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용_결-들러보다_나무에 금박, 혼합기법_130×170cm_2006
세월이 그린 그림· 절로 새기는 한국적 아름다움
부드럽고 단단한 회화 - 섬세하고 소중한 것은 약해서 늘 문제이다.
그리고 선하고 따뜻한 것은 왜 매일 당하는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추억은 오래 못가고 흐릿하기만 하다. 확실히 잡을 수가 없다.
좋은 게 강하고 귀한 것이 오래 갔으면 오죽 좋겠는가. 그런데 김덕용의 작업에선 안심이다.
나무판의 견고한 물성과 결이 주는 구조적 뼈대가 보드랍고 아스라한 이미지들을 보호해 준다.
나무가 고맙고 결이 든든하다.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은 잡을 수 없고 사라지기 쉽다는
고질적 문제에 개입하는 작업임이 틀림없다. 거기에는 삶의 섭섭함을 달래는 속성이 있다.
흐려지는 추억을 응고시키듯, 스러지는 젊음을 동결하듯, 작품이 믿음직스레 버텨주는 것이다.
이렇게 지극히 회화적이고 또 부조와 같은 볼륨을 가진 작업에
사진적 효과가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삶의 진행을 순간적으로 멈춰
이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작용을 뜻한다. ‘얼음 땡’ 놀이에서 순간을 멈춰 시간의 지속성을 부여하듯,
어렴풋한 이미지는 기억의 저장고에서 올라와 나무판이라는 든든한 표면에 정착된다.
다시는 잃어버릴 염려 없이.
그의 작업은 우리의 눈을 순하게 한다.
일상을 애정 어리게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다 - 작가가 그랬듯이.
문득 이 작가가 낮잠 자는 누렁이를, 좀내 베어있는 오래된 장롱을,
그리고 그 위의 얹혀있는 빛바랜 이불을 이토록 오래 바라보았음을 깨닫는다.
침묵의 미학, 느림의 미학이다. 너무 빠른 세상에서 우리가 결정적으로 상실한 부분이 아니던가.
빠른 것이 지겨운 생활, 스피드가 단조로움이 되고 있는 삶이다.
‘또 바꿨구나’하는 한탄과 함께 새로움은 어느새 진부함으로 넘어간다.
자극과 흥분의 수위가 높아 있는 시선으로 김덕용의 작품을 본다면 이상할 수밖에 없다.
반대의 움직임을 만나기에.
김덕용_작은방-길몽_나무에 단청기법_95×138cm_2006
唯心히 보는 눈
일상의 한 장면을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소리 없이 쳐다볼 수 있을까.
김덕용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장면의 묘사가 아니라 그 장면을 지켜보는 시선이다.
그 시선의 속성은 시간이 길고 조용해서 장면 속 대상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그 시선은 숨을 죽이고 가까이 접근해서는 대상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한다.
나무 아래 누렁이는 한 동안 단잠을 깨지 않을 것이고, 나뭇가지 위 간신히 매달린 살진 달팽이는
그 느려터진 행보를 계속 할 것이다. 작가의 숨죽인 시선은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는다.
마치 카메라 줌을 당기듯 보고픈 부위가 눈앞으로 다가오며 명확히 보인다.
자세히 볼수록, 가까이 눈을 댈수록 자꾸 더 들어간다.
이는 근작에서 보는 ‘프레임 속 프레임’의 독특한 구성 방식과 연관된다.
하나의 장면은 네모로 잘게 나눠지고 재구성된다. 일종의 ‘동양화 콜라쥬’처럼
커다란 화면 안에 작은 구성들이 담겨있다. 파편 파편 임의적이고
우연적으로 맞춰지는 서양식 콜라쥬와는 다르다.
‘그림 속 그림’인 조각 그림인데도 떼어 내 보면 하나의 완전한 구성이기 때문이다.
맞추고 배열하는 구성은 지극히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작가는 진정 유심히 보는 자이다.
사실 요즈음 이렇게 마음을 담아 집중하여 보는 것이 힘든 세상 아닌가.
눈으로만 스쳐 지나가며 보는 것이 익숙해,
마음을 기울여 소위 ‘유심히 보는’ 것이 새삼스런 시대이다.
시간을 동결시켜 영원한 비젼으로 만드는 노력이다.
그러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일 수 밖에 없다. 고전성은 무엇보다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고,
또 그 때문인지 시간을 초월하는 속성이dLT다. 이러한 감싸는 시선 속에,
때마침 날라 온 새를 지켜보는 창틀의 아이는 영원히 그 지져귀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한복을 곱게 입은 여인의 영롱한 가야금 소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술이 추구하는 가장 큰 욕망 중 으뜸이 변치 않는 것에 대한 욕망이다.
현대성(modernity)과 대비되는 고전성이 이 욕망을 담당해 왔다.
그래서 김덕용의 작업은 고전적이라 말할 수 있다.
삭힘, 결, 그리고 고전성이 갖는 시간의 지속이 서로 통한다.
때문에 그의 작업을 보고 전통이니 향토니 하는 말은 아무래도 식상하고 피상적이다.
고전성이라는 미적 근거 위에 ‘한국적’이라는 특성이 접붙여진 작업이라 보는 편이 적절하다.
김덕용_결-자운영_나무에 자개, 혼합기법_148×123cm_2006
삭힘의 시간성
김덕용의 한국성이라는 것은 이러한 고전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나오는 특성이다.
시간의 축적과 삭힘의 미학을 한국성으로 표현하는 그이다.
시간의 삭힘을 갖기 위해 작가는 일부러 오래된 나무판을 구하거나 일부러 판을 낡게 만든다.
그가 한국성에서 가장 중요시여기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곰삭은 흔적이고 묵은 삶의 무게이다.
그리고 이러한 김덕용의 시간성은 '결'과 연관된다.
결은 작품의 텍스추어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이면서도 그가 가장 관심을 두는 시간성과의
상징적 고리이기도 하다. 나무의 결은 절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아름답다.
한국미의 특성으로 자연스러움과 삭힘을 중시하는 작가이다.
나뭇결의 자연스런 선율은 작품을 이루는 핵심적 요소이다.
“한 작품을 시작할 때 먼저 의식하는 건 화면과 자신과의 의사소통입니다.
그리고 물감을 바르고 갈아내고 하는 삭힘의 과정을 거친 후 완성시기에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움입니다. 이러한 모든 작업 과정 중 한국성을 인식하지만 일부러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양식적 틀이 되어 자유로운 표현으로 나가지 못하고
국지적 한계에 머물러 버리는 작가들의 모습을 종종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한결같다’라는 말이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단절적 진행을 무색하게 만드는 멋진 말이다. 적당한 속도와 일정한 정도로
시간은 물 흐르듯 진행된다. 사실 김덕용이 조심스레 떠낸 결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시간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느낌이다. 조급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멈춤도 없다.
진행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안달복달해도 절대 그 흐름을 앞지를 수 없다.
이러한 삶의 진행방식을 체화한 사람을 우리는 도사라 부른다. 여유로운 멋이 있다.
인위성을 넘어서는 절로 철학이 담긴 시간성 - 이것을 한국성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김덕용의 작업에서 한국적이라 부를 수 있는 속성이기도 하다.
결은 리듬을 타며 넘나드는 숨결이 되고, 안뜰에 부는 바람결이 되고,
작품 속 여인의 은밀한 살결이 된다.
김덕용_어머니-청싱홍실_나무에 자개_110×153cm_2006
한국의 여인性
그의 작업이 담는 아름다움은 너무 다 보이지 않고 빨리 드러내지 않는 수줍은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이런 속성을 한국의 여성미로 인식한다.
성적인 매력을 노골적으로 보이지 않고 은근히 베일에 감추인 여성의 몸이 더 아름다운 법이다.
적어도 ‘한국적’이라는 말을 쓸 때 그러하다.
육체적인 것보다 감성적인 미감을 더 치는 것이 우리의 고전미가 아니겠는가.
뭔가 신비롭고 갈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것이 한국 여성의 매력이다.
김덕용의 여인은 말 수가 적고 지독히도 내성적이다.
그러나 그 침묵의 공백에 천천히 움직이는 몸짓에는 진한 은근함과 따스함이 베어 있다.
이 여인네의 몸은 지켜보고 감상할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다.
살은 사르르 녹을 듯 부드럽지만 실제 표면질감은 반대가 아닌가.
엄격하고 딱딱한 피부가 애달픈 체온을 더욱 그립게 한다.
그리움 속 이미지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화석과 같은 것.
그래서 나무판은 단호하고 견고하기만 하다. 그래서 김덕용의 작품은 역설적이다.
말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똑똑한 척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전달하지 못한다.
한국적인 것이란 말로 전달하기 힘든 근본적인 영역의 감성이다.
궁뜨지만 순진한 눈빛의 촌 아주머니의 정스러움은 적당한 말을 못 찾는다.
아이들의 투덕투덕한 사투리가 정겨운 것은 또 어떤가.
머리고 꽁지고 간에 분홍색 리본으로 요란한 요크셔 테리어보다는,
살이 겹쳐 구겨진 귓두덩이와 목욕상태가 의심스런 동그란 엉덩이의 누렁이가
생태적으로 귀여운 걸 어쩌랴. 김덕용 작품 중 종종 등장하는 흰 개가 그렇다.
자기 할 도리는 않고 허구한 날 낮잠만 자는 개가 마냥 사랑스런 것도 그게 한국적이라 그렇다.
그 자연스러움을 추출해 표현해 내는 작업이 진정 한국적 미술이다.
이것은 도시와 시골이라는 공간적 구분의 문제가 아니다.
또 그렇다고 옛날과 오늘날이라는 시간 축으로 잴 것도 아니다.
이렇듯 시, 공간의 ‘구상적’ 한계를 뛰어넘어 표현할 수 있는 추상적 미가 한국성이다.
그러할 때 토속성이나 향토성이라는 국지적 용어를 진정 벗을 수 있다.
김덕용_결-꽃길_나무에 단청기법_64×135cm_2006
김덕용_여인-망_나무에 단청기법_100×84cm_2006
매체의 확장
작가에게 있어 매체가 늘 제약이다.
어느 작가이든 이러한 창작의 물적 조건을 거부하고 극복하고,
또 때로 적극 활용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자신의 도구에 통달하는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장인이어야 한다. 장인의 손에서 예술이 살아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요즈음의 미술이 그 손을 버리고 머리에 더 치중한다는 것을 누구나 느낀다.
그리고 여기에 포스트모던이니 현대성이니 하는 용어가 따라 붙었다.
물론 중요한 것은 개념이고 작가는 기술자가 아님을 부인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기발난 발상과 도발적 자유로움 못지않게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마침내 작품으로 드러나는 사고를 위한 시간의 축적과,
보려고 찾으려고 발로 걸어 다녔던 무수한 공간이다.
시간적 삭힘을 담기에는 화선지가 너무 예민해서 나무판으로 전환한 것은
용기 있는 확장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일은 작가가 장인으로서의 업보를 자초한 셈이다.
표면을 고르게 하기 위해 갈아 문지르고 또 정확히 배열한 후,
석채안료를 나무 면에 베어 스며들도록 단청채색을 하고 때로는 자개, 알 껍질,
그리고 금박 등을 옻으로 이겨 붙이는 작업은 고도의 기술이 겸비되어야 한다.
그 안에는 화가뿐 아니라 목수, 나전칠기 공예가, 단청장 등 여러 ‘업종’이 함께 따라 들어간다.
이런 각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는 화면과의 다층적인 의사소통에 몰두한다.
김덕용_결-가을 햇살_나무에 단청기법_78×55cm_2006
김덕용_결-오색문_나무에 단청기법_80×89cm_2006
공간을 그리다
이번 전시출품작의 소재는 집이다. 보다 넓게는 동네이다.
작품 하나하나를 표면적으로 보면 금방 와 닿지 않을 수 있지만 작품 전체를 한꺼번에 조망하면
작가의 전정한 관심은 공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이 있고 쉼이 있는 공간을 그린다.
작품이 다루는 내용은 국화향기 은근히 풍기고 낮잠 자던 개 움쩍거리는 소리,
까치소리 간간히 나는 그런 열린 공간인데, 이건 평면적인 시각이 아니다.
그의 작업은 시간성을 중심에 두고 왔지만, 점차 공간에 대한 것으로 심화된다.
곰곰이 작품을 살펴보면 작가가 염두에 두는 공간의 문제가 보인다.
작업은 한지 지면을 벗어나와 부조가 되더니, 그것도 답답하여
건축공간으로 확장되는 이미지인 셈이다.
그러니 실제로 나무판에 보는 것이 모두가 아니다.
모두는 커녕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전체의 전경(facade)인 셈이다.
그 전체는 공간이고 입체이다. 사실 2차원의 평면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니,
그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이고 있다.
김덕용의 작품에 걸맞는 공간은 민속촌일 수도 요즘 말끔하게 단장한 가회동 기와집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쨌든 한국적 건축공간이면 더 좋다. 진정 김덕용의 작품은 어디에 걸리느냐가 중요하다.
장소 특정적이다. 물론 이는 거의 모든 작품들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그의 경우는 작품의 내용 자체가 공간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더욱 절실하다.
그래서 이번 이화익 갤러리의 전시공간에서 어떻게 연출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공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기에 이번 전시는 ‘집-들러보다’라는 이야기로 설정되어 있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누군가의 집-마음의 집-을 놀러가 둘러보고
거기서 느끼는 감성을 그리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 둘러봄의 첫 시작은 동네어귀 절의 불상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찾아 들어가는
그 집안 대문에는 고운 여인이 반겨줍니다. 그 여인의 따뜻한 손길에 가슴 설레며
집으로 들어가면 안마당 장독대에 놓인 정한수가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의 애틋함을 담고 있지요.
안방에 들어가 보면 이불과 책, 그리고 단아한 정물들이 오랜 세월을 보듬고 있으며,
구석진 곳에서는 강아지가 제 역할도 못한 체 졸려하고 있습니다. 뒷 뜰을 둘러보니 가을국화가
누이의 얼굴을 연상케 하고 어린시절 까치 울음소리에 그날 기분이 좌우되던 뒷방 꼬마가
나의 옛 모습을 떠올립니다.”- 작가
혼과 얼을 그릴 수는 없다. 다만 예술작품은 그 자취를 떠내어 시각화할 수 있다.
마치 달팽이가 끈적끈적한 그 액을 뒤로 남기듯, 작품은 없어진 본체를 액으로 표현한다.
김덕용의 예술은 한국적 정서와 정신이 담긴 공간을 표현하려 한다.
그 언어는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그래서 작가 김덕용은 소박하게 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 내용은 견실하고 단단하며 또 깊숙하기만 하다. 소박은 하겠지만 야심은 당차다.
그 미적 야심은 회화도, 부조도 또 그렇다고 공예도 아닌 독창적 영역으로 발휘된다.
김덕용의 온기어린 한국성은 장르의 한계를 너머 구체화되고 있다. /전영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