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상시

감당할 만한 거리 / 박상천

경호... 2012. 1. 19. 14:38

 

 

 

 

 

 

감당할 만한 거리 / 박상천

 

멀리서 보는 단풍은 아름답다

욕심을 부려 가까이 다가가

잎잎을 보면

상하고 찢긴 모습을

만날 뿐이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단풍든 잎잎의 상하고 찢긴 모습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는 일에

겁을 낸다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한다

 

감당할 만한 거리에 서 있으려고 한다.

 

 

 

십이월에 / 박상천

 

몇잔의 술에

쉽게 취한 십이월 저녁의 귀가길

어둠이 내리는

빈 나뭇가지를 보며

그대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깨닫습니다

아직 떠나가지 못한

나뭇잎 몇장이

십이월 달력의 숫자처럼 매달린

빈 가지 사이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가는 바람들,

그 바람에

또 몇 개의 숫자가 떨어지지만

비운만큼

버린 만큼 아름다운

빈 가지 사이로

빈 가지 사이로

십이월의 정갈함도 보입니다.

 

 

 

복권 가게 앞에서 / 박상천

 

아이와 함께 길을 걷다가

문득 복권이 사고 싶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잠시 망설인다.

 

복권을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긴 싫어

꾸욱 참고 가게 앞을 그냥 지나쳐 간다.

자꾸만 호주머니에 손이 가지만

아이에게 변명할 말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내 행동을 이해하도록 설명해주어야 할만큼

아이가 자라고 나니

이제 나는

복권을 사고 싶은 나이,

참 쓸쓸하고 허전한 나이에 이르고 말았다.

 

 

시와 시학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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