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碧巖錄

「벽암록(碧嚴錄)」 中 - 제66칙 암두의 할(巖頭作力)

경호... 2011. 10. 9. 23:33

원오(圜悟)스님께서 풍주(灃州)의 협산(夾山) 영천선원(靈泉禪院)에 주석하시면서
설두 중현(雪竇重顯)스님의 송고(頌古)에 대하여 평창한 말씀의 핵심.


    벽암록 中

       제66칙 암두의 할(巖頭作力)

      [垂示]
      垂示云. 當機覿面, 提陷虎之機, 正按傍提, 布擒賊之略.
      明合暗合, 雙放雙收解弄死蛇. 還他作者.

      [수시]
      기틀에 당하여서는 범을 빠뜨리는 덫을 당장에 놓고
      도적을 사로잡는 작전을 이리저리 짠다.
      밝음에도 합하고 어둠에도 합하며,
      한꺼번에 놓아주기도 하고 한꺼번에 잡아들이기도 한다.
      죽은 뱀을 가지고 노는 것일랑 저들 작가 선지식에게 맡겨라.


      [본칙]
      擧. 巖頭問僧什麽處來. 僧云, 西京來. 頭云, 黃巢過後, 還收得劍麽. 僧云, 收得.
      巖頭引頸近前云, [囗+力]. 僧云, 師頭落也. 巖頭呵呵大笑.
      僧後到雪峰, 峰問, 什麽處來. 僧云, 巖頭來.
      峰云, 有何言句, 僧擧前話, 雪峰打三十棒趕出.

      거론하다.(擧.)
      암두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느냐?”(巖頭問僧什麽處來.)

      - 입을 열기 이전에 벌써 저버렸다. 해골을 뚫어버렸다.
        온 곳을 알려 한다면 어렵지 않지.

      “서경(西京)에서 왔습니다.”(僧云, 西京來.)
      - 예상했던 대로 좀도둑이었군.

      황소(黃巢)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느냐?”(頭云, 黃巢過後, 還收得劍麽.)
      - 평소에 좀도둑질은 하지 않았구나.
        모가지 떨어질까 두려워하지도 않고 이처럼 물어다대니 담력이 퍽이나 크구나.

      “주었습니다.”(僧云, 收得.)
      - 졌구나. 몸을 피할 줄을 몰랐구나.
        멍청한 놈들이 삼대 같고 좁쌀처럼 많다.

      암두스님이 목을 그의 앞으로 쑤욱 빼면서 “얏!”하고 소리치자,
      (巖頭引頸近前云, [囗+力].)

      - 반드시 적절한 기연을 알아야 한다. 범을 잡는 덫이군.
        이 무슨 수작인가?

      스님은 말하였다.
      “스님의 머리가 떨어져버렸습니다.”(僧云, 師頭落也.)

      - 송곳 끝이 날카로운 것만 알지, 끌의 끝이 네모난 줄은 모르는군.
      (네 주제에) 무슨 좋고 싫은 것을 따지는가! 한 수 두었다.

      암두스님이 껄껄대고 크게 웃었다.(巖頭呵呵大笑.)
      - 온 천하의 납승이라도 (암두스님) 어찌할 수 없다.
        천하 사람은 속일지 몰라도, 이 늙은이의 머리가 떨어진 곳은 못 찾는다.

      스님이 그 뒤 설봉(雪峰)스님에게 이르자, (僧後到雪峰,)
      - 여전히 어리석구나.
        이 스님이 늘 완전히 지기만 하는구나.

      설봉스님이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느냐?”(峰問, 什麽處來.)

      -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지. 반드시 시험해보아야 한다.

      “암두에서 왔습니다.”(僧云, 巖頭來.)
      - 예상했던 대로 지고 말았네.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峰云, 有何言句,)
      - 이야기를 해도 방망이 맞는 것을 면치 못하리라.

      스님이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僧擧前話,)
      - 곧바로 쫓아냈어야 했다.

      설봉스님이 서른 방망이를 쳐서 쫒아 내버렸다.(雪峰打三十棒趕出.)
      - 비록 (속발하는) 못을 끊고 쇠를 자르기는 했으나
        무엇 때문에 서른 방망이만 쳤느냐?
        주장자가 아직도 부러지지 않았다.
        이는 아직 본분 소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3천 방망이, 저녁에 8백 방망이를 쳐야 하기 때문이다.
        동기동창이 아니라면 어떻게 또렷한 뜻을 분별하랴.
        이와 같긴 하지만 말해보라, 설봉스님과 암두스님의 귀결점은 어디에 있는가를.

      [평창]
      바랑을 걸머쥐고 풀을 헤치며 바람을 맞으면서 행각할 때는
      반드시 안목을 갖춰야만 된다.
      이 스님은 안목이 (민첩하기가) 유성과 같았으나
      암두스님에게 시험을 당하여 한 꿰미에 뚫려버렸다.
      당시에 제대로 된 놈이었다면, 때로는 죽이기도 하고 때로는 살리기도 하면서
      (종사가) 말해주면 바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변변치 못하여 대뜸 “주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행각을 한다면
      염라대왕이 그대에게 행각 중에 얻어먹었던 밥값을 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짚신을 떨어뜨리면서 설봉스님에게 이르렀는가?
      당시 조금이라도 안목이 있어 대뜸 일어나 갔었더라면
      이 어찌 통쾌하지 않았겠느냐?
      이런 인연(암두스님이 웃는 것)은 깐깐하여 어렵다.
      ‘이 일’은 득실이 없다고는 하나
      여기에 이르러서는 또한 안목을 갖춰 간택할 필요가 있다.

      용아(龍牙)스님이 행각할 때 의심을 일으켜 덕산(德山)스님에게 물었다.
      “학인이 막야(鏌鎁) 보검을 들고서
      스님의 머리를 베려고 할 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덕산스님이 목을 쑥 빼며 앞으로 다가서며 “얏!”하고 소리 지르자,
      용아스님은 말하였다.
      “스님의 머리는 떨어졌습니다.”
      덕산스님의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용아스님이 그 뒤 이일을 동산(洞山)스님에게 얘기하자
      동산스님은 말하였다.
      “덕산이 당시에 무어라고 말하던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가 말이 없었던 것은 그만두고
      떨어진 덕산스님의 머리를 나에게 가져와보게.”
      용아스님은 이 말에 완전히 깨닫고 마침내 향을 사르면서
      멀리 덕산스님을 바라보고 절을 올리며 참회하였다.
      어느 스님이 덕산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이 일을 전하자 덕산스님은 말하였다.
      “동산 늙은이가 좋고 나쁜 것도 구별할 줄 모르는군.
      이놈이 죽은 지 한참 지났는데 구해준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 공안을 살펴보면 용아스님의 경우와 매한가지이다.
      덕산스님이 방장실로 되돌아가 버렸던 것은
      곧 어둠 가운데서 가장 현묘한 것이었다.
      암두스님이 크게 웃었는데, 그의 웃음 속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누구나 이를 알 수 있다면 천하를 누빌 것이다.
      스님이 그 당시 알 수만 있었다면
      천고 이후에도 계속되는 꾸지람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암두스님의 문하에서 이미 한바탕 틀려버렸다.

      이를 살펴보면 설봉스님은
      암두스님과 동참(모두 덕산스님의 제자)이기에 곧 귀결점을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 말해주지 않고 서른 방망이를 두들겨서 절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이는 전무후무의 경지라 할 만하다.
      이는 작가 납승의 면목을 나타내어 사람을 지도하는 솜씨이다.
      그에게  이렇게 해주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스스로가 깨닫겠는가?
      본분종사는 사람을 지도하되,
      어느 때는 꼼짝도 못하게 가두어놓기도 하고
      어느 때는 놓아주어 어쩔 줄 모르게 만들어 깨닫도록 해주었다.

      저토록 대단하신 암두·설봉 스님은
      거꾸로 밥통 같은 선객에게 감파를 당하였다.
      암두스님이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느냐?”고 하였는데,
      여러분은 말해보라,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해야 그의 웃음을 면할 수 있으며,
      또한 설봉스님의 방망이에 쫓겨남을 면할 수 있을까?
      이 깐깐한 화두를 몸소 깨닫지 못한다면
      설령 입으로 통쾌하고 날카롭게 말하여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른다 하여도
      투철하게 생사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산승은 평소에 사람들에게 이 기관(機關)이 전변하는 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만약 머뭇머뭇 헤아린다면 멀고도 먼 이야기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투자(投子)스님이 연평(延平)스님에게 물었던 것을,
      투자스님이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느냐?”고 묻자,
      스님이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투자스님은 “30년 동안 마부 노릇을 하였지만
      오늘 도리어 나귀한테 들이받혔구나”라고 말했다.

      살펴보면 이 스님은 참으로 작가였다.
      “주었다”고 말하지도 않고 “줍지 못했다”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서울[西京]의 스님네와는 저 바다 건너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진여(眞如)스님은 이를 염(拈)하여 말하였다.
      “옛사람은 하나(투자스님)는 우두머리가 되고 하나(이 스님)는 꼴찌가 되었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黃巢過後曾收劍, 大笑還應作者知. 三十山藤且輕恕, 得便宜是落便宜.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다는데(黃巢過後曾收劍,)

      -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라고,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는 다만 주석으로 만들어진 (물렁한) 칼 한 자루일 뿐이다.

      크게 웃는 웃음은 작가이어야 알 수 있다.(大笑還應作者知.)
      - 한 자식만이 몸소 얻었군. 과연 몇 사람이 있을는지?
        그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서른 방망이도 또한 가볍게 용서해줌이니(三十山藤且輕恕,)
      - 같은 가지에서 나고 같은 가지에서 죽는다.
        아침엔 3천, 저녁엔 8백 방망이다.
        동쪽집 사람이 죽자 서쪽집 사람이 조문을 한다.
        구제하여 살려주었다.

      이익을 본 것 같으니 결국 손해를 본 것이로다.(得便宜是落便宜.)
      - 죄상에 의거하여 판결하였다.
        당초에 조심하지 않았던 게 후회스럽다.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평창]
      “황소가 지난 뒤에 칼을 주었다는데,
      크게 웃는 웃음은 작가이어야 알 수 있다”는 것은
      설두스님은 그 스님과 암두스님이 큰 소리로 웃었던 곳을 노래한 것이나,
      이는 천하 사람이 더듬고 찾아도 찾을 수 없다.
      말해보라, 그는 무엇 때문에 웃었는가를.
      모름지기 이는 작가이어야 알 것이다.
      이 웃음 속에는 권(權)과 실(實)이 있으며, 조(照)와 용(用)이 있고,
      죽임[殺]과 살림[活]이 있다.

      “서른 방망이도 또한 가볍게 용서해줌이니”라는 것은,
      스님이 그 뒤 설봉스님에게 이르러 여전히 거칠었으므로
      설봉스님이 법령에 따라 서른 방망이를 친 후 쫓아내버린 것을 노래한 것이다.
      말해보라, 무엇 때문에 이처럼 했는가를.
      온갖 망정을 다하여 이 말을 이해하려고 하는냐?
      이익을 본 것 같으나 실은 손해를 봄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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