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실상에 머리숙여 예배한다 (강의 - 4)
우리가 앞에 「자타관문(自他觀門)」을 공부를 했는데,
자타(自他)는 주객(主客)을 얘기하고
관문(觀門)은 볼 관(觀)자 문 문(門)자를 씁니다.
자와 타를 잘 관찰하게 되면 실상(진실한 모습. 진리)에 들어갈 수 있다.
오늘 얘기 하는 것도 자타를 잘 관찰해 들어가면
구경에는 본연의 마음자리로 들어가는 것을 얘기 합니다.
모든 부처님이 오직 명칭만 있고 실체가 없는 것이
마치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다.
무심(無心)한 구경도(究竟道)가 법 하나하나에 자연 평등하나,
평등한 곳에 또한 평등할 것이 없다.
평등할 것이 없는 데서 평등하게 설하니,
이 가운데 말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멸해지는 것이다.
‘제불유유명(諸佛唯有名) 여공응향성(如空應響聲)’,
‘모든 부처님이 오직 명칭만 있고 실체가 없는 것이
마치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다.‘
이 말은, 부처님을 실체로서 이해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무엇인가 있는 것 같이 얘기하면 곤란하다는 거죠.
‘실체가 없는 것이 마치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다.’했는데
비슷한 얘기가 『금강경』에 나오죠.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浦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유의법(有爲法), 함이 있는 법,
생겼다, 머물렀다, 사라지는 것을 유의법이라 그럽니다.
찻잔으로 비유하면,
도공에 의해서 만들어져서 얼마간 유지하다가
풍화작용에 의해서 없어지는 이런 것을 유의법이라 그래요.
현상 있는 것은 다 그렇습니다.
일체유의(一切有爲)의 현상[法]들은 여몽환포영(如夢幻浦影),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그렇게 봐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금강경』 제일 마지막에 부처님이 일러주신 얘기에요.
그러면 그런 시각에서 부처님을 어떻게 봐야 되느냐 하면,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示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다.
무릇 모든 형상은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모양과 색깔을 다 보는데,
이 모양과 색깔은 전부 마음이 만든 거예요.
가짜라는 말이죠.
가짜기 때문에 이 형상을 가지고 부처를 찾으려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뒤에 게송도 보면,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 이랬어요.
형상으로 나를 찾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 자는
삿된 길로 가는 자이니 부처를 보지 못하리라, 이래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부처님 하는 것은
결국 명칭만 있는 것이지 형상이 없는 겁니다.
옛날에 우리 학감스님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는데
한 번 더 하죠.
그 스님은 성당에 오래 다니신 분이에요.
몸이 늘 안 좋으셨는데,
성당에 다니면서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를 많이 했답니다.
성당에는 고기를 먹잖아요.
그런데 스님은 안 먹는 거예요.
아니 내 몸뚱아리도 어찌 보면 고긴데
다른 고기를 취해서 내 고기를 건강하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고기를 안 먹어요.
그러니까 고기도 안 먹고 살생도 안 하는 거죠.
그런데 누가 단전호흡하면 건강해 진다는 말을 듣고
그 단체를 찾아갔는데,
어느 거사님이 『금강경』 게송을 읊는 거예요.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
형상으로 나를 찾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 자는
삿된 길로 가는 자이니 부처를 보지 못하리라,
이 말을 탁 듣는 순간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하나님에게 기도를 몇 년 동안 하면서
목적이 단 한 가지, 하나님 음성 한 번 들어 보려고 했는데
음성으로 나를 찾는 자는 삿된 길로 가는 자라니까
거기서 깜짝 놀래가지고 생각을 했대요.
불교도 깊은 도리가 있구나.
그래서 고민 고민 하다가 출가를 하신 겁니다.
『금강경오가해』 보면 야부 선사(冶父禪師) 가
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 위를 지나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 위를 지나지 못하고
쇠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 위를 지나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진짜 부처가 아니라는 얘기죠.
그러면 뭐가 진짜 부처냐,
물을 끼얹어도 젖지 않는 게 부처고,
불로 태워도 타지 않는 게 부처다, 이리 되어있어요.
여러분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물에 젖지 않고 불에 타지 않잖아요.
그것을 실체로서 어떤 형상을 가지고 부처를 얘기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선사들이
부처를 찾으려면 마음을 꿰뚫어보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부처님, 부처님 하는 부처님은 형상 있는 부처님이고
형상은 모두 명칭이 있는 거예요.
이렇게 명칭이 있는 부처님은 유의법입니다.
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가짜라는 얘기죠.
조계사에서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부처님 교체하니까
그 부처님이 훨씬 좋은데 왜 옮기느냐고 신도들이 난리가 난거예요.
그 분들은 『금강경』도리를 모르는 분들이죠.
그래서 법문을 잘 들어야 되는 겁니다.
뭐가 부처인지 확실히 알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마음이 다 부처라는 것이 아니고
깨어있는 마음만이 부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명칭만 있는 부처님은 진실하지 않다 이런 얘깁니다.
‘모든 부처님이 오직 명칭만 있고 실체가 없는 것이
마치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다.’,
그러면 무엇이 부처냐 하는 게 참 중요하죠.
『금강경』에 ‘상이 상 아님을 보면 부처를 본다.’ 이랬죠?
법신불은 원래 형상이 없는 거예요.
대구 용연사 적멸보궁에 보면 불상이 없잖아요.
여러분 이해하실 겁니다.
‘무심(無心)한 구경도(究竟道)가 법 하나하나에 자연 평등하나,
평등한 곳에 또한 평등할 것이 없다.
이 가운데 말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멸해지는 것이다.’
무심이라는 것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요.
이 의미를 잘 아셔야 됩니다.
보통 무심하면 마음이 없다 이렇게 이해하죠.
옛날 조사스님들은
‘무심심(無心心), 무심도 마음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셨어요.
선가에서 많이 쓰는 용어 인데,
무심(無心)하고 무념(無念)하고 비슷한 것 같아도 다릅니다.
무심해지면 도에 합해질수 있는,
도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
‘무심하다’는 것은 거친 생각들이 안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와 합해질 수 있다,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 말이죠.
무념(無念)은 구경각(究竟覺)이라 하는데, 깨달음을 뜻 합니다.
그러니까 미세망념까지 없는 상태를 얘기하는 거예요.
미세망념심이 없으면 마음이 전부 자성청정심으로 바뀌어버립니다.
단순하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수준이 아니고
무심은 아무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이라면
무념에 의해서 드러난 마음은 청정한 마음이에요.
청정한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런 것이 없어요.
그래서 무심하고 무념의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겁니다.
여기 무심(無心)한 구경도(究竟道)라 하는 얘기는
무심한 상태가 되어야만이 구경길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 말이에요.
그 길[道]에 들어가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은
‘법 하나하나에 자연 평등하나’,
전부 다 평등하다, 법이라는 말은 현상(정신적, 물질적)을 얘기하는데,
현상은 나타나는 것, 생각이 일어났다? 법이죠.
감정이 일어나는 것도 법인 거예요.
책상위에 찻잔이 있다, 이 찻잔도 법인 거죠.
눈에 보이는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 법이에요.
이런 법들이 다른 것 같아도 평등하다,
왜 평등하냐?
모양과 색깔은 누가 결정합니까?
마음이 결정하죠?
서울대 물리학자인데 이름을 잊어버렸네요.
이분 이야기가
우주의 물질을 분해하면 원자가 나오는데,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가 돈답니다.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는 99%가 비어있어서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답니다.
그 원자핵를 부수면 중성자와 양성자가 나오고,
이것을 또 부수면 쿼크라는 물질이 나오는데,
그것이 몇 천만분의 1정도 밖에 존속하지 않습니다.
변한다는 거죠.
그 세계는 모양과 색깔이 없는 세계에요.
그래서 그 과학자가 하는 얘기가
텅 비어있고 모양과 색깔은 마음이 만드는 거라는 거예요.
그럼 텅 비어 있다면
벽을 치면 손 쑥 들어가야 되는데 왜 안 되느냐 하니까
그 과학자 하는 말이
전자와 전자끼리 부딪쳤을 때는 서로 밀어내는 힘이 있어서
텅 비어 있어도 통과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양과 색깔은 마음이 결정하는 거라고
그 과학자가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이 모양과 색깔을 만든다고 하는데
마음이 없다면 모양과 색깔이 있겠습니까?
없죠.
마음은 눈과 대상이 만나면 시각이라는 마음이 생기고,
귀와 소리가 만나면 청각이라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마음이 대상하고 딱 끊어져 버리면
마음이 움직임이 없어서 모양과 색깔을 안 나타내는 거예요.
그러면 모양과 색깔이 없기 때문에 평등한 거예요.
그래서 『능가경』에 이 세계는 마음이 만든 그림자다,
마음이 밖으로 투영되어서 나타난 세계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만든 장엄한 세계를 보면 얼마나 신비로워요, 그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우주를 만든 창조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마음이다,
하나님도 마음이 만든 것이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굉장한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마음이 만든 모양과 색깔의 세계에 붙들려가지고
진짜 내 밖에 따로 분리되어 있는 무엇이 있다고 착각을 일으키니까
욕심 부리고, 화를 내고, 소유하려고 하고,
피 터지게 싸우고 그러는 거예요.
마음을 물에 많이 비유합니다.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없어요.
바람이 불면 물이 출렁하고,
물이 담긴 그릇을 흔들면 출렁 거리지만
바람이 불지 않거나 그릇을 흔들지 않으면 물은 움직임이 없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마음도 누가 비난하거나 칭찬하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 들어갔을 때 구경 길에 들어선 거예요.
그랬을 때 보이는 이 세계가 형상이 없기 때문에 평등하다,
일어나고 사라짐이 있으면 비교가 되기 때문에 불평등이 생기는데,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평등하다,
그래서 ‘구경도(究竟道)가 법 하나하나에 자연 평등하나,
평등한 곳에 또한 평등할 것이 없다.’
평등하기 때문에 다시 평등하다할 건더기가 없다 이 말이에요.
‘평등할 것이 없는 데서 평등하게 설하니,
이 가운데 말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멸해지는 것이다.’
평등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평등하게 설하니,
말만 그렇다 그거죠.
부처님 모습은 물에도 젖지 않고 불에도 타지 않는다 했지요?
그럼 부처님 모습은 뭡니까?
정등(正等), 평등이잖아요.
그래서 『화엄경』에는
‘이 중생과 부처와 마음은 차별이 없이 평등 하다’ 이랬어요.
예를 들어, 찻잔이 있으면 찻잔이라는 모양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찻잔이다’라고 명칭을 붙일 수 있고
‘이것은 내꺼’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만일에 이 찻잔이 모양과 색깔이 없으면
찻잔이라고 말 할 수도 없고 가져갈 수도 없죠.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의 본질이
본래 허공과 같이 텅 비어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양과 색깔이 없는 거예요.
거기에 ‘아! 저게 무엇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죠.
‘아! 저게 어떤 모양이다’하고 붙들 수 있습니까?
말도 할 수 없고 붙들 수 없는 것은 화 내봐야 소용없죠?
텅 빈 자리에 화낼 게 뭐 있습니까?
그래서 옛날에
황제가 혜천국사한테 질문을 하니까 혜천국사가 대답 안 했거든요.
황제가 화가 나서 왜 대답을 안 하냐고 하니까
혜천국사가 “황제여! 허공이 대답하는 거 봤습니까?”ㅎㅎㅎ
그러니까 텅 빈 자리에는 물을 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가운데 말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멸해지는 것이다.’
말도 끊어지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공(空)이라 얘기 합니다.
그것을 마음으로 표현 할 때는 일심(一心)이라 그러고,
깨어있는 마음을 얘기하면 그것은 바로 불성(佛性)을 얘기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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