛에 대한 지엄의 해석에서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엄은 법계를 법성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한 것으로 보이며, 의상도 그 해석에 따르고 있다. 華嚴經問答(『大正藏』45. 599c),
“六 法界佛 … 釋云 所有功德與法性相應無盡故 解云 ?切功德皆與法性相應 卽?切法是十方三世?切處中無盡義 以爲法界佛故”
<표3> 法界圖의 구성
의상은 자리행의 증분에서 ‘法性’을 중심으로, 연기분에서 ‘眞性’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에 주목한 전해주는 연기문와 성기문을 각각 眞性緣起와 法性性起로 파악하고 있다.86)
여기서 ‘眞性緣起’는 慧遠이 소개한 여러 연기의 용례 중 하나이지만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앞의 법계연기의 체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승의 입장에서 보면 혜원이 사용한 ‘眞性緣起’는 삼승연기의 한 예로서 사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87)
왜냐하면 여기서 진성은 여래장성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지엄은 법계연기의 染門에 위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88) 그러나 의상은 眞記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眞性이 곧 法性’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法界圖記叢隨錄의 眞記에서는 眞性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86) 全好蓮(海住), 앞의 논문, 2011, 47 - 65면 참조.
87) 眞性緣起는 지론교학의 4종판에서 眞宗[顯實宗]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진성은 여래장의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이를 지엄은 3승의 연기라하여 법계연기의 染門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大乘義章』卷1(『大正藏』44, 483a),
“顯實宗者 大乘中深 宣說諸法妄想故有 妄想無體 起必託眞 眞者所謂如來藏性 恒沙佛法 同體緣集 不離不脫不斷不異 此之眞性緣起 集成生死涅槃 眞所集故 無不眞實 辨此實性 故曰眞宗”
88) 鎌田茂雄, ?唯心과 性起?, 平川彰 외, 앞의 책, 273면.
[문] 진성은 위의 법성과 어떻게 다른가?
[답] ⑴ 어떤 이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즉 法性은 眞과 妄에 두루 통하고 원융하게 취하며, 또한 有情과 非情에 통한다. (하지만) 이 眞性은 곧 眞에만 통하고 또한 유정문에만 통한다. …
⑵ 그러나 진실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진성이 곧 법성이다. 이른바 진성의 체가 甚深하고 微妙하다는 것은 단지 자성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연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89)
89)『叢隨錄』卷1, 『眞記』(『大正藏』45, 722b),
“問眞性與上法性何別
答有云別也 謂法性則通眞妄取圓融 又通情非情也 此則唯是眞而又唯是有情門 …
然而今 約實云 眞性?是法性也 所謂眞性之體甚深微妙者 但以不存自性攬諸緣成故也”
⑴은 眞性에 대한 이해가 삼승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眞性이 眞識과 有情에만 통한다는 입장이다. 法性과 그 범위에 큰 차이를 보인다. 이에 반하여 ⑵는 일승의 입장에서 ‘진성이 곧 법성’임을 밝히고 있다. 진성이 유정에만 해당하고 법성은 유정과 무정에 다 통한다는 구분에 따르지 않는다. 진성과 법성의 구분은 다만 법성성기의 증분이 불가설의 입장에 있고, 진성연기의 연기분이 가설의 입장에 있다고 설정한 것일 뿐, 법성과 진성이 별개의 체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는 앞서 화엄경문답에서 연기와 성기의 관계를 논한 내용과 동일하다. 여기서 ‘眞性緣起’는 ‘진성에 의지하는 연기’가 아니라 ‘진성인 연기’로, ‘法性性起’는 ‘법성에 住하는 성기’가 아니라 ‘법성인 성기’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眞性緣起’는 無住의 연기로서 ?乘緣起의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삼승과 일승의 차이는 ‘隨緣’의 의미를 통해서 분명히 할 수 있다.
⑶ 만약 삼승의 입장에서 논한다면 자성청정심은 무명의 바람인 緣을 따라 차별 만법을 이루는 것이다.
⑷ 만약 일승의 뜻에 따르면 ‘緣 이전에 法이 없기’[緣前無法] 때문이다. 먼저 진성이 있고 연을 따라 있는 것이 아니다.90)
90) 叢隨錄 卷1, 眞記(『大正藏』 45, 722b),
“若約三乘論者 自性?淨心隨無明之風緣成差別萬法也
若自?乘義 則以緣前無法故 非先有眞性而隨緣成”
⑶은 眞如隨緣의 입장으로 진여에서 무명의 연을 따라 모든 법이 일어난다는 입장이다. 이는 곧 삼승연기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⑷는 眞性隨緣의 입장으로 ‘연의 이전에 법이 따로 없다’[緣前無法]는 입장, 즉 無住緣起인 일승연기의 입장이다. 진성이든 법성이든 그것이 연이 발생하는 依持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眞性隨緣의 입장에서보면 진성이 곧 연기일 뿐, 진성이 먼저 있고 연이 (진성을 따라) 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법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법성이 곧 성기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법계도에서는 성기와 연기의 관계를 증분과 연기분으로 설정하고 있다. 증분은 性起에, 연기분은 緣起에 각각 병립하고, 법성은 불가설의 입장으로, 眞性은 가설의 입장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이 圖印에 의하여 만약 상근이라면 곧바로 증분에 들어가고, 만약 중근이라면 ‘眞性’이하의 교분에서 들어갈 수 있으며, 만약 하근이라면 뒤에 ‘行者’ 이하의 수행방편에서 비로소 들어갈 수 있다.”91)고 했듯이 이는 다만 중생의 근기를 보아서 설정된 것일 뿐, 증분과 연기분이 곧 하나의 법계이다.
91) 叢隨錄 卷1, 大記(『大正藏』45, 721a),
“依於此印 若是上根直入證分 若是中根眞性下?分之中而能得入 若是下根於後行者下修行方便之中方始得入也”
법계도는 결국 모두가 법성의 세계, 즉 일승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시설한 것이다. 法性인 性起의 세계밖에 진성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법성게?의 구조를 보면 성기의 세계(증분)와 연기의 세계(연기분)가 중도의 입장에서 다시 모두 ‘법성’임을 밝히고 있다.92)
증분과 연기분을 고정적으로 본다면 다시 二邊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因과 果의 兩位가 法性家의 진실한 덕용으로 그 성품이 中道에 있음을 밝히고,93) 증분과 연기분을 모두 法性(家)[=性起]으로 귀결시키고자 함이 ?법성게?의 구상에 담겨 있다.
92) 叢隨錄 卷1, 眞記(『大正藏』45, 733c), “法性家者 約今日緣中所起之法 爲證分及緣起分之法性也
或云 證?不分之中道方爲法性家也”
93) 法界圖 卷1(韓佛全 2, 1b), “何故始終兩字 安置當中 表因果兩位法性家內 眞實德用 性在中道故”
법계도에는 법성과 성기를 모두 중시하면서도 ‘법성’=‘성기’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상의 제자들의 법계도에 대한 주석에서는 한결같이 法性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화엄경문답도 ‘性起가 곧 法性’임을 명시하고 있다.
"性起란 곧 스스로 그러한 것이고 연을 따라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연기란 성기에 들어가는 가까운 방편이다. 이를테면 법이 연을 따라 일어나지만[起], 자성이 없으므로, 곧 그 법이 일어나지 않는[不起] 가운데 그것[법]을 解得해 들어가게 한다.
性起란 곧 法性이요, 곧 일어남이 없음[無起]을 ‘性’으로 하며, 일어나지 않음[不起]으로써 ‘起’를 삼는다."94)
94)『華嚴經問答』(『大正藏』 45, 610b),
“性起者 卽自是言不從緣. 言緣起者 此中
入之近方便 謂法從緣而起 無自性故 卽其法不起中令入解之
其性起者 卽其法性 卽無起以爲性故 卽其以不起爲起”
즉 법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기’ 그대로 법성이라는 것이다. 이는 의상의 법계도의 핵심 용어로 ?법성게?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법성은 無住의 법성이다. 그러므로 법성의 의미는 重重無盡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한 티끌도, 수미산도,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五尺의 몸도 그대로 법성 아님이 없게 된다.
"법성이란 미진법성이고 수미산법성이고 一尺法性이고 五尺法性이다.
만약 금일 오척법성을 논한다면 미진법성이고 수미산법성 등이 각기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不動自位] 五尺을 이룬다고 한다. 작은 자리라도 늘지 않고 큰 자리라도 줄지 않으나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능히 이루는 것이다.
… ‘모든 法’이란 이전의 法을 지칭하고, ‘움직이지 않음’[不動]이란 이전의 性을 가리킨다.
性이란 無住인 法性이다. 그러므로 의상 화상께서 금일 五尺身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無住’라 하셨다."95)
95) 叢隨錄 卷1, 眞記?(『大正藏』45, 721c),
“法性者 微塵法性 須彌山法性 ?尺法性 五尺法性
若約今日五尺法性論者 微塵法性 須彌山法性等 不動自位稱成五尺 不增小位不減大位而能成也
… 諸法者 指前法也 不動者 指前性也
性者無住法性也 故此和?云 約今日五尺身之不動爲無住也”
법성에서 ‘법’은 모든 법을 지칭하고, ‘성’은 움직이지 않음[不動]을 말하는 것으로 ‘無住의 法性’을 말한다. 이 ‘法性’이 부동하여 무주이기 때문에 모든 법이 법성 아님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미진이 법성이요,
수미산이 법성이요, 五尺身인 우리의 현재의 몸이 다 법성이다.
"일어남[起]이란, 곧 그 法性이 분별을 떠난 보리심 가운데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일어남[起]이라고 한다. 이는 곧 일어나지 않음[不起]으로써 일어남[起]을 삼는 것이니, 마치 그 법의 본성이므로 일어남[起]이라고 할 뿐이요 일어나는 모습이 있는 일어남은 아니다."96)
96)『華嚴經問答』(『大正藏』45, 610b),
“言起者 卽其法性 離分別菩提心中 現前在故 云爲起 是卽以不起爲起如其法本性 故名起耳 非有起相之起”
‘일어남[起]’이라고 하는 것은 그 法性이 분별을 떠난 菩提心 가운데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대로 드러날 뿐 그것이 어떤 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므로 실상은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것[不動]이다. 움직임이 없는 자리에서 그대로 드러난 것은 곧 不起로써 起를 삼는 것이다. 즉 그 법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남을 일어남[起]이라고 할 뿐, 일어나는 모습이 따로 있어서 일어남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문] 만약 그렇다면, 분별을 떠난 마음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일어난다는 것은 ‘본래 일어나지 않음’[本不起]과 차이가 있는데, 어찌 ‘본래 일어나지 않음’[本不起]으로써 ‘일어남’[起]을 삼는가?
[답] 비록 분별이 없는 마음을 기다려서 비로소 일어나지만 본래 일어나지 않는 것과는 서로 다른 모습이 아니다.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이 서로 같고 다르지 않아서 증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 허공을 새가 가는 것과 가지 않는 것이 둘 다 다른 허공이 아님을 비유로 설명한다.97)
97)『華嚴經問答』(『大正藏』45, 610b),
“問 若爾要待離分別心方起者 爲本不起別 何卽之以本不起爲起乎
答 雖待無分別心方起 與本不起非別相. 起與不起同無異故 無增減故
是故經中以虛空中鳥所行不所行 俱無別空爲喩說”
비록 ‘분별이 없는 마음’을 기다려서 비로소 일어나지만 본래 일어나지 않는 것과는 다르지 않다.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이 본래 다른 것이 아니고 어떠한 증감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에 새가 지나가는 것과 지나가지 않는 것이 둘 다 다른 허공이 아님을 비유한 것이다. 이 비유에서 보면, 일어남이나 일어나지 않음이나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허공에는 아무런 증감도 주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허공의 비유를 통해서 참된 法性이 곧 無住임을 밝히고 있다. 性起는 無住의 法性이다. 의상은 법계연기의 사유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연기의 이면에서 성기를 밝혔던 지엄의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기를 전면에 내세워 성기중심으로 연기마저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일승의 입장에서 보면 미진이든, 수미산이든, 현재 우리의 오척신이든 모두가 있는 그대로가 다 法性 아님이 없으며, 모든 行이다 心地에 菩提心이 現在한 것으로 性起 아님이 없음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화엄경문답?을 중심으로 연기와 성기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화엄경문답이 의상의 문헌이란 점에서 스승인 지엄의 영향, 그리고 법계도와의 관계도 함께 고려했다. 일승연기는 삼승연기를 비판하면서 성립된 것이다. 지엄은 지론교학의 3종연집설과 혜원의 연기문?의지문의 체계를 흡수하여 법계연기의 체계를 수립하고 있다. 여전히 여래장의 입장을 벗어나고 있지 않지만, 자체(혹은 자체연기)의 의미에 대한 확장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자체와 여래장의 의미에 대한 확장된 논의가 지론교학 내부에서 고조되는 과정에서 여래장사상이 성기사상으로 한 단계에 진화할 수 있는 사상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지엄은 智正으로부터 지론교학을 배우고 혜광의 화엄경소를 듣고서 ‘별교일승의 무진연기’를 깨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일승연기의 성립 배경에서 12세 이후 두순으로부터 전수받은 화엄의 법계관, 그리고 삼계교, 정토교, 동산법문 등 실천 수행 중시의 사상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논의는 앞으로 더욱 세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지만, 본고에서는 이 가운데 지론교학의 연집설과 자체의 의미를 중심으로 일승연기설과 성기 사상 형성의 과도기적 흔적을 일부 살필 수 있었다. 다만 화엄경문답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체’와 ‘성기’를 별다른 구분 없이 사용한 지엄과는 달리 의상은 ‘자체’를 ‘성기’와 구분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동교와 별교의 교판상의 차이로도 나타나고 있다.
화엄경문답은 삼승연기와 일승연기의 차이를 구분하고, 일승연기를 강조하고 있다. 지엄의 법계연기의 체계를 수용하면서도 일승연기의 독자적인 영역을 밝힌 법계연기의 淨門에 집중하여 일승의 연기문(수생, 수생본유)과 성기문(본유, 본유수생)을 병립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는 법계도의 연기분와 증분(성기)을 병립하고 있는 입장과 상통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성기의 의미를 無住의 法性과 연결시켜 법성이 곧 성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기사상을 실천적 경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의상의 성기사상은 더욱 그렇다. 성기사상은 잠재태인 인위의 여래장 사상보다 현실태인 과위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이다. 현실 그대로를 法性의 현현으로 긍정하고, 보리심을 발하면 일체의 행이 모두 心地에 현재하는 그대로 性起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엄을 계승한 법장이 법계연기의 이론적 체계화를 중시한 반면에, 의상은 수행을 중시하여 성기를 전면으로 부각시키고 있으며, 無住의 法性이 곧 性起라하여 실천적 경향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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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2011. 04. 11 심사완료일: 2011. 06. 22 게재확정일: 2011. 06. 24
<Abstract>
On the Relation of ‘Dependent Co - arising’ and ‘Nature Arising’
-Focusing on the Hwaeomgyeong-mundap-
Jang, Jin - Young
The problem of ‘Dependent Co-arising’(緣起) and ‘Nature-arising’(性起) is the central theme of Hwaeom(華嚴, C. Huayan) School. The serious concern with this problem begins with Zhiyan(智儼, 602~668). He criticizes the theory of ‘Dependent Co-gathering’(緣集說), Dependent Co - arising of Jilun(地論) School on the grounds that it is Dependent Co - arising of Tri-vehicle(三乘), on the contrary, he suggests the theory of ‘Dependent Co - arising of Dharmdh?tu’(法界緣起), viz., the Dependent Co - arising of Single - vehicle(?乘). And he proposes the existence of ‘Nature-arising’ present deeply within Dependent Co-arising. It seems that Jilun School at that time holds a advanced discussions on the meaning of ‘Self - noumenon’(自體, K. Jache), which may be generally identified with the Tath?gata - garbha(如來藏). Ordinarily Tath?gata - garbha tends to be understood as potentiality of Buddha. But the detailed discussions of ‘Self - noumenon’(Jache) sometimes makes Tath?gata - garbha understood as actuality of Buddha. In examining changes in the meaning of ‘Self - noumenon’(Jache), therefore, we can find out the vestiges of transitional move from Tath?gata - garbha to Nature - arising. Zhiyan accepts the term of ‘Self-noumenon’ and uses it in the same context as ‘Nature-arising’. But in the Hwaeomgyeong - mundap(華嚴經問答), Uisang(義相, 625~702) distinguishes ‘Self - noumenon’ and ‘Nature-arising’, and makes clear the meaning of Nature - arising in distinguishing between the ‘Dependent Co - arising of Self - noumenon’(自體緣起) and the ‘Dependent Co-arising of Single - vehicle’(?乘緣起).
The thought of Nature-arising begins with Zhiyan. He introduces the Nature - arising into the system of ‘Dependent Co - arising of Dharmdh?tu’. Also Uisang accepts and develops Zhiyan’s idea of ‘Dependent Co - arising of Dharmdh?tu’. He pays more attention to the the purity part(淨門) of ‘Dependent Co-arising of Dharmdh?tu’. And he understands ‘Originally - existing’(本有) and ‘Developing - by - practice of Originally - existing’(本有修生) in the place of Nature - arising, and in parallel with it, ‘Developing - by - practice’(修生) and ‘Originally - existing of Developing - by - practice’(修生本有) in the place of Dependent Co - arising. His approaches in the Hwaeomgyeong - mundap correspond to the system of Ilseungbeopgye - do focusing on practice. Uisang understands the relation of ‘Dependent Co - arising’ and ‘Nature-arising’ from th viewpoint of ‘midway without abiding in anything’(無住中道). He explains that the Nature - rising is the ‘Dharma - nature’(法性) without abiding in anything, and sings ‘Dharmdh?tu’ based on ‘Dharma - nature. ‘He posits Nature - arising in front of Dependent Co - arising, and thinks highly of the differentiation of practice according to sentient beings’ positions. He strengthens the practical tendency by putting a great emphasis on Nature-arising.
Key words: Zhiyan, Uisang, Dependent Co-arising of Dharmdh?tu, Self-noumenon, Dependent Co-arising, Nature-arising, Dharma-nature, Hwaeomgyeong -mund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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