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쓴다 -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生 풍화되었다.
-시집'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에서...
지나간다 - 천양희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은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 눈을 감는다
-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에서
오래된 가을 -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억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속에 오래
서있어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않고
마음으로 보는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에서
* 시인 천양희 (千良姬, 1942년~ 부산)
이화여대 국문과 졸, 1965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등과
산문집『시의 숲을 거닐다』『직소포에 들다』 등을 펴냄.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박두진문학상, 공초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학 부문) 등을 수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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