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碧巖錄

「벽암록(碧嚴錄)」 上 - 제 1칙 달마불식(達摩不識)

경호... 2011. 9. 15. 01:52

원오(圜悟)스님께서 풍주(灃州)의 협산(夾山) 영천선원(靈泉禪院)에 주석하시면서
설두 중현(雪竇重顯)스님의 송고(頌古)에 대하여 평창한 말씀의 핵심.


벽암록 上

   제 1칙 달마불식(達摩不識)

    [垂示]
    隔山見煙,早知是火. 隔牆見角,便知是牛.
    擧一明三.目機銖兩,是衲僧家尋常茶飯.
    至於截斷衆流,東涌西沒,逆順縱橫,與奪自在.
    正當恁麽時,且道,是什麽人行履處.看取雪竇葛藤.

    [수시]
    산 너머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불이 난 줄을 알고,
    담장 밖에 뾰족한 뿔이 보이면 소인 줄을 알 수 있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나머지 셋을 알고 상대의 수행이 깊은지 얕은지를 한 눈에 척 아는 것이야
    납승(衲僧)의 살림살이로서는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것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다.
    알음알이[衆流]를 끊어버리고 동쪽에서 솟았다가 서쪽으로 잠기기도 하고,
    종횡 무진하게 상대의 근기에 맞춰 주기도 하고 거슬리기도 하며,
    주고 뺏음을 자유자재하게 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때는 어떠한 경지인지 말해보라.
    이러한 경지는 어떤 사람이 행동하는 경계인가? 
    설두스님의 이야기(葛藤)를 살펴보자.


    [본칙]
    擧. 梁武帝, 問達磨大師.
    如何是聖諦第一義 磨云, 廓然無聖.
    帝曰,對朕者誰. 磨云,不識. 帝不契. 達磨遂渡江至魏.
    帝後擧問志公 志公云,陛下,還識此人否 帝云,不識 志公云,此是觀音大士.傳佛心印.
    闔國人去,佗亦不回

    거론하다(擧).
    양무제(梁武帝)가 달마스님에게 물었다.(梁武帝, 問達磨大師.)

    - 이런 멍청한 놈. (說這不喞漢)

    “무엇이 근본이 되는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如何是聖諦第一義)
    - 이 무슨 나귀를 얽어매는 말뚝같은 소리를 하나?(是甚繫驢橛)

    달마가 대답했다.
    “텅 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磨云, 廓然無聖.)

    - 꽤 기특한 줄 알았더니만, 화살이 저 멀리 신라 땅으로 날아가 버렸구나.
      매우 명백하다. (將謂多少奇特,箭過新羅.可殺明白.)

    양무제가 말했다.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십니까?”(帝曰,對朕者誰.)

    - 얼굴에 가득한 부끄러움을 가누며 애써 정신을 차렸구나.
      과연 찾질 못하는구나. (滿面慚惶,强惺惺,果然摸索不着)

    달마대사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磨云,不識.)

    - 쯧쯧! 거듭해봤자 반푼 값어치도 되질 않는구나.(咄, 再來不直半文錢)

    무제가 이를 깨닫지 못했다.(帝不契)
    - 애석하다. 아직 멀었군.(可惜許,却較些子.)

    달마스님은 마침내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에 이르렀다.(達磨遂渡江至魏.)
    - 이 들여우야. 한바탕 부끄러움을 면치 못했구나.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군. (這野狐精,不免一場. 從西東過,從東西過)

    무제는 그 후 이 일을 지공(公)에게 질문 했다.(帝後擧問志公)
    - 가난한 사람이 해묵은 빚을 근심하는구나.
      제삼자가 보면 빤히 보이지.(貧兒思舊債,傍人有眼)

    지공스님이 말하였다. “폐하! 이 사람을 아십니까? (志公云,陛下,還識此人否)
    - 지공스님까지도 함께 나라 밖으로 내쫓아야 옳았을걸.
      좋게 30방망이는 쳐야겠다. 달마가 왔구나. (和志公趕出國始得,好與三十棒.達磨來也.)

    무제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帝云,不識)
    - 도리어 무제가 달마의 공안을 들었구나.(却是武帝承當得達磨公案.)

    지공이 말했다.
    “이는 관음대사이시며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는 분이십니다.”
                                      (志公云,此是觀音大士.傳佛心印.)

    - 멋대로 설명하네. 팔이란 바깥으로 굽지 않는 법.(胡亂指注, 臂膊不向外曲.)

    무제는 후회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맞이하려 하자.(帝悔,遂遣使去請)
    - 결코 붙잡지 못할 것.
      조금 전에도 ‘멍청한 놈’이라 말했었건만.(果然把不住.向道不喞)

    지공스님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려 하지 마십시오.(志公云,莫道陛下發使去取)

    - 동쪽 집사람이 죽으니 서쪽 이웃 사람이 조문하는 꼴이군.
      한꺼번에 나라 밖으로 쫓아냈어야 좋았으리라.(東家人死,西家人助哀.也好一時趕出國.)

    온 나라 사람이 부르러 가더라도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闔國人去,佗亦不回)
    - 지공스님 또한 30방망이를 쳐야 한다.
      발아래에서 큰 광명이 방출하는 그 사실을 모르는군! (志公也好與三十棒.不知脚跟下放大光明)

    [평창]
    달마스님은 멀리서 이 나라에 대승(大乘)의 근기(根器)가 있음을 보시고
    마침내 멀리 바다를 건너와 심인(心印)을 홑으로 전하여 혼미한 길을 열어주셨는데,
    문자를 운운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였다.
    만일 이처럼 이해한다면 바로 자유로운 경지를 얻어
    일체의 언어에 좌우되지 않고 (본성이) 그대로 타나나리라.
    그래야만 뒤이어 무제(武帝)와 나눈 대화와,
    이조(二祖)스님의 안심처(安心處)를 자연히 알아차리리라.

    비교하고 헤아리는 정식(情識)의 티끌을 단칼에 베어 버려야만 쇄쇄낙락 하리니,
    이에 다시 무슨 시비와 득실을 분별할 필요가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기는 하지만 이를 몇 사람이나 할 수 있을는지…….

    무제가 일찍이 가사를 입고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몸소 강설하자
    감응하여 하늘 꽃이 수북히 떨어지고 땅이 황금으로 변하였다.
    도교를 물리치고 천하에 칙령을 내려
    사찰을 일으키고 승려에게 도첩을 내려, 불법을 몸소 실천하도록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불심 있는 임금〔佛心天子〕이라고 불렀다.
    달마스님이 처음 무제를 알현하자 무제가 물었다.
    “짐은 사찰을 일으키고 스님들에게 도첩을 내렸는데,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공덕이 없습니다.”

    바로 이는 더러운 물을 느닷없이 머리 위에 끼얹는 꼴이다.
    여러분들이 만일 “공덕이 없다”는 말을 깨쳤다면
    그대에게 달마스님을 친견했노라고 인정해주겠다.
    말해보라.
    사찰을 일으키고 스님들에게 도첩을 주었는데도
    무엇 때문에 전혀 공덕이 없다고 했겠는가?
    이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무제는 누약(婁約)법사(양나라의 국사). 혜약(慧約 452--535)·부대사(傅大士)·
    소명(昭明)태자와 함께 진(眞)·속(俗) 이제(二諦)를 의논하였다.
    교학의 말을 의거해 보면
    ‘진제(眞諦)란 있지 않음〔非有〕을 밝힌 것이고
    속제(俗諦)는 없지 않음〔非無〕을 밝힌 것이니,
    진·속 이제가 둘이 아님이 근본이 되는 성스런 진리라고 한다.
    이는 교학의 가장 궁극의 경지이다.
    무제는 바로 이 궁극의 경지를 들추어 달마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가장 성스럽고 으뜸가는 진리입니까?”
    이에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텅 비어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천하의 납승들은 이 질문에 걸려들어 벗어나지 못하지만
    달마스님은 그를 위해서 단칼에 베어 주었는데도,
    요즈음 사람들은 이를 전혀 잘못 이해하고 도리어 분별망상으로 눈알을 부라리면서
    “텅 비어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고들 말하지만, 좋아하시네.
    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의 은사이신 오조(五祖 : ?~1104)스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텅 비어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말씀을 꿰뚫어 아는 사람이 있다면
    (본래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 편안히 쉬리라(歸家穩坐).
    똑같이 언어문자를 사용하면서도 무제를 위해 무명의 칠통을 깨뜨려주었으니,
    그중 달마스님은 그래도 훌륭하시구나”라 했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한 구절을 깨치면 일천 구절, 일만 구절을 단박에 깨치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면 자연히 꼼짝달싹 못하게 하여 콱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證道歌)를
    “뼈가 가루 되고 몸이 부서져도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나니
    한 구절 분명히 깨달으면 백억 법문을 뛰어넘는다(粉骨碎身未足酬,一句了然超百億)”
    고 하였다.

    달마스님이 정면으로 그를 내질렀을 때 상당히 허점을 내보였는데도
    무제는 이를 알지 못하고서, 도리어 인견(人絹)·아견(我見)에 사로잡혀
    다시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십니까”라고 물은 것인데,
    달마스님은 자비심이 너무나 많으셔서 또다시 그에게 “모르겠다(不識)”고 말해주었다.
    무제는 곧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무엇이 핵심인지, 이것이 무슨 말인지를 몰랐다.
    이쯤 되면 문제가 있고 없고에 관련 없이 말조차 할 수 없다.

    백운 수단(白雲守端 : 1025~1072)스님이 송(頌)하였다. (五祖法演선사의 스승)

    화살을 쏠 때마다 으레 수리새를 명중시키지만, (廓然無聖이라고 직시한 것)
    다시 화살을 뽑아 들어서는 짐짓 빗겨 쏘는구나. (不識이라고 다시 말한 것)
    곧바로 소실봉 앞에 되돌아가 앉았으니
    양왕이시여, 다시 불러오라는 말은 하지 마오.

    다시 말하기를 “누가 불러오려는가?” 했다.
    무제가 이를 깨치지 못하니 (달마스님은) 살며시 나라를 떠나버린 것이다.
    이 늙은이는 그저 부끄럼만 당하고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에 이르렀다.
    당시 위나라 효명제(孝明帝)라는 임금이 있었는데,
    그는 북방인의 종족으로서 성은 척발(拓跋)씨였으며,
    후일에 중국 성으로 성을 바꾸었다.
    달마스님이 그 나라에 도착하자,
    (임금은 칙명을 내려 만나고자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달마스님은) 곧장 소림사를 찾아 9년간 면벽(面壁)하다가 이조(二祖)스님을 지도했다.
    그 지방 사람들은 그를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불렀다.

    양무제가 뒤에 지공스님에게 묻자,
    지공스님은 “폐하! 이 사람을 아십니까?”하니,
    무제는 “모른다”고 하였다.

    말해보라.
    이는 달마스님이 말했던 “모른다”는 말과 같은가, 다른가?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서
    “앞서 달마스님이 (모른다고 한 것은) 선(禪)으로 대답한 것이고,
    뒤에서 무제가 지공스님에게 대답한 것은,
    즉 ‘서로 아는 사이인가?’라는 말의 그 ‘아느냐’에 답한 것이다”라고 한다.
    하지만 좋아하시네, 전혀 관련이 없다.

    당시에 지공스님이 이렇게 물었더라면,
    말해보라 어떻게 말했어야 하는가?
    왜 한 방망이로 후려갈겨서 얼버무리지 못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무제가 자백하여 “모르겠습니다”하니,
    지공스님은 이런 기미(機微)를 보고서
    곧바로 이는 “관음대사이시며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어른이십니다”고 하였다.
    이에 무제는 후회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모셔오도록 하였으니,
    매우 멍청한 사람이다.
    그 당시 그가 “관음대사이시며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어른이십니다”는 말을 할 때
    그 놈을 나라 밖으로 내쫓아 버렸더라면 그래도 조금은 좋았을 터인데…….

    사람들의 전하는 말로는
    “지공스님은 천감(天) 13년(514)에 돌아가셨고,
    달마스님은 보통(普通) 원년(520)에야 중국에 왔으니, 7년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같은 시기에 서로 만났다고 말할 수 있으리요?
    이는 반드시 잘못 전해진 것이다”고들 한다.
    그러나 전기(傳記)에 실린 바에 따를 뿐,
    여기서는 그것이 사실이었는가는 따지지 않겠다.
    다만 그 요점만을 알면 된다.

    말해보라.
    달마스님이 관음인가, 지공스님이 관음인가?
    어느 쪽이 진정한 관음인가?
    관음일진대 무엇 때문에 둘만 있겠는가?
    어찌 둘 뿐이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당시 후위(後魏)의 광통율사(光統律師)와 보리 유지삼장(菩提流支三藏)이
    달마스님과 함께 논의하였는데,
    스님이 모습〔相〕을 배척하고 마음만을 가리켰다.
    편협하고 얽매인 지식을 지닌 그들이었기에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가지고서 여러 차례 독약으로 죽이려 했으니,
    그러기를 여섯째에 이르러서는 교화의 인연도 다하고 법을 전할 사람도 생겼기에
    마침내 더 피하려 않고 단정히 앉아 돌아가시니,
    웅이산(熊耳山) 정림사(定林寺)에 장례를 모셨다.

    후위(後魏)의 송운(宋雲)이 사신으로 갔다가
    총령(葱嶺 : 파미르고원)에서 손에 한쪽 신만을 들고 가시는 스님을 만났다.
    무제는 스님을 추모하여 스스로 비문을 지었다.

    아! 눈으로 보고서도 알아보질 못하였고,
    만나고서도 알아모시지를 못했구나.
    마주치고도 보지 못했으니, (遇之不遇라는 말이 唐本에는 없다.)
    예나 제나 원망스럽고 한스럽다.

    다시 찬탄을 하였다.

    마음이 있으면 영겁토록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심해야 찰나에 묘각(妙覺)의 경지에 오르리라.

    말해보라.
    달마스님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서로 지나쳤는데도 모르다니…….(當面蹉過也不知)


    [송]
    聖諦廓然 何當辨的. 對朕者誰? 還云不識.
    因茲暗渡江 豈免生荊棘. 闔國人追不再來! 千古萬古空相憶.
    休相憶 淸風匝地有何極. 師顧視左右云 這裏還有祖師麽.
    自云 有 喚來與老僧洗脚.

    성스런 진리란 (본성이 없어) 공하니 (聖諦廓然)

    - 화살이 신라로 날아가 버렸군. 어헛! (箭過新羅,咦)

    언제라서야 핵심을 알아차릴까.(何當辨的)
    - 지나갔구나. 알아차리기가 뭐 어렵겠는가?(過也,有什麽難辨.)

    나를 마주한 그대는 누구시오?(對朕者誰)
    - 거듭 질문한들 반푼어치도 안 되는구나.
      또 그 짓거리냐! (再來不直半文錢.又恁麽去也)

    모른다고 하는군.(還云不識)
    - 서너 명이 모두 독화살에 맞았다.
      (원오스님이) 꾸짖었다.(三个四个中也.咄)

    그래서 남몰래 강을 건너시니,(因玆暗渡江)
    - 남의 콧구멍을 꿰지 못하더니 도리어 남에게 코를 뚫렸구나.
      아이고, 아이고! 참으로 형편없는 놈.(穿人鼻孔不得,却被別人穿.蒼天蒼天.好不大丈夫.)

    가시덤불이 돋아나는 것을 어찌 면하랴.(豈免生荊棘)
    - 발아래 벌써 깊숙하게 몇 발이나 우거졌다.(脚跟下已深數丈)

    온 나라 사람들이 뒤쫓아가도 다시 오지 않음이여!(闔國人追不再來)
    - 두 번 거듭된 공안이구나.
      뒤 쫓아가 무엇 하겠는가?
      어느 곳에 있는가?
      대장부의 기상은 어디 갔는가?(兩重公案.用追作麽.在什麽處.大丈夫志氣何在.)

    천고 만고에 부질없이 아쉬워하네.(千古萬古空想憶)
    - 손을 바꾸어가면서 가슴을 치고 허공을 바라보며 하소연하는구나.(換手搥胸,望空啓告)

    아쉬워하지 말아라. (休想憶)
    - 무슨 짓인고, 귀신의 소굴 속에서 살려 하다니.(道什麽,向鬼窟裏作活計)

    맑은 바람 온 누리에 가득하니 어찌 다함이 있으랴.(淸風匝地有何極)
    - 과연 예상했던 대로다.
      설두 같은 대단하신 스님도 풀 속에서 헤매는군.(果然,大小雪竇向草裏輥)

    설두스님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여기에 조사가 있느냐?”(師顧視左右云,這裏還有祖師麽.)

    - 그대는 자백을 번복하려고 하는가? 아직도 이 짓거리냐! (你待番款那.猶作這去就)

    스스로 대답하기를 “있다”하고서,(自云,有)
    - 헛수고 하는군.(塌薩阿勞) (塌薩(탑살) 낙심하여 기력을 잃어버린 모습)

    “(달마스님을) 데려다가 노승의 다리나 씻도록 해야겠다”하였다.(喚來與老僧洗脚.)
    - 다시 삼십 방망이를 내리쳐 쫓아낸다 해도 잘못될 것 없다.
      이런 짓하는 것을 보니 아직 멀었군.(更與三十棒趕出.也未爲分外.作這去就.猶較些子.)

    [평창]
    이 공안에 대한 설두스님의 송을 살펴보니,
    보검 태아(太阿; 전설상의 名劍)를 능란한 솜씨로 다루는 것 같다.
    허공을 향하여 이리저리 휘둘러도 조금도 칼날에 다치지 않는다.
    이러한 솜씨가 없었다면 칼을 들기만 해도 바로 칼끝에 닿아 손을 다쳤을 것이다.
    만일 안목이 있는 자라면 때로는 들기도 하고 휘두르기도 하며,
    때로는 칭찬하기도 하고 깍아 내리기도 하여,
    불과 네 구로써 이 한 칙의 공안을 처리하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대개로 송고는 둘러가는 길(繞路)을 제시하는 것처럼,
    직절(直截)적인 표현을 피하고 선을 설한 것이며,
    염고(拈古 評唱)은 선불교의 정신인 핵심(大網)을
    재판관이 조서(款)에 의해서 판결(案 )을 내리는 것처럼 설한 것이다.
    (대체로 송고(頌古)는 너즈러지게 선(禪)을 설명하고
    염고(拈古)는 자백서를 근거로 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설두스님은 한 번 난데없이 내질러 말하기를
    “성스런 진리〔聖諦〕공하구나, 언제라서야 핵심을 알아차릴까?”하였으니,
    설두스님이 그 첫 구절에 이 한 구절을 붙인 것은 참으로 좋다.

    말해보라, 결국 어떻게 핵심을 알아차리겠는가를.
    설령 무쇠 눈과 구리 눈동자를 갖춘 사람이라도 찾지 못할진대,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마치 마찰할 때 튀기는 돌의 불꽃, 번뜩이는 번갯불과도 같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헤아림〔心機〕과 뜻과 생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입을 연들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계교하는 마음이 생길 때 새 잡는 매는 멀리 신라를 지나 버리리라.
    그래서 설두스님은
    “너희 천하 납승들은 언제 핵심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라고 했던 것이다.

    “나를 마주한 그대는 누구인가?”라는 구절에, ‘모른다’는 설명을 붙인 것은
    설두스님이 노파심이 간절하여 거듭거듭 가르침을 보인 곳이다.

    말해보라.
    ‘공하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깨친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깨치지 못한 사람의 경우라면 결국 양쪽에 모두가 얽매일 것이다.
    세상에서 흔히들 “설두가 (공안을) 거듭 되풀이했다”하지만,
    이는 네 구절로 공안을 모두 노래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뒤이어 또다시 자비의 마음 때문에 사건의 전말을 노래하여,
    “그래서 남몰래 강을 건너시니 가시덤불이 돋아나는 것을 어찌 면하랴”하였다.

    달마스님이 본디 이 나라에 온 까닭은
    사람들의 집착과 속박을 풀어 제거해주며,
    속박하는 못과 말뚝을 뽑아주며, 가시덤불을 없애주려 함이었는데,
    도리어 무엇 때문에 “가시덤불이 돋아난다”고 말했을까?
    이는 그 당시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발아래에도 덤불이 무성하여 여러 길이나 된다.

    “온 나라 사람들이 뒤 쫓아가도 다시 오지 않음이여,
    천고만고에 부질없이 아쉬워하네”하였으니,
    참으로 대장부답지 못하구나!

    말해보라, 달마스님이 어느 곳에 있는가?
    달마스님을 이해했다면 설두스님이 학인들에게 지도한 본뜻을 알게 될 것이다.
    설두스님은 사람들이 정견(情見)을 따를까 염려했던 까닭에
    문의 지도리를 휙 돌려 자기의 견해를 드러내 이르기를
    “아쉬워하지 말아라.
    맑은 바람 온 누리에 가득하니 어찌 다함이 있으랴”하였다.
    아쉬워하지 않는다면, 그대 발아래의 일(생사문제)은 또한 어쩌자는 것인가?

    설두스님은
    “지금 여기 맑은 바람이 온 누리에 가득하니 어찌 다함이 있으랴”라고 했다.
    설두스님은 천고만고의 일을 들어 우리의 면전을 향하여 던졌으니,
    그 당시에만 다함이 없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에 어찌 다함이 있었겠는가?

    그는 또한 사람들이 여기에 집착할까 염려스러워 거듭 방편을 써서
    큰 소리로 “여기에 달마스님이 있느냐?”하고, 스스로 “있다”고 답하였다.
    설두스님이 여기에 이르러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망울져 있다.
    또한 스스로 “불러다 노승의 다리나 씻기도록 하라”하였으니,
    사람(달마스님)의 체통(권위)을 몹시 깍아내리(깔아뭉개)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가 본령(本領)을 발휘하기 위한 것이었었다.

    말해보라, 설두스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었는가를.
    이쯤 되면 노새라 불러도 좋고, 망아지라 해도 좋고, 달마조사라 말해도 좋다.
    무어라 이름해야 할까?
    더러는 설두스님이 조사를 주물렀다고 말하지만,
    좋아하시네, 전혀 관계가 없다.

    말해보라, 과연 무엇인가?
    늙은 오랑캐(달마스님)가 불법을 알았다는 것은 인정하나
    늙은 오랑캐가 체득했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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