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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초기 불교역사.[중요자료]

경호... 2011. 9. 15. 00:52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 온 것은 삼국시대 입니다.

당시 불교는 단순한 종교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문화창달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불교가 본래 종합적인 문화를 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고구려, 백제, 신라에 전해진 것입니다. 

고구려에서 받아들인 불교문화는 주로 전진(前秦)을 비롯한 북방 중국의 불교문화였으며, 백제는 주로 동진(東晉)을 비롯한 남쪽 중국의 불교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신라는 처음엔 고구려로부터, 그 뒤에는 백제와 중국에서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신앙인 삼신(三神) 사상과 자연숭배 사상, 그리고 그러한 문화의 형태 속에서 생활해 오던 당시의 우리 겨레는 외래의 종교이며 새로운 사조를 동반한 불교문화를 포용해서 훌륭한 민족문화를 형성하였습니다.

 

◆ (1) 고구려의 불교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소수림왕 2년 (AD 372년)이었습니다.

당시 북부 중국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편에 불상과 경전을 전한 데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뒤 374년에는 승려 아도가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최초로 성문사와 이불란사 등을 세워 순도와 아도가 주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 보다 훨씬 앞서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양고승전"에 의하면 동진때의 고승지둔도림(314~366)이 고구려의 고승에게 글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평(A.D 67년) 연간에 전래된 중국의 불교가 과연 어떤 형태의 것이었고 또한 중국의 고유신앙과 어떻게 융합되어 발전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읍니다. 따라서 고구려에 전래된 초기 불교의 형태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있어야겠습니다. 다만 고구려에서는 처음부터 불교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급속하게 발전시켜 국가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초기부터 국왕과 왕실이 중심이 되어 받아들였으며, 18대 고국원왕은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는 칙령을 내렸으며 391 년, 19대 광개토왕은 평양에 아흡개의 절을 세우는 등(즉위 2년 392 년) 자못 불교 교화활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고승들이 구법과 전교활동을 위해 나라 밖에까지 나아가 활약하였던 것도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불교인들이 이웃 중국에 유학하여 구법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에는 그 곳의 불교인을 가르친 훌륭한 스님도 있었습니다.

또 고구려는 불교문화를 일본에 심어주고 이끌어 주었습니다. 물론 가장 먼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나라는 백제였지만 고구려도 많은 불교문화를 일본에 전하고 가르쳐주었습니다.

혜편같은 이는 선신니, 선장니, 혜선니등의 일본 최초의 세 비구니를 배출하였으며 혜자는 일본이 자랑하는 성덕태자의 스승이었습니다.

영양왕 때 일본에 간 담징은 법륭사 법당의 벽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혜량은 551 년 신라에 귀화하여 승통이 되어 신라불교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27 대 영류왕(618~642)때에 들어온 도교의 득세로 말미암아 고구려의 불교는 차츰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보덕같은 이는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국가사상이며 문화의 주축인 불교를 갑자기 핍박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여러번 경고했으나 보장왕은 듣질 않았습니다. 보다못한 보덕이 신라로 떠나자 (67 년) 다음해에 고구려는 정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불교를 바르게 신봉하고 불교문화를 일으켰던 광개토왕 때에는 그렇게 강성하였던 고구려 불교를 버린 보장왕때에 나라를 잃게 되었음을 볼 때 불교는 바로 고구려를 지탱하던 생명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2) 백제의 불교

백제는 바다를 사이에 둔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보다 12 년 뒤인 침류왕 원년(384 년)에 인도의 스님 마라난타 라는 스님이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 옴으로써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때 백제의 침류왕은 그를 크게 환영하고 궁중에 머물게 하며 공경하였다고 합니다. 백제는 바다를 통하여 인접한 중국의 문물에 적지않은 영향을 받아왔던 터였으므로 새로운 문화의 불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사전지식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듬해에는 한산에 절을 지어 마라난타를 머물게 했고 이곳에서 열 명의 제자가 배출되었습니다.

그후 26대 성왕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고 성왕 4 년(526 년)에는 고승 겸익이 인도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불교경전을 번역하였습니다.

그 중 "율부" 72권은 왕이 그 서문을 짓기도 했습니다.

성왕 23 년에는 장육 불상을 조성하였고 30 년에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하였습니다. 이것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최초이며 그 후 백제는 여러 면으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쳐 이른바 아스까 문화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29대 법왕 원년(559 년)에는 "살생을 금지하는 명"을 내려 민가에서 기르는 매 종류를 놓아주게하고, 고기잡고 사냥하는 것을 금했으며, 이듬해에는 도성인 부여에 왕흥사를 세웠습니다. 30대 무왕(600~641)때에는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거대한 탑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주서이역전" 에 백제에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백제의 불교가 대단히 성하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차차 형식위주의 사원건립과 엄격한 계율 위주의 사상이 백제불교를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 (3) 신라의 불교

고구려와 백제가 별다른 문제없이 불교를 받아들인 반면, 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대륙과의 소통이 적었던 신라는 백제보다 수십년 늦은 눌지왕 때에 비로소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완고하고 배타적인 각 부족 실권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순탄치 못했습니다.

법흥왕은 불교가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오게 하며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확신하고 즉위 때부터 국가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가 왕 14 년(527 년)에 불교 불자이며 젊은 신하 인 <이차돈>의 순교에 힘입어 비로소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차돈의 이적에 의해 공인된 신라불교는 이기적 신앙과  함께 미륵하생 신앙과 전륜성왕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법흥왕은 이때에 불교 흥법의 깃발을 들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관제를 정비하고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연호를 세우는 등 문물정비에 공헌하였습니다. 이것이 뒷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불교 신앙을 통해서 백성들이 선량한 민본주의 관념을 가질수 있고 신라의 문화가 향상 발전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법흥왕 때부터 시작된 신라불교가 완전히 정착한 것은 진흥왕  때 부터입니다.

진흥왕 5년에는 선왕때부터 짓기 시작한 흥륜사가 완성되었고 그 해 3월에는 뜻이 있는 자는 누구나 자유롭게 승려가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말년에 왕 자신도 출가하여 법운이라 했고 왕비도 영흥사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습니다. 왕은 또 불교이념으로 항 수양단체인 화랑도를 창설, 신라 청소년들이 자연스럽게 불교적인 윤리관을 터득하게 하는 등 국민정신의 함양을 위해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제 30 대 문무왕 때에는 삼국을 통일하고 태평성대를 이루게 되자 불교도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이로써 신라불교는 대승의 종파와 교학이 크게 일어났던 때를 전기, 그리고 실천활동으로서의 선불교, 특히 중국의 달마선이 성행한 때를 후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활발했던 전기의 신라불교가 차차 침체되자 이 무렵에 선불교가 중국에서 들어와 신라 선종 형성의 바탕이 되었고 후일 구산선문 형성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신라불교는 열반종,  율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의 다섯 종파로 나뉘어져 각기 그 교리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를 5교라고 합니다.

열반종은 무열왕때 보덕이, 율종은 선덕왕때 자장율사가, 화엄종은 문무왕때 원효와 신문왕때 의상이, 법상종은 경덕왕때 진표율사가 세웠으며 법상종은 시대와 종조를 알 수 없습니다.

한창 흥하던 신라불교가 신라말 혜공왕 이후로 국가가 혼란해지면서 침체되었으나 삼국통일후 중국에서 성행하던 선종이 들어오자 불교계는 다시 활발한 양상을 띄게 되었고 교학 위주였던 신라교단에 <"불립문자 * 직지인심 * 견성성불">이라는 교외별전의 선지가 풍미하게 되었습니다. 침체되어가던 불교계로서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고려초기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9개의 선문이 개창되었으며 이를 일컬어 9산선문이라고 합니다.

구산선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가지산문: 6 조 혜능의법통인 서당지장의 법을 전수해온 도의는 아직 대중의 근거가 성숙하지 않음을 보고 설악산에 들어가 40 여년을 나오지 않았고 그 손제자인 보조체증 선사가 장흥의 가지산 보림산에서 스승을 위하여 개산하였습니다.

★ 실상산문: 흥척국사가 지리산의 실상사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켜 개산하였습니다. 제자는 편운, 수철등이 있습니다.

★ 동리산문: 혜철국사가 도의국사와 같은 해에 중국에가서 역시 서당지장에게서 법을 받고 돌아와 곡성군 죽곡동의 동리산 태안사에서 개산조가 되었습니다.

성주산문: 무염국사가 중국에 가서 마곡보철화상의 회상에서 동방보살이라는 칭호를 받고 귀국하여 보령군 미산면의 성주산 성주사에서 개산하였습니다.

사굴산문: 구산선문 중 가장 왕성하였던 강릉군 구정면의 사굴산 굴산사에서 범일국사가 개산하였습니다.

★사자산문: 도윤국사가 영월군 수주면의 사자산 흥녕사에서 개산하였습니다.

개산조인 도윤국사가 중국 당나라의 선승인 남전보원 선사에게서 법을 잇게 되자 선사는 "우리 종의 법인이 동국으로 간다" 고 탄식하였다고 합니다.

★ 희양산문: 문경군 가은면의 희양산 봉암사에서 도헌국사가 개산하였습니다.

도헌국사는 중국에 간 일은 없고 4 조의법을 이은 혜은선사의 도를 이었으며 신도 심층의 청을 받아 봉암사를 창건하고 산문을 열었습니다.

★ 봉림산문: 현욱국사는 중국에서 돌아와 역대왕의 스승이 되었고 효공왕 때에 창원군 상남면의 봉림산에 봉림사를 창건하고 개산하였습니다.

★ 수미산문: 이엄존자는 당나라에서 돌아와 고려태조의 조칙을 받아 해주군 금산면의 수미산 광조사를 창건하고 구산선문중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수미산문을 개산하였습니다.

 

◆ (4) 고려의 불교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왕건이 신라 말기에 출현한 도선의 도참사상을 신봉하였습니다.

도참설은 불교의 선근공덕 사상에다 도교의 음양오행과 풍수지리설을 가미한 과도기적인 사상입니다. 왕은 도참사상을 신봉하면서도 불교신앙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송도에 10 개의 호국도량을 지었으며 서경에는 9 층 호국탑을 세우고 몸소 불교를 널리 펼 것을 발원하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특히 왕가에서 대를 이어 불교를 믿도록 하기 위하여 "훈요십조" 를 만들고 팔관회와 함께 연등회를 열도록하였습니다. 이러한 태조의 염원으로 고려불교의 성격과 그 방향이 개국초부터 굳혀졌습니다.

그러나 후일 불교신앙은 속신적 기복에 흘렀고 국민정신은 샤마니즘으로 전락되어 불교교단은 정신적 선도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958 년에 태조는 승려의 위계질서를 확립할 승과를 설치하였습니다. 이는 승려를 존경하는 반면에 그들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라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했던 구산선문은 고려에 와서 이엄의 수미산문 개산으로 마침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종의 영향으로 다른 종파의 교학은 그 빛을 잃은 듯했으나 화엄교학만은 그 세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왕자들의 출가가 빈번하였습니다. 특히 의천대각국사는 문종의 제 4 왕자로 11 세에 출가하여 송나라에 유학하고 천태학을 전수하여 귀국하였습니다. 그는 천태교관을 널리 강설하는 한편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국내외의 논저를 수집하여 "속장경"을 간행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선이 성행하였으나 천태교학이 들어온 중기 이후 재래 선종의 명맥은 부진하게 되나 선의 맥은 끊이지 않아 고려후기에는 선종 일색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지눌이 구산선문의 교리를 통합하여 우리나라 불교의 정통인 선종을 확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려시대의 불교에서 특기할 것은 역시 두 차례에 걸쳐 조판한 "고려대장경" 입니다.

첫번째는 제 8 대 현종 원년에 거란이 칩입하자 왕은 외적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할 것을 기원하여 대장경판의 조조를 시작하였습니다.

왜적이 물러간 뒤에도 약 40년간에 걸쳐 대장경을 완성하였습니다. 이것을 "고구려장경" 또는 "초조장경" 이라고 하며 총 1,106 부 5,048권입니다. 이것은 비단 거란의 침입을 막으려는 기원뿐 아니라 밖으로는 "요"의 무력에 대해 고려의 문화적 우위성을 과시하고 안으로는 국가의 관념적 지도능력을 다지려는 의도가 내포되었던 것입니다.

대장경판은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되어 호국의 상징인 동시에 신앙의 구심적 역활을 해왔으나 고종 19 년에 몽고군의 칩입으로 경주의 황룡사 9 층탑과 함께 불타고 말았습니다.

이때 고종은 피난지 강화도에서 부인사의 대장경이 타버렸다는 비보를 듣고국민의 단합과 부처님의 가피를 빌면서 다시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두번째 대장경판의 판각에 착수했습니다. 강화에 대장도감 본사를 두고 진주에 분사를 설치하여 총력을 기울여 16 년간에 걸쳐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총81,258 장이나 되는 판목에 양면으로 새겨 면수로는 162,516 면이며 경의 분량으로는 1,512 부 6,791 권(현재 해인사에 봉안)입니다. 이를 "고려대장경" 이라고 하며 흔히 "팔만대장경" 이라고 합니다. 이 대장경은 그 양의 풍부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한자의 오자도 없기로 유명합니다.

고려시대 불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연등회와 팔관회입니다.

연등회고려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월 보름에 등을 밝히고 음악과 가무 등으로 국가 민족의 안녕과 복을 비는 전국적 행사였습니다.

팔관회토속신앙과 융합된 일종의 추수 감사제이며 의식이 퍽 복잡하였습니다. 중경에서는 추수가 끝난 음력 11 월에, 서경에서는 10 월에 등불을 찬란히 밝히고 술과 다과를 준비하고 춤과 놀이를 베풀어 나라와 백성의 태평을 빌었습니다. 

특히 이때에 송, 왜, 여진, 탐라 등 외국의 사절단과 상인들이 와서 축하하고 이 자리에서 교역도 행하였다고 합니다.

 

◆ (5) 조선시대의 불교

조선시대 불교는 한마디로 억압과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개국 초 태조 이성계는 비록 개인적으로 불교를 신봉하고 불사도 많이 하였으나 건국 초기 조준, 정도전 등 유학자들이 중심이 된"배불사상" 의 강한시대적 조류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조선 500 년을 통하여 불교는 핍팍을 당하고 승려는 천대를 받는 법난이 계속되었으며 철저한 배불정책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이런 긴 법난을 겪으면서도 승려들은 아무런 반항의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초기에 몇 사람들의 움직임이 없지 않았으나 극히 짧은 동안이었고 매우 미미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중엽에 와서 오직 한 사람의 규탄자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현종 때의 백곡처능은 당시의 지나친 배불정책에 분개하여 장장 팔만여언의 상소문을 올리니 이것이 조선조 오백년의 불교 핍박에 맞선 단 한차례의 상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억불정책은 늦추어지지 않았고 승려들은 여전히 성 내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산중으로 내쫓기고 갖은 학대를 받으면서도 도성을 지킬 산성을 쌓았고 또 산성을 수비하는 일을 도맡았으며 관가와 유생들에게 종이와 기름, 신 등을 지어 바치는 등 여러가지 잡역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는 용감하게 나서서 목숨을 바쳐 구국에 앞장을 섰습니다.

일제의 고승으로서 임진왜란 당시에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으로 구국에 앞장섰던 "서산 청허"대사 이래 적지않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참선과 간경에 전력하는 종장들이 연이어 나와서 삭막하였던 불교계에 한때 새로운 기풍을 이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법난을 겪는 동안 교단은 태종 때에 11 종이 7 종으로 합쳐졌고 다시 선, 교 양종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이러한 종파의 폐합도 교단의 자의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종지도 종파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채 전승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조선불교가 그래도 한국불교의 전통을 전하여 지킨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삼국시대 이래로 면면이 내려온 호국사상과 고려시대 이후의 선교겸수의 영향이었다고 할것입니다.

또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사실은 그 기나긴 억불 가운데 그래도 백성들은 지극하게 불교를 믿어왔다는 점과 한때는 궁중내에 불당을 세우기도 했었으며 왕자, 공주, 옹주 중에 삭발 출가한 이도 적지않게 있어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겨레의 정신적 귀의처였던 불교의 뿌리가 그만큼 깊어섰다는 사실입니다.

 

◆ (6) 호국불교에 대하여

흔히 한국불교를 두고 호국불교라 합니다.

실제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는 늘 우리나라가 외침을 받아 국가와 겨레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난국 타개에 앞장서 왔습니다.

세속을 떠나 출세간간적인 이상을 추구하고 자비를 제일의로 삼는 불교가 창 칼을 들고 싸움터에 나서는 것은 얼핏 생각하기에 이율배반적인 것 같으나 보다 큰 안목으로 볼 때 불교라 해서 나라와 겨레에 우선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라의 원광대사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해치는 일은 승려로서 취할 바가 아니다. 나라의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다."

는 생각으로 수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글 "걸사표" 을 지었고 자장율사는 불교의 차원을 넘어서 호국사찰인 황룡사에 9 층탑을 세우고 삼국의 통일을 기원했습니다.

의상스님은 당나라에서 공부하다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친 당나라가 신라까지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알리러 급히 귀국한 일도 있습니다.

통일신라 때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절을 토함산 일대에 세우고 나라와 조상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부처님 전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절들은 군사적으로는 동해의 초소역활도 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으로 갖가지 불교행사를 행하여 나라의 발전과 안녕을 불교에 의지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팔관회, 백고좌법회 등의 각종 법회와 대장경 판각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사는 호국사상을 국가적으로 수용하여 국론의 통일과 국민의 대화합을 꾀하여 국가발전의 원동력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스님들은 호국불교 자체가 신앙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승유억불정책으로 일관하여 불교는 정치적으로 갖은 학대와 멸시를 받았으나 나라와 겨레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은 가장 두드러졌던 때였습니다. 임진왜란때 죽음을 무릅쓰고 구국의 선봉에 선 휴정, 용규, 유정스님이 그 좋은 예입니다. 또 일제시대에는 만해 한용운스님 등 많은 스님이 호국사상으로 일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에서는 아침, 저녁 예불때마다 국태민안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합니다.

이러한 호국사상과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 경에 의하면 호국이란, 내호와 외호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내호란 우리 마음속의 번뇌를 제거하여 이 국토를 살기좋은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반야바라밀을 수호하는 것이고 외호는 현실적 국가사회의 전쟁, 내란, 질병, 등의 모든 재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살은 출세간의 진리인 제혜와 세속의 번뇌가 둘이 아님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불보살의 원력과 공덕에 의하여 국가를 보호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한국의 불교가 호국불교적이어서 왕권과 결탁, 이로 인하여 대중불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견해는 잘못된것입니다.

또한 불교는 초월 주의적이어서 현실을 외면하는 종교라고 하는 견해도 호국불교의 진정한 의미를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자기완성에 힘쓰고 공간적으로는 청정한 불국토가 되게 하려는 신념으로 불교의 이상적 국가이념인 정법주의, 자비주의, 평등주의의 구현에 힘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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