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실상에 머리숙여 예배한다 (강의 - 7)
지난 시간에는 육진을 분별하는 망념이 없다,
육진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여기 풀이를 합니다.
이것을 풀이해 보자.
눈이 공(空)하나 색이 공하지 않고
색이 공하나 눈이 공하지 않으면 서로가 인정할 수 없다.
근(根)과 경계(境界)가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서로 침해하게 된다.
만약 동일한 성품이라면 서로 의심이 없어 침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세간에서 사람을 보증 서는 것과 같다.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이라면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이 보증설 수 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라면 보증설 수 없다.
왜냐하면 쓰는 마음의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육근과 육진이 화합하여 같은 것이 이미 그러하니,
일체만법이 종지(宗旨)에 수순하여 같은 것도 또한 그렇다.
‘눈이 공(空)하나 색이 공하지 않고
색이 공하나 눈이 공하지 않으면 서로가 인정할 수 없다.’
눈은 공한데 색[대상]이 공하지 않으면 인식이 안 이루어진다, 이런 얘깁니다.
공(空)하다는 것에 대해서 얘기 해보죠.
정말 실체라든지 자아가 있어서 사물을 보게 하는 눈이라면 어떻게 될까.
무엇인가 보는 주체가 있어서 본다든지
듣는 주체가 있어서 듣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공하다는 것은 없을 무(無)자, 무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실체나 주체가 없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내안에 자아라는 게 있어서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냄새 맡게 하고, 맛보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중풍 걸린 사람에게 손 떠는 것을 멈추라고 해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무엇인가 있다면 멈추게 할 수 있을 텐데 계속 떤다는 거죠.
안 된다는 겁니다.
음식을 먹을 때 입안에서는 어떤 음식인가 압니다.
하지만 식도를 통과하고 위장으로 들어갈 때도 압니까?
모르잖아요.
내안에 보고 듣고 하는 무엇인가 있다면
음식물이 들어갈 때 알아야 되잖아요.
그런 것 없다는 거죠.
이 얘기도 전 시간에 했는데,
부처님이 아난존자에게
“무엇이 보느냐?”
“눈이 봅니다.”
“그래, 눈이 본다면, 죽은 사람도 눈이 있을 텐데 봐야 되지 않느냐?”
아난존자가 얼른 말을 바꿔서
“마음이 보는 겁니다.”그래요.
눈에 수정체를 통해서 마음이 사물을 인식하는 거예요.
『아함경』에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것을 제일의공경이라 하는가?
눈은 생길 때에도 오는 곳이 없고, 눈이 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면서 생기고, 생겼다가는 다 소멸하나니
업보(業報)는 있지만 그 업을 지은 놈은 없느니라.
실험을 해볼까요?
이건 뭡니까? 찻잔.
이건 뭡니까? 종이.
그러면 종이라고 인식할 때는 찻잔 인식하던 그 마음 어디 갔습니까?
없어졌죠?
존속이 안 되고 대상 따라 바뀌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실체가 없는 공이라 그러는 거예요.
원인과 조건이 만나면 결과[업보]가 생기지만 그것을 짓는 놈이 없는 거라.
그러니까 눈은 대상 따라서 생겼다 사라졌다 인식은 하긴 하지만
그에 따른 결과가 오긴 오는데 짓는 놈이 없어요.
마음이 눈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지만
이 마음은 대상 따라 매 순간 바뀌기 때문에
그 안에는 주체나 실체를 찾을 수가 없어요.
그것을 공이라 그럽니다.
그렇다면 대상은 어때요.
이것을 종이라 했는데 분명히 모양과 색깔이 있지만 이것도 공한 겁니다.
요즘 과학이 발달해서 전자현미경으로 물질을 보면,
원자핵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는데
그 사이는 99%가 비어있답니다.
그런 속에는 모양과 색깔이 없는데 마음이 만드는 겁니다.
결국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서 자기가 보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자기가 만들어서 보고 있는데,
자기감정을 끊어버리고 세상을 보는 인식하는 마음을 끊어 버리면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육조단경』에 보면
깃발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논쟁을 합니다.
한 스님이 ‘깃발이 움직인다’ 하니까
다른 스님은 ‘아니다, 바람이 부니까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니까
노행자가 하는 말이
‘이게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스님 당신들 마음이 움직이는 거요.’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모양과 색깔이 나타나는 것은 마음이 만들어서 보는 겁니다.
실체가 없어요.
여기 종이 한 번 찢어 보세요.
찢어지죠?
실체가 있으면 찢어지지 않아야 되는데
계속 찢어지니까 실체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눈도 실체가 없으니 공이고
대상도 실체가 없이 공이니까 서로가 잘 맞는다 이거죠.
그래서 대상 인식이 가능하다는 거죠.
눈은 공한데 대상이 공하지 않으면 인식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색이라는 게 실체가 있다면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되고, 변하지 말아야 되는 두 가지 조건이
합당하게 맞아야 됩니다.
그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관계가 끊어져야 되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어야 됩니다.
독립된 것이라면 아무리 눈으로 보려고 해도 안 보여요.
왜냐하면, 보인다는 것은 관계를 가져야 보이고,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독립되지 않았다는 말이 되죠.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변하는 겁니다.
수행을 하다보면 감정, 생각도 인식되기 때문에 변합니다.
이렇게 변한다 하는 것은 실체가 없고 공하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여호와의 신은 절대 무이(無二)하고 안 변한다 하는데,
그러면 여호와의 신은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일무이하고 독립되어 있다면 우리하고 인식이 안 되는 거죠.
교감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서 여호와의 신이 받는다면 관계를 가지게 되는 거죠.
관계를 갖는 다면 변하는 존잽니다.
그러니까 유일무이이고 변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존재 한다면 변한다는 거죠.
그래서 요즘 기독교 과정신학에서는
여호와도 성장을 한다고 얘기를 합니다.
고정불멸이 아니라 이거죠.
그래서 관계성 속에 실체도 없고 자아도 없는 게 공이라는 겁니다.
‘색이 공하나 눈이 공하지 않으면 서로가 인정할 수 없다.
근(根)과 경계(境界)가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서로 침해하게 된다.’
근은 육근(안·이·비·설·신·의)을 얘기하고
경계는 인식 대상[색·성·향·미·촉·법]을 얘기 합니다.
만일에 내가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여러분이 저를 볼 수 있습니까?
없죠.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실체로서 독립되어 있다면
제가 여러분을 봐도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게 ‘서로 침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다르게 표현한다면 ‘서로 모르게 된다’ 이렇게 됩니다.
‘만약 동일한 성품이라면 서로 의심이 없어 침해하지 않을 것이다.’
공이라는 것은 동일한 성품이죠.
만일이 저도 공하고 여러분도 공하다면,
공하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동일한 성품이죠.
동일한 성품에서 제가 여러분을, 여러분이 저를 안다고 할 수 있느냐.
모르는 겁니다.
그렇지만 앎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무엇이냐.
이 앎이 일어나는 것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거고
인연의 본질인 공의 입장에서는
여러분하고 저하고 똑같기(하나이기) 때문에 앎이 없는 거예요.
봄에 매화는 봄바람을 모르고 봄바람은 매화를 모르지만
서로 만나게 될 때 꽃이 피는 겁니다.
서로 모르는데 만나고 꽃이 피는 거죠.
이게 진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면
온갖 자기감정 생각 덧붙이고 의미부여 해가지고
없던 것을 턱 만들어내는 게 우리 인생살이에요.
‘이것은 마치 세간에서 사람을 보증 서는 것과 같다.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이라면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이 보증 설수 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라면 보증설 수 없다.
왜냐하면 쓰는 마음의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체만법이 종지(宗旨)에 수순하여 같은 것도 또한 그렇다.’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마치 눈이 있어도 눈이 없는 것 같이,
넋이 있으면서 넋이 없는 것 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눈이 있어도 눈이 없는 것 같이 살아간다는 말은
대상 따라서 마음이 흔들린다는 거죠.
봐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이 깨어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좋은 물건이 있으면 갖고 싶고, 좋은 옷 있으면 입고 싶고,
좋은 음식 있으면 먹고 싶고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눈, 귀, 코, 혀, 몸이 비어있고
그 대상도 비어 있다면 대상 따라 쫓아갈 게 뭐 있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힘듭니까.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수능엄경』에서 부처님은 아난에게
“육근과 육진은 같은 근원이요 속박과 해탈은 둘이 아니다.
식(識)의 성품이 허망하여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육근은 주관이고 육진은 객관이죠.
‘속박과 해탈은 둘이 아니다.’
여러분들이 결혼 생활 하면서 몸과 마음이 지치면 남편한테 안 그럽니까,
“당신 연애할 때는 그렇게 좋아했는데,
시집와서 보니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냐.”고 하죠.
남편은 “당신은 연애시절 때 그렇게 아름답고 예쁘더니
지금 와서 보니까 영 아니네.” 그러죠.
이렇게 가정이라는 것은 감옥과 같고 속박되어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속박 속에 자유가 있는 거예요.
어떻게?
있다고 생각하면 속박이고,
관계성, 비어 있다고 생각하면 자유에요.
너무 간단하죠.
그러니까 남편이 나를 속박한다, 자식이 나를 얽어맨다,
이런 생각 하지 마세요.
그래서 둘이 아니라 이거죠.
‘식(識)의 성품이 허망하여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여섯 개죠.
안식은 시각, 이식은 청각, 비식은 후각, 설식은 미각, 신식은 촉각입니다.
여기에 식(識)이 들어가면 마음이죠.
이런 식이 알고 보면 허공 꽃 같이 그렇다는 겁니다.
허공 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허망하고 없다는 것이죠.
아까 제일의공경에도 얘기 했죠.
‘눈은 생길 때에도 오는 곳이 없고, 눈이 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눈이 생긴다는 것은
대상, 사물을 보면 저것이 무엇이다 라고 인식이 일어나죠.
그게 눈이 생긴다는 겁니다.
아~ 참 어렵다 그죠? ㅎㅎㅎ
이게 뭡니까?
종이죠?
이건 뭡니까?
찻잔이죠.
이 찻잔을 인식했다면 눈이 생긴 거죠.
이렇게 생기기는 생기는데 오는 곳이 없죠.
멸할 때도 가는 곳이 없다.
이것은 뭐라 했죠? 종이.
이렇게 종이를 인식할 때는 찻잔을 인식했던 시각은 사라져 버리고,
찻잔을 인식할 때는 종이를 인식했던 시각이 사라져 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대상 따라 순간순간 변하니까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참 허망하다 해서 허공 꽃과 같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한 달이고,
한 생각이 계속 지속될 때가 언제에요?
내가 얘기 할까요?
연애할 때. ㅎㅎㅎ
연애할 때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오로지 그 사람 생각만 나죠.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 헤어질 때는 생각납니까?
그때는, 바람은 지나간다, 바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가죠?
오로지 그 사람 생각만 하던 그 마음이
어느 순간에 바뀌어버려 가지고 생각 안하는 거예요.
참 허망하죠.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이 비어 있다’ 그러는 겁니다.
생각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 우울증 환자도
있다고 생각하면 허망한 것이지만,
원래 실체가 없이 비어 있다, 이렇게 알면,
이런 강의를 듣고 벗어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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