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신현림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폴레옹의 이 말은 10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이었다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내 많은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송곳은 가차없이 찌르고 찔러왔다
모든 불행엔 충고의 송곳이 있다
자만치 말라는, 마음 낮춰 살라는 송곳
불행의 우물을 잘 들여다보라는 송곳
바닥까지 떨어져서
다시 솟아오르는 햇살의 송곳
송곳은 이제 지팡이처럼 내게 다가와
신들린 듯 거친 바다처럼 밀어간다
-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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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빠삐용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주인공의 꿈에 재판관이 나타나 ‘너의 죄는 인생을 낭비한 것’이라고 말한다. 함부로 허송한 시간들, 개념 없이 몽롱했고 허투루 비뚤비뚤 사악했던 시간들, 미래를 대비하지 못했던 삶에 대한 뒤늦은 회한이 몰아닥칠 때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란 말이 목구멍에 탁 걸린다.
개인의 삶이든 한 집단의 운명이든 현재의 상태는 지금까지 행한 태도의 결과이자 총합이다. 미세한 생각의 차이로 태도가 결정되고 그 태도들이 모여 중대한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은 누가 봐도 명백한 객관적 과오뿐 아니라, 당시엔 인식 못하고 예상치 못했던 사소한 실수나 판단 착오의 경우도 포함한다.
지난 시간을 촘촘히 피드백해보면 누구나 허점투성이의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의 실패 뒤 유럽연합군에 체포되어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을 때 과거를 되돌아보며 했던 말로 알려진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은 일종의 반성적 자기고백인 셈이다. 비록 워털루전투에서 패하여 백일천하로 끝났지만 엘바 섬을 탈출,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끔 스스로를 자극했던 말이기도 하다.
신현림 하면 시인이며 사진작가라는 신분과 함께 싱글맘이란 이미지가 병치되어 떠오른다. 그래서 그가 이 시를 쓴 시점에서 거슬러 '10년 동안' 그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의 충고가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었고,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나 아픔을 겪을 때마다 남편과의 이혼이라는 실패를 떠올렸던 건 아닐까 추측되어지는 것이다. 이혼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며 당당하게 말하는 이도 있긴 하지만, 사실 그 말을 뒤집으면 그 결혼이 인생에서 가장 잘 못되었다는 반성적 자기고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불쑥 생모가 나타난대도 골 아픈 노릇이지만 큰아이의 혼례를 제 에미 없이 치런다는 자체만으로 내겐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란 혐의를 벗지 못함을. 하지만 어쩌랴. 이유의 자초지종은 모두 무의미한 지난 일들. 찔릴만큼 찔린 이제는 언젠가 잘 보낸 눈곱만큼의 시간이 내게도 있다면, 염치없지만 그 보상으로 소소한 행복을 꿈꾸며 '바다처럼 밀어갈' 도리밖에.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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