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산책]/가곡

끝없는 사념

경호... 2008. 8. 22. 23:54

 

끝없는 사념(思念)

 



김병수 시, Tenor 신영조

찬란히 빛나는 해를봐도  어스럼 달빛에 밤이 되어도
한없이 그리운 그대 생각 끝없이 보고픈 그 모습
이젠 잊어버리려고 눈을 감아버렸지만
날이 갈수록 짙어가는 그대생각 그것뿐
하염없이 떠오르는것은 그대의 모습 그 모습 뿐
그 모습 아름다워라 그 모습 아름다워라

이젠 잊어버리려고 눈을 감아버렸지만
날이 갈수록 짙어가는 그대생각 그것뿐
하염없이 떠오르는것은 그대의 모습 그 모습 뿐
그 모습 아름다워라 그 모습 아름다워라

Tenor, 신영조

1975년 10월 1일 한양대학교에 부임한 이래 현재까지 성악과장과 음악대 학장 등의 보직을 거치며 음악대학의 비전과 후진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이태리 가곡, 프랑스 가곡, 스페인 가곡 연구회 회원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귀국 후에는 95회의 독창회와 수천회의 연주회를 통하여 한국가곡의 보급과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신 교수의 주요 업적으로는 춘희, 라보엠, 로미오와 줄리엣 등 수십편의 오페라에 주역 출연, 베토벤의 장엄미사 등 100여 편의 오라토리오 및 Messe 독창자, 뉴욕 카네기홀 공연 등 100여 회 Lied-Aben과 연가곡의 밤, 제1회∼제3회 대한민국 음악제 출연,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극장의 독창자 오디션 합격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주요 수상으로는 국제적으로 Rio de Janerio 국제 성악콩쿨입상, 국내 ‘월간음악’ 올해의 음악가상,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한국음악평론가협회’ 올해의 음악가상, ‘한국음악협회’ 한국 음악상을 수상한 바 있다.

신영조 교수는 한양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한 뒤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국립음악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수학했으며〈춘희〉,〈라보엠〉,〈로미오와 줄리엣〉등 수십편의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또한 뉴욕 카네기홀 공연 등 총 98회의 독창회와 1,000여회의 가곡의 밤 및 연주회 무대에 섰으며 1회부터 3회까지 대한민국 음악제에 출연하기도 했다. 올해의 음악가상(1983, 1996), 한국 음악상 수상(1999)을 수상했으며 지난 76년부터 95년까지 국립 오페라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95년부터 99년까지 음대 학장을 역임했다. 1960년에 설립된 음대는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음대 가운데 하나로, 수많은 음악인들을 양성해 왔다. 소프라노 박정원, 김우경 등 음대 출신 성악가들의 활발한 활동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신 교수는 이러한 본교 출신 성악가 라인업의 선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리오 국제 성악 콩쿨에서 입상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 교수는 독일 스투트가르트 오페라 극장의 독창자 오디션에 합격해 그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신 교수는 세종문화회관과 뉴욕 카네기홀 등 국내와 국외를 가리지 않고 각종 무대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으며, 수없이 많은 공연을 통해 국내 최정상급의 테너 반열에 올라섰다. 지금까지 총 98번의 독창회를 가졌으며,〈춘희〉,〈라보엠〉,〈로미오와 줄리엣〉등 40여편의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연가곡의 밤이나 연주회 참여는 1,000회를 넘을 정도로 신 교수의 정력적인 연주활동은 다른 성악가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이러한 활동으로 신 교수는 1983년, 1996년에는 '올해의 음악가상'을, 1999년에는 '한국 음악상'을 받았으며 월간 음악상은 13회 차례나 수상했다.

그리고 1976년부터 1995년까지 국립 오페라단 단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목 보호를 위한 냉수마찰 등 철저한 자기관리 유명 물론 이러한 돋보이는 경력은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신 교수는 투명한 목소리, 완벽한 고음처리, 풍부한 표현력으로 유명하다. 이를 위해 성악가의 천적인 감기를 예방하고, 목을 보전하기 위해 약 27년간 1년내내 냉방에서 자고, 냉수마찰을 할 정도로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해왔다. 그 결과 그는 감기에 걸린 기억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감기관리'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냉방에서 자는 것과 냉수마찰을 중단했다. 저는 천부적인 음악성이 있는 성악가 스타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측면 때문에 더욱 더 자기관리에 철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로가 되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잖아요? 나름대로 성공했고, 많은 것을 이루었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건강이 안 좋아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신 교수는 대학에 들어온 후 처음에는 자신이 재능이 전혀 없는 것 같아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군대에 가서는 복학 후에 법대로 전과를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대안까지 마련했을 정도다. 그러나 군제대 무렵 교회에서 우연하게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었는데 자신도 놀랄 정도로 좋은 소리가 나왔다. 음악적 성공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린 결과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신 교수는 성악과로 복학했고, 이후 출세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성취와 만족을 위해 음악을 하자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가지면서 더 많은 음악적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꽃동네·나환자촌에서의 자선공연 성악가로서 누릴 수 있는 영예와 음악적 성공을 거둔 신 교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독창회를 3년마다 한번씩 홀로 무대에 선 세종문화회관이나 세계적인 무대인 카네기홀일 것이라는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모든 공연이 다 기억에 남죠.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자선공연들입니다. 화려하지도 않고, 관객들도 음악적 소양이 많지 않지만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자리입니다.

꽃동네, 나환자촌 같은 곳에서 열린 자선공연들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한번은 시각장애자들 앞에서 공연을 했는데, 제가 만났던 관객들 중 가장 두려운 관객들이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노래를 불렀죠. 소외된 사람들에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게 저의 가장 큰 계획 중 하나입니다. 또 이를 통해 저 자신은 사회적 환원을 실천하고, 몸과 마음이 부자인 음악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이와 함께 독일에서 귀국한 직후에 출연한〈파우스트〉공연도 잊을 수 없는 무대다. 주인공 역을 맡아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공연을 통해 본교 교수로 부임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공연을 관람한 본교 김연준 이사장이 신 교수에게 성악과 교수로 와 줄 것을 제안한 것. 신 교수는 '청산에 살리라' 등을 작곡하는 등 음악가로서 일가를 이룬 김연준 이사장이 우수한 음악인들을 교수로 초빙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열정이 지금의 음대가 있게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했다.

음원출처:http://pds57.caf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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