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碧巖錄

「벽암록(碧嚴錄)」 中 - 제52칙 조주의 돌다리(趙州石橋)

경호... 2011. 10. 5. 03:19

원오(圜悟)스님께서 풍주(灃州)의 협산(夾山) 영천선원(靈泉禪院)에 주석하시면서
설두 중현(雪竇重顯)스님의 송고(頌古)에 대하여 평창한 말씀의 핵심.


    벽암록 中

       제52칙 조주의 돌다리(趙州石橋)

      [수시]

      [본칙]
      擧. 僧問趙州, 久響趙州石橋, 到來只見略彴. 州云, 汝只見略彴, 且不見石橋.
      僧云, 如何是石橋. 州云, 度驢度馬.

      거론하다.(擧.)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조주스님 돌다리의 소문을 들은 지가 오래인데 막상 와보니 외나무다리[略彴]뿐이군요.”
      (僧問趙州, 久響趙州石橋, 到來只見略彴.)

      - 그래도 호랑이 수염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었군.
        이 또한 납승의 본분 일이다.

      “그대는 외나무다리만 보았을 뿐, 돌다리는 보질 못했군.”(州云, 汝只見略彴, 且不見石橋.)
      - 노련하게도 틈을 찌르네.
        이 늙은이가 (지도해주느라고) 몸을 다 바쳐버리는구나.

      “어떤 것이 돌다리입니까?”(僧云, 如何是石橋.)
      - 낚시에 걸렸군. 과연 예상했던 대로군.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州云, 度驢度馬.)
      - 일망타진해버렸구나.
        온 누리 사람들이 숨도 내쉬지 못하고 마는군.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살지 못한다.

      [평창]
      조주(지금의 河北省) 땅에는 돌다리가 있었는데 이는 이응(李膺)이 만든 것이라 하며
      지금까지도 천하에 유명하다.
      약작(略彴)이란 외나무다리를 말한다.
      이 스님은 조주스님의 체통을 깎아내리려는 의도에서 물었다.
      “조주 땅의 돌다리의 소문을 들은 지가 오래인데, 막상 와보니 외나무다리뿐이군요.”
      “그대는 외나무다리를 보았을 뿐 돌다리는 보질 못하였군.”
      그 스님의 물음은 그저 평소에 하던 이야기였지만,
      조주스님이 이를 가지고 그를 낚자 스님은 과연 낚시에 걸려들었다.

      그의 질문에 이어서 대뜸 물었다.
      “어떤 것이 돌다리입니까?”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
      참으로 말 가운데 몸을 벗어날 곳이 있다 하겠다.
      조주스님이 몽둥이질로 하거나 덕산스님이 소리를 질렀던 것과는 달리
      말로써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였다.
      이 공안을 살펴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기봉(機鋒)을 겨루는 듯하다.
      그렇지만 접근하기가 몹시 어렵다.

      하루는 수좌와 함께 돌다리를 구경하다가 수좌에게 물었다.
      “누가 만들었는가?”
      “이응이 만들었습니다.”
      “만들 때 어디부터 손을 댔는가?”
      수좌가 말이 없자 조주스님은 말하였다.
      “평소에는 ‘돌다리 돌다리’ 잘도 말하면서도 물으니 손을 댄 곳도 모르는구나.”

      또 하루는 조주스님이 땅을 쓸고 있는데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선지식이신데 어떻게 해서 티끌이 있으십니까?”
      “바깥에서 온 것이다.”
      그러자 다시 물었다.
      “청정한 가람에 어떻게 해서 티끌이 있습니까?”
      “여기 티끌 한 점(질문하는 스님이) 또 있구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저 담 너머에 있다.”
      “이런 길을 묻지 않고 대도(大道)를 물었습니다.”
      “큰 길은 장안(長安)으로 뚫려 있지.”
      조주스님은 이러한 기봉(機鋒 : 상대를 일깨우는 말)만을 쓰는 경향이 있다.
      그는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지도하되,
      칼날을 상하거나 손을 다치지 않았다.
      반드시 고준(孤峻)하여 이상과 같이 기봉을 매우 정교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孤危不立道方高, 入海還須釣巨鼇. 堪笑同時灌溪老, 解云劈箭亦徒勞.

      고고하게 위세를 부리지 않지만 도는 드높나니,(孤危不立道方高,)

      - 모름지기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될 것이다.
        그 말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본분납자를 지도하는 것일랑은 조주스님에게 맡겨라.

      바다에 들어가면 반드시 큰 자라를 낚아야지.(入海還須釣巨鼇.)
      - 요새가 되는 나루터에 딱 버티고 있으니 범부도 성인도 왕래하지 못한다.
        새우나 소라는 물을게 못 되지.
        대장부는 (오직 조주 한 명일 뿐) 두서넛 있을 수 없지.

      우습다, 같은 시대의 관계(灌溪 : ?~895)스님이여!(堪笑同時灌溪老,)
      - 또 이런 사람이 있어 이처럼 찾아와, 이 같은 기관을 사용하는 솜씨가 있었구나.

      쏜살같은 급류라고 말할 줄은 알았지만 부질없는 헛수고였네.(解云劈箭亦徒勞.)
      - 조주스님에 비하면 아직도 반 정도에 불과하다.
        비슷하기는 해도 옳지는 않다.

      [평창]
      “고고하게 위세를 부리지 않지만 도는 드높다.”는 것은
      설두스님이 평소에 사람을 지도할 때
      현묘(玄妙)함과 고고함을 내세우지 않았던 조주스님을 노래한 것이다.
      이는 총림에서 흔히 말하는
      “허공을 타파하고 수미산을 쳐부수며, 바다 밑에 티끌이 일고
      수미산에 파도가 쳐야 조사의 도에 걸맞다“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설두스님은 “고고하게 위세를 부리지 않지만 도는 드높다”고 말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만 길 벼랑에 서서 불법의 기특한 영험을 나타내는 것이
      비록 고고하고 높다고 하겠지만,
      (조주스님은) 고고함을 세우지 않아도 평상시 자연스럽게
      또굴또굴 매끈하게 수행자를 제접한다.
      위세를 부리지 않아도 저절로 위엄스레 되고 높이지 않아도 저절로 높아지며,
      상대방과의 주고받는 말[機]속에서 고고함이 우러나와 현묘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바다에 들어가면 큰 자라를 낚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안목을 갖춘 종사(조주스님)께서는 무심히 말을 한마디 하거나
      한 기틀을 써서, 새우나 소라는 낚지 않고 대뜸 큰 자라를 낚아 올리니
      참으로 작가답다.
      이 한구절로써 앞의 공안을 밝혀준 것이다.
      “우습다, 같은 시대의 관계스님이여!”라고 하였는데 듣지 못하였는가?

      어떤 스님이 관계스님에게 물었다.
      “관계스님의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막상 와 보니
      삼[麻]이나 축일 정도의 작은 웅덩이로군.”
      “그대는 삼 축일 정도의 작은 웅덩이만 보았지, 관계는 보질 못했네.”
      “어떤 것이 관계입니까?”
      “쏜살같은 급류이지.”
      또 어떤 스님이 황룡스님에게 물었다.
      “황룡스님의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막상 와 보니 능구렁이[赤斑蛇]만 보이는군요.”
      “그대는 능구렁이만 보았지 황룡은 아직 보질 못했군.”
      “어떤 것이 황룡입니까?”
      “굽이굽이 서려 있지.”
      “갑자기 금시조(金翅鳥 : 용을 잡아먹는 새)를 만났을 때는 어떻습니까?”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겠지.”
      “그렇다면 그 금시조를 만나면 먹히겠군요.”
      “그대의 공양에 감사드리오.”

      이상의 얘기는 모두가 고고한 경지를 세운 것이니 옳기는 옳다하겠지만
      너무나 힘(인위적 조작)을 쓴 것이므로
      조주스님이 평상시 했던 것과는 같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쏜살같은 급류라 말할 줄은 알았지만 부질없는 헛수고였다.“고 말한 것이다.
      관계스님과 황룡스님과의 경우는 그만두더라도
      조주스님이 말한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넌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려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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