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낭송시

폭설(暴雪)/오 탁번

경호... 2007. 10. 24. 13:00
        폭설(暴雪) 詩 오 탁번 / 낭송 이재영 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宇宙의 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오탁번 시인은
    우리 사회의 근엄주의는 물론 우리 시의 근엄함마저도 확실하게 깨부수고 있다.
    그의 시는 대체로 쉽다.
    특히 "폭설" 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쉬움을 넘어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한다.
    처음 읽을 때 ‘좆나게 내려부렸당께’나 ‘워메, 지랄나부렸소잉’ ‘좆돼버렸쇼잉’ 등
    이장의 직설적인 전라도 사투리가 코미디를 볼 때보다 더 큰 웃음을 준다.
    시를 읽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다.
    이 시의 끝은 웃음이 아니다.
    웃음을 접고 다시 한번 읽으면
    서로 보듬고 사는 우리 농촌 주민의 생활상에 ‘아름답다’는 단어가 떠오르고,
    폭설에 삶의 터전이 무너진 농부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래서 한번 읽을 때 웃고, 두번 읽으면 슬퍼지는 시 "폭설"은
    우리 시의 근엄주의를 일시에 무너뜨린 대표적인 수작(秀作)일 것이다.
    〈황인원 시인>
    -------------------------------------------------------------------

    이 시를 읽으면서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나지 않습니까?
    허허 소리내어 웃지는 않으셨는지요....
    저도 처음에 이 시를
    접하고 나서 왜 그렇게 통쾌하고 재미가 있던지 실실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좆”이라는 말이 본래의
    사전적인 의미를 떠나서 썩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말이라도 쓰이는 장소나 쓰임새에 따라서 어감이나 의미도
    영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이 시에서 “좆”을 그 흔한 욕설이라고
    생각할 사람이나 있을까요...
    어지간해서는 눈이 오지 않는 땅끝마을에 어느 겨울인가는 참
    오지게도 눈이 많이 내렸나 봅니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옹기종기 모여든 주민들이 힘들여 눈을 치우고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걸치고 따뜻한 잠이 들었건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내린 폭설은 축사 지붕까지 몽당
    무너뜨렸나 봅니다. 그러나 동네 이장의 절박한 말투에서
    역설적이게도 내일에 대한 소박한 희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정감어린 말투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양현근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