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삼경(三境)과 삼량(三量)의 분별 (강의 - 7. 見分은 하나다)

경호... 2011. 9. 29.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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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삼경(三境)과 삼량(三量)의 분별(강의 - 7) 묻습니다. : 잠에서 깨어난 독두의식의 한 생각이 십팔계를 반연할 때에 몇 개의 상분(相分)과 본질(本質) 및 견분(見分)이 있는 것입니까. 이건 꿈에서도 십팔계를 반연하고 눈을 번쩍 떠도 십팔계를 반연하는 겁니다. 이렇게 십팔계를 반연할 때에 몇 개의 상분(相分)이 있느냐 이거죠. 상분은 형상 있는 부분이죠. 열여덟 개를 다 반연하기 때문에 열여덟 개가 상분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눈도 의식으로 반연이 가능하고 눈의 대상도 의식으로 반연이 가능하고 그것을 알고 있는 시각도 의식으로 반연이 가능합니다. 내가 보고 있다고 내가 알잖아요. 그럼 촉각은 어때요? 자, 손을 들어서 새끼손가락을 제쳐 보세요. 아프죠? 아픈 것은 촉각입니다. 그럼 손가락은 몸이죠? 몸이 있고, 접촉되고, 그래서 느끼는 촉각, 이 세 가지를 의식이 알죠. 이렇게 청각, 후각, 미각도 의식이 알죠. 그것만 압니까, 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의식이 알잖아요. 그래서 의식은 열여덟 개를 전부다 대상으로 인식이 가능하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이 의식이 의식도 인식한다 이거예요. 이것이 의식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십팔계를 반연할 때 십팔계가 상분이 된다 이거예요. 또 형상이 없는 것도 반연되면 무형상이 형상이에요. 다시 제쳐 보세요. 아프죠? 아픈 것은 촉감입니다. 촉감은 형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이렇게 촉감은 형상이 없는데도 의식이 알죠? 이것을 무형상의 형상이라 그럽니다. 그것도 의식이 반연한다 이겁니다. 그 다음에 본질(本質)은 뭐냐. 모양을 띠고 있는 것은 본질이라 그래요. 견분(見分)은 몇 갭니까? 상분[객관]은 열여덟 개고 견분[주관]은 하나죠. 본질은 상분의 모습이 본질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같은거라고 보면 되요. 이제 답을 합니다. : 본질과 상분에 각각 열여덟 개가 있고 견분은 오직 하나 뿐이다. 각각 열여덟 개라고 하지만 본질의 모습이 상분이기 때문에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다음에 또 묻고 답을 합니다. : 어떻게 열여덟 개의 상분이 있는 것입니까. : 상분은 열여덟 개의 본질로부터 일어나므로 열여덟 개의 상분이 있게 된다. ‘상분은 열여덟 개의 본질로부터 일어나므로’, 본질로부터 상분이 일어나기 때문에 같은 것이라는 이유가 그거예요. 똑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본질이 형상화 된 게 상분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열여덟 개의 상분이 있게 된다.’ 이렇게 얘기 하는 겁니다. 그럼 견분은 왜 하나냐. 마치 한 면의 거울 속에서 많은 사람의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다. 거울은 한 면만 있는데 그 한 면이 견분에 해당하는 거고, ‘많은 사람’은 열여덟 개의 상분을 얘기 합니다. 거울 바깥에 열여덟 명의 사람이 있다면 거울은 하나이나, 거울 위에는 열여덟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견분(見分)도 그러하여, 하나의 견분은 열여덟 개의 상분을 반연할 수 있다. 하나의 거울에 열여덟 명의 사람을 반연 하듯이 하나의 견분[의식, 보는 부분]에 열여덟 개의 상분[보여 지는 부분]을 반연할 수 있다. 만약 본질과 그림자가 열여덟 개라면 견분이 이것을 반연하는 경계로서 허물이 없는 것이다. 만약 한 생각에 열여덟 개의 견분이 있다면 바로 많은 마음이 있다는 허물이 있게 된다. 견분 하나에 한 마음이기 때문에 한 마음에 열여덟 개의 견분이 있을 수 없어요. 쉽게 말하면, 거울 밖에 열여덟 사람은 본질이라 하고 거울이 비친 열여덟 개는 상분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거울은 견분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도 이해하기 힘들죠. 다시 한 번 점검을 합시다. 의식의 대상은 십팔계지만 다른 말로 하면 영상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법처에 수용된다 그랬죠? 법이란 대상과 조건이 만나면 일어나는, 인연소생이 법이죠. 그게 영상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실재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여러분들이 그렇게 본다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의식 밖에 또 있습니까? 그래서 유식(唯識)이라 그러는 겁니다. 실제로 모양과 색깔은 우리 밖에 있는 걸로 알지만 밖에 있는 게 아니고 의식이 바깥으로 투영 된 세계, 이것이 의식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사실은 의식 안에 의식의 대상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라는 게 마음 안에 있지 마음 밖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가 두 가지 얘기 했죠. 꿈속에 나타난 십팔계도 영상인데 잠에서 깨어나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이 세계도 알고 보면 의식 대상은 전부다 영상이라는 겁니다. 독두의식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오식(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동반하지 않고 홀로 의식이 작용 했을 때 나타나는 대상은 전부다 영상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선정 중에 나타나는 대상도 영상이라 이거죠. 다음에 세 번째, 셋째는 선정(禪定) 가운데 일어나는 독두의식으로 십팔계와 온갖 법 및 과거와 미래의 경계와 진여 등을 반연하는 것이다. 가짜이든 진짜이든 간에 모든 것을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가운데서도 역시 의식이 작용 해가지고 일체법을 다 반연을 해요. 그것이 ‘가짜이든 진짜이든 간에 모든 것을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정 중에 나타나는 모든 걸 다 반연하는데, 그러면 그게 전부다 영상이라는 얘기예요. 그 다음에 현량(現量)과 비량(比量)과 비량(非量)을 분별함에 명료의식은 전념과 후념으로 삼량에 통한다. 그러나 꿈속에서 일어나는 독두의식은 오직 비량(非量)일 뿐이니, 경계에 칭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 여기서 부터는 ‘현량(現量)과 비량(比量)과 비량(非量)을 분별함에’가 무엇인가 하면, 재해석 하는 겁니다. 몽중의식, 독산의식, 정중의식 이 세 가지를 인식의 차원에서 다시 해석을 또 하는 겁니다. 현량은 직감이고, 비교할 비자 비량은 추리고, 아닐 비자 비량은 오류(착각)죠. 이 세 가지를 통해서 다시 꿈속에서 나타나는 독두의식, 꿈에서 깨어나서 인식하는 독산의식, 선정 중에서 인식하는 정중의식, 이런 것들을 직관, 추리, 오류 세 가지를 가지고 다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꿈속에서 일어나는 독두의식은 현량, 비교할 비자 비량, 아닐 비자 비량, 어디에 해당할 까요? 그렇죠, 아닐 비자 비량에 속합니다. 그래서 ‘꿈속에서 일어나는 독두의식은 오직 비량(非量)일 뿐이니, 경계에 칭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재의 경계하고 딱 들어맞지 않다는 거죠. 꿈속에서만 나타나는 대상이기 때문에 현실하고는 결합이 안 된다 이거죠. 그래서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꿈속에 뭘 봤다 이러면 현실과 다 결부시키죠? 현대 심리학에서 꿈 분석을 많이 하는데 그 사람 심리 파악하는데 많이 사용합니다. 꿈이 심리의 반영이기 때문에 분석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보통 꿈속에 있는 일을 가지고 현실하고 결부 시켜서 보는 경향이 많죠. 그래서 꿈속에 있었던 일을 긍정적으로 분석하면 긍정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부정적인 생각하고 결부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일 하고 매체가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게 뭡니까? 꿈을 어떻게 분석하느냐에 달려 있죠. 그래서 옛날부터 하는 말이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다’ 한 겁니다. 예를 들어, 이성계가 거울이 깨지는 꿈을 꿨다, 거울이 깨졌다면 사람들은 다 나쁘게 생각하죠. 그런데 무학대사가 꿈을 어떻게 풀이 했습니까? 좋다고? 어떻게? 거울이 깨지면 소리가 나니까 좋은 일이다, 그랬죠. 그래서 왕이 됐잖아요. 만일에 부정적으로 풀이를 해서 ‘아이고, 내가 왕이 되기는 틀렸다’ 이렇게 했다면 이성계가 왕이 못 됐을 거 아니에요. 꿈 풀이가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해 봐야겠죠. 그래서 꿈속에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올바르게 인식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거죠. 꿈속에 대상을 인식하는 게 전부다 아닐 비자 비량이기 때문에 잘못된 인식이거든요. 그래서 이왕이면 추리를 하더라도 해석이 훌륭하면 심리가 좋은 방향으로 긍정적으로 작용을 하니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마음에 의해서 현실도 그렇게 나타난다 이 말이에요. 오늘 좋은걸 알려드렸습니다.ㅎㅎㅎ 그래 앞으로 꿈을 꿨어도 좋게 해석 하십시오. 어떤 분이 꿈에 새집에 도배를 했데요. 그런 꿈을 꿨다면서 “스님, 이게 좋은 꿈이에요, 나뿐 꿈이에요?” 묻데요. 그런데 그 분이 며칠 후에 이사를 할건데 이런 꿈을 꿨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꿈이 무슨 꿈입니까? “좋은 꿈요.” 어떻게 좋은 꿈입니까? “도배를 해서요.” 에이, 해석을 잘 해야 된다니까. ㅎㅎㅎ 도배를 새로 했다면 이사할 꿈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보살님은 이사할 마음을 갖고 꿈을 꿨으니까 당연히 새집에 도배를 새로 하죠. 이사할 꿈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현실에 이사할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분의 심리가 반영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